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강진과 패강장성(삼국사기 헌덕왕본기 중)

2020. 5. 6. 15:16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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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조카를 잡아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은 826년 8월에 죽습니다. 그런데 헌덕왕이 죽기 직전인 7월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十八年, 秋七月, 命牛岑太守白永, 徴漢山北諸州郡人一萬, 築浿江長城三百里.

 

 

대충 7월에 우잠태수 백영에게 한산 북쪽 여러 주와 군의 사람 1만 명을 징집해 패강에 장성 300리를 쌓게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잠은 황해도의 금천으로 보는데, 경기도에서 서북쪽으로 황해도로 넘어가는 입구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한산은 한산주나 북한산 또는 남한산을 의미할 텐데, 여기서는 북한산이라 보는 게 맞겠죠. 패강은 사실 불분명합니다. 삼국사기에서는 패강 또는 패수가 지칭하는 강이 다양한데, 넓게는 압록강도 패강으로 보고, 일반적으로는 대동강이나 예성강을 지칭하며, 가까이는 정황상 임진강도 가리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浿江長城'이라는 말이 패강에다 장성을 쌓긴 쌓았는데, 그 위치가 어디냐는 걸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의 '장성'은 이후 기록에는 안 나오거든요.

 

 

 

 

사실 이 문제는 신라의 서북 지역 국경이 어디인지를 추적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나당전쟁 당시 신라는 황해도에서 꿈을 키워 가던 안승과 검모잠의 짭고구려와 함께 탁발씨와 싸웠습니다. 탁발씨의 말갈 압잡이인 이근행이 평양 이남으로 공격해 왔을 때도 용감히 싸웠습니다. 신라, 짭고구려 연합군은 백수성(재령?)에서 탁발부를 크게 이겼지만, 이어 석문(서흥 서부?)으로 추격해 갔다가 대패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해 주세요.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6

 

백수성전투와 석문전투(삼국사기 문무왕본기 중)

신라가 사비 지역에 소부리주를 만들어서 사실상 옛 백제 영토에 대한 전역이 마무리되었을 때, 탁발선비는 야만족 이근행과 야만족 고간을 보내 평양에서 남진하게 합니다. 백제가 망하고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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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신라는 짭고구려를 전략적으로 포기하고, 예성강, 임진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다시 구축하게 됩니다. 즉, 이 당시 신라는 경기도와 황해도 동부 끄트머리를 영유했을 뿐, 서부 지역은 일시적으로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매초성과 기벌포에서 탁발부가 대패하고 적어도 대동강 이남에서는 꺼져버린 뒤, 신라는 지속적으로 황해도 서부 지역을 행정 통치에 편입시켜 나갑니다.

 

 

冬, 築松岳·牛岑二城.(효소왕, 694)

 

築開城.(성덕왕, 713)

 

 

상술한 것처럼, 우잠은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송악은 지금의 개성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713년의 개성도 역시 지금의 개성으로 봅니다. 대구가 넓은 것처럼 개성도 넓겠죠? 나당전쟁이 676년에 끝났으니까, 이렇게 보면 3~40여 년 동안 겨우 개성, 금천까지밖에 못 갔나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때까지는 탁발부와 신라가 아직 서먹서먹해서 서로 손가락 엿도 안 날리던 사이였거든요. 전쟁 이후 신라도 내부를 정리하느라 바빴고, 탁발부도 주변의 층간소음을 해결한다고 바빴습니다.

