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1. 11:32ㆍ시 이야기/대아 문왕지십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시》 번역에는 특별히 고정적으로 참고한 번역서가 없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때는 기타 블로그들을 참고하였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毛詩正義》와 《詩經集傳》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毛詩正義》에는 毛亨, 鄭玄, 孔穎達의 주석이 수록되어 있고, 陸德明의 주석 역시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毛亨의 주석을 傳이라고 하고, 鄭玄의 주석을 箋, 孔穎達의 주석을 疏라고 합니다. 陸德明의 경우, 音義라고 합니다. 다만 상기하였듯, 《毛詩正義》에는 陸德明의 音義가 부분적으로만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經典釋文》을 직접 참고하여, 陸德明의 音義를 모두 인용해 두었습니다. 《詩經集傳》에는 朱熹의 주석이 수록되어 있는데, 朱熹의 주석 역시 傳이라고 합니다. 毛亨과 鄭玄, 朱熹의 주석은 모두 번역하였고, 孔穎達의 주석은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본문을 한 쪽만 따라 번역하지는 않았습니다. 더 나은 설을 택하였고,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엔 제 의견에 따라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추후에 呂祖謙의 《呂氏家塾讀詩記》, 王引之의 《經義述聞》,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그리고 孔穎達의 疏도 번역하여 반영하고 싶은데,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 첫 부분에는 시 전체의 본문과 번역문을 기재하였습니다. 그 뒷부분에는 본문과 번역문, 그리고 주석을 기재해 두었습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毛亨의 설을 소개하고, 또 鄭玄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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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5년 3월 21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皇矣」
皇矣
皇하도다.
위대하도다.
皇矣上帝、臨下有赫。監觀四方、求民之莫。
皇하도다, 上帝여. 下를 臨하는데, 赫을 有하도다. 四方을 監觀하면서, 民을 莫을 求하였도다.
위대하도다, 상제여. 하계를 내려다 보는데, 위엄을 품고 있다. 사방을 살피면서, 백성들이 안정되기를 바랐도다.
維此二國、其政不獲。維彼四國、憎其式廓。
[그런데] 此 二國의 경우, 其의 政이 獲하지 않았고, 彼 四國의 경우, 其의 廓을 式한 꼴을 [상제가] 憎하였다.
[그런데] 이쪽 두 나라의 경우, 그 제후가 올바르지 않았고, 저쪽 네 나라의 경우, 주제 넘는 짓을 하는 꼴을 [상제가] 미워하였다.
上帝耆之、爰究爰度。乃眷西顧、此維與宅。
[그러나] 上帝는 之를 耆하였기에 [어느 나라가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를 계속] 究度하였는데, 乃 眷하게 西로 顧하였으니, [주나라를 발견하고] 此에 [뜻을] 與하게 宅하였도다.
[그러나] 상제는 백성들을 가엾게 생각하였기에 [어느 나라가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를 계속] 헤아렸는데, 이에 마음을 내어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니, [주나라를 발견하고] 이 땅에 [뜻을] 함께 하였도다.
作之屏之、其菑其翳。脩之平之、其灌其栵。啟之辟之、其檉其椐。攘之剔之、其檿其柘。
[주나라 태왕은 정착하기 위해] 作하고 屏하였는데, 其는 菑요, 翳였고, 脩하고 平하였는데, 其는 灌이요, 栵이었다. 啟하고 辟하였는데, 其는 檉이요, 椐였고, 攘하고 剔하였는데, 其는 檿이요, 柘였다.
[주나라 태왕은 정착하기 위해] 베고 없앴는데, 그렇게 한 것은 서서 죽은 나무들이요,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었고, 정리하고 정돈하였는데, 그렇게 한 것은 너무 가까이서 자라는 나무들이요, 줄지어 자라는 나무들이었다. 심고 키웠는데, 그렇게 한 것은 왕버들과 영수목이요, 보살피고 가지를 쳤는데, 그렇게 한 것은 산뽕나무와 뽕나무였다.
帝遷明德、串夷載路。
[이에] 帝가 明德에게 遷하였으니, 串夷가 [주나라에 쫓겨] 路를 載하였고,
[이에] 상제의 뜻이 위대한 덕을 품은 군주에게 옮겨 갔으니, 곤이가 [주나라에 쫓겨] 길을 가득 채웠고,
天立厥配、受命旣固。
天대로 厥 配를 立하니, 受命은 旣 固해졌다.
하늘의 뜻대로 그 배필을 세웠으니, 천명은 이윽고 굳건해졌다.
帝省其山、柞棫斯拔、松柏斯兌。
帝는 其 山을 省하고서, [주나라를 돕기 위해] 柞와 棫을 拔하였고, 松과 柏을 兌하였다.
상제는 그 산을 살피고서, [주나라를 돕기 위해]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를 생장시켰고,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올곧게 만들었다.
帝作邦作對、自大伯王季。
[또,] 帝은 邦에 作하였고, 對에도 作하였으니, [이렇게 한 것은] 大伯과 王季 때부터였다.
[또,] 상제는 나라에 복을 내렸고, 비빈들에도 복을 내렸으니, [이렇게 한 것은] 태백과 왕계 때부터였다.
維此王季、因心則友、則友其兄、則篤其慶、載錫之光。
此 王季는 心이 友하였기에, 其 兄을 友하였고, 其 慶을 篤하였으니, 載 光이 錫해졌으며,
이 왕계는 마음가짐이 우애로웠기에, 그 형을 잘 대하였고, 그 덕을 두텁게 닦았으니, 그리하여 영광이 내려왔으며,
受祿無喪、奄有四方。
[상제에게서] 受한 祿을 喪하지 않고, [그 덕으로] 四方을 奄하였다.
[상제에게서] 받은 복록을 잃지 않고, [그 덕으로] 사방을 덮었도다.
維此王季、帝度其心、貊其德音。其德克明、克明克類、克長克君。
此 王季에 대해서, 帝는 其 心을 度하고, 其 德音을 貊하였으니, [왕계는] 其德으로 克明하였고, 克明하여 克類하였으며, 克長하고 克君하였다.
이 왕계에 대해서, 상제는 그 마음을 바로잡아 주고, 그 덕음을 다스려 주었으니, [왕계는] 그 덕으로 시비를 살필 수 있었다. 시비를 살필 수 있으니 선악을 구분할 수 있었고, [그러자] 어른이자 군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王此大邦、克順克比。
王은 此하듯 邦을 大하였는데, [왕계가 온화하였기에 백성들은 왕계를] 克順하였고, [왕계가 선을 가릴 줄 알았기에 백성들은 왕계에게] 克比하였다.
왕은 이처럼 나라를 성장시켰는데, [왕계가 온화하였기에 백성들은 왕계를] 따를 수 있었고, [왕계가 선을 가릴 줄 알았기에 백성들은 왕계에게] 모여 들 수 있었다.
比于文王、其德靡悔。
文王에 比하더라도, 其 德은 悔가 靡하였던 것이다.
옛 성왕들에 견주어 보더라도, 왕계의 덕은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旣受帝祉、施于孫子。
[왕계가] 帝의 祉를 受한 뒤에, [그 복은] 孫子에게까지 施하였다.
[왕계가] 상제의 복록을 받은 뒤에, [그 복은] 자손에게까지 미쳤다.
帝謂文王、無然畔援、無然歆羨、誕先登于岸。
帝가 文王에게 謂하였다. “畔援하지 말고, 歆羨하지 말며, 誕 先 岸에 登하라.”
상제가 문왕에게 일렀다. “멋대로 날뛰지 말고, 탐욕을 부리지 말며, 가장 먼저 왕업을 이루어라.”
密人不恭、敢距大邦、侵阮徂共。
[그런데] 密人이 不恭하더니, 敢 大邦에 距하고, 阮, 徂, 共과 함께 侵해 왔다.
[그런데] 밀나라 사람들이 불경하게 굴더니, 감히 큰 나라에 항거하고, 원나라, 조나라, 공나라와 함께 침범해 왔다.
王赫斯怒、爰整其旅、以按徂旅、以篤于周祜、以對于天下。
王이 怒하여서 赫하고는, 爰 其 旅를 整하고서, 徂旅를 按하고, 周祜를 篤하였으며, 天下를 對하였도다.
왕이 화가 나서 소리를 꽥 지르고는, 이에 군대를 가다듬고서 조나라의 군대를 저지하였고, 주나라의 복록을 공고하게 닦았으며, 천하를 다스릴 공업을 성취하였도다.
依其在京、侵自阮疆、陟我高岡、無矢我陵、我陵我阿、無飲我泉、我泉我池。
[이윽고 문왕은 역공에 나섰으니,] 其 京에 在한 군대에 依하여서, 阮나라의 疆에서부터 [네 나라를] 侵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我의 高한 岡을 陟함에, [원나라 사람들은] 我의 陵에 矢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我의 陵이요, 我의 阿였으며, 我의 泉을 飲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我의 泉이요, 我의 池였도다.
[이윽고 문왕은 역공에 나섰으니,] 주나라 경에 있던 군대를 일으켜서, 원나라 국경에서부터 [네 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높은 산등성이를 올랐음에, [원나라 사람들은] 우리 언덕에 진을 치지 못하였으니, [이미] 우리의 언덕이요, 우리의 고개였으며, 우리 샘물을 마시지 못하였으니, [이미] 우리의 샘이요, 우리의 못이었도다.
度其鮮原、居歧之陽、在渭之將。萬邦之方、下民之王。
[사람들이 더 모여 들자 수도를 새로 물색하기 위해] 鮮과 原을 度하다가, 歧의 陽에 居하였으니, 渭의 將에 在하였다. [이에] 萬邦은 方하였고, 下民은 王하였다.
[사람들이 더 모여 들자 수도를 새로 물색하기 위해] 고립된 산과 드넓은 평원을 물색해 보다가, 기산의 남쪽에 거처를 정하였으니, 위수 곁에 있었다. [이에] 만국이 우러러 보았고, 백성들은 왕이라고 여겼다.
帝謂文王、予懷明德、不大聲以色、不長夏以革。不識不知、順帝之則。
[이에] 帝가 文王에게 謂하였다. “予는 明德을 懷하고, 聲을 大하여서 色하지 말 것이요, 夏를 長하여서 革하지 말지어다.” [그러자 문왕은] 不識不知 간에, 帝의 則을 順하게 되었다.
[이에] 상제가 문왕에게 말하였다. “너는 올바른 덕을 품고, 명성을 과장하여 겉을 꾸미지 말 것이요, 제후들을 이끌어 가면서 성급하게 굴지 말지어다.” [그러자 문왕은] 부지불식 간에, 상제의 원칙을 따르게 되었다.
帝謂文王、詢爾仇方、同爾兄弟、以爾鉤援、與爾臨衝、以伐崇墉。
帝가 [다시] 文王에게 謂하였다. “仇方과 詢하고, 兄弟와 同하며, 鉤援과 臨衝를 以하여서 崇의 墉을 伐하라.”
상제가 [다시] 문왕에게 말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와도 논의하고, 가까운 나라와도 힘을 합치며, 운제와 임차, 충차를 사용하여서, 숭나라의 성을 정벌하라.”
臨衝閑閑、崇墉言言。執訊連連、攸馘安安。是類是禡、是致是附、四方以無侮。
臨과 衝이 閑閑하자, 崇의 墉은 言言하였다. 執訊은 連連하였고, 攸馘은 安安하였다. 類하고, 禡하여서, [신명에게] 致하고, [그 뜻에] 附하였으니, 四方이 以 [주나라를] 悔하지 않았도다.
임차와 충차가 느릿느릿 움직이자, 숭나라의 성은 위태로워졌다. 포로를 신문하는 일은 끊이지 않았고, 포로의 귀를 자르는 모습에는 위엄이 있었다. 유를 지내고, 마를 지내서, [신명에게] 치성을 드리고, [그 뜻에] 맞추었으니, 주변 나라들이 이에 [주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도다.
臨衝茀茀、崇墉仡仡。是伐是肆、是絶是忽。四方以無拂。
臨과 衝이 茀茀하자, 崇의 墉은 仡仡하였다. [숭나라 병사들을] 伐하고, 肆하자, [숭나라의 동맹은] 絶하였고, [숭나라를 편드는 나라들이] 忽하니, 四方이 以 [주나라를] 拂하지 않았도다.
임차과 충차가 거세게 밀어 붙이자, 숭나라의 성은 전전긍긍하였다. [숭나라 병사들을] 찌르고, 시체를 흩어 놓자, [숭나라의 동맹은] 끊어졌고, [숭나라를 편드는 나라들이] 사라졌으니, 주변 나라들이 이에 [주나라를] 거스르지 않았도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皇矣」
皇矣
皇하도다.
위대하도다.
◈◈ 毛亨은 皇矣/美周也//天監代殷/莫若周//周世世脩德/莫若文王, ‘「皇矣」는 周나라를 찬미하는 글이다. 하늘이 천하를 살피다가 殷나라를 대신하게 하려 하였는데, 周나라 만한 나라가 없었다. 周나라는 대대로 德을 닦았지만, 그 통치자 중엔 文王 만한 왕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監/視也//天視四方可以代殷王天下者/維有周爾//世世脩行道德/維有文王盛爾, ‘監은 보다는 뜻이다. 하늘이 사방으로 殷나라를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릴 만한 나라를 살폈는데, 오직 周나라가 있었을 뿐이었다. 대대로 德을 닦았는데, 오직 文王의 德이 두터웠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王天下/往況反//下追王當王同, ‘王天下의 王은 往과 況의 반절로 읽는다. 밑에 나오는 追王, 當王의 王도 그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皇矣/一本無矣字//天監代殷/莫若周/絶句//周世世脩德//一讀莫若周世/絶句/周世脩德/爲一句//一本無下一世字//義並通//崔集注/莫若周也/世世脩德//王天下/往況反//下追王當王同, ‘제목인 皇矣에 대해, 어떤 판본에는 矣가 없는 경우가 있다. 天監代殷/莫若周까지 句를 끊는다. 周世世脩德에 대해서는, 莫若周가 아니라 莫若周世까지 句를 끊는 경우도 있고, 周世脩德까지를 句로 보는 경우도 있다. 어떤 판본에는 世世 중 한 글자가 없다. 모두 의미는 통한다. 崔의 《集注》에는 莫若周也/世世脩德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崔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 朱熹는 此詩敘大王大伯王季之德/以及文王伐密伐崇之事也, ‘이 詩에서는 大王, 大伯, 王季의 德에 대해 서술하면서, 文王의 代에 密나라와 崇나라를 정벌했다는 점까지 언급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大는 모두 ‘태’라고 읽는다. 太와 같다. 大王는 文王의 조부인 古公亶父를 이른다. 大伯은 古公亶父의 맏이이자, 文王의 백부다. 王季는 季歷으로, 文王의 부친이다. 大伯과 季歷 사이에 仲雍이 또 있는데, 기록대로라면 仲雍 역시 季歷에게 제후 자리를 양보했다고 한다.
◈◈ 亡亡案 : 周나라는 大王 때 이미 天命을 받았고, 그 命은 王季를 거쳐 文王의 시대에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周나라 사람들이 이거하거나, 전쟁을 벌인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
皇矣上帝、臨下有赫。監觀四方、求民之莫。
皇하도다, 上帝여. 下를 臨하는데, 赫을 有하도다. 四方을 監觀하면서, 民을 莫을 求하였도다.
위대하도다, 상제여. 하계를 내려다 보는데, 위엄을 품고 있다. 사방을 살피면서, 백성들이 안정되기를 바랐도다.
◈ 皇은 용언으로, ‘위대하다’는 말이다. 《說文解字》 「王部」에 皇/大也, ‘皇은 위대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皇/大, ‘皇은 위대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여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皇을 大, ‘위대하다’로 풀이하였다. ▼ 朱熹 역시 皇/大, ‘皇은 위대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여다.
◈ 矣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다. ‘~하도다’처럼 해석된다.
◈ 上帝는 체언으로, ‘상제’다. ‘하느님’, ‘하늘’, ‘天神’을 이른다.
◈ 臨은 용언으로, ‘내려다 보다’는 말이다. 下를 받는다. 하늘 위에서 땅을 ‘내려다 보다’는 말이다. 《說文解字》 「臥部」에는 監에 대해 監/臨下也, ‘내려다 보다’라고 하였는데, 臨을 다시 臨/監臨, ‘臨은 監臨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으니, 臨 역시 監처럼 ‘내려다 보다’라고 할 수 있겠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大明」에 上帝臨女, ‘上帝가 너를 臨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臨/視也, ‘臨은 보다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孔穎達 역시 臨視, ‘보다’라고 풀이하였다. 《詩》 「頌 魯頌」의 「閟宮」에도 같은 말이 있다. 《詩》 「國風 邶風」의 「日月」에는 日居月諸/照臨下土, ‘해와 달이 下土를 照臨한다’라는 말이 있고, 《詩》 「小雅 北山之什」의 「小明」에는 明明上天/照臨下土, ‘밝은 上天이 下土를 照臨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照臨은 ‘굽어 살피다’, ‘굽어 비추다’라는 말이다. 臨이 ‘보다’가 아니라 ‘살피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아래를’ 살핀다는 의미로는 같다. 《莊子》 「人間世」에도 其高臨山/十仞而後有枝, ‘그 높이는 산을 臨할 정도였으니, 밑둥에서 열 길이나 올라간 뒤에야 가지가 나 있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臨 역시 ‘내려다 보다’라는 뜻이다. ▼ 鄭玄은 臨/視也, ‘臨은 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臨/視也, ‘臨은 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有는 용언으로, ‘품고 있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赫을 받는다.
◈ 赫은 체언으로, ‘위엄’을 이른다. 《爾雅》 「釋訓」에 赫兮烜兮/威儀也, ‘赫兮와 烜兮는 위엄 있는 모습을 이른다’라는 말이 있다. ▼ 朱熹는 赫/威明也, ‘赫은 위엄 있고 빛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監觀은 용언으로, ‘살피다’는 말이다. 四方을 받는다. 監과 觀은 모두 ‘살피다’는 말이다. ▼ 朱熹는 監/亦視也, ‘監 역시 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四方은 체언으로, ‘사방’, ‘온세상’을 이른다. 東, 西, 南, 北을 四方이라 한다.
◈ 求는 용언으로, ‘원하다’, ‘바라다’는 말이다. 民之莫을 받는다.
◈ 民은 체언으로, ‘백성’이다.
◈ 求民之莫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 莫은 체언으로, ‘안정’이다. 定과 같다. 이러한 용례는 《詩》에 몇 군데 보이고, 그 외에서는 찾기 어렵다. 《爾雅》 「釋詁」에 貉/暯/安/定也, ‘貉, 暯, 安은 정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陸德明은 嗼音莫/本亦作莫, ‘嗼은 莫이라고 읽는다. 판본에 따라 莫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곧, 莫 역시 ‘정하다’는 말이 된다. ▼ 毛亨은 莫/定也, ‘莫은 안정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莫을 定, ‘안정’이라고 풀이하였다. ▼ 朱熹 역시 莫/定也, ‘莫은 안정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大矣//天之視天下/赫然甚明//殷紂之暴亂/乃監察天下之衆國/求民之定/謂所歸就也, ‘위대하도다. 하늘이 천하를 살피는데, 위엄 있게 아주 빛났도다. 殷의 紂가 폭정을 행하자, 천하의 여러 나라들을 살펴서, 백성들이 안정되기를 바라다가, 마침내 정하였다고 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天神을 인격신처럼 표현하고 있다.
維此二國、其政不獲。維彼四國、憎其式廓。
[그런데] 此 二國의 경우, 其의 政이 獲하지 않았고, 彼 四國의 경우, 其의 廓을 式한 꼴을 [상제가] 憎하였다.
[그런데] 이쪽 두 나라의 경우, 그 제후가 올바르지 않았고, 저쪽 네 나라의 경우, 주제 넘는 짓을 하는 꼴을 [상제가] 미워하였다.
◈ 나는 爰究爰度과 憎其式廓의 위치를 바꾸었다. 이 부분은 본래 維此二國/其政不獲/維彼四國/爰究爰度//上帝耆之/憎其式廓/乃眷西顧/止維與宅처럼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내용의 흐름이 이상하다. 維此二國/其政不獲은 夏나라와 殷나라가 패권을 잃었다는 점을 뜻한다. 이 다음에 오는 維彼四國/爰究爰度는 四國에 대해 上帝가 究度, 즉 ‘헤아렸다’는 의미이다. 夏나라와 殷나라 대신 패권을 쥘 나라를 찾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다음에 오는 上帝耆之/憎其式廓은 上帝가 어떤 나라를 미워하고, 증오하였다는 말이다. 끝으로, 乃眷西顧/止維與宅는 上帝가 서쪽으로 시선을 옮겨 周나라에 뜻을 주었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 살펴 보자면, 夏나라와 殷나라를 대신할 나라를 찾다가 마음에 드는 나라가 없어서 周나라까지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이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에 문제가 있다. 爰究爰度은 上帝가 적합한 나라를 찾느라 골몰하는 모습을 표현한 句다. 그런데 上帝가 골몰하다가, 上帝耆之/憎其式廓에서 갑자기 어떤 나라를 증오하게 된다. 夏나라와 殷나라가 실정하였으므로, 上帝가 이 두 나라 및 殷나라에 부역하였던 다른 나라들을 미워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그렇다면, 시의 줄거리가 ‘夏나라와 殷나라에 실망하였다가 周나라를 찾아서 뜻을 주었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원문 대로라면, ‘夏나라와 殷나라에 실망하였기에, 달리 적합한 다른 나라를 찾다가, 다시 두 나라를 증오하였다가, 또 周나라를 찾아서 마음을 주었다’는 말이 된다. 말이야 맞추면 되겠지만, 내용이 비루하고 난잡하다. 내 생각에는 爰究爰度과 憎其式廓의 위치가 바뀐 듯하다. 이 두 句의 위치를 바꾼다면, 維此二國/其政不獲/維彼四國/憎其式廓//上帝耆之/爰究爰度/乃眷西顧/止維與宅이 되는데, 그러면 夏나라와 殷나라에 실망하고, 四國에 대해 증오하였지만, 다른 적절한 나라를 찾다가 결국 周나라에 이르렀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보면 내용이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대구에서 군산으로 가는데 거창에 들릴 일이 있다면, 장수까지 갔다가 갑자기 거창으로 돌아 오고, 그 뒤에 군산으로 가는 편 보다, 대구에서 거창을 들렀다가 군산으로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런 까닭에, 나는 爰究爰度과 憎其式廓의 순서를 바꾸어서 번역하였다. 번역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본문 역시 바꾸었다.
◈ 維는 아마 의미 없는 조사일 듯하다. ‘오직’이나 ‘다만’처럼 해석할 수야 있겠지만,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진다.
◈ 此는 ‘이쪽’과 같다. 二國을 받는다.
◈ 二國은 ‘두 나라’다. 鄭玄은 殷나라와 崇나라를 이른다고 했다. 文王이 紂의 악행을 비난했을 때, 崇나라의 제후가 紂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하여 文王이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毛亨과 朱熹의 경우 夏나라와 殷나라라고 하였는데, 殷나라면 몰라도, 夏나라는 이미 망한 지가 수백 년이었는데, 上帝가 살피고 말고 할 것이 무엇 있었겠는가. ▼ 毛亨은 二國/殷夏也, ‘二國은 殷나라와 夏나라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夏/戶雅反//下文長夏并注同, ‘夏는 戶와 雅의 반절로 읽는다. 뒷글에 나오는 長夏 및 주석에 나오는 夏들은 모두 이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二國/謂今殷紂及崇侯也, ‘二國은 殷나라의 紂와 崇侯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崇侯는 紂에게 붙어서 周나라를 곤경에 빠뜨린 사람이다. ▼ 朱熹는 二國/夏商也, ‘二國은 夏나라와 商나라다’라고 하였다.
◈ 其政不獲의 其는 二國을 가리킨다. 政을 받는다.
