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 5 - 덕충부 - 해설

2021. 8. 10. 15:59장자 내편 이야기 - 완결/원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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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편》 번역에는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이민수(李民樹)의 2007년 번역, 현암사에서 나온 안동림(安東林)의 2019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내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1년 7월 27일 11시 54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원문과 번역에 대해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91

 

장자 내편 - 5 - 덕충부 - 1 - 중니와 상계가 왕태의 덕을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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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92

 

장자 내편 - 5 - 덕충부 - 2 - 신도가가 자산을 꾸짖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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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93

 

장자 내편 - 5 - 덕충부 - 3 - 숙산무지와 노담이 중니를 논하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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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94

 

장자 내편 - 5 - 덕충부 - 4 - 노나라 애공과 중니가 애태타의 덕을 논하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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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95

 

장자 내편 - 5 - 덕충부 - 5 - 성인은 덕충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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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96

 

장자 내편 - 5 - 덕충부 - 6 - 장자와 혜자가 사람의 정에 대해 논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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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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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주석> 장자 내편 - 5 - 덕충부 - 6 - 장자와 혜자가 사람의 정에 대해 논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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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책으로 출판되어 교보문고를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전문을 다 읽으시려면 책을 구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莊子內篇孃注》, 李相珉, 책과세계)

 

**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내용은, 번역문 전체 및 주석 일부입니다. 그러나 번역문과 주석 모두 중간 부분을 {...}라는 표시로 비워 뒀습니다. 책을 구입하기 전 열람할 수 있는 견본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교보문고와 리디북스 두 개 서점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 가능한 링크는 아래에 기재해 두었습니다.

 

1.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3332426(양장본, 품절)

 

2.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9069155(문고판, 상권 및 하권으로 분절, 세트로 판매, 재고 있음)

 

 

3. 전자책

 

3-1. 교보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405

(전자책, 교보문고, 합본)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1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6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3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63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2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7

(전자책, 교보문고, 편별로 분권)

 

 

3-2. 리디북스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8?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1

(전자책, 리디북스, 합본)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1?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4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2?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5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3?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6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4?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7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5?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3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6?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8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7?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2

(전자책, 리디북스, 편별로 분리)

 

 

 

 

 

