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기 박씨 3왕이 재위한 이유(삼국사기 신덕왕본기 중)

2020. 5. 15. 15:19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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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신라의 초기 계보를 문자 그대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와는 별개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들은 어쨌거나 건국 이후 신라의 지배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여 주는 단서가 됩니다.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왕은 박씨이지만, 4대인 탈해왕이 갑자기 석씨가 되고, 13대인 미추왕은 또 갑자기 김씨가 됩니다. 박석김이 순차적으로 왕위를 돌려 가며 즉위했다는 말은 낭만적입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사실이 아닙니다. 초기 17개 왕의 성들은 '박박박 석 박박박박 석석석석 김 석석석 김'입니다.

 

성이 같다는 것은 어쨌거나 같은 집안이라는 겁니다. 처가가 가까운들 친가 보다는 가까운 게 아니라서, 아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왕성이 바뀌었다는 것은 당시 쿠데타이든, 무엇이든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서든, 아니면 기록이 사실에 비해 너무 오래 뒤라서 정확히 알 수 없었든, 삼국사기에는 초기 왕계에 대해 불미스러운 말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왜놈서기에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왜놈들은 만세일계라고 해서 천황들이 신무천황에서부터 왕조가 바뀌지 않고 이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일본서기 중에는 천황의 집안이 바뀌었다는 말은 없지만, 정황상 어디 멀리 숨어 있는 '천손'을 모셔 와 천황으로 세웠다고 하는 말이 있을 경우 왕조가 바뀐 게 아닌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계체천황이 딱 그렇습니다.

 

17대 왕이 바로 내물왕 또는 나물왕입니다. 내물왕 이후로는 석씨와 박씨가 짜졌는지, 왕위를 김씨가 거의 독점했습니다. 내물왕 이후 550여 년 동안을 김씨가 왕위를 독점했습니다. 지증왕이 여자를 후릴 때도, 진흥왕이 성왕을 잡아 죽일 때도, 의자왕에게 처맞을 때도, 무열왕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할 때도, 혜공왕이 여장할 때도, 선덕왕과 원성왕이 왕위를 찬탈했을 때도, 헌덕왕이 자기 조카를 잡아 죽일 때도,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죽었을 때도, 경문왕이 자기 7촌 고모들과 결혼했을 때도, 짝눈미륵과 견훤이 처음 본기에 나왔을 때도 왕은 김씨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가다가, 효공왕이 죽고 갑자기 박씨가 53번째로 왕위에 오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신덕왕입니다. 다음으로는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이 이어 오르는데, 경명왕과 경애왕은 모두 신덕왕의 아들이고, 경애왕이 동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은 모두 박씨인 거죠. 경애왕은 견훤에게 잡혀 죽고, 견훤이 다시 김씨를 왕위에 세우니, 이것이 바로 경순왕입니다.

 

 

 

 

 

그러면 김씨가 왕위를 독차지했던 동안 박씨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박씨는 8대인 아달라왕 이후에는 아예 왕위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왕비는 자주 냈습니다. 사실 이례적으로 여왕이 즉위하는 중에도 박씨는 왕위에서 저 멀리 밀려나 있었죠. 예를 들어 진흥왕본기의 즉위기를 보면 이렇습니다.

 

 

眞興王立. 諱彡麥宗,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 母夫人金氏法興王之女, 妃朴氏思道夫人. 王幼少, 王大后攝政.(진흥왕, 540)

 

 