◈ 政은 체언으로, 아마 ‘우두머리’, ‘제후’를 이를 듯하다. 鄭玄의 설이다. 이 政은 正과 같고, 正은 다시 長과 같다. 長은 곧 ‘어른’으로, ‘우두머리’를 이른다. 《爾雅》 「釋詁」에 育/孟/耆/艾/正/伯/長也, ‘育, 孟, 耆, 艾, 正, 伯은 長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이 글자는 鄭玄의 판본에는 正이라고 되어 있다. 鄭玄은 正/長, ‘正은 長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長은 아마 ‘우두머리’를 이르는 말 같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長/張丈反//篇內皆同, ‘長은 張과 丈의 반절로 읽는다. 이 편 안에서는 모두 이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政如字//政/政敎也//鄭作正//正/長也, ‘政은 글자 그대로 읽는다. 政은 政敎라는 뜻이다. 鄭玄의 판본에는 正이라고 되어 있다. 正은 長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상기하였듯, 長은 아마 ‘우두머리’를 이를 것이다.
◈ 不은 부정어다. 獲을 한정한다.
◈ 獲은 용언으로, ‘바로잡히다’, ‘올바르다’는 말이다. 獲은 본래 ‘얻다’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타당함을 얻다’, 곧 ‘바로잡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鄭玄은 獲/得也, ‘獲은 얻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타당성을 ‘얻다’는 말로, 곧 ‘올바르다’라는 말이다. ▼ 朱熹는 不獲/謂失其道也, ‘不獲은 도리를 잃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彼는 ‘저쪽’과 같다. 四國을 받는다. ▼ 毛亨은 彼/彼有道也, ‘彼는 “저 도리를 품은”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四國은 ‘네 나라’다. 鄭玄은 密나라, 阮나라, 徂나라, 共나라라고 보았다. 이 나라들은 이 시 뒷부분에 나온다. 혼란을 야기하다가 文王에게 정벌당한다. 毛亨과 朱熹는 四方, 四方之國, 즉 ‘주변 나라’로 해석하였는데, 그러면 二國과 對가 맞지 않고, 또 四方之國을 의도하였으면서 굳이 四方이라고 기술하지 않았을 이유도 찾을 수 없다. ▼ 鄭玄은 四國/謂密也阮也徂也共也, ‘四國은 密나라, 阮나라, 徂나라, 共나라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密, 阮, 徂, 共은 文王 때의 다른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에 대해서는 「皇矣」 뒷부분에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共音恭//下同, ‘共은 恭이라고 읽는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四國/四方之國也, ‘四國은 四方의 나라들이다’라고 하였다.
◈ 상기하였듯, 나는 爰究爰度과 憎其式廓의 위치를 바꾸었다.
◈ 憎은 용언으로, ‘미워하다’, ‘증오하다’는 말이다. 其式廓을 받는다. ▼ 朱熹는 耆憎式廓/未詳其義//或曰/耆/致也//憎/當作增//式廓/猶言規模也, ‘耆, 憎, 式, 廓은 의미를 분명히 알지 못하겠다. 어떤 사람은 “耆는 致라는 뜻이고, 憎은 增이 되어야 하며, 式廓은 規模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增은 ‘더하다’, ‘늘리다’는 말인데, 이렇게 본다면 式廓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 憎其式廓의 其는 四國을 가리킨다. 처럼 지시하는 말이다. 式廓을 받는다.
◈ 式은 아마 用과 같은 말로, ‘쓰다’, ‘사용하다’, 혹은 ‘행하다’는 말일 것이다. 廓을 받는다. 《爾雅》 「釋言」에 試/式/用也, ‘試와 式은 用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주석의 用大位/行大政을 참고할 때, 毛亨은 式을 用과 行으로 해석하고 있다. ‘쓰다’, ‘행하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 역시 式을 用, ‘쓰다’라고 해석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式을 法, ‘법식’이라고 해석한 듯하다.
◈ 廓은 체언으로, ‘주제 넘는 짓’을 이를 것이다. 廓은 大와 같은데, 大는 또 太와 같다. 太는 ‘심하다’, ‘지나치다’는 말이다. 그럼 무엇이 ‘주제 넘는 짓’일까. 시 뒷부분에, 密나라, 阮나라, 徂나라, 共나라가 싸움을 벌이자 文王이 이를 정리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본문의 순서에 대한 내 생각이 맞다면, 憎其式廓은 四國에 대한 기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네 나라는 제후국이지, 天子가 아니므로, 멋대로 싸움을 벌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주제 넘는 짓’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아귀가 맞다. 《爾雅》 「釋詁」에 弘/廓/宏/溥/介/純/夏/幠/厖/墳/嘏/丕/弈/洪/誕/戎/駿/假/京/碩/濯/訏/宇/穹/壬/路/淫/甫/景/廢/壯/冢/簡/箌/昄/晊/將/業/席/大也, ‘弘, 廓, 宏, 溥, 介, 純, 夏, 幠, 厖, 墳, 嘏, 丕, 弈, 洪, 誕, 戎, 駿, 假, 京, 碩, 濯, 訏, 宇, 穹, 壬, 路, 淫, 甫, 景, 廢, 壯, 冢, 簡, 箌, 昄、晊, 將, 業, 席은 大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陸德明은 판본에 따라 郭으로도 되어 있고, 廓으로도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의미는 같을 것이다. ▼ 毛亨은 廓/大也, ‘廓은 大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郭/苦霍反/大也//又如字/本又作廓, ‘郭은 苦와 霍의 반절로 읽는다. 大라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읽기도 한다. 판본에 따라 廓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 憎에 대한 朱熹의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式廓을 規模라고 풀이했다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두었다. 規模는 아마 말 그대로 ‘규모’를 이를 것이다. 朱熹의 주석에 疆境之規模, ‘강역의 規模’라는 말이 나온다.
◈◈ 鄭玄은 殷崇之君/其行暴亂/不得於天心//密阮徂共之君/於是又助之謀//言同於惡也, ‘殷나라와 崇나라의 군주들은 행실이 난폭하여, 天心에 합치되지 못하였다. 密나라, 阮나라, 徂나라, 共나라의 군주들은 이 때 또 殷나라와 崇나라를 도와 주려고 모의하였으니, 함께 못된 짓을 벌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行/下孟反, ‘行은 下와 孟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上帝가 여러 곳을 둘러 보았으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나라만 있었다는 말이다.
上帝耆之、爰究爰度。乃眷西顧、此維與宅。
[그러나] 上帝는 之를 耆하였기에 [어느 나라가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를 계속] 究度하였는데, 乃 眷하게 西로 顧하였으니, [주나라를 발견하고] 此에 [뜻을] 與하게 宅하였도다.
[그러나] 상제는 백성들을 가엾게 생각하였기에 [어느 나라가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를 계속] 헤아렸는데, 이에 마음을 내어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니, [주나라를 발견하고] 이 땅에 [뜻을] 함께 하였도다.
◈ 耆는 용언으로, 아마 ‘가엾게 여기다’, ‘불쌍하게 생각하다’는 말 같다. 耆는 老와 같다. 耆는 본래 ‘늙은이’, ‘노인’을 이른다. 사람들이 노인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가엾게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확장해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 毛亨은 耆/老也, ‘耆는 老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老는 아마 ‘노인’이 아니고, ‘공경하다’는 따위의 의미가 아닐까 하다. ▼ 鄭玄 역시 耆/老也, ‘耆는 老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耆/巨夷反//毛惡/鄭老也, ‘耆는 巨와 夷의 반절로 읽는다. 毛亨은 惡라고 풀이하였고, 鄭玄은 老라고 풀이하였다’라고 하였다. 《毛詩正義》의 傳을 보면, 毛亨은 耆를 老라고 풀이해 두었다. 그런데 陸德明은 毛亨이 惡, 즉 ‘미워하다’라고 풀이했다고 인용해 두었다. 이 말들이 상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憎에 대한 朱熹의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耆를 致라고 풀이한 사람의 설을 인용해 두었다. 致는 아마 ‘이루다’는 말일 텐데, 정확히 무슨 의도로 이렇게 풀이하였는지는 모르겠다. 朱熹의 주석에 上帝之所欲致者, ‘上帝가 이루고자 하였던 바’라는 말이 나온다.
◈ 耆之의 之는 아마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다. 求民之莫의 民이다. 세상은 어지럽지만, 上帝는 여전히 백성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 爰은 아마 의미 없는 조사일 것이다. ‘이에’처럼 해석해도 좋겠다.
◈ 究와 度은 모두 ‘헤아리다’는 말이다. 이 때 度은 ‘탁’이라고 읽는다. 四國, 즉 사방의 나라들이 백성들을 구제할 만한지 ‘헤아려 보았다’는 말이다. 究와 度는 爰 때문에 따로 떨어져 있지만, 爰이 의미 없는 조사이므로, 나는 한 단어처럼 붙여서 번역하였다. ▼ 毛亨은 究/謀//度/居也, ‘究는 꾀하다는 뜻이고, 度는 居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居는 ‘거처하다’, ‘있다’는 말일 텐데, 그러면 爰究爰度은 ‘꾀하고 있었다’라는 의미란 말일까.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 鄭玄은 度亦謀也, ‘度 역시 꾀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究/九又反//度/待洛反//篇內皆同//毛/居也//鄭/謀也, ‘究는 九와 又의 반절로 읽는다. 度은 待와 洛의 반절로 읽는다. 이 편 안에서 모두 그렇게 읽는다. 毛亨은 居라고 풀이하였고 鄭玄은 謀라고 풀이하였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究/尋//度/謀也, ‘究는 찾다는 말이고, 度은 꾀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乃는 아마 ‘이에’ 같은 말일 것이다.
◈ 眷은 부사어로, ‘은혜롭게’, ‘마음을 써서’ 같은 말일 것이다. 眷然과 같다. 이 眷은 睠과 같다. 陸德明은 판본에 따라 睠이나 券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고 하였는데, 모두 卷으로 읽는다고 했다. 睠이나 卷은 모두 ‘마음을 쓰다’는 말이다. 眷은 본래 ‘돌아 보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돌아 보다’라는 용언처럼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뒤에 있는 顧를 해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眷을 眷然으로 풀이하였다. ▼ 陸德明은 眷/本又作睠/又作券/並音卷同, ‘眷은 판본에 따라 睠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券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音은 모두 卷으로 같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 역시 眷을 眷然으로 풀이하였다.
◈ 西는 부사어로, ‘서쪽으로’라는 말이다. 顧를 받는다.
◈ 顧는 용언으로, ‘돌아 보다’, ‘시선을 옮겼다’는 말이다. ▼ 毛亨은 顧/顧西土也, ‘顧는 서쪽 땅을 돌아 보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此는 체언으로, 아마 ‘이곳’이라는 말일 듯하다. 周나라를 이른다. ‘이 땅’이라고 하면 좋겠다. ▼ 朱熹는 此/謂岐周之地也, ‘此는 岐周의 땅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維는 아마 의미 없는 조사일 것이다.
◈ 與는 부사어로, ‘함께’다. 宅을 한정한다. 上帝가 周나라와 ‘함께’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 宅은 용언으로, ‘있다’, ‘거처하다’, ‘머무르다’라는 말이다. 《爾雅》 「釋言」에 宅/居也, ‘宅은 居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宅/居也, ‘宅는 居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 역시 宅을 居로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宅을 爲居宅, ‘집으로 삼다’라고 풀이하였다.
◈◈ 毛亨은 憎其用大位/行大政, ‘사방의 나라들이 주제 넘는 지위를 사용하고, 주제 넘는 정치를 행하는 꼴을 미워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天須假此二國/養之至老/猶不變改/憎其所用爲惡者浸大也//乃眷然運視西顧/見文王之德/而與之居//言天意常在文王所, ‘하늘이 비록 이 두 나라를 기다리면서, 아주 공경스럽게 보살폈으나, 두 나라는 잘못을 시정하지 않았다. 두 나라가 행한 악행이 점점 커지자, 하늘은 이를 미워하여, 眷然하게 시선을 서쪽으로 돌렸는데, 文王의 德을 보고는 함께 머물렀다. 이는 하늘의 뜻이 언제나 文王이 있는 곳에 머물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假는 아마 ‘기다리다’는 말 같다. 이렇게 번역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假/戶嫁反/本又作暇//浸/子鴆反, ‘假는 戶와 嫁의 반절로 읽는다. 판본에 따라 暇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浸은 子와 鴆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皇矣上帝/臨下有赫/監觀四方/求民之莫/維此二國/其政不獲/維彼四國/爰究爰度/上帝耆之/憎其式廓/乃眷西顧/此維與宅을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此其首章/先言天之臨下甚明/但求民之安定而已//彼夏商之政旣不得矣/故求於四方之國//苟上帝之所欲致者/則增大其疆境之規模/於是乃眷然顧視西土/以此岐周之地/與大王爲居宅也, ‘이 부분은 첫 章이다. 먼저 하늘이 하계에 임하는 모습이 아주 위엄 있지만, 백성들의 안정을 바라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저 夏나라와 商나라의 정치는 이미 어찌 할 수가 없었으니, 그래서 서쪽의 나라 중에서 백성들을 안정시킬 나라를 찾았다. 上帝가 진정 이루고자 했던 바는, 강역의 규모를 늘리는 것이었는데, 이에 마음을 내어 서쪽 지방으로 시선을 돌렸으니, 이 岐周 지역을 大王에게 내려 주고, 살 곳으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疆境之規模라는 말이 나오는데, 疆境이 무슨 疆境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 亡亡案 : 殷나라와 崇나라, 그리고 기타 네 나라의 정치가 올바르지 못했다는 점을 먼저 설명하였다.
作之屏之、其菑其翳。修之平之、其灌其栵。啟之辟之、其檉其椐。攘之剔之、其檿其柘。
[주나라 태왕은 정착하기 위해] 作하고 屏하였는데, 其는 菑요, 翳였고, 脩하고 平하였는데, 其는 灌이요, 栵이었다. 啟하고 辟하였는데, 其는 檉이요, 椐였고, 攘하고 剔하였는데, 其는 檿이요, 柘였다.
[주나라 태왕은 정착하기 위해] 베고 없앴는데, 그렇게 한 것은 서서 죽은 나무들이요,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었고, 정리하고 정돈하였는데, 그렇게 한 것은 너무 가까이서 자라는 나무들이요, 줄지어 자라는 나무들이었다. 심고 키웠는데, 그렇게 한 것은 왕버들과 영수목이요, 보살피고 가지를 쳤는데, 그렇게 한 것은 산뽕나무와 뽕나무였다.
◈ 맥락을 따져 보면, 作之屏之/其菑其翳에서는 쓸 모 없는 나무를 정리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脩之平之/其灌其栵에서는 무질서한 나무들을 정돈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啟之辟之/其檉其椐에서는 쓸 모 있는 나무들을 새로 심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攘之剔之/其檿其柘에서는 쓸 모 있는 나무들을 가꾸고 보살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作, 屏, 脩, 平, 啟, 辟, 攘, 剔은 모두 나무를 어떻게 한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겠다. 있던 것을 없애거나, 바로잡거나, 새로 심는다는 따위의 말이다. 또, 菑, 翳, 灌, 栵은 나무의 상태를 표현한 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죽었거나, 쓰러져 있거나 하는 따위의 말이다. 끝으로, 檉, 椐, 檿, 柘는 나무의 이름를 표현한 말인 것 같다. 예를 들면 ‘밤나무’, ‘귤나무’ 같은 말들이다. 이 점에 착안하여 해석해야 하겠다.
◈ 作은 용언으로, ‘베다’는 뜻이다. 나무를 ‘베었다’는 말이다. 《禮記》 「內則」에 魚曰作之, ‘물고기에 대해서는 作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穎達은 郭氏爾雅今本作斫之/注云/謂削鱗也, ‘郭璞의 《爾雅》 今本에는 斫之라고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郭璞은 “비늘을 깎아 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斫과 削는 모두 칼로 ‘베다’는 말이다. ▼ 朱熹는 作/拔起也, ‘作은 뽑아 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之들은 모두 의미 없는 조사일 것이다. 나무들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로 볼 수도 있겠다.
◈ 屏은 용언으로, ‘없애다’, ‘물리치다’는 말이다. 《禮記》 「王制」에 屏之四方, ‘四方으로 屏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屏/猶放去也, ‘屏은 쫓아 내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屏/必領反/除也, ‘屏은 必과 領의 반절로 읽는다. 없애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屏/去之也, ‘屏은 없애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其들은 아마 앞의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같다. ‘그것은’, ‘그렇게 한 것은’처럼 해석된다.
◈ 菑는 체언으로, ‘서서 죽은 나무’를 이른다. 菑는 椔의 가차자다. 《爾雅》 「釋木」에 立死/椔, ‘나무가 서서 죽으면 椔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木立死曰菑, ‘나무가 서서 죽으면 菑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菑/本又作甾/側吏反/又音緇//木立死也//韓詩云/反草也, ‘菑는 판본에 따라 甾라고도 되어 있다. 側과 吏의 반절로 읽는다. 緇라고 읽기도 한다. 나무가 서서 죽었다는 뜻이다. 《韓詩》에는 “反草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反草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 朱熹는 菑/木立死者也, ‘菑는 나무가 서서 죽은 것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翳는 체언으로, ‘쓰러진 나무’를 이른다. 《爾雅》 「釋木」에 獘者/翳, ‘나무가 엎어져 있으면 翳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自斃爲翳, ‘저절로 엎어지면 翳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斃/婢世反/本或作蔽/必世反, ‘斃는 婢와 世의 반절로 읽는다. 판본에 따라서 蔽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는 必과 世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翳/於計反//毛云/自斃爲翳//爾雅云/木自斃/柛//蔽者翳///郭云/相覆蔽///韓詩作殪/云/因也/因高填下也///柛音申, ‘翳는 於와 計의 반절로 읽는다. 毛亨은 “저절로 엎어지면 翳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爾雅》에 “나무가 저절로 넘어지면 柛이라고 하고, 가려진 것을 翳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郭璞은 “서로 거듭 가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韓詩》에는 殪라고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因이라는 뜻이다. 높은 데에 의지하여서 아래를 메웠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柛은 申이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爾雅》 인용문은 「釋木」이다. 상기하였듯, 《爾雅》에는 蔽가 아니라 獘로 되어 있다. ▼ 朱熹는 翳/自斃者也//或曰/小木蒙密蔽翳者也, ‘翳는 스스로 엎어진 것을 이른다. 어떤 사람은 작은 나무이 빽빽하게 자라서 그늘로 가린 것을 翳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修와 平은 모두 용언으로, ‘정리하다’, ‘다스리다’, ‘정돈하다’는 말이다. 治와 같다. 화단을 가꾼다면, 꽃이나 나무를 적당한 간격으로 심고, 잡초를 뽑아야 하며, 가지도 쳐 줘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이른다. 바로 뒤에 나오는 灌과 栵의 의미를 보면 더욱 분명하다. 朱熹의 설이 타당하다. ▼ 朱熹는 修平/皆治之使疏密正直得宜也, ‘修와 平은 모두 간격이나 모양을 올바르게 정리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灌은 체언으로, ‘너무 가깝게 자라는 나무들’을 이른다. 《爾雅》 「釋木」에 灌木/叢木, ‘灌木은 모여 있는 나무를 이른다’라는 말이 있고, 또 같은 편에 木族生爲灌, ‘나무가 모여서 자라나는 것을 灌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나무가 가까이 모여서 자라면, 한정된 양분을 나눠 먹느라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 毛亨은 灌/叢生也, ‘灌은 모여서 자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灌/古亂反/木叢生, ‘灌은 古와 亂의 반절로 읽는다. 나무가 모여서 자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灌/叢生者也, ‘灌은 모여서 자라는 것들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栵은 체언으로, ‘줄지어 자라는 나무’를 이를 것이다. 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단서가 거의 없다. 《爾雅》와 《說文解字》에 풀이가 있지만, 그 풀이는 본문의 栵과 합치되지 않는다. 《爾雅》 「釋木」에는 栵/栭, ‘栵은 栭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고, 《說文解字》 「木部」에는 栵/栭也, ‘栵는 栭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栭는 나무의 일종으로, ‘산밤나무’를 뜻한다. 이처럼 《爾雅》와 《說文解字》에서는 모두 栵을 ‘산밤나무’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栵이 실제로 ‘산밤나무’였는지와는 별개로, 본문의 栵은 ‘산밤나무’로 해석할 수가 없다. 첫 부분 주석에 밝혔듯, 菑, 翳, 灌, 栵은 모두 나무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菑가 ‘서서 죽은 나무’를 뜻하였듯, 栵 역시 나무가 어떤 상태에 있다는 점을 표현하는 말이어야 한다. ‘산밤나무’ 같이 나무의 종류를 뜻해서는 안 된다. 그런 고로, 나는 𩢾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栵의 의미를 역으로 추론해 보려 한다. 𩢾에 대해, 《說文解字》 「馬部」에는 𩢾/次弟馳也, ‘𩢾은 순서 대로 달린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고, 《廣韻》 「入聲 薛 列」에는 𩢾/次第馳馬, ‘𩢾은 순서 대로 달려 가는 말이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說文解字》에 대해 段玉裁는 次弟成行列之馳也/故從列, ‘차례 대로 줄을 지어서 달린다는 뜻이니, 그래서 列이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段玉裁의 설명대로라면, 𩢾이라는 글자를 만들 때, ‘줄을 짓는다’라는 의미에서 列을 붙였을 것이요, ‘달린다’는 의미에서 馬를 붙였을 것이다. 栵 역시 마찬가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나무가 줄지어 있으니 木과 列을 합쳐서 栵이라고 썼을 것이다. 毛亨은 栭, ‘산밤나무’로 풀이하였는데, 이는 상기하였듯 틀렸다. 陸德明은 발음만 밝혔지, 의미를 해설하지는 않았다. 朱熹는 行生者, ‘줄지어 자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설이 타당하다. ▼ 毛亨은 栵/栭也, ‘栵은 산밤나무다’라고 하였다. 상기하였듯, 이 설은 틀렸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栭音而//舍人注爾雅云/江淮之閒呼小栗爲栭栗, ‘栭는 而라고 발음한다. 《爾雅》에 대한 주석에서 舍人은 “江淮 사이에서는 小栗을 栭栗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舍人은 아마 郭璞을 이를 것이다. 郭璞은 太子舍人의 벼슬을 지낸 적이 있었다. ▼ 陸德明은 栵音例/又音列/栭也, ‘栵은 例이라고 읽는다. 列이라고 읽기도 한다. 栭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栵/行生者也, ‘栵은 줄지어 자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설이 타당하다.
◈ 啟와 辟은 용언으로, 아마 ‘시작하다’는 말일 것이다. 나무를 ‘시작한다’는 말이니, 아마 기르기 ‘시작했다’, ‘심었다’는 따위의 표현이 아닐까 하다. 啟와 辟에는 모두 ‘열다’는 의미가 있다. 우선, 辟은 闢과 같다. 《說文解字》 「門部」에 闢/開也, ‘闢은 열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段玉裁는 古多叚借辟字, ‘옛날에는 辟을 가차한 글자가 많았다’라고 하였다. 곧, 闢은 辟의 가차자이며, 辟 역시 ‘열다’는 말임을 알 수 있겠다. 啟는 啓와 같은데, 啓 역시 ‘열다’는 말이다. 《書》 「虞書 堯典」에 胤子朱啓明, ‘胤子인 朱는 啓明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安國과 蔡沈은 모두 啓/開也, ‘啓는 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곧, 啟와 辟은 모두 ‘열다’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啟와 辟은 모두 나무에 대한 서술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면 나무를 ‘열다’라고 하면, 이는 무슨 의미일까. 닫혀 있는 상태는 일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니, 닫힌 것을 ‘연다’는 말은 곧 새로 시작한다는 말일 것이다. 나무를 새로 시작한다는 말은, 곧 새로 심어서 키운다는 의미일 것이다. 毛亨과 鄭玄은 의미를 해석하지 않았고, 陸德明은 발음만 밝혔다. 朱熹의 경우, ‘없앤다’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앞의 作之屏之에서, 作과 屏을 이미 ‘없앤다’는 말로 사용하였는데, 왜 啟와 辟 부분에서 다시 ‘없앤다’는 말을 반복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朱熹를 따르지 않았다. ▼ 陸德明은 辟/婢亦反/沈必亦反, ‘辟은 婢와 亦의 반절로 읽는다. 沈旋은 必과 亦의 반절로 읽는다고 했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啟辟/芟除也, ‘啟辟은 베어서 없앤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檉은 체언으로, 아마 ‘왕버들나무’일 것이다. 나는 나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마 쓸 모가 있어서 심었을 것이다. 《說文解字》 「木部」에 檉/河柳也, ‘檉은 河柳다’라는 말이 있고, 《爾雅》 「釋木」에도 같은 말이 있다. 河柳가 ‘왕버들나무’를 이른다. 朱熹가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 두었다. ▼ 毛亨은 檉/河柳也, ‘檉은 河柳다’라고 하였다. 河柳는 나무의 일종이다. 아마 ‘왕버들나무’를 이를 것이다. ▼ 陸德明은 檉/勑丁反/河柳也, ‘檉은 勑과 丁의 반절로 읽는다. 河柳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檉/河柳也//似楊/赤色/生河邉, ‘檉은 河柳다. 버드나무와 비슷하고, 붉은색이다. 강 근처에 자란다’라고 하였다. 상기하였듯 河柳는 ‘왕버들나무’일 것이다.
