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왕대 민란의 뿌리는 언제일까(삼국사기 진성왕본기 중)

2020. 5. 11. 17:37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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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신라는 통일한 이후, 외부로는 큰 전쟁 없이 무난하게 멸망까지 이어졌습니다. 적어도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대로면 그렇습니다. 통일 이후에도 간혹 전쟁 기록이 확인되긴 합니다. 성덕왕 때인 731년에 왜놈들이 공격해 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성덕왕 때인 733년에 발해를 공격했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들은 단발적으로 그쳤고, 그 전과 등도 불분명합니다. 현종 이후로 다시 신라와 가깝게 지낸 동맹인 탁발부는 907년에 망할 때까지 중국의 지배 세력으로 존속했습니다. 발해 역시 926년에 망할 때까지 신라와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한편 왜놈들도 신라와 크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왜놈들은 백제 멸망 시기 한반도의 전란에 말려 들어 크게 데였던 적이 있었는데, 통일 당시에는 신라나 탁발부의 침입을 두려워했고, 상황이 안정된 이후에도 발해와 함께 신라를 공격할 계획도 있었던 것 같으나 실제로 전면전을 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신라는 자체적으로 황해도를 점령하고, 평안도로도 북진해 갔다는 정황 증거가 있긴 하나, 그것이 다른 나라들과의 분쟁으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외부적인 사정이 이처럼 안정된 것도 운이라면 운이겠습니다.

 

 

 

하지만 내부는 외부처럼 아주 평화롭지는 않았습니다. 내부에서는 지속적으로 반란이 터졌거든요. 탁발부에서는 주로 국경 지역을 방어하라고 보낸 절도사들이 문제를 일으켰죠? 이에 비해 신라에서는 왕족 또는 귀좇들이 수도에서 반란을 지속적으로 일으켰습니다.

 

예를 들어 통일 직후인 신문왕 시기에도 큰 반란이 두 번이나 터집니다. 하나는 김흠돌의 난(681)입니다. 김흠돌의 난이 신문왕의 기획인지, 아님 진짜 반란이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어쨌거나 신문왕은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무열왕, 문무왕 때의 공신들을 어느 정도 박살내고 치세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보덕국의 고구려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대문의 난(684) 또는 복실의 난이라고 합니다. 신문왕은 이 반란도 쉽게 진압해 버립니다.

 

신문왕 시기 이 두 반란은 그래도 기록에 몇 줄 이상 남았습니다. 규모가 컸거나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이죠. 반대로 기록에 한 줄도 남지 못한 반란도 수두룩합니다. 효소왕 때는 이찬이었던 경영이란 놈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700) 하지만 이 반란은 전후 사정도, 뭣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반란들을 700년부터 삼국사기에 보이는 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영의 난(700, 효소왕, 이찬)

영종의 난(740, 효성왕, 파진찬) - 딸의 대우에 대한 불만

대공, 대렴의 난(768, 혜공왕, 각간) - 96각간의 난, 전국적인 내전?

김융의 난(770, 혜공왕, 대아찬)

김은거의 난(775, 혜공왕, 이찬)

염상과 정문의 난(775, 혜공왕, 이찬, 시중)

김지정의 난(780, 혜공왕, 이찬) - 반란 중 혜공왕, 와이프 시해

제공의 난(791, 원성왕, 이찬)

언승, 제옹의 난(809, 애장왕, 왕의 숙부) - 조카 잡아 죽이고 헌덕왕 즉위

서부 민란(815, 헌덕왕) - 기근 때문에 서부에서 민란

초적 봉기(819, 헌덕왕)

김헌창의 난(822, 헌덕왕, 웅천주 도독)

김범문의 난(825, 헌덕왕, 김헌창 아들)

김명, 이홍의 난(838, 희강왕, 상대등, 시중) - 희강왕 죽고 민애왕 즉위

김우징의 난(838, 민애왕, 왕의 육촌) - 민애왕 죽고 신무왕 즉위

홍필의 난(841, 문성왕, 일길찬) - 섬으로 도주

장보고의 난(846, 문성왕, 청해진 대사) - 문성왕이 염치가 없음

양순, 흥종의 난(847, 문성왕, 이찬, 파진찬)

