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 가족들의 골육상쟁(삼국사기 희강왕본기 중)

2020. 5. 6. 16:55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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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원성왕에서 신무왕까지는 모두 원성왕의 자손들이면서도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며 왕위를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언젠가 이 난장판을 한 번쯤 쭉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일단 가계도를 좀 알아야 합니다.

 

 

김경신(원성왕)

           김인겸(혜충)

                      김준옹(소성왕)

                                 김청명(애장왕)

                                 김체명

                      김언승(헌덕왕)

                      김제옹(김수종?, 흥덕왕)

                      김충공

                                 김명(민애왕)

           김의영(헌평, 무자식 상팔자?)

           김예영(김효진)

                      김균정

                                 김우징(신무왕)

                                             김경응(문성왕)

                                 김의정(김우정, 김의종?, 헌안왕)

                      김헌정

                                 김제륭(희강왕)

                                            김계명

                                                      김응렴(김의렴, 경문왕)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는 대체로 불분명하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왕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성왕 - 소성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신무왕 이후로는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으로 승계되는데, 이 때부터는 나름 무난하게 왕위가 이어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무난하지 않았지만요.

 

 

 

원성왕은 선덕왕이 죽은 뒤 왕위를 잇습니다. 원성왕은 14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아주 무난하게 정사를 봤습니다. 저는 무식해서 원성왕의 치세에 대해서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원성왕에게 불행한 점이 있었다면, 생전에 아들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七年, 春正月, 王太子卒, 謚曰恵忠.(원성왕, 791)

 

八月, 封王子義英爲大子.(원성왕, 792)

 

太子義英卒, 謚曰憲平.(원성왕, 794)

 

十一年, 春正月, 封恵忠太子之子俊邕為太子.(원성왕, 795)

 

 

원성왕 가계도가 엿 같은 점은 본기 기록에 가계가 깔끔하게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기록만 보면 원성왕의 아들이 둘(혜충, 의영)이겠구나 싶은데, 희강왕본기를 보면 김균정이 흥덕왕의 사촌이라고 했고, 흥덕왕은 혜충태자의 아들이니 김균정은 혜충태자의 형제의 아들이어야 하고, 그런데 의영태자는 기록상 자식이 없고, 따라서 제 3의 아들이 있게 됩니다. 바로 그 사람이 '예영', 일명 '효진'입니다. 저는 신라사 전공자도 아닐 뿐더러, 경주 김씨 가계도를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위의 가계도를 맞는 것으로 간주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여튼, 아들인 김인겸(혜충)은 791년에 죽었고, 다른 아들인 김의영을 태자로 두었더니 794년에 죽습니다. 또 다른 아들인 김예영이 있었으나, 왜인지 태자위가 처음 죽은 김인겸의 아들인 김준옹에게로 갑니다. 원성왕이 14년만에 죽은 뒤, 김준옹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소성왕입니다.

 

 

 

소성왕은 원성왕의 손자입니다. 하지만 소성왕도 불행했습니다. 소성왕은 799년에 왕위에 올라 800년에 죽고 맙니다. 그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소성왕 사후 그 아들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잇는 것으로 보아, 나이가 부족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소성왕이 죽고 그 아들인 김청명이 왕위에 오릅니다. 바로 애장왕입니다.

 

 

 

애장왕은 원성왕의 증손자입니다. 13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너무 어려서 '언승'이 섭정했다고 하는데, 언승은 바로 소성왕의 형제이자 애장왕의 삼촌입니다. 애장왕의 불행은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그리고 장성한 삼촌이 눈에 불을 켜고 섭정으로서 정치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애장왕은 10년 동안 통치했고, 23살?에 삼촌'들'의 쿠데타로 잡혀 죽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바로 섭정이었던 김언승과 그 동생인 김제옹입니다. 나중에 흥덕왕본기에는 왕의 휘가 '수종'으로 나오는데, 아마 김제옹과 김수종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9

 

애장왕 시해 사건(삼국사기 애장왕본기 중)

원성왕은 선덕왕과 함께 무열왕계의 계승을 끝장내고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왕계는 원성왕의 후손들이 대개 독점하죠. 원성왕 본인의 치세는 무난했던 것 같지만, 그 후손들의 ��

philosophistory.tistory.com

 

 

 

 

 

헌덕왕은 원성왕의 손자이고, 소성왕의 동생이자 애장왕의 삼촌입니다. 조카를 잡아 죽인 업보를 받는 것인지, 헌덕왕의 치세에는 외부의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기근이 많았습니다. 신라 백성들이 절강까지 가서 레이드를 뛰었답니다. 탁발부에서는 절도사들이 깽판을 칩니다. 권력 공백이 생기자 아마 해좇들도 많이 생겼을 겁니다. 그 와중에 김헌창이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왕의 사촌과 오촌인 김균정, 김우징 부자 등이 잘 진압했긴 하지만, 멍가 뒷통수가 가렵습니다. 헌덕왕은 재위 18년만에 죽었습니다. 왕위는 동생이 이었으니, 바로 흥덕왕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헌덕왕본기나 흥덕왕본기에는 쿠데타 같은 것이 있었다는 말은 없고, 정작 헌덕왕 본인에게 왕자가 있었다는 말도 없는데, 본기 중에 '태자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聘角干忠恭之女貞嬌爲太子妃.(헌덕왕, 822)

