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 6 - 대종사 - 해설

2021. 8. 29. 13:35장자 내편 이야기 - 완결/원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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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편》 번역에는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이민수(李民樹)의 2007년 번역, 현암사에서 나온 안동림(安東林)의 2019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내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1년 8월 12일 9시 53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원문과 번역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98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1 - 진인은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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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00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2 - 도를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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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01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3 - 여우가 자규에게 도의 계보를 알려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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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02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4 - 자사, 자여, 자려, 자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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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03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5 - 자상호, 맹자반, 자금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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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04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6 - 안회와 중니가 맹손재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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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05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7 - 의이자가 허유에게 도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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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내편 - 6 - 대종사 - 8 - 안회가 좌망하여 중니가 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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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내편 - 6 - 대종사 - 9 - 자여가 자상을 문병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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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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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주석>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9 - 자여가 자상을 문병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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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책으로 출판되어 교보문고를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전문을 다 읽으시려면 책을 구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莊子內篇孃注》, 李相珉, 책과세계)

 

**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내용은, 번역문 전체 및 주석 일부입니다. 그러나 번역문과 주석 모두 중간 부분을 {...}라는 표시로 비워 뒀습니다. 책을 구입하기 전 열람할 수 있는 견본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교보문고와 리디북스 두 개 서점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 가능한 링크는 아래에 기재해 두었습니다.

 

1.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3332426(양장본, 품절)

 

2.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9069155(문고판, 상권 및 하권으로 분절, 세트로 판매, 재고 있음)

 

 

3. 전자책

 

3-1. 교보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405

(전자책, 교보문고, 합본)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1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6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3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63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2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7

(전자책, 교보문고, 편별로 분권)

 

 

3-2. 리디북스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8?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1

(전자책, 리디북스, 합본)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1?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4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2?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5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3?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6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4?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7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5?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3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6?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8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7?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2

(전자책, 리디북스, 편별로 분리)

 

 

 

 

 

「大宗師」는 '大宗師'라고 씁니다. '宗'은 {...} 말입니다. '師'는 사서에서 주로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보통은 스승, 더 나아가 '위대한 스승님'이라는 말로 사용됩니다. 스승과 제자를 의미하는 사제의 '사'가 바로 '師'거든요. 원불교 라디오에서도 격언을 할 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로 항상 시작하는데, 여기서 대종사는 원불교의 창시자인 박중빈을 {...} 말로 사용됩니다. 「德充符」에서 왕태(王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守其宗也'라고 한 적이 있었죠. 만약 {...} 말해서 '도를 따라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大宗師」는 구조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자는 글 전반부에서 진인(眞人)과 도(道)에 대해 상세히 {...} 뒤로는 우화가 끝까지 이어지는데, 우화들에서는 일관되게 도가 전수된 과정, 도를 깨닫는 과정, 그리고 도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강령이 {...} 측면에서는 「人間世」의 심재(心齋)와 통합니다. 게다가 「大宗師」에는 좌망(坐忘)이라는 말도 나오죠.

 

따라서 엄밀하게 말을 하자면 「大宗師」의 주제로써 「大宗師」에 처음 나오는 말은 없습니다. 모두 《內篇》 앞 부분에서 {...} 「大宗師」에서는 모든 주제가 종합되고, 심화됩니다. 즉, 「大宗師」에서 《內篇》의 이론적 주제가 실질적으로 마무리된다고 {...}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를 실천하는 방법이죠. 「大宗師」가 「齊物論」에 대응된다면, 「應帝王」은 「養生主」에 대응됩니다. 이제부터 아래에서는 {...} 합니다.

 

 

 

가장 처음 해야 할 작업은 「大宗師」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상기한 것처럼, 「大宗師」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진인과 도를 {...} 도에 집중한다는 점이 「大宗師」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다른 편들의 주제는 도에서 파생된 강령들이지, 도 그 자체는 아니었거든요. 「逍遙遊」에는 아예 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養生主」에서는 {...} 설명됩니다. 「德充符」에는 도를 실천하면서 세상에서 살아 가는 성인들이 등장합니다. 역설적으로 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齊物論」은 달랐습니다. 「逍遙遊」에서 {...}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진군(眞君)과 진재(眞宰) 같은 비유를 들어 논증했습니다. 그리고는 도를 따르는 것이 유가, 묵가, {...} 특이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자주 그렇게 쓰니까요. 하지만 《內篇》 {...} 이론이라는 것이 두 편 다 《莊子》의 핵심 주제인 도(道)에 대한 점이라는 것을 우연이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다.

