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 2 - 수신 - 1 - 군자는 반성하고, 소인은 반성하지 않는다

2021. 9. 26. 02:05순자 이야기/원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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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安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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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0년 5월 7일 12시 24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98

 

순자 - 2 - 수신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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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99

 

<하단 주석> 순자 - 2 - 수신 - 1 - 군자는 반성하고, 소인은 반성하지 않는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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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善,修然必以自存也;見不善,愀然必以自省也。善在身,介然必以自好也;不善在身,菑然必以自惡也。

故非我而當者,吾師也;是我而當者,吾友也;諂諛我者,吾賊也。故君子隆師而親友,以致惡其賊。好善無厭,受諫而能誡,雖欲無進,得乎哉!

小人反是,致亂而惡人之非己也,致不肖而欲人之賢己也,心如虎狼、行如禽獸而又惡人之賊己也。諂諛者親,諫争者疏,修正爲笑,至忠爲賊,雖欲無滅亡,得乎哉!

詩曰:

「噏噏呰呰,亦孔之哀。謀之其臧,則具是違;謀之不臧,則具是依。」

此之謂也。

 

 

[남에게서] 옳은 점을 본다면, 다잡는 태도로 자기[에게도 옳은 점이 있는지]를 꼭 살펴야 하고, [남에게서] 옳지 않은 점을 본다면, 부끄러워하는 태도로 자기[에게도 옳지 않은 점이 있는지]를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見善/修然必以自存也//見不善/愀然必以自省也, ◈ 見善의 見은 용언으로, 아마 ‘보다’는 말일 것이다. 善을 받는다. ◈ 善은 체언으로, ‘옳은 점’을 이를 것이다. 善은 善美라는 말처럼, 美와 같은데, 美는 ‘바로잡다’는 뜻이다. 따라서 善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는 체언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옳은 점’이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善을 ‘좋다’라고 보면, 단순히 좋은 일을 보았다고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래서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禮記》 「學記」에 君子知至學之難易/而知其美惡, ‘君子는 至學의 難易를 깨우치고, 그 美惡을 깨우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美惡/說之是非也, ‘美惡라는 말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표현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옳다’라고 풀이될 수 있으니, 곧 ‘바로잡다’라고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앞의 「勸學」에 曷足以美七尺之軀哉, ‘어떻게 일곱 자나 되는 몸 전체를 美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글에서도 美는 ‘바로잡다’는 의미였다. ◈ 修然은 아마 자신을 ‘단속하는 모습’을 이를 것이다. 修는 ‘다스리다’, ‘닦다’, ‘수양하다’, ‘바로잡다’는 말이므로, 修然은 아마 ‘바로잡는 모습’, ‘다스리는 모습’, 즉 자신을 ‘다스리는 모습’을 뜻할 것이다. 修然이라는 표현은 이 글 외에는 사용된 예가 없어서 이렇게 의미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楊倞은 修然/整飭貌, ‘修然은 정돈하는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 必은 부사어로, ‘반드시’, ‘꼭’이다. ◈ 以自存也의 以는 ‘~를’이다. 自를 받는다. 以自省也의 以도 그렇다. ◈ 自는 체언으로, ‘자신’을 이른다. ◈ 存은 용언으로, ‘살피다’, ‘생각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存은 王念孫이 지적하였듯, 뒤의 省처럼 ‘반성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爾雅》 「釋詁」에 在/存/省/士/察也, ‘在, 存, 省, 士는 살피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점은 王念孫 역시 언급해 두었다. 또, 《禮記》 「祭義」에 致愛則存/致愨則著, ‘愛를 지극하게 하면 存하고, 愨을 지극하게 하면 著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存著則謂其思念也, ‘存과 著는 생각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에 있고, 또 마음에 드러나니, 이는 마음 속에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또, 《書》 「虞書 舜典」에 在璿璣玉衡, ‘璿璣와 玉衡을 在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安國과 蔡沈은 모두 在/察也, ‘在는 살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王念孫은 爾雅/在/存/省/察也[周官司尊彝/大喪存奠彝///注/存/省也///大傳/五曰存愛///注/存/察也/察有仁愛者///大戴記曾子立事篇/存往者/在來者///在存/皆察也], ‘《爾雅》에 “在, 存, 省은 살피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王先謙의 부연 : 《周》 「官」의 司尊彝 부분에, “大喪이 나면, 奠, 彝를 存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한 주석에서 “存은 살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大傳」에 “다섯 번째는 存愛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한 주석에서는 “存은 살피다는 뜻이니, 仁愛를 품고 있는지 살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大戴記》 「曾子立」에 “지난 일을 存하고, 닥칠 일을 在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在와 存은 모두 살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周》 「官」은 《周禮》 「春官宗伯」을 이른다. 이에 대한 주석은 鄭玄의 주석을 이른다. 「大傳」은 《禮記》의 편이다. 