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대아 - 문왕지십 - 6 - 사제

2025. 3. 21. 11:30시 이야기/대아 문왕지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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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시》 번역에는 특별히 고정적으로 참고한 번역서가 없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때는 기타 블로그들을 참고하였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毛詩正義와 詩經集傳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毛詩正義에는 毛亨鄭玄孔穎達의 주석이 수록되어 있고陸德明의 주석 역시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毛亨의 주석을 이라고 하고鄭玄의 주석을 孔穎達의 주석을 라고 합니다陸德明의 경우音義라고 합니다다만 상기하였듯毛詩正義에는 陸德明의 音義가 부분적으로만 인용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經典釋文을 직접 참고하여陸德明의 音義를 모두 인용해 두었습니다詩經集傳에는 朱熹의 주석이 수록되어 있는데朱熹의 주석 역시 이라고 합니다毛亨과 鄭玄朱熹의 주석은 모두 번역하였고孔穎達의 주석은 번역하지 않았습니다다만본문을 한 쪽만 따라 번역하지는 않았습니다더 나은 설을 택하였고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엔 제 의견에 따라 번역하였습니다본문은 몰라도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추후에 呂祖謙의 《呂氏家塾讀詩記》, 王引之의 《經義述聞》,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그리고 孔穎達의 疏도 번역하여 반영하고 싶은데,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 첫 부분에는 시 전체의 본문과 번역문을 기재하였습니다. 그 뒷부분에는 본문과 번역문, 그리고 주석을 기재해 두었습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毛亨의 설을 소개하고, 또 鄭玄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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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5년 3월 21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思齊」

 

 

 

 

思齊

齊하도다

공경스럽도다

 

思齊大任、文王之母、思媚周姜、京室之婦。

齊한 大任은 文王의 母이니, 周姜에게 媚하여서, 京室의 婦가 되었다.

정결한 태임은 문왕의 어머니인데, 주강에게 사랑을 받아, 경실의 며느리가 되었다.

 

大姒嗣徽音、則百斯男。

[그 뒤로는] 大姒가 徽한 音을 이었으니, 男이 百이었다.

[그 뒤로는] 태사가 훌륭판 평판을 이었으니,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다.

 

惠于宗公、神罔時怨、神罔時恫。

[문왕은] 宗公에게 惠하였으니, 神들은 怨하지 않았고, 神들은 恫해 하지 않았다.

[문왕은] 종묘의 선조들에게 순종하였으니, 신명들은 원망하지 않았고, 애통해 하지도 않았다.

 

刑于寡妻、至于兄弟、以御于家邦。

[문왕은] 寡妻에게 刑하였고, [그 영향이] 兄弟에 至하였으니, 이렇게 家邦에서 御해졌다.

[문왕은] 과처에게 모범을 보였고, [그 영향이] 형제들에게도 미쳤으니, 이 덕분에 집안 사람들과 나라의 백성들이 [문왕에게] 마음을 모았다.

 

雝雝在宮、肅肅在廟。

[문왕은] 雝雝한 태도로 宮에 在하고, 肅肅한 태도로 廟에 在하였으니,

[문왕은] 온화한 태도로 궁에 머물고, 공경스러운 모습으로 종묘에 머물렀으니,

 

不顯亦臨、無射亦保。

[자신을] 顯하지 않고도 臨하였고, 射하지 않고도 保하였도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나라를] 다스렸고, 사지를 찢지 않고도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肆戎疾不殄、烈假不瑕。

그러므로 戎한 疾이 殄하지 않아도, [문왕은] 烈假하여서 瑕하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심각한 환란이 끊이지 않았어도, [문왕은] 위대하였기에 실수하지 않았으니,

 

不聞亦式、不諫亦入。

聞하지 않았더라도 式하였고, 諫하지 않았더라도 入하였다.

명성이 높지 않더라도 기용하였고, 간쟁하지 못하더라도 용인하였다.

 

肆成人有德、小子有造。

그리하여 [문왕 덕분에] 成人은 德을 有하고, 小子는 造를 有하였으니,

그리하여 [문왕 덕분에] 성인은 덕을 갖추었고, 아이들은 성취를 이루었으니,

 

古之人無斁、譽髦斯士。

古之人은 [이처럼] 斁하지 않고, 斯士를 譽髦하였도다.

옛 사람은 [이처럼] 싫증내지 않고, 이 사들을 훌륭하게 길렀도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思齊」

 

 

 

 

思齊

齊하도다

공경스럽도다

◈ 思는 아마 발어사일 것이다. 해석되지 않는다.

◈ 齊는 ‘공경스럽다’, ‘몸가짐이 깨끗하다’는 뜻이다. 齋와 같고, 莊과 같이 해석된다. ▼ 陸德明은 齊/側皆反/本亦作齋//齋/莊也//下同, ‘齊는 側과 皆의 반절로 읽는다. 판본에 따라 齋로 되어 있기도 하다. 齋는 莊이라는 뜻이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毛亨은 思齊文王所以聖也//言非但天性/德有所由成, ‘「思齊」에서는 文王이 성명하였던 까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文王의 천성이 그러하였을 뿐만 아니라, 德이 있어서, 그 德에 말미암아 성명한 모습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文王의 올바른 정치가, 文王의 할머니인 周姜, 어머니인 大任, 그리고 아내인 大姒을 통해 전수된 德에 근거한다는 내용이다.

 

 

 

 

思齊大任、文王之母、思媚周姜、京室之婦。

齊한 大任은 文王의 母이니, 周姜에게 媚하여서, 京室의 婦가 되었다.

정결한 태임은 문왕의 어머니인데, 주강에게 사랑을 받아, 경실의 며느리가 되었다.

◈ 思는 아마 ‘아’ 같은 발어사일 것이다. 해석되지 않는다. ▼ 朱熹는 思/語辭, ‘思는 어조사다’라고 하였다.

◈ 齊는 관형어로, ‘공경스럽다’, ‘몸가짐이 깨끗하다’는 뜻이다. 大任을 한정한다. 이 齊는 齋와 같다. 毛亨, 陸德明, 朱熹는 모두 莊이라고 풀이했는데, 莊은 태도가 ‘공경스럽다’는 뜻이다. ▼ 毛亨은 齊/莊, ‘齊는 莊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제목인 思齊의 齊에 대해 齊/側皆反/本作齋//齋/莊也//下同, ‘齊는 側과 皆의 반절로 읽는다. 판본에 따라 齋로 되어 있기도 하다. 齋는 莊이라는 뜻이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齊/莊, ‘齊는 莊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大任은 사람 이름이다. 古公亶父의 妻이자, 周나라 文王의 모친이다. 大는 ‘태’로 읽는다. 古公亶父는 곧 太王을 이르니, 文王의 할아버지다.

◈ 文王은 周나라의 文王이다.

