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5. 23:18ㆍ시 이야기/대아 문왕지십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시》 번역에는 특별히 고정적으로 참고한 번역서가 없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때는 기타 블로그들을 참고하였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毛詩正義》와 《詩經集傳》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毛詩正義》에는 毛亨, 鄭玄, 孔穎達의 주석이 수록되어 있고, 陸德明의 주석 역시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毛亨의 주석을 傳이라고 하고, 鄭玄의 주석을 箋, 孔穎達의 주석을 疏라고 합니다. 陸德明의 경우, 音義라고 합니다. 다만 상기하였듯, 《毛詩正義》에는 陸德明의 音義가 부분적으로만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經典釋文》을 직접 참고하여, 陸德明의 音義를 모두 인용해 두었습니다. 《詩經集傳》에는 朱熹의 주석이 수록되어 있는데, 朱熹의 주석 역시 傳이라고 합니다. 毛亨과 鄭玄, 朱熹의 주석은 모두 번역하였고, 孔穎達의 주석은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본문을 한 쪽만 따라 번역하지는 않았습니다. 더 나은 설을 택하였고,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엔 제 의견에 따라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추후에 呂祖謙의 《呂氏家塾讀詩記》, 王引之의 《經義述聞》,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그리고 孔穎達의 疏도 번역하여 반영하고 싶은데,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 첫 부분에는 시 전체의 본문과 번역문을 기재하였습니다. 그 뒷부분에는 본문과 번역문, 그리고 주석을 기재해 두었습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毛亨의 설을 소개하고, 또 鄭玄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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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5년 4월 25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文王有聲」
文王有聲
文王이 聲을 有하였도다
문왕이 왕업을 이루었도다
文王有聲、遹駿有聲。遹求厥寧、遹觀厥成。
文王이 聲을 有하였도다. 聲을 駿하게 有하였도다. 厥 寧을 求하고, 厥 成을 觀하였도다.
문왕이 왕업을 이루었도다. 왕업을 위대하게 이루었도다. 백성들의 안녕을 이룩하고, 그 성취를 훌륭하게 완성하였도다.
文王烝哉。
文王은 烝하도다.
문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文王受命、有此武功。旣伐于崇、作邑于豐。
文王은 命을 受하여, 此 武功을 有하였도다. 崇을 伐한 뒤에 豐에 邑을 作하였도다.
문왕은 천명을 받아 이러한 군공을 이루었도다. 숭나라를 정벌한 뒤에 풍에 수도를 세웠도다.
文王烝哉。
文王은 烝하도다.
문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築城伊淢、作豐伊匹。匪棘其欲、遹追來孝。
[문왕은] 淢에 따라 城을 築하였고, 匹에 따라 豐을 作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其 欲을 棘한 것이 匪하다. [문왕은 다만 선왕의 행적을] 追하여서 來하고 孝하였을 뿐이다.
[문왕은] 도랑을 따라 성벽을 지었고, 이치에 따라 풍을 세웠도다. [그러나 이는] 문왕이 바라는 바를 서두른 것이 아니다. [문왕은 다만 선왕의 행적을] 좇아 정진하고 삼갔을 뿐이다.
王后烝哉。
王后는 烝하도다.
군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王公伊濯、維豐之垣、四方攸同、王后維翰。
豐의 垣 덕분에 王의 公이 [세상에] 濯해졌으니, 四方이 攸 同하여서 王后를 翰하였도다.
풍의 성벽 덕분에 왕의 사업이 [세상에] 드러났으니, 사방 제후들이 이에 한 마음으로 군왕을 의지하였도다.
王后烝哉。
王后는 烝하도다.
군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豐水東注、維禹之績、四方攸同、皇王維辟。
禹의 績 덕분에 豐水는 東으로 注하[는데, 무왕이 그 땅에 도읍을 세웠으]니, 四方이 攸 同하여서 皇王[의 덕망]을 辟하였도다.
우의 공적 덕분에 풍수는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무왕이 그 땅에 도읍을 세웠으]니, 사방 제후들이 이에 한 마음으로 제왕[의 덕망]을 본받았도다.
皇王烝哉。
皇王은 烝하도다.
제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鎬京辟廱、自西自東、自南自北、無思不服。
[무왕이] 鎬京에 辟廱을 세우자, 西에서도, 東에서도, 南에서도, 北에서도, [무왕에게] 不服이 無하였다.
[무왕이] 호경에 벽옹을 세우자, 서쪽에서도, 동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모두 [무왕에게] 복종해 왔다.
皇王烝哉。
皇王은 烝하도다.
제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考卜維王、宅是鎬京。維⻱正之、武王成之。
王은 卜을 考하여서 是 鎬京에 宅하였도다. ⻱를 가지고 之를 正하고는, 武王이 [직접] 之를 成하였도다.
왕은 점괘를 살펴서 이 호경에 거처하기로 하였도다. 거북이 점을 통하여 하늘의 명을 듣고는, 무왕이 [직접] 호경을 일으켰도다.
武王烝哉。
武王은 烝하도다.
무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豐水有芑、武王豈不仕。詒厥孫謀、以燕翼子。
豐水에 芑가 有하니, [하늘의 뜻이 내려 온지라,] 武王이 豈 [왕업에] 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왕은 왕업에 매진하여 천하를 다스릴] 謀를 厥 孫에게 詒하였으니, 以 翼子를 燕해 주었도다.
풍숫가에 백묘가 자라니, [하늘의 뜻이 내려 온지라,] 무왕이 어찌 [왕업에] 매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왕은 왕업에 매진하여 천하를 다스릴] 방법을 그 자손에게 전하였으니, 이로써 신실한 아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도다.
武王烝哉。
武王은 烝하도다.
무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文王有聲」
文王有聲
文王이 聲을 有하였도다
문왕이 왕업을 이루었도다
◈◈ 毛亨은 文王有聲/繼伐也//武王能廣文王之聲/卒其伐功也, ‘「文王有聲」은 이어서 정벌한 것이 그 내용이다. 武王은 文王의 聲을 넓혀서, 文王의 伐功을 마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繼伐者/文王伐崇/而武王伐紂, ‘繼伐이라는 말은, 文王이 崇나라를 정벌하고, 武王이 紂를 정벌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豐과 鎬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文王과 武王을 선전하는 글이다. 이 시는 여덟 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 2章 끝에는 文王烝哉가, 3, 4章 끝에는 王后烝哉가, 5, 6章 끝에는 皇王烝哉가, 7, 8章 끝에는 武王烝哉가 나오며 章이 마무리된다. 文王과 王后는 文王을, 皇王과 武王은 武王을 뜻한다. 이런 식으로 후렴구를 반복하는 형식을 煞脚이라고 한다.
文王有聲、遹駿有聲。遹求厥寧、遹觀厥成。
文王이 聲을 有하였도다. 聲을 駿하게 有하였도다. 厥 寧을 求하고, 厥 成을 觀하였도다.
문왕이 왕업을 이루었도다. 왕업을 위대하게 이루었도다. 백성들의 안녕을 이룩하고, 그 성취를 훌륭하게 완성하였도다.
◈ 文王은 周나라의 文王 昌이다.
◈ 有는 용언으로, 아마 ‘이루다’는 말 같다. 聲을 받는다. 爲와 같다. 有와 爲는 서로 혼용되었다. 《孟子》 「滕文公 上」에 人之有道也/飽食暖衣/逸居而無敎/則近於禽獸, ‘사람이 道를 有하더라도, 배 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옷을 입으며, 편안하게 살되, 배우지 않으면, 禽獸에 가깝다 하겠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有는 ‘하다’는 말로, 爲와 같다. 《國語》 「周語」에는 胡有孑然其效戎翟也, ‘어찌 孑然하게 戎과 翟에게 效하는 일을 有하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有는 ‘하다’라는 말로, 爲와 같다. 또, 《國語》 「晉語」에 克國得妃/其有吉孰大焉, ‘國을 이기고 妃를 얻었으니, 장차 무슨 일이 더 길하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春秋左氏傳》 「昭公」 5년에는 其爲吉孰大焉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두 句는 有와 爲가 다를 뿐, 나머지는 같다. 내용도 같을 것이다. 이렇게 사용된 까닭은 有와 爲가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王引之는 爲有/一聲之轉//故爲可訓爲有/有亦可訓爲爲, ‘爲와 有는 소리가 같기 때문에 서로 전용되었다. 그래서 爲는 有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고, 또 有도 爲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有」에 수록되어 있다.
◈ 聲은 체언으로, 아마 ‘업적’, ‘위업’, ‘왕업’ 따위의 말인 듯하다. 聲은 聲聞처럼, 본래 ‘평판’, ‘명성’을 이른다. 그러나 나는 ‘평판’이나 ‘명성’으로 보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업적’처럼 의역하였다.
◈ 遹은 聿처럼 의미 없는 조사인 듯하다. 朱熹는 遹을 聿로 보았는데, 이 설이 타당할 듯하다. 聿은 ‘율’이고, 遹은 ‘휼’이므로, 발음이 비슷하여서 전용되었을 것이다. 鄭玄과 陸德明은 述로 보았는데, 이 述은 아마 ‘말하다’, ‘언급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다. 그러나 나는 이 설을 따르지 않았다. 한편, 《爾雅》 「釋言」에 律/遹/述也, ‘律, 遹은 述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鄭玄과 陸德明의 설과 같다. 같은 책 「釋詁」에는 遹/遵/率/循/由/從/自也, ‘遹, 遵, 率, 循, 由, 從은 自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自는 ‘~로부터’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본문과 어울리지 않는다. 「釋詁」에는 또 遹/遵/率/循也, ‘遹, 遵, 率은 循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循은 ‘좇다’는 뜻이다. 이를 택하여, ‘이치에 따라’, ‘순리를 좇아’처럼 遹을 해석한다면 퍽 어울린다. 그러나 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 鄭玄은 遹/述, ‘遹은 述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述은 아마 ‘말하다’, ‘언급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다. 상기하였듯, 《爾雅》 「釋言」에 이 내용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郭璞은 皆敘述也/方俗語耳, ‘모두 서술하다는 뜻이다. 아마 속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시문의 의미를 고려할 때, 遹을 ‘서술하다’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鄭玄의 주석을 풀이할 때, 나는 述을 ‘말하다’처럼 해석하였으나, 사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陸德明은 遹/尹橘反/述也//又音述, ‘遹은 尹와 橘의 반절로 읽는다. 述이라는 뜻이다. 述이라고 읽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遹義未詳//疑與聿同//發語詞, ‘遹의 의미는 잘 모르겠다. 聿과 같은 말이 아닐까 의뭉스럽다. 발어사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설을 따랐다.