「大傳」에 대한 주석은 鄭玄의 주석을 이른다. 孔穎達 역시 똑같이 풀이하고 있다. 《大戴記》 「曾子立」은 《大戴禮記》 「曾子立事」를 이른다. ◈ 見不善의 見은 용언으로, 아마 ‘보다’는 말일 것이다. 不善을 받는다. ◈ 不善은 명사구로, ‘옳지 않은 점’을 이를 것이다. ◈ 愀然은 ‘부끄러워하는 모습’, ‘근심하는 모습’, ‘낯빛을 바꾸는 모습’이다. 愀는 ‘근심하다’, ‘걱정하다’는 말이다. 《史記》 「蘇秦列傳」에는 齊王愀然變色, '齊王이 愀然하게 낯빛을 바꾸었다'라는 말이 있다. 《禮記》 「哀公問」에는 孔子愀然作色, '孔子가 愀然하게 낯빛을 바꾸었다'라는 말이 있고, 《大戴禮記》 「哀公問於孔子」에도 孔子愀然作色, '孔子가 愀然하게 낯빛을 바꾸었다'라는 말이 똑같이 있다. 鄭玄은 愀然/變動貌也//作/猶變也, '愀然은 바뀌는 모습이다. 作은 변하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 愀然이라는 말은 蹵然이라고 가차해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莊子》 「德充符」에 子產蹵然改容更貌曰, ‘자산이 蹵然하여 낯빛과 용모를 고치고 말했다’라는 말이 있고, 또 《莊子》 「大宗師」에 仲尼蹵然曰, ‘仲尼가 蹵然하여 말했다’라는 말이 있으며, 《莊子》 「應帝王」에 陽子居蹵然曰, ‘陽子居가 蹵然하여 말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蹵然 역시 愀然과 같다. 蹵然은 蹴然으로 되어 있기도 한데, 같은 말이다. 그러면 蹵 또는 蹴이 愀의 가차자라는 점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문맥상 蹵然이 愀然처럼 해석된다. 《莊子》에 대해 成玄英은 蹴然/驚慚貌也, '蹴然은 놀라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蹵然起謝, '낯빛을 바꾸고 감사해 하였다'라고 했다. 愀然과 같다. 두 번째로, 발음이 비슷하다. 《莊子》에 대해 陸德明은 蹵에 대해 子六反, '蹵는 子와 六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는다. 그런데 《禮記》 「哀公問」의 愀에 대해서는 愀/七小反/舊慈糾反/又在由反/又音秋/又子了反/下同, '愀는 七과 小의 반절로 읽는다. 옛날에는 慈와 糾의 반절로 읽는다. 在와 由의 반절로 읽기도 하고, 秋라고 읽기도 하며, 子와 了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子와 六의 반절이면 '쥬'라고 읽힐 것이고, 「哀公問」의 愀는 순서대로 '초', '쥬', '쥬', '추', '죠'라고 읽혔을 것이다. 이렇듯 발음이 유사하였기에 가차해서 쓰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愀然/憂懼貌, ‘愀然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 省은 용언으로, ‘살피다’, ‘반성하다’는 말이다. ◈◈ 楊倞은 言見善必自整飭/使存於身也, ‘옳은 일을 보면, 반드시 자신을 단속하여, 자신에게도 옳은 점이 있게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또 自省其過也, ‘스스로 자기 잘못을 반성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王念孫은 見善必以自存者/察己之有善與否也/見不善必以自省者/察己之有不善與否也//楊解自存/失之, ‘見善必以自存이라는 말은, 자신이 善한 점이 있는지의 여부를 살핀다는 말이고, 見不善必以自省이라는 말은, 자신이 不善한 점이 있는지의 여부를 살핀다는 말이다. 楊倞은 “자신에게 있다”라고 풀이했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王念孫이 지적하였듯, 楊倞은 ‘자신에게 있게 한다’는 식으로 풀이했는데, 이는 틀렸다. 楊倞은 存을 ‘살피다’가 아니라 ‘있다’라고 풀이하였기 때문에 글 전체의 의미가 틀어져 버린 것이다. 한편, 王念孫은 ‘자신에게 善한 점이나 不善한 점이 있는지를 살핀다’라고 풀이하였는데, 내 생각에는 이 말도 틀린 것 같다. 荀子는 살아 가다가 남에게서 ‘옳은 점’이나 ‘옳지 않은 점’이 발견되었을 때,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孃破가 포악한 짓을 일삼는다면, 나는 孃破를 보고 나 자신도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는지 살펴야 하고, 孃破에게 옳은 점이 보인다면, 나는 孃破를 보고 나 자신도 옳게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나 자신에게 옳은 점이 나왔다면, 왜 자신을 추스려서 자신을 살핀다고 하겠는가. 자신에게서 옳은 점이 나왔으면, 만족하거나, 아니면 더 분발하면 될 뿐이지, 자신을 살필 필요는 없다.) [반성한 결과,] 자신에게 옳은 면이 있다면,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꼭 자신을 자랑스러워해야 하고, 자신에게 옳지 않은 면이 있다면, 죄를 지은듯 반드시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한다.(善在身/介然必以自好也//不善在身/菑然必以自惡也, ◈ 善은 체언으로, ‘옳은 점’이다. ◈ 在는 용언으로, ‘있다’, ‘존재하다’는 말이다. 身을 받는다. ◈ 身은 체언으로, ‘자신’이다. ◈ 介然은 아마 ‘혼자 있는 모습’, ‘혼자서’, ‘홀로’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남에게 드러내어 자랑할 것 없이, ‘혼자’ 좋아하면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나는 ‘그러내지 않다’처럼 의역하였다. 《孟子》 「盡心 下」에 山徑之蹊閒介然/用之而成路//爲閒不用/則茅塞之矣, ‘산속의 샛길은 介然한데, 사용하면 길이 된다. 그러나 잠시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풀이 자라 막아 버린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介然은 ‘고립된 곳에 있다’, ‘혼자 있다’라는 의미다. 趙技나 孫奭은 介然을 따로 풀이하지 않았는데, 아마 흔히 사용하던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朱熹는 介然/倏然之頃也, ‘介然은 아주 잠깐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山徑之蹊閒介然/用之而成路가 아니라 山徑之蹊閒/介然用之而成路처럼 읽어야 한다. 이렇게 보아도 말이 되지만, 다른 글들에서 介然이 사용된 사례를 볼 때, ‘혼자 있다’처럼 해석하는 편이 더 낫다. 또, 《漢書》 「律曆志 上」에 銅爲物之至精/不爲燥溼寒暑變其節/不爲風雨暴露改其形/介然有常, ‘銅은 物의 지극한 精이다. 건조하거나, 습하거나, 춥거나, 덥거나, 그 절조를 바꾸지 않고, 비바람이 내리고, 이슬이 내려도 형태를 바꾸지 않으니, 介然하게 불변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萬物이 주변 환경에 따라 변하는 중에도, 銅, 즉 ‘구리’는 ‘홀로’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즉, 이 介然 또한 ‘홀로’, ‘혼자’라는 말이다. 顏師古는 介然/特異之意, ‘介然은 특이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다른 글들에서 介然이 사용된 사례를 볼 때, ‘혼자’처럼 해석하는 편이 더 낫다. 