◈ 文王之母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된다. 京室之婦의 之도 그렇다.

◈ 媚는 용언으로, ‘사랑하다’, ‘아끼다’는 말이다. 愛와 같다. 그런데 문맥을 볼 때, 周姜은 大任의 시어머니이므로, 周姜을 ‘사랑하다’가 아니라, 周姜에게 ‘사랑을 받다’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즉, 媚於周姜과 같다. 周姜을 목적어로 보려면, 媚는 ‘존경하다’처럼 풀이해야 한다. 鄭玄이 이렇게 해석하였다. 그러나 의미가 훨씬 못하다. ▼ 毛亨은 媚/愛也, ‘媚는 사랑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周姜을 그대로 목적어로 보고, 思愛, ‘사모하다’처럼 풀이하였다. ▼ 陸德明은 媚/美記反/後同//愛也//沈音眉, ‘媚는 美와 記의 반절로 읽는다. 뒤로도 그렇다. 사랑하다는 뜻이다. 沈旋은 眉로 발음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媚/愛也, ‘媚는 사랑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媚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思媚周姜은 思媚於周姜처럼 해석해야 하겠다. ‘周姜에게 媚를 받다’는 뜻이다.

◈ 周姜은 大姜으로, 太王 古公亶父의 妻다. 文王의 할머니다. 大姜의 大는 ‘태’로 읽는다. ▼ 毛亨은 周姜/大姜也, ‘周姜은 大姜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周姜/大王之妃/大姜也, ‘周姜은 大王의 妃로, 大姜이다’라고 하였다.

◈ 京室은 周나라의 ‘왕실’을 이른다. 京은 본래 ‘수도’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수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아마 지명일 듯하다. 西周의 수도가 鎬京인데, 鎬京의 京이 아마 이 京일 것 같다. 이는 鄭玄의 설이다. ▼ 毛亨은 京室/王室也, ‘京室은 왕실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京/周地名也, ‘京은 周나라의 지명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京/周也, ‘京은 周나라다’라고 하였다.

◈ 婦는 체언으로, ‘며느리’다.

◈ 京室之婦에는 용언이 없다. 京室之婦가 ‘되었다’처럼 해석하면 되겠다. 아니면 京室之婦의 之를 도치를 표현하는 글자라고 보고, 婦를 ‘며느리가 되다’ 혹은 ‘며느리 노릇을 하였다’처럼 용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 鄭玄은 常思莊敬者/大任也/乃爲文王之母//又常思愛大姜之配大王之禮/故能爲京室之婦//言其德行純備/故生聖子也//大姜言周/大任言京/見其謙恭/自卑小也, ‘大任은 언제나 공경스러운 태도를 사모하였으니, 이에 文王의 어머니가 되었다. 또, 늘 大姜이 大王의 예법에 짝을 맞추었다는 점을 사모하였으니, 이에 왕실의 며느리가 될 수 있었다. 大任의 덕행이 순수하고,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성명한 아들을 낳았다는 뜻이다. 大姜에 대해서는 周라고 하고, 大任에 대해서는 京이라고 한 것은 겸양한 뜻을 드러낸 말로,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이에 대해 行/下孟反//見/賢遍反, ‘行은 下와 孟의 반절로 읽고, 見은 賢과 遍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고부 사이인 周姜과 大任이 모두 德이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大姒嗣徽音、則百斯男。

[그 뒤로는] 大姒가 徽한 音을 이었으니, 男이 百이었다.

[그 뒤로는] 태사가 훌륭판 평판을 이었으니,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다.

◈ 大姒는 사람 이름이다. 文王의 妻다. 大는 ‘태’로 읽는다. ▼ 毛亨은 大姒/文王之妃也, ‘大姒는 文王의 妃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大姒/文王之妃也, ‘大姒는 文王의 妃다’라고 하였다.

◈ 嗣는 용언으로, ‘잇다’, ‘계승하다’는 말이다.

◈ 徽音은 ‘아름다운 평판’, ‘훌륭한 평판’을 이른다. 周姜의 德을 며느리인 大任이 이었고, 大任의 德을 다시 며느리인 大姒가 이었다는 뜻이다. 徽는 ‘훌륭하다’, ‘아름답다’는 말이다. 音은 ‘소리’이니, 아마 聲과 통할 것이고, 곧 ‘名聲’이나 ‘평판’이라는 뜻일 것이다. ▼ 鄭玄은 徽/美也, ‘徽는 아름답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徽/許韋反/美也, ‘徽는 許와 韋의 반절로 읽는다. 아름답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徽/美也, ‘徽는 아름답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則은 ‘~하니’, ‘~하여서’처럼 해석된다. 乃와 같다.

◈ 百斯男은 아마 男百이 아닐까 의뭉스럽다. ‘아들이 백 명이었다’는 뜻이다. 百斯男 그대로 본다면, 斯를 의미 없는 조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百斯男은 곧 百男과 같고, 이는 ‘백 명의 아들’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말이 되지 않는다. 내 생각에 斯는 之처럼 도치하는 글자일 듯하다. 그러면 百斯男은 男百이 되고, ‘아들이 백 명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의미가 낫다. 그러면 大姒가 정말 아들을 백 명이나 낳았을까. 毛亨은 첩의 자식까지 합해서 백 명이라고 하였고, 朱熹는 그냥 많다는 표현이라고 하였는데, 어느 쪽이든 말이 되겠다. ▼ 毛亨은 大姒十子/衆妾則宜百子也, ‘大姒는 아들이 열 명이었는데, 文王은 첩을 여럿 두었으므로 아들이 백 명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百男/舉成數而言其多也, ‘百男은 成數를 들어서 많다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嗣大任之美音/謂續行其善敎令, ‘大任의 훌륭한 명성을 이었다는 말은, 훌륭한 敎令을 이어서 행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思齊大任/文王之母/思媚周姜/京室之婦/大姒嗣徽音/則百斯男을 한 章으로 보았고, 이에 대해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을 이른다. 또 朱熹는 此詩亦歌文王之德/而推本言之曰/此莊敬之大任/乃文王之母/實能媚于周姜/而稱其爲周室之婦/至於大姒/又能繼其美德之音/而子孫衆多//上有聖母/所以成之者遠/內有賢妃所以助之者深也, ‘이 詩에서도 文王의 德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德의 근본을 미루어 말하고 있다. 이 공경스러운 大任은 文王의 어머니이니, 진정 周姜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기에, 大任이 周나라 왕실의 며느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았다. 大姒에 이르러서도 그 미덕의 말씀을 이어갈 수 있었기에 자손이 많았던 것이다. 위로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기에 이룬 것이 원대하였고, 안으로는 현명한 비가 있어서 도움을 받은 바가 깊었도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大任의 며느리인 大姒 역시 德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고대에는 다산이 곧 다복이었다.