◈ 駿은 부사어로, ‘크게’, ‘위대하게’라는 말이다. 《爾雅》 「釋詁」에 弘/廓/宏/溥/介/純/夏/幠/厖/墳/嘏/丕/弈/洪/誕/戎/駿/假/京/碩/濯/訏/宇/穹/壬/路/淫/甫/景/廢/壯/冢/簡/箌/昄/晊/將/業/席/大也, ‘弘, 廓, 宏, 溥, 介, 純, 夏, 幠, 厖, 墳, 嘏, 丕, 弈, 洪, 誕, 戎, 駿, 假, 京, 碩, 濯, 訏, 宇, 穹, 壬, 路, 淫, 甫, 景, 廢, 壯, 冢, 簡, 箌, 昄、晊, 將, 業, 席은 大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鄭玄, 陸德明, 朱熹의 설이 모두 같다. ▼ 鄭玄은 駿/大, ‘駿은 大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駿音峻/大也, ‘駿은 峻이라고 읽는다. 大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駿/大, ‘駿은 大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求는 용언으로, 아마 ‘이루다’, ‘이룩하다’는 말 같다. 求는 終과 같다. 《爾雅》 「釋詁」에 求/酋/在/卒/就/終也, ‘求, 酋, 在, 卒, 就는 終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終은 ‘마치다’는 말인데, 일을 ‘마치다’는 말은, 곧 일을 ‘이루다’는 뜻이다. ▼ 鄭玄은 求/終, ‘求는 終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朱熹는 求를 ‘바라다’ 그대로 풀이하였다.
◈ 厥寧의 厥은 아마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厥은 其와 같다. 《爾雅》 「釋言」에 厥/其也, ‘厥은 其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寧은 체언으로, ‘안녕’, ‘안정’이라는 뜻일 것이다.
◈ 觀는 용언으로, 아마 ‘훌륭하게 이루다’ 혹은 ‘많이 이루다’는 따위의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觀은 多와 같다. 《爾雅》 「釋詁」에 洋/觀/裒/衆/那/多也, ‘洋, 觀, 裒, 衆, 那는 多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多는 본래 ‘많다’는 말이되, ‘훌륭하다’는 의미도 있다. 《爾雅》에 수록된 본래의 취지는 ‘많다’는 의미인 듯한데, 그렇다면 ‘많이 이루다’처럼 해석할 수 있겠다. 나는 ‘훌륭하게 이루다’는 의미가 본문과 더 합치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렇게 번역하였다. 鄭玄과 陸德明 역시 多로 풀이하였다. ▼ 鄭玄은 觀/多也, ‘觀은 多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觀/古亂反/多也//注同, ‘觀은 古와 亂의 반절로 읽는다. 多라는 뜻이다. 주석에서도 그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朱熹는 觀을 ‘살피다’ 그대로 풀이하였다.
◈ 厥成의 厥은 아마 文王을 가리키는 말 같다. ‘그’처럼 번역하였다.
◈ 成은 체언으로, 아마 ‘성취’, ‘성과’라는 말 같다.
◈◈ 鄭玄은 文王有令聞之聲者/乃述行有令聞之聲之道所致也//所述者/謂太王王季也//又述行終其安民之道/又述行多其成民之德/言周德之世益盛, ‘文王에게는 훌륭한 평판이 있었기에, 훌륭한 평판을 이룰 수 있을 행동거지에 대한 도리와, 그로써 이루는 바를 언급한 것이다. 언급한 바란, 太王과 王季의 일을 이른다. 또, 몸가짐으로서 백성들을 안정시킬 만한 도리를 이룰 방법에 대해 언급하였고, 또 몸가짐으로서 백성들을 이루어 줄 德을 넓힐 방법에 대해 언급하였으니, 이는 周나라의 德이 대대로 더욱 충만하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鄭玄의 해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述이 도통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나는 述을 ‘말하다’, ‘언급하다’처럼 번역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聞音問/本亦作問, ‘聞은 問이라고 읽는다. 판본에 따라 問이라고도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聞과 問에는 모두 ‘평판’이라는 의미가 있다.
◈◈ 亡亡案 : 文王을 선전하는 말 같다.
文王烝哉。
文王은 烝하도다.
문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 烝은 아마 체언으로, ‘참된 군주’라는 말 같다. 여기서는 서술어로 해석되므로, ‘참된 군주다’처럼 해석된다. 《爾雅》 「釋詁」에 林/烝/天/帝/皇/王/后/辟/公/侯/君也, ‘林, 烝, 天, 帝, 皇, 王, 后, 辟, 公, 侯는 君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陸德明은 《韓詩》에서 烝을 美, ‘훌륭하다’라고 풀이한 설을 소개해 두었는데, 이 역시 의미상 타당하다. ▼ 毛亨은 烝/君也, ‘烝은 군주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烝을 君, ‘군주’로 풀이하였다. ▼ 陸德明은 烝/之丞反/君也//韓詩云/美也, ‘烝은 之와 丞의 반절로 읽는다. 군주라는 뜻이다. 《韓詩》에서는 훌륭하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烝/君也, ‘烝은 군주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哉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로, ‘~하도다’처럼 해석된다.
◈◈ 鄭玄은 君哉者/言其誠得人君之道, ‘君哉라는 말이니, 이는 진정 군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를 갖추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文王有聲/遹駿有聲/遹求厥寧/遹觀厥成/文王烝哉를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此詩言文王遷豐/武王遷鎬之事/而首章推本之曰/文王之有聲也/甚大乎其有聲也/蓋以求天下之安寧/而觀其成功耳/文王之德如是/信乎其克君也哉, ‘이 시에서는 文王이 豐으로 천도하고, 武王이 鎬로 천도한 일을 설명하고 있는데, 첫 장에서 주제를 드러내며 “文王이 有聲하였고, 文王의 有聲은 아주 위대하였다. 文王은 대체로 天下의 안녕을 바라고, 天下의 성취를 살폈도다. 文王의 德이 이와 같았으니, 진정 군주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文王이 참된 군주였다는 말이다.
文王受命、有此武功。旣伐于崇、作邑于豐。
文王은 命을 受하여, 此 武功을 有하였도다. 崇을 伐한 뒤에 豐에 邑을 作하였도다.
문왕은 천명을 받아 이러한 군공을 이루었도다. 숭나라를 정벌한 뒤에 풍에 수도를 세웠도다.
◈ 受는 용언으로, ‘받다’는 말이다. 命을 받는다.
◈ 命은 체언으로, ‘天命’이다. 紂의 ‘명령’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有此武功의 有는 용언으로, 아마 ‘이루다’는 말일 것이다. 有는 爲와 같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文王有聲의 有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此는 若此처럼, ‘이러한’, ‘이와 같이’라고 해석된다.
◈ 武功은 체언으로, ‘軍功’을 이른다. 군사적인 공업을 武功이라고 한다. 「大雅 文王之什」의 「皇矣」에 文王이 密, 阮, 徂, 共의 네 나라를 정벌한 일, 그리고 崇나라를 정벌한 일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를 이를 것이다. ▼ 鄭玄은 武功謂伐四國及崇之功也, ‘武功이란, 네 나라와 崇나라를 정벌한 공적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四國이란, 密, 阮, 徂, 共의 네 나라를 이른다. 상기하였듯 이 내용은 「皇矣」에 나온다. ▼ 朱熹는 伐崇事/見皇矣篇, ‘崇나라를 정벌한 일은 「皇矣」에 나온다’라고 하였다.
◈ 旣는 ‘~한 뒤에’라는 말이다. 伐于崇을 받는다.
◈ 伐은 용언으로, ‘정벌하다’는 말이다.
◈ 旣伐于崇의 于는 아마 ‘~를’이라는 말 같다. 崇을 받는다. 이 于는 ‘~에서’, ‘~로’처럼 해석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于를 ‘~로’처럼 해석한다면, 旣伐于崇을 ‘崇나라로 정벌을 간 뒤’처럼 할 수도 있겠다.
◈ 崇은 나라 이름이다. 關中 지역에 있었다.
◈ 作은 용언으로, ‘만들다’는 말이다. 邑을 받는다. 여기서는 ‘세우다’처럼 번역하였다.
◈ 邑은 체언으로, ‘수도’다. ‘都邑’이라는 말과 같다. 《爾雅》 「釋地」에 邑外謂之郊, ‘邑 바깥을 郊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郭璞은 邑/國都也, ‘邑은 나라의 수도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作邑者/徙都于豐以應天命, ‘作邑이라는 말은, 豐으로 수도를 옮겨서 天命에 응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應/應對之應, ‘應은 應對라고 할 때의 應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作邑/徙都也, ‘作邑이란, 수도를 옮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作邑于豐의 于는 ‘~에’처럼 해석된다.
◈ 豐은 지명이다. 본래 崇나라의 수도였을 것이다. ▼ 朱熹는 豐/即崇國之地/在今鄠縣杜陵西南, ‘豐은 곧 崇나라의 땅이다. 지금의 鄠縣 杜陵 서남쪽이었다’라고 하였다. ‘지금’이란, 趙宋 때를 뜻한다.
◈◈ 亡亡案 : 周나라가 본래 岐山 부근에 있다가, 崇나라를 정복한 뒤에 崇나라의 수도로 그 수도를 옮겼다는 말이다. 아마 崇나라는 당시에 꽤 큰 나라였던 것 같다. 文王이 崇나라를 정벌한 이야기는 「大雅 文王之什」의 「皇矣」 말미에 나온다.
文王烝哉。
文王은 烝하도다.
문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 文王烝哉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朱熹는 文王受命/有此武功/旣伐于崇/作邑于豐/文王烝哉를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築城伊淢、作豐伊匹。匪棘其欲、遹追來孝。
[문왕은] 淢에 따라 城을 築하였고, 匹에 따라 豐을 作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其 欲을 棘한 것이 匪하다. [문왕은 다만 선왕의 행적을] 追하여서 來하고 孝하였을 뿐이다.
[문왕은] 도랑을 따라 성벽을 지었고, 이치에 따라 풍을 세웠도다. [그러나 이는] 문왕이 바라는 바를 서두른 것이 아니다. [문왕은 다만 선왕의 행적을] 좇아 정진하고 삼갔을 뿐이다.
◈ 築은 용언으로, 건물을 ‘쌓다’, ‘짓다’, ‘세우다’는 말이다. 城을 받는다.
◈ 城은 체언으로, ‘성’이다. 아마 문맥상 ‘성벽’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한다.