 

물론 이 둘이 아주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단 「大宗師」의 이론 부분 주제는 진인(眞人)과 도(道)로 한정되지만, 「齊物論」의 이론 부분에는 유가, 묵가, {...} 주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齊物論」 해설에서 남을 비판하면서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논증 방식이 의미가 {...} 묵가, 명가를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설명 방식에 차이는 있으나, 「齊物論」의 주제도 '道'로 한정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大宗師」와 「齊物論」이 {...} 다른 학파, 즉 유가, 묵가, 명가의 이념에 비해 어떤 점이 더 나은지를 드러내기 위한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齊物論」에서 '도로써 만물은 하나로 통한다'는 원칙은 유묵의 시비, 혜자의 상대주의, 아열의 {...} 또 다른 원칙은 다음 편인 「養生主」에 가서야 제시됩니다. 「齊物論」은 그 자체로 글이 아주 길 뿐만 아니라, 내용도 {...} 더 '심화 과정'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장자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독자가 《內篇》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읽어 왔다면, 독자들은 「齊物論」에서 「德充符」에 이르기까지 도의 {...} 접한 다음 「大宗師」를 읽게 됩니다. 즉, 독자들 입장에서는 「大宗師」를 읽기 전에 '고급 과정'을 밟을 준비를 갖추게 된 것이고, 장자 입장에서는 마침내 독자들에게 단계별로 설명해 주기만 했던 요리를 직접 만들도록 {...} 거죠. 그래서 저는 「大宗師」에서 모든 주제들이 종합되고, 심화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大宗師」의 의의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 말처럼 「大宗師」에 장자가 의도한 핵심 주제들이 {...} 장자는 설명을 체계적으로 하기 보다는 비유적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 설명 {...} 이해할 수 있었겠냐고 묻는다면, 전 모르겠습니다. 《莊子》에 대해 고금의 학자들이 주석을 많이 달고, 또 그 {...} 주제가 「大宗師」에서 종합되기는 하지만, 「大宗師」 혼자만 있다고 「大宗師」가 빛날 수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大宗師」의 큰 주제인 진인(眞人)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진인은 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道人'이라고 {...} 용례를 고려할 때 신인은 진인, 성인, 지인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장자가 「大宗師」에서 진인에 대한 이야기를 {...} 것에는 근거가 있기 마련입니다. A라는 사실이 타당하려면, A의 근거인 B를 믿을 수 있든지, 아니면 다른 경로로 A가 증명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장자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은 그 지지 기반이나 {...} 이것을 진지(眞知), 즉 진정한 지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진지는 '道'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지는 어디서 나온다고 할까요? 바로 진인(眞人)입니다. 장자는 이런 방식으로 「大宗師」에서 진인에 대한 이야기를 {...} 비판하면서, 유묵에서는 '是'와 '非'를 숭상하는데, '是'와 '非'는 절대적인 {...} 사실 「大宗師」 첫 부분과 의미가 같습니다.

 

