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기의 군벌들(삼국사기 경애왕본기 중)

2020. 5. 15. 10:20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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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전에 다른 글에서 진성왕 시기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반란의 뿌리는 어디일까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4

 

진성왕대 민란의 뿌리는 언제일까(삼국사기 진성왕본기 중)

신라는 통일한 이후, 외부로는 큰 전쟁 없이 무난하게 멸망까지 이어졌습니다. 적어도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대로면 그렇습니다. 통일 이후에도 간혹 전쟁 기록이 확인되긴 합니다. 성덕왕 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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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저는 그 뿌리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성왕 후손들의 왕위 쟁탈전이 그에 영향을 크게 미쳤으리라 추정했습니다. 특히 822년 김헌창의 난과 838년 민애왕, 신무왕 교체 당시 쿠데타 때 그 양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김헌창의 난 때는 왕위 쟁탈이 고착화된 것은 아니었을 때였고, 이 덕분인지 중앙군이 반란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보고와 김우징의 쿠데타 당시에는 민애왕의 중앙군이 오히려 쿠데타군에게 쉽게 밀려 버립니다. 게다가 쿠데타군은 청해진에 주둔한, 중앙군 입장에서 보면 외부 세력이었죠. 수장도 김씨가 아닌, 엄마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장보고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쿠데타 당시 이미 지역 세력들이 중앙에 이반할 조짐, 정황들이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삼국사기 기록상은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국적인 이반은 없었습니다.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때는 귀족 반란이 많았습니다. 특히 한주에서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귀족 반란이 일어나도 보통은 경주에서 일어났다고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김요의 난은 이례적이죠. 경문왕본기, 헌강왕본기, 정강왕본기에는 눈에 띠는 실정은 없으나, 이 시기 왕위가 부자 계승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874년의 이찬 근종의 난 때는 대궐로 반란군이 처들어오기도 했다니, 그 시대는 적힌 것 만큼이나 평화롭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황상, 국가적인 피로가 이렇듯 착실하게 누적되어 왔고, 그것이 진성왕 때 귀좇을 넘어 평민들에게까지 반란으로 번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889년에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은 김헌창의 난처럼 전국적인 난은 아니었습니다. 사벌주(경북 중북부)에서 일어난 반란이었고, 진압하는 중 중앙군이 애를 먹긴 했으나, 그 뒤에 원종과 애노가 지구를 정복했다는 말이 없는 걸로 보아서는 와해되거나 다른 반란으로 흡수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원종과 애노의 난은 '반란' 그 자체로는 김헌창의 난처럼 아주 거대한 반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반란은 신라 하대 말기에 터진 반란 중 가장 첫 머리에 있습니다. 사실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정황상 다른 '도좇'들도 이미 난립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원종과 애노의 반란 이후 진성왕본기엔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五年, 冬十月, 北原賊帥梁吉, 遣其佐弓裔領百餘騎, 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内酒泉等十餘郡縣.(진성왕, 891)

 

六年, 完山甄萱, 㩀州自稱後百濟, 武州東南郡縣降屬.(진성왕, 892)

 

十年, 賊起國西南, 赤其袴以自異, 人謂之赤袴賊. 屠害州縣, 至亰西部牟梁里, 劫掠人家而去.(진성왕, 896)

 

 

짝눈미륵과 견훤이 본기에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896년은 적고적이라고 해서, 붉은 바지()를 입은 힙스터들이 경주 서쪽까지 와서 차별과 '혐오'를 멈추어 달라고 하고 돌아갔습니다. 견훤은 이 시기에 이미 서남부 지역을 이미 다 깨트린 것으로 보입니다. 짝눈미륵은 이 때 강원도의 영서, 영동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함락시키고 다녔는데, 이런 행보는 기반 세력이 이미 갖춰져 있지 않으면 힘들죠. 열전에는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眞聖王即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欝悒不自安, 潜結箕萱麾下元㑹·申煊等爲友.(891, 삼국사기 열전 10 궁예)

 

景福元年壬子, 投北原梁吉. 善遇之, 委任以事.(892, 삼국사기 열전 10 궁예)

 

 

