장자 내편 - 7 - 응제왕 - 해설

2021. 9. 9. 15:25장자 내편 이야기 - 완결/원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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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편》 번역에는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이민수(李民樹)의 2007년 번역, 현암사에서 나온 안동림(安東林)의 2019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내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1년 8월 30일 11시 6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원문과 번역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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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책으로 출판되어 교보문고를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전문을 다 읽으시려면 책을 구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莊子內篇孃注》, 李相珉, 책과세계)

 

**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내용은, 번역문 전체 및 주석 일부입니다. 그러나 번역문과 주석 모두 중간 부분을 {...}라는 표시로 비워 뒀습니다. 책을 구입하기 전 열람할 수 있는 견본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교보문고와 리디북스 두 개 서점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 가능한 링크는 아래에 기재해 두었습니다.

 

1.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3332426(양장본, 품절)

 

2.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9069155(문고판, 상권 및 하권으로 분절, 세트로 판매, 재고 있음)

 

 

3. 전자책

 

3-1. 교보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405

(전자책, 교보문고, 합본)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1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6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3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63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2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7

(전자책, 교보문고, 편별로 분권)

 

 

3-2. 리디북스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8?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1

(전자책, 리디북스, 합본)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1?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4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2?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5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3?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6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4?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7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5?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3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6?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8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7?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2

(전자책, 리디북스, 편별로 분리)

 

 

 

 

 

장자가 《內篇》에서 직접적으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세 곳 있습니다. 첫 번재는 「人間世」입니다. 「人間世」 마지막에서 접여의 말을 {...} 펴는 방법을 비교적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세 번째는 바로 「應帝王」입니다. 「應帝王」은 사실 제목부터 '應帝王'입니다. '帝王'이 {...} 아닙니다. 「應帝王」에는 7개 이야기가 있지만, 그 중 정치에 직결되는 이야기는 3개밖에 없습니다. 바로 접여(接輿)와 견오(肩吾)의 대화, 천근(天根)과 무명인(無名人)의 대화, 양자거(陽子居)와 노담(老聃)의 대화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정치와 관련이 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 생각하고 있는지를 먼저 따져 봐야 합니다.

 

이 글에서 저는 먼저 장자가 정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분석해 보고, 장자가 '정치 행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야기할 {...} 상술하였듯, 「應帝王」의 7개 이야기 중 왜 4개는 정치에 직접 관련되지 않는지, 그렇다면 장자가 왜 이런 식으로 「應帝王」을 구성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우선 장자가 정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그런데 장자가 정치에 대해 특별히 의견을 밝혔던 {...} 장자가 《內篇》에서 장자의 인식이 전반적으로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 {...} 생각하는지도 추론해 봅시다.

 

'장자 맛보기'였던 「逍遙遊」를 제외한다면, 「齊物論」에서 「大宗師」에 {...} 「齊物論」에서 나온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아주 중요하고, 제일 유명하며, 가장 근본적입니다. 만물제동(萬物齊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장자는 「齊物論」에서 유가와 묵가, 혜자의 방생지설, 아열의 {...} 개념이 왜 틀렸는지를 설명하죠. 그런데 장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장자의 초점은 유가, 묵가, 명가가 만물을 {...} 않는다면 장자는 유가를 비판하지 않았을 겁니다. 「養生主」에서는 '도에게서 내려 받은 자신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이 {...} 누릴 수 있도록 조심하라는 말이니까요.

 

이 두 가지 원칙이야말로 《內篇》에서 {...} 보면 「人間世」 이후 편들은 「齊物論」과 「養生主」를 활용하고 확장한 명제에 불과합니다. 「應帝王」도 마찬가지입니다. 「齊物論」의 원칙이 {...} 논지와 명제들은 원칙적으로 이 두 가지 원칙으로 수렴됩니다.