 

 

 

 

惠于宗公、神罔時怨、神罔時恫。

[문왕은] 宗公에게 惠하였으니, 神들은 怨하지 않았고, 神들은 恫해 하지 않았다.

[문왕은] 종묘의 선조들에게 순종하였으니, 신명들은 원망하지 않았고, 애통해 하지도 않았다.

◈ 惠는 용언으로, 아마 ‘순종하다’는 말인 듯하다. 宗公에게 ‘순종했다’는 뜻이다. ‘따르다’, ‘좇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宗公들의 정사를 ‘좇았다’처럼 풀이해야 하겠다. ▼ 鄭玄은 惠/順也, ‘惠는 따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惠/順也, ‘惠는 순종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于는 ‘~에’다. 宗公을 받는다.

◈ 宗公은 ‘종묘의 조상’을 이른다. 文王의 조상은 周나라의 제후였으므로 公이라고 칭하였을 것이다. 鄭玄은 大臣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도 일리가 있으나 나는 따르지 않았다. ▼ 毛亨은 宗公/宗神也, ‘宗公은 宗神이다’라고 하였다. 宗神은 ‘종묘의 귀신’을 이른다. ▼ 鄭玄은 宗公/大臣也, ‘宗公은 大臣이다’라고 하였다. 정사를 주관하는 신하들을 이른다. ▼ 朱熹는 宗公/宗廟先公也, ‘宗公은 宗廟의 옛 公들이다’라고 하였다.

◈ 神은 체언으로, ‘신명’, ‘귀신’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神明, ‘신명’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 罔은 亡, 無와 통용되는데, 여기서는 不과 같다고 보는 편이 좋겠다. 怨과 恫를 각각 한정한다.

◈ 時는 아마 의미 없는 조사 같다. 是, 此, 玆와 통용되어 ‘이것’처럼 해석될 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時가 ‘이것’, 즉 文王을 이른다면, 怨이나 恫 뒤에 와서 목적어가 되어야 한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是라고 글자를 바꾸어 풀이하였다.

◈ 怨은 용언으로, ‘원망하다’는 말이다.

◈ 恫은 용언으로, ‘애통해 하다’는 말이다. ▼ 毛亨은 恫/痛也, ‘恫은 애통해 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恫音通/痛也, ‘恫은 通이라고 발음한다. 애통해 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恫/痛也, ‘恫은 애통해 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文王爲政/咨於大臣/順而行之/故能當於神明/神明並無怨恚//其所行者/無是痛傷/其所爲者/其將無有𣧑禍, ‘文王이 정사를 돌보는데, 大臣들에게 자문하고, 이를 좇아 행하였으니, 신명의 뜻에 합치될 수 있었고, 신명들이 모두 원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文王이 행한 바 덕분에 신명들이 애통해 하지 않았던 것이요, 文王이 爲한 바 덕분에 나중에 재앙을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𣧑音兇/本又作凶, ‘𣧑은 兇이라고 읽는다. 판본에 따라 凶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鄭玄은 신하에게 자문하여 정사를 돌보았다는 식으로 해석하였는데, 시의 분위기를 볼 때, 정사 보다는 ‘제사’라고 해석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刑于寡妻、至于兄弟、以御于家邦。

[문왕은] 寡妻에게 刑하였고, [그 영향이] 兄弟에 至하였으니, 이렇게 家邦에서 御해졌다.

[문왕은] 과처에게 모범을 보였고, [그 영향이] 형제들에게도 미쳤으니, 이 덕분에 집안 사람들과 나라의 백성들이 [문왕에게] 마음을 모았다.

◈ 刑은 용언으로, ‘모범이 되다’, ‘모범을 보이다’는 뜻이다. 刑은 法과 같다. ▼ 毛亨은 刑/法也, ‘刑은 모범을 보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刑/法也//韓詩云/刑/正也, ‘刑은 모범을 보이다는 뜻이다. 《韓詩》에서는 “刑은 바로잡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韓詩》는 韓嬰이 지은 《韓詩》를 이른다. 지금은 《韓詩外傳》만 남아 있는데, 《韓詩外傳》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 朱熹는 刑/儀法也, ‘刑은 모범을 보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于는 ‘~에게’다. 각각 寡妻, 兄弟를 받는다. 以御于家邦의 于는 다르게 해석된다. 《荀子》 「大略」에도 이 시가 인용되어 있는데, 그 인용문에는 각각 于, 于, 於로 되어 있다.

◈ 寡妻는 ‘부족한 妻’, ‘德이 부족한 妻’라는 뜻이다. 寡德之妻와 같다. 남에게 자기 妻를 낮춰서 겸양하는 표현이다. 주어는 文王이므로 大姒를 이를 것이다. ▼ 毛亨은 寡妻/適妻也, ‘寡妻는 정실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適/丁歷反, ‘適은 丁과 歷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寡妻/寡有之妻/言賢也, ‘寡妻는 德을 적게 가진 妻라는 뜻으로, 현명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寡妻/猶言寡小君也, ‘寡妻는 寡小君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小君은 妻를 이른다.

◈ 至는 용언으로, 아마 ‘미치다’, ‘이르다’는 말일 것이다. 文王이 大姒에게 모범을 보이자, 文王의 태도를 보고 형제들 역시 文王을 좇았다는 뜻일 것이다. ‘지극하게 대하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한데, 나는 따르지 않았다.

◈ 以는 是以와 같다. ‘이로써’, ‘이렇게’, ‘이 덕분에’처럼 해석된다.

◈ 御는 용언으로, 아마 ‘마음을 모으다’, ‘마음을 합치다’는 말 같다. 설이 두 개 있다. 毛亨과 朱熹는 迎이라고 풀이했고, 鄭玄은 治라고 풀이했다. 治는 ‘다스리다’는 말이다. 迎은 무슨 뜻일까. 迎은 본래 ‘맞이하다’는 말이지만, 이렇게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迎은 迎合이나 逢迎의 迎으로, 남에게 뜻을 맞추어 주는 것을 이른다. 곧, 家와 邦에서 文王에게 ‘합심하다’, ‘마음을 합치다’, ‘마음을 모으다’라는 의미가 된다. 鄭玄의 설에도 일리가 있으나, 나는 따르지 않았다. 이 때는 御를 ‘아’라고 읽는다. ▼ 毛亨은 御/迎也, ‘御는 迎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아마 迎은 逢迎을 이를 것이다. ▼ 鄭玄은 御/治也, ‘御는 다스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御/毛牙嫁反/迎也//鄭魚據反/治也, ‘御에 대해, 毛亨의 경우엔 牙와 嫁의 반절로 읽는다. 迎이라는 뜻이다. 鄭玄의 경우엔 魚와 據의 반절로 읽는다. 治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御/迎也, ‘御는 迎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迓는 迎이라는 뜻의 글자로, ‘아’라고 읽는다. 《爾雅》 「釋詁」에 迓/迎也, ‘迓는 迎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朱熹가 毛亨의 주석을 단순하게 베껴서 迎이라고 해석했는지, 아니면 逢迎이라는 의미를 인지하고 迎이라고 풀이하였는지는 모르겠다. 朱熹가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주석에서 御를 逢迎처럼 풀이하였을 텐데, 朱熹는 以御于家邦也라고만 하였으니 의뭉스럽다. 나는 逢迎처럼 선해해 주었다.

