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 6 - 대종사 - 6 - 안회와 중니가 맹손재를 논하다

2021. 8. 29. 13:29장자 내편 이야기 - 완결/원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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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편》 번역에는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이민수(李民樹)의 2007년 번역, 현암사에서 나온 안동림(安東林)의 2019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내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1년 8월 12일 9시 53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08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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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54

 

<하단 주석> 장자 내편 - 6 - 대종사 - 6 - 안회와 중니가 맹손재를 논하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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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책으로 출판되어 교보문고를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전문을 다 읽으시려면 책을 구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莊子內篇孃注》, 李相珉, 책과세계)

 

**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내용은, 번역문 전체 및 주석 일부입니다. 그러나 번역문과 주석 모두 중간 부분을 {...}라는 표시로 비워 뒀습니다. 책을 구입하기 전 열람할 수 있는 견본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교보문고와 리디북스 두 개 서점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 가능한 링크는 아래에 기재해 두었습니다.

 

1.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3332426(양장본, 품절)

 

2.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9069155(문고판, 상권 및 하권으로 분절, 세트로 판매, 재고 있음)

 

 

3. 전자책

 

3-1. 교보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405

(전자책, 교보문고, 합본)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1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6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3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63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2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7

(전자책, 교보문고, 편별로 분권)

 

 

3-2. 리디북스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8?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1

(전자책, 리디북스, 합본)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1?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4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2?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5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3?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6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4?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7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5?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3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6?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8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7?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2

(전자책, 리디북스, 편별로 분리)

 

 

6-6

 

顏回問仲尼曰:

 

「孟孫才,其母死,哭泣無涕,中心不戚,居喪不哀。無是三者,以善處喪蓋魯國。固有無其實而得其名者乎?回壹怪之。」

 

仲尼曰:「夫孟孫氏盡之矣,進於知矣。唯簡之而不得,夫已有所簡矣。孟孫氏不知所以生,不知所以死;不知就先,不知就後;若化爲物,以待其所不知之化已乎!且方將化,惡知不化哉?方將不化,惡知已化哉?吾特與汝。其夢未始覺者邪!且彼有駭形而無損心,有旦宅而無情死。孟孫氏特覺,人哭亦哭,是自其所以乃。

 

且也相與吾之耳矣,庸詎知吾所謂吾之乎?且汝夢爲鳥而厲乎天,夢爲魚而沒於淵。不識!今之言者,其覺者乎?其夢者乎?

 

造適不及笑,獻笑不及排,安排而去化,乃入於寥天一。」

 

 

안회가 중니에게 물었다.(顏回問仲尼曰, ◈ 顏回는 孔子의 제자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顏回者/魯人也/字子淵//少孔子三十歲, '{...}'라고 되어 있다. 「人間世」에도 등장한 적이 있었다. 이 뒤의 坐忘 부분에서도 孔子와 함께 등장한다. ◈ 問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仲尼는 孔子다. 孔子의 字가 仲尼다.)

 

