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 2 - 수신 - 해설(재작성 예정)

2021. 10. 5. 09:21순자 이야기/원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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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安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0년 5월 7일 12시 24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원문과 번역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1

 

순자 - 2 - 수신 - 1 - 군자는 반성하고, 소인은 반성하지 않는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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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88

 

순자 - 2 - 수신 - 2 - 예를 따르면 만사가 두루두루 잘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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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89

 

순자 - 2 - 수신 - 3 - 군자는 무엇을 따르고, 따르지 말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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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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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91

 

순자 - 2 - 수신 - 5 - 군자는 처지가 아무리 나빠도 항상 의를 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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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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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편인 「권학」에서 순자는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익히고, 공부의 목표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주로 설명했습니다. 순자가 《시》, 《서》, 《예》, 《악》, 《춘추》를 모두 공부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으로는 《예》를 공부해야 하고, 동시에 본 받을 만한 사람, 즉 스승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공부하는 데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이라고 했던 것도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하지만 책만 읽는다고 완전하게 사람이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론서만 들여다 본다고 그 학문에 통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실습'도 필요하고, '이론'이 실제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의견도 참고해 보고, 어떤 것은 배워야 하고, 어떤 것은 배우지 말아야 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와 '修身', 즉 '자기 수양'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독립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순자는 첫 편인 「권학」과 「수신」을 분리해서 기술했습니다. 순자가 「권학」에서 '공부' 자체에 국한해서, 혹은 '공부의 태도'에 국한해서 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면, 「수신」에서는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까'를 주요한 화제로 삼았습니다. 물론 군자(君子), 즉 유학자의 관점에서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공부에 일관되게 매진해야 한다'는 명제와 '사욕 보다 공의를 우선해야 한다'는 명제는 성격이 서로 다르죠?

 

그런데 순자는 유학자입니다. 따라서 순자가 유가적 가치를 좇을 것이라는 점은 다소 뻔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수신」에서 순자가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전부 유가적 덕목들입니다. 그런데 유가, 유학, 혹은 유교(儒敎)는 천 년하고도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이나 동아시아의 제도적, 윤리적 패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우리 세상이 최근에 급박하게 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유가적 덕목을 은연 중에 자명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서로서로 '예의를 갖춘다'는 전제 아래,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당연'합니다. '몸가짐을 단정하게 해야 한다'는 점도 '당연'합니다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점도 '당연'합니다. '공직자가 사욕 보다 공의를 우선해야 한다'는 점도 '당연'합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비슷할 겁니다. 이런 '덕목'들을 '유가적 윤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보편 윤리'와도 맡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유교가 길고 긴 세월 동안 동아시아서 패권을 쥐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유교 기저에 깔려 있는 관념이 보편적 관념과 어느 정도 합치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자가 「수신」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제시하는 것들은 크게 네 종류입니다. 물론 본문 자체에는 뒤섞여 있습니다. 제가 지금 네 종류라고 하는 것은 제가 문단들을 종류별로 묶어서 분석한 결과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예(禮)와 스승(師)'입니다. 이 부분은 「권학」과 주제가 겹칩니다. 상기한 것처럼, 순자는 「권학」에서 공부의 근본을 《예》라고 하였고, 공부를 가장 편하고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본 받을 사람(師)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두 번째 주제는 '군자가 견지해야 할 원칙'입니다. 상황이 좋든 나쁘든, 군자는 군자로서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왜 하필이면 유학을 공부해야 할까'입니다. 묵가, 명가, 도가처럼 다른 학문도 많은데 왜 유학자들은 유학을 배우라고 고집할까요? 이 점에 대한 해답을 순자가 나름 기술해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주제는 '군자가 행하고 닦아 나가야 할 행실들'입니다. 사실 네 번째 주제는 상기한 세 가지 주제를 걸러 내고, '기타 주제'들을 모아 놓은 '나머지'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행실'로써 일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권학」을 해설하면서 《대대례기》나 《군서치요》처럼 《순자》 외적인 이야기도 이것저것 많이 해 드렸습니다. 《순자》에 대한 첫 글이기도 하고, 또 경(經)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설명해야 할 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신」 외적인 이야기 보다는 「수신」 내용을 위주로 설명하게 될 것 같습니다.