◈ 椐는 체언으로, 아마 ‘영수목’을 이를 듯하다. 능수버들목에 속한다고 한다. 《廣韻》 「去聲 御 據」에 椐/靈壽木名//又居祛二音, ‘椐는 靈壽木의 이름이다. 居나 祛라고 읽는다’라는 말이 있다. 毛亨과 朱熹는 樻라고 풀이했는데, 이 樻 역시 ‘영수목’일 것이다. ▼ 毛亨은 椐/樻也, ‘椐는 영수목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樻/去愧反/又去軌反/何音匱//草木䟽云/節中腫/似扶老/即今靈壽是也//今人以爲馬鞭及杖, ‘樻는 去와 愧의 반절로 읽는다. 去와 軌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 何胤은 匱로 발음한다고 하였다. 《草木䟽》에는 “마디 중간에 옹이가 있는데, 이 모양이 지팡이와 비슷하다. 곧, 지금의 靈壽다. 지금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가지고 말 채찍이나 지팡이를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草木疏》는 陸機의 《毛詩草木鳥獸蟲魚疏》를 이른다. 扶老는 ‘지팡이’다. ▼ 陸德明은 椐/羌居反/樻也//字林紀庶反/又音舉, ‘椐는 羌과 居의 반절로 읽는다. 영수목이라는 뜻이다. 《字林》에서는 紀와 庶의 반절로 읽는다고 했다. 舉라고 읽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椐/樻也//腫節似扶老/可爲杖者也, ‘椐는 영수목이다. 옹이와 마디가 지팡이와 비슷하니, 지팡이로 만들어 쓸 수 있다’라고 하였다. 扶老는 ‘지팡이’를 이른다.
◈ 攘과 剔은 아마 모두 나무를 보살피고, 가공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朱熹의 설이 타당하다. 攘은 襄의 오기인 듯하다. 襄은 ‘보살피다’ 혹은 ‘이루어 주다’는 말 같다. 剔는 머리를 ‘깎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나무에 대한 표현이므로, 아마 가지를 ‘치다’ 같은 의미일 것이다. ‘체’라고 읽는다. 이 때 剔는 剃와 같다. 陸德明은 剔가 鬄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木剔>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木剔>는 어떤 글자인지 알 수가 없지만, 鬄는 ‘머리카락을 깎다’라는 말이다. 剔 역시 ‘깎다’처럼 해석해야 하겠다. 攘, 즉 襄의 경우, 《春秋左氏傳》 「定公」 15년에 葬定公/雨/不克襄事/禮也, ‘定公을 장례지내는데, 비가 와서 일을 襄할 수가 없었으니, 예법에 맞았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杜預는 襄/成也, ‘襄은 완성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攘/如羊反//剔/他歷反/字或作鬄/又作𢱦/同, ‘攘은 如와 羊의 반절로 읽는다. 剔은 他와 歷의 반절로 읽는다. 鬄나 𢱦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발음은 같다’라고 하였다. 鬄은 ‘깎다’는 말이고, 𢱦은 ‘긁다’는 말이다. ▼ 朱熹는 攘剔/謂穿剔//去其繁冗/使成長也, ‘攘剔는 구멍을 뚫고 깎아 낸다는 뜻이다. 번잡한 부분들을 없애 버리고, 성장시킨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곧, ‘키웠다’는 뜻이다.
◈ 檿은 체언으로, ‘산뽕나무’를 이른다. 《說文解字》 「木部」에 檿/山桑也, ‘檿은 山桑이다’라는 말이 있고, 《爾雅》 「釋木」에도 檿桑/山桑, ‘檿桑은 山桑이다’라는 말이 있다. 山桑은 ‘산뽕나무’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라니, 양잠을 하려면 檿, 즉 ‘산뽕나무’를 보살펴야 했을 것이다. 朱熹의 주석을 보면, 활의 몸체도 산뽕나무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 毛亨은 檿/山桑也, ‘檿은 산뽕나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檿/烏簟反/山桑也, ‘檿은 烏와 簟의 반절로 읽는다. 산뽕나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檿/山桑矣//與柘皆美材/可爲弓幹/又可蠶也, ‘檿은 산뽕나무다. 檿과 柘는 모두 훌륭한 목재다. 활의 몸통 부분을 만들 수 있고, 양잠할 때도 쓸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 柘은 체언으로, 아마 ‘뽕나무’, 혹은 ‘산뽕나무’일 것이다. 나는 ‘뽕나무’라고 번역하였다. 檿과 비슷한 부류일 듯한데, 같지는 않을 것이다. 같으면 檿을 언급하고서 왜 굳이 柘를 또 언급했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段玉裁가 언급해 두었다. 《說文解字》 「木部」에 柘/柘桑也, ‘柘는 柘桑이다’라는 말이 있다. 段玉裁는 이에 대해 山桑柘桑/皆桑之屬//古書竝言二者/則曰桑柘/單言一者/則曰桑/曰柘//柘亦曰柘桑/如淮南注烏號云/柘桑/其木堅勁/鳥歭其上///是也//桑柘相似而別/見胡氏//通鑒釋文辨誤, ‘山桑과 柘桑은 모두 뽕나무의 일종이다. 옛 글들에서 두 글자로 언급할 때는 桑柘라고 하였고, 한 글자로 언급할 때는 桑이나 柘라고 하였다. 柘 역시 柘桑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淮南》 중 烏號에 대한 주석에 “柘桑은 단단하다. 새들이 그 위에 머무른다”라고 한 말과 같다. 桑과 柘는 서로 비슷하지만 다르다. 이 설은 胡氏의 글에 나와 있다. 《通鑒釋文》의 논증은 틀렸다’라고 하였다. 《淮南》은 《淮南子》 「俶眞訓」이다. 「俶眞訓」에 烏號之弓, ‘烏號의 활’이라는 말이 있는데, 인용된 주석은 그 부분에 달려 있다. 胡氏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通鑒釋文》은 아마 趙宋의 史炤가 지은 《資治通鑑釋文》을 이르는 듯하다. ▼ 陸德明은 柘/章夜反, ‘柘는 章과 夜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天旣顧文王/四方之民則大歸往之//岐周之地險隘/多樹木/乃競刊除而自居處/言樂就有德之甚, ‘하늘이 文王을 살핀 뒤, 사방의 백성들이 크게 귀부해 왔다. 그런데 岐周의 땅은 험하고 개발되지 않았었으니, 나무가 많았다. 이에 결국 나무들을 베어 내고, 직접 살게 하였다. 백성들이 즐겁게 岐周의 땅으로 나아간 것은, 文王의 德이 깊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隘/於懈反//刊/苦干反, ‘隘는 於와 懈의 반절로 읽는다. 刊은 苦과 干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정착하기 위해 미개발 지역을 개발했다는 뜻이다. 周나라 사람들은 나무를 베거나 치우고, 정돈하였으며, 심고, 보살폈다. 그런데 이 때 大王이 정착한 지역은 岐山이 아닌 것 같다. 뒤에 천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부분에 居岐之陽/在渭之將, ‘岐山의 남쪽에 居하였으니, 渭水의 곁에 있었다’라는 말이 있다. 저 부분에서 岐山 남쪽으로 이거했다는 점을 알 수 있으므로, 그 앞인 이 부분의 거주지는 岐山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帝遷明德、串夷載路。
[이에] 帝가 明德에게 遷하였으니, 串夷가 [주나라에 쫓겨] 路를 載하였고,
[이에] 상제의 뜻이 위대한 덕을 품은 군주에게 옮겨 갔으니, 곤이가 [주나라에 쫓겨] 길을 가득 채웠고,
◈ 帝는 ‘上帝’가 아니라, ‘上帝의 뜻’을 이른다.
◈ 遷은 용언으로, ‘옮겨 가다’는 말이다. 遷明德은 遷於明德, ‘明德에게 遷하였다’처럼 해석해야 한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毛亨은 遷을 徙就, ‘옮겨 가서 따르다’라고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遷을 就, ‘따르다’라고 풀이하였다.
◈ 明德은 ‘위대한 덕’이 아니라, 明德之君처럼 ‘위대한 덕을 품은 군주’를 뜻한다. 朱熹는 太王이라고 하였는데, 이 설이 옳을 것이다. 太王은 古公亶父로, 文王의 조부다. 王明은 大와 같다. 관형어로, ‘위대한’이라는 말이다. 德을 한정한다. 明은 어떻게 大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荀子》 「勸學」에 天見其明, ‘하늘에게는 其明이 見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王念孫은 明者/大也//小雅車舝/正義曰/明/亦大也///中庸曰/高明所以覆物也///成十六年左傳/夏書曰/怨豈在明/不見是圖/將愼其細也//今而明之/其可乎///是明與大同義//大者/天之全體/廣者/地之全體[繫辭傳/廣大配天地///承上文大生廣生而言/謂大配天/廣配地也//中庸言/博厚配地/高明配天///博亦廣也/明亦大也]//故君子之德/貴其全也//儒效篇曰/至高謂之天/至下謂之地/宇中六指謂之極/塗之人百姓積善而全盡謂之聖人///語意略與此同//楊注皆失之, ‘明은 크다는 말이다. 「小雅」의 「車舝」에 대한 《正義》에서는 “明도 크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中庸」에는 “高明하다는 점은 物을 덮을 수 있는 까닭이다”라는 말이 있고, 「成」 19년에 대한 《左傳》에는 “「夏書」에 ‘원망이 어찌 明한 데에 있겠느냐. 안 보이는 곳에서 꾀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세세한 부분을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之를 明하였으니, 어찌 될 일이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이 글들에서 明은 大와 의미가 같다. 大는 하늘의 全體요, 廣이라는 것은 대지의 全體이니[王念孫의 부연 : 「繫辭傳」에 “광대함은 天地와 配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글 앞부분의 大生과 廣生을 이어서 한 말이니, 大는 天과 짝을 이루고, 廣은 地와 짝을 이룬다. 「中庸」에 “博厚함은 대지와 짝하고, 高明함은 하늘과 짝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博 또한 넓다는 뜻이요, 明 또한 크다는 뜻이다.], 이처럼 君子의 德에는 全이 중요한 것이다. 「儒效」에 “지극히 높은 것을 天이라 하고, 지극히 낮은 것을 地라 한다. 세상의 여섯 방향을 極이라 하고, 보통 사람들이 善을 이어 나가 완전하고, 극진해지면, 이를 聖人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말의 의미가 이 부분과 대체로 같다. 楊倞의 주석은 모두 틀렸다’라고 하였다. 「車舝」은 《詩》 「小雅 桑扈之什」에 속해 있다. 《正義》는 孔穎達의 《毛詩正義》를 이른다. 「車舝」에는 景行行止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景/明也, ‘景은 明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孔穎達은 다시 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明/亦大也, ‘明 또한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詩》 「大雅 生民之什」의 「旣醉」에 대해서도 孔穎達이 明/亦大也, ‘明 또한 크다는 뜻이다’라고 풀이한 말이 있다. 참고차 기재해 둔다. 「中庸」은 《禮記》의 편이다. 「成」은 「成公」이다. 《左傳》은 《春秋左氏傳》이다. 「繫辭傳」은 《易》의 「繫辭 上」을 이른다. ▼ 朱熹는 明德/謂明德之君/即大王也, ‘明德은 明德을 갖춘 군주를 이른다. 곧 大王이다’라고 하였다.
◈ 串夷는 아마 체언으로, 西戎의 混夷를 이를 것이다. 鄭玄의 설이다. 混夷는 ‘곤이’라고 읽는다. 毛亨의 풀이는 의미가 좋지만 너무 추상적이다. 朱熹의 설 역시 鄭玄과 비슷하다. ▼ 毛亨은 串/習//夷/常, ‘串은 익히다는 뜻이고, 夷는 불변적인 법칙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串夷即混夷/西戎國名也, ‘串夷는 곧 混夷로, 西戎의 나라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混音昆, ‘混은 昆이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즉, 混夷는 ‘곤이’라고 읽는다. ▼ 陸德明은 串/古患反//毛云/習也///鄭云/串夷/混夷也///一本作患//或云鄭音患, ‘串은 古와 患의 반절로 읽는다. 毛亨은 習이라고 풀이하였고, 鄭玄은 串夷를 混夷라고 풀이하였다. 어떤 판본에는 患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鄭玄처럼 풀이할 때는 串을 患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 朱熹는 串夷載路/未詳//或曰/串夷/即昆夷//載路/謂滿路而去///所謂昆夷駾矣者也, ‘串, 夷, 載, 路는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串夷를 昆夷로 보고, 載路는 길을 꽉 채워서 떠났다는 뜻이라고 보았다. 「緜」에서 “昆夷가 駾하였다”라고 했던 말이 이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昆夷는 犬戎 계열의 이민족이다. 昆夷駾矣는 《詩》 「大雅 文王之什」의 「緜」에 나오는 말이다. 駾는 ‘말이 빠르게 달린다’는 말인데, 아마 서둘러 도망가는 모습을 이르는 표현 같다.
◈ 載는 용언으로, 아마 ‘가득 채우다’는 말로 보인다. 滿과 같다. 路를 받는다. 《詩》 「大雅 生民之什」의 「生民」에 厥聲載路, ‘그 소리가 길을 載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朱熹는 載/滿也, ‘載는 채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串夷에 대한 주석을 보면, 朱熹는 載를 滿, ‘채우다’라고 해석한 말을 인용해 두었다.
◈ 路는 체언으로, ‘길’이다. ▼ 毛亨은 路/大也, ‘路는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路/應也, ‘路는 응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路/應也의 應은 《經典釋文》에는 瘠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瘠은 ‘여위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瘠/在昔反//詩本皆作瘠/孫毓評作應/後之解者僉以瘠爲誤, ‘瘠은 在와 昔의 반절로 읽는다. 《詩》에는 본래 모두 瘠로 되어 있었는데, 孫毓은 《評》에서 應이라고 하였다. 이에 뒷세대의 주석가들은 모두 瘠이 잘못된 글자라고 생각했다’라고 하였다. 應이 맞을 것이다. 글자 모양이 비슷해서 瘠으로 잘못되었을 것이다. 鄭玄의 주석인 文王則侵伐混夷以應之의 應은 《經典釋文》에도 應으로 인용되어 있고, 陸德明도 應對라고 할 때의 應이라고 하며 정상적으로 풀이하였다. 鄭玄이 만약 路를 應이 아니라 瘠이라고 풀이했다면, 鄭玄의 주석인 文王則侵伐混夷以應之에도 應이 아니라 瘠이 사용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孫毓은 司馬晉 사람이다. 《評》은 孫毓의 《毛詩異同評》을 이른다. ▼ 串夷에 대한 주석을 보면, 朱熹는 路를 ‘길’이라고 해석한 말을 인용해 두었다.
◈◈ 毛亨은 徙就文王之德也, ‘하늘의 뜻이 옮겨 가서 文王의 德을 따랐다’라고 하였다. 毛亨처럼 본다면, 帝遷明德/串夷載路는 ‘하늘의 뜻이 文王에게 옮겨 가니, 文王은 불변적인 법칙을 익혀서 위대한 도리를 품었다’처럼 해석될 것이다.
◈◈ 鄭玄은 天意去殷之惡/就周之德/文王則侵伐混夷以應之, ‘하늘의 뜻이 殷나라의 악행을 떠나 周나라의 德으로 옮겨 왔으니, 이에 文王은 混夷를 정벌해서 하늘의 뜻에 응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應/應對之應//下應和同, ‘應은 應對라고 할 때의 應과 같다. 밑에 나오는 應和의 應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정착하여 국력을 신장시킨 周나라가 串夷, 즉 混夷를 축출하고 그 지역에서 군사적인 패권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뒤의 주석을 보면, 朱熹는 하늘이 混夷를 옮겨 가게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周나라가 混夷를 축출했다고 보아야 타당하지 않겠나 생각된다. 《史記》 「周本紀」에 明年/伐犬戎, ‘이듬해에 犬戎을 정벌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사건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天立厥配、受命旣固。
天대로 厥 配를 立하니, 受命은 旣 固해졌다.
하늘의 뜻대로 그 배필을 세웠으니, 천명은 이윽고 굳건해졌다.
◈ 天은 체언으로, ‘上帝’를 이른다. 내 생각에는 天을 주어로 보지 말고, 以天意, ‘하늘의 뜻 대로’처럼 의역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나는 의역하였다.
◈ 立은 용언으로, ‘세우다’, ‘즉위시키다’는 말이다. 주어는 大王으로 보아야 하겠다. 大王의 妻는 大姜, 즉 周姜이다.
◈ 厥은 其와 같다. 大王을 가리킨다. ‘大王의’처럼 해석된다. 《爾雅》 「釋言」에 厥/其也, ‘厥은 其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配는 체언으로, ‘배필’, ‘아내’를 이른다. 鄭玄처럼 ‘왕비’라고 의역하여도 좋겠다. 周나라 大王의 妻를 이르는 말로, 周姜, 즉 大姜을 이른다. ▼ 毛亨은 配/嫓也, ‘配는 아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嫓/普惠反/配也//郭璞音譬//字林匹地反, ‘嫓는 普와 惠의 반절로 읽는다. 配라는 뜻이다. 郭璞은 譬라고 발음한다고 하였다. 《字林》에서는 匹과 地의 반절로 읽는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配를 妃로 풀이하였다. 妃는 ‘왕비’, 곧 ‘왕의 妻’를 뜻한다. ▼ 陸德明은 配/本亦作妃/音同//注同, ‘配는 판본에 따라 妃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발음은 같다. 주석에서도 그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配/賢妃也/謂大姜, ‘配는 현명한 妃를 뜻한다. 大姜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受命은 ‘내려 받은 命’이다. 天命을 이른다. 受는 관형어로, ‘받은’이다. 하늘에게서 ‘받은’이라는 뜻이다. 命은 체언으로, ‘命’이다. 受命을 ‘命을 受하였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뒤의 旣固를 고려하면, 受命 자체를 명사구이자 주어로 보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 旣는 부사어로, ‘이윽고’다. 旣는 ‘이미’처럼 해석할 수도 있고, ‘이윽고’라고 할 수도 있는데, 배필을 받은 뒤에 천명이 固해진 것이므로, 나는 ‘이윽고’라고 보았다.
◈ 固는 용언으로, ‘굳건해지다’, ‘견고해지다’, ‘단단해지다’, ‘확실해지다’는 말이다. 周나라의 天命이 ‘굳건해졌다’는 뜻이다.
◈◈ 鄭玄은 天旣顧文王/又爲之生賢妃/謂大姒也//其受命之道已堅固也, ‘하늘이 文王을 살핀 뒤, 또 文王을 위해 현명한 妃를 낳았으니, 大姒다. 周나라가 받은 命의 道는 이미 확고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爲/于僞反//下爲生明君爲之立後同, ‘爲는 于와 僞의 반절로 읽는다. 뒤에 나오는 爲生明君과 爲之立後에서도 그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作之屏之/其菑其翳/修之平之/其灌其栵/啟之辟之/其檉其椐/攘之剔之/其檿其柘/帝遷明德/串夷載路/天立厥配/受命旣固를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此章言大王遷於岐周之事//蓋岐周之地/本皆山林險陰/無人之境/而近於昆夷//大王居之/人物漸盛/然後漸次開闢如此//乃上帝遷此明德之君/使居其地/而昆夷遠遁//天又爲之立賢妃以助之//是以受命堅固/而卒成王業也, ‘이 章에서는 大王이 岐周 지역으로 옮겨 간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개 岐周 지역은 본래 모두 산림이 울창한 험지이자, 무인지경이었고, 昆夷와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大王이 이곳에 정착하자, 인구와 물산이 점점 흥성하였으니, 나중에 점점 이와 같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에 上帝의 뜻은 이 위대한 德을 품은 군주에게 옮겨 가, 그 군주를 그 땅에 살게 하였으니, 昆夷는 멀리 떠나 버렸다. 하늘은 또, 太王을 위해 현명한 妃를 세워서 王을 돕게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周나라의 命은 확고해졌고, 마침내 王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군사적 패권을 장악한 뒤, 王이 妻까지 맞았으니, 周나라가 훨씬 안정되었다는 뜻이다.
帝省其山、柞棫斯拔、松柏斯兌。
帝는 其 山을 省하고서, [주나라를 돕기 위해] 柞와 棫을 拔하였고, 松과 柏을 兌하였다.
상제는 그 산을 살피고서, [주나라를 돕기 위해]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를 생장시켰고,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올곧게 만들었다.
◈ 《詩》 「大雅 文王之什」의 「緜」에 柞棫拔矣/行道兌矣, ‘柞과 棫이 拔하니, 行道가 兌하도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문구가 본문의 柞棫斯拔/松柏斯兌와 유사하다. 번역할 때 참고할 만하겠다.
◈ 帝는 체언으로, ‘上帝’다.
◈ 省은 용언으로, ‘살피다’, ‘자세히 보다’는 말이다. 其山을 받는다. 鄭玄은 ‘더 낫게 하다’처럼 풀이하였는데, 이는 의역이다. 속뜻은 鄭玄의 설에 합치된다. ▼ 鄭玄은 省/善也, ‘省은 善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鄭玄의 주석을 보면, 이 善은 아마 ‘잘되게 하다’는 말로 보인다. 산의 수목들을 ‘잘 자라게 하다’, ‘우거지게 하다’는 뜻이다. ▼ 陸德明은 省/昔井反/善也, ‘省은 昔과 並의 반절로 읽는다. 善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其는 아마 大王이나 周나라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山을 받는다.
◈ 山은 체언으로, ‘산’이다. 周나라가 정착한 산을 이른다.