"맹손재는 자기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곡하면서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마음으로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상을 치르면서 서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하지 않았는데도 상례를 잘 치렀다고 온 노나라에 소문이 났다.(孟孫才/其母死/哭泣無涕/中心不戚/居喪不哀//無是三者/以善處喪/蓋魯國, ◈ 孟孫才는 사람 이름이다. 孟孫氏는 魯나라의 {...} 있었는데, 孟孫才는 아마 孟子反과 같은 大夫였을 텐데도 《春秋左氏傳》을 비롯해 어떤 책에도 {...}는 없을 것 같다. 成玄英은 姓孟孫/名才/魯之賢人,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李云/三桓後/才其名也///崔云/才/或作牛, '{...}'라고 했다. 牛는 才와 모양이 비슷해 {...}는 없다. 王先謙은 名才, '{...}'라고 하였다. ◈ 其는 孟孫才를 가리킨다. ◈ 母는 체언으로, '{...}'다. ◈ 死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哭泣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哭과 泣은 모두 '{...}'는 말이다. ◈ 無涕의 無는 부정어다. 涕를 한정한다. ◈ 涕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中心은 아마 '{...}' 같은 표현일 것이다. 中도 '{...}', 心도 '{...}'이다. 《史記》 「樂書」에 情動於中, '{...}'라는 말이 있는데, 張守節은 中猶心也, '{...}'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中心은 '{...}'처럼 해석되겠으나, 中心 자체가 '{...}'일 수는 없다. '{...}'이 되려면 원문이 中心이 아니라 心中이어야 할 것이다. ◈ 不戚의 不은 부정어다. 不哀의 不도 그렇다. 각각 戚과 哀를 한정한다. ◈ 戚은 용언이다. 본래 '{...}'이라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용언으로 '{...}'는 말로 사용되었다. 《詩》 「小雅 北山之什」의 「小明」에 自詒伊戚, '{...}'라는 말이 있는데, 毛亨과 朱熹는 모두 戚을 憂, '{...}'이라고 하였다. 또, 이 戚은 慼과 같다. 慼은 '{...}'이라는 뜻이다. 「小明」의 自詒伊戚은 《春秋左氏傳》 「僖公」 24년, 「宣公」 2년에 모두 自詒伊慼으로 인용되어 있다. 이렇게 증명할 수 있다. ◈ 居는 용언으로, '{...}'라는 뜻이다. 즉, 居喪은 '{...}'라는 말이다. ◈ 哀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無是三者의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是三者를 받는다. ◈ 是三者는 '{...}'다. 哭泣無涕, 中心不戚, 居喪不哀를 가리킨다. 是는 '{...}'처럼 지시하는 말이다. ◈ 以는 '{...}'다. 명사구인 善處喪을 받는다. ◈ 善은 부사어로, '{...}'이라는 말 같다. ◈ 處는 용언으로, {...}라는 말 같다. 郭慶藩은 世德堂本無處字, '{...}'라고 하였다. 處가 없으면 뒤의 喪을 '{...}'라는 용언으로 보아야 한다. ◈ 喪은 체언으로, '{...}'이다. ◈ 蓋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李楨은 以善處喪絕句/文義未完/且嫌於不辭//下蓋魯國三字當屬上爲句/不當連下固有云云爲句//蓋與應帝王篇功蓋天下義同/言孟孫才以善處喪名蓋魯國//爾雅釋言/弇/蓋也///小爾雅廣詁/蓋/覆也///釋名釋言語/蓋/加也///並有高出其上之意/即此蓋字義也, '{...}'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李楨이 타당할 듯하다. 따라서 李楨의 의견에 따라 蓋魯國를 이 문장에 붙여 보았다. 成玄英은 蓋者/發語之辭也, '{...}'라고 하였다. 成玄英이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郭象처럼 蓋魯國을 뒷문장에 붙여 읽었기 때문이다. ◈ 魯國은 체언으로, '{...}'다. ◈◈ 成玄英은 體無爲之一道/知生死之不二/故能跡同方內/心遊物表//居母氏之喪/禮數不闕/威儀詳雅/甚有孝容//而淚不滂沱/心不悲戚/聲不哀痛//三者既無/不名孝子/而鄉邦之內/悉皆善之/云其處喪深得禮法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郭陸成本喪字絕句//李楨云/文義未完//蓋魯國三字當屬上句/與應帝王篇功蓋天下義同///釋言/弇/蓋也///釋名蓋/加也///並有高出其上之意//言才以善處喪名蓋魯國也, '{...}'라고 했다. 상기하였듯 李楨의 의견이 타당하다. 李楨의 글은 앞쪽 문장에 인용해 두었다.) 상례에 대한 실제적인 행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원래 [맹손재처럼] 상례를 잘 치렀다고 명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냐. 회는 그 점이 아주 미심쩍구나.(固有無其實而得其名者乎//回壹怪之, ◈ 固는 부사어로, '{...}'이라는 말이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無其實而得其名者를 받는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其實을 받는다. ◈ 其實의 其는 아마 處喪을 가리키는 듯하다. 其名의 其도 그러하다. ◈ 實은 체언으로, '{...}' 같은 말로 보인다. 앞에 나왔던 涕, 戚, 哀를 뜻한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得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其名을 받는다. ◈ 名은 체언으로, '{...}'을 뜻한다. ◈ 者는 '{...}'라는 말이다. 無其實而得其名을 받는다. ◈ 乎는 {...}다. ◈ 回는 顏回다. ◈ 壹은 부사어로, '{...}'라는 의미일 듯하다. 郭慶藩은 世德堂本壹作一, '{...}'라고 하였다. 두 글자는 동일하다. ◈ 怪는 용언으로, '{...}'는 뜻이다. ◈ 怪之의 之는 有無其實而得其名者, 즉 {...}을 가리킨다. ◈◈ 郭象은 魯國觀其禮/而顏回察其心,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哭泣縗絰/同域中之俗禮//心無哀戚/契方外之忘懷//魯人睹其外跡/故有善喪之名//顏子察其內心/知無至孝之實//所以一見孟孫才/遂生疑怪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顏回는 상례의 實을 {...}하고 있다.)"

 

중니가 말했다.(仲尼曰)

 