이후부터 장자는 진인의 특성이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대체로 특성들을 열거하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 진인은 자기가 곤란해도 그 상황을 {...} 후회하지 않고, 잘 되어도 자만하지 않는다고 하죠. 하지만 이 모두를 열거하는 {...} 생사의 문제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진인은 생과 사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삶에 기뻐하고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도가 내린 명을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게 됩니다. 그래서 진인은 생사나 명에 감정을 개입시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다릅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이라는 {...} 진인들은 세속에 얽매이지는 않고 자유분방하게 삽니다. 다양하고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도가 {...} 한다는 명제로 대체로 귀결된다는 점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명제들은 여기서 파생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말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숨을 목구멍까지 쉬지만, 진인은 발꿈치까지 쉰다고 합니다. 진인이 꿈을 {...} 구절들이 모여서 나중에 도교도들의 수행법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장자는 진인이 불에 들어가도 뜨겁다고 {...}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불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는 것은 단순히 수행으로 오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죠. 장자가 이 이야기를 진심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는 {...} 이 이야기들은 장자가 늘 하던 말들을 조금 확장하고 반복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아주 새롭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장자가 「大宗師」에서 예시를 나열하는 방식으로만 일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접적이긴 하지만 부정어로 정의하기도 했고, 직접 진인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장자가 부정어로 진인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살펴 봅시다. 장자는 먼저 성인(聖人), 인(仁), 현(賢), 군자(君子), 사(士)에 대해서 {...} 없다.(利害不通非君子也)'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장자는 진인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亡身不眞'하는 자를 역인(役人)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役'은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즉, 도를 닦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역인(役人)입니다. 문맥상 역인을 진인으로 바꿔도 문제가 없을 {...} 그렇다면 역인이 아니라는 의미죠. 이 명제의 대우를 생각하면, 역인, 즉 진인이라는 것은 도에게서 내려 받은 자신을 보전하고, 도의 참된 {...} 하겠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亡身不眞'의 사례로 여러 사람을 들었습니다. 호불해(狐不偕), 무광(務光), 백이와 숙제(伯夷叔齊), 기자(箕子), 서여(胥餘), 기타(紀他), 신도적(申徒狄)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자기 신세를 {...} 숙제는 고죽국의 왕자였는데, 왕위를 물려 받을 것을 거절했습니다. 기자는 주(紂)에게 간언하다가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서여는 아마 오자서(伍子胥)인 듯합니다. 왕에게 무리하게 간언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기타와 신도적은 아주 {...} 물에 빠져 자진했습니다. 신도적은 제후들이 기타를 의인이랍시고 문상하자, 그걸 핑계로 들며 3년 뒤에 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다고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자신의 덕이 모자라서 선양을 거절했다는 것은 언뜻 보면 아주 의로운 행위 같습니다. 사실 《莊子》에는 허유(許由)가 간혹 {...} 것은 똑같은데, 호불해와 무광은 욕을 먹고 허유는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호불해와 무광은 선양을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 뒤에 자진해 버렸습니다. 선양을 거절했다고 누가 와서 왕위를 왜 안 받았냐고 죽이는 것도 {...} 허유는 더럽다고 귀를 씻었지, 죽지는 않았습니다. 호불해, 무광의 자진은 필요 이상의 행동이었습니다. 선양을 안 받으면 안 받았지, 저 멀리 나아가서 죽기까지 한다는 것은 일부러 명성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주나라가 은나라를 져 버렸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 신도적은 아주 노골적입니다. 자기들에게 선양 제의가 온 것도 아닌데, 꼴값을 떨면서 자진했습니다. 게다가 기타가 자진한 것에 대해 제후들이 {...} 장자가 왜 이 사람들을 비판했는지 알 만하죠.

 

대선판이 되면 사람들의 눈이 뒤집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큰 이익이 걸린 도박판 {...} 자기 자신을 그르치기 가장 쉬운 매개가 바로 명성이나 명예, 영화, 이익 같은 것이므로, 이런 것들 때문에 자기 자신을 망치지 말고, 자신을 {...} 간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간단한 것을 지키지 못해서 우리 자신을 망치고 맙니다. 장자는 호불해부터 신도적까지를 {...} 길을 대신 가 줬을 뿐(適人之適), 도를 찾기 위해 자신들에게 맞는 길을 걸어 갔던 사람이(自適其適者) 아니었다고 {...}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장자가 {...} 봅니다. 이 말은 평범합니다. 그런데 장자는 만물이 도로써 하나로 통한다는 견해도(一) 진인에게는 하나의 입장일 뿐이고, 통하지 {...} 지금까지의 주장과 상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장자는, 도로써 통한다는 입장이 하늘의 뜻과 같다고 하였고, 도로써 통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보통 사람들의 뜻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입장과 사람의 {...} 진인을 바로 이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짚어 볼 만한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 동격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養生主」에서 우사는 자기 발을 그렇게 만든 것이 '天'이라고 했습니다. 「齊物論」에서도 시비에 치우치지 않는 모습이라는 의미로 '天鈞'이라는 말이 사용된 적이 있죠. {...} 하기도 했고, 자여(子輿)의 말 중에서는 '天'과 '造物'이 동격으로 쓰였습니다. 맹손재(孟孫才) 이야기에서는 '寥天'이라는 {...} 사례입니다. 그런데 「大宗師」에서는 '天'이 '道'의 {...} 대립시키면서 진지(眞知)와 진인(眞人)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었죠. 이 부분도 그렇습니다. 장자는 하늘의 입장과 사람의 {...} 말은 우리가 《內篇》을 읽을 때 어떤 용어의 의미를 항상 일관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 사용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이 경우의 '天'도 마찬가지겠습니다.