 

 

부드럽게 생각하면 아들이 없으니 동생을 태자로 봉했었고, 그래서 동생에게 충공의 딸 정교를 시집보냈다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동생을 태자로 봉했다는 말도 없으니 멍가 찜찜하네요. 맞다면 아마 흥덕왕본기에 나오는 장화부인이 이 사람이겠죠? 또한 여기 나오는 충공이 바로 김인겸의 아들이자 헌덕왕, 흥덕왕의 형제인 김충공이라면, 이 새끼들은 삼촌이 조카를 다른 삼촌에게 시집보낸 것이 됩니다. 그 때와 지금은 다르겠지만, 좀 지저분하네여.

 

 

 

흥덕왕은 원성왕의 손자이자 헌덕왕의 친동생입니다. 흥덕왕은 낭만주의자라서, 826년에 왕비가 죽자 새장가를 들지 않고 죽을 때까지 수절했습니다. 왕비가 자기 조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습니다... 흥덕왕의 지조와 낭만은 차치하더라도, 이에 흥덕왕의 자손이 없어 흥덕왕 사후 다시 친척들끼리 잡아 죽이는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만 김의종이라는 왕자를 탁발부에 숙위하도록 보냈다는 말은 있습니다.

 

 

遣王子金義琮, 謝恩兼宿衛.(흥덕왕, 836)

 

 

김의종은 왕자라고 하는데, 흥덕왕의 치세 동안 태자를 두었다는 기록도 없고, 흥덕왕 사후 태자가 어떻게 되었다는 기록도 없으니 이상합니다. 이 김의종은 사실 나중에 헌안왕으로 오른 '誼靖'과 동일인이라고 보는 말이 많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김의종은 김균정의 아들이고, 흥덕왕의 왕자는 아니게 됩니다. 아마 예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외교 사절용 '가왕자'가 아닐까 합니다. 위 가계도에는 표시돼 있지 않습니다.

 

 

 

흥덕왕이 적절한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시 원성왕의 후손들 사이에 싸움이 터졌습니다. 이번엔 원성왕의 손자이자 흥덕왕의 사촌인 김균정과 원성왕의 증손자이자 흥덕왕의 오촌 조카인 김제륭이 싸웠습니다. 사실 가계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김균정과 김제륭은 서로 삼촌, 조카 사이입니다. 이번엔 패싸움을 벌였는데, 김균정의 아들이자 김제륭의 사촌인 김우징, 그리고 김주원에서 내려오는 저 먼 친척인 김양이 김균정의 편을 들었습니다. 김제륭측에는 같이 원성왕의 증손자이자 김제륭의 육촌 형제인 김명과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쩌리 이홍이 붙었습니다. 이 싸움에서는 김제륭이 이기고, 난 중에 김균정은 죽었으며, 결과적으로 김양, 김우징은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청해진에서 합류합니다. 이로써 김제륭이 오르니, 바로 희강왕입니다.

 

 

 

 

희강왕은 원성왕의 증손자입니다. 또한 희강왕은 헌덕왕과 반대로, 자기 삼촌을 잡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희강왕의 불행은 희강왕 본인의 세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희강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만인 838년에 '공신'인 쩌리 이홍과 육촌 김명에게 핍박 받아 자살하고 맙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희강왕 사후, 쩌리 이홍을 제치고 김명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 사람이 민애왕입니다.

 

 

 

 

 

민애왕은 원성왕의 증손자입니다. 희강왕의 육촌이고, 김균정의 오촌 조카입니다. 사실 민애왕은 아까 제가 욕했던 흥덕왕의 처, 즉 흥덕왕의 조카와는 남매 사이일 것입니다. 따라서 흥덕왕은 민애왕의 삼촌이자 자형이 되나? 개꼬여 있네요. 안동 종가에 가서 물어 보는 게 더 빠르겠습니다.

 

사실 민애왕은 더 불쌍합니다. 아빠인 김균정이 죽어 칼을 갈고 있던 김우징과, 동조 세력인 김양 무리가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애왕은 838년 1월에 즉위합니다. 희강왕과 민애왕, 즉 육촌 형제끼리 서로 잡아 죽이는 걸 보고 있던, 민애왕의 사촌이자 희강왕의 육촌인 김우징이, 김양과 장보고를 끌어 들여 민애왕을 죽이러 갔습니다. 민애왕은 진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839년 1월에 일반 병사에게 잡혀 죽고 맙니다. 이에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신무왕입니다.

 

 

 

 

 

신무왕은 원성왕의 증손자입니다. 신무왕 사후에는 다행스럽게도 김씨들끼리 서로 왕 되겠다고 잡아 죽이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신무왕 사후 왕위는 신무왕의 아들이자 원성왕의 고손자인 문성왕에게 이어집니다.

 

원성왕이 지하에서 이 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처음으로 깽판 치기 시작한 헌덕왕은 죽은 뒤에 할아버지에게 많이 까였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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