"저 맹손씨는 상례를 극진히 치렀다. [오히려 상례에 대해] 잘 안다는 자 보다 더 나았다.(夫孟孫氏盡之矣/進於知矣, ◈ 夫는 '{...}'처럼 {...}이다. ◈ 孟孫氏는 孟孫才다. ◈ 盡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盡之의 之는 喪을 가리킨다. ◈ 進은 용언이다. 본래 '{...}'는 말인데, 여기서는 {...}는 뜻이다. 成玄英은 過, '{...}'라고 하였다. ◈ 於는 비교하는 말로, '{...}'라는 말이다. 知를 받는다. ◈ 知는 아마 체언으로, {...}이라는 말 같다. ◈◈ 郭象은 盡死生之理/應內外之宜者/動而以天行/非知之匹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孟孫氏窮哀樂之本/所以無樂無哀//盡生死之源/所以忘生忘死//既而本跡難測/故能合內外之宜//應物無心/豈是運知之匹者耶, '{...}'라고 하였다. ◈◈ 宣穎은 其盡道過於知喪禮者,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知, 즉 상례에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비록 상례를 간소하게 치르고 싶어 해도 그럴 수가 없기 마련인데(唯簡之而不得, ◈ 唯는 雖와 통용된다. 부사어로, '{...}'이라는 말이다. 《荀子》 「性惡」에 唯禹不知仁義法正/不能仁義法正也, '{...}'라는 말이 있는데, 楊倞은 唯/讀爲雖, '{...}'라고 하였다. ◈ 簡은 용언으로, '{...}'라는 뜻이다. 주석을 참고할 때 郭象과 成玄英은 簡을 모두 簡擇, '{...}'라고 보고 있다. 宣穎은 簡者/略於事//世俗相因/不得獨簡/故未免哭泣居喪之事, '{...}'라고 하였다. ◈ 簡之의 之는 喪을 가리킨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不得은 '{...}'는 뜻이다. 得은 용언으로, '{...}'라는 뜻이다. ◈◈ 郭象은 簡擇死生而不得其異/若春秋冬夏四時行耳,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生來死去/譬彼四時/故孟孫簡擇/不得其異,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보통 사람들은 상례를 {...}는 뜻이다.), 저 맹손씨는 아주 간소하게 치러 버렸다. 맹손씨는 삶에도 연연하지 않았고, 죽음에도 연연하지 않았으며(夫已有所簡矣//孟孫氏不知所以生/不知所以死, ◈ 夫는 {...}로 보아야 할 것이다. ◈ 已는 부사어로, '{...}'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爲와 같다. 《孟子》 「滕文公 上」에 人之有道也/飽食暖衣/逸居而無教/則近於禽獸,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有는 '{...}'는 말로, 爲와 같다. 《國語》 「周語」에는 胡有孑然其效戎翟也,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有는 '{...}'라는 말로, 爲와 같다. 또, 《國語》 「晉語」에 克國得妃/其有吉孰大焉, '{...}'라는 말이 있는데, 《春秋左氏傳》 「昭公」 5년에는 其爲吉孰大焉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두 句는 有와 爲가 다를 뿐, 나머지는 같다. 내용도 같을 것이다. 이렇게 사용된 까닭은 有와 爲가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王引之는 爲有/一聲之轉//故爲可訓爲有/有亦可訓爲爲, '{...}'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有」에 수록되어 있다. ◈ 簡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따라서 所簡은 '{...}'를 뜻한다. 따라서 已有所簡은 '{...}'라는 말이 된다. 已有所簡에 대해 宣穎은 然已無涕不戚不哀/是已有所簡矣, '{...}'라고 하였고, 蘇輿는 二語泛言/不屬孟孫氏說, '{...}'라고 하였으며, 姚鼐는 常人束於生死之情以爲哀痛/簡之而不得/不知於性命之眞/已有所簡矣,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의 설에 대해 王先謙은 似較宣說爲優, '{...}'라고 하였다. ◈ 孟孫氏는 孟孫才다. ◈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 같다. 즉, 不知는 '{...}'는 말이 된다. ◈ 所以는 '{...}'이다. '{...}'라고 볼 수도 있으나, 문맥상 '{...}'이라고 해석해야 타당하겠다. ◈ 生은 체언으로, '{...}'이다. 따라서 所以生은 '{...}'이다. ◈ 死는 체언으로, '{...}'이다. 따라서 所以死는 '{...}'이다. ◈◈ 郭象은 已簡而不得/故無不安/無不安/故不以生死概意而付之自化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雖復有所簡擇/竟不知生死之異/故能安於變化而不以哀樂概懷也, '{...}'라고 하였다. ◈◈ 宣穎은 生死付之自然/此其進於知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孟孫才가 {...}는 말이다.), 삶을 좇을 줄도 몰랐고, 죽음을 좇을 줄도 몰랐다.(不知就先/不知就後, ◈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즉, 不知는 '{...}'는 말이 된다. 앞뒤의 不知는 각각 명사구인 就先과 就後를 받는다. ◈ 就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論語》 「學而」에 就有道而正焉,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就는 '{...}'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先은 체언으로, 아마 生, '{...}'을 뜻할 것이다. 成玄英은 生, '{...}'이라고 하였다. ◈ 後는 체언으로, 아마 死, '{...}'을 뜻할 것이다. 成玄英은 死, '{...}'이라고 하였다. ◈◈ 郭象은 所遇而安, '{...}'라고 하였다.) [다만 도가 일으키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도가 내린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마음가짐으로, [자신이 죽은 뒤 도가 일으킬] 자신의 알 수 없는 변화가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다.(若化爲物/以待其所不知之化已乎, ◈ 若은 용언으로, '{...}'는 말로 보인다. 順과 같다. 化를 받는다. 《書》 「禹書 堯典」에 乃命羲和/欽若昊天, '{...}'라는 말이 있는데, 이 若에 대해 蔡沈은 順, '{...}'라고 하였다. 또, 「德充符」에 知不可柰何而安之若命/唯有德者能之, '{...}'라는 말이 있었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順, '{...}'라고 하였다. ◈ 化는 체언으로, {...}다. ◈ 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物은 체언으로, '{...}'이다. {...}을 가리킨다. ◈ 以는 아마 '{...