◈ 伊는 아마 以처럼, ‘~로써’, ‘~에 따라’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를 들어 築城伊淢은 築城以淢으로, ‘淢에 따라 성을 지었다’는 말일 것이고, 作豐伊匹은 作豐以匹로, ‘匹에 따라 豐을 세웠다’는 말일 것이다. 다만, 뒤에 나오는 王公伊濯에서는 伊를 以처럼 해석할 수가 없으니, 의뭉스럽다. 다른 글에서도 伊가 以처럼 사용된 사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찾지 못했다. 일반적으로는 伊를 의미 없는 조사로 해석하는 듯하다. 이 때 伊는 維와 같다. 《爾雅》 「釋詁」에 伊/維也, ‘伊는 維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淢은 체언으로, 成과 成 사이의 ‘도랑’을 이르는 말 같다. 洫과 같다. 毛亨, 鄭玄, 陸德明, 朱熹 모두가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成이란, ‘아르’, ‘헥타르’ 같은 일종의 면적 단위다. 《論語》 「學而」의 道千乘之國 부분에 대해, 馬融은 司馬法/六尺爲步/步百爲畝/畝百爲夫/夫三爲屋/屋三爲井/井十爲通/通十爲成/成出革車一乘, ‘《司馬法》에 “여섯 자를 步라고 하고, 步가 백이면 畝라고 하고, 畝가 백이면 夫라고 하고, 夫가 셋이면 屋이라 하고, 屋이 셋이면 井이라고 하고, 井이 열이면 通이라 하고, 通이 열이면 成이라 한다. 成에서 革車 한 乘이 나온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지금의 《司馬法》엔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成은 일정한 면적을 이른다. 한 城은 여러 成들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成들 사이에는 경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 경계에 도랑을 두었는데, 그 도랑이 바로 淢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대구 안에는 수성구도 있고, 동구도 있는데, 옛날 중국인들은 수성구와 동구의 경계를 따라 물이 흐르는 도랑을 만들어서 구분하였던 모양이다. ▼ 毛亨은 淢/成溝也, ‘淢은 成의 도랑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方十里曰成//淢/其溝也/廣深各八尺, ‘반경 10里를 成이라고 한다. 淢이란, 그 成의 도랑을 이른다. 너비와 깊이는 각각 여덟 자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廣/古曠反//深/尸鴆反, ‘廣은 古와 曠의 반절로 읽는다. 深은 尸와 鴆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淢/況域反/溝也//成閒有淢/廣深八尺//字又作洫/韓詩云/洫/深池, ‘淢은 況과 域의 반절로 읽는다. 도랑이라는 뜻이다. 成들 사이에는 淢이 있다. 너비와 깊이는 여덟 자다. 淢는 洫이라고도 되어 있는데, 《韓詩》에서는 洫을 깊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淢/城溝也//方十里爲成//成間有溝/深廣各八尺, ‘淢은 城의 도랑이다. 반경 10里를 成이라고 한다. 成들 사이에는 도랑이 있는데, 깊이와 너비가 각각 여덟 자다’라고 하였다. 城溝也에서 城은 成의 오기인 듯 보인다. 朱熹의 주석은 보다시피 毛亨, 鄭玄, 陸德明의 주석을 표절한 글인데, 이 중 淢/城溝也는 毛亨의 淢/成溝也을 베낀 것이다. 여기서 成은 면적 단위를 의미하지, ‘城’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朱熹가 잘못 베꼈거나, 아니면 단순한 오기일 것이다.
◈ 作은 용언으로, ‘짓다’, ‘세우다’는 말이다. 豐을 받는다.
◈ 豐은 지명이다. 文王이 崇나라를 병탄한 뒤, 崇나라 땅에 세웠다는 도시다.
◈ 匹은 체언으로, 아마 ‘조화’, ‘이치’가 아닐까 한다. 匹은 본래 ‘짝’, ‘배우자’를 뜻한다. 둘이 함께 짝을 이루니, 곧 ‘조화’라고 볼 수도 있다. ‘조화’는 곧 세상 만물이 어우러지는 ‘이치’다. 文王은 崇나라를 병탄한 뒤, 崇나라의 땅에 豐을 세웠는데, 作豐伊匹은 아마 그 까닭을 설명하는 말인 듯하다. 이리도 생각해 보고, 저리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 설명이 가장 나아 보인다. ▼ 毛亨은 匹/配也, ‘匹은 짝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匹을 偶라고 풀이했다. 偶는 ‘짝’으로, 配과 같다. ▼ 朱熹는 匹/稱, ‘匹은 稱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稱은 아마 ‘알맞다’, ‘걸맞다’는 말인 듯하다.
◈ 匪는 ‘~가 아니다’는 말이다. 非와 같다. 棘其欲을 받는다. 匪棘其欲은 ‘棘其欲하였기 때문이 아니다’처럼 해석된다.
◈ 棘은 용언으로, ‘서두르다’는 말일 것이다. 其欲을 받는다. 이 棘은 亟과 같다. 亟은 ‘빠르다’는 말이다. 陸德明은 《經典釋文》에 이 棘을 亟으로 인용해 두기도 하였다. ▼ 鄭玄은 棘/急, ‘棘은 서두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亟/居力反/下亟同//或作棘, ‘亟은 居와 力의 반절로 읽는다. 밑에 나오는 亟도 그렇게 읽는다. 棘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상기하였듯, 《經典釋文》에는 棘이 亟으로 인용되어 있다. ▼ 朱熹 역시 棘/急也, ‘棘은 서두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其欲의 其는 文王을 가리키는 말이다. 欲을 받는다.
◈ 欲은 체언으로, ‘욕구’, ‘욕망’이라는 뜻이다. 文王이 ‘원하는 바’를 이른다. 陸德明은 《經典釋文》에 欲을 慾으로 인용해 두었다. 즉, 匪棘其欲은 ‘文王이 원하는 바를 서두르지 않다’는 말이 된다. ▼ 陸德明은 慾音欲/本亦作欲, ‘慾은 欲이라고 읽는다. 판본에 따라 欲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상기하였듯, 《經典釋文》에는 欲이 慾으로 인용되어 있다.
◈ 遹은 의미 없는 조사일 것이다. 文王有聲/遹駿有聲의 遹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追는 용언으로, 아마 ‘좇다’는 말 같다. 先王들을 ‘좇다’는 의미일 것이다. 追는 본래 ‘쫓다’는 말로, 이는 곧 ‘좇다’, ‘따르다’는 뜻과 같다.
◈ 來는 용언으로, ‘노력하다’, ‘정진하다’는 말일 것이다. 앞편인 「下武」에서도 來가 ‘노력하다’는 의미로 풀이된 사례가 있었다. 來는 勤과 같다. 《爾雅》 「釋詁」에 勞/來/強/事/謂/翦/篲/勤也, ‘勞, 來, 強, 事, 謂, 翦, 篲는 勤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勤은 ‘근면하다’, ‘노력하다’는 말이다. ▼ 鄭玄은 來/勤也, ‘來는 노력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孝는 용언으로, 아마 ‘사려 깊다’, ‘삼가다’는 말이 아닐까 하다. 앞편인 「下武」에 孝思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때 孝思를 ‘사려 깊다’처럼 풀이하였다. 孝는 ‘부모를 잘 모시는 일’을 이르고, 思는 ‘사려 깊다’는 말인데, 생각이 깊어야 효도도 잘 할 법하다. 鄭玄과 朱熹는 孝를 ‘효성’ 그대로 풀이했는데, 나는 ‘효성’이라는 말이 본문의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따르지 않았다.
◈◈ 鄭玄은 文王受命而猶不自足/築豐邑之城/大小適與城偶/大於諸侯/小於天子之制//此非以急成從己之欲/欲廣都邑/乃述追王季勤孝之行/進其業也, ‘文王은 命을 받았지만, 되려 만족하지 않고, 豐邑의 성을 쌓았는데, 크고 작은 것들이 城偶와 맞게 하였으니, 큰 것은 제후의 법도에 맞게, 작은 것은 天子의 법도에 맞았다. 이는 文王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대로 급하게 처리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읍을 확장하려 하였기 때문으로, 이에 王季의 효행을 述追하여, 왕업을 정진시켰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城偶는 아마 성에 지은 누각을 이르는 듯한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行/下孟反, ‘行은 下와 孟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崇나라를 멸망시킨 뒤, 崇나라 땅에다가 豐을 세우고, 성을 쌓았는데, 文王이 이렇게 한 것은 文王의 개인적인 탐욕이나 공적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先王들의 방침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王后烝哉。
王后는 烝하도다.
군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 王后는 체언으로, ‘군왕’을 이른다. 文王을 이른다. 王은 물론 ‘군주’다. 后 역시 ‘군주’를 이른다. 《爾雅》 「釋詁」에 林/烝/天/帝/皇/王/后/辟/公/侯/君也, ‘林, 烝, 天, 帝, 皇, 王, 后, 辟, 公, 侯는 君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后/君也, ‘后는 군주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王后/亦指文王也, ‘王后 역시 文王을 가리키는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 烝哉에 대해서는 文王烝哉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鄭玄은 變諡言王后者/非其盛事/不以義諡, ‘시호를 바꾸어서 王后라고 한 것은, 文王이 일을 盛한 경우가 아니라서 義諡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앞에서는 文王烝哉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王后烝哉라고 말이 바뀌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지 논한 말이다.
◈◈ 朱熹는 築城伊淢/作豐伊匹/匪棘其欲/遹追來孝/王后烝哉를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또, 言文王營豐邑之城/因舊溝爲限而築之/其作邑居/亦稱其城而不侈大//皆非急成己之所欲也/特追先人之志而來致其孝耳, ‘이러한 뜻이다. 文王이 豐邑의 성을 지을 때, 옛 도랑을 경계로 하여 쌓았고, 거주지를 만들 때에도 성에 맞도록 지었을 뿐, 사치하지 않았다. 모두 文王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서둘러 한 일이 아니요, 다만 옛 사람들의 뜻을 따르고, 孝心을 다한 경우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앞에서는 文王烝哉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왜 王后烝哉라고 했을까. 鄭玄이 나름 설명을 해 두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단순히 반복을 피하기 위해 말을 바꿨을 수도 있겠다.
王公伊濯、維豐之垣、四方攸同、王后維翰。
豐의 垣 덕분에 王의 公이 [세상에] 濯해졌으니, 四方이 攸 同하여서 王后를 翰하였도다.
풍의 성벽 덕분에 왕의 사업이 [세상에] 드러났으니, 사방 제후들이 이에 한 마음으로 군왕을 의지하였도다.
◈ 내 생각에, 이 節인 王公伊濯/維豐之垣/四方攸同/王后維翰과, 이 다음 節인 豐水東注/維禹之績/四方攸同/皇王維辟에서, 維들은 모두 도치하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 같다. 王公伊濯/維豐之垣은 豐之垣/王公伊濯으로, ‘豐之垣 덕분에 王의 公이 濯해졌다’가 되고, 王后維翰은 翰王后로, ‘王后를 翰하였다’는 말이 된다. 豐水東注/維禹之績은 禹之績/豐水東注으로, ‘禹之績 덕분에 豐水는 東으로 注한다’는 말이 되고, 皇王維辟은 辟皇王으로, ‘皇한 王을 辟한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의미가 잘 통한다.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 王은 체언으로, ‘왕’이다. 文王을 이른다.