◈ 柞과 棫은 ‘상수리나무’의 일종이되, 아마 세세한 종류는 다른 듯하다. 앞의 其檿其柘에서, 檿과 柘는 모두 ‘뽕나무’였지만, 세세한 종류는 달랐다. 이와 같다. 나는 각각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로 보았다. 柞과 棫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논란이 있었다. 《說文解字》 「木部」에는 柞/木也, ‘柞은 나무다’라는 말이 있고, 같은 글에 棫/白桵也, ‘棫은 白桵다’라는 말이 있다. 또, 《爾雅》 「釋木」에도 棫/白桵, ‘棫은 白桵다’라는 말이 있다. 白桵는 ‘상수리나무’를 이른다. 그런데 《說文解字》의 柞에 대해, 段玉裁는 詩有單言柞者/如維柞之枝/析其柞薪/是也//有柞棫連言者/如皇矣/旱麓/綿/是也//陸機引三蒼/棫卽柞也///與許不合//假令許謂棫卽柞/則二篆當聯屬之//且詩不當或單言棫/或單言柞/或柞棫竝言也//鄭詩箋云/柞/櫟也///孫炎爾雅注/櫟實/橡也///齊民要術援爾雅注合柞栩櫟爲一/亦皆非許意, ‘《詩》에는 柞이 혼자 언급된 경우가 있으니, 維柞之枝나 析其柞薪 같은 경우이다. 柞과 棫이 연달아 언급된 경우도 있으니, 「皇矣」, 「旱麓」, 「綿」 같은 경우이다. 陸機는 《三蒼》에서 “棫은 곧 柞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는데, 許愼의 설과 합치되지 않는다. 가령 許愼이 “棫은 곧 柞다”라고 하였다면, 두 글자에 대한 전서가 마땅히 연이어 기재되어 있어야 한다. 또, 《詩》에서도, 棫이나 柞이 어떨 때는 한 글자씩 나오고, 어떨 때는 두 글자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鄭玄은 箋에서 “柞은 櫟이다”라고 하였고, 孫炎은 《爾雅》에 대한 주석에서 “櫟實은 橡이다”라고 하였다. 《齊民要術》에서는 《爾雅》에 대한 주석을 인용해서, 柞, 栩, 櫟이 동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두 許愼의 말과 합치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다. 維柞之枝는 《詩》 「小雅 桑扈之什」의 「采菽」에 나오는 말이다. 析其柞薪은 《詩》 「小雅 桑扈之什」의 「車舝」에 나오는 말이다. 《三蒼》은 자전의 일종이다. 橡은 ‘상수리’로, 상수리나무의 열매다. 이처럼, 柞과 棫을 같게 본 학자들도 있었고, 다르게 본 학자들도 있었다. 段玉裁의 경우 다르다고 보았는데, 나 역시 檿과 柘의 사례를 미루어 볼 때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緜」에 나온 柞과 棫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鄭玄은 柞/櫟也//棫/白桵也, ‘柞은 櫟이다. 棫은 白桵다’라고 하였다. 櫟과 白桵는 모두 ‘상수리나무’의 일종인데, 세세한 종류는 다를 것이다. 陸德明의 경우, 발음을 제시하고, 陸機처럼 《三蒼》을 가지고 둘이 같다는 주장을 인용해 두었다. 陸德明은 柞/子洛反/後同//棫音域/後同//三蒼云/棫即柞也///字林/於目反, ‘柞은 子와 洛의 반절로 읽는다. 아래로도 그렇다. 棫은 域이라고 발음한다. 아래로도 그렇다. 《三蒼》에는 “棫은 곧 柞이다”라는 말이 있다. 棫에 대해 《字林》에서는 於와 目의 반절로 읽는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한편 朱熹는 좀 더 실제적으로 설명하였다. 朱熹는 柞/櫟也//枝長葉盛/叢生有刺//棫/白桵也//小木/亦叢生有刺, ‘柞은 櫟이다. 가지는 길고, 잎은 크다. 군집을 이루며 살고, 가시가 있다. 棫은 白桵다. 작은 나무이며, 마찬가지로 군집을 이루며 살고, 가시가 있다’라고 하였다. 즉, 鄭玄과 朱熹는 柞이 櫟이고, 棫은 白桵라는 점에서 의견이 같고, 朱熹의 경우 두 나무가 다르다는 점을 보다 상세하고 실증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제 생각해 보자. 柞과 棫은 둘 다 상수리나무의 일종이거나, 그 근연종일 것이다. 그런데 상수리나무와 비슷한 나무로는, 졸참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가 있다. 나는 식물학자가 아니니, 柞과 棫이 구체적으로 어떤 나무를 가리키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朱熹의 주석을 감안할 때, 柞과 棫의 잎에는 모두 가시가 있어야 한다. 상기한 여섯 나무 중, 잎에 가시가 있는 나무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柞과 棫은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柞을 ‘상수리나무’로 보았고, 棫을 ‘굴참나무’로 보았다.
◈ 柞棫斯拔과 松柏斯兌의 斯는 아마 도치를 표시하는 글자 같다. 柞棫斯拔은 拔柞棫으로, ‘柞과 棫을 拔하였다’는 뜻이고, 松柏斯兌는 兌松柏로, ‘松과 柏을 兌하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思齊」에 大姒嗣徽音/則百斯男, ‘大姒가 徽音을 이었으니, 百斯男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斯 역시 도치를 표시한다. 百斯男는 男百으로, ‘男이 百이다’, 즉 ‘아들이 백 명이었다’라는 말이다.
◈ 拔은 용언으로, 아마 ‘생장시키다’는 말 같다. 柞과 棫을 받는다. 상수리나무나 굴참나무는 모두 참나무의 일종인데, 참나무는 건축 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숯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도토리는 먹을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上帝가 周나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그 나무들을 ‘성장시켰다’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본문의 경우 鄭玄이 ‘무성하게 하다’라고 해석하였다. 「緜」에서 孔穎達과 朱熹 역시 이와 비슷하게 해석하였다. 孔穎達은 ‘가지와 잎을 생장시키다’처럼 풀이하였고, 朱熹는 ‘곧게 위로 솟게 하다’처럼 풀이하였다. 毛亨은 拔에 대해 따로 설을 내지 않았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茂盛, ‘무성하게 하다’라고 풀이하였다. 다만 鄭玄의 경우, 拔과 兌를 분리하여 풀이하지 않고, 뭉뚱그려 해석하였으므로, 주의해서 보아야 하겠다. ▼ 陸德明은 拔/蒲貝反, ‘拔은 蒲와 貝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緜」에서, 孔穎達은 拔에 대해, 拔然生柯葉, ‘拔然하게 가지와 잎을 생장시켰다’라고 풀이하였는데, 이 때 拔는 곧 ‘생장시키다’는 따위의 말이 된다. 이 때 拔는 ‘패’라고 읽고, 柭와 같다. 세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朱熹의 설과 의미가 통한다. 한편 陳啓源은 《毛詩稽古編》에서 韻을 근거로, 拔을 拔로 보아야 韻이 맞지, 柭로 본다면 韻이 맞지 않는다고 孔穎達의 설을 반박하였는데, 참고차 기재해 둔다. ▼ 朱熹는 拔兌/見綿篇//此亦言其山林之間/道路通也, ‘拔과 兌에 대해서는 「緜」에 설명해 두었다. 이 글에서도 역시 숲 안에 도로가 통하게 되었다는 점을 뜻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緜」에서는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緜」에서 朱熹는 拔/挺拔而上/不拳曲蒙密也, ‘拔이란, 우뚝 위로 솟았다는 말이니, 구부러지거나 우거지지 않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즉, 朱熹는 拔을 ‘곧게 솟게 하였다’처럼 해석하였다.
◈ 松과 柏은 각각 ‘소나무’와 ‘측백나무’다. 사시사철 푸르고, 올곧게 쭉쭉 자라 난다고 하여, 좋은 의미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 兌는 용언으로, 아마 ‘올곧게 만들다’는 말일 듯하다. 松과 柏을 받는다. 毛亨의 설이다. 朱熹는 소나무와 측백나무 사이로 ‘길을 내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이 설 역시 좋지만, 上帝의 행위라는 점에서 생각한다면 너무 사소하고 치졸하다. 그래서 나는 朱熹를 따르지 않고, 毛亨을 따랐다. ▼ 毛亨은 兌/易直也, ‘兌는 구불구불하지 않고 곧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易는 ‘평이하다’는 말로, ‘구부러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易/以豉反//下施易同, ‘易는 以와 豉의 반절로 읽는다. 아래의 施易에서도 그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緜」의 兌에 대해 毛亨은 달리 해석하였다. 「緜」에서 毛亨은 兌/成蹊也, ‘兌는 오솔길을 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참고차 기재해 둔다. ▼ 陸德明은 兊/徒外反/易直也, ‘兊는 徒와 外의 반절로 읽는다. 구불구불하지 않고 곧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經典釋文》에는 兌가 兊로 되어 있다. ▼ 朱熹는 拔 부분에 설명하였듯, 「緜」의 주석으로 설명을 대신하였다. 「緜」에서 朱熹는 兌/通也//始通道於柞棫之閒也, ‘兌는 통하다는 뜻이다. 柞과 棫 사이로 처음 길이 통하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즉, 朱熹는 길을 ‘통하게 하다’처럼 兌를 풀이하였다. 이는 「緜」의 兌에 대한 毛亨의 설과 같다.
◈◈ 鄭玄은 天旣顧文王/乃和其國之風雨/使其山樹木茂盛/言非徒養其民人而已, ‘하늘이 文王을 살핀 뒤에, 그 나라에 대한 비와 바람을 알맞게 조절하였고, 그 산의 수목들을 우거지게 하였다. 이는 하늘이 백성들만 보살펴 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上帝가 신적 권능, 즉 대자연적 수단을 통해 周나라를 돕는다는 말이다.
帝作邦作對、自大伯王季。
[또,] 帝은 邦에 作하였고, 對에도 作하였으니, [이렇게 한 것은] 大伯과 王季 때부터였다.
[또,] 상제는 나라에 복을 내렸고, 비빈들에도 복을 내렸으니, [이렇게 한 것은] 태백과 왕계 때부터였다.
◈ 帝는 체언으로, ‘上帝’를 이른다.
◈ 作은 祚나 胙가 아닐까 의뭉스럽다. 祚와 胙는 모두 ‘복을 내리다’는 말이다. 《說文解字》 「示部」에 祚/福也, ‘祚는 福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胙에 대해서는, 《說文解字》 「肉部」에 胙/祭福肉也, ‘胙는 제사를 지낸 복스러운 고기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胙가 꼭 ‘제사 고기’만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福’을 뜻하기도 한다. 옛날에 胙는 作과 같은 글자로 통용되었는데, 胙에는 ‘복’ 혹은 ‘복을 내리다’는 의미가 있고, 이는 祚와 같다. 따라서 祚 역시 제한적으로 作과 통용되었을 듯하다. 그러면 作邦은 ‘나라에 복을 내리다’는 말이 되고, 作對는 ‘對에 복을 내리다’는 말이 된다. 周나라를 축복한다는 의미라고 본다면, 글의 내용도 자연스레 이어진다. ▼ 鄭玄은 作/爲也, ‘作은 爲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爲는 아마 ‘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爲의 의미는 아주 다양하고, 또 모호하므로,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作邦은, 鄭玄의 해석 대로라면 ‘나라를 爲하다’, ‘나라를 하다’는 말이 되는데, 무슨 의미란 말인가. 鄭玄은 이를 興周國, ‘周나라를 흥기시켰다’라고 풀이하였지만, 作을 爲로 풀이하였음에도, 결국 爲의 본래 의미를 살렸다고 할 수는 없겠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作을 ‘만들다’처럼 해석한 듯하다. 예를 들어 作邦은 ‘나라를 세우다’는 의미가 된다.
◈ 邦은 체언으로, 아마 ‘나라’일 것이다. ‘周나라’를 이른다. ▼ 鄭玄은 天爲邦/謂興周國也, ‘하늘이 나라를 爲했다는 말은, 周나라를 흥기시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對는 체언으로, 아마 ‘妃嬪’을 이를 것이다. 王의 ‘배우자’를 이른다. 毛亨과 鄭玄의 설과 같다. 곧, 作對는 ‘妃嬪에게 복을 내리다’는 말로, 훌륭한 자손이 태어나게 해 주었다는 말일 것이다. ▼ 毛亨은 對/配也, ‘對는 配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配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鄭玄의 주석을 따른다면 ‘배우자’라고 볼 수 있겠다. ▼ 鄭玄 역시 毛亨의 설을 받아 對를 配로 풀이하였다. 鄭玄은 作配/謂爲生明君也, ‘作配란, 明君을 낳게 하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對/猶當也//作對/言擇其可當此國者/以君之也, ‘對는 當과 같다. 作對란, 이 나라에 적합한 사람을 가려서 다스리게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自는 ‘~로부터’, ‘~에서부터’다. 大伯王季를 받는다. 大伯과 王季의 시기‘부터’라는 말이다.
◈ 大伯은 大王, 즉 古公亶父의 맏아들이자, 文王의 큰 삼촌이다. 大는 ‘태’로 읽는다. ▼ 陸德明은 大音泰//注大伯同, ‘大는 泰로 읽는다. 주석의 大伯에 대해서도 그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大伯/大王之長子, ‘大伯은 大王의 장자다’라고 하였다.
◈ 王季는 季歷이다. 大王, 즉 古公亶父의 막내아들이자, 文王의 부친이다. 大伯과 季歷 사이에는 仲雍이 있는데, 이 글에는 언급이 안 되어 있다. ▼ 朱熹는 王季/大王之少子也, ‘王季는 大王의 작은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 毛亨은 從大伯之見王季也, ‘大伯에서부터 王季가 나타날 때까지 上帝가 그러하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是乃自大伯王季時則然矣//大伯讓於王季而文王起, ‘이는 大伯에서부터 王季 때까지 上帝가 그러하였다는 뜻이다. 大伯이 王季에게 왕위를 양보하자, 文王이 일어났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大伯과 王季 때부터 上帝가 나라에 복을 내리고, 훌륭한 후손들이 나도록 비빈들에게 복을 내렸다는 말 같다. 그런데 앞의 帝遷明德/串夷載路 부분을 보면, 이미 大王, 즉 古公亶父 때 周나라를 돕기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나.
維此王季、因心則友、則友其兄、則篤其慶、載錫之光。
此 王季는 心이 友하였기에, 其 兄을 友하였고, 其 慶을 篤하였으니, 載 光이 錫해졌으며,
이 왕계는 마음가짐이 우애로웠기에, 그 형을 잘 대하였고, 그 덕을 두텁게 닦았으니, 그리하여 영광이 내려왔으며,
◈ 維는 아마 의미 없는 조사일 것이다.
◈ 此는 ‘이’처럼 지시하는 말이다. 王季를 받는다.
◈ 因은 아마 ‘~하기 때문에’, ‘~하였기에’와 같은 말 같다. 心則友를 받는다. 즉, 因心則友는 ‘心則友하였기에’가 된다. ▼ 毛亨은 因/親也, ‘因은 親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親은 아마 가족들을 ‘가깝게 생각한다’는 말인 것 같다. ▼ 心에 대한 주석을 보면, 朱熹는 因을 ‘따르다’라고 풀이한 듯하다.
◈ 心은 체언으로, ‘마음’, ‘마음가짐’이다. ▼ 朱熹는 因心/非勉强也, ‘因心은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즉, 因心은 ‘마음 가는 대로 했다’는 말이다.
◈ 因心則友의 則는 아마 주격 조사 같다. 之와 같다. 之와 則은 통용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東略之不知/西則否矣, ‘동쪽을 정벌하는 일은 모르겠으나, 서쪽은 정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고, 《國語》 「晉語」에 華則榮矣/實之不知, ‘겉은 화려하였지만, 실체는 모르겠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之과 則은 모두 ‘~는’과 같이 사용되었으며, 같은 형식의 句에서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則과 之가 옛날에 서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之」에 수록되어 있다.
◈ 友는 용언으로, ‘형제들을 잘 대하다’는 말이다. 友愛라고 할 때의 友와 같다. 《爾雅》 「釋訓」에 善父母爲孝/善兄弟爲友, ‘부모에게 잘하는 것을 孝라고 하고, 형제에게 잘하는 것을 友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善兄弟曰友, ‘형제들에게 잘하는 것을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善兄弟曰友, ‘형제들에게 잘하는 것을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則友其兄의 則은 아마 ‘~하였으니’, ‘~한 즉’처럼 해석된다. 則篤其慶의 則도 그렇다.
◈ 友其兄의 友는 용언으로, ‘잘 대하다’는 말이다. 其兄을 받는다.
◈ 其兄의 其는 王季를 가리킨다. 其慶의 其도 그렇다. 각각 兄과 慶을 가리킨다.
◈ 兄은 체언으로, ‘형’이다. 맏형인 大伯을 가리킨다. ▼ 朱熹는 兄/謂大伯也, ‘兄은 大伯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篤은 용언으로, ‘두텁게 하다’, ‘신실하게 닦다’는 말이다. 其慶을 받는다. 篤은 厚와 같다. 《爾雅》 「釋詁」에 惇/亶/祜/篤/掔/仍/肶/埤/竺/腹/厚也, ‘惇, 亶, 祜, 篤, 掔, 仍, 肶, 埤, 竺, 腹은 厚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鄭玄은 篤/厚, ‘篤은 두텁게 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篤/厚, ‘篤은 두텁게 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慶은 체언으로, ‘善’이다. 고대에는 이렇게 사용된 모양이다. 나는 ‘德’이라고 의역하였다. 《書》 「周書 呂刑」에 一人有慶/兆民賴之, ‘한 사람이 慶을 가지고 있으면, 兆民이 之를 의지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安國은 이를 天子有善/則兆民賴之, ‘天子가 善을 품고 있으면, 兆民이 之를 의지한다’라고 풀이하였다. 慶은 곧 ‘善’이다. ▼ 毛亨은 慶/善, ‘慶은 善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慶을 功美, ‘공업’이라고 풀이하였다.
◈ 載는 則처럼 ‘그리하여’라고 해석된다. 朱熹의 설이 타당하다. 《詩》 「國風 鄘風」의 「載馳」에 載馳載驅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載之言則也, ‘載는 則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朱熹 역시 載/則也, ‘載는 則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國語》 「周語」에 載戢干戈/載櫜弓矢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韋昭는 載/則也, ‘載는 則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載𩛥」애 기재되어 있다. ▼ 鄭玄은 載/始也, ‘載는 비로소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載/則也, ‘載는 則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錫는 용언으로, ‘주어졌다’는 말이다. 賜의 가차자일 것이다. 上帝가 王季에게 준 것이므로, 나는 ‘내려왔다’처럼 의역하였다. 《爾雅》 「釋詁」에 賚/貢/錫/畀/予/貺/賜也, ‘賚, 貢, 錫, 畀, 予, 貺은 賜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賜는 ‘주다’는 말이다.
◈ 載錫之光의 之는 아마 도치를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錫之光은 곧 光錫으로, ‘光이 錫해졌다’는 뜻이 된다.
◈ 光은 체언으로, ‘光榮’, ‘榮光’일 것이다. ▼ 毛亨은 光/大也, ‘光은 위대함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王季之心/親親而又善於宗族/又尤善於兄大伯/乃厚明其功美/始使之顯著也//大伯以讓爲功美/王季乃能厚明之/使傳世稱之/亦其德也, ‘王季는 마음가짐이 훌륭하여, 부모를 친근하게 모시고, 또 친척들을 잘 대했으며, 또 형인 大伯에게 더욱 잘하였으니, 공적을 쌓아, 마침내 명성이 드러났도다. 大伯은 王季에게 양위함으로써 공을 세웠고, 王季는 이어 받은 공업을 더 두텁게 쌓아, 대대손손 칭양하게 하였으니, 이 역시 王季의 德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著/珍慮反//傳/直專反, ‘著는 珍과 慮의 반절로 읽는다. 傳은 直과 專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王季의 德行 덕분에 上帝가 周나라에 영광을 내렸다는 말이다.
受祿無喪、奄有四方。
[상제에게서] 受한 祿을 喪하지 않고, [그 덕으로] 四方을 奄하였다.
[상제에게서] 받은 복록을 잃지 않고, [그 덕으로] 사방을 덮었도다.
◈ 受祿無喪은 ‘受祿이 無喪하였다’가 아니라, 以受祿無喪으로 보고 ‘受祿을 無喪하였다’로 보아야 하겠다. 내용을 생각해 볼 때 受祿은 喪의 목적어가 되어야 하지, 주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어는 王季일 것이다.
◈ 受는 관형어로, ‘받은’이라는 말이다. 祿을 한정한다. 上帝에게서 ‘받은’이라는 뜻이다.
◈ 祿은 체언으로, ‘福祿’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祿을 福祿이라고 풀이하였다.
◈ 無는 부정어다. 不과 같다. 喪을 한정한다.
◈ 喪은 용언으로, ‘잃다’, ‘잊다’는 말이다. 忘과 같다. 《莊子》 「齊物論」에 今者吾喪我/汝知之乎, ‘지금 나는 나를 喪하였다. 너는 이 말을 이해하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成玄英은 成玄英은 喪/猶忘也, ‘喪은 잊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 毛亨은 喪/亡, ‘喪은 亡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亡은 ‘잃다’나 ‘잊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喪을 失, ‘잃다’라고 풀이하였다.
◈ 奄은 용언이다. 아마 ‘포용하다’는 따위의 말이 아닌가 하다. 奄은 본래 ‘덮다’는 말이다. 德이나 福祿을 가지고 四方을 ‘덮었다’는 뜻일 것이다. 鄭玄의 설이 타당하다. ▼ 毛亨은 奄/大也, ‘奄은 大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大는 아마 ‘크게 하다’, ‘확장하다’는 따위의 표현일 듯하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奄有를 붙여서 覆有라고 풀이하였다. 覆有는 아마 ‘덮다’는 말일 것이다. ▼ 朱熹는 奄字之義/在忽遂之間, ‘奄는 갑자기와 마침내 사이의 의미로 풀이한다’라고 하였다. 아마 朱熹는 奄을 ‘어느덧’처럼 풀이한 듯하다.
◈ 有는 아마 의미 없는 조사 같다. 용언으로 해석한다면 아마 ‘소유하다’, ‘가지다’는 말일 텐데, 奄과 굳이 붙여서 해석할 만한지 모르겠다. 奄에 대한 주석을 보면, 鄭玄은 奄有를 붙여서 覆有라고 풀이하였다.
◈ 四方은 물론 ‘四方’으로, 주변 지역을 이른다.
◈◈ 鄭玄은 王季以有因心則友之德/故世世受福祿/至於覆有天下, ‘王季는 자연스레 우애를 행하는 德을 갖추고 있었기에, 대대로 福祿을 받아 天下를 덮을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帝省其山/柞棫斯拔/松柏斯兌/帝作邦作對/自大伯王季/維此王季/因心則友/則友其兄/則篤其慶/載錫之光/受祿無喪/奄有四方을 한 章으로 보았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言帝省其山/而見其木拔道通/則知民之歸之者益衆矣/於是旣作之邦/又與之賢君/以嗣其業//蓋自其初生大伯王季之時而已定矣/於是大伯見王季生文王/又知天命之有在/故適吳不反//大王沒/而國傳於王季//及文王/而周道大興也//然以大伯而避王季/則王季疑於不友/故又特言王季所以友其兄者//乃因其心之自然/而無待於勉强//旣受大伯之讓/則益脩其德/以厚周家之慶/而與其兄以讓德之光/猶曰彰其知人之明/不爲徒讓耳//其德如是/故能受天祿而不失/至於文王/而奄有四方也, ‘이러한 뜻이다. 上帝가 그 산을 살펴 보니, 나무가 올곧고 길이 나 있는 모습을 보았던 즉, 周나라에 귀부한 백성들이 더욱 많아졌다는 점을 알았다. 이에, 나라를 세워, 현명한 군주에게 주었고, 이로써 그 업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대체로 처음에 太王이 大伯과 王季를 낳았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 때 大伯은 王季가 文王을 낳은 것을 보고, 天命이 文王에게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吳나라로 가서 周나라로 돌아 오지 않았던 것이다. 大王이 죽은 뒤, 나라는 왕계에게 전해졌다. 文王에 이르러서는, 周나라의 道가 크게 흥성하였다. 그런데, 大伯이 王季를 피했으니, 王季가 혹시 형을 제대로 모시지 않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기에, 王季가 자기 형을 잘 대했다는 점을 특별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王季는 자기 마음을 자연스레 따랐을 뿐, 억지로 형에게 잘하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王季는 大伯이 양위해 준 뒤에, 자기 德을 더욱 수양하여서, 周나라의 慶을 두텁게 닦았고, 형에게 양위의 德이라는 영광을 주었으니, 이로써 大伯이 사람의 위대함을 잘 알아 보았고, 공연히 양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었다. 王季의 德이 이와 같았으니, 하늘의 복록을 받고, 잃지 않을 수 있었고, 文王에 이르러서는 천하를 어느덧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王季의 德은 上帝에게서 기인하였다는 말이다.
維此王季、帝度其心、貊其德音。其德克明、克明克類、克長克君。
此 王季에 대해서, 帝는 其 心을 度하고, 其 德音을 貊하였으니, [왕계는] 其德으로 克明하였고, 克明하여 克類하였으며, 克長하고 克君하였다.
이 왕계에 대해서, 상제는 그 마음을 바로잡아 주고, 그 덕음을 다스려 주었으니, [왕계는] 그 덕으로 시비를 살필 수 있었다. 시비를 살필 수 있으니 선악을 구분할 수 있었고, [그러자] 어른이자 군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 維는 아마 의미 없는 조사일 것이다.
◈ 此는 ‘이’처럼 지시하는 말이다. 王季를 받는다.
◈ 帝는 체언으로, ‘上帝’를 이른다.
◈ 度는 용언으로, 아마 ‘바로잡아 주다’는 말일 것이다. 其心을 받는다. 이 경우에는 아마 ‘도’로 읽을 듯하다. 度은 곧 法制다. 法度라는 말과 같다. 곧, 度는 ‘바로잡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毛亨과 朱熹의 설도 아마 이런 의미일 듯하다. ▼ 毛亨은 心能制義曰度, ‘마음으로 義를 판단할 수 있는 모습을 度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나온다. ▼ 朱熹는 度/能度物制義也, ‘度은 외물을 헤아리고 義를 판단할 수 있는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 其心의 其는 王季를 가리킨다. 其德音, 其德의 其도 그렇다.