}'라는 말이다. 若化爲物을 받는다. ◈ 待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其所不知之化를 받는다. ◈ 其는 '{...}'다. 孟孫才를 가리킨다. ◈ 所는 '{...}'이다. 아마 不知之化已를 받는 것 같다. ◈ 不知之化는 '{...}'다. 知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따라서 不知는 '{...}'는 의미가 된다. 不知之化의 之는 {...}로, '{...}'처럼 해석된다. 化는 체언으로, '{...}'다. {...} 그래서 不知之化라고 표현한 듯하다. 뒤의 문장을 참고하면, 不知之化는 {...} 또한 함축되어 있다. 成玄英은 不知之化/謂當來未化之事也, '{...}'라고 하였다. ◈ 已는 아마 용언으로, '{...}'라는 말일 것이다. 주어는 不知之化다. 成玄英은 止, '{...}'라고 하였다. ◈ 乎는 {...}다. ◈◈ 郭象은 不違化也//死生宛轉/與化爲一/猶乃忘其所知於當今/豈待所未知而豫憂者哉,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既一於死生/故無去無就//冥於變化/故順化爲物也//見在之生/猶自忘遣//況未來之化/豈復逆憂//若用心預待/不如止而勿爲也, '{...}'라고 하였다. ◈◈ 宣穎은 順其所以化/以待其將來所不可知之化/如此而已,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死爲鬼物/化也//鼠肝蟲臂/所不知之化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孟孫才가 {...}는 말이다.) 가령 이제 막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은 어찌 알 수 있겠으며, 지금 막 변화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변화하였을 수도 있다는 점은 어찌 알 수 있겠느냐.(且方將化/惡知不化哉//方將不化/惡知已化哉, ◈ 且는 若처럼 '{...}'이라는 표현 같다. 《呂氏春秋》 「季秋紀 知士」에 且靜郭君聽辨而爲之也/必無今日之患也,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戰國策》 「齊策」에는 若聽辨而爲之/必無今日之患也, '{...}'라고 되어 있다. 且가 若처럼 '{...}'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예는 王引之의 《經傳釋詞》 「且徂」에 수록되어 있다. 또, 이런 사례도 있다. 《史記》 「齊太公世家」에는 君且欲霸王/非管夷吾不可,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도 且는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 方將은 부사어로, '{...}'과 같은 말이다. ◈ 化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惡는 의문사로, '{...}'다. '{...}'라고 읽는다. 陸德明은 音烏/下同, '{...}'라고 하였다. ◈ 知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惡知不化哉의 知는 명사구인 不化를 받는다. 惡知已化哉의 知는 명사구인 已化를 받는다. ◈ 不化는 명사구로, '{...}' 같은 표현이다. ◈ 哉는 {...}이다. ◈ 已는 부사어로, '{...}'다. 즉, 已化는 명사구로, '{...}'이라는 말이 된다. ◈◈ 郭象은 已化而生/焉知未生之時哉//未化而死/焉知已死之後哉//故無所避就/而與化俱往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方今正化爲人/安知過去未化之事乎//正在生日未化而死/又安知死後之事乎//俱當推理直前/與化俱往/無勞在生憂死/妄爲欣惡也, '{...}'라고 하였다. ◈◈ 宣穎은 四語正不知之化/總非我所能與,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莊子는 道의 命을 받고 {...}에 대한 부연이다.) [하지만 우리는 맹손씨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마 [도를 도외시하고] 꿈에서 아직 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吾特與汝/其夢未始覺者邪, ◈ 吾는 1인칭 대명사로, 孔子 자신을 이른다. ◈ 特은 부사어로, 아마 '{...}'이라는 말 같다. ◈ 與는 '{...}'다. '{...}'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 汝는 2인칭 대명사로, 顏回를 가리킨다. ◈ 其는 지시대명사가 아니라 부사어로, '{...}'일 것이다. 殆와 같다. 이 문장은 {...} 그러므로 其는 지시대명사가 아니라 부사어로 보는 편이 더 좋겠다. 《禮記》 「檀弓 上」에 子張病/召申祥而語之曰/君子曰終/小人曰死/吾今日其庶几乎,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其는 殆처럼 '{...}' 혹은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春秋左氏傳》 「隱公」 6년에 善不可失/惡不可長/其陳桓公之謂乎, '{...}'라는 말이 있고, 《國語》 「周語」에는 我又章之/懼長及子孫/王室其愈卑乎, '{...}'라는 말이 있는데, 두 글에서 其는 모두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其와 殆의 의미가 같기 때문에, 두 글자를 붙여서 한 단어처럼 사용한 사례도 있다. 《易》 「繫辭 下」에 顏氏之子/其殆庶幾乎,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其殆는 '{...}'라는 뜻이다. 이 문장의 其는 아마 {...} 않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 夢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未始는 '{...}'는 뜻이다. ◈ 覺는 용언으로, {...}는 뜻이다. '{...}'라고 읽는다. 陸德明은 古孝反//注下皆同, '{...}'라고 하였다. ◈ 者는 아마 '{...}'이라는 말일 것이다. 夢未始覺를 받는다. ◈ 邪는 {...}다. '{...}'라고 읽는다. ◈◈ 郭象은 夫死生猶覺夢耳/今夢自以爲覺/則無以明覺之非夢也//苟無以明覺之非夢/則亦無以明生之非死矣//死生覺夢/未知所在/當其所遇/無不自得/何爲在此而憂彼哉,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夢是昏睡之時/覺是了知之日//仲尼顏子/猶拘名教/爲昏於大夢之中/不達死生/未嘗暫覺者也, '{...}'라고 하였다. ◈◈ 宣穎은 未能若孟孫之進於知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孔子와 顏回가 {...} 쓰이고 있다.) 또한 맹손재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겉으로는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고(且彼有駭形而無損心, ◈ 且는 부사어로, '{...}'이다. {...}이다. 莊子는 이 앞 문장까지 {...}하려 한다. ◈ 彼는 孟孫才를 가리킨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표현이다. 