◈ 公은 체언으로, ‘사업’이다. 公은 事와 같다. 鄭玄은 事로 풀이했고, 朱熹는 功으로 풀이했는데, 朱熹의 설은 의역에 가깝다. 앞의 편인 「靈臺」에 矇瞍奏公, ‘맹인들은 公을 奏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毛亨과 朱熹는 모두 公/事也, ‘公은 일을 뜻한다’라고 하였다. 「靈臺」의 公은 ‘古事’를 이른다. ▼ 鄭玄은 公/事也, ‘公은 사업을 뜻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公/功也, ‘公은 공적을 뜻한다’라고 하였다.
◈ 伊는 의미 없는 조사 같다. 주격 조사처럼 해석해도 말이 된다. 주어는 王公이다.
◈ 濯은 용언으로, 세상에 ‘드러나다’는 말일 것이다. 濯은 大와 같다. 大는 ‘위대해지다’, ‘커지다’는 말이다. 위대해지고, 커지니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 그래서 ‘드러나다’는 뜻과 통한다. 毛亨은 大라고 풀이했고, 朱熹는 著明이라고 풀이했는데, 모두 맥락상 의미는 같다. 陸德明은 《韓詩》에서 美, ‘훌륭해지다’라고 풀이했다는 설을 소개해 두었는데, 이 역시 좋다. 《爾雅》 「釋詁」에 弘/廓/宏/溥/介/純/夏/幠/厖/墳/嘏/丕/弈/洪/誕/戎/駿/假/京/碩/濯/訏/宇/穹/壬/路/淫/甫/景/廢/壯/冢/簡/箌/昄/晊/將/業/席/大也, ‘弘, 廓, 宏, 溥, 介, 純, 夏, 幠, 厖, 墳, 嘏, 丕, 弈, 洪, 誕, 戎, 駿, 假, 京, 碩, 濯, 訏, 宇, 穹, 壬, 路, 淫, 甫, 景, 廢, 壯, 冢, 簡, 箌, 昄、晊, 將, 業, 席은 大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方言》에도 碩/沈/巨/濯/訏/敦/夏/于/大也, ‘碩, 沈, 巨, 濯, 訏, 敦, 夏, 于는 大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濯/大, ‘濯은 大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濯/直角反/大也//韓詩云/美也, ‘濯은 直과 角의 반절로 읽는다. 大라는 뜻이다. 《韓詩》에서는 훌륭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朱熹는 濯/著明也, ‘濯은 유명해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維豐之垣의 維는 상기하였듯 도치를 표시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王公伊濯/維豐之垣은 豐之垣/王公伊濯으로, ‘豐之垣 덕분에 王의 公이 濯해졌다’는 말이 된다.
◈ 豐之垣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처럼 해석된다.
◈ 垣은 체언으로, ‘담’, ‘담장’이다. 아마 여기서는 文王이 豐에 쌓았다는 ‘성벽’을 이를 것이다. 《說文解字》 「土部」에 垣/牆也, ‘垣은 담이다’라는 말이 있다. ▼ 陸德明은 垣音𡋡, ‘垣은 𡋡이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𡋡은 袁과 같다.
◈ 四方은 체언으로, ‘주변 국가들’, ‘四方의 제후들’을 이른다. 殷나라를 배신하고 周나라에 영합한 나라들을 뜻할 것이다.
◈ 攸는 부사어로, ‘그래서’, ‘이에’처럼 해석된다. 攸는 所以와 같다. 所以는 ‘그래서’처럼 해석되기도 하는데, 본문의 攸 역시 그렇게 해석된다. 그러면 攸가 所以로 해석된다는 점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書》 「周書 洪範」에 我不知其彝倫攸敘, ‘나는 그 彝倫가 敘한 攸를 모르겠다’라는 말이 있는데, 王肅은 이를 我不知常倫所以次敘라고 풀이하였다. 곧, 攸는 所以와 같다. 이 부분에서는 ‘~한 까닭’으로 해석된다. 또, 《書》 「周書 大誥」에 若涉淵水/予惟往求朕攸濟, ‘물을 건널 때, 내가 濟할 攸을 구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安國은 이를 若涉淵水/往求我所以濟渡라고 풀이하였다. 즉, 攸는 所以다. 여기서는 ‘~하는 곳’처럼 해석된다. 이처럼 해석되는 양상은 다르지만, 攸는 所以처럼 해석된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由猶攸」에 수록되어 있다.
◈ 同은 용언으로, 아마 ‘함께하다’, ‘모이다’, ‘마음을 모으다’라는 따위의 표현 같다. 나는 문맥상 부사어처럼 번역하였다.
◈ 王后는 체언으로, ‘군왕’을 이른다. 文王을 뜻한다. 翰의 목적어인 듯하다.
◈ 王后維翰의 維는 상기하였듯 도치를 표시하는 말 같다. 王后維翰은 翰王后와 같다.
◈ 翰은 용언으로, 아마 ‘의지하다’는 말 같다. 王后를 받는다. 翰은 ‘줄기’를 뜻한다. 줄기는 곧고 단단하므로 의지할 수 있다. 아마 이렇게 파생시켜 사용한 듯하다. 《爾雅》 「釋詁」에 楨/翰/儀/榦也, ‘楨, 翰, 儀는 줄기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翰/幹也, ‘翰은 줄기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翰/戶旦反/幹也//徐音寒, ‘翰은 戶와 旦의 반절로 읽는다. 줄기라는 뜻이다. 徐邈은 寒이라고 읽는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 鄭玄은 文王述行大王王季之王業/其事益大//作邑於豐/城之旣成/又垣之/立宮室/乃爲天下所同心而歸之//王后爲之幹者/正其政敎/定其法度, ‘文王은 大王과 王季의 왕업을 기술하고, 이행하였으니, 文王의 사업은 더욱 커졌다. 豐에 도읍을 세웠는데, 성은 이미 있었고, 또 벽을 쌓았으며, 궁실을 지었다. 이에 天下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귀부해 온 것이다. 王后에 대해 줄기라고 표현한 것은, 정치와 교화를 바로잡고, 법도를 정하였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文王이 豐을 정비하자, 사방 제후들이 귀부해 왔다는 말이다.
王后烝哉。
王后는 烝하도다.
군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 王后烝哉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朱熹는 王公伊濯/維豐之垣/四方攸同/王后維翰/王后烝哉를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王之功所以著明者/以其能築此豐之垣故爾//四方於是來歸/而以文王爲楨榦也, ‘文王의 공적이 드러난 것은, 豐에 성벽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이에 와서 귀부하고는, 文王을 줄기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줄기로 삼았다’는 말은 곧 ‘의지했다’는 뜻이다.
◈◈ 亡亡案 : 文王을 선전하는 말이다.
豐水東注、維禹之績、四方攸同、皇王維辟。
禹의 績 덕분에 豐水는 東으로 注하[는데, 무왕이 그 땅에 도읍을 세웠으]니, 四方이 攸 同하여서 皇王[의 덕망]을 辟하였도다.
우의 공적 덕분에 풍수는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무왕이 그 땅에 도읍을 세웠으]니, 사방 제후들이 이에 한 마음으로 제왕[의 덕망]을 본받았도다.
◈ 이 章의 주제는 豐이 아니라 鎬, 즉 鎬京인 듯하다. 이 점에 유의해서 읽어야 하겠다. 豐은 文王 때 천도한 곳이고, 鎬는 武王 때 천도한 곳인데, 豐水를 사이에 두고 가까운 곳에 있다.
◈ 상기하였듯, 維는 도치를 표시하는 말일 것이다. 豐水東注/維禹之績은 禹之績/豐水東注로 해석해야 할 것이고, 皇王維辟은 辟皇王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 豐水는 강 이름이다. 渭水의 지류다. 《水經注》에서 酈道元은 豐水出豐溪西北//流分爲二水/一水東北流爲枝津/一水西北流/又北交水自東入焉//又北昆明池水注之/又北逕靈臺西/又北至石墩注于渭, ‘豐水는 豐溪 서북쪽에서 나온다. 흐르다가 두 줄기로 나뉜다. 한 줄기는 동북쪽으로 흘러서 枝津이 되고, 한 줄기는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또 북쪽에서 강과 만난다. 동쪽에서부터 들어 간다. 또, 북쪽에서 昆明池의 물이 흘러 들어 가고, 또 북쪽으로 靈臺의 서쪽을 지난다. 또, 북쪽으로 石墩에 이르면 渭水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豐水東北流/徑豐邑之東/入渭而注于河, ‘豐水는 동북쪽으로 흘러, 豐邑 동쪽을 지나, 渭水에 합류하여 黃河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 東은 부사어로, ‘동쪽으로’라는 뜻이다.
◈ 注는 용언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말이다.
◈ 豐水東注/維禹之績의 維는 도치를 표시하는 말이다. 豐水東注/維禹之績은 禹之績/豐水東注와 같다.
◈ 禹는 夏禹다.
◈ 禹之績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처럼 해석된다.
◈ 績은 체언으로, ‘공적’이다. ▼ 毛亨은 績/業, ‘績은 공업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績/功, ‘績은 공적을 뜻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績/功也, ‘績은 공적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四方攸同은 ‘사방 제후들이 이에 한 마음으로’처럼 해석된다.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皇王은 체언으로, ‘제왕’이라는 말일 것이다. 皇도 ‘왕’이고, 王도 ‘왕’이다. 따라서 皇王 역시 ‘왕’이라는 말이 된다. 이는 武王을 가리킨다. 상기하였듯, 이 章의 주제는 豐이 아니라 鎬로 보아야 한다. 豐으로 천도한 사람은 文王이지만, 그 뒤에 鎬로 천도한 사람은 武王이다. 따라서 이 皇王도, 또 皇王烝哉의 皇王도 모두 武王을 뜻한다. 첫 부분에 豐水라는 말이 나와서 괜히 헷갈린다. 朱熹는 武王으로 보았다. 皇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大로 보고, ‘위대한’처럼 해석할 수 있다. 이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로는, 王으로 볼 수 있다. 두 설 모두 타당성이 있다. 《說文解字》 「王部」에 皇/大也, ‘皇은 大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고, 毛亨 역시 皇을 大로 풀이하였다. 《爾雅》 「釋詁」에 暀暀/皇皇/藐藐/穆穆/休/嘉/珍/褘/懿/鑠/美也, ‘暀暀, 皇皇, 藐藐, 穆穆, 休, 嘉, 珍, 褘, 懿, 鑠은 훌륭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맥락이 같다. 이 것이 첫 번째 설의 근거다. 《爾雅》 「釋詁」에는 林/烝/天/帝/皇/王/后/辟/公/侯/君也, ‘林, 烝, 天, 帝, 皇, 王, 后, 辟, 公, 侯는 군주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것이 두 번째 설의 근거다. 그런데, 후렴구를 생각해 보면, 文王烝哉라는 말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王后烝哉라는 말이 있었다. 이 章에서부터는 皇王烝哉라는 말이 나오며, 이 뒤의 章에는 武王烝哉라는 말이 나온다. 文王과 武王이야 文王과 武王을 의미한다. 그런데 王后라는 말은, 王과 后가 모두 ‘왕’을 뜻하였으므로, 그 자체로 ‘왕’을 뜻한다. 만약 이 句의 皇王이라는 표현이 王后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 말이라면, 皇王을 ‘皇한 王’, 즉 ‘위대한 왕’이라고 보기 보다는, 王后처럼 ‘왕’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는 이 점에 착안하여 皇王을 ‘왕’으로 보고, ‘제왕’이라고 번역하였다. ▼ 毛亨은 皇/大也, ‘皇은 위대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 역시 皇을 大라고 풀이하였다. ▼ 朱熹는 皇王/有天下之號/指武王也, ‘皇王은 天下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르는 표현이다. 武王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 皇王維辟의 維는 상기하였듯 도치를 표시하는 말일 것이다. 皇王維辟은 辟皇王과 같다.