 

두 번째는 도로써 만물이 하나로 통한다는 {...} 사용되어 온 '원칙'이었습니다. '원칙'이라는 말은, 곧 이 원칙과 상반되는 이론이 《內篇》 안에 존재해서는 {...} 사람들의 입장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상반되죠? 상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A와 A의 부정이니까요. 그리고 장자는 이 두 입장을 조화시킬 {...} 하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은 '道'의 {...} 하위의 명제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보이는 걸까요? 정말 '만물제동'의 원칙이 장자의 이론에서 하위 명제이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 방생지설(方生方死), 즉 상대주의를 비판하면서 저런 입장이라는 것도 하나의 시비에 불과하고, 이런 입장이라는 것도 하나의 시비에 불과하므로, 본질적으로 이런 입장이나 저런 입장이라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경지가 있고, 이를 도추(道樞)라고 했죠. '樞'는 돌쩌귀입니다. 둥글죠. 대립이 없는 조화의 {...}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진인은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조화시키니, 결국 하늘의 입장 역시 사람의 입장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본다면 {...} 이미 '道'로써 만물이 하나로 통한다는 원칙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齊物論」에서 장자가 이런 {...}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 착안해 봅시다. 장자의 입장은 만물이 원래 구분되어 있었는데 지금 '道'라는 이념을 가지고 하나로 합치려는 게 아니라, 원래 만물은 구별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 하늘의 입장과 사람의 입장으로 구분되기 전에 모두가 분별되지 않는 경지가 있'었'고, 진인의 역할이 둘을 다시 합치는 것이 {...} 없게 됩니다. 태초에는 도밖에 없었으니, 도가 없었다는 주장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물이 구분되면서 원래 있던 도에 대해 도가 없다는 주장이 생겨난 것이죠. 즉, '만물제동'의 {...} 중요한 명제의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장자는 「大宗師」에서 진인의 정치에 {...} 정치에 직접 나서기도 합니다. 형벌을 이용하는 것은 사사로운 감정을 들이지 않기 위해서이고, 예법을 사용하는 것은 정치를 통해 도를 세상에 펼치기 위해서이며, 필요하다면 세속적인 식견이라도 활용해서 부득이하게라도 {...} 했습니다. 이상하죠? 장자는 지금까지 《內篇》에서 정치에 대해, 특히 위정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 멀었습니다. 오히려 신도가(申徒嘉)는 자산(子產)이 집정(執政), 즉 재상의 지위를 가지고 깝치고 다닌다고 한 소리 하기도 하죠.

 

그래서 학자들은 이 부분을 장자의 저작이 아니라고 의심했습니다.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이 이 점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을 인용해 놓았습니다. 재인용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장묵생(張黙生)은 아예 이 부분을 「大宗師」에서 빼 버려야 {...} 본문에 편입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지전지구의 생각에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형벌을 사용하니, 예법을 사용하니 하는 것은 장자의 {...} 입장에서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養生主」에서도 자신을 보전하며 도(道)를 따라 나가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목표라고 했고, 「人間世」에서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해 처세술을 {...} 주로 '개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자가 통치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좀 어색하고 이상하죠.

 

그런데 《內篇》 안에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적긴 하지만, 그래도 나오긴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사실 「應帝王」에서 제일 긴 내용은 열자(列子)와 호자(壺子)의 대화인데, 이 이야기는 또 정치와는 거리가 멀죠. 하지만 《內篇》에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곳이 또 있습니다. 바로 {...} 있었습니다. '天下有道/聖人成焉//天下無道/聖人生焉//方今之時/僅免刑焉' 여기서 '成'을 '治'의 뜻, 즉 '정치하다', '다스리다'는 뜻으로 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천하에 도가 있다면 성인이 정치를 펴겠으나, {...} 어떨까요? 그러면 정치색은 없이 처세술에 대한 이야기로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이 이야기에 {...} 않죠. 그래서 '成'은 '治'로 보아야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장자가 접여의 말을 넣은 의도가 접여의 {...} 겨우 면해 가며 근근이 살아갈 뿐이다.'가 됩니다. 성인이 정치를 펴려는 목적이 {...} 성인도 도를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 혹은 그것이 {...} 여의치 않으니, 숨 죽이고 조용히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것이 장자의 생각이라면, 장자가 {...} 정치에 임할 기회와 때가 온다면, 그리고 그것이 도가 내린 명이라면 장자는 이를 따를 것이지만, 장자가 살아 있는 동안 장자에게 그런 때가 오지는 않았습니다. 장자는 칠원에서 관리를 지냈습니다. 장자는 칠원의 {...} 도가 내린 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장자는 이를 거절했을 것입니다. 결국 장자가 죽을 때까지, 혹은 도가 장자를 {...} 것입니다. 그 명을 내리지 않은 것도 도의 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장자는 천하를 다스릴 명이 내렸다면, 「大宗師」 이 부분의 기술처럼 정치에 기꺼이 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 여길 것입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이것이 장자의 철학입니다.