김식, 대흔의 난(849, 문성왕, 이찬, 이찬)

윤흥의 난(866, 경문왕, 이찬) - 동생들인 숙흥, 계흥도 가담

김예, 김현의 난(868, 경문왕, 이찬)

근종의 난(874, 경문왕, 이찬) - 대궐로 병력이 처들어 옴

신홍의 난(879, 헌강왕, 일길찬)

김요의 난(887, 정강왕, 이찬) - 한주의 이찬

원종과 애노의 난(889, 진성왕) - 조세 독촉 때문에 사벌주에서 반란

 

이상이 삼국사기 중 적어도 본기에는 기록돼 있는 반란들입니다. 원성왕 가족들의 왕위 쟁탈전 중, 왕이 죽은 뒤 자기들끼리 싸운 건 뺐습니다. 그래도 25번이나 됩니다. 그 중 민란이 3번입니다. 장보고는 김씨도 아니고, 경주 내부 세력도 아니기 때문에 분리해 둡시다. 그럼 21번입니다. 887년의 김요의 난은 한주에서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에 경주 중앙 반란이 아닙니다. 이를 빼면 수도에서 또는 수도로 진격한 반란이 20번이나 됩니다. 또 세밀하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으나, 신라의 17관등 중 5번째 관등인 대아찬까지는 성스러운 뼈다구, 진정한 뼈다구만 될 수 있답니다. 그럼 반대로 6번째인 아찬, 7번째인 일길찬은 김씨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일길찬이 일으킨 반란이 두 번 있습니다. 빼면 18번입니다. 김헌창, 김범문 부자는 모두 왕족이지만, 각각 웅천주와 한산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빼면 16번입니다. 이 16번의 반란들은 전부 왕족에 해당하는 김씨들이 수도에서, 혹은 수도로 진격하여 일으킨 반란이라는 말입니다.

 

이 반란들 중 대부분은 기록이 거의 안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반란의 규모가 어디까지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대공, 대렴의 난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데, 유사 기록을 따르면 전국이 다 니 편, 내 편 들면서 치고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삼국사기에는 대공, 대렴의 난이 전국적이라고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위에 열거된 반란들 중 어느 것이 전국 범위로 확장되었는지, 혹은 단기간에 해결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은 쉽게 진압해서 잡아 죽였다고 하지만, 대공, 대렴의 난도 그런 식으로 기술돼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네요. 700년부터 900년까지, 200년이라고 생각을 하면, 적어도 11년에 한 번씩은 왕족 또는 귀좇 반란이 터진 셈입니다. 그 중 두 번 이상은 전국적인 규모로 내전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민란은 단 세 번밖에 안 터졌다고 합니다. 헌덕왕 즉위 직후, 조카를 잡아 죽인 것에 대해 벌을 받는 건지 나라 서부에 기근이 크게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신라 사람들이 절강까지 가서 레이드를 뛰었다고 하는데, 민란이 815년, 819년에 두 번밖에 안 터졌다고 하니, 신라 사람들은 과연 군자인가 봅니다. 다른 민란은 889년의 원종과 애노의 난입니다. 세수가 없어서 세금을 독촉하다가 사벌주에서 반란이 터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아주 미심쩍습니다. 당장 궁예 열전만 보더라도, 기훤, 양길 같은 '독립 세력'들이 보이거든요. 늘 느끼지만, 삼국사기에는 적혀 있는 것 보다 적혀 있지 않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제가 이 글에서 관심이 있는 건 진성왕 때의 반란들입니다. 쿠데타로 신무왕이 즉위하면서, 원성왕 이후 그 후손들의 왕위 쟁탈전은 일단락됩니다. 본기 기록상, 왕위 계승도 아주 무난합니다. 꼭 아빠에서 아들로 이어지진 않았지만요. 신무왕 이후로 문성왕(19), 헌안왕(5), 경문왕(15), 헌강왕(12), 정강왕(2), 진성왕(11)이 차례로 계승합니다. 적어도 정강앙까지의 치세는 나름 평안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헌강왕본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閒,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甞聞之如此.” 因奏曰, “上即位以來, 隂陽和, 風雨順, 歳有年, 民足食, 邉境謐静, 市井歡娱, 此聖徳之所致也.” 王欣然曰, “此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徳焉.”(헌강왕, 880)