「逍遙遊」에서 시작해 「齊物論」, 「養生主」, 「人間世」를 순서 대로 읽어 보면, 내용은 복잡하지만 나름 대로 내용의 경향성이 뚜렷하게 보인다는 점을 느낄 수 {...} 사실 제가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일부러 드러내 왔던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봅시다. 마음도 {...}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바로 도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에 장자는 「德充符」에서 도를 이루었으면서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왕태(王駘), 신도가(申徒嘉), 숙산무지(叔山無趾), 애태타(哀駘它),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 옹앙대영(甕㼜大癭)의 여섯 사람이 {...} 비유한 것은 분명합니다. 장자는 도를 이룬 사람을 '至人', '聖人', '眞人'으로 표현하는데, 본문에는 '至人'이라는 {...} 상기하였듯 「德充符」를 저술한 의도를 고려할 때, 넓게 봐서 여섯 사람을 모두 도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생기지를 {...} 사람입니다. 죄를 지어서 발이 잘렸으면,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모두 싫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곤장 몇 대 {...} 너무 못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애태타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라고 했습니다. 인기지리무신은 절름발이에, 언청이에, 지리멸렬하게 {...} 감복시키고, 설복시키며, 세상 누구든 이 사람들을 흠모해서 존중하고, 존경하려 듭니다. 노나라의 애공은 애태타에게 국정을 맡기려고까지 했습니다. 왕태를 {...} 이야기하기까지 하죠. 죄인이라서 발이 없기도 하고, 못생겨서 사람들이 놀라기까지 하는데 모두들 사람들을 끌어 당기는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도를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도를 깨달았다는 말은 물론 {...}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不與) 오히려 세상의 변천을 명(命)으로써 받아들이고, 도의 뜻을(其宗) 지켜 나갑니다. 그리고 만물이 {...} 잃지 않고 만물과 어우러지기에, 이들은 만물의 본 뜻을 온전히 보존하는 거울, 즉 귀감이 됩니다. 그래서 바로 {...} 점이 '존중의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인기의 비결'은 아닙니다. '존중의 비결'입니다. 다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점이 「德充符」의 핵심 {...} 왕태와 애태타의 우화가 가장 으뜸입니다. 길고, 상세하고, 「德充符」의 핵심 주제들이 다른 말로 교차해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자가 {...} 매몰돼서 주제를 찾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이니까요. 신도가와 {...}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부분에서는 외형과 본질에 대해 장자가 직접 독백으로 이 부분의 주제를 제시해 버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핵심은 왕태와 애태타의 우화에 들어 있고, 이 점까지 장자가 직접 해설해 {...} 통해 만물이 하나로 통한다고 {...} 실천론이 '실제적 세상'에서 종합된 결과가 「人間世」라면, 「德充符」는 이론과 실천론이 도를 닦는 관점에서 종합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착안해 볼 만한 점은 「德充符」 6인방의 '貌'와 '形', 즉 외모와 외형입니다. 왕태와 신도가, 숙산무지는 올자(兀者)입니다. 죄를 짓고 {...} 없고, 옹앙대영은 달고 있는 혹이 항아리 만큼 크다고 합니다. 무언가 하나씩 결격 사유가 있습니다. 장자는 「德充符」의 주제로 {...} 부분에 있는 장자와 혜자의 대화에서는 '形'과 '貌'로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장자가 일부러 도를 {...} 서로 무관하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이 점은 단순하면서도 {...} 독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장자는 외형과 상대되는 관념을 {...} 있게 하는 것, 즉 형체 이전에 있는 것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本'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문맥을 고려할 때 '使其形者'는 '本'과 같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사자와 월자(刖者) 이야기에서는 본래 {...} 유추하면 '존중받기 위한 노력', 혹은 '존중받는 것'이라는 관념이 '形'과 상대되게 사용되었으므로, 이를 '本'과 등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미 돼지는 죽었지만, 새끼 돼지는 어미가 죽은 줄을 모르고 젖을 빱니다. 그러다가 어미가 {...} 월자는 몸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장례에 삽을 쓰지 않고, 신발을 아끼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形'이 훼손되었고, 그 때문에 '本'도 돌보지 않는 예시입니다. 시녀는 천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르고, 귀를 뚫지 {...} 도를 지켜 나갑니다. '形'은 온전하지 않지만, '本'은 온전합니다.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미 돼지 온전 훼손
전사자, 월자  훼손 훼손
후궁, 신혼 관리 온전 온전
애태타 훼손 온전

 

어미 돼지에서 애태타에 이르기까지, 장자는 이처럼 '形'과 '本'이 온전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경우를 나누어 예시를 들었습니다. 장자는 {...} 올자이기 때문에 또 무시했습니다. 상계는 왕태가 올자에다가 하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사람들이 왜 저렇게 모이나 의심했고, 애공은 애태타가 명망은 있는데 추하다고 해서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왕태, 신도가, 숙산무지, {...} 나중에 노담(老聃), 즉 노자와 이야기를 하면서 공자가 '形'과 '名', 즉 외형과 명성에 얽매여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지인(至人), 즉 도를 깨달은 사람에게 명성 같은 것은 족쇄(桎梏)일 뿐인데, 공자는 오히려 족쇄를 영예로 {...} 풀어 줄 수가 없다고 힐난하죠. 장자는 이런 점을 보고, 사람들이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말이 바로 성망(誠忘)입니다. '誠'은 부사어로, '정말', '진짜', '진실로'라는 말입니다.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다는 탄식 섞인 말인 셈입니다.

 