 

상기했듯이, 장묵생(張黙生)은 아예 이 부분을 「大宗師」에서 빼 버려야 한다고 했고, 지전지구(池田知久)는 이 부분을 장자의 저작이 아니라고 {...}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까요? 「人間世」에 나오는 접여의 말을 생각하지 않고도, 저는 사실 장자가 이런 {...} 몇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치 행위'를 절대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장자 본인이 칠원의 관리로 생활하기도 했고 말입니다. 만약 장자가 정치 행위를 절대악이라고 생각했다면, 장자 {...}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올자(兀者)들도 그랬죠.

 

이처럼, 장자는 유가나 묵가처럼 정치의 당위성을 주장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정치 체제 자체를 악이나 불선이라고 규정한 것도 {...} 묵가에 비해 장자는 상위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유가와 묵가는 서로에 대해 인의(仁義)가 어떠니, 절용(節用)이 어떠니 하고 싸워댔습니다. 순자가 「富國」에서 묵가를 조목조목 비판했던 것처럼요. 그런데 장자는 {...} 이야기하며 '利澤施乎萬世'이라고 한 것을 보면, 정치의 외형적 목적, 즉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준다는 것에는 장자도 유묵과 비슷했던 것 같으나, 내면적 목적은 물과 기름처럼 아예 섞일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장자와 {...} 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즉 이처럼, 「人間世」의 접여의 말을 고려하면 이 부분은 장자의 {...}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못할 이유는 없죠. 좀 이상(異常)하긴 해도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大宗師」에 나오는 진인(眞人)의 대체입니다. 진인은 도를 {...} 장자의 목표라면, 결국 진인이 되는 과정이 비중을 크게 차지할 테니 말입니다. 본문에서처럼 진인은 신비한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간혹 외계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자는 {...}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면 정치에 나서기도 합니다. 진인은 본래 예(禮)나 식견(知)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 덕목을 동원해 백성들을 다스리기도 합니다.

 

 

 

장자는 진인에 대해 이야기를 끝낸 뒤에는 도(道)에 대해 기술했습니다. 장자가 도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齊物論」이었습니다. 장자는 「齊物論」에서 도가 실재한다는 것을 논증하고, 시비(是非)와 상대주의(彼是)를 모두 넘어선다고 {...} 그렇게 하는 줄도 모르는(不知其然) 경지를 도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것, 즉 '其'가 가리키는 {...} 말입니다. 제가 굳이 「齊物論」을 끌어 들여서 장자의 도론을 환기시킨 것은, 「大宗師」에서 장자가 {...} 바로 '不用而寓諸庸'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만물의 본질을 대정(大情)이라고 {...} 길이라는 대상은 사실 우리의 자의적 사고로 재정의된 관념입니다. 바로 이것이 「齊物論」에 나오는 '用'입니다. 우리는 사실은 그 '길'이 '길'이 되기 이전에 무엇이었는지를 알지는 못합니다. 만약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면 {...} 모릅니다. 하지만 '짹'이라는 관념은 다시 참새가 자의적으로 정의한 것일 뿐, 사실 본래 그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짹'도 '用'인 것이죠. 장자는 이 '用'들이 아닌, 물체 본래 그대로의 {...} 하기도 했고, 불변하는(恆) 대정(大情)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본래적 의미라는 것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道'에서 옵니다. 장자는 세상 만물과 그에 대한 모든 현상들에 도(道)가 내린 대정이 있다고 {...} 장자가 사람들이 오구를 연못에다 숨기고, 배를 도랑에다가 숨긴다고 했던 말이 이를 가리켰던 것입니다.