 

이런 국면은 발해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발해가 건국되고, 무왕 당시 거란의 반란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북방에서 군사 활동을 펼치자 탁발부가 신라에 도와 달라고 먼저 부탁해 왔거든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해 주세요.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2

 

신라, 당의 대 발해 동맹(삼국사기 성덕왕본기 중)

우리는 남북국시대에 대해 잘 모릅니다. 남국은 그럭저럭 아는데 북국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죠. 발해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게 없습니다. 단편적으로나마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점들은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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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5

 

마도산 전투와 730년대 국제 위기

* 마도산 전투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성덕왕본기에 이 당시 국제전의 단면만이 나와 있습니다. 지난 번에 성덕왕 시기 발해 공격을 설명하면서 발해와 탁발부 사이의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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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은 실제로 군사를 일으켰고,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발해군은 퇴각했습니다. 그리고 탁발부에서는 어차피 지배할 수 없는, 사실 발해가 건국되기 전에도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던 황해도의 고구려 영토를 신라의 영토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실 이 영토 '분할'은 이미 무열왕과 짝눈이 사이에 협의돼 있던 것을 탁발씨 야만좇이 안 지키다가 이 때 이르러서야 선심 쓰는 척 지킨 것이었습니다.

 

 

義忠迴, 勑賜浿江以南地.(성덕왕, 735)

 

三十五年, 夏六月, 遣使入賀正, 仍附表陳謝曰, “伏奉恩勑, 賜浿江以南地境. 臣生居海裔, 沐化聖朝. 雖丹素爲心, 而功無可効, 以忠貞爲事, 而勞不足賞. 陛下降雨露之恩, 發日月之詔, 錫臣土境, 廣臣邑居, 遂使墾闢有期, 農桑得所. 臣奉絲綸之旨, 荷榮寵之深, 粉骨麋身, 無由上荅.”(성덕왕, 736)

 

 

여기서 패강은 일반적으로 대동강으로 봅니다. 대동강 이북의 평양은 어차피 갖지도 못하면서 왜 붙들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기록상 대동강 이남을 명목상 신라의 영토로 인정해 준 거죠. 이후 신라는 적극적으로 황해도 중부, 서부를 영토로 편입하기 시작합닌다. 먼저 성덕왕 생전에 평양주와 우두주를 살피고 다녔습니다

 

 

遣伊湌允忠·思仁·英述, 検察平壌·牛頭二州地勢.(성덕왕, 736)

 

 

평양주는 아마 평양이나 그 이남의 황해도를 의미할 것이고, 우두주는 영서 지방을 의미하는데 춘천이 있는 남부가 아니라 북부를 의미하겠죠.

 

 

遣阿湌貞節䓁, 檢察北邉, 始置大谷城等十四郡縣.(경덕왕, 748)

 

二十一年, 夏五月, 築五谷·鵂巖·漢城·獐塞·池城·徳谷六城, 各置太守.(경덕왕, 762)

 

 

경덕왕 때는 대곡성과 14개 군, 현을 두었다고 합니다. 대곡은 황해도의 평산입니다. 군, 현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맥락상 황해도 지역일 것 같네요. 또한 이 지역에는 원래 고구려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 때 신라의 행정 통치가 시작되기 전에는 독립 국가를 이루진 못하더라도 아마 신라의 간접 지배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762년에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의 성 6개를 쌓고 태수를 두었다고 했습니다. 한성은 특히 재령에 있던 고구려의 큰 도시였죠. 모두 황해도에 소재합니다.

 

 

冬十一月, 雉岳縣䑕八十許向平壤.(혜공왕, 769)

 

 

혜공왕 때는 치악현(황해도 배천)에서 평양으로 쥐떼가 몰려 갔다는 말이 있는데, 이걸 평양을 영역화하려는 신라의 시도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사람도 있으나, 일단 이 기록만으로 구체적인 사실을 추론하긴 힘들어 보입니다.

 

 

二月, 王巡幸漢山州, 移民戸於浿江鎭.(선덕왕, 782)

 

 

그런데 선덕왕 때 문제가 될 기록이 있습니다. 왕이 한산주(경기도)를 순행하고,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옮겼다고 했거든요. 여기서 패강진이 문제입니다. 진은 군대가 주둔하는 진을 의미하기도 하고, 행정 구역이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선덕왕본기의 이 기록 이전에 패강진이 나온 예가 없고, 패강이라는 것은 상술한 바와 같이 압록강,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등 의미가 많아서 의미가 좀 애매한 것입니다. 여기서 맥락상 패강진은 한산주를 순행한 기사와 함께 실려 있으므로, 아마 대동강이나 예성강, 임진강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사실 그 때 임진강은 군사 방어선으로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예성강이나 대동강 중 하나로 보입니다.