 

 

 

순자는 이미 「권학」에서 다섯 경 중 《예》를 가장 중심에 두고 공부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고, 본 받을 사람을 가까이 두어야 빠르고 편하게 공부할 수 있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공부를 일관되고 전일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도 했었습니다. 「수신」에서도 이 논지는 유지됩니다.

 

순자는 만사가 두루두루 잘 풀릴 만한 방법(扁善之度)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방법으로는 기운을 다스리고(治氣) 건강을 돌볼 수도 있으며(養生), 자기를 수양하고(修身) 공적을 세울 수도(自名) 있습니다. 상황이 좋을 때도 유용하고, 상황이 나쁠 때도 유용하다고 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방법은 '예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자의 요지는, 우리가 살면서 이런 것을 하기도 하고, 저런 것을 하기도 할 텐데, 그럴 때 예를 따르면 올바른 도리에 맞게 되고, 예를 따르지 않으면 난잡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루 잘 풀린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열정과 의지, 식견(血氣, 志意, 知慮)을 운용하는데, 예를 따르면 순조롭고(治通), 예를 따르지 않으면 어지럽거나(勃亂) 태만해집니다.(提僈) 옷을 입고, 먹고 마시는 것처럼 일체의 동정(動静)에도 이 원칙은 적용됩니다. 예를 따르면 자연스럽고 질서가 서며(和節), 예를 따르지 않으면 실수하기도 하고(觸陷),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生疾) 사소한 행위조차도 예를 따르면 우아해지지만(雅), 그렇지 않으면 거만해지고(夷固), 부정해집니다.(僻違)

 

이처럼 순자는 사람이 살면서 행하고, 겪는 모든 행위에 대해 예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라도 예가 없으면 살아 갈 수가 없다고(人無禮則不生) 하였고, 어떤 일이라도 예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가 없다고(事無禮則不成) 하였으며, 어떤 나라라도 예가 없다면 안정될 수가 없다고(國家無禮則不寧) 하였던 것입니다. 개인의 동정에서부터 국가의 안위에까지 모든 일에 예가 필요하니까, 바로 '扁善之度', 즉 '만사가 두루두루 잘 풀릴 방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권학」에서 순자는 '예를 지키지 않는 놈들과는 상종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권학」에서 순자가 왜 그렇게까지 표현했는지 이제 이해가 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扁善之度'의 주제, 즉 '우리가 사는 데 필요하고, 살면서 거쳐야 하는 모든 과정에 예가 필요하다'라는 기조는 뒤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수신」에는 '扁善之度' 외에도 '治氣養心之術'이라는 '술법'이 나옵니다. '자기 기운을 잘 다스리고,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길러 내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이 방법 또한 '예를 따라야 한다'는 강령으로 귀결됩니다. 혹시나 '術'이라고 되어 있다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術'은 순자가 자주 쓰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논어》 같은 책에 비해서 《순자》에는 '術' 같은 '하위적 표현'들이 상대적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직역하면 '방법'이나 '술법'일 텐데, '술법'이라고 하면 좀 사이비스럽잖아요? 저는 처음 읽을 때 이런 표현들 때문에, '術'들이 혹시 순자 본인의 저작이 아니라, 나중에 끼어 든 말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자주 나오고, 그리고 무엇 보다도 '術'들에도 순자의 주장이 그대로 잘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순자가 직접 한 말이라는 점을 우리가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治氣養心之術'이란 이렇습니다. 너무 강경하면(血氣剛强) 주변과 조화를 이루게 해서(調和) 유하게(柔) 만들어 주고, 생각이 가라앉아 있으면(知慮漸深) 평온하고 신실하게(易良) 자기 생각을 다잡게(一) 해 줍니다. 사람됨이 너무 사나우면(勇膽猛戾) 이끌어 주고, 깨우쳐 주어서(道順) 사납지 않도록 바로잡아 주어야(輔) 합니다. 행동이 너무 성급하면(齊給便利) 행동을 제지해서(動止) 절도 있게(節) 만들어 주고, 도량이 너무 좁으면(狹隘褊小) 넓혀서(廣大) 너그럽게(廓) 만들어 줍니다. 의지가 너무 박약하고(卑溼) 더디면(重遲) 마음을 고취시켜서(高志) 견인해 주어야(抗) 합니다. 또 있습니다. '治氣養心之術'이 좀 깁니다. 재주는 평범한데(庸衆) 자기 멋대로 굴려고 한다면(駑散) 스승이나 친구를 적당히 붙여서(師友) 개선시키고(刦), 태만하고(怠慢) 경박하다면(僄弃) 나중에 큰 일을 당할 수 있음을(禍災) 일깨워 주어야(炤) 합니다. 끝으로, 요령은 없지만 올바르고 성실하다면(愚款端愨), 예와 악을 가지고(禮樂) 세상과 잘 어울리도록 다듬어 주고(合), 깊게 생각하게 해서(思索) 세상과 통하도록(通)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순자는 9가지 방법이 세세하게 어떻든 간에, 예를 따르는 것 만큼이나 빠른 방법이 없고(莫徑由禮), 모범으로 삼을 사람을 구하는 것 만큼 중요한 방법이 없으며(莫要得師), 한결 같은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 만큼 신묘한 방법이 없다고(莫神一好) 하였습니다. '由禮', '得師', 그리고 '一好'는 「권학」에서 순자가 주장했던 바와 일치합니다. 그래서 제가 「권학」과 「수신」에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결국 순자의 수양법은 예를 따르고(由禮), 본 받을 사람을 찾고(得師), 한결 같이 하는 것(一好)으로 귀결됩니다.