 

七年, 春三月, 燕羣臣於臨海殿. 酒酣, 上皷琴, 左右各進歌詞, 極歡而罷.(헌강왕, 881)

 

 

 

 

앞의 기록에서는 경주 사람들이 아주 행복하게 살았는데, 초가집은 없고 전부 기와집이며, 뗄나무를 안 쓰고 숯을 밥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뒤의 기록에서는 헌강왕과 신하들이 임해전에서 술 먹고, 춤 추고, 금 타면서 놀았다는 말입니다. 태평성대죠? 이것이 880~881년의 경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진성왕 3년인 889년, 즉 헌강왕대의 태평성대에서 고작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三年國内諸州郡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所在盗賊蜂起. 於是, 元宗·哀奴等, 㩀沙伐州叛. 王命奈麻令竒捕捉, 令竒望賊壘, 畏不能進. 村主祐連力戰死之. 王下勑, 斬令竒, 祐連子年十餘歳, 嗣爲村主.(진성왕, 889)

 

 

나라에 세금이 모자라 창고가 텅 비어서 사람을 보내 독촉했더니, 그것 때문에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진성왕은 나마 영기를 보내 진압하게 했는데, 이것도 실패해 버립니다. 822년에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김헌창의 난이 거의 전국적인 규모였음에도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압했었는데, 이것하고는 상반되죠? 원종과 애노가 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본기에 나오지 않는데, 결국 진압됐거나 다른 촟적들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작 10년입니다. 우리나라도 고작 10여 년 만에 나라가 망할 뻔 했지만, 이것은 지도자가 무축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근친상간을 일삼은 신라라고 하더라도 고작 10년 동안 하늘에서 바닥으로 대들보가 무너졌을까요? 그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멀쩡한 집이 무너지려면 기둥이나 대들보가 오랜 세월 동안 착실히 썩어야 하는 것처럼, 신라의 부패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되어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썩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였을까요?

 

 

 

 

일단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헌강왕, 정강왕까지의 정치는 무난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의 태평성대 기사도 헌강왕 때죠. 그러다 갑자기 진성여왕이 '음란'하게 놀기 시작하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常入内用事. 仍命與大矩和尚, 修集郷歌, 謂之三代目云. 魏弘卒, 追謚爲惠成大王. 此後, 潛引少年羙丈夫兩三人, 滛亂, 仍授其人以要職, 委以國政. 由是, 侫倖肆志, 貨賂公行, 賞罰不公, 紀綱壊弛. 時有無名子, 欺謗時政, 構辝榜於朝路. 王命人搜索, 不能得. 或告王曰, “此必文人不得志者所爲. 殆是大耶州隠者巨仁耶.” 王命拘巨仁京獄, 將刑之. 巨仁憤㤪, 書於獄壁曰,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其夕忽雲霧震雷雨雹. 王懼出巨仁放歸.(진성왕, 888)

 

 

 

 

진성왕은 위홍이라는 각간과 음란하게 놀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으로 추존합니다. 말이 좀 맞지 않죠? 진성왕은 여왕이었으니, 아마 위홍은 정식으로 결혼한 남편은 아니었더라도, 남편에 준하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죽은 뒤에 왕으로까지 추존하는 거죠. 위홍이 죽은 뒤로는 미소년들을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는 정치를 위임했다고 하는데, 사실 왕 한 사람이 이렇게 한다고 나라가 바로 무너지겠어요?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할 시대도 아니고, 후대 만큼 관료화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의사 결정은 관료들을 통해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저는 회의적입니다. 진성왕은 여왕이고, 본격적으로 반란이 터지기 시작한 시발점이며, 신라가 무너길 시기의 대표적인 왕이기 때문에 그 책임을 다 떠맡게 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진성왕이 음란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의 붕괴가 진성왕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채호도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고구려의 모본왕에 대해 말할 때, 모본왕이 아무리 포악하게 굴었기로니, 그것은 주변 귀좇들에게 그런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백성에게 학정을 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거든요. 따라서 명림답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백성의 뜻이 아니라 그냥 귀좇들의 뜻이었을 것이라고요.