◈ 辟은 용언으로, 아마 ‘본받다’는 말일 것이다. 辟에는 설이 두 가지 있는데, ‘군주’로 볼 수도 있고, ‘본받다’라고 할 수도 있다. 《爾雅》 「釋詁」에 林/烝/天/帝/皇/王/后/辟/公/侯/君也, ‘林, 烝, 天, 帝, 皇, 王, 后, 辟, 公, 侯는 군주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鄭玄과 朱熹 역시 ‘군주’라고 풀이하였다. 이 것이 첫 번째 설의 근거다. 陸德明은 婢와 亦의 반절로 읽을 수 있고, 이 때는 法, ‘본받다’라고 해석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두 번째 설의 근거다. 문맥상 둘 다 말이 되는데, ‘본받다’ 쪽이 더 간명한 듯하여 나는 그 설을 취하였다. ▼ 鄭玄은 辟/君也, ‘辟은 군주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辟音璧/君也//注及下皆同//又音婢亦反/法也, ‘𨐓은 璧이라고 읽는다. 군주라는 뜻이다. 주석 및 뒤의 글에서도 모두 그렇게 읽는다. 婢와 亦의 반절로 읽기도 하는데, 이 때는 法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辟/君也, ‘辟은 군주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昔堯時洪水/而豐水亦氾濫爲害//禹治之/使入渭/東注于河/禹之功也//文王武王今得作邑於其旁地/爲天下所同心而歸//大王爲之君/乃由禹之功/故引美之//豐邑在豐水之西/鎬京在豐水之東, ‘옛날 堯가 군림할 때 물이 넘쳤는데, 豐水 역시 범람해서 문제가 되었다. 禹가 이를 다스려서, 이를 渭水로 합치고, 동쪽으로 黃河에 흘러 들어 가도록 만들었으니, 이것이 禹의 공적이었다. 이 부분에서 文王과 武王은 그 근처 지역에 도읍을 세웠는데, 天下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귀부해 왔다. 사람들이 이처럼 위대한 왕을 군주로 모시되, 도리어 禹의 공적에 근거하였으니, 이는 그 사건을 끌고 와서 찬미한 것이다. 豐邑은 豐水 서쪽에 있고, 鎬京은 豐水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氾/芳劒反/字亦作汎//濫/力暫反//大王/此及下言大者/並如字, ‘氾은 芳과 劒의 반절로 읽는다. 이 글자는 汎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濫은 力과 暫의 반절로 읽는다. 大王과 뒤에 나오는 大는 모두 글자 그대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치수를 잘한 사람은 禹인데, 제후들이 왜 武王을 군주로 모셨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武王이 禹를 본받았기 때문일까. 鄭玄의 설에 따르면, 豐과 鎬가 바로 禹가 치적을 세운 지역에 있기 때문에, 禹의 고사를 끌어 와서 文王과 武王을 찬미하였다고 하였다. 이 설이 그럴 듯하다. 이 설에 근거하여 번역하였다.
皇王烝哉。
皇王은 烝하도다.
제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 皇王은 체언으로, ‘왕’을 이른다.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武王을 뜻한다.
◈ 烝哉에 대해서는 文王烝哉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鄭玄은 變王后言大王者/武王之事又益大, ‘王后라고 하다가 위대한 왕이라고 표현을 바꾼 까닭은, 武王의 사업이 또 더욱 신장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大王은 皇王烝哉의 皇王을 이르는 말이다.
◈◈ 朱熹는 豐水東注/維禹之績/四方攸同/皇王維辟/皇王烝哉를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言豐水東注/由禹之功/故四方得以來同於此/而以武王爲君//此武王未作鎬京時也, ‘이런 뜻이다. 豐水가 동쪽으로 흘러 들어 가는 것은 禹의 공적 덕분이다. 이에 사방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는 武王을 주군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武王이 아직 鎬京을 건설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武王을 선전하는 글이다.
鎬京辟廱、自西自東、自南自北、無思不服。
[무왕이] 鎬京에 辟廱을 세우자, 西에서도, 東에서도, 南에서도, 北에서도, [무왕에게] 不服이 無하였다.
[무왕이] 호경에 벽옹을 세우자, 서쪽에서도, 동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모두 [무왕에게] 복종해 왔다.
◈ 鎬京辟廱은 武王이 ‘鎬京과 辟廱을 세웠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고, ‘鎬京에 辟廱을 세웠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후자처럼 번역하였다.
◈ 鎬京은 부사어로, ‘鎬京에’처럼 해석된다. 鎬京은 지명이다. 西周의 수도였다. 武王 發이 세웠다. 豐水를 중간에 두고, 서쪽에는 豐이 있었고, 동쪽에는 鎬가 있었다고 한다. 《史記》 「秦始皇本紀」에 吾聞周文王都豐/武王都鎬/豐鎬之閒/帝王之都也, ‘내가 듣기로, 周나라의 文王은 豐에 수도를 정했고, 武王은 鎬에 수도를 정했다. 豐과 鎬 지역은 제왕의 도읍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鎬가 바로 鎬京이다. 그런데 武王이 鎬京로 천도했다는 말은 이상하게도 「周本紀」에는 나오지 않는다. ▼ 朱熹는 鎬京/武王所營也//在豐水東/去豐邑二十五里//張子曰/周家自后稷居邰/公劉居豳/大王邑岐/而文王則遷于豐/至武王又居于鎬//當是時/民之歸者日衆//其地有不能容/不得不遷也, ‘鎬京은 武王이 지은 곳이다. 豐水의 동쪽에 있었고, 豐邑에서 25里 떨어져 있었다. 張子는 이렇게 말했다. “周나라는 后稷 때는 邰에 살았고, 公劉 때는 豳에 살았으며, 大王 때는 岐에 수도를 두었다. 그런데 文王 때는 豐으로 천도하였고, 武王에 이르러서는 다시 鎬에 거처하였다. 이 때에는 귀부해 오는 백성들이 나날이 많아졌기에, 그 땅에 백성들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어절 수 없이 옮겼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張子란, 趙宋의 張載를 이른다.
◈ 辟廱은 용언으로, ‘辟廱을 세우다’는 말일 듯하다. 주석을 보면, 鄭玄은 ‘辟癰의 禮를 행하였다’처럼 해석하였고, 朱熹는 ‘辟癰에서 학문을 講하고, 禮를 행했다’처럼 해석하였다. 辟廱은 辟廱宮을 이른다. 太學, 太廟, 明堂 같은 기관의 이름이다. 교화를 행하는 기관으로 보인다. 《蔡中郞集》 「明堂月令論」에 取其四面周水圜如璧/則曰辟廱, ‘네 면이 물을 둘러싼 모습이 구슬 같기 때문에 辟廱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또, 《漢書》 「平帝紀」에 安漢公奏立明堂辟廱, ‘安漢公이 明堂과 辟廱을 세우자고 상주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應劭는 辟廱者/象璧圜/雍之以水/象敎化流行, ‘辟廱이라는 것은 구슬을 본뜬 것으로,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교화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본따서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들을 보면, 辟廱은 교화를 펴는 기관이되, 교화가 물처럼 퍼지는 모습을 본따서 지었기 때문에 특별히 辟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할 수 있겠다. 張載와 朱熹는 교육 기관이라고 하였는데, 아마 이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辟廱이라는 말은 太學 같은 표현과는 따로 사용되므로, 목적은 같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朱熹는 辟廱/說見前篇//張子曰/靈臺辟廱/文王之學也//鎬京辟廱/武王之學也//至此始爲天子之學矣, ‘辟廱에 대한 설명은 앞의 편에 기재해 두었다. 張子는 이렇게 말했다. “靈臺의 辟廱은 文王의 학교다. 鎬京의 辟廱은 武王의 학교다. 武王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天子의 학교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張子란, 趙宋의 張載를 이른다. 앞의 편이란, 「靈臺」를 이른다.
◈ 自는 부사어로, ‘~로부터’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에서도’처럼 해석된다. ▼ 鄭玄은 自/由也, ‘自는 由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由 역시 ‘~로부터’라는 말일 것이다. 《爾雅》 「釋詁」에 遹/遵/率/循/由/從/自也, ‘遹, 遵, 率, 循, 由, 從은 自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西는 체언으로, ‘서쪽’이다.
◈ 東은 체언으로, ‘동쪽’이다.
◈ 南은 체언으로, ‘남쪽’이다.
◈ 北은 체언으로, ‘북쪽’이다.
◈ 無思不服은 ‘복종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즉 ‘모두 복종해 왔다’는 뜻이다. 나는 이중부정을 살리지 않고 후자처럼 번역하였다. 無不은 ‘~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표현이다. 服은 용언으로, ‘복종하다’, ‘복종해 오다’는 말이다. 思는 의미 없는 조사다. 「思齊」에서 思들은 의미 없는 조사로 사용되었는데, 이와 같다. 鄭玄과 朱熹는 思를 ‘마음으로’ 같은 부사어로 해석하여, 無思不服을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처럼 보았다. 이 설은 그럴 듯하지만, 思가 부사어라면, 服을 한정해야 하고, 그러면 어순이 無思不服이 아니라 無不思服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 朱熹는 無思不服/心服也//孟子曰/天下不心服而王者/未之有也, ‘無思不服란, 마음으로 복종했다는 뜻이다. 《孟子》에 이런 말이 있다. “天下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王으로 군림한 사람은 있던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孟子》 인용문은 「離婁 下」에 나온다.
