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 3 - 양생주 - 해설

2021. 7. 27. 08:33장자 내편 이야기 - 완결/원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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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편》 번역에는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이민수(李民樹)의 2007년 번역, 현암사에서 나온 안동림(安東林)의 2019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내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0년 6월 10일 4시 49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원문과 번역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45

 

장자 내편 - 3 - 양생주 - 1 - 양생이란 무엇인가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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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77

 

장자 내편 - 3 - 양생주 - 2 - 포정이 소를 잡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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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78

 

장자 내편 - 3 - 양생주 - 3 - 우사를 외발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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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79

 

장자 내편 - 3 - 양생주 - 4 - 꿩은 가축이 되고 싶지 않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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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80

 

장자 내편 - 3 - 양생주 - 5 - 진일이 노담을 문상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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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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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30

 

<하단 주석> 장자 내편 - 3 - 양생주 - 2 - 포정이 소를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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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33

 

<하단 주석> 장자 내편 - 3 - 양생주 - 5 - 진일이 노담을 문상하다(끝)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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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책으로 출판되어 교보문고를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전문을 다 읽으시려면 책을 구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莊子內篇孃注》, 李相珉, 책과세계)

 

**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내용은, 번역문 전체 및 주석 일부입니다. 그러나 번역문과 주석 모두 중간 부분을 {...}라는 표시로 비워 뒀습니다. 책을 구입하기 전 열람할 수 있는 견본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교보문고와 리디북스 두 개 서점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 가능한 링크는 아래에 기재해 두었습니다.

 

1.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3332426(양장본, 품절)

 

2.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9069155(문고판, 상권 및 하권으로 분절, 세트로 판매, 재고 있음)

 

 

3. 전자책

 

3-1. 교보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405

(전자책, 교보문고, 합본)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1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6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3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63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2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7

(전자책, 교보문고, 편별로 분권)

 

 

3-2. 리디북스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8?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1

(전자책, 리디북스, 합본)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1?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4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2?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5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3?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6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4?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7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5?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3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6?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8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7?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2

(전자책, 리디북스, 편별로 분리)

 

 

 

 

 

'養生'이라는 말은 삶을 기른다, 풍족하게 산다, 즉 잘 산다는 말입니다. 2000년대에 {...} 양생이 무엇인지, 즉 '올바르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그 뒤에는 짧은 우화들을 통해 그 의견을 뒷받침하고 {...} 기술한 글이라고 할 수 {...} 드러나는 것이죠.

 

상기한 것처럼 장자는 글 첫 {...} 하는데, 장자의 태도는 이와 아주 배치됩니다. '知'는 분명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를 상징하는 말일 것입니다. 장자는 「齊物論」에서도 유가와 묵가가 시비(是非)를 가린답시고 서로 치고 받으며 싸우는 행위를 맹렬하게 비판했었습니다. 시비를 {...} 합니다. 바로 그것이 '知'입니다. 장자는 '知'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齊物論」에서도 '大知'와 '小知'를 구분했고, {...} 이 글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장자가 '知'를 비판할 때는 항상 수반되는 문맥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짚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남을 이기려 하는 마음, 명성이나 명예를 얻으려 하는 마음, {...} 상태로 보았고, 궁극적으로 이 행위로써 유가와 묵가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기 보다는 {...} 하는 것에 대해, 진정 그러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취, 명예를 위해 입만 {...} 이에 따라, '知'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양생을 위한 첫 번째 방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명제는 선을 행하더라도 명성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 중용(中庸)이라고 하는 말과도 통합니다. 사실 장자는 「齊物論」에서 '不用而寓諸庸'이라고 하여,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만물이 타고난 그대로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두 뜻이 잘 통합니다. 유가와 {...} 하면 다른 하나는 남이 될 것입니다. 윗문단에 이어 다시 반복하는 {...}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不用而寓諸庸'이나 '督' 같은 표현들은 뜻이 깊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기계적 {...}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유묵과는 범주가 아예 다른 제 3의 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유묵은 국가와 {...} 생각하니까요. 이것이 바로 양생할 두 번째 방법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양생을 위해 두 가지 방법으로 열심히 {...} 의미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保身'은 자기 자신을 보전하는 일을 이릅니다. 도교 {...} 것입니다. '養親'은 의미가 조금 이질적입니다. '親'은 친지, 가까운 사람을 의미하는데, 보통은 부모를 의미합니다. 즉, '養親'은 부모를 봉양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장자는 부모를 모시는 행위에 대해서 다른 곳에 {...} 인, 의, 예, 지가 잘 발현된다면,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 특히 {...} 의, 예, 지에 동의할 리도 없으므로, '養親'이 유가적인 의미의 '孝'와 같은 동기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는 {...} 뒤의 '盡年'이 모두 이런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어쩌면 장자는 자신을 보존하는 것도 보존하는 것이지만, 부모가 {...} 도에게서 내려 받은 수명을 해치지 않고 잘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養生'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 그대로 보존할 일, 도를 거스르지 않을 일 등에 대한 '세칙'은 뒷편인 「大宗師」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 글입니다. 사실 장자가 「養生主」에서 밝히고 싶은 {...} 모두 들어 있고, 뒤의 우화들은 모두 이 부연일 뿐입니다.

