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맺음말

2021. 9. 9. 19:33장자 내편 이야기 - 완결/원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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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편》 번역에는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이민수(李民樹)의 2007년 번역, 현암사에서 나온 안동림(安東林)의 2019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내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1년 9월 1일 19시 33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내편》을 지금까지 번역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이것저것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다소 두서가 없을지라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내편》을 읽기 전에 먼저 글을 하나 썼었습니다. 입문용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 글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수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처음 썼을 때부터 정해 두었던 개요와 초점은 지금도 대체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내편》 안에 있는 우화들이 장자가 의도한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왜곡되어서 사람들에게 퍼져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었습니다. 장자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만이 비유를 자유자재로 들며 논지를 전개할 수 있는 법이죠. 하지만 그 뜻이 심오하고, 또 여간해서는 장자가 직접 사람들에게 자기 뜻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장자가 들었던 '비유'들이 사람들이 《내편》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뭐, 같은 말을 보더라도 사람들이 이해하는 정도는 모두 다르고, 그 점이 당사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제가 할 말이 없긴 합니다. 하지만 어쨌건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니, 저는 《내편》을 번역하면서 우화들이 각 편의 주제, 의미, 논지와 잘 맞아 들어가도록 최대한 번역했습니다. 사실 이번에 직접 번역해 나가면서 저 스스로도 생각을 고친 점이 많습니다. 사실 처음에 '읽기 전에'라는 글을 쓰고, 이후에 그 글을 수차례 수정했던 것도 《장자》에 대한 제 생각이 크게 몇 반 바뀌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이 맺음말을 쓰기 직전에도 한 번 수정했습니다. 부끄럽네요.

 

또 저는 그 글에서 《내편》을 보는 관점을 두 가지로 나누었었습니다. 하나는 정치 철학서로 보는 관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양서로 보는 관점이었습니다. 두 관점 모두 타당합니다. 어느 하나만 맞지는 않습니다. 둘 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데 둘 중 하나를 배제하고 보기는 좀 그렇습니다. '인간이 먼저 되고,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말은 선진 동양 철학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강령입니다. 유학도 그랬고, 묵가도 그랬고, 도가도 그랬습니다. '인간이 되는 방법'은 다들 다르지만, 수양 또는 수행 이후에 출사해야 제대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모든 학파가 동의합니다. 장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자는 먼저 도를 깨우친 다음, 즉 지인(至人)이 된 다음 세상 만물이 도에게서 받은 본질을 되찾아 주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정치적 목표입니다. 그런데 장자식대로 정치를 이루려면 먼저 도를 깨우쳐야 합니다. 반대로 도를 깨우치고 또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만물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결국 《장자》, 특히 《내편》을 정치 철학서로만 볼 수도 없고, 무턱대고 수양서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물론 선진 도가는 명칭부터 '先秦'인 만큼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을 때 이미 사멸했습니다. 장자의 정치 이상은 결국 세상에 이루어지지 못했죠. 아쉽습니다.

 

서한 초엽에 잠시 황로학이 유행했지만, 무제 이후로부터는 다시 비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서 수은을 마시고 어린애 오줌으로 눈을 씻는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 시기부터의 '도교'를 '도가'라고 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진 시대 현학자들이 이야기했던 '형이상학'을 선진 도가와 같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현학을 '도학'이 아니라 '현학'이라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곽상(郭象)이 물론 여러 의미에서 《장자》 연구에 족적을 크게 남기기는 했지만, 곽상이 남긴 주석 중에 실질적으로 제가 《내편》을 번역하면서 도움이 되었던 것이 있냐고 묻는다면 저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도가는 사멸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내편》을 번역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기존 번역문 중에 손에 꼽을 만큼 탁월한 번역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겠습니다. 잡다하게 이곳저곳 필요에 따라 뒤져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로 참고한 책들은 있었습니다. 먼저 저는 안동림(安東林)이 번역하고 현암사에서 출판한 《장자》를 참고했습니다. 완역입니다.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의 번역도 참고했습니다.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왔습니다. 책으로도 있고, 인터넷으로도 그냥 열람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민수(李民樹)의 번역을 참고했습니다. 혜원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이민수의 번역은 생각 보다 좋습니다. 다른 두 번역에 비해서 난해한 부분을 탁월하게 풀어낸 측면이 있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펴 보았을 때 생각이 뚫리는 경우가 좀 있었거든요. 다만 이민수의 경우, 주석이 적고, 그리고 무엇 보다 이설들이 있는 경우 이를 주석에 거의 설명해 두지 않았습니다. 좀 옛날 투라는 것도 감안해야 하겠습니다.