진흥왕의 와이프는 박씨입니다. 사도부인이라고 하네요. 진흥왕을 이은 진지왕은 진흥왕와 사도부인의 아들입니다. 즉, 진지왕의 어머니도 박씨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왕비 중 적어도 17명 이상이 박씨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왕비나 국모가 박씨에서 나온다는 것은 박씨가 왕은 못 될지언정 적어도 귀좇으로써의 위치는 계속 유지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대와 가깝진 않으나, 눌지왕 때의 박제상도 있습니다. 박제상은 복호와 미사흔을 탈출시킨 것으로 유명한 재상이죠. 김씨가 왕위를 독점한 550여 년 동안 피바람이 수 없이 많이 불었을 텐데, 그 세월을 어떻게 버틴 것인지는 제가 알기로는 따로 기록이 전하지 않아 모릅니다. 물론 박씨가 아무리 처우가 초기 보다 나빠젔다고 하더라도, 아마 석씨 보다는 나았을 겁니다. 흘해왕이 죽은 뒤로는 신라본기에 아무런 기록도 안 나오거든요. 흘해왕이 죽고 내물왕이 오른 뒤 다 잡아 죽은 것인지, 폐서인했는지, 고구려나 백제에게 표적 연습용으로 주었는지, 상어밥으로는 주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박씨는 왕은 못 되었더라도 귀좇 지위는 유지했습니다. 사료상 박씨가 제일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왕비들이지만, 박씨들이 그냥 딸 바치는 기계는 아니었을 것이니, 아마 벼슬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름이 외자가 아니면 대체로 그 성을 적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삼국사기에 벼슬을 했다고 기술된 사람들 중에 박씨가 섞여 있었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대아찬까지는 진골만 할 수 있었는데, 혹시 진골은 김씨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박씨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닌지 의심이 좀 듭니다. 사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모두 진골 같은 말이 나오긴 하지만, 진골이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서는 기록이 또 전무하기 때문에 분석해 나가기가 아주 곤란하고 더럽습니다. 그래서 나온 기록상 누구는 진짜 뼈다구고, 누구는 성스러운 뼈다구라고 하는 것을 보고 진골이 뭐니, 성골이 뭐니 생각하곤 하지만 분명하지 않습니다. 신라가 폐쇄적이라고는 하지만, 알에서 태어난 '시조'들이 근친혼이나 일삼던 놈들 보다는 상식적으로 건전하기 때문에, 아마 박씨들은 특별 대우를 받지 않았겠나 생각이 듭니다... 그럼 석씨는 왜 대우를 못 받았냐 할 수 있는데, 아마 김씨랑 사이가 안 좋았던 거 아닐까요? 아달라왕 이후로는 박씨가 왕위에 오른 적도 없거니와, 그 이후에는  석씨와 김씨만 왕위를 두고 경쟁했기 때문에 아주 좋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박씨가 신라 가장 말기까지 살아 남을 정황이 가능한지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37명이 연달아 모두 김씨였는데, 왜 갑자기 박씨가 즉위했냐는 겁니다. 여기에도 몇 가지 정황을 끼워 맞출 수 있긴 합니다. 가장 쉬운 설명은 이 때쯤 박씨가 킹왕짱 세지고, 김씨가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왜 그랬는지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두 번째 정황은 신라의 계승 구도가 부계 남자 상속이 무조건 우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즉, 사위도 계승할 수 있지 않았냐는 겁니다. 저는 진평왕과 무왕의 육탄전이 떠오르네요. 세 번째는 부계는 김씨이지만, 모계를 따라 박씨를 칭했을 경우입니다. 혹은 원래 박씨였는데, 김씨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을 수도 있겠죠.

 

 

 

먼저 김씨가 약해지고 박씨가 세졌다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원성왕계 왕들의 왕위 계승 암투가 일단락된 것은 신무왕과 문성왕이 즉위하고부터입니다. 하지만 문성왕이 신무왕을 이은 뒤에도 여전히 귀족 반란은 많이 있었습니다. 841, 846, 847, 849년에 연이어 반란이 터진 겁니다. 846년의 반란은 장보고였기 때문에 특별하게 고려할 여지가 있지만, 제외해도 세 번이나 됩니다. 841년은 일길찬이라 관등이 좀 낮지만, 847, 849년 반란엔 이찬들과 파진찬이 몰려 들어 깽판을 쳤습니다.

 

그럼 문성왕 이후의 계승은 어땠을까요? 문성왕 뒤를 이은 헌안왕은 문성왕의 삼촌이자 신무왕의 이복동생입니다. 근데 유지도 남아 있고, 계승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헌안왕에서 경문왕으로의 계승이 이상합니다. 경문왕은 희강왕의 손자이고, 헌안왕의 6촌 손자입니다. 헌안왕은 아들이 없었는지, 경문왕을 사위로 삼고 왕위를 잇게 했거든요. 김씨긴 한데, 사위이자 6촌에게 계승을 시킨 것이죠. 귀좇들도 이 계승 구도에 불만이 많았는지 866, 868, 874년에 연이어 반란을 일으킵니다. 뒤를 이은 헌강왕은 경문왕의 아들입니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동생이고요. 진성왕은 헌강왕의 여동생입니다. 즉,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은 남매 사이인 거죠. 무난합니다. 그렇다 칩시다. 근데 신라의 누적된 피로가 터져 나라가 분열되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진성왕 때였습니다. 진성왕에서 효공왕으로의 계승도 이상합니다.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 즉 진성왕의 조카인데, 이게 조카라는 걸 알고 한 게 아니라 길에서 주워서 조카라고 왕위를 잇게 한 거거든요.