 

 

 

장자는 소를 잡는 포정(庖丁)의 {...} 말이 있습니다. 결을 따라 자르면 쉽고 부드럽게 잘리고, 결을 거스르려 하면 힘을 더 쓰는 것은 물론이고, 칼이나 {...} 힘 때문에 넘어지거나 뒤집힐 수도 있습니다. 이 '결'이라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포정은 소의 결을 따라 소를 잡습니다. 그러니 힘도 {...} 않습니다. 그렇기에 포정이 19년 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칼날은 아직 새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포정이 소를 {...} 썰다가 칼날이 상하는 것은, 곧 사람이 자기 멋대로 살다가 도에게서 받은 자기 본성을 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를 따라 살더라도, 포정이 뭉친 부분에서 {...} 부분을 풀어 내고, 스스로 만족하며, 흙에 흙 탄 듯, 물에 물 탄 듯,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다면, 이런 것이 바로 {...} 마지막에 포정을 보고 양생할 방법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포정이 소를 잡는 태도가 도를 따라 살면서 '保身', '全生', '養親', '盡年'할 수 있는 태도임을 의미합니다.

 

꿩 이야기의 주제도 본래 타고난 그대로의 천성(天性)을 {...} 마르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반면, 새장 속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한다'라는 이 말은 언뜻 보기에는 방종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 억지로 교정하거나 '바로잡으려' 하면 결국 천성을 해치는 결과에밖에 이르지 못할 테니까요. 포정(庖丁)은 소를 해체할 때, 소의 천리(天理), 즉 소가 타고난 결을 따라 소를 잘랐습니다. 타고 난 결을 따라 {...}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이루어 주어야 합니다.

 

 

 

공문헌(公文軒)과 우사(右師)의 대화는 「大宗師」와도 통하는 {...}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天'은 곧 하늘이고, 하늘은 일반적으로 《內篇》에서 '道'와 동격으로 사용됩니다. 즉, 우사는 도가 자신을 외다리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으면 사는 데 {...}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따르고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大宗師」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려(子犁), 자래(子來)라는 네 친구가 나오는데, 이들은 번갈아가면서 괴질에 갈려 {...} 왼손이 닭으로 바뀌든, 등이 굽든, 배꼽이 턱 보다 높이 있든, 그것이 도의 뜻이라면 모두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임희일(林希逸)과 곽경번(郭慶藩)은 꿩 {...} 사람이므로, 아마 권세나 부귀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반면에 우사는 외다리밖에 없는 관리에 불과합니다. 임희일, 곽경번은 공문헌이 우사를 보고 외다리라고 놀라는 말을, 공문헌이 우사를 깔보고 {...} 자신은 외다리이지만 자유롭고, 공문헌은 부귀나 권세를 누리지만 속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꿩 이야기를 우사의 말에 포함시키는 {...} 공문헌이 우사를 비웃었다고 보기도 어려울 뿐더러, 우사의 대답 역시 자신이 외다리가 된 것은 오직 도가 그렇게 한 것일 뿐이라고 하는 데에서 그칩니다. 도가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에 너는 속박되어 있니 하는 {...} 속박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꿩 이야기를 우사의 말 속에 포함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참고차 첨언하였습니다.