 

이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장자의 정치 {...} 떠올려 봅시다. 유가와 묵가의 사상은 정치 이론입니다. 그런데 혜자의 방생지설과 아열의 백마비마론은 모두 논리 이론이죠. 따라서 {...} '범주 착오'겠죠. 하지만 장자는 모두 비판했습니다. 비판의 논지도 위에서 {...} '범주 착오'를 범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자가 정치 {...}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유가와 묵가, 그리고 명가의 설들을 '정치 이론'이나 '논리 이론'으로 '구분'하지만, 당대의 학자들에게 이 설들은 {...} 상대주의적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장자는 도 앞에 만물이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치 이론이든, 논리 이론이든 {...}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장자는 도 앞에서 만물이 모두 같다고 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정치 이론과 수학 {...} 같습니다. 따라서 정치 {...} 구별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 현상들을 모두 두 가지 원칙에 입각해 이해하려 합니다. 결국 장자의 철학에서는 '정치 이론'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치도 {...}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장자가 정치를 위해 따로 글을 적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손자는 《孫子兵法》을 지을 때, 간첩에 대한 말들을 「用間」에만 모아 두었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應帝王」을 {...} 기대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좀 정신 사납겠지만, '장자의 정치'를 분석해 {...} 넘나들 수밖에 없습니다.

 

 

 

장자가 정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아 {...} 뒤에야 외물과 현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德充符」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잡은(能正生) 뒤에야 외물과 현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正衆生) 했죠. 먼저 자신을 '수양'하고, {...} 들어 《禮記》 「大學」에는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격물과 치지, 성의, 정심은 사물을 탐구하고 자신을 바로잡는 행위, 즉 자기 수양을 뜻합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는 {...} 정치 이론 구조도 '正而後行'으로써 「大學」과 같습니다. 자신을 '수양'하고, 그리고 '실천'합니다. 다른 점은 {...}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도(道)이기 때문입니다.

 

'齊家/治國/平天下'가 유가적 '정치 행위'인 것처럼, 이에 대응되는 '正衆生'이야말로 장자의 '정치 행위'라고 할 수 {...} 주지했던 두 가지 원칙을 지키는 일이죠. 그러면 외물과 현상을 바로잡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養生主」에 나와 {...} 따르도록 '풀어 준다',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養生主」에서는 진일(秦失)이 '현상에 감정이 끼어드는 일', 예를 들어 {...}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제지현해는 도에 어긋나는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장자의 정치 행위'를 다시 조명해 {...} 있겠습니다. 천하 만물과 모든 현상들이 도에 역행하거나 도가 내린 본질을 잃었다면, 바로잡아서 도를 따르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정치 행위'인 것입니다. 즉 '장자의 정치'란, 먼저 자기 자신이 도를 따라 지인(至人)의 {...} 기본적이지만, 원래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기가 제일 어려운 법입니다. 그냥 도를 따르라고 해서 도를 따를 수 있게 {...} 실천해야 하는지, 도를 지키며 세상에서 어떻게 {...} 사람인지를 길고 길게 이야기해 왔습니다. 「應帝王」이 《內篇》을 {...} 생각합니다.

 

장자가 정치 행위로써 {...} 「大宗師」에 맛보기처럼 단면이 잠시 드러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應帝王」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요? 저는 「應帝王」의 7개 이야기 {...} 통해 「應帝王」에 정치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應帝王」의 우화 중 정치에 대해 직접 기술되어 있는 것은 접여와 견오의 대화가 하나, 천근과 무명인의 대화가 둘, 양자거와 노담의 대화가 셋, 이렇게 세 개입니다. 각각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접여(接輿)와 견오(肩吾)의 대화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견오는 접여에게 자신이 중시(中始)와 만난 이야기를 합니다. 중시는 견오에게 경식의도(經式義度)를 가지고 {...} 방법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질타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로잡은 뒤에야 외물과 {...} 그럴 줄도 모른다고 견오를 욕합니다.

 

접여는 왜 견오를 비판했을까요? 견오와 중시가 자기 앞가림도 {...} 바로잡지 못했거든요. 저는 앞에서 '자신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도를 따른다'는 {...} 즉 정치를 시비(是非)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장자는 시종일관 만물을 분별하지 말고 하나로 보아야 {...} 것은, 중시의 그 말이 도를 따르는 입장에서 전혀 타당하지 않을 뿐더러, 견오가 중시의 {...} 때문이었던 것이죠.

 

새와 혜서를 들어 견오를 비난한 것도 {...} 때문입니다. 소중하게 쓰다가 돌려 주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견오는 중시의 말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왜 {...} '도도 모르는 놈'이라고 힐난한 것과 같습니다.