 

이상한 계승 구도가 이어집니다. 그 동안의 내전 때문에 권위가 파탄난 건지 귀좇들도 반란을 연이어 일으키죠. 위에는 안 적었지만 헌강왕, 정강왕 때도 879, 887년에 반란이 있었습니다. 진성왕 때는 나라가 작살났습니다. 북동부에는 짝눈미륵이, 서남부에는 견훤이 등장했습니다. 각지의 통치가 무너집니다. 민란이 터지고, 도좇들이 설칩니다. 성주, 장군이라고 자칭하는 군벌들이 생겨납니다. 효공왕 때는 예전에 멸망시켰던 고구려와 백제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신라의 영토는 경상도 일대로 줄어들었고, 그 경상도의 서부조차도 견훤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동부라고 신라의 통치를 고분고분히 들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성왕계니, 무열왕계니 이전에, 김씨가 적법한 통치 권력을 이 시점에서 행사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박씨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다면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그 말이 적혀 있지 않을 리가 없거든요. 계승의 정통성 문제이기도 하고요.

 

 

神徳王立. 姓朴氏, 諱景暉, 阿逹羅王逺孫. 父乂兼, 事定康大王爲大阿湌, 母貞和夫人, 妃金氏憲康大王之女. 孝恭王薨, 無子, 爲國人推戴即位.(신덕왕, 912)

 

 

신덕왕본기에는 효공왕 사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추대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쿠데타라기 보다는 나라가 망해감에 김씨들이 신뢰를 잃음과 동시에 박씨 중 당시 세력이 있었던 신덕왕의 집안이 계승의 적격자로써 부각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럼 신덕왕은 그 당시의 실력자가 맞았을까요?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후손이라고 했고, 정강왕 때 대아찬을 지낸 예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달라왕의 후손이라는 점은 550년의 세월을 거슬러 증명하기 힘들지만, 아빠인 예겸의 행적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即位, 拜伊湌魏弘為上大等, 大阿湌乂謙爲侍中, 大赦内外殊死已下.(헌강왕, 875)

 

三年, 春三月, 納伊湌乂謙之女爲妃.(효공왕, 899)

 

 

예겸은 헌강왕 때는 대아찬이자 시중을 지냈고, 정강왕 때는 대아찬을 지냈으며, 효공왕 때는 이찬을 지내면서 왕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신덕왕이 박씨이니 예겸도 박씨일 것인데, 진골만 할 수 있는 이찬을 지냈다는 점이겠네요. 원래 진골에 박씨가 들어가 있었던 건지, 이 때에 제도가 무너지면서 이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적어도 김씨가 몰락하고, 박씨가 힘을 얻었다고 보기엔 이 생각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두 번째는 상속 우선권 문제입니다. 사실 첫 번째 근거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효공왕은 아들 없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으면서 나라 안에 왕족에 가까운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리는 없거든요. 마지막 왕이 되는 경순왕도 김씨이고요. 찾아 보면 어느 왕에서든 갈라져 나온 후손이 있을 겁니다. 근데 쿠데타 없이 다른 성인 박씨가 왕이 됐다는 건, 어쩌면 신라의 왕위 계승 원칙이 부자 상속에만 한정된 건 아니라는 의미일 수도 있어요. 헌안왕을 이어 즉위한 경문왕의 경우, 헌안왕의 6촌 손자이자 사위입니다. 그럼 경문왕이 헌안왕의 뒤를 이은 이유는 뭘까요? 헌안왕에게 6촌 보다 가까운 친척이 하나도 없었을 리는 없으니, 결국 그 이유는 사위이기 때문으로 좁혀집니다. 아들이 하나도 없을 때, 불가피하다면 딸에게 왕위가 갈 수 있습니다. 그 예시가 진평왕과 선덕왕입니다. 후사가 없을 땐, 좀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여동생에게도 왕위를 넘겨 주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정강왕과 진성왕입니다.