 

그런데 공문헌과 우사 이야기에서는 고찰해 볼 만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사는 하늘이 자신을 외다리로 만들었다, 즉 다리 한 쪽을 {...} 잘못을 저질러서 발이 잘렸다면, 사람이 했다고 해야지, 하늘이 했다고 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바로 이 점을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德充符」에는 왕태(王駘)와 신도가(申徒嘉), 그리고 숙산무지(叔山無趾)처럼 발이 잘린 올자(兀者)들이 {...} 합니다. 장자는 「德充符」에서 '이처럼 덕이 충만하면 외형은 얼마나 해괴하든 잊게 되는 법이다'(故德有所長而形有所忘)라고 했습니다. 발이 잘리든, 추하든, 뭐가 어떻든 간에, 도를 따르려는 자세를 갖춘다면, 외형이 {...} 자신의 발이 부당하게 잘리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적다'(自狀其過以不當亡者眾/不狀其過以不當存者寡)라고 했습니다. 즉, 발이 잘린 것은 자기 잘못이고, 또 도(道)가 그렇게 내린 일이니, 이를 원망하거나 거부하지 {...} 외다리가 되었는지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우사는 그 원인을 하늘(天)에서 찾지, 사람(人)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 {...} 않죠. 공문헌(公文軒)은 '깜짝' 놀랐지만요.

 

이런 태도는 다리 하나가 없어지는 고락(苦樂)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生死)의 영역에까지 확장됩니다. 노담(老聃), 즉 노자(老子)이 죽자 진일(秦失)이 문상을 {...} 태어났다고 기뻐할 것이 없으며, 누가 죽었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태어났다고 기뻐하거나, 죽었다고 슬퍼하는 것은 도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세상에 올 때가 {...} 생각은 유가의 태도와는 아주 상반됩니다. 유가에서는 상례에서 슬퍼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大宗師」에도 {...} 죽고 말았습니다. 공자(孔子)가 자공(子貢)을 보내 상례를 돕게 했는데, 자공이 가 보니 오히려 맹자반, 자금장이 거문고를 뜯으며, 자상호가 {...} 아니지 않느냐고 이야기하지만, 공자는 오히려 자상호 등이 세속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이며, 공자와 자공은 세속 {...} 사례도 노담의 사례처럼, 자상호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이니, 결코 그 친구들은 슬퍼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생, 사, 고, 락 모두는 도가 사람에게 내리는 {...} 한다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자, '양생법'의 요체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생사고락에 감정이 끼어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이것은 장자의 입장에서는 잘못입니다. 장자는 진일의 입을 빌려서 이를 둔천지형(遁天之刑)이라고 {...} 끼어드는 행위를 '刑', 즉 '罪'라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노담의 문상객들이나 「大宗師」의 자공처럼, 사람이 죽었을 때 슬프게 곡을 하는 것을 '禮'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 바로잡는 것을 두고 장자는 다시 진일의 입을 빌려 제지현해(帝之縣解)라고 특기했습니다. 제지현해는, 도가 내린 생사고락을 {...} 것으로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도를 따르도록 해야 할까요? 희노애락 같은 감정들은 {...} 돌아갈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도의 작용에 대해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을 '刑', 즉 죄라고 명시한 것도 그렇지만, 이것을 적극적으로 올바르게 '풀어 낸다'고 하는 의미에서 '帝之縣解' 같은 표현을 {...} 상기한 것처럼 「齊物論」이 도에 대한 이론적 각론이라면, 「養生主」는 도에 대한 실천적 각론이 됩니다. 또한 {...} 것처럼 「大宗師」에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대담하게 생각해 보면, 「齊物論」과 「養生主」가 각각 이론과 실천에 대한 각론이고, 「大宗師」를 두고 이 둘을 종합한 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大宗師」에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장자가 「養生主」에서 주장하고 있는 양생(養生)이라는 것은, 세상 {...}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도를 따라 선에 치우치지도 말고, 악에 치우치지도 말며, 중용(督)에 의지해서 자기 {...} 천수를 누리도록 모시고, 자신도 천수를 다해야 합니다.