또, 《漢書》 「公孫劉田王楊蔡陳鄭傳」에 九江祝生奮史魚之節/發憤懣/譏公卿/介然直而不撓/可謂不畏彊圉矣, ‘九江의 祝生은 史魚의 절조를 떨쳐, 분노하고, 公卿을 헐뜯으며, 介然 올곧고 흔들리지 않았으니, 험난한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할 수 있겠다’라는 말이 있고, 같은 말이 《鹽鐵論》 「雜論」에는 九江祝生奮由路之意/推史魚之節/發憤懣/刺譏公卿/介然直而不撓/可謂不畏強禦矣, ‘九江의 祝生은 由와 路의 뜻을 떨치고, 史魚의 절조를 이어, 분노하고, 公卿을 헐뜯었으며, 介然하게 강직하고, 흔들리지 않았으니, 험난한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할 수 있겠다’라고 되어 있다. 두 글에서 介然은 모두 ‘홀로이면서’, ‘혼자이면서’처럼 풀이된다. 또, 《漢書》 「王商史丹傅喜傳」에 雖與故定陶太后有屬/終不順指從邪/介然守節, ‘비록 옛날엔 定陶太后와 같은 편이었지만, 끝까지 지시를 따르거나 삿된 짓을 벌이지 않고, 介然 절개를 지켰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介然 역시 ‘홀로’, ‘혼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례로 든 介然들은 아마 兀然과 같은 표현일 것이다. 兀은 ‘발이 하나다’라는 뜻인데, ‘하나’라는 점에서 兀然 또한 ‘혼자’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살펴보았듯, 介然도 마찬가지다. 介는 兀이 잘못된 글자일 것이다. 본래 兀然이 맞는 말인데, 兀과 介가 모양이 비슷해서 잘못되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兀然 대신 介然이 사용되게 되었을 것이다. 《莊子》 「養生主」에는 右師라는 외발이가 나오고, 또 「德充符」에는 王駘, 申徒嘉, 叔山無趾 같은 외발이들이 나온다. 그런데 「養生主」에서는 右師를 보고 介라고 하였고, 「德充符」에서는 王駘 등을 가리켜 모두 兀者라고 하였다. 특히 「德充符」에서 陸德明은 兀에 대해 五忽反/又音界//李云/刖足曰兀///案篆書兀介字相似, '兀은 五와 忽의 반절로 발음한다. 界라는 音도 있다. 李頤는 "발을 베인 것을 兀이라 한다"라고 했다. 생각해 보건대 篆書에서는 兀과 介의 모양이 비슷하다'라고 했고, 「養生主」의 介에 대해 陸德明은 音戒/一音兀//司馬云///刖也///向郭云///偏刖也///崔本作兀/又作≪足兀≫/云///斷足也, '介의 음은 戒다. 兀로 읽기도 한다. 司馬彪는 "발 뒷꿈치가 잘린 것이다"라고 하였고, 向秀와 郭象은 "한 쪽 발이 잘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崔譔本》에는 介가 兀로 되어 있고, 또 ≪足兀≫로 되어 있기도 하다. 崔譔은 "발이 잘렸다는 뜻이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陸德明은 介와 兀의 모양이 비슷하다고 하였고, 또 《崔譔本》에는 介가 兀로 되어 있다고 했으니, 바로 이 점이 介然의 介가 兀이 잘못된 글자라는 정황적 증거라 하겠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介然/堅固貌//易曰/介如石焉, ‘介然은 굳건한 모습이다. 《易》에는 “돌처럼 介하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易》 「繫辭 下」에 나온다. 한편 宋基采는 王天海의 소개해 두었다. 王天海는 介가 고대에 潔과 통용되었다고 보았다. 潔은 ‘깨끗하다’, ‘맑다’는 말이다. 王天海는 이렇게 보면, 다음 句의 菑然과도 대구가 잘 맞다고 하였는데, 王天海가 菑然을 ‘검다’, ‘흐리다’, ‘더럽다’처럼 풀이했기 때문이다. 宋基采 또한 이를 따라 介然을 ‘정결하게 여겨’처럼 번역하였다. 나는 따르지 않았다. ◈ 必은 부사어로, ‘반드시’, ‘꼭’이다. ◈ 以自好也의 以는 ‘~를’이다. 自를 받는다. 以自惡也의 以도 같다. ◈ 自는 체언으로, ‘자신’이다. ◈ 好는 용언으로, ‘자랑스러워하다’는 말인 것 같다. 好는 본래 ‘좋아하다’, ‘아름답다’, ‘훌륭하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惡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惡가 ‘부끄러워하다’는 말이므로, 이 好는 ‘자랑스러워하다’라고 풀이해야 할 듯하다. 楊倞은 自好/自樂其善也, ‘自好라는 말은, 자신의 善에 대해 스스로 즐거워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不善은 명사구로, ‘옳지 않은 점’이다. ◈ 不善在身 다음에는 판본에 따라 也가 있기도 하였다. 王先謙은 謝本從盧校/身下增也字, ‘《謝本》에서는 盧文弨의 교정을 좇아, 身 다음에 也를 더 붙여 놓았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上句也字/宋本無, ‘위의 句에 있는 也가 《宋本》에는 없다’라고 하였다. 王念孫은 元刻也字/乃涉上下文而衍//上文見善見不善及善在身下皆無也字/呂錢龔本竝無, ‘《元刻》에 있는 也는 아마 앞뒤의 글 때문에 잘못 들어간 글자일 것이다. 앞 글의 見善과 見不善, 善在身 다음에는 전부 無가 없다. 《呂本》, 《錢本》, 《龔本》에도 전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王先謙은 王說是//今依宋本刪上句也字, ‘王念孫의 설이 타당하다. 이 글에서는 《宋本》에 근거해, 앞의 句에 있는 也를 없앴다’라고 하였다. ◈ 菑然은 ‘재앙이 내린듯이’, ‘해를 당한 듯이’, ‘죄를 지은 듯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때 菑는 ‘재’라고 읽는다. 菑는 災의 옛 글자다. 즉, 菑然은 災然과 같다. 《荀子》 「天論」에 其說甚爾/其菑甚慘, '그 說은 아주 爾하지만, 그 菑는 아주 참혹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菑는 여기서 '해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呂氏春秋》 「士容論 審時」에 必遇天菑, '분명 天菑를 당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菑/害也, '菑는 재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漢書》 「匈奴傳 下」에 後無餘菑, '나중에 남은 菑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菑/古災字也, '菑는 옛날에 사용하던 災字다'라고 하였다. 즉, 菑와 災는 같은 글자다. 《莊子》 「人間世」에 命之曰菑人, ‘이름하여 菑人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音災//下皆同, '菑의 音은 災다. 아랫쪽 글에서도 모두 그렇게 읽는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菑/讀爲災//災然/災害在身之貌, ‘菑는 災라고 본다. 災然이란, 자기 자신에게 재해가 내린 듯한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내 의견과 같다. 郝懿行은 輪人注/鄭司農云/泰山平原所樹立物爲菑/聲如胾/博立梟棊亦爲菑///詩皇矣毛傳云/木立死曰菑///然則菑者植立之意//楊注非相篇是/此讀菑然爲災然/非, ‘輪人에 대한 주석에서, 鄭司農은 “泰山과 平原에서는 物을 세워 놓은 것을 菑라고 한다. 胾와 같이 발음한다. 梟棊를 평탄하게 세우는 일도 菑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詩》 「皇矣」에 대한 毛亨의 傳에서는 “나무가 서서 죽은 것을 菑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즉, 菑라는 말은 꼿꼿하게 서 있다는 뜻이다. 