 

 

 

이것으로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효용도 있습니다. 효용이 있어야 후학들이 실천할 테니까요. '治氣養心之術'이 잘 되면, 의지가 잘 닦이고(志意修), 도의를 두텁게 쌓을 수 있습니다.(道義重) 의지를 잘 닦으면 부유하거나 존귀한 자들 앞에서도 씩씩하게 있을 수 있게 되고(驕富貴), 도의가 두터워지면 왕공처럼 권세가 드높은 사람들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길 수 있게 됩니다.(輕王公) 올바르게 배웠다면, 배운 길을 그대로 실천해 나갈 뿐, 외부 사람의 권세가 어떻든 저떻든 그에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옳은 말'을 상주하는 것이 유학자들의 본분이니까요. 그래서 공자가 삼환(三桓)과 타협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이 말의 초점은 '권세에 흔들리지 않는다'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충분히 도를 닦아 내면을 굳건하게 만들어서, 외물에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데 있겠습니다. 이것이 '治氣養心之術'의 주제이고, 예를 따라서 나오는 '효과'입니다.  

 

순자는 '志意修'와 '道義重' 외에도 다각도로 '효용'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거동은 공손하고 정중해지고(體恭敬), 마음은 진정성 있고 믿음직해집니다.(心忠信) 행실에는 예와 의가 깃들게 되고(術禮義), 성정은 인정스럽고 어질게 됩니다.(情愛人) 또, 이런 사람들은 힘든 일은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맡으려고 다투며(勞苦之事則爭先), 쉬운 일은 남에게 양보하려 듭니다.(饒樂之事則能讓) 성정은 올바르고 성실하며(端愨), 정성스러운데다가(誠信), 자기 직분도 엄격하게 지키고(拘守), 직무도 상세하게 처리합니다.(詳) 수양을 통해 이처럼 예를 터득한다면, 순자는 온천하 사람들이 이 사람을 존귀하게(貴) 여기고, 또 믿음직하게(任) 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효용입니다.

 

반대로 수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거동은 거만하고 고루해지고(體倨固), 마음은 고집만 세고 남을 기만하기나 하게 됩니다.(心執詐) 행실은 신도나 묵적처럼 그릇된 길을 가게 되고(術順墨), 성정은 잡스러고 부정해집니다.(精雜汙) 힘든 일은 남에게 떠넘기려 하고(偷儒轉脫), 쉬운 일은 자기가 채 가려 합니다.(佞兌) 그러면서 돌려 말할 염치도 없습니다.(不曲) 성정은 삿되지고(辟違), 자기 일에 대해서는 성과만 내려 하지(程役) 돌아 볼 줄은 모릅니다.(不録) 순자는 이런 놈이 있다면, 이 놈이 사리에 통달하게 되더라도 온천하 사람들이 이 놈을 천박하게(賤) 여기고, 멀리 할 것이라고(棄) 했습니다. 이것도 예를 수양할 '효용'입니다. 수양하지 않으면 온세상에게 미움을 받게 될 테니까요.