명사구인 駭形을 받는다. ◈ 駭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春秋左氏傳》 「哀公」 23년에 馬駭/遂驅之, '{...}'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林堯叟는 馬驚而逸/知伯遂驅之, '{...}'라고 풀이해 놓았다. 「德充符」에 以惡駭天下, '{...}'라는 말이 있었다. 陸德明은 如字//崔作咳/云/有嬰兒之形, '{...}'라고 했다. ◈ 形은 체언으로, '{...}'이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표현이다. 명사구인 損心을 받는다. ◈ 損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心은 체언으로, '{...}'이다. ◈◈ 郭象은 以變化爲形之駭動耳/故不以死生損累其心,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彼之孟孫/冥於變化/假見生死爲形之驚動/終無哀樂損累心神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彼孟孫氏雖有駭變之形/而不以損累其心,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郭象, 成玄英, 王先謙은 有駭形와 無損心을, 변화를 따르지만 {...}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몸이 야위기는 하였으나 정신이 무너지지는 않았다.(有旦宅而無情死, ◈ 有는 용언으로, {...}라는 표현이다. 명사구인 旦宅를 받는다. ◈ 旦宅은 명사구로, '{...}'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아닌가 싶다. 旦은 아마 怛의 가차자일 것이다. 怛은 '{...}'는 말이다. 駭形의 駭와 같다. 宅은 '{...}'인데, 아마 '{...}'를 뜻하는 것 같다. 駭形의 形과 같다. 즉, 旦宅은 앞의 句에 나오는 駭形와 같다. 成玄英은 旦을 日新, '{...}'이라고 하였고, 宅은 神之舍, '{...}'이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並如字//王云/旦暮改易/宅是神居也///李本作怛㤞/上丹末反/下陟嫁反/云/驚惋之貌///崔本作靼宅//靼/怛也, '{...}'라고 하였다. 安炳周와 田好根은 奚侗과 王叔岷이 旦宅을 怛化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는 설을 소개해 두었다. 그런데 그러면 怛化, '{...}'라는 말이 되는데, 이는 {...}는 기본 전제와 완전히 배치되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는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표현이다. 명사구인 情死를 받는다. ◈ 情死는 명사구로, '{...}'이라는 말 같다. 情은 '{...}'이다. 損心의 心과 같다. 死는 '{...}'는 뜻으로, 損心의 損과 같다. 즉, 情死는 損心과 같다. 다만, 情死가 損心을 {...}지 의뭉스럽다. 姚鼐는 情/實也//言本非實有死者, '{...}'라고 하였다. ◈◈ 郭象은 以形骸之變爲旦宅之日新耳/其情不以爲死,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以形之改變爲宅舍之日新耳/其性靈凝淡/終無死生之累者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 문장은 앞의 有駭形而無損心을 한 번 {...}을 뜻한다.) [맹손씨는] 다만 [우리와 달리 꿈에서] 깨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장례 중에 곡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이 곡을 하면, [그에 맞춰서 자신도] 또한 곡을 했을 뿐이다. 이것이 진정 맹손재가 상을 잘 치렀다는 명망을 저절로 얻은 까닭이다.(孟孫氏特覺/人哭亦哭/是自其所以乃, ◈ 孟孫氏는 孟孫才다. ◈ 特은 부사어로. '{...}'처럼 해석하면 좋겠다. ◈ 覺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라고 읽는다. ◈ 人은 체언으로, {...}이다. ◈ 哭은 용언으로, '{...}'는 뜻이다. ◈ 亦은 부사어로, '{...}'다. ◈ 是는 {...}처럼 해석된다. ◈ 自는 부사어로, 아마 '{...}'라는 말 같다. ◈ 其는 {...}를 가리킬 것이다. ◈ 所以는 '{...}'이다. 乃를 받는다. ◈ 乃는 본래 '{...}'라는 말이지만, 그렇게 보면 말이 안 된다. '{...}'라는 말이 문장의 마지막에 올 만하지도 않다. 乃는 '{...}'라고 보아야 한다. 즉, 然 또는 如此와 같다. 王先謙은 乃/猶言如此, '{...}'라고 하였는데, 이 설이 타당하다. 「德充符」의 申徒嘉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서, 子産은 申徒嘉에게 子無乃稱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王先謙은 乃者/猶言如此//子無乃稱/謂子毋如此言也//大宗師篇/不知其所以乃///亦謂不知其所以如此也, '{...}'라고 하였었다. 「大宗師」에는 不知其所以乃라는 말이 없는데, 아마 본문의 是自其所以乃를 가리키는 듯하다. 王先謙처럼 乃를 如此, 즉 '{...}'이라고 보면 문맥도 잘 {...} 된다. 한편 郭慶藩은 朱桂曜本乃作盈, '{...}'라고 했다. 盈은 '{...}'는 말로, {...}했다고 하면 의미가 통한다. 安炳周와 田好根은 章炳麟이 乃를 然의 가차자로 보고, 如此처럼 풀이했다는 설을 소개해 두었다. 이 설 역시 王先謙의 설과 동일하다. 주석을 참고할 때, 郭象은 乃를 宜, '{...}'처럼 풀이하였다. 아마 人哭亦哭을 감안한 표현인 듯하다. 그런데 安東林은 王叔岷과 馬敍倫이 《莊子校釋》과 《莊子義證》에서 《道藏成疏本》에는 {...} 않는다. 陸德明은 崔本乃作惡, '{...}'라고 하였다. ◈◈ 郭象은 夫常覺者/無往而有逆也/故人哭亦哭/正自是其所宜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孟孫冥同生死/獨居覺悟/應於內外/不乖人理//人哭亦哭/自是順物之宜者也, '{...}'라고 하였다. ◈◈ 蘇輿는 孟孫氏特覺句絕//言我汝皆夢/而孟孫獨覺/人哭亦哭/是其隨人發哀,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人哭亦哭/己無容心,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孟孫才가 道를 {...}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德充符」에는 哀駘它에 대해 未嘗有聞其唱者也/常和人而已矣, '{...}'라는 말이 있었고, 또 이론 부분에 眇乎小哉/所以屬於人也//謷乎大哉/獨成其天, '{...}'라는 말이 있었다. 孟孫才가 {...}야 할 것이다. ◈◈ 孃破又案 : 이 문장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是自其所以乃를 {...}고 있다. 두 번째 방향은 是自其所以乃를 {...}고 있다. 두 설 모두 장단점이 있다. 첫 번째 설을 {...}의 타당성이 있으므로, 이를 숙고해 보길 바란다.)"