◈ 家邦은 체언으로, ‘집안 사람들과 나라의 백성들’을 이른다.

◈ 御于家邦은 본래 ‘家邦에서 御해졌다’, 즉 ‘家邦 사람들에게서 마음이 모아졌다’처럼 해석해야 하겠지만, 나는 어순을 바꾸어서 ‘家邦이 御했다’처럼 의역하였다.

◈◈ 鄭玄은 文王以禮法接待其妻/至于宗族/以此又能爲政治于家邦也//書曰/乃寡兄朂///又曰/越乃御事, ‘文王은 예법을 지켜서 妻를 대우하였으니, 그 태도가 친척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에 또 家邦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書》에 “너의 寡兄이 노력하였다”라는 말이 있고, 또 “너는 事를 다스려라”라는 말도 있다’라고 하였다. 인용문은 「周書 康誥」와 「周書 召誥」에 각각 나온다. 越乃御事의 경우, 越自乃御事라고 되어 있다. 乃는 모두 2인칭 대명사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勗/許玉反/下同, ‘勗은 許와 玉의 반절로 읽는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經典釋文》에는 勖이 勗으로 되어 있다. 같은 글자다.

◈◈ 朱熹는 惠于宗公/神罔時怨/神罔時恫/刑于寡妻/至于兄弟/以御于家邦을 한 章으로 보았고, 이에 대해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는 시문이다. 또 朱熹는 言文王順于先公/而鬼神歆之無怨恫者/其儀法/內施於閨門/而至于兄弟/以御于家邦也//孔子曰/家齊而後國治//孟子曰/言舉斯心加諸彼而已//張子曰/言接神人/各得其道也, ‘文王이 先公을 따라서 귀신에게 흠향하였기에, 원망도, 애통도 없었으니, 文王의 거둥은 안으로는 규문에 베풀어졌고, 형제에도 이르렀으며, 이리하여 집안 사람들과 나라의 백성들이 문왕에게 마음을 모았다는 뜻이다. 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집안이 정리된 이후에 나라가 다스려진다.” 孟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마음을 들어서 상대에게 입혀 준다는 뜻이다.” 張子는 이렇게 말했다. “귀신과 사람을 대할 때, 각각 도리에 맞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孔子의 말은 《禮記》 「大學」에 나온다. 孟子의 말은 《孟子》 「梁惠王 上」에 나온다. 張子는 아마 張載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朱熹는 어떻게 張載를 孔子나 孟子와 함께 언급할 수 있을까.

◈◈ 亡亡案 : 文王이 예법을 지켜서 大姒에게 모범을 보이자, 결국 집안 사람들과 나라의 백성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었다는 뜻이다.

 

 

 

 

雝雝在宮、肅肅在廟。

[문왕은] 雝雝한 태도로 宮에 在하고, 肅肅한 태도로 廟에 在하였으니,

[문왕은] 온화한 태도로 궁에 머물고, 공경스러운 모습으로 종묘에 머물렀으니,

◈ 雝雝은 ‘온화한 모습’을 이른다. 文王의 태도를 이르는 표현이다. 이 雝은 雍과 통용되는 글자인데, 雍은 ‘온화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雍州를 雝州라고 하기도 한다. ▼ 毛亨은 廱廱/和也, ‘廱廱은 온화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廱은 雝과 같다. ▼ 朱熹는 雝雝/和之至也, ‘雝雝은 온화한 태도가 지극한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 在는 용언으로, ‘~에 있다’, ‘~에 머물다’는 말이다. 각각 宮과 廟를 받는다.

◈ 宮은 체언으로, ‘궁전’이다. ▼ 鄭玄은 宮/謂辟廱宮也, ‘宮은 辟廱宮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辟/必亦反/下同//廱/於容反, ‘辟은 必과 亦의 반절로 읽는다. 아래로도 그렇다. 廱은 於와 容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辟廱은 太學, 太廟, 明堂 같은 기관의 이름이다. 교화를 행하는 기관으로 보인다. 《蔡中郞集》 「明堂月令論」에 取其四面周水圜如璧/則曰辟廱, ‘네 면이 물을 둘러싼 모습이 구슬 같기 때문에 辟廱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또, 《漢書》 「平帝紀」에 安漢公奏立明堂辟廱, ‘安漢公이 明堂과 辟廱을 세우자고 상주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應劭는 辟廱者/象璧圜/雍之以水/象敎化流行, ‘辟廱이라는 것은 구슬을 본뜬 것으로,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교화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본따서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들을 보면, 辟廱은 교화를 펴는 기관이되, 교화가 물처럼 퍼지는 모습을 본따서 지었기 때문에 특별히 辟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할 수 있겠다. 교화를 퍼트리니, 곧 교육 기관일 것이다. 그런데 辟廱이라는 말은 太學 같은 표현과는 따로 사용되므로, 목적은 같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肅肅은 ‘공경스러운 모습’을 이른다. 文王의 태도를 이르는 표현이다. ▼ 毛亨은 肅肅/敬也, ‘肅肅은 공경스럽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肅肅/敬之至也, ‘肅肅은 공경스러운 태도가 지극한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 廟는 체언으로, ‘종묘’나 ‘태묘’를 이른다.

◈◈ 鄭玄은 羣臣助文王/養老則尙和/助祭於廟則尙敬/言得禮之宜, ‘신하들이 文王을 도왔는데, 노인들을 모시니 和한 태도를 숭상한 것이요, 종묘에서 제사를 도우니, 敬한 태도를 숭상한 것이니, 이로써 文王의 행동거지가 타당한 예법에 맞아 들어 갔다는 점을 설명하였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궁실에는 사람이 있고, 종묘에는 조상의 신명이 있다. 따라서 이 句는 文王이 사람과 신명 모두를 예법에 맞는 태도로 대했다는 뜻이다.