 

이병도는 패강진을 우봉(금천)으로 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748년에 두었다는 대곡성이 바로 패강진이라고 보기도 했죠. 그럼 평산이 됩니다. 둘 다 예성강 근처이기도 하고요. 금천이든 평산이든, 이렇게 보면 패강진은 신라의 최전방이자 신규 영토인 황해도를 통치하는 행정 기관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이 의견들은 신라의 서북 국경은 탁발부와 협의한 대로 대동강이기 때문에, '패강진'이긴 하지만 대동강 이북은 아닐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깔고 있기도 하죠.

 

 

 

요즘은 다른 의견들도 있습니다. 패강진이라는 것이 대동강 이북 지역을 관할한다는 것입니다. 정황상 증거가 좀 있습니다. 일단 736년에 평양주를 살피고 다녔다는 점,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5의 평양부 기록에 패강진이 있다는 점, 패강진이 한산주와는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취급된다는 점, 황해도 일대가 패강진이 아니라 한산주의 관할 구역이었다는 점 등입니다. 일단 근거로써 명확한 것들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조 시대의 평양부는 황해도를 관할하지 않았습니다. 황해도는 해주부와 개성부로 따로 구역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즉, 평양부(대동강 이북?)에 패강진 기록이 있다는 것에는 주목할 만합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조 중기에야 나온 책이기 때문에, '명주군왕'을 논할 때처럼, 그 신빙성을 좀 의심해 볼 만합니다. 떠도는 이야기를 적어 둔 것일 수 있으니까요.

 

여러 기록에서 패강은 한산주와 별개로 취급됩니다. 특히 김헌창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호응한 주와 호응하지 않은 주가 다음과 같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反叛, 國號長安, 䢖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 菁州都督向榮, 脫身走推火郡, 漢山·牛頭·歃良·浿江·北原等, 先知憲昌逆謀, 舉兵自守.(822, 헌덕왕)

 

 

가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한산, 우두, 삽량, 패강, 북원 등은 이미 헌창의 반란을 알고 병사를 일으켜 지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별개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니 하는 기록도 있는데, 거긴 패강진으로만 나와 있지, 한산주가 병기돼 있지 않기 때문에 아주 확실한 증거는 아니겠죠. 물론 행정 단위가 분리돼 있다고 패강진이 대동강 이북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산주가 경기도만, 그리고 황해도를 패강진이 관할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황해도도 한산주에 들어간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일단 조당집이라는 책의 권17을 보면 798년에서 868년까지 살았다는 도윤이라는 스님이 한산의 휴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휴암은 황해도의 봉산이므로, 황해도 지역도 한산주 관할이라는 말이 됩니다.

 

두 번째는 삼국사기의 지리지입니다. 지리지 한주 부분을 보면, 개성군, 송악군, 우봉군, 토산군, 영풍군, 해고군, 폭지군, 중반군, 오관군, 서암군, 취성군이 한주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군들의 소재는 모두 지금의 경기 서북부 및 황해도입니다. 이 중 몇 개 군을 제외하면 모두 예성강 이서 지역에 있고, 특히 취성군은 바로 대동강 남쪽의 평양 일부 및 중화 등에 있었습니다.

 

 

 

 

대동강 이남의 황해도까지 한산주 관할이라면, 패강진은 어디 있는 곳일까요? 아마 평양이겠죠?

 

 

 

만약 이 말처럼 패강진이 평양, 혹은 넓게 봐서 대동강 이북이라고 한다면, 패강진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 놓은 기관일까요?