 

<중니의 말 이어짐>

 

"무릇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지금 자기 자신의 육신이] 자기 자신이라고 하고 다닌다.(且也相與吾之耳矣, ◈ 且는 부사어로, '{...}'처럼 보면 좋겠다. {...}이다. ◈ 也는 아마 {...}일 것이다. ◈ 相與는 부사어로, '{...}'다. 相과 與는 모두 '{...}'라는 뜻이다. 나는 '{...}'라고 의역하였다. ◈ 吾는 1인칭 대명사인데, 여기서는 {...}을 가리킨다. ◈ 之는 {...} 같다. ◈ 耳는 '{...}'라는 말이다. 吾之耳는 아마 '{...}'라는 표현 같다. 즉, {...}는 말일 것이다. ◈◈ 郭象은 夫死生變化/吾皆吾之//既皆是吾/吾何失哉//未始失吾/吾何憂哉//無逆/故人哭亦哭//無憂/故哭而不哀,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吾生吾死/相與皆吾/未始非吾/吾何所失//若以係吾爲意/何適非吾,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莊子는 이 윗쪽까지는 {...}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지금] 자기 자신을 [진정한]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지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庸詎知吾所謂吾之乎, ◈ 庸詎는 의문사로, '{...}'라는 말이다. 成玄英은 庸을 常, '{...}'라고 설명했다. 陸德明은 詎에 대해 其庶反//下章同, '{...}'라고 하였다. 下章은 아마 意而子와 許由 이야기를 뜻할 것이다. ◈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吾所謂吾를 받는다. ◈ 吾所의 吾는 '{...}'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을 가리킨다. 謂吾의 吾도 그렇다. 다만 吾所의 吾는 {...}을 이른다. ◈ 所는 '{...}'이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之는 {...} 같다. ◈ 乎는 {...}다. ◈◈ 郭象은 靡所不吾也/故玄同外內/彌貫古今/與化日新/豈知吾之所在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凡常之人/識見淺狹/詎知吾之所謂無處非吾//假令千變萬化/而吾常在/新吾故吾/何欣何惡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人每見吾暫有身/則相與吾之//豈知吾所謂吾之/果爲吾乎/果非吾乎, '{...}'라고 하였다.) 또, 너는 꿈 속에서 새가 되어서는 하늘로 날아 가기도 하고, 물고기가 되어 물 속으로 들어가기도 해 보았을 것이다.(且汝夢爲鳥而厲乎天/夢爲魚而沒於淵, ◈ 且는 부사어로, '{...}'이다. ◈ 汝는 2인칭 대명사로, 顏回를 이른다. ◈ 夢은 용언으로, '{...}'는 뜻이다. ◈ 爲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鳥는 체언으로, '{...}'다. ◈ 而厲乎天의 而는 순접이다. '{...}'와 같이 해석된다. 而沒於淵의 而도 그렇다. ◈ 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漢書》 「蒯伍江息夫傳」에 鷹隼橫厲/鸞俳佪兮, '{...}'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厲/疾飛也, '{...}'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至, '{...}'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厲戾/同聲通用/至也, '{...}'라고 하였다. ◈ 乎는 於와 같다. '{...}'다. 天을 받는다. ◈ 天은 체언으로, '{...}'이다. ◈ 魚는 체언으로, '{...}'다. ◈ 沒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於는 '{...}'다. 淵을 받는다. ◈ 淵은 체언으로, '{...}'이다. ◈◈ 郭象은 言無往而不自得也, '{...}'라고 하였다.) 알 수가 없구나,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우리는 깨어 있는 것일까, 꿈 속에 있는 것일까.(不識//今之言者/其覺者乎/其夢者乎, ◈ 識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즉, 不識은 '{...}'는 뜻이다. 不識은 뒤의 {...}되기 때문이다. 즉, 不識은 '{...}'라고 하며 {...}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今은 부사어로, '{...}'이다. ◈ 今之言의 之는 {...}일 것이다. ◈ 言은 관형어로, '{...}'이다. ◈ 今之言者의 者는 '{...}'이다. 言을 받는다. 따라서 今之言者는 '{...}'가 된다. ◈ 其覺者乎의 其는 今之言者를 가리킬 것이다. '{...}'처럼 해석된다. 其夢者乎의 其도 그렇다. ◈ 覺는 관형어로, {...}이다. '{...}'라고 읽는다. 즉, 覺者는 '{...}'이 된다. ◈ 乎는 {...}다. ◈ 夢은 관형어로, '{...}'는 말이다. 즉, 夢者는 '{...}'이 된다. ◈◈ 郭象은 夢之時自以爲覺/則焉知今者之非夢耶/亦焉知其非覺耶//覺夢之化/無往而不可/則死生之變/無時而足惜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且爲魚爲鳥/任性逍遙/處死處生/居然自得//而魚鳥既無優劣/死生亦何勝負而係之哉//孟孫妙達斯源/所以未嘗介意//又不知今之所論魚鳥者/爲是覺中而辯/爲是夢中而說乎//夫人夢中/自以爲覺//今之覺者/何妨夢中//是知覺夢生死/未可定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未知魚鳥是覺邪夢邪/抑今人之言魚鳥者是覺邪夢邪,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상기하였듯, 莊子는 꿈을 {...}를 따라야 한다. 莊子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중니의 말 이어짐>