 

만물과 현상은 태어나고, 살아가며, 죽는 것을 {...} 대정(大情)을 보존하여 도를 따르는 것이겠죠.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은 태어남과 죽음을 사람의 '用'으로 재단하는 행위입니다. 「養生主」에서부터 장자는 생사고락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을 보고 죄(形)라고 {...} 현상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 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죽는 것을 슬퍼해도 삶을 늘리거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죠. 저는 새벽 시간에 혼자 글을 쓰는 것을 {...} 재단하지만, 장자는 대정(大情), 즉 본연의 본질을 보존하는 것 보다는 못하다고 보았습니다. 물고기를 물 밖에 {...} 것도 없겠죠.

 

그러면 도를 따라 만물과 현상들의 대정을 보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고기를 물 속에 그대로 두듯 해야 합니다. 삶과 죽음에 감정을 {...} 않는 것은 그 하나의 사례이자 현상에 불과합니다. 본질적으로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은 살아 가는 상태이고, 죽음은 죽은 {...} 물 속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大宗師」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을 '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善'은 좋아한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긍정한다고 볼 수 있겠죠. 삶과 죽음, 만물, {...} 그른지를(是非) 가리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입장과 저런 입장이라고(彼是) 구별하지도 말아야 {...} 긍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이렇듯 장자가 만물과 현상의 본질을 {...} 하며, 만물이 변화하는 양상도 도에 모두 의지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작용도 있고, 증거도 있지만, 행위는 없고, 형체도 없습니다. 왜 행위가 없을까요? 변화 그대로가 도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적 의식을 {...} 것이요, 태극(太極) 보다도 위에 있고, 육극(六極) 보다도 아래에 있고, 상고(上古) 보다도 오래되었다고 {...} 본질이자 뿌리이기 때문이죠.

 

결국 도를 안다, 도를 깨닫는다는 말은 세상의 본질을 깨닫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세상의 본질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늘을 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 들어 도를 터득하고서 시위씨(狶韋氏)는 천지를 거느렸고, 북두칠성(維斗)은 모양을 흐트리지 않게 되었다는 {...} 시위씨, 복희씨(伏戲氏), 유두, 즉 북두칠성, 일월(日月), 감배(堪坏), 풍이(馮夷), 견오(肩吾), 황제(黃帝), 전욱(顓頊), 우강(禺強), 서왕모(西王母), 팽조(彭祖), 부열(傅說)을 들었습니다. 상기하였듯, 도를 깨닫는다는 말은 세상의 본질을 깨닫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자들은 도를 깨달아서 영원불멸하게 되기도 하고, 천하를 {...}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삶에 대해 미련은 갖지 않게 될 것 같긴 합니다.

 

 

 

여기까지가 「大宗師」의 이론 부분입니다. 장자는 진인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우리가 도를 따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 볼 만합니다. 대체는 이렇습니다. 도는 태초부터 있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도가 '지금'까지 어떻게 전수되었으며, 도를 터득해 {...}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입니다.

 

 

 

이론 부분에서 장자는 도가 천지(天地) 보다도 앞섰고, {...} 세상의 방위, 방향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상고는 아주 오래 전의 시간입니다. 《朝鮮上古史》의 '上古'와 같습니다. 보통 고대나 그 이전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 말들은 도가 세상의 {...} 있었다면, 장자가 살았던 '지금'까지 도가 {...} 이야기를 펴면서 이 경로를 설명했습니다.

 

가장 처음은 의시(疑始)입니다. 시작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세상의 시원, 태초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삼료(參寥)입니다. '寥'는 {...} 나간 것을 보면 타당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현명(玄冥)입니다. '玄'이나 '冥'은 모두 수준이 깊고, 고고하고, 미묘함을 의미합니다. 특히 '玄'은 《道德經》에서도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玄牝'처럼 {...} 알아 차리기도 전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오구(於謳)입니다. '謳'는 노래하는 것, '於'는 감탄하는 것을 이릅니다. 누군가가 최초로 도를 깨닫고 {...} 소곤거리다, '許'는 듣다는 뜻으로 {...} 않았나 싶습니다. 마침 남백 자규와 여우의 이야기도 사제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 다음은 낙송의 손자(洛誦之孫)입니다. 낙송(洛誦)은 글을 되풀이해 읽는 것을 뜻합니다. 말로 도가 전수되는 것을 이르지 {...} 의미합니다. 《莊子》 같은 글로 도가 전달된 것을 이르는 말일 것입니다. 제 경우에도 '副墨之子' 덕분에 {...}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이 우화 속에서, 여우가 복량의(卜梁倚)라는 사람에게 {...} 대해 잊는 것(外天下)입니다. 여기서 '外'는 도외시하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만물과 현상들을 모두 잊는 것(外物)입니다. 그 다음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즉 자기 자신을 온전히 {...} 도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견독(見獨)입니다. '獨'은 '一'로 봅니다. 절대적인 경지죠. 그래서 도를 깨닫게 된 것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시점에서 복량의는 이미 도를 깨달았습니다. 이 이후 {...} 초월했다고 보지만, 저는 {...} 마지막으로 복량의는 불사불생의 경지에 오릅니다.(入於不死不生)