◈◈ 毛亨은 武王作邑於鎬京, ‘武王이 鎬京에 수도를 세웠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武王於鎬京行辟癰之禮/自四方來觀者/皆感化其德/心無不歸服者, ‘武王이 鎬京에 辟廱의 禮를 행하자, 사방의 나라들이 와서 살피고는, 武王의 德에 모두 감화되어, 마음으로 귀부해 오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武王이 제후들을 힘으로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德으로 교화시켰다는 점을 선전하고 있다.
皇王烝哉。
皇王은 烝하도다.
제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 皇王烝哉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皇王은 武王을 이른다.
◈◈ 朱熹는 鎬京辟廱/自西自東/自南自北/無思不服/皇王烝哉를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此言武王徙居鎬京/講學行禮/而天下自服也, ‘이는 武王이 鎬京으로 옮겨서, 강학하고, 禮를 실천하자, 天下 사람들이 저절로 복종해 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武王을 선전하는 말이다.
考卜維王、宅是鎬京。維⻱正之、武王成之。
王은 卜을 考하여서 是 鎬京에 宅하였도다. ⻱를 가지고 之를 正하고는, 武王이 [직접] 之를 成하였도다.
왕은 점괘를 살펴서 이 호경에 거처하기로 하였도다. 거북이 점을 통하여 하늘의 명을 듣고는, 무왕이 [직접] 호경을 일으켰도다.
◈ 考는 용언으로, ‘살피다’, ‘헤아리다’는 말이다. 稽와 같다. 卜을 받는다. ▼ 鄭玄은 考/猶稽也, ‘考는 稽와 같다’라고 하였다. 稽는 ‘헤아리다’, ‘살피다’는 말이다. ▼ 朱熹 역시 考/稽, ‘考는 헤아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卜은 체언으로, ‘점괘’다. 거북이 딱지를 태워서 얻은 ‘점괘’를 卜이라고 한다. 《說文解字》 「卜部」에 卜/灼剥龜也/象灸龜之形//一曰/象龜兆之從橫也, ‘卜은 거북이의 껍질을 벗겨서 태운 것이다. 불로 지진 껍질의 모습을 본딴 글자다. 어떤 사람은 龜兆가 가로, 세로로 갈라진 모습을 본뜬 글자라고 했다’라는 말이 있다.
◈ 考卜維王의 維는 아마 도치를 표시하는 말 같다. 考卜維王은 王考卜으로, ‘王이 卜을 考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 王은 체언으로, ‘왕’이다. 武王 發을 이른다.
◈ 宅은 용언으로, ‘거처하다’는 말이다. 居와 같다. 豐에서 鎬로 천도했다는 뜻인 것 같다. 앞의 章에서는 鎬를 건설하였고, 이 章에서는 鎬로 천도했다는 뜻이 아닐까. 여기서는 ‘거처하기로 하였다’처럼 번역하였다. 《爾雅》 「釋言」에 宅/居也, ‘宅은 거처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鄭玄은 宅/居也, ‘宅은 거처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宅/居, ‘宅은 거처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是는 아마 ‘이’처럼 지시하는 말일 것이다. 鎬京을 받는다.
◈ 維⻱正之의 維는 아마 ‘~로써’, ‘~를 가지고’와 같은 표현이 아닐까 한다. ⻱를 받는다. 維는 以와 같다. 惟, 唯, 維, 雖는 以와 같이 사용된다. 《書》 「商書 盤庚 中」에 亦惟女/故以丕從厥志, ‘역시 惟女이므로, 그 뜻을 분명하게 따라라’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惟女는 以女로, ‘너 때문이다’라는 말과 같다. 또, 《詩》 「國風 鄭風」의 「狡童」에 維子之故/使我不能餐兮, ‘維子之故에, 나는 밥이 넘어 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維子之故는 以子之故로, ‘너의 일 때문에’라는 말과 같다. 또, 《春秋左氏傳》 「僖公」 2년에 冀之旣病/則亦唯君故, ‘冀나라는 쇠약해졌으니, 이 역시 唯君故다’라는 말이 있는데, 唯君故는 以君故로, ‘군주의 일 때문이다’라는 말과 같다. 또, 《春秋左氏傳》 「僖公」 5년에는 桓莊之族何罪/而以爲戮/不唯逼乎, ‘桓과 莊의 자손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벌을 받았단 말인가. 不唯偪乎’라는 말이 있는데, 不唯偪乎는 不以偪乎로, ‘핍박하였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말과 같다. 이 사례들에서 惟, 唯, 維, 雖는 모두 以와 같이 해석된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惟唯維雖」에 수록되어 있다.
◈ ⻱는 아마 체언으로, ‘거북이 껍질’, 혹은 ‘거북점’을 이를 것이다. 維를 ‘오직’ 같은 부사어로 본다면, ⻱는 ‘거북점을 치다’ 같은 용언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글자는 《詩經集傳》에 龜로 인용되어 있다. 같은 글자다.
◈ 正은 용언으로, 아마 ‘듣다’는 말일 듯하다. 거북점을 쳐서 天命을 ‘들었다’는 표현이 아닐까 하다. 正은 定으로 보고 ‘결정하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듣다’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鄭玄과 朱熹는 모두 ‘결정하다’처럼 풀이하였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正을 ‘결정하다’처럼 해석한다면, ‘鎬京에 거처할 것을 결정했다’는 의미가 이 章 안에서만 여러 번 반복되는 듯하여 의미가 매끄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설을 따르지 않고, ‘듣다’라고 풀이했다. 《周禮》 「夏官司馬」에 家司馬/各使其臣/以正於公司馬, ‘家司馬는 각자 자기 부하들을 부리고, 이로써 公司馬에게서 正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正/猶聽也, ‘正은 聽과 같다’라고 하였다. 聽은 ‘듣다’, ‘청취하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결정하다’처럼 풀이한 듯하다. 鄭玄은 ⻱則正之라고 하였는데, 이는 ‘거북이 점을 쳐서 결정하다’는 의미 같다. ▼ 朱熹는 正/決也, ‘正은 결정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正之의 之는 아마 ‘天命’, ‘하늘의 命’을 가리키는 말일 듯하다.
◈ 成은 용언으로, 아마 ‘일으키다’ 혹은 ‘세우다’, ‘완성하다’ 같은 말일 것 같다. 鎬京을 ‘일으키다’는 말일 것이다. 하늘의 命을 듣고 鎬京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고는 鎬京을 직접 ‘일으켰다’는 말일 것이다. 이 成은 아마 盛의 가차자일 듯하다. 盛은 ‘왕성하다’는 말이니, 곧 ‘왕성하게 하다’, ‘일으키다’는 말이 된다. 한편 鄭玄은 紂를 평정한 일을 포함해, 王業을 ‘이루었다’처럼 풀이하였고, 朱熹는 鎬京의 거주지를 ‘지었다’처럼 풀이했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王業을 ‘이루었다’처럼 풀이하였다. 鄭玄은 脩三后之德/以伐紂定天下/成⻱兆之占, ‘三后의 德을 수양했다. 그리고 紂를 정벌하고 천하를 안정시켜서 점괘를 완성하였다’라고 풀이하였다. ▼ 朱熹는 成之/作邑居也, ‘成之는 수도의 거주지를 지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考卜維王、宅是鎬京。維⻱正之、武王成之。
◈ 武王은 武王 發을 이른다. 考卜維王에서 武王을 뜻하는 王이라는 표현이 이미 나왔기 때문에, 굳이 주어를 한 번 더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이 武王은 ‘武王이 직접’ 하였다는 표현으로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 成之의 之는 아마 鎬京을 가리키는 말 같다.
◈◈ 鄭玄은 稽疑之法/必契灼⻱而卜之//武王卜居是鎬京之地/⻱則正之/謂得吉兆/武王遂居之//脩三后之德/以伐紂定天下/成⻱兆之占/功莫大於此, ‘의뭉스러운 일을 살필 때에는, 꼭 거북이 딱지를 지져서 점을 쳤다. 武王은 이 鎬京 땅에 거처하려 생각하였는데, 거북이 점을 쳐서 결정하였고, 길조를 얻었다고 하면서, 결국 鎬京에 거처하기로 한 것이다. 武王은 鎬京에서 三后의 德을 수양했다. 그리고 紂를 정벌하고 천하를 안정시켜서 점괘를 완성하였으니, 이 보다 더 큰 공적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挈/苦計反/本又作契//或苦結反, ‘挈는 苦와 計의 반절로 읽는다. 판본에 따라 契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苦와 結의 반절로 읽는 사람도 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經典釋文》에는 必契의 契가 挈로 인용되어 있다.
◈◈ 亡亡案 : 앞의 章에서는 鎬에 辟廱을 세웠다고 하였고, 이 章에서는 鎬로 천도했다고 한 듯하다.
武王烝哉。
武王은 烝하도다.
무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 武王은 武王 發이다.
◈ 烝哉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鄭玄은 上言皇王/而變言武王者/皇/大也/始大其業/至武王伐紂成之/故言武王也, ‘앞에서는 皇王이라고 했는데, 武王이라고 표현을 바꾼 까닭은 이렇다. 皇은 크다는 뜻으로, 처음으로 王業을 키웠다는 뜻이다. 武王에 이르러서는 紂를 정벌하고 王業을 이루었다. 그래서 후렴구에서 武王이라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은 본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武王烝哉에 달려 있으나, 이 곳이 더 적절할 듯하여 옮겼다.
◈◈ 朱熹는 考卜維王/宅是鎬京/維⻱正之/武王成之/武王烝哉를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張子曰/此舉諡者/追述其事之言也, ‘張子는 “여기서 諡號를 언급한 것은 옛날의 사건을 좇아 기술한 말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張子는 趙宋의 張載를 이른다. 張載의 말은 후렴구에서 武王이라는 諡號가 직접 언급된 데에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 亡亡案 : 후렴구가 처음에는 文王烝哉, 그 다음에는 王后烝哉, 그 다음에는 皇王烝哉, 그리고 마지막으로 武王烝哉로 바뀌었다. 文王과 王后는 文王을, 皇王과 武王은 武王을 이른다. 文王과 武王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중간에 갑자기 王后나 皇王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豐水有芑、武王豈不仕。詒厥孫謀、以燕翼子。
豐水에 芑가 有하니, [하늘의 뜻이 내려 온지라,] 武王이 豈 [왕업에] 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왕은 왕업에 매진하여 천하를 다스릴] 謀를 厥 孫에게 詒하였으니, 以 翼子를 燕해 주었도다.
풍숫가에 백묘가 자라니, [하늘의 뜻이 내려 온지라,] 무왕이 어찌 [왕업에] 매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왕은 왕업에 매진하여 천하를 다스릴] 방법을 그 자손에게 전하였으니, 이로써 신실한 아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도다.
◈ 豐水는 豐과 鎬 사이에 있던 강이다. 앞의 豐水東注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이 문장에서는 부사어로, ‘豐水에’처럼 해석된다. 아마 ‘豐水 위에’가 아니라, ‘豐水가에’ 같은 말이 아닐까 한다.