 

"조적 보다는 [의]소가 낫고, 의소 보다는 [안]배가 낫다.(造適不及笑/獻笑不及排, ◈ 造適은 명사구로, 아마 '{...}'을 뜻하는 것 같다. 造는 아마 '{...}'는 말 같다. 《周禮》 「地官司徒」에 七曰造言之刑, '{...}'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造言/訛言惑眾,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造에 대해 七報反//注同, '{...}'라고 하였다. 成玄英은 造를 至, '{...}'라고 하였다. 適은 아마 '{...}'는 말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 造適은 '{...}'이라는 의미가 된다. 주석을 참고할 때, 郭象과 成玄英은 '{...}'고 본 것 같지만, 그런 경지가 다른 단계의 하위 단계일 수는 없다. 郭嵩燾는 造適者/以心取適而已/言笑皆忘也, '{...}'라고 하였다. 安東林은 馬敍倫이 《莊子義證》에서 造를 告라고 보고, 適을 謫이라고 {...}다는 설을 소개해 두었다. 그러나 모두 수긍이 될 만하지는 않다. ◈ 不及은 '{...}'라는 말이다. 及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不及笑의 笑는 바로 뒤에 나오는 獻笑를 뜻한다. 獻笑 부분에서 설명하겠다. ◈ 獻笑는 아마 명사구로, '{...}'인 것 같다. 獻은 본래 {...}는 말이다. 여기서는 '{...}'는 의미인 듯 보인다. '{...}'라고 읽는다. 《周禮》 「春官宗伯」에 鬱齊獻酌, '{...}'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鄭司農云/獻讀爲儀, '{...}'라고 했다. 鄭司農은 大司農을 지냈던 鄭衆을 이른다. 여기서 獻은 儀와 같은데, 儀는 '{...}'는 뜻이다. 笑는 '{...}'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獻笑는 '{...}'라는 말이 된다. 成玄英은 獻을 善, '{...}'라고 풀이했다. 陸德明은 向云/獻/善也///王云/章也/意有適/章於笑/故曰獻笑, '{...}'라고 했다. 郭嵩燾는 獻笑者/以笑爲歡而已/推排皆化也, '{...}'라고 하였다. 安東林은 馬敍倫이 《莊子義證》에서 獻을 僖라고 보고, 獻笑를 '{...}'라고 풀이한 설, 奚侗이 《莊子補注》에서 獻을 進이라고 보고, 獻笑를 '{...}'라고 풀이했다는 설을 소개해 두었으나, 수긍이 될 만하지는 않다. ◈ 不及排의 排는 바로 뒤에 나오는 安排를 뜻한다. 安排에서 설명하겠다. ◈◈ 郭象은 所造皆適/則忘適矣/故不及笑也//排者/推移之謂也//夫禮哭必哀/獻笑必樂/哀樂存懷/則不能與適推移矣//今孟孫常適/故哭而不哀/與化俱往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所至皆適/斯亦適也/其常適何及歡笑然後樂哉//若從善事感己而後適者/此則不能隨變任化/與物推移也//今孟孫常適/故哭而不哀也, '{...}'라고 하였다. ◈◈ 郭嵩燾는 極推排之力而冥然安之/窮變化之用而超然去之/乃以游蕩於萬物之表而與天爲一, '{...}'라고 하였다. ◈◈ 宣穎은 人但知笑爲適意/不知當其忽造適意之境/心先喩之/不及笑也//及忽發爲笑/又是天機自動/亦不及推排而爲之/是適與笑不自主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 문장에 나오는 造適, 獻笑, 安排, 그리고 다음 문장에 나오는 去化, 入於寥天一은 모두 어떠한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각 표현들이 {...} 한다.) 안배함으로써 거화하면, 마침내 [맹손재처럼] 요천과 하나 되는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安排而去化/乃入於寥天一, ◈ 安排는 명사구로, 아마 '{...}'을 뜻하는 말 같다. 安은 '{...}'는 뜻이다. 排는 본래 '{...}'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孟子》 「滕文公 上」에서 排淮泗, '{...}'라는 말이 있는데, 朱熹는 決排/皆去其壅塞也, '{...}'라고 하였다. 그러면 安排는 '{...}'이 된다. 陸德明은 排에 대해 皮皆反, '{...}'라고 하였다. 郭象과 成玄英은 排를 推移, '{...}'이라고 풀이했다. 安東林은 奚侗이 《莊子補注》에서 排를 誹의 오기라고 보고, '{...}'라고 풀이했다는 설을 소개해 놓았다. 安炳周와 田好根은 朴世堂이 排者/天命之所排而定者, '{...}'라고 한 설을 소개해 놓았다. 그러나 安排는 {...}해야 할 것이다. ◈ 而는 '{...