 

 

 

이제 「養生主」의 큰 줄거리를 소개했으므로, 나머지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려 합니다. 저는 「養生主」를 '실천적'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이 무슨 {...} 이론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養生主」는 「齊物論」에 비해 훨씬 실천적입니다. 이 말은 「養生主」에 실제 세상에 대한 일이 「齊物論」에 비해 훨씬 많이 표현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포정이 고기를 자르는 모습은 {...} 오줌으로 눈을 씻거나 하는 행위를 '실천적'이라고 {...} 「養生主」에서 장자는 수명을 인위적으로 {...} 싫어하는 감정 때문에 안으로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해치지 않고, 언제나 본래적인 도리를 따를 뿐, 억지로 수명을 늘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吾所謂無情者/言人之不以好惡內傷其身/常因自然而不益生也)라는 말이 {...} 말로써 알 수 있듯, 장자는 도가 우리에게 내린 우리 삶을 잘 보전하는 {...} 사용하는 '養生'과는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養生'이라고 하는 말은 '長生', 즉 오래 사는 것에 가깝습니다.

 

'養生'이 '長生'의 의미로써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서한(西漢) 초엽의 일로 추측됩니다. 서한 초엽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노자에 {...} 담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얼치기 글쟁이들이 '주석'을 달아서 책을 내곤 합니다. 서한 초엽 사람인 사마천(司馬遷)은 《史記》의 「老子韓非列傳」에서 노자가 160에서 200년을 살았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 처음으로 열었던 사람입니다. 사마천은 《史記》를 기술할 때 사실이 아닐 만한 것들은 과감히 부정하기도 하고, 자기 의견을 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천이 노자에 대해 '養壽'의 도를 닦았기 때문에 200여 년이나 살았다고 운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 같습니다. 하나는 노자의 행적이 그 {...} 원류가 그 때에 이미 퍼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서한 초엽에는 황로학(黃老學)이 크게 유행했었습니다. 황로학은 도가와 법가, 특히 도가의 경우에는 노자 계열의 '통치 사상'을 이어 받은 정치 기풍이었습니다. {...} 것이라는 점은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도교가 '종교'로써 구성된 것은 후한(後漢) 초엽이나 {...} 초점을 맞췄습니다. 장릉은 이 과정에서 약을 먹기도 하고, 여러 수행 방법을 만들기도 했으며, 노자 등을 신격화하기도 했습니다. 도교에서는 노자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고 하며, 장자를 남화진인(南華眞人) 또는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고 하며, 《莊子》를 '南華眞經'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짓'이 바로 장릉에서 비롯된 {...}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적 증거가 또 있습니다. 하상공(河上公) 또는 하상장인(河上丈人)이 지었다는 《道德眞經註》가 성립된 것이 바로 이 시기 즈음이라고 추측된다는 {...} 하상장인과 하상공이 동일인이라고 보기도 하고, 무엇 보다도 하상장인과 하상공이 각각 주석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현전하는 《道德眞經註》가 둘이 남긴 주석 중 하나일 확증이 없습니다. 왜냐면, 《道德眞經註》의 내용은 동한(東漢), 즉 후한 때 '養生'을 주장한 사람들이 한 이야기와 비슷하거든요. 따라서 《道德眞經註》가 {...} 시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道德眞經註》는 하상장인이나 하상공의 작품이 아니라 후한 시기 도교들의 위작(僞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설을 취신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養生主」에 나오는 '養生' 관념은 도를 따르고, 도에 순응하는 것, 도에 따라 세상을 올바르게 풀어 내는 것, 그렇게 {...} 장자 등이 신격화됨과 함께, '養生'이 '長生'으로써 확실히 정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기한 것처럼 「養生主」 본편의 '養生'은 '長生'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養生主」가 실천적이라는 {...} 진술되었던 도가, 「養生主」에서 마침내 세상 속의 실천 문제와 결부되어 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혼동하면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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