◈ 心은 체언으로, ‘마음’이다.
◈ 貊은 용언으로, 아마 ‘안정시켜 주다’는 말 같다. 其德音을 받는다. 貊은 본래 동북 지역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글자 그대로 보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陸德明의 글을 보면, 《經典釋文》에는 본래 貉으로 인용되어 있었고, 《春秋左氏傳》에는 莫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곧, 貊은 貉, 莫과 같다. 《爾雅》 「釋詁」에 忥/謚/溢/蟄/慎/貉/謐/顗/頠/密/寧/靜也, ‘忥, 謚, 溢, 蟄, 慎, 貉, 謐, 顗, 頠, 密, 寧은 靜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靜은 ‘고요하다’는 말이다. 이는 毛亨 및 朱熹의 설과 통한다. 또, 같은 편에 貉/縮/綸也, ‘貉, 縮은 綸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綸은 아마 ‘끈’을 이르는 듯하다. 또, 같은 편에 貉/暯/安/定也, ‘貉, 暯, 安은 定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定은 아마 ‘안정시키다’는 말일 것이다. 이는 陸德明이 인용한 《韓詩》의 내용과 합치되고, 또 앞에서, 求民之莫의 莫을 定으로 해석했던 바와 합치된다. 내용을 따져 볼 때, 나는 ‘안정시키다’라고 해석하는 편이 가장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毛亨은 貊/靜也, ‘貊은 고요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德正應和曰貊, ‘德이 바로잡혀서 和에 응하는 모습을 貊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나오는데, 貊이 아니라 莫으로 되어 있다. ▼ 陸德明은 貉/本又作貃/武伯反/靜也//德正應和曰貉//左傳作莫/音同//韓詩同/云/莫/定也, ‘貉은 판본에 따라 貃이라고도 되어 있다. 武와 伯의 반절로 읽는다. 靜이라는 뜻이다. 德이 바로잡혀서 和에 응하는 모습을 貉이라고 한다. 《左傳》에는 莫이라고 되어 있는데, 발음은 같다. 《韓詩》에도 莫이라고 되어 있고, “莫은 定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經典釋文》에는 貊이 貉으로 되어 있다. 貃역시 貊과 같다. 《左傳》은 《春秋左氏傳》을 이른다. 이 말은 「昭公」 28년에 나온다. ▼ 朱熹는 貊/春秋傳樂記皆作莫/謂其莫然淸靜也, ‘貊은 《春秋傳》과 「樂記」에는 모두 莫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텅 빈 듯 고요한 상태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春秋傳》은 《春秋左氏傳》이다. 「昭公」 28년을 이른다. 「樂記」는 《禮記》의 편이다. 「樂記」에는 이 시의 貊其德音이 莫其德音으로 인용되어 있다.
◈ 德音은 아마 ‘德이 있다는 평판’이라는 말 같다. 나는 ‘덕음’이라고 음역하였다. 音은 聞과 같고, 곧 ‘평판’을 이른다. 「思齊」에 大姒嗣徽音, ‘大姒가 徽音을 계승하였다’라는 말이 있었다. 徽音은 ‘아름다운 평판’을 뜻한다. 王季가 내린 政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 克은 能과 같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克 뒤에 明, 類, 長, 君이 붙어 나오는데, 毛亨과 鄭玄의 경우, 《春秋左氏傳》을 인용해서 이를 풀이하였고, 朱熹는 독창적으로 풀이한 경우도 있고, 《春秋左氏傳》을 인용한 경우도 있다. 살펴 보건대, 毛亨과 鄭玄의 설은 상대적으로 추상적이고, 朱熹의 설은 상대적으로 구상적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朱熹를 대체로 좇아 번역하였다.
◈ 明은 ‘밝힌다’는 말로, 곧 ‘是非를 살펴 밝힌다’는 뜻일 것이다. 朱熹를 좇았다. ▼ 鄭玄은 照臨四方曰明, ‘四方을 굽어 보는 것을 明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照臨은 ‘굽어 보다’, ‘통치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나온다. ▼ 朱熹는 克明/能察是非也, ‘克明이란, 是非를 살필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類는 ‘구분하다’는 말로, 곧 ‘善惡을 구분한다’는 뜻일 것이다. 朱熹를 좇았다. ▼ 鄭玄은 類/善也//勤施無私曰類, ‘類는 선하다는 뜻이다. 부지런히 베풀면서 사사로운 마음이 없는 것을 類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나온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施/始豉反, ‘施는 始와 豉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克類/能分善惡也, ‘克類란, 善惡을 분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長은 ‘어른 노릇’, ‘우두머리 노릇’을 이른다. 우두머리는 휘하의 사람들을 부지런하게 교화해야 한다. 鄭玄과 朱熹의 설이 같다. ▼ 鄭玄은 敎誨不倦曰長, ‘교화하면서 게으르게 굴지 않는 것을 長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나온다. ▼ 朱熹는 克長/敎誨不倦也, ‘克長이란, 교화하면서 게으르게 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君은 ‘군주 노릇’을 이른다. 군주는 賞과 罰, 즉 賞과 刑을 적절하게 내려 위엄을 보이고 신하들을 통제한다. 鄭玄과 朱熹의 설이 같다. ▼ 鄭玄은 賞慶刑威曰君, ‘賞으로는 축하하고, 刑으로는 위엄을 보이는 것을 君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나온다. ▼ 朱熹는 克君/賞慶刑威也//言其賞不僭/故人以爲慶/刑不濫/故人以爲威也, ‘克君이란, 賞으로는 축하하고, 刑으로는 위엄을 보인다는 말이다. 賞이 경우에 맞으니, 받는 사람은 이를 축하라고 생각할 것이요, 刑이 남발되지 않으니, 받는 사람은 위엄을 보인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上帝의 도움으로 王季가 德을 닦았으니, 王季는 이로써 是非와 善惡을 살필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이로써 어른이자 군주로서 周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王此大邦、克順克比。
王은 此하듯 邦을 大하였는데, [왕계가 온화하였기에 백성들은 왕계를] 克順하였고, [왕계가 선을 가릴 줄 알았기에 백성들은 왕계에게] 克比하였다.
왕은 이처럼 나라를 성장시켰는데, [왕계가 온화하였기에 백성들은 왕계를] 따를 수 있었고, [왕계가 선을 가릴 줄 알았기에 백성들은 왕계에게] 모여 들 수 있었다.
◈ 王은 체언으로, ‘王’이다. 王季를 이를 것이다. 이 때 周나라는 殷나라의 제후였으므로, 王을 칭하지 못했다. 周나라가 王을 참칭하였을 때는 武王 發이 殷나라에 반역을 일으켰을 때로, 發은 자기 부친인 昌을 文王으로 추존하고서 군대를 일으켰다. 王季는 昌의 부친이요, 發의 조부이므로, 아마 이후에 王으로 추존하였을 것이다. ▼ 鄭玄은 王/君也//王季稱王/追王也, ‘王은 군주를 이른다. 王季를 王으로 부른 것은, 王으로 추존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王如字//鄭云/君也//徐于況反, ‘王은 글자 그대로 읽는다. 鄭玄은 군주라고 풀이하였다. 徐邈은 于와 況의 반절로 읽는다고 했다’라고 하였다.
◈ 此는 若此와 같다. ‘이와 같이’처럼 해석된다.
◈ 大는 용언으로, 아마 ‘성장시키다’, ‘확장하다’는 말일 것이다. 邦을 받는다. 大는 본래 ‘크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크게 하다’, 곧 ‘키우다’, ‘성장시키다’는 의미일 것이다.
◈ 邦은 체언으로, ‘나라’다. 周나라를 이른다.
◈ 克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能과 같다.
◈ 克 뒤에 붙어 나오는 順과 比 역시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 順과 比는 사람들이 王季에 대해 하는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앞의 句에서 王季가 어른이자 군주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서, 사람들이 王季를 順하고 比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克順克比는 직역하자면 王季가 ‘順할 수 있게 되었고, 比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지만, 사실은 王季가 ‘~하여서 사람들이 王季를 順하고, ~하여서 사람들이 王季를 比하였다’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春秋左氏傳》 내용이 이런 식으로 해석된다. 만약 順과 比가 王季가 ‘順할 수 있고, 比할 수 있다’라는 의미였다면, 왜 앞의 其德克明/克明克類/克長克君과 바로 붙여서 克順克比라고 하지 않고, 중간에 王此大邦이라는 말을 끼워 넣었겠는가. 王此大邦/克順克比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王此大邦하여서 克順克比하게 되었다’라고 풀이하는 편이 낫고, 그렇다면 順과 比의 의미상 주어는 ‘백성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 順은 아마 王季가 慈和하여서 사람들이 王季를 ‘따랐다’라는 의미일 듯하다. 《春秋左氏傳》에 근거하였다. 毛亨, 朱熹의 설도 모두 그렇다. ▼ 毛亨은 慈和徧服曰順, ‘온화하여서 모두 복종해 오는 것을 順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상기하였듯 이 말은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나온다. 이에 대해 杜預는 唯順/故天下徧服, ‘順하기 때문에 天下가 두루 복종해 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毛亨의 주석에 대해 陸德明은 徧音遍, ‘徧은 遍이라고 읽는다’라고 하였다. 遍은 ‘두루’, ‘모든’이라는 뜻이다. ▼ 朱熹는 順/慈和徧服也, ‘順은 온화하여서 모두 복종해 온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比는 아마 王季가 善을 가릴 줄 아니, 사람들이 王季에게 ‘모여 들었다’는 의미일 듯하다. 《春秋左氏傳》에 근거하였다. 比는 ‘무리를 이루다’, ‘모이다’, ‘파당을 짓다’라는 말이다. 毛亨은 《春秋左氏傳》에 근거하였다. 朱熹는 독자적인 설을 냈다. ▼ 毛亨은 擇善而從曰比, ‘善을 가리니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比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나온다. ▼ 陸德明은 比/必里反, ‘比는 必과 里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比/上下相親也, ‘比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가깝기 지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王季가 周나라를 확장시켰고, 또 사람들이 일치단결하여 周나라를 섬겼다는 말이다.
比于文王、其德靡悔。
文王에 比하더라도, 其 德은 悔가 靡하였던 것이다.
옛 성왕들에 견주어 보더라도, 왕계의 덕은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 比는 용언으로, ‘비교하다’, ‘견주어 보다’는 말이다. ▼ 朱熹는 比于/至于也, ‘比于는 ~에 이르러서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比를 至라고 하여, ‘~에 이르러서도’처럼 해석하였는데, 그러면 比于文王의 文王은 王季의 아들인 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上帝의 도움을 받아서 王季가 周나라를 성장시킨 일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므로, 文王은 昌으로 볼 수가 없고, 그러면 比는 至처럼 해석할 수가 없다.
◈ 于는 ‘~에’다. 於와 같다. 文王을 받는다.
◈ 文王은 ‘文한 王’, 혹은 ‘諡號가 文인 王’을 이른다. 아마 王季 보다 옛날에 존재하였던 ‘聖王’을 이를 것이다. 나는 ‘옛 聖王’이라고 의역하였다. 文은 시호의 일종이다. 《逸周書》 「諡法解」에 經緯天地曰文//道德博厚曰文//勤學好問曰文//慈惠愛民曰文//愍民惠禮曰文//錫民爵位曰文, ‘天地를 경영하면 文이라고 한다. 道德이 넓게 미치고 두터우면 文이라고 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묻기를 좋아하면 文이라고 한다. 자애롭게 백성들을 아끼면 文이라고 한다. 백성들을 생각하고, 예법을 잘 따르면 文이라고 한다. 백성들에게 작위를 내리면 文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文은 좋은 의미를 다 담아 둔 시호다. 그래서 周나라 창업의 기틀을 다진 昌을 文王이라고 하였고, 漢나라를 안정시킨 劉恒을 文帝라고 하였던 것이다. 朱熹가 韓愈를 韓文公이라고 참칭하고, 朱熹의 제자들이 朱熹를 朱文公이라고 참칭하였던 까닭도 다 같다. 상기하였듯, 王季의 아들 昌은 시호가 文이므로, 文王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 文王을 昌, 즉 周나라의 文王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文王은 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比 부분에 설명하였듯, 이 문단에서는 王季 시기의 일을 논하고 있지, 후대의 일을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 毛亨은 經緯天地曰文, ‘天地를 경영하면 文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그냥 文王이라고만 풀이하고 있는데, 아마 昌이라고 해석한 듯하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文王을 王季의 아들 昌으로 간주하고 있다.
◈ 其德의 其는 王季를 가리킨다. 德을 받는다.
◈ 德은 체언으로, ‘德’이다.
◈ 靡는 용언으로 보고, 無처럼 ‘없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不과 같은 부정어로 볼 수도 있다. 나는 無로 보았다. 어떤 경우에든 悔를 받는다. 《爾雅》 「釋言」에 靡/罔/無也, ‘靡와 罔은 없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鄭玄은 靡/無也, ‘靡은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悔는 체언으로, ‘지나친 점’, ‘과실’, ‘허물’, ‘손색’이다. 過와 같다. 靡를 無로 본다면, 체언으로 해석해야 한다. 悔는 ‘잘못’, ‘허물’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면 改悔는 ‘잘못을 고치다’는 말이고, 愆悔는 그 자체로 ‘잘못’이라는 말이다. ‘잘못’이니, 곧 ‘지나친 것’이다. 朱熹는 恨, ‘悔恨’이라고 보았다. 朱熹의 설을 따른다면, 王季의 德이 文王의 代에 이르러서도 ‘회한이 없었다’처럼 해석되어야 한다. 끼워 맞추면 말이야 되겠지만, 지나치다. ▼ 朱熹는 悔/遺恨也, ‘悔는 회한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王季之德/比于文王/無有所悔也//必比于文王/盛德以聖人爲匹, ‘王季의 德은 文王에 비견해 보아도 흠결이 없었다. 文王에 견줄 수 있으니, 분명 德이 중후하여 聖人과 짝을 이룰 정도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文王은 昌을 이르는 듯하다. 悔는 아마 ‘흠결’이라는 뜻 같다.
◈◈ 亡亡案 : 王季의 德이 옛 聖王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손색이 없었다는 뜻이다.
旣受帝祉、施于孫子。
[왕계가] 帝의 祉를 受한 뒤에, [그 복은] 孫子에게까지 施하였다.
[왕계가] 상제의 복록을 받은 뒤에, [그 복은] 자손에게까지 미쳤다.
◈ 旣는 부사어로, ‘~한 뒤에’처럼 해석된다.
◈ 受는 용언으로, ‘받다’는 말이다. 帝祉를 받는다.
◈ 帝는 관형어로, ‘上帝의’다. 祉를 받는다. ‘上帝가 내린’처럼 해석된다. ▼ 鄭玄은 帝/天也, ‘帝는 하늘이다’라고 하였다.
◈ 祉는 체언으로, ‘복록’이다. 《說文解字》 「示部」에 祉/福也, ‘祉는 福이다’라는 말이 있고, 《爾雅》 「釋詁」에 祿/祉/履/戩/祓/禧/禠/祜/福也, ‘祿, 祉, 履, 戩, 祓, 禧, 禠, 祜는 福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鄭玄은 祉/福也, ‘祉는 福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祉音恥, ‘祉는 恥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 施는 용언으로, ‘~에 미치다’는 말이다. 이 때는 ‘이’로 읽는다. ▼ 鄭玄은 施/猶易也/延也, ‘施는 易와 같다. 미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易는 ‘옮겨 가다’는 말이다. ▼ 陸德明은 施/以豉反/注同//易也/延也, ‘施는 以와 豉의 반절로 읽는다. 주석에서도 그렇다. 옮겨 가다, 늘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于는 ‘~에’다. 於와 같다. 孫子를 받는다.
◈ 孫子는 체언으로, ‘子孫’을 이른다. 고대에는 이렇게 글자 순서를 도치시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論語》 「學而」에 弟子入則孝/出則弟, ‘弟子는 入하면 孝하고, 出하면 弟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弟子는 子弟, 즉 ‘젊은이’라는 뜻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孫子를 子孫이라고 풀이하였다.
◈◈ 朱熹는 維此王季/帝度其心/貊其德音/其德克明/克明克類/克長克君/王此大邦/克順克比/比于文王/其德靡悔/旣受帝祉/施于孫子를 한 章으로 분류했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하는 시문이다. 朱熹는 또, 言上帝制王季之心/使有尺寸能度義//又淸靜其德音/使無非間之言/是以王季之德能此六者//至於文武/而其德尤無遺恨/是以旣受上帝之福/而延及于子孫也, ‘다음과 같은 뜻이다. 上帝가 王季의 마음을 다스려서, 아주 조금씩이라도 義를 헤아릴 수 있게 하였고, 또 王季의 德音을 맑게 정화하여 비난하거나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에 王季는 德을 가지고 이 여섯 가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文王과 武王에 이르러서는 그 德에 한스러운 바가 더욱 없었으니, 上帝의 복을 받은 뒤에 자손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此六者란, 克 뒤에 붙어 있던 明, 類, 長, 君, 順, 比를 이른다.
◈◈ 亡亡案 : 이제 王季의 이야기가 끝나고 文王 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帝謂文王、無然畔援、無然歆羨、誕先登于岸。
帝가 文王에게 謂하였다. “畔援하지 말고, 歆羨하지 말며, 誕 先 岸에 登하라.”
상제가 문왕에게 일렀다. “멋대로 날뛰지 말고, 탐욕을 부리지 말며, 가장 먼저 왕업을 이루어라.”
◈ 帝는 체언으로, 上帝다.
◈ 謂는 용언으로, ‘이르다’, ‘말하다’는 말이다. 上帝가 文王 昌에게 ‘말했다’는 말이다.
◈ 文王은 王季의 아들인 昌이다. 周나라의 文王이다. ▼ 帝謂文王에 대해 朱熹는 帝謂文王/設爲天命文王之詞//如下所言也, ‘帝謂文王이라는 말은, 하늘이 文王에게 命한 말을 가정했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 無然은 ‘이와 같이 하지 마라’, ‘이렇게 하지 마라’라는 말이다. 無는 毋와 같다. ‘~하지 마라’라는 말이다. 然은 如是, 如此와 같다. 예를 들어 無然畔援은 毋如是畔援, ‘畔援하는 것 같은 짓을 하지 마라’라는 뜻이 된다. 《禮記》 「大傳」에 一輕一重/其義然也,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니, 그 의미가 然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然/如是也, ‘然은 이와 같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王引之는 凡經稱然則/雖然/不然/無然/胡然/夫然者/皆是也//常語也, ‘經文에서 然則, 雖然, 不然, 無然, 胡然, 夫然이라고 하는 말들에서 然은 모두 이러한 뜻으로, 일반적인 용법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례는 王引之의 《經傳釋詞》 「然」에 기재되어 있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은 無然을 無是라고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無然을 無如是라고 풀이하였다. ▼ 朱熹는 無然/猶言不可如此也, ‘無然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 畔援은 아마 ‘힘을 믿고 날뛰는 모습’을 이르는 말 같다. 멋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짓을 이른다. 나는 鄭玄과 陸德明을 따랐다. 毛亨과 朱熹는 ‘배신하다’처럼 해석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은 畔援을 畔道와 援取로 나누어서 풀이하였다. 畔道는 아마 ‘도리에서 벗어나는 짓’을 이르는 말 같고, 援取는 아마 ‘의지하는 짓’을 이르는 것 같다. 아마 ‘배반하다’처럼 해석한 듯하다. ▼ 鄭玄은 畔援/猶跋扈也, ‘畔援은 跋扈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跋扈란, ‘멋대로 날뛴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拔/蒲末反/下同//字或作跋//扈音戶, ‘拔은 蒲와 末의 반절로 읽는다. 아래로도 그렇다. 이 글자는 跋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扈는 戶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跋 역시 ‘난폭하게 군다’는 말이다. 跋扈는 《經典釋文》에 拔扈라고 인용되어 있다. ▼ 陸德明은 援/毛音𡋡/取也//又于願反//鄭胡喚反//畔援/拔扈也//韓詩云/畔援/武強也, ‘援은 毛亨 같이 해석할 경우, 𡋡이라고 발음한다. 於와 願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 鄭玄처럼 해석할 경우, 胡와 喚의 반절로 읽는다. 畔援은 拔扈라는 뜻이다. 《韓詩》에 “畔援은 武強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𡋡은 袁과 같다. 武와 強은 모두 힘이 넘치는 모습을 뜻하는데, 이에 따라 생각해 보면, 武強은 아마 ‘멋대로 군다’는 말일 것이다. ▼ 朱熹는 畔/離畔也//援/攀援也//言舍此而取彼也, ‘畔은 이반하다는 뜻이다. 援은 의지하다는 뜻이다. 畔援은 이 쪽 편은 버리고, 저 쪽 편에 붙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毛亨의 풀이와 통한다. 朱熹는 또, 援에 대해 音阮, ‘阮이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 歆羨은 남의 것을 ‘탐하는 짓’을 이른다. 歆과 羨은 모두 ‘탐하다’는 말이다. 《說文解字》 「㳄部」에 羨/貪欲也, ‘羨은 탐욕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또, 《國語》 「楚語」에 楚必歆之 ‘楚나라는 분명 之를 歆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韋昭는 歆/猶貪也, ‘歆은 貪과 같다’라고 하였다. 貪은 ‘탐하다’는 뜻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은 歆羨을 貪羨, ‘탐하다’라고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 역시 歆羨을 貪羨, ‘탐하다’라고 풀이하였다. ▼ 陸德明은 歆/許金反//羨/錢面反, ‘歆은 許와 金의 반절로 읽는다. 羨은 錢과 面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歆/欲之動也//羨/愛慕也//言肆情以徇物也, ‘歆은 하고 싶어 한다는 말이다. 羨은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歆羨은 멋대로 굴면서 외물을 좇는 짓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誕은 부사어로, ‘가장’, ‘제일’이라는 말일 듯하다. 先을 한정한다. 앞에 나왔던 憎其式廓에서, 廓이 大라는 점을 해설하기 위해 인용하였던 《爾雅》 「釋詁」 내용에 誕 역시 들어 있다. 곧, 誕도 大라는 뜻이다. 大는 부사어로 사용될 때, ‘아주’, ‘심히’처럼 해석된다. 그러므로 ‘가장’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다. ▼ 鄭玄은 誕/大, ‘誕은 大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誕/但旦反/大也, ‘誕은 但과 旦의 반절로 읽는다. 大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先은 부사어로, ‘먼저’다. 용언인 登을 한정한다.
◈ 登은 용언인데, 직역하자면 ‘오르다’라고 해야 할 것이고, 의역하자면 ‘이루다’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루다’처럼 번역하였다. 登을 ‘이루다’로 본다면, 뒤에 나오는 岸은 일종의 ‘업적’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爾雅》 「釋詁」에 功/績/質/登/平/明/考/就/成也, ‘功, 績, 質, 登, 平, 明, 考, 就는 이루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鄭玄은 登/成, ‘登은 이루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于는 ‘~에’다. 於와 같다. 岸을 받는다.
◈ 岸은 체언으로, ‘王業’을 이른다. 岸은 본래 ‘언덕’이다. 그러나 登을 ‘이루다’로 보았기에, 岸은 ‘언덕’ 보다는 ‘王業’이나 ‘霸業’ 같은 업적이 되어야 한다. 《莊子》 「大宗師」에 以德爲循者/言其與有足者至於丘也, ‘眞人이 德을 따를 것으로 생각하는 까닭은, 장차 有足者와 같이 丘에 이르기 위해서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有足者는 ‘발이 있는 사람’인데, 이는 道를 닦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을 이른다. 丘는 이 글의 岸처럼 ‘언덕’인데, ‘道를 깨우친 경지’를 이른다. 언덕은 높은 데에 있다. 따라서 ‘높은 경지’를 뜻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 듯하다. 毛亨과 朱熹는 모두 그러한 방향으로 풀이하였다. 鄭玄의 경우, 岸을 법적 ‘송사’로 풀이하였는데, 나는 따르지 않았다. ▼ 毛亨은 岸/高位也, ‘岸은 높은 위치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岸/訟也, ‘岸은 송사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岸/道之極至處也, ‘岸은 道가 지극한 경지다’라고 하였다.