}'처럼 해석된다. 以와 같다. 《墨子》 「尙賢 下」에 使天下之爲善者可而勸也/爲暴者可而沮也, '{...}'라는 말이 있고, 또 같은 편에 上可而利天/中可而利鬼/下可而利人, '{...}'라는 말이 있다. 《呂氏春秋》 「孟春紀 去私」에는 南陽無令/其誰可而爲之, '{...}'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可而는 모두 可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는 뜻이다. 而가 以와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용된 것이다. 또, 《荀子》 「成相」에는 進諫不聽/剄而獨鹿/棄之江, '{...}'라는 말이 있는데, 剄而獨鹿의 而는 以, 즉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수록되어 있고, 또 《荀子》 「成相」의 剄而獨鹿에 대한 王念孫의 주석에도 들어 있다. ◈ 去化는 '{...}'라는 말일 것이다. 去化는 安排처럼 {...}라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化는 '{...}'이므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去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라는 뜻이다. 《漢書》 「匈奴傳 上」에 得漢食物/皆去之, '{...}'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去/棄也/音丘呂反, '{...}'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라는 뜻이다. 《漢書》 「李廣蘇建傳」에 掘野鼠去屮實而食之, '{...}'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去謂藏之也/音丘呂反, '{...}'라고 하였다. 만약 去를 '{...}'라고 한다면, 去化는 '{...}'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去를 '{...}'라고 한다면, 去化는 '{...}'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둘 모두 본문의 의미에 합당하다. ◈ 乃는 부사어로, '{...}'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 入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於는 '{...}'다. 명사구인 寥天一을 받는다. ◈ 寥天 역시 道와 같다. 寥는 '{...}'는 말이다. 空이나 虛와 같다. 天은 '{...}'이다. 虛도 道를 뜻하고. 天도 道를 뜻한다. 陸德明은 寥에 대해 本亦作廖/力彫反//李良救反, '{...}'라고 하였다. ◈ 一은 아마 용언으로, '{...}'는 말일 듯하다. 즉, 寥天一은 '{...}'가 된다. ◈◈ 郭象은 安於推移而與化俱去/故乃入於寂寥而與天爲一也//自此以上/至於子祀/其致一也//所執之喪異/故歌哭不同,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所在皆適/故安任推移/未始非吾/而與化俱去//如此之人/乃能入於寥廓之妙門/自然之一道也, '{...}'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崔本作造敵不及笑/獻芥不及𩐎/安排而造化不及眇/眇不及雄漂淰/雄漂淰不及簟筮/簟筮乃入於漻天一, '{...}'라고 하였다. 《崔譔本》에 더 있다고 하는 문장을 살펴 보자. 아마 獻芥는 獻笑가 잘못된 듯하니, 이를 고쳐 써 보면 造敵不及笑/獻笑不及𩐎/安排而造化不及眇/眇不及雄漂淰/雄漂淰不及簟筮/簟筮乃入於漻天一이 된다. 이렇게 고쳐서 보면 {...} 조금 다르다. 원문은 '{...}'이지만, 《崔譔本》은 '{...}'가 된다. 《崔譔本》에만 있는 𩐎, 眇, 雄漂淰, 簟筮를 풀이해 보면 {...}한 경지로 표현되고 있는데, 《崔譔本》에서는 安排而去化를 安排而造化로 바꾸고, 그 사이에 眇, 雄漂淰, 簟筮의 세 단계가 더 들어 있다는 점이 의뭉스럽다. 安排而造化라고 해도 이 말이 道에 대한 지극한 경지를 표현하는 말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 宣穎은 由此觀之/凡事皆非己所及排/冥冥中有排之者//今但當安於所排/而忘去死化之悲/乃入於空虛之天之至一者耳,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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