 

접여와 견오의 일화에서는 '자신을 바로잡고서야 외물과 현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 있다는 점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천근(天根)과 무명인(無名人)의 대화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천근이 은양에 놀러 갔다가 무명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천근은 무명인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 즉 '爲天下'를 묻습니다. '爲'는 '治'와 같습니다. 무명인은 {...} 묻자 무명인은 대답해 주기를, 마음을 옅게 먹고, 기를 넓게 연 다음, 만물이 원래 그러한 바(自然)를 따르고, 사사로운 {...}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다, '天下治'라고 하죠.

 

이 대화는 특히 눈여겨 볼 필요가 {...} 쓰였기 때문입니다. 천근은 천하를 다스리고 싶어 하고, 무명인은 천하가 다스려질 것이라고 합니다. 어조가 {...} 한다고 했던 것처럼, 장자는 만물이 원래 그러한 바를 따르고, 사사로운 감정을 그에 끼어 들지 못하게 해야 천하가 {...} '만물이 원래 그러한 바'를 '自然'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물이 원래 그러한 바'라는 것은 만물의 {...} 하기도 했고, 이곳에서는 '自然'이라고 했습니다. 만물에는 도가 내린 본질이 있고, 도가 변화시키는 모습이 {...} 그 만물의 본질을 잘 보존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이라고 하고요. 이것이 장자 정치 이론의 본질입니다.

 

유학자들이 '유가적 목적'을 통해 {...} 아니라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大宗師」에서 진인(眞人)이 '刑', '禮', '知', '德'을 좇아서라도 정치에 나선다고 한 {...}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죠.

 

 

 

세 번째 이야기는 양자거(陽子居)와 노담(老聃)의 대담입니다. 양자거와 노담은 명왕(明王)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양자거는 민첩하고, 굳건하며, {...} 재주 때문에 자기 명을 재촉하게 되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양자거가 다시 명왕의 정치(明王之治)에 대해 묻자 노담은 공적이 많아도 자기가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교화가 만물에 미치더라도(化貸萬物) 백성들은 {...} 기뻐하지 말고 {...}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明王'은 명철한 왕이라는 말입니다. '聖'이 학파를 가리지 않고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明'도 긍정적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속뜻은 다릅니다. 《荀子》 「王制」에도 '明王'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유가적 성왕을 뜻하죠. 마찬가지로 {...} 대담 주제는 '도가적으로 이상적인 정치란 무엇일까요?'였던 것입니다. 보통 양자거는 바로 양주(楊朱), 노담은 노자(老子)라고 {...} 정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정치를 이야기했다면, 양자거와 노담은 위정자와 백성, 즉 정치의 '주체'와 {...} 있습니다. 이 점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장자는 《內篇》 전반에 {...} 도를 따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人間世」에서는 '知'와 아울러 '名'을 흉기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道德經》 17장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太上不知有之, 즉 '가장 좋은 경우는 백성들이 위정자가 있는 줄도 모르는 상태이다'라는 {...} 있었습니다. 진인(眞人)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진인을 위정자와 동격으로 보았거든요. 장자는 진인은 {...} 은택을 만세 동안이나 베풀어도 이것은 위정자가 백성들을 사랑하기 때문은 {...} 무유의 세계에서 거니는 것(遊於無有)이라고 했습니다.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은 '無有'를 '無功', '無名', {...} 통합니다. 뜻이 정확히 같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도가적 정치, 혹은 장자의 정치가 {...} 의지하지 않고 그 상태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천근과 무명인의 대화에서 우리는 장자의 정치가 만물이 '원래 그러한 바', 즉 '자기들의 본질을 되찾'도록 현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 자부할 것도 없게 됩니다. 만물들, 즉 백성들 또한 도가 내린 자기 본질을 찾았을 {...} 본질을 기꺼이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질을 받아 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지인(至人)들은 사람들이 {...}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치'입니다.