 

이렇다면, 사실 매부나 사위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주 초기라서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탈해왕은 남해왕의 사위였습니다. 남해왕에서 유리왕을 거쳐 탈해왕으로 계승됐기 때문에, 매부에게 왕위가 간 셈이긴 하죠. 사위는 아니지만, 나라 사람들이 다른 성에게 왕위를 넘긴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달라왕에서 벌휴왕으로의 승계가 그랬습니다. 선화공주에 대해서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왕이 진평왕의 사위가 되는데, 아들이 없던 진평왕이 사위에게 왕위를 넘기기 싫어서 맏딸인 만덕이에게 어거지로 왕위를 넘겼으니, 이가 바로 선덕왕이라는 것입니다. 신채호의 설입니다. 아주 기발한 생각이긴 하지만, 선화공주가 실재해야 이 말이 맞든 틀리튼 할 텐데, 미륵사지의 석탑에서 미륵사를 사택왕후가 지었다는 글이 나와 버리면서 선화공주의 존재 자체가 아주 불투명해져 버렸습니다. 저는 신채호의 설을 믿고 싶은데, 제가 믿고 싶다고 역사인 건 아니겠죠.

 

그래서, 부자, 적자 상속이 신라 왕위 계승의 대원칙 같긴 합니다. 그런 경우가 아닌 경우 보다 훨씬 많으니까요. 하지만 왕위 계승이 부자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이고, 효공왕은 신덕왕 아빠인 예겸의 사위이며, 신덕왕은 헌강왕의 사위입니다. 좀 복잡하고, 말이 안 돼 보이는데, 헌강왕과 예겸이 서로 겹사돈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효공왕은 신덕왕과 서로서로 처남이자 매부인 거죠. 따라서 효공왕에서 신덕왕으로의 계승은 '처남'이자 '매부'로의 계승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유를 기술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덕왕의 아빠인 예겸은 입지가 있는 정치인이었기에, 성이 달랐더라도 처남 또는 매부로의 계승이 아주 부자연스럽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점으로 알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신덕왕이 왕위에 오른 것이 단순히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는 혈통만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씨 중에는 이 시기까지 살아 남아, 어떤 점에서는 김씨 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상고 시대 박씨의 후손인지, 아니면 세월 속에서 새로 출현한 박씨인지, 제비가 물어 온 양자강 출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순하게 전설 속 왕의 후손이라고 당시 신라 사람들이 왕으로 인정해 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력이 뒷받침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세 번째는 신덕왕의 성이 바뀐 적이 있다는 설입니다. 원래 박씨였는데 김씨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다는 가정이거나, 김씨였는데 박씨로 바꾸었다는 가정이거나... 실제로 삼국유사에는 신덕왕의 아빠인 예겸이 친아빠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겸은 의부이고, 친아빠는 부원 또는 문원이라고요. 여기서는 문원으로 보겠습니다. 예겸은 이찬을 지냈다고 하니, 예겸이 진짜 뼈다구라면, 상식 대로 김씨일 가능성이 크겠죠. 그럼 친부라는 문원은 박씨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삼국유사 외에는 또 신덕왕의 출신에 대해 이렇게 기술해 둔 책이 없기 때문에 의뭉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정상수웅은 신덕왕의 여동생이 효공왕의 와이프가 되면서 김씨에서 박씨로 바꾸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예겸이나 친부라는 문원에 대한 기록이 더 남아 있다면 뚜렷해질 텐데,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더 추측하기 힘듭니다. 세 번째 설은, 김에서 박으로든, 박에서 김으로든, 김씨였던 적이 있었기에 왕위를 계승 받을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는 데 초점을 둔 것 같습니다.

 

 

 

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가, 신덕왕의 성을 갈아 엎지 않고 할 수 있는 생각 중에서는 가장 타당한 접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처음과 두 번째 이유가 다 타당하더라도, 적어도 흥덕왕 이전까지는 이런 계승 양상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결국엔 신라의 수명이 다 됐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반란으로, 중앙에서는 이런 형태로 드러난 것 아니었을까요? 이런 설도 있습니다. 신덕왕에 대한 직접적인 설은 아니지만, 박씨 3왕 이후 다시 김씨인 경순왕이 즉위합니다. 그런데 경순왕의 즉위 방식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견훤이 직접 경주로 처들어와서 경애왕을 잡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운 것이거든요.

 

 

노랑은 좌측부터 근품성, 공산 동수, 고울부 / 청색은 고려령 대야성 / 빨강은 927년 공산 동수 전투 이전 견훤의 공격 방향 / 자색은 927년 왕건의 신라 구원군

 

 

당시 견훤의 전략 기동이 아주 비정상적으로 신속했고, 다른 곳도 아니고 경주가 뚫려 왕이 잡혀 죽은 정황을 볼 때, 혹시 경주 내부에 내통자가 있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내통자가 바로 박씨 3왕에 불만을 품은 김씨가 아니었을까 하는 거죠. 물론 증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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