 

 

 

 

不顯亦臨、無射亦保。

[자신을] 顯하지 않고도 臨하였고, 射하지 않고도 保하였도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나라를] 다스렸고, 사지를 찢지 않고도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 不顯은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마 文王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不은 부정어다. 顯을 한정한다. 顯은 용언으로, ‘드러내다’는 말이다. 毛亨은 不을 해석하지 않고, 顯 그대로 풀이하였는데, 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은 不顯亦臨을 以顯臨之라고 풀이하였다. 이 경우, 不은 의미 없는 조사다. 王引之 역시 《經傳釋詞》 「不」에서 毛亨의 말을 근거로 삼아, 不이 의미 없는 조사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 朱熹는 不顯/幽隱之處也, ‘不顯은 깊숙히 숨어 있는 듯 처신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亦는 ‘~하더라도’처럼 해석된다. 각각 臨과 保를 받는다.

◈ 臨은 용언으로, 아마 ‘다스리다’, ‘통치하다’는 말일 것이다. 文王이 周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이다. 鄭玄은 ‘보이다’, ‘보여 주다’처럼 해석하였으나 나는 따르지 않았다. ▼ 鄭玄은 臨/視也, ‘臨은 보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보여 주다’, ‘드러내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朱熹는 若有臨之, ‘臨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臨은 ‘보다’는 말이다. 혼자 있을 때도 풀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 無 역시 不과 같은 부정어다. ‘~하지 않다’처럼 해석된다. 射를 체언으로 보고, 無를 ‘~가 없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 射는 용언으로, 아마 ‘찢어 죽이다’, ‘책형을 가하다’는 말 같다. 이 射는 磔과 같다. 《韓非子》 「難言」에 司馬子期死而浮於江/田明辜射, ‘司馬子期는 죽어서 강물에 떠내려 갔고, 田明은 辜射를 당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俞樾은 俞樾은 舊注曲說//辜射/卽辜磔//磔/從石聲/與射聲相近/故得通用//辜磔/本疊韻字//荀子正論篇/斬斷枯磔///以枯爲辜//此云辜射/又以射爲磔//古書每無定字/學者當以聲求之//周禮掌戮/殺王之親者辜之///注曰/謂磔之///田明辜射/卽此刑也//字又作矺//史記李斯傳/十公主矺死於杜///索隱曰/矺/與磔同/古今字異耳, ‘舊注는 잘못된 설이다. 辜射는 곧 辜磔이다. 磔은 石聲에 속하니, 射의 발음과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辜와 磔은 본래 疊韻이다. 《荀子》 「正論」에 “斬斷하고 枯磔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枯는 辜로 보아야 한다. 본문의 辜射 같은 경우, 射를 磔으로 보아야 한다. 옛 글들에는 늘 하나로 정해진 글자가 없었으니, 학자들은 마땅히 소리를 가지고 글자의 의미를 추론해야 할 것이다. 《周禮》의 掌戮 부분에, “왕의 친척을 죽인 자는 辜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주석에서는 “磔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田明辜射는 바로 이 형벌이다. 이 글자는 矺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史記》 「李斯傳」에 “열 公主가 杜에서 矺으로 죽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索隱》에서는 “矺은 磔과 같다. 예와 지금 사용하는 글자가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周禮》 인용문은 「秋官司寇」에 나온다. 주석은 鄭玄의 말이다. 鄭玄은 辜之言枯也/謂磔之, ‘辜는 枯를 뜻하니, 磔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李斯傳」은 「李斯列傳」이다. 《索隱》은 司馬貞의 《史記索隱》이다. 司馬貞은 矺音宅/與磔同/古今字異耳//磔謂裂其支體而殺之, ‘矺은 宅이라고 발음한다. 磔과 같다. 예와 지금 사용하는 글자가 다를 뿐이다. 磔은 몸을 찢어서 죽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이 설이 이 詩 내용과 잘 합치된다. 不顯亦臨에서 文王이 周나라를 다스리는 모습을 표현하였으므로, 대구를 이루는 無射亦保 역시 그러한 모습을 풀이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無射亦保는 아마 가혹한 형벌을 쓰지 않고도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毛亨과 朱熹는 ‘싫어하다’, ‘싫증내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이렇게 보면 ‘싫증내지 않고 백성들을 보호하였다’는 말이 된다. 내 생각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 鄭玄은 ‘활쏘기’로 해석하였는데, 이렇게 보면 ‘활을 쏘지 않고도 자기 왕위를 지켰다’는 말이 된다. 아마도 鄭玄은 활을 쏘는 기예를 왕위에 군림하 수 있는 재능이라고 이해한 듯하다. 한국에서도 고구려의 鄒牟가 활을 잘 쏴서 왕이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상기하였듯, 나는 射를 磔으로 보았는데, 磔이란 곧 형벌이다. 賞罰은 군주의 권한으로, 賞罰을 적재적소에 내릴 수 있다면, 군주의 권위를 보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보면 鄭玄의 설과 내 설은 맥락상 같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毛亨은 射를 厭이라고 풀이하였다. 厭은 ‘싫증내다’, ‘싫어하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射를 六藝의 射 그대로 풀이하였다. ‘활쏘기’다. ▼ 陸德明은 射/毛音亦/厭也//鄭食夜反/射藝, ‘射에 대해, 毛亨의 경우 亦이라고 발음한다. 厭이라는 뜻이다. 鄭玄의 경우 食과 夜의 반절로 발음한다. 射藝를 뜻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射/與斁同/厭也, ‘射는 斁과 같다. 厭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保는 용언으로, 아마 ‘편안하게 하다’, ‘안정시키다’, ‘안심시키다’는 말일 것이다. 安保나 保安이라는 말처럼, 保에는 ‘편안하게 하다’는 의미가 있다. 毛亨은 ‘편안하게 하다’, 鄭玄은 ‘차지하다’, 朱熹는 ‘견지하다’처럼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毛亨은 保를 保安, ‘편안하게 하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 鄭玄은 保/猶居也, ‘保는 居와 같다’라고 하였다. 居는 아마 ‘차지하다’는 말일 것이다. 文王이 자신의 王位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 朱熹는 保/猶守也, ‘保는 守와 같다’라고 하였다. 守는 아마 원칙 같은 것을 ‘견지하다’는 말일 듯하다.

◈◈ 毛亨은 以顯臨之/保安無厭也, ‘드러낸 德으로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에 싫증 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猒/於豔反/下同//一本作/保/安也//射/猒也///非, ‘猒은 於와 豔의 반절로 읽는다. 아래로도 그렇다. 어떤 판본에는 “保는 편안하게 하다는 뜻이고, 射는 싫증내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 一本作 이후의 글들은 毛亨의 주석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라고 이해하였다. 《經典釋文》에는 厭이 猒으로 되어 있다.

◈◈ 鄭玄은 文王之在辟廱也/有賢才之質而不明者/亦得觀於禮//於六藝無射才者/亦得居於位/言養善使之積小致高大, ‘文王이 辟廱에 있었는데, 賢才의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文王의 禮法을 살필 수 있었고, 六藝에 대해서는 활쏘는 재주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기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으니, 이는 장점을 키워서, 미미한 덕행을 쌓아 위대한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상기하였듯, 鄭玄은 아마 활을 쏘는 기예를 王으로 군림할 수 있는 재능으로 보았던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겠다.