楊倞의 주석은 「非相」에서는 타당하였지만, 이 부분에서는 菑然을 災然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 鄭司農은 東漢의 鄭衆을 이른다. 저 주석은 《周禮》 「冬官考工記」의 察其菑蚤不齵, ‘그 菑와 蚤가 齵하지 않는지를 살핀다’라는 말에 인용되어 있다. 鄭玄은 菑/謂輻入轂中者也, ‘菑는 바퀴살이 들어가 바퀴통에 맞는 것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菑/側吏反/注及下皆同, ‘菑는 側과 吏의 반절로 읽는다. 鄭玄의 주석 및 아랫 부분에서도 모두 그렇다’라고 하였다. 「皇矣」는 《詩》 「大雅 文王之什」에 속해 있다. 주석은 其菑其翳, ‘菑와 翳를’ 부분에 붙어 있다. 毛亨은 木立死曰災/自斃爲翳, ‘나무가 서서 죽은 것을 災, 저절로 엎어진 것을 翳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판본에 따라 菑라고도 되어 있고, 災라고도 되어 있는 모양이다. 陸德明은 災/本又作甾/側吏反/又音緇, ‘災는 판본에 따라 甾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側과 吏의 반절로 읽는다. 緇라고 읽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非相」에는 周公之狀/身如斷菑, ‘周公의 모습은, 몸은 斷菑 같았고’라는 말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 楊倞은 爾雅云/木立死曰椔///椔/與菑同, ‘《爾雅》에 “나무가 서서 죽은 것을 椔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椔는 菑와 같다’라고 하였는데, 이 풀이가 본편의 菑然에도 타당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郝懿行처럼 菑然을 ‘꼿꼿이 서서’, ‘선 채로 죽은 듯’처럼 해석하면, 이 句는 ‘꼿꼿이 서서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혹은 ‘선 채로 죽은 것처럼 자신을 부끄러워한다’라고 풀이될 텐데, 그러면 말이 아무래도 어색해진다. 따라서 나는 郝懿行을 따르지 않았다. 한편 宋基采는 介然에서처럼 王天海의 설을 따르고 있다. 王天海는 菑를 淄 혹은 緇라고 보았는데, 淄와 緇는 모두 ‘검다’는 뜻이다. 宋基采는 이를 따라, 菑然을 ‘더럽다고 여기다’처럼 번역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역시 따르지 않았다. 災의 옛 글자가 菑라는 점이 분명한데, 굳이 글자를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惡는 용언으로, ‘부끄러워하다’는 말이다. 이 때는 ‘오’라고 읽는다. 好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孟子》 「公孫丑 上」에 無羞惡之心/非人也, ‘羞惡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羞는 ‘부끄러워하다’는 말이고, 羞惡는 같은 의미의 두 글자가 모여 구성된 단어이므로, 惡 역시 ‘부끄러워하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 朱熹는 羞/恥己之不善也//惡/憎人之不善也, ‘羞는 자기의 옳지 않은 점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이고, 惡는 다른 사람의 옳지 않은 점을 미워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틀렸다. 또, 《史記》 「平原君虞卿列傳」에 此百世之怨而趙之所羞/而王弗知惡焉, ‘이는 百世의 원한이요, 趙나라가 부끄러워하는 바인데, 王은 惡할 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惡 역시 앞의 羞처럼 ‘부끄러워하다’는 말이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데,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 蜀虎案 : 앞의 節에서 이어진다. 남에게서 옳은 점이나 옳지 않은 점을 발견했을 때, 자신을 돌아 보고, 자신에게 옳은 점이 있다면 혼자 자랑스러워하고, 옳지 않은 점이 있다면, 죄를 지은 것처럼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자신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항상 경계하고 살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내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이야기해 준다면 얼마나 고맙겠느냐. 따라서] 나에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의견이] 타당한 사람은 나의 스승이요, 나에게 동의하지만 [의견이] 타당한 사람은 나의 친구요, 나에게 알랑거리기만 하는 놈은 나의 원수로다.(故非我而當者/吾師也//是我而當者/吾友也//諂諛我者/吾賊也, ◈ 故는 ‘이처럼’이라고 해석된다. 是故와 같다. 앞의 말‘처럼’ 사람은 늘 자신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 非我의 非는 용언으로, ‘부정하다’, ‘동의하지 않다’라는 말이다. 我를 받는다. 是我의 是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 我는 체언으로, ‘나’, ‘내 의견’이다. ◈ 非我而當의 而는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처럼 해석된다. ◈ 當은 용언으로, ‘타당하다’, ‘마땅하다’는 말이다. ◈ 非我而當者의 者는 ‘~한 사람’이다. 관형어절인 非我而當이 者를 한정한다. 是我而當者, 諂諛我者의 者도 그렇다. 각각 관형어절인 是我而當, 관형어구인 諂諛我의 한정을 받는다. ◈ 吾師의 吾는 관형어로, ‘나의’다. 師를 한정한다. ◈ 師는 체언으로, ‘스승’, ‘선생’, ‘모범이 되는 사람’이다. ◈ 是我의 是는 용언으로, ‘긍정하다’, ‘동의하다’는 말이다. 我를 받는다. 非我의 非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 是我而當의 而는 ‘~한데’, ‘~하는데’처럼 해석된다. ◈ 吾友의 吾는 관형어로, ‘나의’다. 友를 한정한다. ◈ 友는 체언으로, ‘친구’다. 友는 ‘뜻이 같은 친구’를 이른다. 옛날에는 朋과 友를 구분했었다. 《周禮》 「地官司徒」에 五曰聯朋友, ‘다섯 번째는 朋과 友를 聯하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同師曰朋/同志曰友, ‘스승이 같으면 朋이라고 하고,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賈公彦은 但朋疏而多/友親而少/故云同師曰朋/同志曰友, '다만 朋은 멀지만 많고, 友는 가깝지만 적으니, 그래서 스승이 같으면 朋이라고 하고,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고 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문의 友 역시 ‘뜻이 같은 사람’이다. ◈ 諂諛는 용언으로, ‘아첨하다’, ‘알랑거리다’는 말이다. 我를 받는다. 諂과 諛는 모두 ‘아첨하다’는 뜻이다. ◈ 吾賊의 吾는 관형어로, ‘나의’다. 