잊어야 할 것이라는 것은 {...} 것이고, 남을 해치는 흉기입니다. 이에 대해선 여러 차례 나왔었습니다. '約'은 사람을 속박하는 사회적 규범입니다. '德'은 사람들끼리 교제하는 데 사용되는 사회적 덕목입니다. 「德充符」의 '德'과는 글자는 같지만 의미는 {...} 기술, 기교입니다. 여기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라는 맥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인들은 사람들이 바라는 명예, 성취를 바라지 않기에 지(知), 약(約), 덕(德), 공(工)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살기 {...} 살아가야 한다고 「人間世」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럼 성인들은 지(知), 약(約), 덕(德), 공(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성인들은 {...} 내려 준 바가 있으니 이에 의지해 살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외형과 지(知), 약(約), 덕(德), 공(工)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本'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 봅시다. 애태타는 '形'은 {...} 경우에는 '本'을 하늘에게서 내려 받은 본질, 본성, 본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애태타는 도에게서 받은 자기 자신을 잘 보존한 사람이 됩니다. 장자는 이것을 '才全'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才'는 재주, 재능으로 번역하지만, 문맥상 '바탕', '본바탕'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고 {...} 문상 이야기를 할 때도 살고 죽는 문제를 올 때가 되어서 왔고, 갈 때가 되어서 갔을 뿐이라고 하였고, 이에 사사롭게 즐겁거나 슬프다는 감정을 내비춰서는 안 된다고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둔천지형(遁天之刑)이라고 해서 {...} 본바탕을 져 버린다는 것은, 도에게서 받은 바를 져 버리는 것이고, 이는 곧 도를 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才全'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애태타 뿐만 아니라 왕태 이야기에서도 이 기조는 유지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잘 지키게 되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세상이 변천해 가는 것에 흔들리지 {...} 세상사, 변천하는 세상사를 의미합니다. '懼'는 원래 두려워한다는 말이지만, 문맥상 흔들리다, 휩쓸리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 것으로 드러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변화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의 본바탕을 잘 지키는 것의 다음 단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세상이 변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장자는 일체의 현상적 변화를 모두 '變'으로 묶는 것 같습니다. 일단 {...} 않습니다. 「養生主」의 공문헌(公文軒)과 우사(右師)를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우사는 외발이지만,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만 하고 {...} 잘린 것을 원망하지 않고 하늘의 뜻으로 의연하게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하지만 인위적인 현상 모두가 다 받아들여야 하는 '變'이나 '實'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유가와 {...} 세상의 변천을 도가 내린 것으로써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취해야 할 자세라고 장자가 주장했다는 점에 {...} 긍정할 수 있습니다.

 

변천이 무엇인지 이해했다면, 그 다음으로는 {...}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으로 곧잘 드러납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하고 있지만, 변화에 휩쓸리는 것, 즉 감정을 {...} 자기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장자의 원칙들을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왕태 이야기에서 장자는 휩쓸리지 않는 마음을 보고 상심(常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자기 자신은 도에게서 {...} 원칙을 의미합니다.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은 「德充符」 마지막에 있는 장자와 혜자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장자와 혜자는 사람의 '情', 즉 감정에 대해 대화를 나눕니다. 혜자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情'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장자는 자기가 좋아하고 {...} 태어났다고 기뻐하고, 죽었다고 슬퍼하는 것이 바로 '傷'에 해당하는 행위인 셈입니다. 어쩌면 「逍遙遊」에서 '至人無己'라고 했던 {...} 「養生主」와 「德充符」를 고려할 때 '己'를 '情'이라고 해도 타당할 것 같습니다. 신도가는 '知不可柰何而安之若命唯有德者能之'라고 하여, 자기가 {...} 보면 뼈가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제 세상의 변천에 {...}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서시와 문둥이가 같다고 한 비유가 유명합니다. 그런데 변화한다고 한들, 변천하는 세상을 자기 자신과 온전히 별개의 것으로 구별하고, 대상화한다면, 「齊物論」에서 장자가 주장했던 원칙과는 정합이 {...} 양태를 대상화하고, 구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만물은 격류처럼 변천하는데, 그 격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 흘러가는 현상 그 {...} 존재하듯, 세상 만물이 변해 가더라도 만물에 내재한 본질, 즉 도에게서 내려 받은 본질은 존재할 테니까요. 애태타 이야기에서 재전(才全)에 대해 설명하면서 장자는 만물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혹은 만물과 {...} 도로써 하나로 통할 것이고, 이를 드러내어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도를 닦는 사람이 걸어야 {...} 분명히 통하죠?