 

 

 

이로써 「應帝王」에서 정치가 {...} 알 수 있었죠. 바로 '만물이 도가 내린 본질을 되찾도록 현해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명성이 드러나니 어쩌니 {...}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3개밖에 보지 않았는데, 그러면 나머지 4개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4개 이야기는 {...} 「齊物論」이나 「大宗師」에 더 어울린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한 것처럼, 장자에게 정치 {...} 장자가 정치에 대해 더 상세하게 설명하거나 논점을 심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자는 정의를 위와 같이 정의하고서는 유가적 정치 제도를 거부했습니다. 제도는 만물을 '분열'시키니까요. 따라서 장자 입장에서 '정치' {...} 말입니다. 애초에 장자가 《內篇》에서 '帝之縣解' 이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니, 제가 뭘 더 이야기하면 그건 '述'이 아니라 '作'이겠지요. 반면 유학자들은 인과 의 같은 원칙들을 법과 제도를 통해 실현하고 {...} 변화했습니다. 공자는 '述而不作'이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유학은 {...} 못했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앞에서 「應帝王」의 우화 {...} 파생된 것들 위주로만 언술했을 뿐입니다. 「應帝王」의 나머지 4개 우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4개 우화에는 정치에 대해 {...} 말아야 할 글을 잘못 넣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3개 우화에서 드러나 있는 {...}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장자의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應帝王」의 나머지 4개 우화들의 주제는 '분별심'이거나, '본질' 또는 '도를 깨달아 가는 과정과 그 모습'으로 한정됩니다. 따져 {...} 후건에 해당합니다. 분별심을 극복해야 {...} 것으로 정치를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 본다면 「應帝王」은 분명 장자의 정치 이론이 '집대성'된 편이겠습니다. 표현 그대로 전부 들어 있지는 않지만요.

 

 

 

「應帝王」에서 정치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4개 우화들은 이렇습니다. 설결(齧缺)과 포의자(蒲衣子)의 대화가 하나, 계함(季咸)과 호자(壺子), 그리고 열자(列子) 이야기가 둘, 그리고 지인(至人)에 대한 장자의 설명이 셋, 그리고 숙(儵)과 홀(忽), 혼돈(渾沌) 이야기가 넷입니다. 특히 숙과 홀, 혼돈 이야기는 아마 다들 한 번 이상 들어 보셨을 겁니다. 유명하거든요.

 

 

 

설결과 포의자(蒲衣子)의 대화는 사실 「齊物論」에서 설결과 {...} 점에 대해서 문답을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나눈 이후, 설결이 기뻐하면서 왕예의 스승인 포의자에게 이 이야기를 {...} 유우씨(有虞氏)와 태씨(泰氏)를 예로 드는데, 유우씨는 순(舜)을 뜻하고, 태씨는 아마 삼황 중 하나인 복희씨(伏羲氏)를 이르는 것 같습니다.

 

포의자는 유우씨가 인(仁)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았지만, 즉 사람들을 {...} 태씨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소라고 하면 자신을 소라고 여기고, 사람들이 말이라고 하면 자신을 말이라고 여겼다고 칭찬했죠. 소나 말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 때문이 아닙니다. 태씨는 만물이 {...}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태씨는 유우씨처럼 시비를 가리려고 하지조차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 것이야말로 정치를 펴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계함(季咸)과 호자(壺子), 그리고 열자(列子) 이야기는 「應帝王」에서 가장 서사적이고, 긴 이야기입니다. 계함은 사람들의 관상(相)을 잘 보는 무당입니다. 열자가 이 점에 마음이 흔들려서 자기 스승인 호자 보다 계함이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호자는 계함이 상(相)을 볼 줄은 알지만, 도가 내린 본질 그 자체를 보지 못한다는 점을 간파했습니다. 그리고 {...} 만물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임이 분명하지만, 오히려 「大宗師」에서 본질을 {...} 한 번 나오고, 연(淵)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나와서, 본질을 가리키죠.

 

이 이야기를 분명히 이해하려면, 「大宗師」 뿐만 아니라 「齊物論」의 호접몽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호접몽을 통해 장자는 만물의 {...} 장자가 '꿈'이라는 소재를 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호접몽을 대거 오해하게 만들어 버렸죠. 도가 일으키는 변화는 단지 물체에서 {...} 곱추가 되거나, 죽게 되거나, 혹은 엉덩이가 수레가 {...} 모두가 도에 기인합니다.

 

계함과 호자 이야기에서 호자는 자신의 상(相)을 호자를 만날 때마다 바꿉니다. 처음에는 '地文'을 보여 주고, 그 다음에는 '天壤'을 {...} 변하는 모습은 바로 도가 만물을 변화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계함은 관상을 볼 줄은 알았어도, 그 관상을 내리는 것이 {...} 멋대로 바꾸는 사람을 만나자, 까무러쳐서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호자는 열자에게 상(相)이 변하는 것은 변하는 {...} 들어서 '地文'과 '天壤', 그리고 '太沖莫勝'은 '淵'이 각각 '止水', '流水', '鯢桓'한 모습이 표현된 상(相)인 {...} 없이 '大情', '宗', '物之情'과 같습니다. 도가 내린 본질을 뜻하죠.