賊을 한정한다. ◈ 賊은 체언으로, ‘적’, ‘원수’, ‘해치는 사람’이다. ◈◈ 蜀虎案 : 자신과 의견이 같거나, 같지 않거나 한 점이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지적해 주는 일이 훨씬 더 유의미하다는 말이다. 앞의 말과 이어진다. 또, 이 말은 곧 君子가 남의 충고를 받아 들일 줄 안다는 말이기도 하다. 《論語》 「爲政」에 君子周而不比/小人比而不周, ‘君子는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지 편당을 이루지 않고, 小人은 편당을 이루지 두루 잘 지내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과 의미가 대체로 통한다. 왜 편당을 이루겠는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놈들끼리 모이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자는 쫓아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자는 스승[이라 할 만한 사람]을 숭상하고, 친구[라고 할 만한 자]는 가까이 하지만, 원수[라고 할 만한 자]는 아주 미워한다.(故君子隆師而親友/以致惡其賊, ◈ 故는 ‘따라서’, ‘그래서’다. ◈ 君子는 체언으로, ‘君子’다. ◈ 隆은 용언으로, ‘존귀하게 여기다’, ‘높이다’, 즉 ‘숭상하다’는 뜻이다. 師를 받는다. ◈ 師는 체언으로, ‘스승’이다. ◈ 而는 ‘그리고’처럼 해석된다. ◈ 親은 용언으로, ‘가까이 하다’, ‘가깝게 지내다’, ‘친하게 지내다’는 말이다. 友를 받는다. ◈ 友는 체언으로, 뜻이 같은 ‘친구’다. ◈ 以致惡其賊의 以는 ‘그러나’처럼 해석된다. 而와 같다. 《論語》 「爲政」에 使民敬忠以勸/如之何, ‘백성들이 공경하게 하고, 진심을 다하게 하며, 以, 권면하게 하면 어떻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禮記》 「爲政」에 治世之音安以樂/亂世之音怨以怒/亡國之音哀以思, ‘세상을 바로잡을 音은 安 以 樂하고, 세상을 어지럽힐 音은 怨 以 怒하며, 나라를 망하게 할 音은 哀 以 思하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以는 모두 而, ‘그리고’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 예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㠯以已」에 수록되어 있다. 以가 而처럼 ‘그리고’라고 사용되었기에, 아마 마찬가지로 而처럼 ‘그러나’로도 풀이될 수도 있을 것이다. ◈ 致는 부사어로, ‘아주’, ‘극히’다. 楊倞은 致/猶極也//下同, ‘致는 極과 같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惡는 용언으로, ‘미워하다’는 말이다. 이 때는 ‘오’라고 읽는다. 其賊을 받는다. ◈ 其賊의 其는 ‘君子’를 가리킨다. 賊을 받는다. ◈ 賊은 체언으로, ‘적’, ‘원수’다. ◈◈ 蜀虎案 : 의견이 타당하기 때문에 스승과 친구를 가까이 하고, 알랑거리기나 하기 때문에 원수를 미워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군자는] 선을 좋아하고 만족할 줄을 모르며, 충고를 받아 [스스로] 경계할 줄도 아니, 설사 [군자가] 정진하지 않으려 한들, 정진하지 못할 수가 있겠느냐.(好善無厭/受諫而能誡/雖欲無進/得乎哉, ◈ 好는 용언으로, ‘좋아하다’는 말이다. 善을 받는다. ◈ 善은 체언으로, ‘옳은 일’, ‘선행’, ‘선’이다. ◈ 無는 부정어로, ‘~하지 않다’는 말이다. 不과 같다. 厭을 한정한다. ◈ 厭은 용언으로, ‘싫증내다’, ‘물려 하다’, ‘질려 하다’, ‘만족하다’는 말이다. 《詩》 「小雅 白華之什」의 「湛露」에 厭厭夜飲/不醉無歸, '厭厭한 밤의 술자리여,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는데, 毛亨과 朱熹는 厭厭을 安, '편안하다'라고 하였고, 陸德明은 韓詩作愔愔/和悅之貌, '《韓詩》에는 愔愔이라고 되어 있다. 화평하고 즐거운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즉, 이 때는 '만족하다'는 뜻이 된다. 또, 《史記》 「貨殖列傳」에 原憲不厭糟糠, '原憲은 糟糠도 厭하지 못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司馬貞의 《史記索隱》에는 饜으로 되어 있다. 司馬貞은 飽, '배부르게 먹다', '물릴 만큼 먹다', '만족할 만큼 먹다', '질릴 만큼 먹다'라고 풀이하였다. 또, 《呂氏春秋》 「孟秋紀 懷寵」에 求索無厭, '탐하여 찾기를 厭하지도 않는다'라는 말이 있으니, 여기에서도 厭은 '물리다', '질리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莊子》 「人間世」에 弟子厭觀之, ‘弟子가 厭하게 之를 보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王先謙은 厭/飽也, '厭은 만족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受는 용언으로, ‘받다’, ‘받아 들이다’, ‘수용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간언을 ‘수용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諫은 체언으로, ‘간언’, ‘충고’다. 앞 節의 非我而當이나 是我而當이 이를 이른다. ◈ 受諫而能誡의 而는 ‘~함으로써’처럼 해석된다. 受諫을 받는다. 이 而는 以와 같다. 《墨子》 「尙賢 下」에 使天下之爲善者可而勸也/爲暴者可而沮也, ‘온세상의 善한 사람들을 더욱 권면할 수 있고, 暴한 사람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같은 편에 上可而利天/中可而利鬼/下可而利人, ‘위로는 하늘을 이롭게 할 수 있고, 중간으로는 鬼를 이롭게 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呂氏春秋》 「孟春紀 去私」에는 南陽無令/其誰可而爲之, ‘南陽에 令이 없는데, 누가 맡을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可而는 모두 可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而가 以와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용된 것이다. 또, 《荀子》 「成相」에는 進諫不聽/剄而獨鹿/棄之江, ‘간언을 올려도 듣지 않으니, 獨鹿을 가지고 목을 베어 강에 버렸다’라는 말이 있는데, 剄而獨鹿의 而는 以, 즉 ‘獨鹿을 가지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수록되어 있고, 또 《荀子》 「成相」의 剄而獨鹿에 대한 王念孫의 주석에도 들어 있다. ◈ 能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誡를 받는다. ◈ 誡는 용언으로, ‘경계하다’, ‘삼가다’는 말이다. 충고를 수용함으로써 자신을 ‘삼갈’ 줄 안다는 뜻이다. ◈ 雖는 부사어로, ‘비록’, ‘설사’, ‘~한다 하더라도’라는 말이다. ◈ 欲은 ‘~하려 한다’는 말이다. 無進을 받는다. ◈ 無는 부정어로, ‘~하지 않다’는 말이다. 不과 같다. 進을 한정한다. ◈ 進은 용언으로, ‘나아가다’, ‘정진하다’는 말이다. ◈ 得은 ‘할 수 있다’, ‘가능하다’, ‘되다’는 말이다. 