 

안동림의 번역은 세 번역 중 가장 탁월합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가장 좋기도 하고, 번역문 자체도 현대적으로 구성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번역자인 안동림 본인은 지금은 살아 있지 않지만요. 참고한 고금의 주석서도 36개나 됩니다. 만약 《장자》를 처음,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 있게 파고 들고 계신 분들에게는 꼭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안동림 번역의 경우, 간혹 원문에는 없지만 문맥의 이해를 위해 없는 말을 괄호를 해서 넣은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이런 방식으로 번역을 진행했습니다. 말을 넣지 않자니 너무 난해하고, 넣자니 숨은 의미를 찾아야 하고, 아주 고역이었습니다. 다만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안동림 번역본의 문장들이 이민수 번역본의 문장과 겹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제가 지금 표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이민수의 본을 저본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색인이 붙어 있습니다. 《내편》만 해도 상당히 길기 때문에 어디에 무슨 내용이 나오는지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가 너무 힘듭니다. 색인 덕분에 한 층 편하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있으니까 검색하면 그만이기도 하죠.

 

안병주, 전호근의 번역은 장점과 단점이 아주 뚜렷합니다. 주석을 굉장히 폭넓게 모아 두었습니다. 이설들을 소개한 것도 가장 다양합니다. 물론 안동림 번역과 인용한 주석이 겹치기도 하지만, 겹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주석들을 비교하면서 읽고 싶은 분들은 꼭 안병주와 전호근의 번역을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그리고 또 큰 장점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올라가 있거든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만든 동양고전종합DB에 접속하시면 어디서든, 휴대폰으로든 컴퓨터로든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료입니다. 전산화되어 있기 때문에 컴퓨터로 보면서 작업하기 좋죠. 그런데, 단점이 있습니다. 비문이 너무 많습니다. 정상적인 문장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번역문이 현학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번역을 보다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왜 이렇게 비비 꼬아서 설명을 해 둔 건지, 원문에는 이런 말 없는데 왜 번역을 이렇게 현학적으로 해 둔 것인지 의심이 드는 경우가 좀 있었습니다.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안동림 번역본이 가장 좋습니다. 물론 안동림 번역이라고 완벽하고 무결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번역문의 질, 참고 자료의 질 등을 판단할 때 독보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 가지 번역문 전부 한계가 뚜렷합니다. 위에서 기술한 장단점은 번역 내용이 아니라 번역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번역 내용으로 따지면 사실 셋 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번역할 때 가장 초점을 맞췄던 점은 글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옮기는 것이지만, 문맥 속에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장자》, 특히 《내편》은 주제가 일관된 글이 분명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저곳으로 주제를 옮기면서 횡설수설거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뜯어 보면 주제가 아주 명백하고, 일관되며, 분명합니다. 저는 적어도 《내편》은 장자 본인이 쓴 것이 확실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 정도로 뚜렷합니다. 글이 일관된다는 전제가 분명하다면, 우리는 글의 내용도 그 일관된 주제에 맞춰서 봐야 합니다. 시덥잖고 하찮아 보이는 용어 하나라도 주제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도록 보아야 합니다. 우화의 주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우화만 주제가 글의 다른 부분들에 비해서 붕 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정말 붕 떠 있다면 착간이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글이 유입되고도 볼 수 있지만, 정말 그렇게 볼 증거나 정황이 없다면, 전후에 맞게 해석해 나가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우화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도 됩니다.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이 학자일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번역을 하는 학자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 겁니다. 장황하게 현학적인 말을 늘어 놓는다고 맞는 게 틀리게 될 수는 없고, 틀린 게 맞게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학문입니다. 동양 고전 철학 번역서에는 항상 이런 문제가 수반됩니다. 한문 번역투 같은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에 불과합니다. 어쨌건 제일 중요한 점은 내용을 왜곡 없이 잘 전달할 수 있느냐입니다. 제가 참고한 세 번역들이 모두 그럴 만한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가장 나은 안동림의 번역도 내용을 분석한다는 측면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번역이 아니라 논문을 쓰는 학자들이 그 맥락을 잘 고려하느냐,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학자들은 현학적으로 개념을 비비 꼬기를 잘하지, 사실 원전의 내용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적어도 제 번역에는 이런 문제가 없길 바랬습니다.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장자를 만나고 온 것은 아닙니다. 만났다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겠죠. 하지만 《장자》 안에 나오는 모든 글들을 전체 주제에 정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적어도 노력은 했습니다. 각 편에 대해 해설문을 쓰면서 생각을 몇 번이고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해석을 했는데, 나중에 다른 편을 읽다가, 혹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나서 해석이 바뀐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다 보니 오늘 마지막으로 「응제왕」에 대한 해설문을 쓰면서 모든 편들이 정합적으로 잘 맞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럼 된 것 같습니다. 나중에 또 뭔가 바뀔 수 있겠지만, 일단은 일단락지을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양생주」에서 포정이 고기를 내려 두기를 흙을 땅에 털듯이 한 것처럼, 저도 그런 기분이 좀 듭니다.