 

처음에 열자는 계함이 사람의 상을 맞추는 것을 {...} 공부가 한참 모자랐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위해 밥을 하고, 돼지를 사람처럼 {...} 것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주제도 '분별심'과 '도로써 만물은 하나로 통한다'입니다.

 

 

 

계함과 호자 이야기 이후에는 장자가 직접 도를 깨닫는 단계를 설명하는 말이 있습니다. 장자는 이 단계를 7개로 나누었습니다. 명성에 {...} 내리는 끝 없는 변화를 남김 없이 받아들여서(體盡無窮), 만물과 조화를 이루고, 그 조화에 어긋날 기색조차 {...} 명칭을 자질구레하고 난잡하게 만들었을 텐데, 장자는 이 7개 단계에 대해 따로 명칭을 붙이지는 않았습니다. 간단명료하긴 하지만, 《內篇》을 정독해 오셨다면 이 7개 단계가 도를 깨우치는 핵심 과정이라는 {...} 견지해야 할 태도도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도 무언가를 터득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고(無見得), 그저 마음을 {...} 게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단계를 지켜 나가면 도를 깨우칠 수 {...} 거울처럼 대한다고 보았습니다. 무엇이든 떠나 보내려 하지도 않고, 맞아 들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 모습을 {...} 둔다는 것은(藏) 만물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好惡) 같은 성심(成心), 즉 편견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성심이 {...} 이룰 사람입니다. 만물을 본질 그대로 볼 수 있으니, 또한 만물에게 본질을 찾아 줄 수도 {...} 어떻게 만물을 현해(縣解)해 줄 수 있을까요, 그쵸?

 

여기서 {...} 말이 제목에 들어가 있고, 그 내용을 보더라도 정치가 어쩌니 하고 있으니, '應帝王'도 '제왕에게 하는 무슨 말인가 보다' 하고 {...} 했습니다.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은 임희일(林希逸)과 주득지(朱得之)가 '마땅히 이러해야 할 제왕의 뜻'이라고 {...} 뜻으로 본다면, '應帝王'은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 자가 제왕이다', 혹은 '제왕은 만물을 있는 {...} 현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바로 '應'을 {...} 해석하면, 장자의 정의와 '應帝王'이라는 제목이 부절처럼 꼭 맞게 됩니다.

 

 

 