無進을 뜻한다. ◈ 乎哉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無進하려 해도, 得, 즉 되겠느냐는 뜻이다. 곧, 정진하지 않으려 해도 정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蜀虎案 : 君子는 옳은 길을 가면서도 싫증낼 줄 모르고, 남의 충고를 수용하고 반성할 줄도 아니, 잘 되지 않으려 해도 잘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소인은 이를 반대로 한다.(小人反是, ◈ 小人은 체언으로, ‘小人’이다. 君子와 대조되는 표현이다. ◈ 反은 용언으로, ‘거꾸로 하다’, ‘반대로 하다’는 말이다. 是를 받는다. ◈ 是는 君子의 행위를 가리킨다. ◈◈ 蜀虎案 : 小人의 행실은 君子와 정반대라는 뜻이다.) [소인은 품행이] 아주 난잡하면서도 남이 자기를 비판하는 일을 미워하고, [식견은] 매우 불초하면서도 남이 자신을 존경해 주기를 바란다.(致亂而惡人之非己也/致不肖而欲人之賢己也, ◈ 致은 부사어로, ‘아주’, ‘극히’라는 말이다. 亂과 不肖를 각각 한정한다. ◈ 亂은 용언으로, ‘문란하다’, ‘어지럽다’, ‘단정하지 않다’, ‘올바르지 않다’는 말이다. 治에 반대되는 말이다. ◈ 致亂而惡人之非己의 而는 ‘그러면서도’, ‘그럼에도’처럼 해석된다. 致不肖而欲人之賢己의 而도 그렇게 해석된다. ◈ 惡는 용언으로, ‘미워하다’, ‘싫어하다’는 말이다. ‘오’라고 읽는다. 명사구인 人之非己를 받는다. ◈ 人은 체언으로, ‘다른 사람’, ‘남’이다. ◈ 人之非己의 之는 주격 조사다. 人之賢己의 之도 그렇다. ◈ 非己의 非는 용언으로, ‘부정하다’, ‘동의하지 않다’는 말이다. 己를 받는다. 아니면, 誹의 가차자로 보아도 좋겠다. 誹는 ‘비판하다’는 말이다. ◈ 己는 체언으로, ‘자기’다. 小人을 이른다. ◈ 不肖는 용언으로, ‘불초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보통 ‘모자라다’, ‘올바르지 못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賢과는 대조되는 표현이다. ◈ 欲은 용언으로, ‘바라다’, ‘원하다’는 말이다. ◈ 賢己의 賢은 용언으로, ‘존경하다’, ‘우대하다’, ‘좋아하다’는 말이다. 己를 받는다. 《論語》 「學而」에 賢賢易色, ‘賢을 賢하기를 色을 易하는 만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安國은 賢賢을 好賢, 즉 賢을 ‘좋아하다’라고 풀이하였고, 孔穎達은 上賢/謂好尙之也, ‘앞의 賢은 높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禮記》 「內則」에는 獻其賢者於宗子, ‘賢한 것을 宗子에게 獻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과 孔穎達은 모두 賢/猶善也, ‘賢은 善과 같다’라고 하였다. 「內則」에서 善은 ‘좋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善을 형용사로 볼 때 「內則」처럼 ‘좋다’가 되고, 동사로 보면 ‘좋아하다’는 말이 되겠다. ◈◈ 蜀虎案 : 小人은 품행이 난잡하고, 식견은 자기 주제도 모른다는 뜻이다.) 심성은 범이나 승냥이 같고, 행실은 금수 같[아서, 남들이 싫어할 짓을 자초하고 있]으면서도 남들이 자기를 비방하는 일은 또 싫어한다.(心如虎狼/行如禽獸/而又惡人之賊己也, ◈ 心은 체언으로, ‘마음’, ‘심성’이다. 소인의 ‘심성’을 이른다. ◈ 心如虎狼의 如는 용언으로, ‘~와 같다’는 말이다. 虎狼을 받는다. ◈ 虎狼은 체언으로, ‘범과 승냥이’를 이른다. 남을 해치면서 못된 짓을 벌이는 놈들을 보통 虎狼에 비유한다. ◈ 行은 체언으로, ‘행동’, ‘행동거지’, ‘행실’이다. ◈ 行如禽獸의 如는 용언으로, ‘~와 같다’는 말이다. 禽獸를 받는다. ◈ 禽獸는 체언으로, ‘금수’, ‘짐승’이다. 禽은 ‘날짐승’, 獸는 ‘들짐승’을 이른다. ◈ 而는 ‘그러면서도’, ‘그럼에도’처럼 해석된다. ◈ 又는 부사어로, ‘또’다. ◈ 惡는 용언으로, ‘미워하다’, ‘싫어하다’는 말이다. 人之賊己를 받는다. ◈ 人은 체언으로, ‘남’, ‘다른 사람’이다. ◈ 人之賊己의 之는 주격 조사다. ◈ 賊은 용언으로, 본래 ‘해치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비방하다’, ‘헐뜯다’라고 풀이해야 하겠다. 己를 받는다. 《春秋繁露》 「仁義法」에 稱人之惡/謂之賊, ‘남의 오점을 말하는 짓, 이를 賊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다. ◈ 己는 체언으로, ‘자기’다. 小人을 이른다. ◈◈ 蜀虎案 : 스스로 남들이 싫어할 짓을 하면서도 남들이 자신을 미워하면 또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아첨하는 놈들은 가까이 하고, 충고해 주는 사람은 멀리 하며, [자신을] 바로잡아 주려 하는 사람은 웃음거리로 여기고, [자신에게]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원수라고 생각한다.(諂諛者親/諫爭者疏/修正爲笑/至忠爲賊, ◈ 諂諛者는 ‘아첨하는 놈’, ‘알랑거리는 놈’이다. 諂諛는 관형어로, ‘아첨하는’, ‘알랑거리는’이다. 者를 한정한다. 者는 ‘~하는 사람’이다. 諂과 諛는 모두 ‘아첨하다’, ‘알랑거리다’는 말이다. ◈ 親은 용언으로, ‘가까이 하다’, ‘가까이 지내다’, ‘친하게 지내다’는 말이다. 疏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 諫爭者는 옳은 말로 ‘충고하는 사람’, ‘간언하는 사람’이다. 諫爭은 관형어로, ‘충고하는’, ‘간쟁하는’이다. 者를 한정한다. 者는 ‘~하는 사람’이다. 諫은 ‘간언하다’, ‘충고하다’는 말이다. 爭은 諍의 가차자로, 이 역시 ‘간언하다’, ‘충고하다’는 말이다. 즉, 諫爭은 諫諍과 같다. 《孝經》 「諫諍」에 昔者天子有爭臣七人/雖無道/不失其天下, ‘옛날에는 天子에게 爭臣이 일곱 명만 있으면, 무도하더라도 天下를 잃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李隆基는 爭/謂諫也, ‘爭은 간언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顧野王이 지은 《玉篇》에도 爭/諫也, ‘爭은 간언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 疏는 용언으로, ‘멀리 하다’는 말이다. 親과 대구를 이루고 있다. ◈ 修正은 체언으로, 아마 小人을 ‘바로잡아 주려는 사람’을 이를 것이다. 正은 ‘바로잡다’는 말이다. 修는 ‘고치다’는 말로, 이 역시 곧 ‘바로잡다’는 말이다. ◈ 爲는 용언으로, ‘~라고 여기다’, ‘~라고 생각하다’는 말이다. 각각 笑와 賊을 받는다. ◈ 笑는 체언으로, ‘웃음거리’, ‘비웃을 일’이다. ◈ 至忠은 체언으로, 아마 小人을 ‘간절하고 진심 어리게 대하는 사람’을 이를 것이다. 至는 ‘지극하다’, ‘간절하다’는 뜻이다. 忠은 ‘진심 어리다’, ‘정성스럽다’는 말이다. 至를 부사어로 보고, 至忠을 ‘지극하게 忠한 사람’처럼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修正은 의미가 동일한 글자인 修와 正이 모여서 구성된 단어인데, 至忠을 ‘지극하게 忠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修正과 형식적으로 대구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 賊은 체언으로, ‘원수’, ‘적’이다. ◈◈ 楊倞은 至忠反以爲賊, ‘진심을 다해 줘도 도리어 원수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도움이 될 사람들은 멀리 하고, 도움 안 될 놈들만 좋아한다는 뜻이다.) 