 

게다가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진성왕본기에는 진성왕의 음란함 때문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금이 부족해 경사의 창고가 비었고, 이 때문에 세금을 독촉하여 반란이 터진 것이라고요. 이 문제는 오래 누적되어 온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가까이 본다면 경문왕이나 헌강왕 시기의 일일 수 있고, 멀리 본다면 원성왕 후손들의 내분 때문일 수도 있죠. 세금이 제대로 안 걷힌다는 것은, 중앙과 타 지역 사이의 연결망이 끊어졌거나, 지역 통치가 와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패강진, 청해진 등을 얘기할 때 항상 말씀드렸던 해적들 때문에 그랬을 수도, 혹은 왕위 다툼 때문에 지역이 점차 중앙과 따로 놀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헌강왕 시기의 기와집 기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쉽게 생각하면 구라일 수 있습니다.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생각하면 되는 거죠. 그럼 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삼국 성립 당시의 초기 기록들도 믿는다고 가정하고 설명 방법을 찾은 것처럼, 헌강왕 기사도 참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 기사는 경주와 경주 외 지역의 유리가 아주 심각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라는 수백 년이 넘은 나라고, 수백 년 동안 아주 공고하게 김씨들이 지배해 온 나라입니다. 게다가 무열왕, 문무왕 때는 경쟁 국가들을 없애 버리고, 탁발부마저 축출해 버려 대동강 남쪽의 유일한 문명 세력이 됩니다. 중앙으로 물자가 모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그 외 지역이 상대적으로 정치에서 소외되는 것도 자명한 현상입니다. 21세기에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죠? 그래서 수백 년의 시간 동안 경주는 귀좇들이나 관료들만을 위한 도시가 어쩌면 되어 버렸고, 나머지 지역은 소외당한 채 그 피로나 불만이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되어 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이 고고학적으로 얼마나 증명되는지, 혹은 반증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전성기에 경주 인구가 178936호에 아주 큰 집이 35개라고 했으니, 이를 감안해서 생각해야겠습니다. 지금 제 글과는 별개로, 경주 인구가 최대 얼마였느냐 하는 것은 이견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추측입니다. 언젠가 누가 확인하겠죠.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죠. 신라 하대에서 지역 통치가 붕괴되는 것은 언제쯤일까요? 전제는 삼국사기 기록만을 취신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료를 찾아 볼 능력도 제겐 없고요. 지역 통치가 붕괴된다는 것을 보려면 물론 그 지역의 기록을 찾아 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대의 지역 기록이 없어요. 왜놈들은 풍토기라는 책들이 남아 있어, 왜곡돼 있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그 지역 역사를 추론해 볼 만한 단서로 쓸 수 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에는 풍토기 같은 게 없고, 삼국사기도 대부분이 경주 중심 기록입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경주 내외부에서 반란이 터졌다는 기록의 빈도를 두고 그 때의 정치 안정성이 어땠는지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귀족 반란이 아주 많으면 정치가 불안정하다는 거니까 아마 지역 통치 상황이 나빠졌을 것이고, 이에 민란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정확성은 비교적 떨어지겠으나 이런 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분수령으로 삼을 만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바로 822년의 김헌창의 난, 그리고 838년의 김우징의 쿠데타입니다. 일단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의 반란 중 규모가 가장 컸습니다. 나라의 2/3가 넘어가고 시작됐으니까요. 귀좇 반란이긴 했지만, 김헌창이 수도에서 왕위를 찬탈할 것을 노린 게 아니라, 웅천주에서 독립을 노렸기 때문에 형태상으로도 이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압했습니다. 838년의 쿠데타는 상황이 정반대입니다. 김우징이 경주의 중앙 병력을 외부 병력, 즉 장보고와 김양의 병력으로 이기고 민애왕을 잡아 죽입니다. 이 때는 중앙군을 외부 세력이 이겨 버린 것입니다. 김양의 병력은 그 출처를 알 수가 없으나, 열전을 보면 청해진에서 합류하기 전에 독자적으로 무주(무진주)와 남원(남원경)에서 신라군을 이기고 다녔다고 합니다. 반란군은 결국 대구를 거쳐 경주로 들어가 민애왕을 잡아 죽이는 데 성공합니다.