◈ 有는 용언으로, 아마 ‘자라다’는 말 같다. 芑를 받는다. 이 有는 育의 가차자이거나, 오기가 아닌가 하다. 문맥상 芑가 그냥 ‘있다’라고 하는 편 보다, ‘자라다’, ‘자라나다’처럼 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번역하였다.
◈ 芑는 체언으로, ‘白苗’를 뜻한다. 벼의 일종으로, 줄기가 하얀데,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상태를 이른다. 고대 중국인들은 상서로운 곡식이라고 생각하였다. 武王이 다스리는 豐水에 芑가 났으니, 이는 곧 武王이 天命을 받았다는 점을 뜻한다. 天命을 받았으니, 바로 뒤에서 武王豈不仕, ‘武王이 어찌 王業에 매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한 것이다. 《爾雅》, 《說文解字》에 나온다. 《爾雅》 「釋草」에 芑/白苗, ‘芑는 白苗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郭璞은 今之白粱粟/皆好穀, ‘지금의 白粱粟이다. 모두 상서로운 곡식이다’라고 하였다. 白粱粟은 ‘흰 차조’라고 번역하는 모양이다. 조의 일종이다. 한편, 邢昺은 芑/即嘉穀/白苗者//郭云/今之白粱粟/皆好穀///也, ‘芑는 곧 상서로운 곡식으로, 白苗다. 郭璞은 “지금의 白粱粟로, 모두 좋은 곡식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한편, 《說文解字》 「艸部」에는 芑/白苗/嘉榖也//从艸己聲//詩曰/維虋維芑, ‘芑는 白苗로, 상서로운 곡식이다. 艸가 들어 있고, 己라고 발음한다. 《詩》에 “虋이요, 芑로다”라는 말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詩曰/維虋維芑는 지금 《說文解字》에는 없으나, 段玉裁의 설에 의거해 보충하였다. 維虋維芑는 「大雅 生民之什」의 「生民」에 나오는 말로, 「生民」에는 維穈維芑로 되어 있다. 段玉裁는 이에 대해, 虋字下詳之矣/芑不類廁於虋者/以字有篆籒別之//管子/其種蓼䄫///字從禾//驅里切//一部//籒文作𦯸//今本無此六字/依韵會所據補//詩小雅采芑/毛云/菜也///大雅/豐水有芑///毛云/艸也, ‘虋 부분에 자세하게 설명해 두었다. 《說文解字》에 芑는 虋 부근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전서에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管子》에는 其種蓼䄫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는 글자에 禾가 들어 있다. 芑는 驅와 里의 반절로 읽는다. 一部다. 大篆에서는 𦯸라고 되어 있다. 詩曰/維虋維芑는 지금 《說文解字》 판본에는 없다. 《韵會》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詩》 「小雅」의 「采芑」에 대해 毛亨은 “나물이다”라고 하였다. 「小雅」에는 豐水有芑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毛亨은 “풀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管子》 인용문은 「地員」에 나온다. 「地員」에는 其種大樛杞라고 되어 있다. 一部는 아마 발음에 대한 말 같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韵會》는 《韻會》와 같다. 「采芑」는 「小雅 彤弓之什」에 속해 있다. 「大雅」 인용문은 바로 이 시인 「文王有聲」이다. 段玉裁가 虋 부분에 설명해 두었다고 하였으니, 이왕 찾아 본 김에 虋도 한 번 살펴 보자. 《說文解字》 「艸部」에 虋/赤苗/嘉穀也//从艸釁聲, ‘虋은 赤苗다. 상서로운 곡식이다. 艸가 들어 있고, 釁이라고 발음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段玉裁는 大雅曰/誕降嘉榖/維虋維芑///爾雅毛傳皆曰/虋/赤苗//芑/白苗///按倉頡篇曰/苗者/禾之未秀者也///禾者今之小米//赤苗/白苗謂禾莖有赤白之分/非謂粟//云嘉榖者/據生民詩言之/今詩作嘉種//許君引誕降嘉榖/維秬維秠//虋芑下皆曰嘉榖//莫奔切//十三部//今詩作穈非, ‘「大雅」에는 誕降嘉榖/維虋維芑라는 말이 있는데, 《爾雅》와 毛亨의 傳에서는 모두 虋을 赤苗, 芑를 白苗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자. 《蒼頡篇》에서는 “苗라는 것은 벼인데,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상태다”라고 되어 있다. 禾는 지금의 小米다. 赤苗니 白苗니 하는 것들은 벼의 줄기가 붉거나 희거나 한 것으로 구분한 표현이다. 조의 일종이 아니다. 상서로운 곡식이라는 표현은 「生民」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 지금 「生民」에는 嘉榖이 아니라 嘉種이라고 되어 있다. 許君은 「生民」의 誕降嘉榖/維秬維秠를 인용하였는데, 虋과 芑에 대해 모두 “상서로운 곡식이다”라고 하였다. 虋은 莫과 奔의 반절로 읽는다. 十三部다. 지금 「生民」에는 虋이 穈로 되어 있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 「大雅」 인용문은 「生民之什」의 「生民」이다. 許君은 許愼을 높인 표현이다. 이제 정리해 보자. 芑에 대해, 《爾雅》와 《說文解字》에는 모두 白苗라고 하였다. 이는 ‘하얀 모’를 이른다. 그런데 郭璞은 이를 白粱粟, ‘흰 차조’라고 하였다. 白苗는 ‘모’를 이르니, 벼의 일종이다. 그러나 白粱粟는 ‘흰 차조’이니, 조의 일종이다. 둘 다 곡식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段玉裁는 《蒼頡篇》을 인용하여, 白苗가 벼의 일종이지, 조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郭璞은 西晉 때 사람이므로, 그 당시에는 白苗라는 표현이 조를 가리키는 말로 와전되어 사용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段玉裁를 따랐다. 또, 段玉裁는 「生民」을 예로 들었는데, 「生民」에서는 虋과 芑, 즉 赤苗와 白苗를 상서로운 곡식이라고 하며, 이를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아마 芑, 즉 白苗는 당시 사람들이 ‘하늘이 내린 곡식’처럼, 상서로운 징조라고 생각하였던 식물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는 豐水有芑라고 하였는데, 이는 상술하였듯 ‘上帝가 武王에게 命을 내렸다’, 즉 ‘武王이 天命을 받았다’는 점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다만, 그 내용이 바로 뒤의 「生民」에 나옴에도, 鄭玄과 朱熹 모두 이 점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이 의뭉스럽다. ▼ 毛亨은 芑/草也, ‘芑는 풀의 일종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芑音起/草也, ‘芑는 起라고 발음한다. 풀의 일종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芑/草名, ‘芑는 풀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 武王은 武王 發이다.
◈ 豈는 ‘어찌 ~하지 않겠는가’, 혹은 ‘어찌 ~하겠는가’처럼 해석된다.
◈ 不은 부정어다. 仕를 한정한다. 그러나 이 句에서는 豈에 이미 부정과 반문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부정어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 仕는 용언으로, 아마 王業에 ‘노력하다’, ‘매진하다’는 말일 것이다. 仕는 事와 통용된다. 毛亨, 鄭玄, 朱熹는 모두 事로 풀이하였다. 事는 ‘일’, ‘일하다’는 말이므로, 이를 그대로 사용하여 ‘일로 삼다’, ‘일을 하다’처럼 번역할 수 있겠다. 나는 ‘노력하다’, ‘매진하다’처럼 의역하였다. ▼ 毛亨은 仕/事, ‘仕는 일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仕를 以其功業爲事, ‘공업을 일로 삼다’처럼 풀이하였다. ▼ 朱熹 역시 仕/事, ‘仕는 일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詒는 용언으로, ‘끼치다’, ‘남기다’, ‘전하다’는 뜻이다. 鄭玄과 陸德明은 ‘전하다’라고 하였고, 朱熹는 ‘끼치다’, ‘남기다’라고 하였는데, 두 말은 본질적으로 같다. 厥孫과 謀를 받는다. 다만 詒는 어순에 주의해야 한다. 詒는 ‘전하다’는 말이므로, 전해 줄 대상이 필요하고, 그리고 전해 줄 물건, 즉 목적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타동사 뒤에는 목적어가 바로 오지만, 詒의 경우에는 대상이 뒤에 오고, 그 뒤에 목적어가 온다. 즉, 詒厥孫謀는 ‘厥孫에게 謀를 詒한다’는 말이지만, 詒謀於厥孫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관습적으로 이렇게 사용하였던 모양이다. 《春秋左氏傳》 「昭公」 6년에 叔向使詒子産書, ‘叔向이 사람을 보내 子産에게 書를 詒하였다’라는 말이 있고, 《春秋左氏傳》 「文公」 6년에는 先王違世/猶詒之法, ‘先王들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오히려 之에게 法을 詒했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도 詒 다음에는 대상이 오고, 그 다음에 목적어가 온다. ▼ 鄭玄은 詒/猶傳也, ‘詒는 전하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傳/直專反/下同, ‘傳은 直과 專의 반절로 읽는다. 뒤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詒/以之反/傳也, ‘詒는 以와 之의 반절로 읽는다. 전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詒/遺, ‘詒는 遺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遺는 ‘끼치다’, ‘전하다’는 말로, 이 역시 傳과 같다.
◈ 厥은 ‘그’라는 뜻이다. 武王을 이른다. 孫을 받는다. 厥은 其와 같다.
◈ 孫은 아마 체언으로, ‘자손’일 것이다. 鄭玄은 天下를 ‘순종시키다’처럼 해석하였다. 그러면 詒厥孫謀는 ‘그 天下를 순종시킬 謀를 전하다’는 말이 된다. 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詒의 사용법을 분석해 보았을 때, 詒厥孫謀는 ‘厥孫에게 謀를 詒하다’처럼 해석해야지, ‘厥 孫할 謀를 詒한다’처럼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陸德明은 王, 申, 毛의 경우 ‘자손’으로 풀이하였고, 鄭玄은 ‘따르다’라고 풀이했다는 점을 소개해 두었다. 王은 아마 王肅일 것이고, 毛는 毛亨을 것이다. 申은 누구인지 모르겠다. 朱熹 역시 ‘자손’이라고 풀이한 듯하다. ▼ 鄭玄은 孫/順也, ‘孫은 따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孫/王申毛如字//鄭音遜/順也, ‘孫의 경우, 王肅, 申, 毛亨은 글자 그대로 보았다. 鄭玄은 遜으로 읽었다. 이 때는 따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謀는 체언으로, ‘방법’, ‘계책’이다. 아마 天下를 다스릴 ‘방법’을 이를 듯하다. ‘王業’ 그 자체로 보아도 좋겠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孫謀를 順天下之謀, ‘天下를 순종시킬 방법’처럼 풀이하였다.