설사 [소인이] 망하지 않으려 한들, 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雖欲無滅亡/得乎哉, ◈ 雖는 부사어로, ‘비록’, ‘설사’, ‘~한다 하더라도’라는 말이다. ◈ 欲은 ‘~하려 한다’는 말이다. 無滅亡을 받는다. ◈ 無는 부정어로, ‘~하지 않다’는 말이다. 不과 같다. 滅亡을 한정한다. ◈ 滅亡은 용언으로, ‘망하다’는 말이다. 滅과 亡 모두 ‘망하다’는 뜻이다. ◈ 得은 ‘할 수 있다’, ‘가능하다’, ‘되다’는 말이다. 無滅亡을 뜻한다. ◈ 乎哉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無滅亡하려 해도, 得, 즉 되겠느냐는 뜻이다. 곧, 망하지 않으려고 해도 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 蜀虎案 : 小人은 자신에게 좋을 만한 사람은 모조리 내치고, 도움이 되지 않을 짓은 다 하고 다니니, 망하지 않으려고 해도 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시》에 이런 말이 있다.(詩曰, ◈ 詩는 체언으로, 《詩》, 즉 《詩經》을 이른다. 인용된 詩는 「小雅 小旻之什」의 「小旻」이다. 楊倞은 詩/小雅小旻之篇, ‘이 詩는 「小雅」의 「小旻」이다’라고 하였다. ◈ 曰은 말을 표현하거나, 다른 곳의 글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소인들은] 화합하다가도 비방해 대니, 또한 아주 안타깝다. 계책이 좋으면 함께 거스르고, 계책이 좋지 않으면 함께 따르는구나.”(噏噏呰呰/亦孔之哀//謀之其臧/則具是違//謀之不臧/則具是依, ◈ 噏噏은 ‘어울려서 잘 지내는 모습’인 것 같다. 噏은 ‘숨을 들이 쉬다’는 말이므로,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다. 「小旻」에는 噏噏이 潝潝으로 되어 있다. 潝은 본래 ‘물이 빨리 흐르는 소리’를 뜻한다. 이 역시 가차자일 것이다. 「小旻」은 《漢書》 「楚元王傳」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楚元王傳」에는 噏噏呰呰가 歙歙訿訿로 되어 있다. 歙 역시 숨을 ‘들이 쉬다’는 말이다. 그런데 顏師古는 歙音翕, ‘歙은 翕이라고 읽는다’라고 하였다. 바로 이 翕이 ‘화합하다’는 말이다. 噏, 潝 모두 이 翕의 가차자일 것이다. 《爾雅》 「釋詁」에는 㪉/郃/盍/翕/仇/偶/妃/匹/會/合也, ‘㪉, 郃, 盍, 翕, 仇, 偶, 妃, 匹, 會는 合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合은 ‘화합하다’는 뜻이다. 또, 《爾雅》 「釋訓」에는 「小旻」이 翕翕訿訿라고 인용되어 있고, 《說文解字》 「言部」의 訾 부분에도 翕翕訿訿라고 인용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噏과 潝이 모두 翕의 가차자라는 점은 역시 분명하다 하겠다. 毛亨이나 鄭玄은 潝潝의 의미를 직접 풀이하지 않았다. 陸德明은 潝/許急反, ‘潝은 許와 急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고, 또 爾雅云/潝潝訿訿/莫供職也///韓詩云/不善之貌, ‘《爾雅》에는 “翕翕訿訿는 직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고, 《韓詩》에는 “善하지 않은 모습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爾雅》는 앞에 인용하였듯 「釋訓」을 이른다. 《韓詩》는 아마 옛 《韓詩內傳》을 이르는 듯하다. 지금 전하는 《韓詩外傳》에는 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왜 《爾雅》에서 ‘직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라고 풀이했을까. 이에 대해 孔穎達은 自作威福/競營私利/是不供君職也, ‘자기들끼리 威福을 부리고, 사적인 이익을 누리려고 다투니, 이 말이 군주의 직무를 돕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풀이하였다. 潝潝에 대해 孔穎達은 潝潝/爲小人之勢/是作威福也, ‘潝潝은 小人들이 세를 이루어서, 이렇게 威福을 부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潝潝/相和也, ‘潝潝은 서로 화목하게 지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朱熹의 설이 타당하겠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噏/許急反, ‘噏은 許와 急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噏噏呰呰/元刻與詩考合/宋本作潝潝訿訿//注同, ‘噏噏呰呰라는 말은 《元刻》의 경우 《詩考》와 동일한데, 《宋本》에는 潝潝訿訿라고 되어 있다. 楊倞의 주석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詩考》는 王應麟의 저작이다. 王應麟은 趙宋 사람이다. ◈ 呰呰는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모습’인 듯하다. 呰는 ‘헐뜯다’, ‘비방하다’, ‘흠을 잡다’는 말이다. 「小旻」에는 呰呰가 訿訿로 되어 있는데, 訿 역시 ‘헐뜯다’는 말이다. 噏噏 부분에 인용하였듯, 《漢書》 「楚元王傳」, 《爾雅》 「釋訓」, 《說文解字》 「言部」의 訾에도 모두 訿訿로 인용되어 있다. 《漢書》에 대해 顏師古는 訿音紫, ‘訿는 紫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또, 噏噏 부분에서 인용하였듯, 《爾雅》 「釋訓」에는 潝潝/訿訿/莫供職也, ‘翕翕訿訿는 직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毛亨과 鄭玄은 訿訿를 따로 풀이하지 않았다. 「小旻」에 대해 陸德明은 訿音紫, ‘訿는 紫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孔穎達은 訿訿者/自營之狀/是求私利也, ‘訿訿라는 말은, 자기 영화를 좇는 모습으로, 이렇게 사적인 이익을 챙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訿訿/相詆也, ‘訿訿는 서로 흉을 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朱熹의 설이 타당하겠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呰音紫, ‘呰는 紫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亦은 부사어로, ‘역시’, ‘또한’이다. 혹시 亦이 奕의 가차자일지도 모르겠다. 奕은 ‘크다’는 말이므로, 大와 통한다. 그런데 大는 ‘아주’, ‘크게’, ‘심히’라는 말이므로, 뒤의 孔과 의미가 같다. 그러면 亦孔은 한 단어의 부사어로, ‘심히’, ‘크게’, ‘아주’라는 말이 된다. ◈ 孔은 부사어로, '심히', '아주', '크게'라는 말이다. 哀를 한정한다. 孔은 大와 통용된다. 《道德經》 21장에 孔德之容, '孔德의 모습은'이라는 말이 있는데, 河上公은 孔/大也, '孔은 크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詩》 「小雅 彤弓之什」의 「六月」에 玁狁孔熾, '玁狁이 孔熾하니'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孔熾를 甚熾, '아주 熾하다'라고 풀이하였다. 朱熹 역시 孔을 甚, '심히'라고 풀이했다. 