 

'효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도 합니다. 젊은이가 성정이 올바르고(端愨), 규범을 잘 따른다면(順弟) '善少者'라고 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참한 젊은이', '착실한 청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공부하기를 좋아하고(好學), 공손하고 기민하기까지 하다면(遜敏), 비슷한 정도의 사람은 있을지라도, 이 사람을 넘어 설 만한 사람은 없을 테니(有鈞無上) 군자(君子)라고 할 수도 있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예를 잘 닦고, 공부 열심히 하면 군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성정이 구차하고 나약해서 남에게 자기 일을 떠넘기려 하고(偷儒), 일하기 싫어하며(憚事), 염치도 없고(無廉恥), 놀고 먹기만 좋아한다고(嗜乎飲食) 해 봅시다. 순자는 이런 사람을 '惡少者'라고 했습니다. '못난 놈'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다가 제 멋대로이고(愓悍) 도리를 따르지도 않으며(不順), 부정하며(險賊), 불손하기까지(不弟) 하다면, 순자는 이런 놈을 '不詳少者', 즉 '상서롭지 못한 놈', '글러먹은 놈'이라고 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당장 형벌을 받아 다치거나 죽더라도, 사람들은 마땅하다고 여기지, 동정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노인을 공경하면(老老) 젊은이들이 따르게 되고, 불초한 사람들을 핍박하지 않으면(不窮窮) 이치에 통달한 사람들이 모여 들게 됩니다. 너그럽고 인정 있는 모습을 흠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인을 공경하면서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行乎冥冥), 불초한 자들에게 아량을 베풀면서도 보답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施乎無報), 현명한 사람이든, 불초한 사람이든, 이 사람을 한 마음 한 뜻으로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이 덕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덕'입니다. 그러므로 순자는, 이 사람이 실수를 혹시나 저지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늘조차도 이 사람이 잘못되지 않게 보살피리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군자가 수양해서 '禮'를 이루는 이유는 예를 이루었을 때 수반되는 효용을 얻기 위해서일까요? 물론 효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오로지 효용 때문에 예를 수양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순자는 실용적인 사람이었고, 따라서 꼬장꼬장하게 굴 줄도 알았지만, 반대로 유연하게 생각할 줄도 알았습니다. 순자는 덕목을 제시할 때, 항상 이 덕목을 이루면 어떤 점이 더 좋은지를 이야기해서 사람들을 끌어 들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면서도 원칙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禮'를 수양하면 천하가 자신을 우러러 보고, 수양하지 않으면 천하가 자신을 내 버릴 것이기 때문에 예를 수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집을 나설 때, 하다 못해 세수라도 한 번 하고 나가는 것은 단순하게 남에게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옷을 입고 나가는 것도, 옷을 안 입으면 공연음란죄에 저촉되기 때문이 아니죠. 우리는 우리 모습을 단정하게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를 배워서 저런 효용이 있기는 하지만, 단지 효용이 예를 배우는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를 배우는 것은 예가 옳기 때문입니다. 예를 배워야 '올바른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효용은 부가 요소에 불과합니다.

 

 

 

순자의 수양법이 결국에는 '禮'로 귀결된다는 점은 이미 몇 차례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순자는 '禮'를 어떻게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장자는 《내편》 「대종사」를 처음 시작하면서, 우리가 '知'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장자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취지는 물론 유가나 묵가 같은 '기타' 학파를 따르는 것 보다 '道'를 따르는 것이 더 낫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知'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에 착안했습니다. 만약에 철수가 "영희가 밥을 먹었데."라고 했는데, 철수가 못 믿을 놈이라면, 철수의 말의 진위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장자는 이를 근거로 하여, 여러 학파들의 '知'에는 근거가 없고, 오로지 '道'만이 '眞知', 즉 진정한 지식으로써 따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순자도 마찬가지로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순자가 장자를 만났었는지, 아니면 《장자》를 공부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신」에는 장자의 논증과 비슷한 논점이 두 군데나 나옵니다. 하나는 지금 이야기할 '禮의 근거'이고, 다른 하나는 '名家에 대한 의견'입니다.