◈◈ 朱熹는 雝雝在宮/肅肅在廟/不顯亦臨/無射亦保를 한 章으로 보았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을 이른다. 朱熹는 또 言文王在閨門之內/則極其和/在宗廟之中/則極其敬/雖居幽隱/亦常若有臨之者/無厭射/亦常有所守焉/其純亦不已蓋如是, ‘文王은 규문 안에 있을 때는 온화한 태도를 다하였고, 종묘에 있을 때 공경스러운 태도를 다하였는데, 처신하는 모습이 은미하더라도, 언제나 보는 사람이 있는 듯 행동하였고, 싫증내지 않고도 언제나 견지하는 바가 있었으니, 그 순선한 태도가 멈추지 않는 모습이 대개 이와 같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磔이란, 사람을 죽인 다음에 사지를 찢는다는 뜻이니, 아주 무거운 벌이었다. 이 句에서도 文王의 德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文王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도 周나라를 잘 다스렸고, 또 磔刑 같은 중형을 남발하지 않고도 백성들을 안정시켰는데, 德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백성들이 文王을 의지할 수 있었고, 중형으로 경계하지 않고도 백성들이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肆戎疾不殄、烈假不瑕。

그러므로 戎한 疾이 殄하지 않아도, [문왕은] 烈假하여서 瑕하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심각한 환란이 끊이지 않았어도, [문왕은] 위대하였기에 실수하지 않았으니,

◈ 肆는 부사어로, 아마 ‘그리하여’, ‘그래서’ 같은 말일 것이다. 毛亨과 朱熹는 故今이라고 풀이했는데, 아마 故今을 붙여서 ‘그러므로’처럼 사용했던 모양이다. 《爾雅》 「釋詁」에 治/肆/古/故也//肆/故/今也, ‘治, 肆, 古는 故라는 뜻이다. 肆, 故는 今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故와 今은 모두 ‘그러므로’라는 말이다. ▼ 毛亨은 肆/故今也, ‘肆는 그러므로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肆는 그러므로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戎은 관형어로, ‘큰’, ‘커다란’이다. 疾을 한정한다. 《爾雅》 「釋詁」에 弘/廓/宏/溥/介/純/夏/幠/厖/墳/嘏/丕/弈/洪/誕/戎/駿/假/京/碩/濯/訏/宇/穹/壬/路/淫/甫/景/廢/壯/冢/簡/箌/昄/晊/將/業/席/大也, ‘弘, 廓, 宏, 溥, 介, 純, 夏, 幠, 厖, 墳, 嘏, 丕, 弈, 洪, 誕, 戎, 駿, 假, 京, 碩, 濯, 訏, 宇, 穹, 壬, 路, 淫, 甫, 景, 廢, 壯, 冢, 簡, 箌, 昄、晊, 將, 業, 席은 크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戎/大也, ‘戎은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戎/大也, ‘戎은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疾은 체언으로, 아마 ‘고난’ ‘환란’, ‘난관’을 이를 것이다. 朱熹의 설이 타당하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毛亨과 鄭玄은 모두 ‘병’이라는 본래 의미로 해석한 듯하다. ▼ 朱熹는 疾/猶難也, ‘疾은 難과 같다’라고 하였다. 難은 ‘고난’이라는 말일 것이다. 朱熹는 또, 戎疾에 대해 大難/如羑里之囚/及昆夷獫狁之屬也, ‘大難은 羑里에 갇힌 일이나, 昆夷나 獫狁 같은 문제들을 뜻한다’라고 하였다.

◈ 不은 부정어다. 殄을 한정한다.

◈ 殄은 용언으로, ‘다하다’, ‘끝나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과 鄭玄은 모두 絶로 풀이하였다. 絶은 ‘끊이다’, 즉 ‘이어지지 않다’는 말이다. ▼ 朱熹는 殄/絶, ‘殄은 끊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烈은 아마 용언으로, ‘위대하다’는 말일 것이다. 烈假는 한 단어로, 文王이 ‘위대하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朱熹는 光이라고 풀이했는데, 고대에 光은 廣과 통용되었고, 廣은 ‘넓다’, ‘크다’는 말이므로, 곧 大와 같다. 烈과 假를 따로 떼어서 볼 필요는 없겠다. 光이 어떻게 廣과 통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詩》 「頌 周頌」의 「敬之」에 日就月將/學有緝熙於光明, ‘나날이 就하고, 다달이 將하니, 학문은 또한 빛나 光해지고, 明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毛亨은 光/廣也, ‘光은 넓어지다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以光之照耀/所及廣遠/故以光爲廣, ‘빛으로 비추어, 廣遠한 데에 이르니, 이에 毛亨은 光을 廣으로 풀이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國語》 「周語」에 叔父若能光裕大德/更姓改物/以創制天下/自顯庸也, ‘叔父가 만약 大德을 光裕하여, 姓을 고치고, 物을 고쳐서, 天下를 創制한다면, 저절로 쓰임새가 드러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韋昭는 光/廣也//裕/寬也, ‘光은 넓히다는 뜻이고, 裕은 너그럽게 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光裕는 아마 大德을 ‘넓히다’, ‘키우다’는 의미의 용언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荀子》이다. 《荀子》 「儒效」에는 大雅之所以爲大雅者/取是而光之也, ‘「大雅」가 「大雅」라고 불리는 까닭은 是를 取해서 光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郝懿行은 光/猶廣也//光廣古通用, ‘光은 넓히다는 말과 같다. 光과 廣은 고대에 통용되었다’라고 하였다. ▼ 毛亨은 烈/業, ‘烈은 業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業은 아마 大처럼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戎 부분에 인용한 《爾雅》 「釋詁」 내용에 業 역시 포함되어 있다. ▼ 鄭玄의 판본에는 烈이 厲라고 되어 있다. 鄭玄은 厲假/皆病也, ‘厲와 假는 모두 병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烈/毛如字/業也//鄭作厲/力世反/又音賴/病也, ‘烈은 毛亨의 경우엔 글자 그대로 읽는다. 業이라는 뜻이다. 鄭玄의 판본에는 厲라고 되어 있고, 이 때는 力과 世의 반절로 읽는다. 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病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烈/光, ‘烈은 빛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假는 아마 용언으로, ‘위대하다’는 말일 것이다. 烈과 한 단어를 이룬다. 戎 부분에 인용한 《爾雅》 「釋詁」 내용에 假 역시 포함되어 있다. ▼ 毛亨은 假/大也, ‘假는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烈 부분에 기술하였듯, 鄭玄은 病, ‘병’이라고 보았다. ▼ 陸德明은 假/古雅反/大也, ‘假는 古와 雅의 반절로 읽는다.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假/大, ‘假는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瑕는 용언으로, 아마 ‘실수하다’, ‘잘못하다’는 말일 것이다. 瑕는 본래 玉에 나 있는 ‘흠결’을 뜻한다. ‘흠결’이니, 곧 ‘잘못’이다. 《說文解字》 「玉部」에 瑕/玉小赤也, ‘瑕는 玉에 있는 작은 붉은 점이다’라는 말이 있다. 朱熹의 설이 옳다. 毛亨과 鄭玄은 ‘멈추다’, ‘끝나다’처럼 해석하였다. 그런데 이 설이 타당하려면, 戎疾不殄이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라고 해석된 것처럼, 烈假不瑕 역시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고민해 보았지만, 假를 ‘문제’, ‘환란’처럼 해석할 여지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따르지 않았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毛亨은 瑕를 絶, ‘끊이다’, ‘멈추다’라고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瑕를 已, ‘멈추다’라고 풀이하였다. ▼ 陸德明은 瑕/毛音遐/遠也//鄭古雅反/已也, ‘瑕는 毛亨의 경우, 遐라고 읽는다. 멀다는 뜻이다. 鄭玄의 경우, 古와 雅의 반절로 읽는다. 멈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遐는 ‘멀다’는 말이다. ▼ 朱熹는 瑕/過也, ‘瑕는 잘못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毛亨은 故今大疾害人者/不絶之而自絶也, ‘그리하여 심각한 병이 사람들을 해칠 때에, 멈추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멈추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文王於辟廱/德如此//故大疾害人者/不絶之而自絶//爲厲假之行者/不已之而自已/言化之深也, ‘文王이 辟廱에 있을 때, 德이 이와 같았으니, 심각한 병이 사람을 해칠 때에, 멈추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멈추었으며, 厲假가 횡행할 때에, 멈추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멈추었다. 이토록 文王의 교화가 깊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行/下孟反/下皆同, ‘行은 下와 孟의 반절로 읽는다. 아래로도 모두 그렇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文王이 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수 차례 닥친 환란도 잘 극복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朱熹가 언급한 대로, 文王이 세력을 갖추자 紂는 文王을 羑里에 감금하였다. 그러나 文王은 고명하였고, 그래서 제후들이 文王을 구명해 주자, 紂는 어쩔 수 없이 풀어 주었다.