 

822년과 838년의 차이는 큽니다. 전국적인 반란을 진압할 정도로 유능했던 신라군이 왜 838년에는 쪽도 못 쓰고 질 정도로 몰락했을까요? 지휘간이 유, 무능해서였을까요? 아님 오래 이어진 왕위 찬탈 때문이었을까요? 아님 그냥 청해진과 김양의 병력이 강했기 때문일까요? 정확하게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황이 바뀌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김양이 조달한 사병은 김양이 흙으로 빚어 온 것을 아닐 테니, 아마 백성들을 선동해서 모은 걸 텐데, 이걸 보고 백성들이 경주 정부를 더 쉽게 이반하게 된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청해진의 군대가 중앙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을 지역 세력들이 838년에는 충분히 성장했다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까요? 청해진은 물론 이례적입니다. 장보고가 신라 말의 호족 같은 사람도 아니고, 아주 자생적인 세력도 아니니까요. 따라서 신라 말의 호족 난립 양상이 이미 민애왕, 신무왕 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역의 군벌 또는 군사 집단들을 중앙에서 통제하기 버거운 시대가 왔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838년은, 말 하자면 그런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위의 반란들이 어느 시점에 몰려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대공, 대렴의 난부터 김지정의 난까지의 5개 반란은 모두 혜공왕 때 일어난 것입니다. 특히 대공, 대렴의 난은 삼국유사에는 96각간의 난이라고 하여 온 나라가 왕과 반란군의 편으로 갈라져 싸웠다고 합니다. 특히 이 반란들은 768년부터 780년까지, 10여 년 동안 5번이나 몰려 있습니다. 본기상 혜공왕 시기의 정치는 어지러웠다고 하고, 혜공왕 본인부터 겨우 8살에 왕위에 올라 정체성 문제까지 겪었으니 그럴 법합니다. 결국 반란 때문에 혜공왕이 죽고, 무열왕계가 끊어졌지만, '신라'는 그대로 잘 유지되었습니다.

 

822년의 김헌창의 난도 김헌창의 개인적인 야심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에 편승했을 정황이 있습니다. 헌덕왕 시기에는 가뭄이 많았고, 백성들이 굶주려 절강까지 가서 레이드를 뛰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나중에 문제가 되는 해적들도 이 때 대량으로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헌덕왕 때는 유독 자연재해가 많았는데, 즉위 직전인 809년부터 가뭄(애장왕), 815년에 기근 때문에 민란, 816년엔 기근 때문에 백성들이 절강 레이드, 817년에 또 가뭄, 820년에 가뭄과 기근, 821년엔 기근 때문에 자식까지 팔았다고 하고, 김헌창의 난이 터지기 직전인 822년 2월에도 대설과 나무 피해가 있었습니다.

 

 

大旱.(애장왕, 809)

 

西邉州郡大飢, 盗賊蜂起. 出軍討平之.(헌덕왕, 815)

 

年荒民飢, 抵浙東求食者一百七十人.(헌덕왕, 816)

 

夏五月, 不雨, 遍祈山川, 至秋七月乃雨. 冬十月, 人多飢死, 教州郡, 發倉穀存恤.(헌덕왕, 817)

 

十二年, 春夏旱, 冬飢.(헌덕왕, 820)

 

十三年, 春, 民饑, 賣子孫自活.(헌덕왕, 821)

 

二月, 雪五尺, 樹木枯.(헌덕왕, 822)

 

 

김헌창의 난이 822년이므로, 위의 모든 사건이 지난 뒤에 터진 것이 됩니다. 사실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는 기근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815년에는 기근 때문에 나라 서부에서 민란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안 나와 있지만 819년 초적들도 정황상 기근 때문에 생겼다고 보는 게 맞겠죠. 그래서 위에서 김헌창의 난이 이런 민심에 편승한 것이 아닐까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데도 그 와중에 반란은 진압되었으니, 분명 위기는 위기였던 것 같은데, 통치가 조금 무너질 기미는 보이지만, 결국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고 보는 편이 맞겠습니다.