◈◈ 毛亨은 無是畔道/無是援取/無是貪羨, ‘도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며,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天語文王曰/女無如是跋扈者/妄出兵也//無如是貪羨者/侵人土地也//欲廣大德美者/當先平獄訟/正曲直也, ‘하늘이 文王에게 말하였다. “너는 힘을 믿고 날뛰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는 함부로 군대를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요, “탐욕을 부리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는 남의 땅을 침범하지 말라는 말이요, “德을 넓히도록 노력하라”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먼저 송사를 공정하게 판결하여, 사람들의 曲直을 바로잡으라는 말이었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上帝가 文王에게 도리를 지키며 周나라를 통치하라고 명하였다.
密人不恭、敢距大邦、侵阮徂共。
[그런데] 密人이 不恭하더니, 敢 大邦에 距하고, 阮, 徂, 共과 함께 侵해 왔다.
[그런데] 밀나라 사람들이 불경하게 굴더니, 감히 큰 나라에 항거하고, 원나라, 조나라, 공나라와 함께 침범해 왔다.
◈ 이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다. 侵阮徂共은 侵與阮徂共이 아닐까 의뭉스럽다. 侵阮徂共은 密나라가 阮, 徂, 共의 세 나라를 공격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뒤의 以按徂旅에서, 文王은 군대를 보내 徂나라의 군대를 막았다고 했다. 密나라가 周나라의 대의에 항거해서 세 나라를 공격했다면, 周나라는 密나라를 막아야 하지, 徂나라 군대를 막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나는 密나라 뿐만 아니라, 阮, 徂, 共의 세 나라 역시 密나라와 ‘함께’ 周나라를 공격해 온 것이 아닌가 의뭉스럽다. 그러면 첫 부분에 나왔던 四國이 密, 阮, 徂, 共이라는 점과도 합치된다. 따라서 나는 侵阮徂共을 侵與阮徂共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주석을 보면, 鄭玄 역시 이렇게 간주한 듯하다.
◈ 密人은 ‘密나라 사람’이다. 密은 나라 이름이다. 《呂氏春秋》 「離俗覽 用民」과 《史記》 「周本紀」에는 密須라고 되어 있다. 《史記》에 대해 裴駰은 應劭曰/密須氏/姞姓之國///瓚曰/安定陰密縣/是, ‘應劭는 “密須氏는 姞姓의 나라다”라고 하였다. 瓚은 “安定 陰密縣이 이곳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張守節은 括地志云/陰密故城在涇州鶉觚縣西/其東接縣城/卽古密國///杜預云姞姓國/在安定陰密縣也, ‘《括地志》에 이런 말이 있다. “陰密의 故城은 涇州 鶉觚縣 서쪽에 있는데, 그 동쪽 부분은 縣城과 접해 있다. 곧, 옛 密國이다.” 杜預는 이렇게 말했다. “姞姓의 나라다. 安定 陰密縣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安定이면, 지금의 西安 보다도 더 서쪽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은 密須氏라고 하였다. ▼ 朱熹는 密/密須氏也//姞姓之國/在今寧州, ‘密은 密須氏다. 姞姓의 나라로, 지금의 寧州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지금’이란, 南宋을 이른다.
◈ 不은 부정어다. 恭을 한정한다.
◈ 恭은 용언으로, ‘공손하게 행동하다’, ‘공경하다’, ‘삼가다’는 말이다.
◈ 敢은 부사어로, ‘감히’다.
◈ 距는 용언으로, 아마 ‘대항하다’, ‘항거하다’는 말일 듯하다. 拒와 같다. 大邦을 받는다.
◈ 大邦은 ‘큰 나라’로, 周나라를 이를 것이다.
◈ 侵은 용언으로, ‘침범해 오다’는 말이다. 첫 부분에 밝혔듯, 密, 阮, 徂, 共 네 나라가 周나라를 ‘침범해 왔다’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徂를 나라 이름으로 보지 않는다면, 阮만 받는다.
◈ 阮은 나라 이름이다. 아마 關中에 있었을 것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은 阮을 나라 이름으로 보았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阮도 나라 이름으로 보았다. ▼ 陸德明은 阮/魚宛反, ‘阮은 魚와 宛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阮/國名//在今涇州, ‘阮은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涇州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지금’이란, 南宋을 이른다.
◈ 徂는 나라 이름일 것이다. 아마 關中에 있었을 것이다. 毛亨과 朱熹는 ‘가다’라고 풀이하였고, 鄭玄은 나라 이름이라고 보았다. 나는 鄭玄을 따랐다. 시 앞 부분에 維彼四國, ‘저 四國에 대해서는’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鄭玄은 四國을 密, 阮, 徂, 共의 네 나라로 보았었다. 나는 鄭玄의 해석이 내용과 잘 합치된다고 생각한다. 毛亨이나 朱熹처럼 해석한다먼, 侵阮徂共은 ‘阮을 侵하고 共으로 徂하였다’처럼 보아야 할 것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은 徂를 往, ‘가다’라고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徂 역시 나라 이름으로 보았다. ▼ 陸德明은 毛云/徂/往也//共/國名///鄭云/徂共/皆國名, ‘毛亨은 “徂는 가다는 뜻이다. 共은 나라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鄭玄은 “徂와 共은 모두 나라 이름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朱熹는 徂/往也, ‘徂는 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共은 나라 이름이다. 아마 關中에 있었을 것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毛亨은 共 역시 나라 이름으로 보았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共도 나라 이름으로 보았다. ▼ 陸德明은 共音恭/注同, ‘共은 恭이라고 읽는다. 주석에서도 그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共/阮國之地名//今涇州之共池/是也, ‘共은 阮나라의 지명이다. 지금의 涇州 共池가 이곳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南宋이다.
◈◈ 毛亨은 國有密須氏/侵阮遂往侵共, ‘密須氏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阮나라를 침범하더니, 결국 옮겨 가서 共나라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阮也徂也共也/三國犯周/而文王伐之//密須之人/乃敢距其義兵/違正道/是不直也, ‘阮, 徂, 共 세 나라가 周나라를 침범하니, 文王이 이 나라들을 정벌하였다. 密須 사람들은 이에 周나라의 義兵에 저항하고, 正道를 어겼으니, 이렇게도 올곧지 않았도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呂氏春秋》 「離俗覽 用民」에 密須之民/自縛其主/而與文王, ‘密須의 백성들은 자기 주인을 스스로 결박해서 文王에게 주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글에 나오는 密須가 바로 密일 것이다. 《史記》 「周本紀」에는 明年/伐密須, ‘이듬해에 密須를 정벌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 내용을 이른다.
王赫斯怒、爰整其旅、以按徂旅、以篤于周祜、以對于天下。
王이 怒하여서 赫하고는, 爰 其 旅를 整하고서, 徂旅를 按하고, 周祜를 篤하였으며, 天下를 對하였도다.
왕이 화가 나서 소리를 꽥 지르고는, 이에 군대를 가다듬고서 조나라의 군대를 저지하였고, 주나라의 복록을 공고하게 닦았으며, 천하를 다스릴 공업을 성취하였도다.
◈ 王은 체언으로, 文王을 이른다.
◈ 赫은 용언으로, 화가 나서 ‘꽥’이나 ‘악’하고 소리를 지르는 꼴을 이른다. 이 赫은 아마 嚇의 가차자일 것이다. 《詩》 「大雅 蕩之什」의 「桑柔」에 反予來赫, ‘도리어 予는 赫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口距人謂之赫, ‘입으로 남에게 대항하는 짓을 赫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화를 내서 소리를 지르다’는 말이다.陸德明은 本亦作嚇/鄭許稼反, ‘판본에 따라 嚇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鄭玄 대로 해석한다면 許와 稼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한편, 《莊子》 「秋水」에 今子欲以子之梁國而嚇我邪, ‘지금 너는 너의 梁國 때문에 나에게 嚇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陸德明은 嚇/本亦作呼/同//許嫁反/又許伯反//司馬云/嚇/怒其聲/恐其奪己也//詩箋云/以口拒人曰嚇, ‘嚇은 판본에 따라 呼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의미는 같다. 許와 嫁의 반절로 읽기도 하고, 許와 伯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 司馬彪는 “嚇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다는 말이니, 惠子가 자기 자리를 莊子가 빼앗을까 걱정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詩》에 대해 鄭玄은 “입으로 남에게 대항하는 짓을 嚇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바로 이 嚇들이 본문의 赫과 같다. ▼ 鄭玄은 赫/怒意, ‘赫은 화가 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赫/虎格反, ‘赫은 虎와 格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赫을 怒와 같게 풀이하였다.
◈ 斯는 아마 도치를 표시하는 글자 같다. 그러면 王赫斯怒는 王怒赫이 되는데, 이는 ‘王이 화가 나서 소리를 꽥 질렀다’는 뜻이 된다. 斯는 이 시 앞 부분이나 앞 편인 「思齊」에서도 도치를 표현하는 글자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이 斯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毛亨, 鄭玄, 朱熹 세 사람의 풀이가 전부 다르다. 毛亨은 따로 밝히지 않았지만, 陸德明은 毛亨이 斯를 此 그대로 풀이했다고 했다. 鄭玄은 盡, ‘다하다’라고 풀이했다. 朱熹는 의미 없는 조사로 보았다. 이제 본문의 王赫斯怒를 생각해 보자. 毛亨처럼 보면, ‘王이 이 분노에 화를 냈다’처럼 해석된다. 鄭玄이라면, ‘王이 화가 나서 분노를 다하였다’라는 말이 된다. 朱熹의 경우, ‘王이 화를 냈다’가 된다. 셋 중에 고른다면 朱熹의 설이 가장 무난하겠다. ▼ 鄭玄은 斯/盡也, ‘斯는 다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斯/毛如字/此也//鄭音賜/盡也, ‘斯에 대해, 毛亨의 경우엔 글자 그대로 읽는다. 此라는 뜻이다. 鄭玄의 경우엔 賜라고 읽는다. 盡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賜 역시 ‘다하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斯를 의미 없는 조사로 풀이한 듯하다. 朱熹는 赫斯怒를 赫怒라고 하였다.
◈ 怒는 용언으로, ‘노하다’, ‘화가 나다’는 말이다.
◈ 爰은 부사어로, ‘이에’처럼 해석된다.
◈ 整은 용언으로, ‘정돈하다’, ‘정리하다’, ‘가지런하게 하다’, ‘가다듬다’는 말이다. 其旅를 받는다. 《說文解字》 「攴部」에 整/齊也, ‘整은 가지런하게 만들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其旅는 ‘周나라 군대’를 이른다. 其는 ‘周나라’를 가리킨다. 旅는 체언으로, ‘군대’다. 《說文解字》 「㫃部」에 旅/軍之五百人爲旅, ‘군인이 500명 있으면 旅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또 《周禮》 「地官司徒」에 五人爲伍/五伍爲兩/四兩爲卒/五卒爲旅/五旅爲師/五師爲軍, ‘5명을 伍라고 하고, 5伍를 兩이라고 하며, 4兩을 卒이라고 하고, 5卒을 旅라고 하며, 5旅를 師라고 하고, 5師는 軍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보면, 伍는 5명, 兩은 25명, 卒은 100명, 旅는 500명, 師는 2500명, 軍은 12500명이 된다. 그러나 본문의 旅는 꼭 ‘500명의 군인’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軍旅라는 말처럼, ‘군대’를 이른다. ▼ 毛亨은 旅/師, ‘旅는 군대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五百人爲旅, ‘500명을 旅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其旅/周師也, ‘其旅는 周나라 군대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以는 ‘~로써’, ‘~하여서’다. 整其旅‘하여서’라는 뜻이다. 以按徂旅, 以篤于周祜, 以對于天下의 以가 모두 그렇다.
◈ 按은 용언으로, ‘저지하다’는 말이다. 徂旅를 받는다. 《爾雅》 「釋詁」에 訖/徽/妥/懷/安/按/替/戾/底/廢/尼/定/曷/遏/止也, ‘訖, 徽, 妥, 懷, 安, 按, 替, 戾, 底, 廢, 尼, 定, 曷, 遏은 止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止는 곧 ‘저지하다’는 말이다. ▼ 毛亨은 按/止也, ‘按은 저지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按을 卻止라고 풀이하였다. 卻止는 ‘물리치다’ 혹은 ‘저지하다’는 말이다. ▼ 陸德明은 按/安旦反//本又作遏/安葛反//此二字俱訓止也, ‘按은 安과 旦의 반절로 읽는다. 판본에 따라 遏이라고 되어 있기도 한데, 이 경우엔 安과 葛의 반절로 읽는다. 이 두 글자는 모두 止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按/遏也, ‘按은 遏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이 설명하였듯, 遏 역시 止와 같다.
◈ 徂旅는 ‘徂나라의 군대’를 이른다. 鄭玄은 徂를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고, 毛亨과 朱熹는 ‘가다’라고 풀이하였다. 나는 鄭玄을 따랐다. 毛亨과 朱熹의 경우, 徂를 나라 이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旅를 달리 풀이했다. 毛亨은 旅를 지명으로 보았고, 朱熹는 여전히 ‘가다’처럼 해석하였다. ▼ 毛亨은 旅/地名也, ‘旅는 지명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徂旅/密師之往共者也, ‘徂旅는 密나라 군대 중 共으로 간 군대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篤은 용언으로, ‘두텁게 만들다’는 말이다. ‘공고하게 하다’처럼 해석할 수 있겠다.
◈ 于周祜의 于는 ‘~를’처럼 해석된다. 周祜를 받는다. 《詩經集傳》에는 이 于가 빠져 있다.
◈ 祜는 체언으로, ‘福’이다. 《爾雅》 「釋詁」에 祿/祉/履/戩/祓/禧/禠/祜/福也, ‘祿, 祉, 履, 戩, 祓, 禧, 禠, 祜는 福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陸德明은 祜音戶, ‘祜는 戶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祜/福, ‘祜는 福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對는 용언으로, ‘이루다’, ‘성취하다’는 말일 것이다. 密나라 등을 막는다고 天下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첫 발을 내딛었다는 점에서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하다. 鄭玄과 朱熹는 天下 사람들의 열망에 ‘대답하다’처럼 풀이했는데, 나는 따르지 않았다. 《爾雅》 「釋言」에 對/遂也, ‘對는 遂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遂는 바로 ‘이루다’, ‘성취하다’라는 말이다. 鄭玄과 朱熹는 모두 ‘대답하다’라고 풀이했는데, 이 역시 평이하고 좋다. ▼ 毛亨은 對/遂也, ‘對는 성취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對/答也, ‘對는 대답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對/答也, ‘對는 대답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于天下의 于는 ‘~를’처럼 해석된다.
◈ 天下는 체언으로, 아마 ‘天下를 다스릴 공업’을 이르는 말 같다.
◈◈ 鄭玄은 文王赫然與其羣臣盡怒曰/整其軍旅而出/以却止徂國之兵衆/以厚周當王之福/以答天下鄕周之望, ‘文王이 화가 나서, 신하들과 함께 분노를 내뱉으며 말했다. “군대를 정리해 출병하여서, 徂나라의 군대를 막고, 周나라의 복록을 두텁게 만들며, 天下 사람들이 周나라에 대해 바라는 바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鄕/本又作嚮/許𠅙反//下同, ‘鄕은 판본에 따라 嚮이라고도 되어 있다. 許와 𠅙의 반절로 읽는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𠅙은 亮과 같다.
◈◈ 朱熹는 帝謂文王/無然畔援/無然歆羨/誕先登于岸/密人不恭/敢距大邦/侵阮徂共/王赫斯怒/爰整其旅/以按徂旅/以篤于周祜/以對于天下를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을 이른다. 朱熹는 또, 人心有所畔援/有所歆羨/則溺於人欲之流/而不能以自濟/文王無是二者//故獨能先知先覺/以造道之極至//蓋天實命之/而非人力之所及也//是以密人不恭/敢違其命/而擅興師旅以侵阮/而往至于共/則赫怒整兵/而往遏其衆/以厚周家之福/而答天下之心//蓋亦因其可怒而怒之/初未嘗有所畔援歆羨也//此文王征伐之始也, ‘사람은 마음 속으로 배신하려 하거나, 탐욕을 부리려 하는 경우가 있은 즉, 이처럼 욕망의 급류에 휩쓸린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런데 文王에게는 이런 욕망이 없었다. 그래서 홀로 먼저 깨달을 수 있었고, 이에 道를 지극히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대개, 하늘이 진정 내리는 命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密나라 사람들이 불손하게 굴면서 하늘의 命을 감히 어기고는, 멋대로 군대를 일으켜 阮나라를 침범하고, 共에까지 이르자, 文王은 분노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密나라의 군대를 저지하고는, 周나라의 복록을 두텁게 만들고, 天下 사람들의 바램에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文王은 화를 낼 만한 일에 화를 냈을 뿐이니, 애초부터 남을 배신하거나 탐욕을 부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文王의 첫 번째 정벌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네 나라가 침범해 왔는데, 침공해 온 군대를 저지했다는 말 같다. 뒷부분에는 침범해 온 나라들을 역으로 공격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依其在京、侵自阮疆、陟我高岡、無矢我陵、我陵我阿、無飲我泉、我泉我池。
[이윽고 문왕은 역공에 나섰으니,] 其 京에 在한 군대에 依하여서, 阮나라의 疆에서부터 [네 나라를] 侵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我의 高한 岡을 陟함에, [원나라 사람들은] 我의 陵에 矢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我의 陵이요, 我의 阿였으며, 我의 泉을 飲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我의 泉이요, 我의 池였도다.
[이윽고 문왕은 역공에 나섰으니,] 주나라 경에 있던 군대를 일으켜서, 원나라 국경에서부터 [네 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높은 산등성이를 올랐음에, [원나라 사람들은] 우리 언덕에 진을 치지 못하였으니, [이미] 우리의 언덕이요, 우리의 고개였으며, 우리 샘물을 마시지 못하였으니, [이미] 우리의 샘이요, 우리의 못이었도다.
◈ 依는 아마 용언으로, ‘의지하다’는 말 같다. 其在京을 받는다. 이 말은 군대에 ‘의지하다’는 말이다. 나는 ‘일으키다’라고 의역하였다. ▼ 朱熹는 依/安貌, ‘依는 편안한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 其는 ‘周나라’를 가리키는 말 같다. 在京을 받는다.
◈ 在는 용언으로, ‘~에 있다’는 말이다. 京을 받는다.
◈ 京은 체언으로, 아마 지명일 것이다. 鄭玄은 그냥 ‘周나라의 땅’이라고 하였고, 朱熹는 ‘周나라의 수도’라고 하였다. 西周의 수도가 鎬京인데, 아마 그 지역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하다. ▼ 毛亨은 京/大阜也, ‘京은 큰 언덕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京/周地名, ‘京은 周나라의 지명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京/周京也, ‘京은 周나라의 수도다’라고 하였다.
◈ 侵은 용언으로, ‘침범하다’는 말이다. 密나라, 阮나라, 徂나라, 共나라를 역으로 ‘침공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 自는 ‘~로부터’다. 阮疆을 받는다.
◈ 阮疆은 ‘阮나라의 경계’, 즉 ‘阮나라의 국경’이다. 疆은 ‘경계’다. ▼ 陸德明은 疆/居良反//注同, ‘疆은 居와 良의 반절로 읽는다. 주석에서도 그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 陟은 용언으로, ‘올라 가다’, ‘오르다’는 말이다. 登과 같다. 我高岡을 받는다. 《說文解字》 「𨸏部」에 陟/登也, ‘陟은 오르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고, 《爾雅》 「釋詁」에도 騭/假/格/陟/躋/登/陞也, ‘騭, 假, 格, 陟, 躋, 登은 오르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鄭玄은 陟/登也, ‘陟은 오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陟我高岡의 我는 1인칭 대명사로, ‘나’, ‘우리’를 이른다. 高岡을 받는다. 이 전쟁은 周나라가 침공을 당한 것이 아니라, 周나라가 침공을 한 것이다. 따라서 高岡은 周나라의 것이 아니라 阮나라의 것이다. 그런데 왜 我라고 하였을까. 周나라가 阮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의 고지대와 강 등을 점거했는데, 원래는 阮나라의 땅이지만, 周나라의 땅이 될 것이기에 我라는 말을 붙인 듯하다. 天命이 周나라에 있다고 믿었으니, 세상 어느 것 중 周나라의 소유가 아닌 것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주변 나라, 민족들을 침탈하고, 핍박하였을 것이다. ▼ 鄭玄은 每言我者/據後得而有之而言, ‘句마다 我라는 말을 붙인 까닭은 나중에 얻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 高岡은 ‘높은 산등성이’다. 高는 관형어로, ‘높은’이다 岡을 한정한다. 岡은 체언으로, ‘산등성이’를 이른다. 《說文解字》 「山部」에 岡/山骨也, ‘岡은 산의 뼈대다’라는 말이 있고, 《爾雅》 「釋山」에 山脊/岡, ‘산의 척추를 岡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 《釋名》 「釋山」에도 山脊曰岡//岡/亢也/在上之言也, ‘산의 척추를 岡이라고 한다. 岡은 높다는 뜻이니, 윗부분에 있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無는 ‘~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矢를 받는다.
◈ 矢는 용언으로, 아마 ‘진을 치다’는 말 같다. 《爾雅》 「釋詁」에 矢/雉/引/延/順/薦/劉/繹/尸/旅/陳也, ‘矢, 雉, 引, 延, 順, 薦, 劉, 繹, 尸, 旅는 陳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陳은 ‘진을 치다’는 뜻이다. 毛亨과 朱熹는 ‘진을 치다’라고 풀이하였고, 鄭玄은 ‘당해 내다’라고 풀이했는데, 두 설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無飲我泉과 함께 생각하면, 無矢我陵과 無飲我泉은 周나라가 阮나라의 땅을 침탈한 뒤, 阮나라 사람들이 그 땅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점을 표현하는 말이므로, ‘진을 치다’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겠다. ▼ 毛亨은 矢/陳也, ‘矢는 진을 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矢猶當也, ‘矢는 當과 같다’라고 하였다. 當은 ‘감당하다’, ‘당해 내다’는 말이다. 鄭玄처럼 해석한다면, 고지대에 진을 친 周나라 군대를 ‘당해 내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 朱熹 역시 矢/陳, ‘矢는 진을 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陵과 阿는 체언으로, 모두 ‘언덕’이다. 나는 ‘언덕’과 ‘고개’라고 번역하였다. 陵과 阿의 세부적인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 《說文解字》 「𨸏部」에 陵/大𨸏也, ‘陵은 큰 언덕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같은 편에 阿/大陵也//一曰/曲𨸏也, ‘阿는 커다란 陵이다. 어떤 사람은 굽은 언덕이라고 했다’라는 말이 있다. 《爾雅》 「釋地」에는 高平曰陸/大陸曰阜/大阜曰陵/大陵曰阿, ‘높고 평평한 땅을 陸이라고 하고, 커다란 陸을 阜라고 하며, 큰 阜를 陵이라고 하고, 큰 陵을 阿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釋名》 「釋山」에도 大阜曰陵, ‘큰 언덕을 陵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즉, 陵도 큰 언덕인데, 阿는 그 보다 더 큰 언덕을 뜻한다. ▼ 鄭玄은 大陵曰阿, ‘큰 陵을 阿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또 陵泉重言者/美之也, ‘陵과 泉을 두 번씩 언급한 까닭은 文王의 행적을 찬미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重/直用反, ‘重은 直과 用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我陵我阿란, 아마도 阮나라의 陵과 阿가 이미 周나라의 陵과 阿가 되었다는 의미인 듯하다. 뒤의 我泉我池 역시 그렇게 보아야 하겠다.
◈ 飲은 용언으로, ‘마시다’는 말이다. 물을 ‘마시다’는 뜻이다.
◈ 泉은 체언으로, ‘샘’이다. 물이 흘러 나오는 곳이다. 《說文解字》 「泉部」에 泉/水原也//象水流出成川形, ‘泉은 물이 나오는 곳이다. 물이 흘러 나와서 내를 이루는 모습을 본땄다’라는 말이 있다.
◈ 池는 ‘못’, ‘연못’이다. 물이 고여 있는 곳이다.