숙(儵)과 홀(忽)이 혼돈(渾沌)을 끔찍하게 죽인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 같습니다. 숙과 홀이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 했죠. 사람이라면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혼돈만 구멍이 없었거든요.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런데 이례째에 혼돈이 죽고 말았습니다. 간단하지만 강렬합니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 이야기를 '人爲'나 '作爲'의 폐해라고 {...} 하고요. 하지만 저는 이런 관점이 《內篇》을 너무 도식적으로만 파악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제가 한 번쯤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大宗師」에 '無爲之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은 {...} 일종의 '표어'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장자를 노자와 함께 분류하면서 '老莊'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 모두 도(道)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도 맞습니다. 하지만 《道德經》과 《莊子》는 사상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물론 공자와 장자 만큼 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학파라고 하는 {...} 사상적인 일체성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無爲自然'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無爲自然'이라는 단어가 《內篇》에 한 단어로써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自然'은 「應帝王」에 한 {...} 나온 경우는 「大宗師」의 '無爲之業'과 '無爲無形'밖에 없습니다. '自然'과 '無爲' 둘 다 도를 직접,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 혼돈에게 구멍을 뚫은 {...} 생각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저는 숙과 홀이 뚫은 구멍을 {...} 보았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선 '儵'과 '忽'은 모두 '아주 짧은 시간', '재빠른 모양'을 뜻합니다. 그런데 안동림(安東林)은 '儵'을 '현상이 빠르게 나타나는 모양'이라고 했고, '忽'은 {...} 것입니다. 없다가 있고, {...} 대립되죠. 숙과 홀은 대립되는 두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숙과 홀이 잡아 죽인 혼돈(渾沌)은 전혀 {...} 규칙성을 담보로 할 때 사용합니다. 실제로 '혼란스럽다'고 비난할지언정, '혼돈스럽다'라고 하진 않죠. 그런데 {...} 있을 뿐입니다. '뒤섞여 있는 모양'이 꼭 원형이진 않겠지만, 숙이나 홀과 달리 직선적인 모양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혼돈이 숙, 홀과 대조된다는 점을 좀 더 드러내 {...} 행태를 비판하면서, 장자는 만물이 이처럼 구분되지 않는 경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도(道)를 '樞', 즉 지도리에 비유하죠. 지도리는 원형입니다. 원형이니까 모든 지점이 통하죠. 대립되어 보이더라도 결국 원을 {...} 만물이 동등하게 뒤섞여 있으니, 앞도 뒤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습니다. 원을 {...} 직선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비슷하죠. 즉, 혼돈(渾沌)은 도(道)와 같습니다. 숙(儵)과 홀(忽)은 반면 직선적이고, 대립적인 것을 {...} 묵가일 수 있습니다. 혹은 인(仁)이나 의(義)일 수도, 절용(節用)과 겸애(兼愛)일 수도 있습니다. 숙과 홀은 이처럼 {...}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혼돈이 숙과 홀을 잘 대해 준 것도, 혼돈이 도(道)의 입장에서 숙과 홀을 {...} 모두 구멍이 7개 있다고 합니다. 눈에 두 개, 귀에 두 개, 코에 두 개, 입에 한 개입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쉽니다. 그런데 혼돈에게는 이 {...} 혼돈이 죽었습니다. 도가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몸에 구멍이 생기면 죽겠지만, 혼돈은 {...} 무엇일까요? 숙과 홀은 혼돈에게 무엇을 새겨 넣었기 때문에 혼돈이 본질을 잃었을까요? 상기한 것처럼 인과 의일 수도 있고, 절용과 겸애일 수도 있습니다. 「大宗師」에서 의이자(意而子)는 요(堯)에게 '인의에 복종하고(躬服仁義), 옳고 그런 것을 명백하게 따져야 한다(明言是非)'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허유(許由)에게 욕을 {...} 될 수 있습니다. 《內篇》에 수도 없이 나왔으니까요. 특별히 유가만 가리킨다고 할 수도 없고, 특별히 묵가를 가리킨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구멍은 단지 인, 의 같은 낱개 개념을 {...} 총괄하는 개념이 되어야 합니다.

 

도를 도가 아니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일까요? 장자는 「齊物論」에서 시비 같은 {...} 원칙은 '만물은 도 앞에서 하나로 통한다'입니다. 도추의 {...} 도를 도가 아니게 하는 요인은 바로 이 원칙의 부정일 것입니다. 즉, 어떤 요인 때문에 만물을 {...} 모두가 해당하는 이것, 이것은 바로 {...} 것, 듣기 좋은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향취와 악취를 알게 되고, 또한 {...} 생기고서는 더 이상 만물을 평등하게 대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숙과 홀을 미워하거나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돈이 혼돈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요, 도가 도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구멍은 {...} 일종의 단서일 뿐, 구멍의 본뜻을 잘 헤아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멍을 작위, 인위로 볼 수도 없습니다. 애초에 {...} 그러면 인위나 작위 때문에 혼돈이 죽었다는 말은 혼돈이 자폭했다는 뜻일까요? 혹자는 구멍이 7개이므로 이를 사람의 '七情', 즉 희노애락 같은 감정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근거 없는 말일 뿐더러, 인이나 의라고 하면 {...} 것을 하늘에서 {...}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應帝王」에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 다른 글이 있지도 않습니다.

 

혼돈은 {...} 포의자의 대화, 계함과 호자, 열자 이야기, 그리고 지인에 대한 장자의 설명에서조차 모두 '분별심'을 배제하는 것이 중심적인 화제였다는 {...} 도를 무너뜨리는 근본인 셈입니다.

 

 

 

「齊物論」이 도에 대한 이론적 개론이었다면, 「養生主」는 도에 대한 실천적 개론이었습니다. 「大宗師」가 도에 대한 이론적 완성이라면, 「應帝王」은 도에 대한 실천적 완성입니다. 도를 {...} 세상에 대한 '참여 이론'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자는 분별심 때문에 도(道)를 잃지 {...} 마침내 「應帝王」에서 {...} 경계하며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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