 

 

 

그런데 김우징의 쿠데타 이후에는 양상이 좀 달라집니다. 신무왕, 문성왕 이후에는 왕위 쟁탈전은 겉보기엔 없었고, 본기상 정치 역시 순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란 빈도를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아요. 문성왕 즉위가 839년입니다. 그런데 장보고의 난을 포함하여, 문성왕 즉위 중에만 귀좇 반란(민란X)이 4번이나 터졌습니다. 841, 846, 847, 849년으로, 840년대, 즉 문성왕 즉위 초기에 집중돼 있습니다. 경문왕 때는 귀좇 반란이 세 번 터집니다. 866, 868, 874년입니다. 특히 874년의 반란 때는 대궐로 반란군이 처들어오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헌강왕 때는 879년에 1번, 정강왕 때는 887년에 한 번 터집니다. 문성왕 즉위년인 839년에서 889년까지를 50년이라고 보면, 귀좇 반란이 9번, 대략 5~6년에 한 번씩 반란이 터진 것이 됩니다. 정강왕 시기, 887년의 김요의 난은 한주의 이찬 김요가 반란의 주체입니다. 이것은 중앙 반란이 아니라 지역의 귀좇 반란입니다. 직전이기는 하지만, 진성왕 이전 시기이면서 지역 통치가 붕괴하고 있다는 정황 증거로 볼 수 있겠습니다.

 

진성왕본기에는 원종과 애노의 난과 함께, 짝눈미륵, 견훤이 뒤이어 등장합니다. 사실 짝눈미륵이의 열전을 보면, 891년에는 기훤이, 892년에는 양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기훤의 기록 바로 앞에는 나라가 분열되어 조정편과 반란군편이 반반이며, 도적들이 아주 많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逺近羣盗, 蜂起蟻聚, 善宗謂乗亂聚衆, 可以得志.(삼국사기 열전 10 궁예)

 

 

기훤과 양길은 891년 이전부터 세력을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892년의 견훤은 본기에서처럼 왕을 자칭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라도를 거점으로 독립 세력이 되어 있었습니다. 896년에는 적고적이란 자들이 전라도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헌강왕 때인 877년에는 왕건이 송악군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왕씨들이 독립 세력은 아니었겠지만, 호족으로써 그 지역에 군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멀리 보면 문성왕이나 경문왕 때도 아마 이미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들은 모두 김씨가 아닙니다.

 

 

 

이 '호좇' 또는 '초좇' 또는 '도좇'들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만으로 본다면, 아마 진성왕 보다 훨씬 이전부터 세력화되어 있다가, 이 때 발호하지 않았을까 싶을 뿐입니다. 다만 왕씨들의 경우는 전하는 찌라시가 있습니다. 고려사의 고려세계를 보면, 왕씨의 시작은 탁발부의 숙종이라고 합니다. 숙종이 제위에 오르기 전인 753년에 황해도에 왔다가 사생아를 낳은 것이 왕씨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라겠죠. 하지만 전설에는 어떤 식으로든 근거로써의 사실이 있는 법입니다. 왕씨의 시작이 753년, 즉 경덕왕 12년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충 50년을 구라라고 쳐서 800여 년 경부터는 가문이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탁발선비의 '황통'이 왕씨로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그 시조가 적어도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는 있겠죠. 외부에서 온 집단이 정착하는 데 100여 년이 필요했다고 치면, 신라의 각 지역에서 김씨가 아닌 토착민으로써 세력화되는 것은 그 보다 시간이 덜 걸릴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왕씨가 자리잡았던 황해, 평안도 일대가 경주에서 멀기 때문에 오히려 정착이 쉬운 곳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100년 보다 더 걸리겠죠.

 

하지만, 이런 자잘한 차이를 접어 두고 딱 100여 년을 정치 세력화에 필요한 임계 시점으로 가정한다면, 맞아 떨어지는 점이 있습니다. 원성왕계의 왕위 쟁탈로 지역 통치가 붕괴될 조짐이 조금씩 보이는 시점이 100여 년 전이니까요. 김헌창의 난도 그렇습니다. 이런 '풍화' 현상이 지속되어, 838년엔 마침내 중앙을 꺾는 데 성공한 지역 세력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본기에 나와 있지는 않으나, 알게모르게 정치 세력으로서의 지역 호좇들이 커지기 시작한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근데 자세한 건 저 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사료를 다양하게 연구할 수 있는 전공자들에게 물어 보세요. 저는 잘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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