◈◈ 鄭玄은 文王但發其依居京地之衆/以往侵阮國之疆//登其山脊而望阮之兵/兵無敢當其陵及阿者/又無敢飲食於其泉及池水者//小出兵而令驚怖如此/此以德攻/不以衆也, ‘文王은 일어나, 다만 京地의 군대에만 의거하여서 阮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였다. 산등성이에 올라가 阮나라의 병사들을 살펴 보니, 阮나라 병사들 중 감히 그 陵과 阿를 당해 내는 자 없었고, 또 감히 그 泉과 池에서 물을 마실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군대를 조금 내었을 뿐인데 적을 이렇게나 놀래켰으니, 이는 文王이 德에 의거하여 공격했기 때문이지, 周나라의 군대가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도다’라고 하였다. 發其의 其는 而와 같다고 보고 번역하였다. 이처럼 鄭玄은 ‘周나라가 공격했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脊/井亦反//令/力成反//重/直用反, ‘脊은 井과 亦의 반절로 읽는다. 令은 力과 成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周나라가 역공하여 阮나라를 침공한 내용이다.
度其鮮原、居岐之陽、在渭之將。萬邦之方、下民之王。
[사람들이 더 모여 들자 수도를 새로 물색하기 위해] 鮮과 原을 度하다가, 岐의 陽에 居하였으니, 渭의 將에 在하였다. [이에] 萬邦은 方하였고, 下民은 王하였다.
[사람들이 더 모여 들자 수도를 새로 물색하기 위해] 고립된 산과 드넓은 평원을 물색해 보다가, 기산의 남쪽에 거처를 정하였으니, 위수 곁에 있었다. [이에] 만국이 우러러 보았고, 백성들은 왕이라고 여겼다.
◈ 度은 용언으로, ‘헤아리다’는 말이다. ‘탁’이라고 읽는다. 나는 ‘찾다’, ‘물색하다’처럼 의역하였다. ▼ 鄭玄은 度/謀, ‘度은 謀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謀는 ‘깊이 생각해 보다’는 말이다.
◈ 其는 아마 의미 없는 조사 같다.
◈ 鮮은 아마 ‘작은 산’을 이르는 말 같다. 《爾雅》 「釋山」에 小山別大山/鮮, ‘작은 산이 큰 산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鮮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郭璞은 不相連, ‘서로 이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邢昺은 謂小山與大山分別不相連屬者/名鮮//李巡云/大山少/故曰鮮, ‘작은 산이 큰 산과 구분되어 있어서 연이어 있지 않은 부류를 鮮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李巡은 “큰 산은 적다. 그래서 鮮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毛亨은 小山別大山曰鮮, ‘작은 산이 큰 산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鮮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別/彼列反, ‘別은 彼와 列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鮮/善也, ‘鮮은 좋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鮮/息淺反/又音仙//毛/小山別大山曰鮮//鄭/善也, ‘鮮은 息과 淺의 반절로 읽는다. 仙이라고 읽기도 한다. 毛亨은 작은 산이 큰 산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鮮이라고 한다고 했고, 鄭玄은 좋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鮮/喜, ‘鮮은 좋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原은 체언으로, ‘평원’을 뜻한다. 《爾雅》 「釋地」에 大野曰平/廣平曰原, ‘큰 들을 平이라고 하고, 넓은 平을 原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 居는 용언으로, 아마 ‘거처를 정하다’는 말 같다. 岐之陽을 받는다.
◈ 岐는 체언으로, ‘岐山’을 이른다.
◈ 岐之陽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처럼 해석된다. 渭之將의 之도 그렇다.
◈ 陽은 체언으로, ‘산의 남쪽’을 이른다. 산의 남쪽이나 강의 북쪽을 陽이라고 하고, 산의 북쪽이나 강의 남쪽을 陰이라고 한다.
◈ 在는 용언으로, ‘~에 있다’는 말이다. 渭之將을 받는다.
◈ 渭는 체언으로, ‘渭水’다. 關中에 있는 강이다. 黃河의 지류다.
◈ 將은 체언으로, ‘측면’, ‘옆’이다. ▼ 毛亨은 將/側也, ‘將은 곁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將/側, ‘將은 곁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萬邦은 체언으로, ‘萬國’이다.
◈ 萬邦之方의 之는 아마 주격 조사 같다.
◈ 方은 용언으로, 아마 ‘우러러 보다’, ‘선망하다’라는 말일 듯하다. 鄭玄과 朱熹가 이렇게 풀이하였다. 毛亨은 則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본보기’, ‘모범’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수도를 옮겼다고 본보기가 될 일은 아니므로, 나는 毛亨을 따르지 않았다. ▼ 毛亨은 方/則也. ‘方은 모범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方/猶鄕也, ‘方은 鄕과 같다’라고 하였다. 鄕은 向과 같으니, ‘향하다’는 뜻이고, 이는 곧 ‘선망하다’, ‘우러러 보다’는 말이다. ▼ 朱熹는 方/鄕也, ‘方은 鄕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선망하다’는 말이다.
◈ 下民은 체언으로, 일반 ‘백성들’을 이른다.
◈ 下民之王의 之는 아마 주격 조사일 것이다.
◈ 王은 용언으로, ‘왕이라고 생각하다’는 말이다. 爲王처럼 해석해야 하겠다.
◈◈ 鄭玄은 文王見侵阮而兵不見敵/知已德盛而威行/可以遷居/定天下之心//乃始謀居善原廣平之地/亦在岐山之南/居渭水之側/爲萬國之所嚮/作下民之君//後竟徙都於豐, ‘文王은 阮나라에게서 침공을 당하였지만, 병사들은 적을 만나지 못했으니, 文王은 이로써 이미 德이 성하고, 위의가 드러나기에, 나라의 위치를 옮기고, 天下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이에 비로소 넓고 평평한 곳에 거처할 것을 모의하여, 岐山 남쪽에서 있는 곳으로, 渭水 측면에 기거하였다. 이에 만국이 선망하는 나라가 되었고, 백성들의 군주가 되었도다. 나중엔 결국 豐으로 수도를 옮겼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依其在京/侵自阮疆/陟我高岡/無矢我陵/我陵我阿/無飲我泉/我泉我池/度其鮮原/居岐之陽/在渭之將/萬邦之方/下民之王을 한 章으로 보았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言文王安然在周之京/而所整之兵/旣遏密人//遂從阮疆/而出以侵密//所陟之岡/卽爲我岡/而人無敢陳兵於陵/飲水於泉/以拒我也//於是相其高原/而徙都焉/所謂程邑也//其地於漢爲扶風安陵//今在京兆府咸陽縣, ‘이런 뜻이다. 文王은 편안하게 周나라의 수도에 있으면서, 병사들을 정돈하여서 密나라 사람들을 저지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阮나라의 경계를 따라 출정하여 密나라를 침공하였다. 周나라의 군대가 산등성이를 올랐으니, 곧 우리의 산등성이가 되었고, 아무도 감히 언덕에 진을 치거나, 샘에서 물을 마시면서, 우리에게 항거하지 못했다. 이에 고원 지대를 골라서 수도를 옮겼으니, 程邑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 땅은 漢나라 때 扶風의 安陵이 되었다. 지금은 京兆府의 咸陽縣에 있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南宋을 이른다. 相은 아마 ‘고르다’는 뜻인 듯하다.
◈◈ 亡亡案 : 원래 살던 곳에서 岐山 남쪽으로 천도하였다는 이야기다.
帝謂文王、予懷明德、不大聲以色、不長夏以革。不識不知、順帝之則。
[이에] 帝가 文王에게 謂하였다. “予는 明德을 懷하고, 聲을 大하여서 色하지 말 것이요, 夏를 長하여서 革하지 말지어다.” [그러자 문왕은] 不識不知 간에, 帝의 則을 順하게 되었다.
[이에] 상제가 문왕에게 말하였다. “너는 올바른 덕을 품고, 명성을 과장하여 겉을 꾸미지 말 것이요, 제후들을 이끌어 가면서 성급하게 굴지 말지어다.” [그러자 문왕은] 부지불식 간에, 상제의 원칙을 따르게 되었다.
◈ 나는 不長夏以革까지를 上帝의 말로 보았고, 不識不知/順帝之則은 그 뒤에 일어난 현상으로 보았다. 鄭玄은 順帝之則까지의 모든 句를 上帝의 말로 해석하였다.
◈ 帝는 체언으로, ‘上帝’를 이른다.
◈ 謂는 용언으로, ‘말하다’, ‘이르다’는 말이다. 文王을 받는다.
◈ 文王은 周나라의 昌이다.
◈ 予는 아마 子의 오기로 보인다. 의미상 이 말은 상대인 文王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너’가 되어야 한다. 予는 1인칭 대명사이고, 子는 2인칭 대명사다. ▼ 주석을 참고해 보면, 鄭玄은 予를 我, 즉 1인칭 대명사 그대로 풀이ㅏ였다. ▼ 朱熹는 予/設爲上帝之自稱也, ‘予는 上帝가 자칭하였다고 가정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 懷는 용언으로, 생각을 ‘품다’, ‘지니다’는 말이다. 明德을 받는다. ▼ 毛亨은 懷/歸也, ‘懷는 歸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歸는 무슨 의미일지 잘 모르겠다. 아마 與처럼 ‘함께하다’는 말이거나, 아니면 貴의 가차자일 수도 있겠다. 貴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懷를 有, ‘가지고 있다’라고 풀이하였다. ▼ 朱熹는 懷/眷念也, ‘懷는 생각을 돌아 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明德은 ‘올바른 德’을 이를 것이다. ▼ 朱熹는 明德/文王之明德也, ‘明德은 文王의 明德이다’라고 하였다.
◈ 不大聲以色은 아마 ‘명성을 과장해서 외형을 꾸며 대지 말라’는 말 같다. 不은 부정어다. 色을 한정한다. 大는 용언으로, ‘과장하다’, ‘키우다’는 말일 것이다. 聲을 받는다. 聲은 체언으로, ‘名聲’, ‘聲譽’다. 以는 ‘~로써’, ‘~함으로써’다. 大聲을 받는다. 色은 용언으로, 아마 ‘겉을 꾸미다’는 말일 것이다. 毛亨은 聲을 ‘소리’로 보고, ‘큰 소리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처럼 풀이하였다. 朱熹의 경우엔 以를 與로 바꾸어서, 不大聲與色이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聲과 色을 大하지 마라’, 곧 ‘목소리와 낯빛을 과장하지 마라’는 뜻이 된다. 이 말이 上帝가 文王에게 하는 조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毛亨의 설은 비루하고, 朱熹의 설은 毛亨 보다는 낫지만 다소 비루하기는 마찬가지 같다. 鄭玄은 ‘말을 과장해서 낯빛을 꾸미지 말라’라고 풀이했는데, 聲을 여전히 ‘소리’라고 해석하였으나, 다른 두 설 보다 훨씬 낫다. ▼ 毛亨은 不大聲見於色, ‘큰 소리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見/賢遍反, ‘見은 賢과 遍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不虛廣言語以外作容貌, ‘말을 과장해서 겉으로 낯빛을 꾸며 대지 마라’라고 하였는데, 셋 중 이 설이 제일 낫다. ▼ 朱熹는 以/猶與也, ‘以는 與와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 不長夏以革은 아마 ‘제후들을 이끌면서 서두르지 말라’는 말 같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이루어 나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不은 부정어다. 革을 한정한다. 長은 ‘이끌어 주다’는 말이다. 夏를 받는다. 夏는 諸夏로, ‘중국의 제후들’을 이른다. 以는 ‘~로써’, ‘~함으로써’다. 長夏를 받는다. 革은 용언으로, 아마 ‘서두르다’는 말 같다. 長은 生長이라는 말처럼 ‘기르다’, ‘자라다’는 말이니, 곧 ‘이끌어 주다’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이 시 앞 부분에 克長克君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敎誨不倦曰長, ‘교화하면서 게으르게 굴지 않는 것을 長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곧 ‘이끌어 주다’는 말이다. 夏가 諸夏라는 것은 鄭玄의 설이다. 革은 ‘서두르다’는 말이다. 이 때 革은 䩯의 가차자다. ‘극’이라고 읽고, 亟과 같다. 《禮記》 「檀弓 上」에 夫子之病革矣, ‘선생의 병이 革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革/急也, ‘革은 急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陸德明은 革/紀力反/竝又音極/注同, ‘革은 紀와 力의 반절로 읽는다. 極이라고 읽기도 한다. 주석에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물론 《禮記》에서 急은 ‘빠르다’ 보다는 ‘중하다’, ‘심하다’는 의미이겠으나, 急이 본래 ‘빠르다’는 말이므로, 革 역시 ‘빠르다’처럼 해석할 수 있겠다. 毛亨은 革을 更, ‘고치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원칙을 ‘고치지 않는다’처럼 풀이한 듯하다. 이 설 역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毛亨은 革/更也//不以長大有所更, ‘革은 고치다는 뜻이다. 長大하다고 생각하여 고치는 바가 있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원칙을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 鄭玄은 夏/諸夏也, ‘夏는 諸夏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諸夏란, 중국의 ‘제후들’을 이르는 표현이다. 鄭玄은 또, 不長諸夏以變更王法, ‘제후들을 이끌면서 王法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풀이하였다. ▼ 朱熹는 夏革/未詳, ‘夏와 革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 不識不知,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지불식 간에’라는 뜻이다. ‘인식하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다. 識은 ‘인식하다’는 말이고, 知는 ‘깨닫다’는 말이다. 鄭玄과 朱熹는 이 역시 上帝의 말에 포함된다고 보고, ‘不識不知하더라도’, 즉 上帝의 命인 줄 ‘깨닫지 못하더라도’처럼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면, 뒤에 왜 順帝之則처럼, 帝가 3인칭 형태로 표현될까. 不識不知/順帝之則이 上帝의 말이 아니라, 上帝의 말을 들은 뒤 文王이 그렇게 하였다는 현상을 기술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鄭玄과 朱熹의 설을 따르지 않았다. ▼ 주석을 참고할 때, 鄭玄은 不識古/不知今, ‘옛 일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금의 일도 깨닫지 못한다’처럼 해석하였다. 鄭玄처럼 본다면, 不識不知/順帝之則은 ‘옛 일도 모르고, 지금 일도 모르더라도, 帝之則을 順한다’라고 해석된다. 鄭玄은 不識不知/順帝之則까지 전부 上帝의 말로 보고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할 때, 朱熹는 不作聦明, ‘聦과 明을 사용하지 않고’처럼 해석하였다. 聦은 ‘귀가 밝다’는 뜻이고, 明은 ‘눈이 밝다’는 뜻이다. 그러면 不識不知/順帝之則은 지각을 사용하지 않고도 上帝의 則을 따른다는 말이 된다.
◈ 順은 용언으로, ‘좇다’, ‘따르다’는 말이다. 帝之則을 받는다.
◈ 帝之則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처럼 해석된다.
◈ 則은 체언으로, ‘원칙’을 이른다. ‘칙’이라고 읽는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則/法也, ‘則은 법도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則/法也, ‘則은 법도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天之言云/我謂人君有光明之德/而不虛廣言語以外作容貌/不長諸夏以變更王法者/其爲人不識古不知今/順天之法而行之者///此言天之道/尙誠實/貴性自然, ‘하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말하노니, 군주는 빛나는 德을 품고 있으면서, 과장된 말로 겉을 꾸미지 않아야 하고, 제후들을 이끌면서 王法을 바꾸지 않아야 하며, 옛 일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금의 일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하늘의 법도를 좇아서 실천해야 한다.” 이는 하늘의 도리를 설명한 말로, 이 말에서는 성실한 태도를 숭상하고, 타고난 성품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岐山 근처로 천도하자, 上帝가 갑자기 나와서 文王에게 내정과 외교에서 지켜야 할 원칙들을 신칙하고 있다.
帝謂文王、詢爾仇方、同爾兄弟、以爾鉤援、與爾臨衝、以伐崇墉。
帝가 [다시] 文王에게 謂하였다. “仇方과 詢하고, 兄弟와 同하며, 鉤援과 臨衝를 以하여서 崇의 墉을 伐하라.”
상제가 [다시] 문왕에게 말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와도 논의하고, 가까운 나라와도 힘을 합치며, 운제와 임차, 충차를 사용하여서, 숭나라의 성을 정벌하라.”
◈ 帝는 체언으로, ‘上帝’를 이른다.
◈ 謂는 용언으로, ‘말하다’, ‘이르다’는 말이다. 文王을 받는다.
◈ 文王은 周나라의 昌이다.
◈ 詢은 용언으로, ‘모의하다’, ‘의논하다’는 말이다. 爾仇方을 받는다. 《爾雅》 「釋詁」에 靖/惟/漠/圖/詢/度/咨/諏/究/如/慮/謨/猷/肇/基/訪/謀也, ‘靖, 惟, 漠, 圖, 詢, 度, 咨, 諏, 究, 如, 慮, 謨, 猷, 肇, 基, 訪은 의논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鄭玄은 詢/謀也, ‘詢은 의논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詢音荀, ‘詢은 荀이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 爾는 본래 2인칭 대명사이지만, 각 句에 다 나오는 것을 감안하면, 의미 없는 조사로 보는 편이 더 낫겠다. 2인칭 대명사로 본다면 文王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 仇方은 아마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仇는 ‘상대방’을 이른다. 方은 아마 邦의 가차자일 것이다. 《爾雅》 「釋詁」에 仇/讎/敵/妃/知/儀/匹也, ‘仇, 讎, 敵, 妃, 知, 儀는 상대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仇는 본래 ‘원수’를 이른다. 그래서 鄭玄도 仇를 怨耦, ‘고깝게 생각하는 짝이다’라고 풀이하였고, 朱熹는 아예 讎國, ‘원수의 나라’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上帝가 의논하라고 한 점을 생각하면, 사이가 좋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원수’라고까지 해석할 수 있겠나 생각된다. ▼ 毛亨은 仇/匹也, ‘仇는 상대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怨耦曰仇//仇方/謂旁國, ‘고깝게 생각하는 짝을 仇라고 한다. 仇方은 이웃 나라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웃 나라끼리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 朱熹는 仇方/讐國也, ‘仇方은 원수의 나라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同은 용언으로, ‘함께 하다’, ‘힘을 합치다’는 말이다. 爾兄弟를 받는다.
◈ 兄弟는 ‘친한 나라’, ‘가까운 나라’일 것이다. 仇方과 대구를 이룬다. ▼ 朱熹는 兄弟/與國也, ‘兄弟는 동맹국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以爾鉤援의 以는 아마 用과 같은 글자일 듯하다. 용언으로, ‘쓰다’, ‘사용하다’는 말이다. 鉤援과 臨衝을 받는다.
◈ 鉤援은 체언으로, ‘운제’, ‘공성 사다리’를 이른다. 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던 사다리다. 臨衝이 臨과 衝으로 나뉘어 풀이된다는 점을 볼 때, 鉤援 역시 鉤와 援 둘로 나누어 풀이해야 하지 않을까 의뭉스럽다. 그러나 鉤가 ‘운제’를 뜻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援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 내지 못했다. 한편, 《六韜》 「虎韜 軍略」에 視城中/則有雲梯飛樓, ‘성 안을 들여다 보는 데에는 雲梯와 飛樓가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雲梯는 공성 병기가 아니라 정찰 도구였을 것이다. 참고차 기재해 둔다. ▼ 毛亨은 鉤/鉤梯也/所以鉤引上城者, ‘鉤는 鉤梯다. 갈고리를 걸어서 성 위로 오르는 도구다’라고 하였다. 梯는 ‘사다리’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梯/他兮反, ‘梯는 他와 兮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鉤/古候反/又古侯反/鉤梯也//援音𡋡, ‘鉤는 古와 候의 반절로 읽는다. 古와 侯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 鉤梯라는 뜻이다. 援은 𡋡이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𡋡은 袁과 같다. ▼ 朱熹는 鉤援/鉤梯也//所以鉤引上城/所謂雲梯者也, ‘鉤援은 鉤梯다. 갈고리를 걸어서 성 위로 오르는 도구다. 雲梯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與는 ‘~와’다. 臨衝을 받는다.
◈ 臨은 체언으로, ‘臨車’를 이른다. 아마 성 안을 들여다 보기 위한 일종의 ‘망루’인 듯하다. 臨은 위에서 밑을 ‘내려다 본다’는 뜻이다. ▼ 毛亨은 臨/臨車也, ‘臨은 臨車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臨如字//韓詩作隆, ‘臨은 글자 그대로 읽는다. 《韓詩》에는 隆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隆은 ‘높다’는 말이다. ▼ 朱熹는 臨/臨車也//在上臨下者也, ‘臨은 臨車다. 위에 있으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도구다’라고 하였다.
◈ 衝은 체언으로, ‘衝車’를 이른다. 성벽에 붙어서, 성벽을 쳐서 무너뜨리는 도구다. ▼ 毛亨은 衝/衝車也, ‘衝은 衝車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衝/昌容反//衝/衝車也//說文作䡴//䡴/陷陣車也, ‘衝은 昌과 容의 반절로 읽는다. 衝은 衝車다. 《說文》에는 䡴이라고 되어 있는데, “䡴은 陣을 함락시키는 수레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說文解字》에는 䡴/陷敶車也라고 되어 있다. 敶은 陣과 같다. ▼ 朱熹는 衝/衝車也//從旁衝突者也//皆攻城之具也, ‘衝은 衝車다. 성 옆에서 충격을 가한다. 모두 성을 공격하는 도구들이다’라고 하였다.
◈ 以伐崇墉의 以는 ‘~함으로써’다. 詢爾仇方/同爾兄弟/以爾鉤援與爾臨衝을 모두 받는다.
◈ 伐은 용언으로, ‘정벌하다’, ‘치다’는 말이다. 崇墉을 받는다.
◈ 崇墉은 ‘崇나라의 성’이다. 崇은 나라 이름이다. 崇나라의 제후가 昌을 紂에게 참소하였었다. 墉은 ‘성’, ‘성벽’을 이른다. 《說文解字》 「土部」에 墉/城垣也, ‘墉은 성의 담을 이른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墉/城也, ‘墉은 성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墉音容/城也, ‘墉은 容이라고 발음한다. 성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崇/國名//在今京兆府鄠縣//墉/城也//史記/崇侯虎讒西伯於紂//紂囚西伯於羑里//西伯之臣/閎夭之徒/求美女奇物善馬以獻紂//紂乃赦西伯/賜之弓矢鈇鉞/得專征伐曰/譖西伯者崇侯虎也//西伯歸三年/伐崇侯虎/而作豐邑, ‘崇은 나라 이름이다. 지금의 京兆府 鄠縣에 있었다. 墉은 성이다. 《史記》에 이런 말이 있다. 崇侯 虎가 紂에게 西伯을 참소하니, 紂가 西伯을 羑里에 가두었다. 西伯의 신하인 閎夭 등이 미녀와 기이한 보물, 좋은 말을 紂에게 헌납하자, 紂는 西伯을 용서하고, 궁시와 부월을 주고는 마음대로 정벌하라고 하면서 “西伯을 참소한 자는 崇侯 虎다”라고 하였다. 西伯은 돌아오고 3년 뒤에 崇侯 虎를 정벌하고, 豐邑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史記》 「周本紀」에 나온다.
◈◈ 鄭玄은 諸侯爲暴亂大惡者/女當謀征討之/以和協女兄弟之國/率與之往//親親則萬志齊心一也//當此之時/崇侯虎倡紂爲無道/罪尤大也. ‘“제후 중에 못된 짓을 일삼는 놈이 있으니, 너는 마땅히 그 놈을 토벌할 일을 모의하되, 이로써 너의 형제국들과 화합하고, 앞장서서 이들과 함께 가야 할 것이다. 가까운 나라들과 가까이 지내면, 만국의 마음과 뜻이 하나로 모일 것이다.” 이 때 崇侯 虎가 紂를 무도한 길로 이끌었으므로, 그 죄가 더욱 컸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帝謂文王/予懷明德/不大聲以色/不長夏以革/不識不知/順帝之則/帝謂文王/詢爾仇方/同爾兄弟/以爾鉤援/與爾臨衝/以伐崇墉을 한 章으로 보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한 시문이다. 朱熹는 또, 言上帝眷念文王/而言其德之深微/不暴著其形迹//又能不作聰明/以循天理/故又命之以伐崇也//呂氏曰/此言文王德不形而功無迹/與天同體而已//雖興兵以伐崇/莫非順帝之則/而非我也, ‘이러한 뜻이다. 上帝가 文王에게 생각을 정리하게 하고, 文王의 德이 깊으니, 그 모습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눈과 귀를 사용하지 않고도 天理를 따른다고 하였다. 이에 다시 崇나라를 정벌하라고 명하였다. 呂氏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글에서는 文王의 德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공적은 자취도 없지만, 文王은 하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군대를 일으켜서 崇나라를 정벌하기야 하지만, 上帝의 則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文王 자신이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다. 呂氏는 아마 呂祖謙일 것이다.
