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청해진(삼국사기 신무왕본기 중)

2020. 5. 10. 09:32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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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본기 외에 열전이 따로 있습니다. 신당서 동이전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삼국사기의 열전은 신당서의 열전을 베껴 온 것 같습니다. 내용이 거의 같거든요... 이 글에서는 가급적 본기 기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 볼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평로치청의 난에 대해 기술한 적이 있습니다. 안사의 난이 터졌을 때, 반란군 속에서 이정기(당시엔 이회옥) 등이 반란을 다시 일으켜 산동 지역을 조정의 이름으로 탈환해 주었다는 말이었죠.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27

 

평로치청의 난(삼국사기 헌덕왕본기 중)

* 평로치청의 난은 신라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탁발부에서는 '절도사'라는 것을 두어 국경의 변경 지역들을 방어했습니다. 현종 경운 2년(711)에 처음 10개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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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말 하면 이렇습니다. 반란군 안에서 반란을 일으킨 평로군 일부는 산동을 탈환한 뒤 산동에 눌러 앉아 안사의 난이 끝난 뒤 평로치청절도사로 제수받습니다. 이정기가 절도사가 돼죠. 이후 이정기는 781년에 다른 절도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평로치청의 난은 이정기가 반란을 일으켰던 시점부터 생각하면 781년부터 819년까지 지속됩니다. 그 중 평로치청절도사는 이정기에서 이납, 이사고, 이사도로 바뀝니다. 긴 시간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위의 링크를 참고하세요.

 

한편 장보고가 청해에 진을 만든 것은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828년 4월입니다.

 

 

 

 

夏四月, 清海大使弓福, 姓張氏, 入徐州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 鎮清海.(흥덕왕, 828)

 

 

파랑은 평로치청절도사 / 빨강은 서주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장보고가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다고 했고, 위의 흥덕왕본기에서는 탁발부의 서주에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열전에도 장보고가 언제 탁발부에 들어갔는지, 무슨 공로로 무령군의 소장이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서주의 위치는 바로 치주와 청주, 즉 산동의 바로 아래이고, 무령군은 서주절도사 막하의 군대라고 하니, 시기상 장보고가 소장으로 출세하게 된 배경에는 평로치청의 난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장보고가 평로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제가 모르는 사료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저는 모르겠네요. 이정기가 고구려계이므로 평로치청의 난을 고구려와 엮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신라인이 이를 진압함에 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역설적입니다.

 

 

 

청해

 

 

장보고는 청해에 군진을 왜 만들었을까요? 흥덕왕본기에는 청해진이 만들어질 때,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이유는 삼국사기의 열전과 신당서에 나와 있습니다.

 

 

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鎮清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清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㠀.(삼국사기 열전 4 장보고·정년)

 

后保皋歸新羅,謁其王曰:“遍中國以新羅人為奴婢,願得鎮清海,使賊不得掠人西去。”清海,海路之要也。王與保皋萬人守之。(신당서 열전 145 동이)

 

 

대체로, 중국에 신라인들이 잡혀와 노비가 되니, 청해에 군진을 두어 이를 막겠다는 말입니다. 이에 흥덕왕은 병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주둔하게 했으니, 청해는 지금의 완도입니다. 청해진을 두자 신라인들이 잡혀가는 것이 없었다고 하네요. 그 때 특채 공무원들은 일을 빨리빨리 잘 처리한 것 같습니다.

 

 

 

장보고가 청해진에 주둔한 사건은 돌이켜 볼 가치가 있습니다. 어릴 때야 그냥 장보고가 위대한 장군이라서 해적들을 잡아 죽였구나 했지만, 크고 나서 생각해 볼 때 석연치 않은 점이 두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도대체 왜 그 때 신라인들이 중국에 '인신매매'당했느냐는 겁니다. 말도 안 통하는 탁발부 오랑캐들에 섞여 살기 위해 자기 몸을 스스로 파는 놈은 없을 것이므로, 아마 빚 때문에 팔리는 것이거나, 아니면 해적들 같은 '적'들에게 당해 잡혀 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탁발부와 신라 사이에는 바다가 있기 때문에, 아마 해적들이 인신매매의 주체였을 텐데, 그럼 그 당시엔 왜 해적들이 많았을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당시 신라와 탁발부 사이의 교역이 많았으니 그럴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왜놈들이나 저 멀리에서 오는 상인들도 있었을 겁니다. 먹을 게 많아지면 거기 파리떼가 꼬이는 법입니다. 시장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해적이 늘어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지만 해적을 단속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죠. 신라와 탁발부는 그럼 그 동안 뭘 하고 있었을까요? 탁발부는 현종 이후로 중흥과 몰락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절도사들의 난이 지속적으로 터졌거든요.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청해진을 만들기 직전엔 평로치청의 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말이 평로치청의 난이지, 실제로는 평로치청절도사 말고 다른 절도사도 탁발부 오랑캐틀에 반독립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헌종은 이사도를 공격하기 전에, 815년에서 817년 동안 회서절도사 오원제를 때려 잡았습니다.