짝눈미륵은 891년에는 기훤에게 의탁하였고, 892년에는 양길에게 의탁했습니다. 기훤은 죽주의 도적이었고, 양길은 북원의 도적이었다고 합니다. 죽주는 안성의 이죽면이고, 북원은 북원경인데, 지금의 원주입니다. 모두 당시로는 북쪽 변경입니다. 본기와 열전 사이에 연도 편차가 조금 있는 편이지만, 일단 있는 그대로 믿기로 하면, 891년과 892년, 혹은 그 이전부터 죽주와 북원에는 기훤와 양길이 할거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기훤에 대한 기록 이전엔 열전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逺近羣盗, 蜂起蟻聚, 善宗謂乗亂聚衆, 可以得志.(삼국사기 열전 10 궁예)

 

 

연도는 없지만, 아마 891년 이전 기록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서는 아예 경주 외 지역의 주현들이 정부를 배신한 것이 반이나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김부식이와 친구들이 그 때의 반란군을 전부 상세하게 알고 있어서 그렇게 적은 것은 아니고, 아마 짝눈미륵에 대해 내려 오는 말들에서 이 말을 채록한 것이겠으나, 우리가 이 기록을 버릴 필요는 없겠죠. 이를 종합해 보면 889~891년 내외로 이미 신라는 전국적인 내란, 할거 상태에 빠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내란은 내란인데, 누가 내란을 일으켰는지 모르면 이상하겠죠? 짝눈미륵이나 견훤은 그 반역자들 중 아주 독보적이고, 유명합니다. 기훤, 양길은 짝눈미륵을 통해 알 수 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이 외에도 많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별의 별 열전들을 다 만들어서 반역자들, 못된 관리들 등의 일화를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무래도 짭사마천을 표방한 김부식이와 친구들은 그 정도의 능력이나 열정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그런 열전이나 기타 기록이 따로 없기 때문에, 정황상 등장하는 사람들이 군벌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황이 명백한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신라본기 12와 이에 해당하는 연대의 열전에는, 앞에는 나오지 않았던 '성주'나 '장군'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거든요. 특히 성주, 장군은 단독으로 나오기 보다는 앞에 특정 지역을 붙여, 예를 들어 '왜관 장군 양파'처럼 본기에 등장합니다. 이게 뭘까요? 당연히 그 지역에 할거하던 독립 세력이었겠죠. 견훤은 892년에 왕은 아니더라도 후백제를 칭했다고 하는데, 견훤 외에도 견훤이나 짝눈미륵에 밀려 눈물을 삼켰던 은메달리스트는 당시에 많았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보이는 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열전입니다. 짝눈미륵과 견훤의 열전입니다.

 

 

公州将軍弘竒來降. 삼국사기 열전 10 904 공주 장군 홍기
平壌城主将軍黔用降, 甑城赤衣·黄衣賊明貴䓁歸服. 삼국사기 열전 10 궁예 911년 이전 평양 성주 장군 검용, 증성 도적 명귀
夏五月, 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8 장군 유문(강주)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柭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8 장군 양지, 장군 명식
四年秋七月, 以甲兵五千人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9 성주 장군 홍술(의성부)
翌日, 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虜百姓, 移入全州. 太祖元逢前有功, 宥之, 攺順州下枝縣. 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30 장군 원봉(순주)

 

 

다만 열전과 본기의 연대가 조금 차이가 날 수 있음은 감안해야 합니다. 총 8명이 등장합니다.

 

이번엔 본기입니다.

 

 