 

 

 

 

不聞亦式、不諫亦入。

聞하지 않았더라도 式하였고, 諫하지 않았더라도 入하였다.

명성이 높지 않더라도 기용하였고, 간쟁하지 못하더라도 용인하였다.

◈ 不은 부정어다. 각각 聞, 諫을 한정한다. 이 節에서는 ‘~하지 못하다’처럼 해석된다.

◈ 聞은 용언으로, 아마 ‘유명하다’, ‘이름이 나다’는 말일 것이다. 鄭玄의 설이다. 즉, 不聞은 명사구로, ‘이름이 나지 않은 사람’, ‘유명하지 않은 사람’을 이른다. 朱熹는 ‘들어 보다’라고 풀이하였는데, 鄭玄의 설에 비해 의미가 다소 비루하다. 聞은 名과 같다. 《戰國策》 「燕策」에 謀未發而聞於外/則危, ‘모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밖에 聞하면 위태롭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聞은 ‘퍼져 나가다’라는 말이다. 또, 《書》 「周書 微子之命」에 爾惟踐修厥猷/舊有令聞, '니가 도리를 닦아, 예전부터 아름다운 聞이 있었다'라는 말이 있고, 《詩》 「大雅 生民之什」의 「卷阿」에 令聞令望, '아름다운 聞과 아름다운 望'이라는 말이 있는데, 聞은 모두 '명성', '평판'을 뜻한다. 《莊子》 「人間世」에도 名聞不爭/未達人心, ‘名聞를 두고 남들과 다투지는 않지만, 아직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지는 못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聞은 名과 같은 말로, 곧 ‘명예’, ‘명망’, ‘평판’을 이른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聞을 聞達, ‘이름이 나다’, ‘명성이 높다’라고 풀이하였다. ▼ 朱熹는 聞/前聞也, ‘聞은 전에 들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亦은 ‘~하더라도’처럼 해석된다.

◈ 式은 용언으로, ‘기용하다’, ‘등용하다’는 말이다. 用과 같다. 鄭玄의 설이다. 朱熹는 ‘본받다’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나쁘지 않다. 《爾雅》 「釋言」에 試/式/用也, ‘試와 式은 用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鄭玄은 式/用也, ‘式은 기용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式/法也, ‘式은 본받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諫은 용언으로, 아마 ‘간쟁하다’는 말일 것이다. 윗사람의 뜻에 반하면서까지도 간언하는 행위를 이른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諫을 諫爭, ‘간쟁하다’라고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朱熹는 諫을 諫諍, ‘간쟁하다’라고 풀이하였다.

◈ 入은 용언으로, ‘용인하다’, ‘받아 들이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朱熹는 入於善, ‘善한 상태에 들이다’처럼 풀이하였는데, 나는 따르지 않는다.

◈◈ 毛亨은 言性與天合也, ‘文王의 천성이 하늘과 잘 맞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文王之祀於宗廟/有仁義之行/而不聞達者/亦用之助祭//有孝悌之行/而不能諫爭者/亦得入//言其使人器之/不求備也, ‘文王이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이 仁義에 따라 행동하였다면, 유명하지 않더라도 제사를 돕는 자리에 기용하였고, 사람이 孝悌에 따라 행동하였다면, 간쟁하지 못하더라도 용인하였다. 이는 文王이 사람을 기용할 때, 그 사람이 완벽한지를 따지지 않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弟音悌/本又作悌//爭/爭𨷖之爭也, ‘弟는 悌로 읽는다. 悌라고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 爭은 싸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肆戎疾不殄/烈假不瑕/不聞亦式/不諫亦入을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此兩句/與不殄厥慍/不隕厥問/相表裏, ‘이 두 句는 不殄厥慍, 不隕厥問과 내용상 서로 겉과 속처럼 대가 맞다’라고 하였다. 不殄厥慍/不隕厥問은 「緜」에 나오는 말이다. 朱熹는 다시, 承上章言//文王之德如此/故其大難雖不殄絶/而光大亦無玷鈌//雖事之無所前聞者/而亦無不合於法度//雖無諫諍之者/而亦未嘗不入於善//傳所謂性與天合/是也, ‘앞장의 내용이 이어진다. 文王의 덕이 이와 같으니, 심각한 환란이 지속되어도 文王은 위대하여 실수하지 않았고, 비록 사안에 대해 앞서 들은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는 경우가 없었으며, 간쟁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선한 경지에 들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毛亨의 傳에서 “천성이 하늘과 합치되었다”라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러한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아마도 환란을 당하는 중에도 文王이 올바르게 처신했다는 점을 설명하는 말 같다.