 

 

파랑은 평로치청절도사 / 빨강은 회서절도사

 

 

절도사라는 게 원래 국경 지역을 방어하라고 둔 것이었는데, 울타리들이 목책 끝을 돌려 집 주인을 향하고 있으니, 바다를 제대로 방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신라도 사정이 녹록치는 않았습니다. 겉보기에는 평안했지만, 혜공왕이 죽은 뒤부터 지속적으로 왕위 찬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헌덕왕에서 흥덕왕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고서는 또 내전이 터집니다. 게다가 삼국사기의 본기는 대부분 경주를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그 때 경주 밖, 특히 서부 해안 지역이 어땠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죠. 전에 패강진에 대해 글을 썼을 때, 패강진이 혹시 해적놈들에게서 황해도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닌지 말씀드렸었는데, 만약 그런 역할도 있다면 신라 조정에서도 해좇들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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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가족들의 골육상쟁(삼국사기 희강왕본기 중)

원성왕에서 신무왕까지는 모두 원성왕의 자손들이면서도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며 왕위를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언젠가 이 난장판을 한 번쯤 쭉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일단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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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29

 

패강진과 패강장성(삼국사기 헌덕왕본기 중)

조카를 잡아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은 826년 8월에 죽습니다. 그런데 헌덕왕이 죽기 직전인 7월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十八年, 秋七月, 命牛岑太守白永, 徴漢山北諸州郡人一萬, 築浿江長城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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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장보고가 김씨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열전에서는, 친구 정년과 장보고 모두 그 출신도, 아빠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張保臯鄭年皆新羅人. 但不知郷邑·父祖.(삼국사기 열전 4 장보고·정년)

 

七年, 春三月, 欲娶清海鎮大使弓福女爲次妃, 朝臣諫曰 ... 弓福海㠀人也, 其女豈可以配王室乎. 王從之.(문성왕, 845)

 

 

다만 아는 건 신라인이라는 점입니다. 출신은 그렇다 치고, 그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은 가계나 가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김씨나 박씨, 혹은 수백 년 전에 멸종한 석씨의 후손이라면 그렇게 적어 뒀겠습니다. 사실 문성왕본기에서는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와이프로 들이려 하자 신하들이 장보고를 섬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어찌 됐거나 귀좇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신라는 평민들은 아주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중앙 요직, 지방 요직을 전부다 김씨가 해 처먹는데 다른 집안에 끼어 들어갈 여지가 어디 있었겠어요. 최치원도 김씨가 아니라지만, 그 최치원도 결국 시중이나 도독 같은 건 못 해 보고, 시중 보다 더 어렵다는 '신선'이 돼서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다만 원성왕본기와 소성왕본기에 나오는 자옥과 양열의 사례를 볼 때, 김씨가 아니더라도 탁발부에서 한 자리 하다 오면 지역 구청장 정도는 시켜 줬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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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삼품과와 유학생(삼국사기 원성왕본기 중)

원성왕본기에 있는 독서삼품과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四年, 春,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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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장보고는 더 이례적입니다. 보통 '유학생'은 최치원처럼 빈공과에 급제하거나, 과거 급제는 몰라도 어쨌건 외국에서 '문과'로서 한 자리 하고 오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장보고는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요즘처럼 공적 의무교육이 있던 시대도 아닌데, 한미한 섬 사람이 어떻게 글자를 익혀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요? 정황상 장보고는 평로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것 같고, 이에 무령군중소장을 지냅니다. 그 이후 신라로 옵니다. 규모가 작든 크든, 군 지휘관으로서 탁발부에서 출세해 신라로 건너와 지역 군진을 총괄하게 된 것은 아마 장보고가 전무할 것입니다. 장보고는 물론 반란군이 아니었으나, 장보고처럼 김씨가 아니면서 지역에 독자적인 군사 세력을 구축한 사례를 보려면 견훤이나 궁예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반대로, 김씨이지만 이런 경우도 있으니, 바로 김헌창입니다. 김헌창의 난이 822년, 김우징과 장보고의 쿠데타가 838년임을 생각하면, 822년에서 838년을 전후로 해서 각 지역에는 '군벌'이나 '호족'이 점차 대두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신라의 통치 체제가 붕괴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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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삼국사기 헌덕왕본기 중)