 

불사불생의 경지란 이론 부분에서 도를 따라 만물의 대정(大情)을 따르는 경지입니다. 다만 {...} 얽매이지 않고, 죽는 것을 사는 것과 같게 여기며, 떠나려는 것을 붙잡지 않고, 오는 것을 {...} 섥혀서 대정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경지를 장자는 영녕(攖寧)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 않겠습니다. 도교도들이 이 '수행 단계'를 어떻게 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좋아했을 {...} 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內篇》에서 도는 만물을 변화시키는(化) 주체로서 항상 {...} 할 수 있겠습니다. 생, 사도 모두 변화에 포함됩니다. 장자는 「大宗師」에서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려(子犁), 자래(子來) 네 친구의 이야기, 그리고 자상호(子桑戶), 맹자반(孟子反), 자금장(子琴張) 세 친구의 이야기, 맹손재(孟孫才) 이야기, 허유와 의이자(意而子) 이야기, 그리고 자여(子輿)와 자상(子桑) 두 친구 이야기로 드러냅니다. 특히 자사, 자여, 자려, 자래 이야기에서 이 점이 극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자여와 자래는 병에 걸려서, 자여는 「人間世」의 지리소(支離疏)처럼 곱추가 되고, 자래는 거의 죽게 되죠. 하지만 자여와 자래는 그 모든 {...} '造物'이라고 표현되고, '造化'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만물을 변화시키는 도의 작용이 훨씬 잘 부각되죠. 사람이 도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래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만약 대야(大冶), 즉 대장장이가 {...} 하겠다고 한다면, 대장장이는 쇳덩이가 자신에게 {...} 유독 사람이 자기 자신은 다음 생에도 사람이 되겠다고 하면, 꼴값 떠는 쇳덩이와 다를 게 무엇이겠냐는 말입니다. 또, 자식은 {...}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주제는 이미 이론 부분에서 충분히 {...} 자공(子貢)을 보내 장례를 돕게 했는데, 자공은 이 꼴을 보고 예(禮)가 아니라고 펄쩍 뛰죠. 맹손재는 어머니가 죽었는데, 곡을 하면서 울지도 않았고, 장례를 치르면서도 서러워하지 않았으며, 마음에 슬픈 기색도 없었다고 {...} 매몰되었더라도 언젠가 다시 도가 그 속박을 풀어 줄 수도 있다고 하는 점에서 '化'한다는 {...} 사람이었는데, 자기 처지가 곤궁한 것을 비관하기는 하지만, 결국 도의 뜻이라고 받아들이죠.

 

도로써 일어난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자상호, 맹자반, 자금장 이야기에서 공자는 이들을 기인(畸人), 즉 유별난 {...} 소인(小人)이라고 하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론 부분에서 장자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 감안하면, 그래도 사람의 길을 따르는 것 보다 하늘의 길을 따르는 것이 모든 것이 도로 {...}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大宗師」의 우화 부분에서 장자는 변화에 {...} 비판하기도 합니다. 자상호, 맹자반, 자금장 이야기에서 자공이 이 세 사람을 비판했던 근거가 바로 '禮'였습니다. 안회 {...} 이상하다고요. 예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안회도 '禮'에 의거해서 맹손재를 {...} 인의와 시비를 따지도록 재단당했다고 의이자를 힐난했습니다.