 

 

 

이 모든 과정을 이룬 사람을 장자는 지인(至人)이나 성인(聖人)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인이나 성인이 된다고 하늘에서 감사패가 {...} 보전하고(保身), 온전하게 자기 삶을 누리며(全生), 부모가 천수를 누리도록 돕고(養親), 자기 자신도 천수를 다하는 것(盡年)으로 명백하게 제시했습니다. 결국 제일 중요한 목표는 자기 본성을 보전하고, 천수를 누리는 {...} 하더라도 명성이 드러날 만큼 하지 말고, 악행을 하더라도 벌을 받지 않을 만큼만 하라고 했죠. 「德充符」에서는 이 모든 것이 {...}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관념은 갖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성인은 명망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기에 미미해 보이지만, 하늘이 내려 준 {...}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지인에게는 왜 {...} 흠모한 남녀가 몰려 드는 것이 끝이 없었다고 합니다. 도를 이루면 없던 매력이 생기는 것일까요? 장자는 이 점을 {...} 본질을 보지 못하고, 또 본인들 스스로도 만물처럼 변해 버리지만 지인들은 그렇지 않죠. 다시 말해 지인은 도에게서 받은 본성을 잘 {...} 점을 '德不形'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애태타는 덕을 지니고 있고, 그 덕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고 있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애태타가 덕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더라도, 덕은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을 감화시켜서, 그 {...} 물은 항상 수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은 '수평성'을 안으로 간직하고 있지만, 일부러 찰랑거려서 주변에다가 '나는 수평성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으스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 누구나 잔잔한 {...} 아니라 '존중의 비결'이라고 한 까닭이 이것입니다. 지인(至人)이 자신을 굳이 {...} 존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德充符」에서 장자는 「逍遙遊」에서 「人間世」까지의 이론, 실천론, 처세술을 종합하여 도를 이루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다시 {...} 사이에 섞여 살며, 홀로 도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사마천은 《史記》 「老子韓非列傳」에서 장자가 송나라의 칠원(漆園)에서 관리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장자는 무책임한 은둔거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론을 삶을 통해 {...}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장자가 지인이나 성인을 묘사한 것을 보면 다소 심심하게 {...} 제맛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끝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德'은 '知', '約', '德', '工'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德充符」 안에서도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애태타를 묘사할 때는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죠. '德'의 의미가 이렇게 오락가락한다는 점에 대해 짧게 생각해 봅시다.

 

도(道)와 덕(德)은 도가의 양대 덕목입니다. 《道德經》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노자의 가르침도 형식적으로 요약하자면 도와 덕에 관한 {...} '道'를 밀어 내고 중심 위치를 차지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德'이라는 말은 아주 미묘합니다. 《內篇》에서 '道'는 일관되게 세상의 근본 원리이자 {...} 말하면, 《內篇》에서 덕은 항상 도에 대해 부차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때론 도를 보조하기도 하고, 부연하기도 하지만, 절대 {...} 이모저모를 구별하고 분별하려 든다고 하면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면 「德充符」에서도 {...} 쓰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점을 더 살펴 보기 위해 '知'에 대해 생각해 {...} 덕목으로 간주하고 비판합니다. 「養生主」 첫 부분에서 지식을 쫓는 것이 위태롭다고 하는 말이나, 「人間世」에서 '知'를 남을 해치는 흉기라고 한 점, 「齊物論」에서 유가와 묵가를 비판할 때 항상 '知'가 비판의 초점으로 {...} 긍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知'가 중립적,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그 의미가 일반적인 경우로 한정됩니다. 반대로 {...} '知'가 비판적으로 {...} 것에 불과할까요?

 

'道'는 어떨까요? 공자나 맹자는 '天道'나 '道' 같은 말을 가끔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論語》 「里人」에는 '朝聞道夕死可矣'라는 말이 나오고, 《孟子》 「盡心 下」에는 '聖人之於天道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두 구문에서 '天道'나 '道'는 명백하게 {...} 중에, '不緣道'라는 말에서만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죠. 이 경우에는 '道'가 세속적인 사람들이 따르는 도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 재정의하고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知'가 긍정적으로도 쓰이고, 부정적으로도 쓰이는 것은 장자가 '知'를 순전히 자기 이론의 '주요 개념'으로 생각하지 {...} 이론의 '주요 개념'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德'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장자에게는 도가 주요 개념일 뿐, 덕은 주요 개념이 아닙니다. 따라서 덕은 도에 비해 한참 부차적인 역할밖에 하지 {...} 역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문장을 번역해야 할 때 보다 두드러져 보입니다. 단어의 의미나 어감이 수시로 바뀌는데, 고대 한문에서는 글자 몇 {...} 이러하다고 보시기 보다, 문맥에 따라 그 {...} 수 있을 길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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