무열왕계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 때 귀족 반란이 여러 번 있었다는 점은 기억하실 겁니다. 모르는 분들은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4 혜공왕대의 귀족 반란들(삼국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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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신라 왕실에서 무슨 생각으로 장보고에게 군대를 1만 명이나 주고, 청해에 군진을 만들어 주둔하도록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신라 귀좇도 아니고, 탁발부에서 먹물 좀 쓰다 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흥덕왕 입장에서 장보고가 아주 믿을 만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기록으로는 갑자기 바다를 건너 와서 청해를 달라고 한 게 전부니까요. 믿을 만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해적이 그 만큼 심각한 문제였거나, 자옥이나 양열의 사례를 따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병력 1만 명은 적은 수가 아니고, 실제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희강왕이 자기 삼촌인 김균정을 잡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이후, 김우징, 김예징, 김양 같은 '김균정파'는 청해진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김양은 독자 병력이 있었고, 김양의 합류 시점은 민애왕 즉위 이후이지만, 김우징, 김예징은 독자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장보고에 모든 걸 의탁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희강왕을 핍박해 죽이고 민애왕이 즉위하고, 청해진의 반란 분자들이 움직였습니다.

 

 

 

 

二月, 金陽募集兵士, 入清海鎮, 謁祐徴阿湌. 祐徴清海鎮金明位, 謂鎮大使弓福曰, “金明弑君自立, 利弘枉殺君父, 不可共戴天也. 願仗將軍之兵, 以報君父之讎.” 弓福曰, “古人有言, 見義不爲, 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 遂分兵五千人, 與其友鄭年曰, “非子不能平禍亂.” 冬十二月, 金陽爲平東將軍, 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統軍, 至武州鐡治縣. 王使大監金敏周, 出軍迎戰, 遣駱金·李順行, 以馬軍三千突擊, 殺傷殆盡.(민애왕, 838)

 

二年, 春閏正月, 晝夜兼行, 十九日至于逹伐之丘. 王聞兵至, 命伊湌大昕·大阿湌允璘·嶷勛等, 將兵拒之. 又一戰大克, 王軍死者過半. 時王在西郊大樹之下, 左右皆散, 獨立不知所爲, 奔入月遊宅, 兵士尋而害之. 羣臣以禮葬之, 謚曰閔哀.(민애왕, 839)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5천 명을 주어 '구국의 결단'을 이행하도록 했습니다. 정년과 김양은 병력을 이끌고 중앙군을 이기고 민애왕을 잡아 죽였습니다. 본기에는 김양이 모두 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진 않았을 것입니다. 839년에 김우징이 즉위하니, 김우징이 신무왕입니다.

 

김양의 병력을 제하면, 신무왕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장보고에게 의탁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신무왕은 장보고에게 빚을 어마어마하게 진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안 되어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아들이 즉위하니 문성왕입니다. 문성왕은 신무왕의 아들로써, 청해진에 도피했을 때부터 장보고를 봐 왔을 것입니다. 따라서 문성왕 역시 장보고에게 예를 갖춥니다. 아주 좋은 자세입니다. 순자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八月, 大赦. 敎曰, “清海鎮大使弓福, 甞以兵助神考, 滅先朝之巨賊. 其㓛烈可忘耶.” 乃拜爲鎮海將軍, 兼賜章服.(문성왕, 839)

 

 

여기서 진해장군은 직관지에 없답니다. 명예직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맞아 세컨드로 삼으려 했는데, 쿠데타에 좇도 도움도 안 줬을 신하들이 반대한 것입니다.

 

 

 

 

七年, 春三月, 欲娶清海鎮大使弓福女爲次妃, 朝臣諫曰, “夫婦之道, 人之大倫也. 故𡍼山興, 㜪氏昌, 褒姒滅, 驪姬亂. 則國之存亡, 於是乎在, 其可不慎乎. 今弓福海㠀人也, 其女豈可以配王室乎.” 王從之.(문성왕, 845)

 

 

앞에도 인용했던 글이죠? 장보고가 섬 사람, 즉 천한 집안 사람이기 때문에 외척으로 맞아 들이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삼촌과 조카가 결혼을 하고, 7촌 고모 자매'들'을 퍼스트와 세컨드로 맞아 들이며, 사람 이름을 박아달라, 박지마로 지으며, '넓은 의미'의 근친상간을 수백 년 동안 일삼아 온 놈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성왕은 이 말을 듣고 장보고의 딸을 맞아 들이지 않기로 합니다.