 

우선 순자는 '法', 즉 예법을 언급하며 논증을 시작합니다. 예법을 숭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선비(士)이고, 식견이 견실해서 아는 대로 이행할 줄 안다면 군자(君子)라고 할 만합니다. 또한 지혜를 내는 모습이 기민하고, 또 지혜가 끝이 없다면 성인(聖人)이라고 했습니다. 단계를 따지자면 '士' 다음에 '君子'가 있고, 그 다음에 '聖人'이 있죠. 하지만 역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法', 즉 '禮'입니다. 예를 숭상할 줄 모르면 선비가 될 수도 없고, 군자도, 성인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법을 숭상하려면 우선 예법이 옳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장사꾼들이 손님들을 등처먹는 것이 예법일까요? 아닙니다. 택시 기사들이 깜빡이를 안 켜는 게 예법일까요? 아닙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예법'을 들고 나와서 자기네들의 '예법'이 진정하고 타당하다고 하면 말이 될까요? 아닙니다. 그럼 예법이 '옳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순자는 바로 '師', 즉 스승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스승이야말로, 예를 바로잡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師者/所以正禮也) 그래서 순자는 스승이 아니라면 순자 자신이 어떻게 예가 옳다는 점을 알고 있을 수 있겠냐고(無師/吾安知禮之爲是也)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단지 '스승에게 배웠다', 혹은 '우리 선생님이 최고이시다'라고 한다고 그 '師'에게서 배운 '예법'이 옳은 것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장사꾼들에게도 자기 나름대로의 '師'가 있을 테니, 장사꾼이 손님을 등처먹는 기술도 '禮'의 범주에 들어가게 될 테니까요. 이 점은 사실 「수신」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추측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순자는 '옳다'고 하는 근본을 요(堯)나 순(舜), 혹은 문왕(文王), 주공(周公) 같은 유가의 성인(聖人) 혹은 선왕(先王)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선왕이 세상을 다스릴 때 세상은 평안했고, 그 선왕의 통치 기법과 정신을 이어 받은 것이 바로 공자이며, 공자의 뜻을 잘 잇고 있는 것이 바로 자궁(子弓)이고, 그 자궁의 뜻을 잘 이은 것이 순자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순자 자신이 잇고 잇는 '禮'는 저 먼 선왕들에서부터 올바르게 이어져 내려 온 것이 됩니다. 이미 세상을 올바르고, 평화로우며, 공정하게 다스린 적이 있는 '도리'이니, 그 '도리'가 순자 자신에게까지 잘 이어졌다는 점이 담보된다면 그 도리인 '禮'도 옳은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순자는 '師', 즉 스승을 '禮'의 근거라고 했습니다. 순자의 스승이 자궁(子弓)이 분명한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비십이자」에서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주제인 '군자가 견지해야 할 원칙'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원칙'은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견지해야 할 지침이자 태도입니다. 나빠도 지켜야 하고, 좋아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자는 군자(君子)가 처지가 좋고 나쁠 것을 가정하고, 처지가 어떻든 간에 군자가 지켜야 할 점이 있다고 논지를 전개해 나갑니다. 이 '원칙'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심지가 흔들려서는 안 되며, 사사로운 욕심 보다 공적인 정의를 우선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순자는 이 부분에서 군자를 위정자라고 직접 표현하지는 않지만, 순자의 논증을 살펴 보면 순자가 군자를 위정자의 입장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나 제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대부 이상의 귀족 계급으로 말입니다.