◈ 以는 是以와 같다. ‘이로써’처럼 해석된다. 詒厥孫謀를 받는다. ‘詒厥孫謀하였으니, 이로써’라는 뜻이다.
◈ 燕은 용언으로, ‘안정시키다’, ‘편안하게 하다’는 말이다. 翼子를 받는다. 燕은 宴과 통용된다. 《後漢書》 「班彪列傳 上」에는 이 글이 以宴翼子로 인용되어 있다. 燕과 宴이 같기 때문이다. 朱熹는 ‘편안하게 하다’라고 풀이했다. 毛亨은 安이라고 본 것 같기도 하고, 及이라고 본 것 같기도 하다. 安이라면 朱熹와 같다. 及이라면, 아마 ‘미치다’, ‘남기다’는 말이 아닐까 하다. 天下를 ‘남겼다’처럼 본다면 毛亨의 해석이 나은데, 앞에 나왔던 詒 역시 ‘남기다’, ‘전하다’는 표현이므로, 의미가 중복되어 좋지 않다. 그래서 나는 及을 따르지 않고, 安을 따랐다. ▼ 毛亨은 燕/及, ‘燕은 及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판본에 따라 毛亨의 傳이 燕/安, ‘燕은 安이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燕/及이라고 되어 있는 판본에서도, 孔穎達은 毛亨이 燕을 安이라고 풀이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孔穎達의 疏를 감안하면 安이 맞겠으나,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판본의 傳에 왜 燕/及이라고 되어 있다는 말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참고차 기재해 둔다. ▼ 朱熹는 燕/安, ‘燕은 편안하게 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翼子는 아마 ‘신실한 아들’이라는 말일 것이다. 武王 發의 아들인 成王 誦을 이른다. 翼은 敬과 같다. 敬은 아마 ‘신실하다’, ‘착실하다’ 같은 표현일 것이다. 아니면 글자의 의미를 그대로 따서 ‘공경스럽다’, ‘공손하다’, 몸가짐이 ‘단정하다’처럼 보아도 좋겠다. 毛亨과 朱熹는 모두 敬이라고만 풀이하였고, 鄭玄은 敬事라고 풀이하였다. 翼은 관형어로, 子를 한정한다. 子는 체언으로, ‘아들’이다. 《爾雅》 「釋詁」에 儼/恪/祇/翼/諲/恭/欽/寅/熯/敬也, ‘儼, 恪, 祇, 翼, 諲, 恭, 欽, 寅, 熯은 敬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또, 같은 책 「釋訓」에 肅肅翼翼/恭也, ‘肅肅과 翼翼은 공손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翼/敬也, ‘翼은 공경스럽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翼을 敬事, ‘공손하게 섬기다’라고 풀이하였다. ▼ 朱熹는 翼/敬也//子/成王也, ‘翼은 공경스럽다는 뜻이다. 子는 成王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豐水猶以其潤澤生草/武王豈不以其功業爲事乎//以之爲事/故傳其所以順天下之謀/以安其敬事之子孫/謂使行之也//書曰/厥考翼/其肯曰/我有後/弗棄基, ‘豐水 덕분에 그 땅이 윤택하여, 풀이 잘 자라니, 武王이 어찌 공업을 세우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일을 자신의 책무로 생각하였기에, 武王 자신이 天下를 순종시킬 방법을 전수하여 공손한 자손을 편안하게 해 주었고, 자손이 이를 이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書》에 “그 아비는 공경스러웠는데, 아들이 깝냥이 아니라면, 어찌 ‘내게 후사가 있우니, 基業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려 하겠는가”라는 말이 있다’라고 했다. 《書》 인용문은 「周書 大誥」에 나온다.
◈◈ 亡亡案 : 武王이 白苗에 편승해서 王業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고, 마침내 王業을 이루어서 成王에게 天下를 온전하게 물려 주었다는 말 같다.
◈◈ 亡亡又案 : 翼子는 成王을 이른다. 그런데 成王만 시호로 표현되지 않은 점을 보면, 이 시는 成王 때나 그 직후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武王烝哉。
武王은 烝하도다.
무왕은 참된 군주였도다.
◈ 武王烝哉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朱熹는 豐水有芑/武王豈不仕/詒厥孫謀/以燕翼子/武王烝哉를 한 章으로 보고, 興也, ‘興이다’라고 하였다. 興은 사물을 묘사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이끌어 내는 시문이다. 朱熹는 또, 鎬京猶在豐水下流/故取以起興//言豐水猶有芑/武王豈無所事乎//詒厥孫謀/以燕翼子/則武王之事也//謀及其孫/則子可以無事矣, ‘鎬京은 오히려 豐水의 하류에 있었기에, 이 점을 들어 興을 지은 것이다. 이런 뜻이다. 풍수에 다만 芑가 있으니, 武王이 어찌 사업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 자손에게 방법을 전하여, 翼子를 편안하게 해 주었으니, 이것이 武王의 사업이었다. 그 계책이 자손들에게까지 미쳤으니, 자손들에게 아무 문제도 없을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이처럼 이 章을 興으로 보았다. 그러나 賦로 보는 사람도 있어, 朱熹는 이 설 역시 소개해 두었다. 이에 대해서는, 或曰/賦也//言豐水之旁/生物繁茂//武王豈不欲有事於此哉//但以欲遺孫謀/以安翼子/故不得而不遷耳, ‘어떤 사람은 賦라고 하였다. 그렇게 보면 이런 뜻이다. 豐水 주변에 생물들이 번성하니, 武王이 이 지역에 어찌 사업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만, 자손에게까지 그 계책을 남겨서, 翼子를 편안하게 해 주려 하였으니, 자 하였기 때문에,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내 생각에는 賦가 더 맞을 것 같다. 앞에서 설명하였듯, 芑, 즉 白苗는 일반적인 식물이 아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芑를 상서롭다고 생각하였다. 豐水에 芑가 자라 났다는 말은, 곧 武王이 天命을 받았다는 말과 같다. 芑를 통해 이런 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芑가 자란 것도 ‘사실’이고, 이에 편승해서 武王이 王業에 매진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며, 그 王業을 통해 武王의 자식, 즉 成王이 天下를 물려 받았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賦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왜 鄭玄과 朱熹를 비롯해서, 아무도 芑가 상서로운 식물이라는 점을 가지고 설명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 亡亡又案 : 이 시를 끝으로 「大雅」의 첫 부분인 「文王之什」이 끝난다. 이 다음부터는 「生民之什」이 시작된다.
◈◈ 《毛詩正義》에서는 「文王有聲」의 편제에 대해, 文王有聲八章/章五句, ‘「文王有聲」은 여덟 章으로, 章마다 다섯 句다’라고 하였다. 또, 「文王之什」의 시들에 대해, 文王之什十篇/六十六章/四百一十四句, ‘「文王之什」 열 편은 예순 여섯 章이요, 사백 열 네 句다’라고 하였다.
◈◈ 《詩經集傳》에서는 「文王有聲」의 편제에 대해, 文王有聲八章/章五句, ‘「文王有聲」은 여덟 章으로, 章마다 다섯 句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또, 此詩以武功稱文王/至于武王則言皇王維辟/無思不服而已//蓋文王旣造其始/則武王續而終之無難也//又以見文王之文/非不足於武/而武王之有天下/非以力取之也, ‘이 시에서는 武功을 가지고 文王을 칭송하였고, 武王에 대해서는 皇王이 오직 임금다웠기에 제후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文王이 기초를 쌓아 두었으니, 武王이 그 유업을 이어서 마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 文王의 文治가, 武功에 비해 모자라지 않았고, 武王이 天下를 가진 일 역시 무력만 가지고 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였다’라고 하였다. 文王이면 유약해 보이지만, 엄연히 武功을 세웠던 적이 있고, 武王이면 깡패 같아 보이지만, 엄연히 德을 통해 제후들을 복종시킬 역량이 있었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는 좋은 평가 같다. 朱熹는 또 「文王之什」의 시들에 대해, 文王之什十篇/六十六章/四百一十四句, ‘「文王之什」 열 편은 예순 여섯 章이요, 사백 열 네 句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또, 「文王之什」의 형성 연대에 대해, 鄭譜/此以上爲文武時詩/以下爲成王周公時詩//今按文王首句/即云文王在上/則非文王之詩矣//又曰/無念爾祖///則非武王之詩矣//大明有聲并言文武者非一/安得爲文武之時所作乎//蓋正雅皆成王周公以後之詩//但此什皆爲追述文武之德/故譜因此而誤耳, ‘鄭玄의 《譜》에서는, 이 시 위로는 文王과 武王 때의 시라고 보았고, 이 뒤로는 成王과 周公 때의 시라고 보았다. 내 생각에는, 「文王」의 첫 句에 文王在上이라는 말이 있으니, 「文王」은 文王 때의 시가 아닐 것 같다. 「文王」에는 또 無念爾祖라는 말이 있으니, 武王 때의 시도 아닐 것이다. 「大明」에도 文王과 武王을 함께 언급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文王이나 武王 때 지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마 「正雅」는 成王과 周公 이후 시기의 시일 것이다. 다만 「文王之什」의 열 편은 모두 文王과 武王의 德을 거슬러 올라가 기술한 시인데, 鄭玄은 이 점을 혼동했기 때문에 잘못 논술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譜》는 鄭玄이 지은 《詩譜》를 이른다. 《詩》의 내용을 시대별로 정리했던 책이라고 한다. 趙宋 이후로 실전되었다. 「正雅」는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正大雅」라고 하면, 「文王之什」의 「文王」, 「大明」, 「緜」, 「棫樸」, 「旱麓」, 「思齊」, 「皇矣」, 「靈臺」, 「下武」, 「文王有聲」과, 「生民之什」의 「生民」, 「行葦」, 「旣醉」, 「鳧鷖」, 「假樂」, 「公劉」, 「泂酌」, 「卷阿」를 이른다. 「正小雅」라는 분류도 있는데, 정확히 어떤 시들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朱熹의 설에 대개 동의한다. 내용상, 成王을 ‘자식’, ‘자손’이라고 표현한 말들이 많고, 또 文王과 武王의 업적을 치켜 세우는 글들이 빈번한데, 이는 成王에게 정통성을 주고, 또 成王을 경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西周 초는 三監의 난으로 표상되듯, 아직 안정되지 못했다. 成王은 어렸고, 殷나라의 유민들은 여전히 강성했다. 섭정이었던 周公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武王의 반역과 찬탈을 정당화하고, 文王과 그 선조들의 정복 활동을 덕치로 윤색해야 했을 것이다. 다만, 「文王」의 文王在上 부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朱熹는 文王在上을 ‘文王이 하늘에 있다’처럼 해석하였으나, 나는 ‘文王이 군위에 있다’처럼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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