秋七月, 北原賊帥梁吉弓裔貳己, 與國原等十餘城主謀攻之, 進軍於非惱城下, 梁吉兵潰走. 효공왕 899 원주 등 10여 성주들
四年, 冬十月, 國原·菁州·槐壤賊帥清吉·莘萱等, 舉城役弓裔. 효공왕 900 국원, 청주, 괴양 도적 청길, 신훤
秋七月, 尚州賊帥阿兹盖, 遣使降於太祖. 경명왕 918 상주 도적 아자개
二月, 康州將軍閠雄, 降於太祖. 경명왕 920 강주 장군 윤웅
六年, 春正月, 下枝城將軍元逢·溟州將軍順式, 降於太祖. 太祖念其歸順, 以元逢夲城爲順州, 賜順式姓曰王. 경명왕 922 하지성 장군 원봉, 명주 장군 순식
是月, 眞寳城將軍洪述, 降於太祖. 경명왕 922 진보성 장군 홍술
七年, 秋七月, 命旨城將軍城逹·京山府將軍良文等, 降於太祖. 경명왕 923 명지성 장군 성달, 경산부 장군 양문
泉州節度使王逢規, 亦遣使貢方物. 경명왕 924 천주 절도사 왕봉규
二年, 冬十月, 髙欝府將軍能文, 投於太祖, 勞諭還之, 以其城迫近新羅王都故也. 경애왕 925 고울부 장군 능문
明宗以權知康州王逢規爲懷化大將軍. 夏四月, 知康州王逢規, 遣使林彦後唐朝貢. 明宗召對中興殿, 賜物. 경애왕 927 권지강주사, 지강주사 왕봉규
二年, 春正月, 髙麗金相與草八城賊興宗戰, 不克死之. 경순왕 928 초팔성 도적 흥종
夏五月, 康州將軍有文, 降於甄萱. 경순왕 928 강주 장군 유문
秋七月, 甄萱義成府城, 髙麗洪述出戰, 不克死之. 경순왕 929 의성부 장군 홍술
順州將軍元逢, 降於甄萱. 太祖聞之怒, 然以元逢前㓛宥之, 伹攺順州爲縣. 경순왕 929 순주 장군 원봉
四年, 春正月, 載巖城將軍善弼髙麗, 太祖厚禮待之, 稱爲尚父. 初太祖將通好新羅, 善弼引噵之, 至是降也. 念其有㓛且老, 故寵褒之. 경순왕 930 재암성 장군 선필

 

 

열전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양길의 부하들을 10명이라고 하고 청길이나 신훤과 겹치지 않는다고 하면, 총 24명이 본기에 등장합니다. 다만 성주 보다는 장군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24명은 다시 열전에 나온 것과 겹치는 바가 있습니다. 열전에 정리한 8명 중 3명이 겹치므로, 총 24+5=29명이 겹치지 않고 삼국사기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게 끝은 아닙니다. 고려사에도 성주나 장군들이 나오거든요. 태조세가나 열전을 찾아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고창군 성주 김선평, 권행, 장길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고창전투에서 왕건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북미질부성주 훤달이나 이름은 모르지만 남미질부성주 같은 사람들도 나옵니다. 고려사 열전에는 다행히도 이런 사람들의 약력이 간략하게나마 남아 있으니, 보고 싶은 분들은 찾아 보시면 되겠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은 법이죠...

 

 

 

기록상으로만 3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후삼국 시기에 각지의 군벌로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엔 도적으로 직접 지칭된 자들도 있으나, 대부분 장군이나 성주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도좇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 이상의 기반을 세운 것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사람들이 아주 확실하게 독립 상태였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삼국지를 보면, 겉으로는 한나라를 따르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세력을 갖고 있는 '태수'들이 많이 나옵니다. 또한 이 태수들은 주변의 다른 거대 세력에 병합당해 사라지거나, 스스로 신속해 반독립의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라 말, 후삼국 시대의 군벌들도 이런 상태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짝눈미륵과 견훤은 군벌들 중 가장 세력이 컸고, 실제로 그 목표도 지역에서 할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지역에서 할거하는 것에 일단 그친 성주, 장군들은 후고구려나 후백제를 칭할 필요가 없었죠. 이들은 각 지역을 기반으로 웅거하면서, 세태에 따라 견훤이나 짝눈미륵 또는 왕건에게 신속했던 것 같습니다. 고려사 태조세가에 나왔던 김선평, 권행, 장길은 고창의 성주로, 본래 견훤의 편에 있었으나, 왕건으로 편을 바꾸어 고창에서 왕건이 이기는 데 지대하게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 성주, 장군들이 자기 거점을 갖고 있으면서 때에 따라 편을 바꾼 예입니다. 주로 '분쟁 지역'의 장군, 성주들이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동 소재인 하지성 장군 원봉은 왕건의 편이었으나 견훤군이 오자 성을 버리고 도주해 버립니다. 원봉은 편을 바꾼 것은 아니나, 어느 정도 '자주적'이고, '필요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다는 예는 되겠죠.