 

장보고는 이에 빡쳤을 것입니다. 본기에는 846년에 장보고가 이 문제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八年, 春, 清海弓福怨王不納女, 㩀鎮叛. 朝廷將討之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𨶒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以斬弓福以獻.” 王從之. 𨶒長佯叛國投清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飲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문성왕, 846)

 

 

기록상, 장보고의 반란은 염장에게 쉽게 제압되었습니다. 다만 그 형태는 무력 충돌이 아니라, 일종의 암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열전에는 신무왕을 도운 쿠데타까지만 나와 있지, 그 이후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김부식이와 친구들이 도대체 어떻게 역할을 나누었길래 글을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네요.

 

이후 청해진이 바로 폐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851년이 되어서야 조정에서는 청해진을 없앱니다.

 

 

十三年, 春二月, 罷清海鎮, 徙其人於碧骨郡.(문성왕, 851)

 

 

본기상으로 장보고는 846년에 죽었으니, 851년에 청해진을 폐하기까지 5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왜 이랬는지, 장보고가 죽은 이후 청해진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속일본후기에 단서가 있습니다. 842년 1월, 인명천황 시기 기록입니다. 842년 1월, 을사일에 신라인 이소정 등 30명이 축자(筑紫)[츠쿠시]의 대재부(大宰府)[다자이후]에 도착했습니다. 축자는 지금의 복강(福岡)[후쿠오카]이고, 대재부는 당시 왜놈들이 외국 사신을 가장 처음 맞이하는 대외 교섭 창구 같은 곳이었습니다. 태재부(太宰府)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파랑은 청해 / 빨강은 대재부

 

 

乙巳 新羅人少貞等 卌人到着筑紫大津 大宰府遣使問來由 頭首少貞申云 張寶高死 其副將李昌珍等欲叛亂 武珍州列賀閻丈興兵討平 今已無虞 但恐賊徒漏網 忽到貴邦 擾亂黎庶 若有舟船到彼不執文符者 竝請切命所在推勘收捉 又去年廻易使李忠揚圓等所齎貨物 乃是部下官吏及故張寶高子弟所遺 請速發遣 仍齎閻丈上筑前國牒狀參來者 公卿議曰 少貞曾是寶高之臣 今則閻丈之使 彼新羅人 其情不遜 所通消息 彼此不定 定知 商人欲許交通 巧言攸稱 今覆解狀云 少貞閻丈上筑前國牒狀參來者 而其牒狀無進上宰府之詞 無乃可謂合例 宜彼牒狀早速進上 如牒旨無道 附少貞可返却者 或曰 少貞今旣託於閻丈 將掠先來李忠揚圓等 謂去年廻易使李忠等所齎貨物 乃是故寶高子弟所遺 請速發遣 今如所聞 令李忠等 與少貞同行 其以迷獸投於餓虎 須問李忠等 若嫌與少貞共歸 隨彼所願 任命遲速 又曰 李忠等廻易事畢 歸向本鄕 逢彼國亂 不得平着 更來筑前大津 其後於呂系等化來云 己等張寶高所攝嶋民也 寶高去年十一月中死去 不得寧居 仍參着貴邦 是日 前筑前國守文室朝臣宮田麻呂 取李忠等所齎雜物 其詞云 寶高存日 爲買唐國貨物 以絁付贈 可報獲物 其數不尠 正今寶高死 不由得物實 因取寶高使所齎物者 縱境外之人 爲愛土毛 到來我境 須欣彼情令得其所 而奪廻易之便 絶商賈之權 府司不加勘發 肆令幷兼 非實賈客之資 深表無王憲之制 仍命府吏 所取雜物 細碎勘錄 且給且言 兼又支給糧食 放歸本鄕(속일본후기 인명천황본기, 842)

 

 

다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적인 내용만 알면 됩니다. 첫 번째, 속일본후기 기록을 따르면, 장보고는 846년이 아니라 841년 11월에 죽었습니다. 두 번째, 장보고 사후 염장이 청해진을 장악했습니다. 세 번째, 장보고 사후, 부장 이창진 등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데 무진주(武珍州) 열가(列賀) 염장이 군대로 토벌했습니다. 무진주는 지금의 전라남도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네 번째, 이 때 사신으로 온 이소정 등은 염장의 명을 받아서 이창진의 반란 당시 포위망을 빠져나간 잔당들을 붙잡으러 온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이충, 양원 등이 장보고의 편으로서 물건을 가지고 탈출해 일본으로 도주했습니다.