 

군자는 이익을 구할 때에는(求利) 대강대강 하지만(略), 해악을 피할 때에는(遠害) 기민하게 해야 합니다.(早) 모욕을 피할 때는(避辱) 조심조심 하지만(懼), 올바른 도리를 실천할 때는(行道理) 과감하게 해야 합니다.(勇) '道理'란, 물론 유학의 '義'를 실천하는 길을 뜻할 것입니다. 과감하다는 것은 자기 몸을 우선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하는데 위험하겠다고 몸을 사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군자는 빈궁하더라도(貧窮) 절개를 꼿꼿하게 빛내야 하니(志廣), 인을 숭상하기 때문이고(隆仁), 부귀하더라도(富貴) 몸가짐은 여전히 공손해야 하니(體恭) 권세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殺埶) 또한 군자는 편안하더라도(安燕) 나태해지지 않으니(血氣不惰) 예의 이치를 잘 분간하기 때문이고(柬理), 피곤하고 괴롭더라도(勞勌) 용모가 흐트러지지는 않으니(容貌不枯) 예의 법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好交) 그리고 끝으로, 군자는 화가 나더라도 재물을 지나치게 빼앗지 않고(怒不過奪), 즐겁더라도 재물을 지나치게 내리지 않습니다.(喜不過予)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사사로운 마음 보다 크기 때문입니다.(是法勝私)

 

마지막 두 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자가 유학적 '義'를 지켜야 한다는 점으로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두 구는 좀 상이하죠? '怒不過奪'와 '喜不過予'에서 '奪'과 '予'는 다름이 아니라 《주례》 「천관총재」에 나옵니다. 「천관총재」에는 팔병(八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柄'은 원래 '자루'나 '손잡이'를 뜻하지만, '권력', '권세'라는 의미로 파생되기도 했습니다.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자루'가 '권력'이라는 뜻으로 쓰인 예입니다. 그래서 '八柄'이라는 것은, '군주가 신하들을 다스릴 여덟 가지 권력'을 뜻합니다. '八柄' 중 '奪'은 여섯 번째, '予'는 세 번째입니다. '奪'은 '빼앗다'는 뜻입니다. '予'는 '賜'와 같습니다. '선물을 내리다'는 뜻입니다. 즉, '奪'과 '予'은 각각 벌과 상으로 재물을 빼앗고 나눠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순자가 군자를 보고 '화가 나도 많이 뺏지 않는다', 그리고 '기쁘다고 많이 나누어 주지 않는다'고 한 것은 군자가 위정자의 입장에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를 풀어 나가야 한다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부분에서도 위정자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명백히 군자와 위정자가 동격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순자는 이 뒤에 《서》를 인용해서 쐐기를 박습니다. 순자는 '無有作好/遵王之道//無有作惡/遵王之路'를 인용합니다. 이 부분은 《서》의 「주서 홍범」에 나오는 말로,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천명을 받고 13년만에 기자(箕子)에게 가서 정치의 도리를 묻는 장면이거든요. 기자는 문왕에게 하늘이(天) 우에게(禹) 내렸다는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洪範九疇'는 정치에 대한 아홉 가지 원칙입니다. 인용구는 홍범구주 중 다섯 번째인 '建用皇極'에 대한 기자의 설명 중 일부입니다. 전문은 '無偏無陂/遵王之義//無有作好/遵王之道//無有作惡/遵王之路//無偏無黨/王道蕩蕩//無黨無偏/王道平平//無反無側/王道正直//會其有極/歸其有極'입니다. 모두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정치를 펴 나가야 한다고 하는 말이죠. 이 문단을 마치며 순자는, 《서》의 이 글이 뜻하는 바를 '군자는 공정한 도의로써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낼 수 있다(君子之能以公義勝私欲)'라고 정리했습니다. 정리하면, 군자는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심지가 흔들려서는 안 되며, 위정자로써 사사로운 마음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신하'로써 섬겨야 할 군주를 선택할 때도 이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몸이 편하면 좋겠지만, 몸이 편한 것 보다는 마음이 편한 게 우선입니다. 언제 군자가 마음이 편할까요? 바로 '義'를 지킬 때입니다. 이익이 많으면 좋겠지만, 이익 보다는 무엇이 올바르냐가 더 중요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죽여서 어마어마한 돈을 받는다 한들,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 '義'에 어긋난다면 군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군주를 섬기는데, 한 사람은 난군(亂君)이고, 한 사람은 순군(順君)입니다. 난군은 나라를 망칠 놈이고, 순군은 올바른 도리를 따르는 군주입니다. 그런데 난군을 섬기면, 몸도 수고롭지 않고, 이익되는 것도 많다고 합니다. 순군을 섬기면 그렇지 않겠죠. 하지만 군자는 난군 보다는 순군을 섬겨야 합니다. 난군은 '義'를 따르지 않고, 순군은 '義'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홍수나 가뭄이 들었다고 농부가 농사를 포기하지는 않고, 손해 좀 보았다고 장사꾼들이 장사를 때려 치우지 않는 것처럼, 군자도 이 원칙, 즉 '義'를 따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 번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하필' 유학을 공부해야 할까요? 순자는 왜 우리에게 유학을 공부하라고 하고 있을까요? 좀 막연하죠? 그래서 순자는 반대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면 안 될까요?' 유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순자가 사실 「권학」에서 이리저리 설명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권학」으로 거슬러 올라갈 생각은 없습니다. 「수신」에서 순자는 질문을 거꾸로 던집니다. 어떤 학문이 공부할 가치가 없는지 말입니다. 순자는 그 예로 명가(名家)를 들었습니다.