 

먼저 떠오르는 건 발해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서북 국경이 불확실한 것처럼, 발해의 서남 국경 역시 아주 불명확합니다. 예를 들어 정약용은 발해가 살수(청천강) 이남을 지배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덕왕 때 신라가 발해에 대해 군사 행동을 벌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엔 있지만, 공격하러 간 '남부의 수도'가 어디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즉, 발해 역시 남쪽으로 어디까지 내려왔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사실 동부는 그렇다 치고, 서부에서 신라와 발해가 접경하고 있었는지도 아주 명확하지 않습니다. 교전 기록도 없고요. 따라서 아마 실질적으로 발해를 막기 위해 둔 것은 아닐 겁니다.

 

물론 발해가 아니더라도 평안도에 아무도 안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근행이의 족속 야만인들이 거기 살았을 거거든요. 다만 말갈 야만좇들도 기록을 남겨 놓은 건 아니기 때문에, 동북 국경에서 신라에게 가끔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서북 국경에도 모여 살며 깽판을 쳤을 것 같긴 한데, 정작 서북 지역에서 신라와 말갈이 전쟁을 벌였다는 말은 없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전말을 알기는 힘듭니다. 만약 패강진이 육상에서 무언가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그 목표는 말갈이겠죠?

 

바다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탁발부 현종 때 무왕이 등주를 불태운 것(732)을 생각하면, 발해만과 서해의 바닷길에는 여전히 오가는 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다만 고구려 통치에도 실패하고, 신라와의 전쟁에서도 탁발부가 깨지면서 요동에서 평양까지가 무주공산으로 황폐화되고, 정약용의 의견을 따른다면 발해가 요동에서 살수 이북으로 들어올 때(선왕 시기?, 818~830)까지 특별히 지배 세력이 없었다면, 이 지역에는 해적들이 창궐하지 않았을까요? 732년의 공격에서도 발해군이 해적을 동원했다는 말이 있는 점, 헌덕왕 때 기근으로 백성들이 절강까지 레이드를 뛰었던 점, 청해진의 설치 목적이 해좇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시대 서해는 난장판이었을 것 같습니다. 신라가 새로 통치 영역으로 만든 황해도 지역이 평야가 많아 곡창 지대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해좇들의 약탈에서 패강(대동강)과 해안을 방어하는 게 목적은 아니었을까요?

 

생각을 좀 바꿔 볼 수도 있습니다. 군진이라는 것이 방어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어딘가로 나아가는 교두보로도 쓰이는 법이니까요. 대동강 이북을 영역화하기 위해 대동강 주변에다가 둔 게 아니냐는 거죠. 이렇다고 할 때, 대동강 이북 지명들이 신라본기에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로 보아 사실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헌덕왕이 죽기 직전에 쌓았다는 패강의 장성이라는 것도, 그 '패강'이 강이 아니라 '패강진'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패강장성'의 소재 가능 지역은 황해도에 국한되지 않고, 멀리 가진 않겠으나 대동강 이북일 수도 있게 됩니다. 황해도와 평안도 남부 지역에는 '장성'으로 추측될 만한 것들이 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안도에는 대령강장성이 있는데, 이건 평안북도니까 해당되진 않겠네요.

 

어떻게 해석하든, 패강장성이라는 것은 아마 평안도 남부나 황해도 일대에 일던 장성일 것이고, 그 위치에 따라 패강진을 해석하는 방식처럼, 그 쓰임새나 목적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놈들은 황해도, 평안도의 장성을 보고 만리장성의 끝이 아니냐고 한다던데, 아마 그건 아닐 거에요. 성의 형식이 쟤들 거하곤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자세한 건 전공자에게 물어 보세요. 궁예가 등장한 이후엔 패강도, 패서도 같은 말도 나오며, 한산주도 독립적으로 언급됩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는 이 세 구역이 서로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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