 

 

 

 

肆成人有德、小子有造。

그리하여 [문왕 덕분에] 成人은 德을 有하고, 小子는 造를 有하였으니,

그리하여 [문왕 덕분에] 성인은 덕을 갖추었고, 아이들은 성취를 이루었으니,

◈ 肆는 ‘그리하여’다. 故와 같다.

◈ 成人은 ‘어른’이다. 小子와 대조되고 있다. ▼ 鄭玄은 成人/謂大夫士也, ‘成人은 大夫와 士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冠以上爲成人, ‘관을 쓰면 成人이 된다’라고 하였다.

◈ 有는 용언으로, ‘가지게 되다’, ‘갖추다’는 말이다. 각각 德과 造를 받는다.

◈ 小子는 ‘아이들’이다. ▼ 鄭玄은 小子/其弟子也, ‘小子는 大夫와 士의 자제들이다’라고 하였다. 弟子는 子弟와 같다. ▼ 朱熹는 小子/童子也, ‘小子는 아이들이다’라고 하였다.

◈ 造는 체언으로, ‘이루다’, ‘성취하다’는 말이다. 就와 같다. 《孟子》 「離婁 下」에 君子深造之以道/欲其自得之也, ‘君子가 道를 가지고 깊이 造하는 것은 스스로 깨닫고자 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趙岐는 造/致也, ‘造는 이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朱熹는 造/詣也, ‘造는 이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르다’는 말은 곧 ‘이루다’는 뜻이다. ▼ 毛亨은 造/爲也, ‘造는 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造/爲也, ‘造는 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文王在於宗廟/德如此/故大夫士皆有德/子弟皆有所造成, ‘文王이 종묘에 있으면서 비친 德이 이와 같았으니, 大夫와 士는 모두 德을 갖추었고, 자제들도 모두 성취를 이루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文王이 올바르게 다스렸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진일보했다는 말이다.

 

 

 

 

古之人無斁、譽髦斯士。

古之人은 [이처럼] 斁하지 않고, 斯士를 譽髦하였도다.

옛 사람은 [이처럼] 싫증내지 않고, 이 사들을 훌륭하게 길렀도다.

◈ 古之人은 ‘옛 사람’을 이른다. 문맥을 따져 보자면, ‘옛 聖人’이나 ‘옛 聖王’, 혹은 ‘文王’이라고 할 수 있겠다. ▼ 鄭玄은 古之人/謂聖王明君也, ‘古之人은 聖王과 明君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古之人/指文王也, ‘古之人은 文王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 無는 부정어다. 不과 같다.

◈ 斁은 용언으로, ‘싫증내다’는 말이다. 《說文解字》 「攴部」에 斁/猒也, ‘斁은 싫증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毛亨은 斁을 厭, ‘싫증내다’라고 풀이하였다. ▼ 鄭玄의 주석에는 斁이 아니라 擇이라고 되어 있다. 擇은 ‘고르다’, ‘가리다’는 말이다. ▼ 陸德明은 斁/毛音亦/猒也//鄭作擇, ‘斁은 毛亨의 경우 亦이라고 발음한다. 싫증낸다는 뜻이다. 鄭玄의 판본에는 擇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譽髦는 아마 용언으로, ‘훌륭하게 만들다’, ‘훌륭하게 기르다’는 의미 같다. 斯士를 받는다. 譽는 ‘명예롭다’, ‘훌륭하다’는 말이니, 곧 ‘뛰어나다’는 말이고, 髦 역시 ‘뛰어나다’는 말이다. 목적어가 斯士이니, 곧 斯士를 ‘뛰어나게 하다’는 말이 된다. 鄭玄과 朱熹가 ‘선비들을 譽髦하게 하다’처럼 해설하였다. 《爾雅》 「釋言」에 髦/俊也, ‘髦는 뛰어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뛰어난 선비’라는 의미로, 髦士라는 말도 있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은 譽를 名譽, ‘명예’라고 풀이하였고, 髦를 俊, ‘뛰어나다’라고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譽를 名譽, ‘명예’라고 풀이하였고, 髦를 俊乂, ‘뛰어나다’라고 풀이하였다. ▼ 陸德明은 髦/俊也, ‘髦은 뛰어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또 一本此下更有/古之人無猒於有譽之俊士也///此王肅語, ‘어떤 판본에는 이 아래에 또 “古之人은 명예를 가진 뛰어난 士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王肅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王肅의 말이라고 인용된 글은 毛亨의 주석과 동일한데, 陸德明이 무엇을 착각한 듯하다. ▼ 朱熹는 譽/名, ‘譽는 명예롭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髦/俊也, ‘髦는 뛰어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斯는 ‘이’처럼 지시하는 말일 것이다. 士를 받는다.

◈ 士는 체언으로, ‘사’다. 大夫 아래의 하급 관리들을 이른다.

◈◈ 毛亨은 古之人無厭於有名譽之俊士, ‘옛 사람들은 명예로운 俊士들에 싫증을 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口無擇言/身無擇行/以身化其臣下/故令此士皆有名譽於天下/成其俊乂之美也, ‘文王은 입으로는 말을 가리지 않고, 몸으로는 행동거지를 가리지 않으면서, 몸소 신하들을 교화하였다. 그리하여 이 士들이 모두 천하에 명예를 떨치게 하였고, 빼어난 장점을 성취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令/力成反//乂音刈, ‘令은 力과 成의 반절로 읽는다. 乂는 刈로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肆成人有德/小子有造/古之人無斁/譽髦斯士를 한 章으로 보았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承上章言//文王之德見於事者如此/故一時人材/皆得其所成就//蓋由其德純而不已/故令此士皆有譽於天下/而成其俊乂之美也, ‘앞의 章 내용에서 이어진다. 文王의 德이 사안들에서 드러나는 모습이 이와 같으니, 그 당시의 인재들이 모두 성취하는 바를 이루었던 것이다. 대개 文王은 자신의 德과 순수함에 따라 이러한 일을 멈추지 않았으니, 이러한 士들이 모두 천하에 명예를 떨치게 하였고, 빼어난 재능을 성취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毛詩正義》에서는 「思齊」의 편제에 대해 思齊四章/章六句//故言二章章六句/三章章四句, ‘「思齊」은 네 章으로, 章마다 여섯 句다. 옛날에는 두 章은 章마다 여섯 句, 세 章은 章마다 네 句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詩經集傳》에서는 「思齊」의 편제에 대해 思齊五章/二章章六句/三章章四句, ‘「思齊」는 다섯 章으로, 두 章은 章마다 여섯 句이고, 세 章은 章마다 네 句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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