 

 

 

 

이 중 특히 특이한 사람이 바로 왕봉규입니다. 왕봉규는 경명왕본기에 천주의 절도사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천주는 중국의 천주가 아니라 경상도의 의령을 의미합니다. 절도사는 탁발부에 있던 관직으로, 사실 신라에는 없던 자리죠. 현종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으나, 탁발부의 절도사들은 자기가 부임한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갖고 있는 군벌이 되어 갔습니다. 왕봉규가 어떤 경로로 '절도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지역을 통치하는 데 나름 자부심도 있고, 배운 것도 있어 탁발부의 '나쁜 선례'를 통해 절도사를 자칭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왕봉규는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당시 탁발부가 망하고 각 지역에서 독립한 절도사들과 자칭 '정통 왕조'들이 서로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후당의 명종은 왕봉규에게 회화대장군이라는 직위까지 주었습니다. 이런 위치까지 올라간 '군벌'은 직접 나라를 세워 버린 견훤이나 짝눈미륵밖에 없었기 때문에, 왕봉규가 경남 서부 지역에서 한 끗발 날리던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죠. 하지만 927년 기록을 끝으로 왕봉규는 삼국사기에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견훤이나 왕건에게 쓸려가 버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왕건, 견훤은 당시 중소, 혹은 중견 군벌들에게 자연재해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짝눈미륵에게 투항했다는 평양 성주 장군 검용과 증성의 도적 명귀도 다른 이유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평양은 남평양이라 하여 지금의 서울 일부를 가르키기도 하지만, 이 때 평양이라는 건 우리가 아는 대동강의 평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효공왕본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秋七月, 弓裔浿西道漢山州管内三十餘城, 遂都於松岳郡.(효공왕, 898)

 

浿江道十餘州縣, 降於弓裔.(효공왕, 904)

 

 

전부 짝눈미륵에 대한 기록입니다. 898년에는 패서도와 한산주의 여러 성들을 빼앗았다고 하고, 904년에는 패강도의 10여 개 현이 짝눈미륵에게 항복했다는 말입니다. 특이한 것은 한산주, 패서도, 패강도가 달리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은 황해도 지역을 패서도로 보고, 패강도와는 같다고 하며, 한산주에 속한 것이라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해 쓰고 있다는 점을 보면, 패서도와 패강도도 다른 지역이고, 아마 한산주와도 별개의 행정 구역이었을 것 같습니다. 패서는 예성강 이서의 황해도 지역이라고 생각하고, 한산주는 예성강 이남의 황해도 동부 일부와 경기도 지역이라고 한다면, 패강도는 아마 대동강 이북 지역일 수 있거든요. 이 점에 대해선 제가 다른 글에서 충분히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적진 않지만, 평양 성주 장군 검용의 존재도 패강도가 대동강 이북이라는 설에 부합하는 또 하나의 정황 증거로써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명귀가 할거하던 증성은 평안남도 강서군의 증산이라고 하니, 명귀 역시 정황 증거일 수 있겠습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29

 

패강진과 패강장성(삼국사기 헌덕왕본기 중)

조카를 잡아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은 826년 8월에 죽습니다. 그런데 헌덕왕이 죽기 직전인 7월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十八年, 秋七月, 命牛岑太守白永, 徴漢山北諸州郡人一萬, 築浿江長城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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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후삼국 시기, 적어도 진성왕 말년 이후나 효공왕 이후 시점에서 삼국사기에 성주, 장군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라 조정이나 궁예, 견훤, 왕건에 형식적으로 신속하고 반독립 상태를 유지했던 군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군벌들은 때에 따라 신속하는 세력을 바꾸기도 하고, 혹은 '충절'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왕봉규 같은 사람들은 절도사를 자칭하고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기도 했지만 주요 세력에 비하면 힘의 격차가 아주 컸던 것 같습니다. 검용처럼, 그 자체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 때문에 다른 분야의 연구에 단서를 주는 사람도 있고, 김선평, 권행, 장길 같은 사람들처럼 그 역할이 후삼국의 통일로 직결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려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말 하는 호족들이 아마도 이 군벌과 의미가 거의 비슷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제가 어릴 때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호족과 제가 말씀드린 군벌들이 아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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