◈◈ 亡亡案 : 文王이 崇나라를 침공한 일을 天命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臨衝閑閑、崇墉言言。執訊連連、攸馘安安。是類是禡、是致是附、四方以無侮。
臨과 衝이 閑閑하자, 崇의 墉은 言言하였다. 執訊은 連連하였고, 攸馘은 安安하였다. 類하고, 禡하여서, [신명에게] 致하고, [그 뜻에] 附하였으니, 四方이 以 [주나라를] 悔하지 않았도다.
임차와 충차가 느릿느릿 움직이자, 숭나라의 성은 위태로워졌다. 포로를 신문하는 일은 끊이지 않았고, 포로의 귀를 자르는 모습에는 위엄이 있었다. 유를 지내고, 마를 지내서, [신명에게] 치성을 드리고, [그 뜻에] 맞추었으니, 주변 나라들이 이에 [주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도다.
◈ 閑閑는 아마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毛亨은 ‘움직이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朱熹는 ‘느릿느릿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閑은 모두 ‘한가하다’는 말이므로, 글자의 의미만 보면 朱熹의 설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朱熹를 따랐다. ▼ 毛亨은 閑閑/動揺也, ‘閑閑은 움직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揺如字/一音羊照反, ‘揺는 글자 그대로 읽는다. 어떤 사람은 羊과 照의 반절로 읽는다고 했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閑閑/徐緩也, ‘閑閑은 느릿느릿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言言은 아마 ‘위태롭다’는 말일 듯하다. 鄭玄의 설을 따랐다. 毛亨과 朱熹는 ‘높고 큰 모습’이라고 보았다. ▼ 毛亨은 言言/高大也, ‘言言은 높고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言言/猶孽孽/將壞貌, ‘言言은 孽孽과 같다.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이 孽은 아마 蠥과 같은 글자로, ‘재앙’을 이를 듯하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孽/魚列反/又五葛反, ‘孽은 魚와 列의 반절로 읽는다. 五와 葛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言言/高大也, ‘言言은 높고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執訊은 ‘포로에 대한 신문’을 뜻한다. 執은 ‘붙잡힌 사람’으로, 곧 ‘포로’를 뜻한다. 訊은 ‘묻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포로에게 ‘캐묻다’, ‘따져 묻다’, 즉 ‘힐문하다’는 뜻이다. 아마 崇나라 내부 사정을 ‘묻다’는 말일 듯하다. 《國語》 「吳語」에 吳王還自伐齊/乃訊申胥, ‘吳王이 齊나라 정벌에서 돌아 와서 申胥에게 訊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韋昭는 訊/告讓也, ‘訊은 告讓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告讓은 ‘꾸짖다’는 뜻으로, 곧 ‘힐문하다’는 말이다. ▼ 鄭玄은 訊/言也, ‘訊은 言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言은 아마 ‘묻다’는 의미일 것이다. ▼ 陸德明은 訊音信/言也//字又作訙/又作誶/並同, ‘訊은 信이라고 발음한다. 言이라는 뜻이다. 이 글자는 訙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誶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발음은 모두 같다’라고 하였다. 訙과 誶 모두 ‘묻다’는 말이다.
◈ 連連은 아마 ‘계속 이어졌다’는 말일 듯하다. 朱熹의 설을 따랐다. ▼ 毛亨은 連連/徐也, ‘連連은 느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徐徐以禮爲之, ‘천천히 예법에 따라 하였다’처럼 풀이하였다. ▼ 朱熹는 連連/屬續狀, ‘連連은 잇달아 있는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 攸는 ‘~한 바’, ‘~한 것’이라는 말이다. 所와 같다. 馘을 받는다. 《爾雅》 「釋言」에 攸/所也, ‘攸는 所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毛亨은 攸/所也, ‘攸는 所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馘은 용언으로, ‘포로의 왼쪽 귀를 자른다’는 말이다. 聝와 같다. 《說文解字》 「耳部」에 聝/軍戰斷耳也, ‘聝은 전쟁에서 귀를 자르는 일을 이른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 고대의 관습이었던 것 같다. 《周禮》 「夏官司馬」에 大獸公之/小禽私之/獲者取左耳, ‘큰 짐승은 함께 하고, 작은 짐승은 각자 가지는데, 獲者는 왼쪽 귀를 가진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 이 말도 같은 관습상의 행위였을 것이다. ▼ 毛亨은 馘/獲也//不服者/殺而獻其左耳曰馘, ‘馘은 포로라는 말이다. 복종하지 않는 자는 죽여서 왼쪽 귀를 바치는데, 이를 馘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馘/古獲反/獲也//字又作聝/殺而獻其耳也//字林/截耳則作耳傍/獻首則作首傍, ‘馘은 古와 獲의 반절로 읽는다. 포로라는 뜻이다. 이 글자는 聝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聝은 죽여서 그 귀를 헌상한다는 뜻이다. 《字林》에는 “귀를 자르니 耳를 글자 옆에 붙이고, 머리를 바치니 首를 글자 옆에 붙인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귀를 잘라 바친다’는 말인데, 《字林》에는 왜 머리를 바친다는 말이 들어 있을까. ▼ 朱熹는 馘/割耳也//軍法/獲者不服/則殺而獻其左耳, ‘馘은 귀를 자른다는 말이다. 군법에서는 포로로 잡힌 자가 복종하지 않으면 죽여서 그 왼쪽 귀를 바친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또, 音虢, ‘虢으로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 安安은 혹시 ‘위엄 있는 모습’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의뭉스럽다. 나는 按按이라고 보았다. 按은 ‘누르다’는 말이니, 곧 ‘위압하다’는 뜻이고, 그러면 ‘위엄이 있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다. 朱熹는 ‘가볍거나 난폭하게 대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鄭玄은 ‘천천히 예법에 따라 한다’처럼 풀이했는데, 포로의 귀를 자르는 짓이 어떻게 한가롭거나 난폭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두 설 모두 따르지 않았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徐徐以禮爲之, ‘천천히 예법에 따라 하였다’처럼 풀이하였다. ▼ 朱熹는 安安/不輕暴也, ‘安安은 가볍거나 난폭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是는 아마 의미 없는 조사 같다. 운율을 맞추기 위해 넣은 듯하다. 是類是禡/是致是附의 是들이 모두 그렇다. 《詩》 「國風 周南」의 「葛覃」에 是刈是濩, ‘刈하고 濩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글의 是가 이 글의 是와 용법이 같다.
◈ 類와 禡는 모두 제사의 이름이다. 類는 하늘의 上帝나 天神 같은 신명에 올리는 제사고, 禡는 군대가 정벌하러 간 곳의 땅에다, 종군한 병사들을 위해 지내는 제사다. 類는 禷와 같은 글자다. 아마 禷가 본래 글자이고, 類는 가차자일 것이다. 단서들이 조금씩 존재한다. 《說文解字》 「示部」에 禡/師行所止/恐有慢其神/下而祀之曰禡, ‘禡는 이렇다. 군대가 행군하다가 멈춘 곳에서, 신명을 업신여긴 일이 있을까 걱정하여 말에서 내려 제사를 지내니, 이에 禡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또 같은 편에 禷/以事類祭天神, ‘禷는 類祭를 지내서 天神을 섬기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爾雅》 「釋天」에는 是禷是禡/師祭也, ‘是禷와 是禡는 군대가 지는 제사다’라는 말이 있는데, 郭璞은 師出征伐/類于上帝/禡於所征之地, ‘군대가 정벌하러 나섰을 때, 上帝에게 類를 지내고, 정벌할 곳의 땅에 禡를 지낸다’라고 하였다. 《禮記》 「王制」에는 天子將出/類乎上帝/宜乎社/造乎禰, ‘天子가 외출하려 할 때는 上帝에게 類를 지내고, 社에 宜를 지내며, 禰에 造를 지낸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類宜造/皆祭名/其禮亡, ‘類, 宜, 造는 모두 제사의 이름인데, 그에 대한 예법은 망실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같은 편에, 天子將出征/類乎上帝/宜乎社/造乎禰/禡於所征之地, ‘天子가 출정하려 할 때는, 上帝에게 類를 지내고, 社에 宜를 지내며, 禰에 造를 지내고, 정벌할 곳의 땅에다가 禡를 지낸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禡/師祭也/爲兵禱/其禮亦亡, ‘禡는 군대에서 지내는 제사다. 병사들을 위해 빈다. 그에 대한 예법 역시 망실되었다’라고 하였다. ▼ 毛亨은 於內曰類/於野曰禡, ‘안에서 지내는 것을 類라고 하고, 들에서 지내는 것을 禡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類也/禡也/師祭也, ‘類와 禡는 군대에서 지내는 제사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類如字/本或依說文作禷//禡/馬嫁反/師祭名, ‘類는 글자 그대로 읽는다. 판본에 따라, 《說文》에 의거하여 禷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禡는 馬와 嫁의 반절로 읽는다. 군대가 지내는 제사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 朱熹는 類/將出師祭上帝也//禡/至所征之地/而祭始造軍法者/謂黃帝及蚩尤也, ‘類는 군대를 출정시키려 할 때 上帝에게 올리는 제사다. 禡는 정벌할 곳에 도착했을 때, 처음 軍法을 만든 사람에게 지내는 제사이니, 그 사람이란 黃帝와 蚩尤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致와 附는 모두 神明에게 ‘치성을 드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是類是禡/是致是附에서 是는 의미가 없다. 의미 있는 글자는 類와 禡, 그리고 致와 附 뿐이다. 類와 禡는 모두 제사였다. 그러면 致와 附는 무슨 뜻일까. 是類是禡는 앞의 일이고, 是致是附는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 是致是附는 是類是禡의 결과로 따라 오는 일이거나, 是類是禡를 통해 기대하는 효과를 의미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類와 禡는 상술하였듯 제사인데, 제사를 통해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神明에게 福을 받고, 禍를 피하도록 빌기 위해 제사를 지낸다. 따라서 致와 附는 神明에게 ‘치성을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毛亨이 타탕하다. 朱熹는 致는 그렇게 해석하였으나, 附의 경우 다른 나라들이 周나라에게 ‘부합한다’, ‘복종한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是類是禡/是致是附의 구조를 보면, 대칭적으로 대구를 이루고 있으니, 類, 禡, 致를 모두 神明에 관계하여 풀이하면서, 附만 따로 떼서 제후국에 대한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다. 朱熹의 설은 틀렸다. ▼ 毛亨은 致/致其社稷羣神//附/附其先祖/爲之立後/尊其尊而親其親, ‘致는 사직과 신명들에게 극진하게 한다는 뜻이다. 附는 선조에 맞춘다는 뜻이니, 선조를 위해 후계를 세운다는 말이다. 존귀한 자는 높이고, 가까운 자는 가까이 대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羣神/本或作羣臣, ‘羣神은 판본에 따라 羣臣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羣臣는 ‘신하들’이다. ▼ 朱熹는 致/致其至也//附/使之來附也, ‘致는 지극한 도리를 다한다는 뜻이다. 附는 상대가 와서 복종하게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四方은 周나라 ‘주변 나라들’을 이른다.
◈ 以는 아마 是以처럼, ‘이에’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四方以無侮는 ‘四方이 이에 無侮하였다’는 말이 된다.
◈ 無侮는 周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깔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無는 不과 같은 부정어다. 용언으로, ‘없다’처럼 해석해도 괜찮다. 侮는 용언으로, ‘업신여기다’, ‘깔보다’는 말이다. 無를 용언으로 본다면, 侮는 체언으로, ‘업신여기는 일’, ‘깔보는 일’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 鄭玄은 無侮者/文王伐崇/而無復敢侮慢周者, ‘無侮라는 것은, 文王이 崇나라를 정벌하자, 감히 또 周나라를 업신여기는 놈들이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執所生得者而言問之/及獻所馘/皆徐徐以禮爲之/不尙促速也, ‘살아 남은 자를 붙잡아서 신문하거나, 잘라 낸 귀를 바치는 데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천히 예법에 따라 하였으니, 서두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言問이란, ‘신문하다’는 말로, 곧 ‘캐묻다’는 뜻이다.
◈◈ 亡亡案 : 周나라가 崇나라를 공격해 궁지에 밀어 넣고 神明에게 제사를 지내자, 주변 나라들이 周나라를 깔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臨衝茀茀、崇墉仡仡。是伐是肆、是絶是忽。四方以無拂。
臨과 衝이 茀茀하자, 崇의 墉은 仡仡하였다. [숭나라 병사들을] 伐하고, 肆하자, [숭나라의 동맹은] 絶하였고, [숭나라를 편드는 나라들이] 忽하니, 四方이 以 [주나라를] 拂하지 않았도다.
임차과 충차가 거세게 밀어 붙이자, 숭나라의 성은 전전긍긍하였다. [숭나라 병사들을] 찌르고, 시체를 흩어 놓자, [숭나라의 동맹은] 끊어졌고, [숭나라를 편드는 나라들이] 사라졌으니, 주변 나라들이 이에 [주나라를] 거스르지 않았도다.
◈ 茀茀은 기세가 ‘강성한 모습’을 이를 것이다. 《說文解字》 「艸部」에 茀/道多艸/不可行, ‘茀은 길에 풀이 많아서, 다닐 수가 없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茀은 풀의 기세가 ‘강성하다’는 뜻이다. 그 의미에 기인해서 사용하였을 것이다. ▼ 毛亨은 茀茀/彊盛也, ‘茀茀은 강성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茀音弗/強盛, ‘茀은 弗이라고 발음한다. 강성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茀茀/强盛貌, ‘茀茀은 강성한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 仡仡은 忔忔로 보아야 하겠다. 아마 ‘행동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모습’, 혹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이르는 듯하다. 《史記》 「扁鵲倉公列傳」에 數忔食飲, ‘여러 차례 음식을 忔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司馬貞은 忔音疑乙反//忔者/風痺忔然不得動也, ‘忔은 疑와 乙의 반절로 읽는다. 忔이란, 마비 때문에 忔然하게 움직이지 못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즉, 忔은 ‘굳어서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다. 崇墉仡仡이라 하였으니, 周나라가 공성하는 중에, 崇나라는 압도되어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毛亨과 朱熹는 ‘굳건한 모습’처럼 풀이하였는데, 周나라가 공성하는 중에 적인 崇나라의 성이 ‘굳건했다’면, 이 시의 주제와 합치되는가. 오히려 모순된다. ▼ 毛亨은 仡仡/猶言言也, ‘仡仡은 言言과 같다’라고 하였다. 앞에서 毛亨은 言言을 高大, ‘높고 크다’라고 풀이하였었다. ▼ 陸德明은 仡/魚乙反//韓詩云/揺也//說文作扢, ‘仡은 魚와 乙의 반절로 읽는다. 《韓詩》에서는 흔들린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說文》에는 扢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說文解字》에는 扢이 없고, 오히려 仡이 기재되어 있다. 摇는 搖와 같다. ▼ 朱熹는 仡仡/堅壯貌, ‘仡仡은 굳건한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 是는 의미 없는 조사일 것이다. 是伐是肆/是絶是忽의 是들이 모두 그렇다.
◈ 是伐是肆/是絶是忽의 경우, 앞에서 是類是禡/是致是附를 풀이하였듯, 是伐是肆와 是絶是忽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고 보고 풀이해야 할 것이다. 是는 모두 의미 없는 글자이므로, 의미가 있는 글자는 伐과 肆, 絶과 忽 뿐이다. 伐과 肆는 모두 ‘공격하다’는 의미이므로, 아마 周나라가 崇나라를 ‘공격하는 행위’라고 보고 풀이해야 할 것이다. 絶과 忽은 모두 ‘없어지다’는 의미인데, 伐과 肆, 즉 周나라의 공격에 대해 따라 오는 결과이므로, 아마 崇나라 편을 드는 제후들이 ‘사라졌다’는 의미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 伐은 용언으로, 무기로 ‘치고 찌른다’는 말일 것이다. 《書》 「周書 牧誓」에 不愆于四伐五伐六伐七伐/乃止齊焉, ‘4伐, 5伐, 6伐, 7伐을 넘지 말고 멈춰서 가다듬어라’라는 말이 있는데, 孔安國은 伐/謂擊剌, ‘伐은 치고 찌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伐/謂擊刺之, ‘伐은 치고 찌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刺/七亦反, ‘刺은 七과 亦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肆는 용언으로, ‘시체를 늘어 놓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禮記》 「月令」에 毋肆掠, ‘肆하거나 掠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肆謂死刑暴尸也, ‘肆는 사형을 내린 뒤, 시체를 난폭하게 다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周禮》 「秋官司寇」에 凡殺人者/踣諸市/肆之三日, ‘사람을 죽인 놈들은 저자에 효수하여, 사흘 동안 肆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肆/猶申也/陳也, ‘肆는 申과 같다. 陳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陳은 시체를 ‘늘어 놓는다’는 뜻이다. 伐을 무기로 ‘치거나 찌르다’처럼 해석했으니, 肆도 그런 행위에 준하여 풀이하여야 한다. 毛亨과 鄭玄은 아마 ‘신속하게 치고 빠진다’는 의미로 풀이한 듯한데, 이는 전술적인 기동술이므로, 伐의 의미와 대구를 이루지 못한다. 朱熹는 ‘멋대로 내버려 두다’처럼 해석하였는데, 이 역시 伐과 대구를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따르지 않았다. ▼ 毛亨은 肆/疾也, ‘肆는 빠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肆/犯突也//春秋傳曰/使勇而無剛者肆之, ‘肆는 공격하는 것이 신속하다는 뜻이다. 《春秋傳》에 “용맹하되 굳세지 않은 자를 보내 肆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春秋傳》은 《春秋左氏傳》으로, 아마 「文公」 12년을 이르는 듯하다. 「文公」 12년에 若使輕者肆焉/其可, ‘만약 輕者를 보내 肆하면 아마 괜찮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杜預는 肆/暫往而退也, ‘肆는 잠시 갔다가 물러 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아마 이 말을 이르는 듯하다. ▼ 陸德明은 肆音四//毛云/疾也//鄭云/犯突也, ‘肆는 四라고 발음한다. 毛亨은 疾이라고 풀이하였고, 鄭玄은 犯突이라고 풀이하였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肆/縱兵也, ‘肆는 병사들을 내버려 두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아마 특별한 방침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둔다는 의미로 풀이한 듯하다.
◈ 絶은 용언으로, 아마 ‘끊기다’는 말일 것이다. 崇나라의 동맹이 ‘끊겼다’처럼 보고 번역하였다.
◈ 忽은 용언으로, ‘사라지다’는 말이다. 崇나라를 편드는 나라들이 ‘사라졌다’처럼 보고 번역하였다. 《爾雅》 「釋詁」에 觳/悉/卒/泯/忽/滅/罄/空/畢/罊/殲/拔/殄/盡也, ‘觳, 悉, 卒, 泯, 忽, 滅, 罄, 空, 畢, 罊, 殲, 拔, 殄은 盡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盡은 盡滅처럼 ‘사라지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毛亨과 朱熹의 설도 모두 滅로 풀이하였다. 다만, 朱熹는 周나라에 복종하지 않는 나라를 ‘멸망시키다’처럼 해설하였다. 毛亨의 경우엔 다른 말이 없어서 그 의도를 알 수 없다. ▼ 毛亨은 忽/滅也, ‘忽은 滅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 역시 忽/滅, ‘忽은 滅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四方은 ‘주변 나라들’을 이른다.
◈ 以는 아마 是以처럼, ‘이에’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四方以無拂는 ‘四方이 이에 無拂하였다’는 말이 된다.
◈ 無拂은 周나라를 ‘거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無는 不과 같은 부정어다. 용언으로 보고, ‘없다’라고 할 수도 있다. 拂은 용언으로, ‘어기다’, ‘거스르다’는 말이다. 無를 용언으로 본다면, 拂은 체언으로, ‘어기는 일’, ‘거스르는 일’처럼 해석해야 한다. ▼ 鄭玄은 拂/猶佹也//言無復佹戾文王者, ‘拂은 佹와 같다. 文王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놈이 다시는 없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佹/九委反/戾也//復/扶又反, ‘佹는 九와 委의 반절로 읽는다. 戾라는 뜻이다. 復는 扶와 又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戾는 ‘패악질을 부리다’는 뜻이다. ▼ 陸德明은 拂/符弗反//鄭/佹也//王/違也, ‘拂은 符와 弗의 반절로 읽는다. 鄭玄은 패악질을 부린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다. 王肅은 거스르다는 뜻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拂/戾也//春秋傳曰/文王伐崇/三旬不降//退修敎而復伐之/因壘而降, ‘拂은 패악질을 부린다는 뜻이다. 《春秋傳》에 “文王이 崇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세 旬 동안이나 항복하지 않았다. 물러났다가 敎를 정비하고 다시 정벌하였는데, 보루 때문에 항복하였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春秋傳》은 《春秋左氏傳》으로, 이 말은 「僖公」 19년에 나온다. 「僖公」 19년에는 文王聞崇德亂而伐之/軍三旬而不降/退脩敎而復伐之/因壘而降, ‘文王이 崇나라의 德이 어지럽다는 말을 듣고, 崇나라를 정벌했는데, 세 旬 동안 공격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물러나서 敎를 정비하고 다시 공격하였는데, 보루 때문에 항복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 朱熹는 臨衝閑閑/崇墉言言/執訊連連/攸馘安安/是類是禡/是致是附/四方以無侮/臨衝茀茀/崇墉仡仡/是伐是肆/是絶是忽/四方以無拂을 한 章으로 보았고, 賦也, ‘賦다’라고 하였다. 賦는 사실을 나열하는 시문이다. 朱熹는 또, 言文王伐崇之初/緩攻徐戰/告祀群神/以致附來者/而四方無不畏服//及終不服/則縱兵以滅之/而四方無不順從也//夫始攻之緩/戰之徐也/非力不足也/非示之弱也/將以致附而全之也//及其終不下/而肆之也/則天誅不可以留/而罪人不可以不得故也//此所謂文王之師也, ‘이런 뜻이다. 文王이 崇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때는 천천히 공격하면서, 신명들에 제사를 지내, 복종해 오는 자를 극진하게 대우했으니, 온사방에서 周나라를 두려워하며 복종해 오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끝까지 복종하지 않는 경우에는 병사들을 풀어서 멸망시켰으니, 온사방 국가들이 周나라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처음 공격할 때 느릿느릿하게 하였던 까닭은, 周나라에 힘이 부족하였거나 약하게 보이려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 귀부하게 하여서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끝까지 복종하지 않는 경우엔, 군대를 풀어 마음대로 하게 하였는데, 이는 하늘의 처벌은 멈춰질 수가 없고, 죄인은 자기 잘못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로다. 이것이 文王의 군대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亡亡案 : 周나라가 崇나라를 공격해 궁지에 밀어 넣고 崇나라의 병사들을 도륙하며 위엄을 보이자, 주변 나라들이 周나라를 거스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 《毛詩正義》에서는 「皇矣」의 편제에 대해, 皇矣八章/章十二句, ‘「皇矣」는 여덟 章이다. 章마다 열 두 句다’라고 하였다.
◈◈ 《詩經集傳》에서는 「皇矣」의 편제에 대해, 皇矣八章/章十二句, ‘「皇矣」는 여덟 章이다. 章마다 열 두 句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또 「皇矣」의 내용에 대해, 一章二章言天命大王/三章四章言天命王季/五章六章言天命文王伐密/七章八章言天命文王伐崇, ‘1, 2章에는 하늘이 大王에게 命을 내렸다는 점이, 3, 4章에는 하늘이 王季에게 命을 내렸다는 점이, 5, 6章에는 하늘이 文王에게 命을 내려서 密나라를 伐하였던 일이, 7, 8章에는 文王에게 命을 내려서 崇나라를 伐하였던 일이 기재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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