《莊子》 「人間世」에 孔揚/采色不定, ‘孔 드러나서, 채색조차 안정되지 못하다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成玄英은 孔/甚也, '孔은 심히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亦孔之哀의 之는 의미 없는 조사인 듯하다. ◈ 哀는 용언으로, ‘슬프다’, ‘안타깝다’는 말이다. ◈ 謀는 체언으로, ‘모의’, ‘도모한 바’라는 말이다. ◈ 謀之其臧의 之는 주격 조사다. 謀之不臧의 之도 그렇다. ◈ 謀之其臧의 其는 ‘만약’이다. 若과 같다. 《禮記》 「文王世子」에 公族其有死罪/則磬于甸人, ‘公族이 其 죽을 죄를 졌다면, 甸人에게 磬한다’라는 말이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其濟/君之靈也//不濟/則以死繼之, ‘其 濟한다면 君의 靈이다. 濟하지 못한다면 죽음으로 따르겠다’라는 말이 있다. 또, 《春秋左氏傳》 「襄公」 23년에 其然/將具敝車而行, ‘其 그렇게 한다면, 이제 敝車를 具해서 行하겠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其는 모두 ‘만약’이라는 말이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 臧은 용언으로, ‘좋다’, ‘착하다’, ‘선하다’는 말이다. ◈ 則은 ‘그러면’이다. ◈ 具는 부사어로, ‘모두’, ‘전부’다. 俱와 같다. 朱熹는 具/俱, ‘具는 함께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則具是違의 是는 의미 없는 조사일 것이다. 則具是依의 是도 그렇다. 주격 조사로 볼 수도 있겠다. ◈ 違는 용언으로, ‘어기다’는 말이다. 鄭玄과 孔穎達은 背違, ‘어기다’라고 풀이했다. ◈ 不臧의 不은 부정어다. 臧을 한정한다. ◈ 依는 용언으로, ‘의지하다’, ‘따르다’는 말이다. 鄭玄은 依就, ‘따르다’라고 풀이하였고, 孔穎達 또한 就依, ‘따르다’라고 풀이하였다. 朱熹는 從, ‘따르다’라고 풀이하였다. ◈◈ 楊倞은 毛云/噏噏然患其上/呰呰然不思稱乎上///鄭云/臣不事君/亂之階也/故甚可哀, ‘毛亨은 “화목하게 굴며 윗사람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비방하면서 윗사람을 헤아리지 않기도 한다”라고 하였고, 鄭玄은 “신하들이 군주를 섬기지 않으니, 나라가 어지러워질 길이다. 그래서 아주 슬퍼할 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楊倞은 《毛詩》를 인용하였을 뿐, 자기 의견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 「小旻」에 대해 毛亨은 小旻/大夫刺幽王也, ‘「小旻」은 大夫가 幽王을 비판한 글이다’라고 하고, 楊倞이 인용하였듯 潝潝然患其上/訿訿然思不稱乎上, ‘화목하게 굴며 윗사람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비방하면서 윗사람을 헤아리지 않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鄭玄은 臣不事君/亂之階也/故甚可哀//謀之善者俱背違之/其不善者依就之//我視今君臣之謀道往行之/將何所至乎//言必至於亂, ‘신하들이 군주를 섬기지 않으니, 나라가 어지러워질 길이다. 그래서 아주 슬퍼할 만한 것이다. 생각해 낸 일이 좋으면 함께 거스르고, 좋지 않으면 따른다. 생각해 보건대, 君臣들이 생각해 낸 계획이 이미 이행되었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반드시 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大夫以王惑於邪謀/不能斷以從善/而作此詩, ‘王이 못된 계략에 미혹되어서, 이를 끊어 내고, 善을 따르지 못하고 있으니, 이에 大夫가 이 詩를 썼다’라고 하였고, 또 言小人同而不和/其慮深矣/然於謀之善者則違之/其不善者則從之/亦何能有所定乎, ‘小人들이 함께 하지만 어울리지 못하니, 이에 대한 걱정이 큰데, 꾸민 계획이 좋으면 거스르고, 좋지 않으면 따르니, 역시 어떻게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겠냐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漢書》 「楚元王傳」에 인용된 「小旻」에 대해 顏師古는 此小雅小旻篇刺幽王之詩也//言在位卿士/歙歙然患其上/訿訿然不供職/各失臣節/甚可哀痛//而謀之善者/則背違之/不善之謀/依而施用/所以爲刺也, ‘이 「小雅」의 「小旻」은 幽王을 비판한 詩다. 卿士의 자리에 있으면서, 화목하게 지내며 윗사람을 걱정하기도 하고, 비방하면서 직무를 돕지 않기도 하니, 신하들이 절조를 지키지 않아 더욱 애통한데, 생각해 낸 바가 좋으면 거스르고, 좋지 않은 일을 꾸미면 따라서 시행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상기하였듯, 원전은 《詩》 「小雅 小旻之什」의 「小旻」이다. 「小旻」은 세상에 도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옳은 법도를 따르지 않고 방종하게 구는 모습을 묘사한 詩다. 毛亨, 鄭玄, 顏師古, 朱熹의 설명을 감안한다면, 西周 幽王 때, 정책이 올바르게 시행되지 않자, 大夫가 幽王과 幽王을 따르는 신하들을 비판한 詩라고 할 수 있겠다.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자들이 정치를 주도하는데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서로서로 자기 이익만 좇으면서 화합하기도 하고, 비방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荀子는 이 앞 부분에서 君子와 小人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君子는 남의 충고를 수용하며 언제나 올바르게 처신하지만, 小人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짓은 받아 들이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충고는 내쳐 버린다고 하였다. 이 詩에서 화합하기도 하고, 비방하기도 하며, 좋은 계획은 거스르고, 나쁜 계획만 따르는 자들은 본래 幽王 때의 卿과 大夫, 그리고 幽王 본인이었겠지만, 荀子는 小人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이 詩를 차용해서 인용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취지에 맞게 번역문 앞에 ‘小人들은’이라는 말을 붙였다. 荀子는 글에서 자주 《詩》를 인용하였지만, 이 경우처럼 《詩》의 본뜻과 荀子가 인용한 취지가 다를 때가 많으므로, 주의해서 읽어야 하겠다.)

 

[이 시가 바로] 이런 뜻이다.(此之謂也, ◈ 此는 君子는 남의 충고를 수용하며 언제나 올바르게 처신하지만, 小人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짓은 받아 들이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충고는 내쳐 버린다는 점을 이른다. 이 부분의 주제다. ◈ 之는 도치를 표현하는 말이다. 원래는 謂此也다. ◈ 謂는 용언으로, ‘이르다’, ‘뜻하다’, ‘표현하다’는 말이다. 謂의 주어는 생략되어 있는데, 바로 앞에서 인용한 「小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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