 

 

 

 

일단 기록의 상세함, 정황 등을 고려할 때, 속일본후기의 이 기록은 믿을 만한 것 같습니다. 왜놈들 기록은 대체로 세부적인 뉘앙스는 자기 유리한 대로 고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관계 그 자체는 온갖 쓸 데 없는 것까지 다 적어 두거든요. 그렇다면 장보고는 846년이 아니라 841년에 이미 죽은 것이 됩니다. 문성왕이 839년에 즉위했으니, 거의 즉위하자마자 숙청된 것이겠네요. 딸을 세컨드로 맞느니, 마니 하는 이야기도 사실이라면 문성왕 즉위 직후에 있었거나, 혹은 신무왕 생전에 이미 약속된 일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걸 계속 미루다가, 혹은 신무왕이 어떻게 한다고 확실하게 정리하기 전에 죽어 버렸다가 사고가 터졌을 수 있는 거죠.

 

속일본후기에는 장보고가 어떻게 죽었다는 얘기는 없고, 장보고 사후 염장이 청해진을 장악한 것으로 나옵니다. 염장은 그 직책이 무진주 열가라고 해서 청해진과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본기상 851년에 가서야 청해진을 없애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염장이 그 세력을 받아서 갖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겠습니다. 장보고는 허무하게 죽었거니와, 이후 장보고를 따르는 세력은 분명히 남아 있어, 부장 이창진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진압된 뒤에도 잔당은 해외로 도주한 것 같습니다. 속일본후기에 나오는 이충, 양원이 그 잔당인 듯 보이죠. 이로써 보면 본기나 열전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장보고는 왜놈들과도 관계를 아주 가깝게 맺었던 것 같습니다. 산동 위해의 법화원도 장보고가 세웠다는 것을 보면, 청해진의 역할이 해적을 때려 잡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해와 남해의 무역을 관장하며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위상까지 확보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장보고 사후 반란 기록은 우리측이나 중국측 사료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걸 보면, 중요한 사건이면서도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건이 얼마나 많았을지 아주 의뭉스럽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장보고는 친구 정년과 함께, 원래 섬 사람으로,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 출세하려 했습니다. 마침 그 당시 탁발부는 절도사의 난으로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장보고는 서주의 무령군에 입대해 이정기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것 같습니다. 이 공으로 무령군중소장의 지위를 얻습니다. 이후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에게 허락을 받고 청해에 군진을 세웠습니다. 당시 해적들이 해안의 신라인들을 납치해 가는 일이 많았는데, 청해진이 만들어지고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흥덕왕이 김씨도 아니고, 기타 귀좇 출신도 아닌 장보고에게 군진을 허락해 준 것은 아마 해좇 문제가 아주 심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삼국사기만을 가지고 보면, 청해진을 거점으로 한 당대 동아시아의 무역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속일본기에 장보고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장보고가 산동의 법화원을 세웠다는 점을 볼 때, 장보고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유명했음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장보고는 민애왕에 대한 김우징의 쿠데타를 도왔고, 끝내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만들었습니다. 신무왕과 장보고 사이에 어떤 약속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보고가 신무왕 즉위시의 1등 공신임에는 분명합니다. 신무왕은 얼마 가지 못해 죽었고, 그 아들인 문성왕이 즉위했습니다. 문성왕 때, 장보고는 자기 딸을 문성왕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 출신이 한미한 점 때문에 조정에서는 거부했습니다. 이에 장보고는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염장에게 846년에 진압되었습니다. 청해진은 851년에 없어졌습니다.

 

한편 속일본기에서는 이창진 등이 장보고 사후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으며, 이 반란은 다시 염장에게 진압되었다고 했습니다. 장보고의 잔당들은 왜놈들에게 투항했고, 염장은 이소정 등을 보내 이들을 되돌려 달라고 대재부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속일본기와 삼국사기에서 장보고가 난을 일으킨 시점, 죽은 시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기록은 속일본기가 좀 더 상세하기 때문에, 제 생각엔 속일본기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보고가 죽은 뒤 청해진은 염장이 이어 받았지만, 851년에 폐한 것을 보면 염장 역시 851년에는 숙청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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