 

사실 장자는 인, 의, 예, 악 자체에 대해 세세하게 {...} 않죠. 다만 장자는 인, 의, 예, 악이라는 것이 사람이 만들어낸 규칙일 뿐, 도가 내린 본질에 합치되지 않기 때문에, 인, 의, 예, 악을 따르는 행위가 도를 따르는 일과 배치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장자에게는 도를 {...} 사실 당대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 인, 의, 예, 악이었기 {...} 충서(忠恕) 같은 관념들이 당대 세상에 적합하기도 했기 때문에 널리 퍼져 있었거든요. 《孟子》 「梁惠王」에서 혜왕이 맹자에게 오십 보나 백 보나 똑같다고 한 소리 듣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혜왕이 아무리 언짢더라도 {...} 인의였습니다. 결국 도를 따르기 위한 첫 걸음은 인, 의, 예, 악을 극복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자는 자공의 {...} 생각하면 인간 세상의 테두리고, 좀 더 멀리 가면 하늘의 길과 인간의 길을 경계라고 할 수 있겠죠. 자상호, 맹자반, 자금장은 '方之外'에서 {...} 무위를 업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저처럼 백수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도의 작용을 {...} 사람들의 세상을 의미하고, '方之外'는 속박을 모두 극복하고 도를 따르게 된 {...} 자공과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하죠.

 

궁극적으로는 인, 의, 예, 악을 극복하는 {...} 것 같습니다. 장자는 공자의 말을 빌려, 조적(造適) 보다는 의소(獻笑)가 낫고, 의소 보다는 안배(安排)가 낫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배하고 거화(去化)하면 마침내 요천(寥天)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조적, {...} 이견이 많습니다. 하지만 글의 전체 문맥을 볼 때, 점차 도에 가까워지는 모습이라는 원칙에 따라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造'를 {...} 됩니다. '獻笑'의 경우, '獻'은 바치다는 뜻이 아니라 위엄 {...} 통하는 척하는 것 보다는, 위엄 있게 웃어 넘기는 게 낫다는 말이 됩니다. '安排'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으나, '安'은 편안하다, 즐겁다는 말로 보고, '排'는 '通'과 같이 보면, 기쁘게 도와 통한다는 말이 됩니다. 의소 보다 {...} 말할 것도 없이 도가 {...} 도(道)와 같죠.

 

장자는 도를 깨달은 경지를 좌망(坐忘)이라고도 {...} 들어와 있던 것도 아니고, 선불교라는 개념도 훨씬 나중에 생겼습니다. '坐'에는 '遂'처럼 마침내, 드디어라는 {...} 수 차례 공자에게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좌망하였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坐忘'의 {...} 신체 작용도 내려 놓고(墮肢體), 감각 작용도 내려 놓고(黜聰明), 육신을 멀리하고(離形), 식견도 내려 놓고는(去知) 천지 만물과 {...} 같은 감정으로 만물을 분별하게 되지 않을 것이고, 도의 뜻에 따라 변해가면 {...} 없에 됩니다. 결국 좌망은 도를 깨달은 경지이죠. 앞에서 요천(寥天)에 든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좌망이 특별한 경지처럼 보이지만, 사실 {...} 다수 나왔었죠. 「大宗師」 외의 다른 편들에도 전반적으로 이런 뉘앙스의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좌망만 따로 떼서 '분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도와 통하고, 도를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은 동일하고, 그 양태가 {...} 극복하고, 도의 흐름을 {...} 만물과 통하는 것, 이 점이 중요합니다.

 

 

 

끝으로 「大宗師」를 마치며, 여담을 하나 해 볼까 합니다. 장자가 {...} 중 호불해, 무광, 백이, 숙제, 서여는 《韓非子》 「說疑」에도 나옵니다. 「說疑」에서 한비자는 나라를 망친 {...} 저렇게 해선 안 된다고 예를 듭니다. 호불해는 호불계(狐不稽)라고 나옵니다. 이 중 호불계와 무광, 백이와 {...}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선양도 물리쳐 버렸기 때문에, 이런 {...} 비판당한 초점이 좀 다릅니다. 한비자는 서여가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고 군주를 설복시키려 했기 때문에 {...} 언제나 군주의 입장에서 신하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초점을 두고 글을 썼습니다. 신하를 통제할 방법이라는 것이 바로 상(賞)과 벌(罰)이죠. 따라서 한비자에게 좋은 신하란, 상과 벌로 잘 통제되면서 자기 직무를 잘 맡아 하는 {...} 비판했지만, 한비자는 상, 벌로 통제되지 않고, 신하의 본분을 져 버리면서 군주를 {...} 때문에 소개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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