 

 

 

가장 번역하기 힘들었던 편은 「제물론」이었습니다. 「제물론」에서 '만물은 도 앞에 하나로 통한다'라는 장자의 핵심적인 원칙이 제시됩니다. 그런데 그 원칙이 비교적 구상적으로 구체화되기 전까지는 장자가 그 말을 직접 하려 들지 않습니다. 유가와 묵가, 그리고 혜자와 공손룡자를 비판하는데, 그 비판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물론」을 번역한 이후에 한참 지나서야 대대적으로 번역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제물론」과 「양생주」를 거치면서 장자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대체적으로 '成心'이 잡히자 다른 편들도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대종사」가 또 어려웠지만 「제물론」 만큼 어렵진 않았네요.

 

「양생주」의 둔천지형(遁天之刑)과 제지현해(帝之縣解)도 꽤 어려웠습니다. 이설들이 많았는데, 이설 중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로 바뀌었거든요. 하지만 둔천지형과 제지현해 역시 《내편》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에 한 번 바람을 타고 나니 거침 없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종사」에서 도가 전달되는 과정을 이야기한 부분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의시에서 시작해서 여러 단계를 거쳐 '지금'까지 도가 이어졌는데, 그 단계에 대한 기존 해석과 번역이 저는 되게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저 나름대로 그 과정을 '말이 되도록' 재구성해 봤는데, 지금 생각해도 제가 한 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사실 기존 해석은 좀 터무니도 없고, 너무 현학적이라서 싫었습니다. 제 '成見'이군요.

 

번역하면서 또 크게 느꼈던 문제점은 다름이 아니라 심재, 좌망 같은 '단어 개념'의 입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심재와 좌망이 뜻하는 것이 물론 도에 가깝기는 하지만, 사실 좌망은 '仁義禮樂'을 잊었다는 말이고, 심재는 마음을 비워서 자기 주관을 배제하고는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게 둔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용어들은 많이 나옵니다. 좌치, 익다, 재인, 천육, 천사 뭐 끝도 없습니다. 장자가 어떤 개념을 '두 글자' 단어로 표현하기를 좋아했거든요. 단어가 있는 것은 좋은데, 그런데 도교도들이 이런 말들에 '수행적 의미'를 붙이면서 《장자》 본문의 뜻에 비해 좀 필요 이상으로 과대 평가된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좌망이 아무리 중요해봤자 좌망이지, '좌망론'처럼 좌망에 대해 '論'이 따로 붙을 만큼 중요하진 않거든요. 좌망은 그냥 인의예악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 경지를 뜻합니다. 도에 가깝죠. 하지만 중요하다면 도가 중요하지, 도를 설명하기 위해 가지고 온 부차적 개념을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거든요.

 

 

 

참 긴 시간이었습니다. 《내편》이 끝났으니, 저는 이제 원래 하던 《순자》로 돌아갈까 합니다. 첫 편부터 다시 고쳐야 할 것 같긴 하지만요. 아마 《장자》 보다는 쉬울 것 같습니다. 《내편》을 공부하는 분들이 제 번역에 도움을 많이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내편》도 이후에 필요하다면 지속적으로 수정해 나갈까 합니다. 《외편》이나 《잡편》은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언젠가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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