 

명가 학자들은 당대의 이단아들이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것' 혹은 '말도 안 되는 것'을 주장하기로 이름이 드높았습니다. '白馬非馬'는 지금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궤변'입니다. 다만 당대의 평가는 '말은 재밌는데 실속은 없다'였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白馬非馬'는 보통 공손룡(公孫龍)의 설이라고 하지만 《한비자》에서는 달리 나옵니다. 《한비자》 「외저설 좌상」에 아열(兒說)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열은 송나라(宋) 사람으로, 말을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특히, 백마를 말이 아니라고 해서(白馬非馬) 제나라 직하(稷下)에 모인 변설가들을 다 설복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아열도 관문을 통과할 때는 관리를 설복시킬 수가 없어서 말에 대한 통행료를 내야 했다고 합니다.(乘白馬而過關/則顧白馬之賦) 한비자는 이 말을 두고 '헛소리로는 한 나라 사람들을 모두 굴복시킬 수 있었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한 사람조차도 기만할 수가 없었다(籍之虛辭則能勝一國/考實按形不能謾於一人)'라고 평했습니다. 아열은 《여씨춘추》와 《전국책》에도 나오는데, 각각 제모변(劑貌辨), 제모변(齊貌辨)이라고 나와서는 말재주로 제나라의 정곽군(靜郭君)을 위기에서 구제해 줍니다.

 

한비자가 아열을 비판한 것처럼, 다른 학파의 학자들도 열심히 명가를 비판했습니다. 《여씨춘추》 「심응람 불굴」에는 '惠子之治魏為本/其治不治', 즉 '혜자가 本으로 위나라를 다스렸으나,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았다'라고 하여, 정치인으로서도 혜자의 치적이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우리가 다룰 순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비십이자」에서도 힐난할 뿐만 아니라, 이 바로 다음 편인 「불구」에서도 비판합니다. 장자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습니다. 물론 장자가 명가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물론」에서 유가와 묵가를 가장 낮은 급, 즉 시비(是非)를 구별하는 수준까지 내려와 있다고 하는 것에 비해, 혜자(惠子)의 방생지설(方生之說)은 만물을 구별하는 궤변이기는 하더라도, 적어도 시비를 구별한다고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유묵 보다는 혜자가 낫다는 것입니다. 혜자가 바로 명가 사람이죠. 그러나, 호의적인 농담이 다소 섞이긴 했어도, 장자 역시 혜자의 말을 쓸 데 없다고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혜자도 장자의 말이 쓸 데 없다고 했던 점이 재밌죠. 「소요유」에 나옵니다. 

 

순자가 명가를 비판한 초점은 '명가의 학설이 군자가 논할 만하지 않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럼 어떤 기준을 가지고 군자가 논할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었을까요? 순자는 끝이 있는 것을 추구하느냐(有所止之),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느냐(窮無窮/逐無極)로 학문을 나누었습니다. 끝이 있다면, 아무리 느리더라도, 일관되게 노력만 하면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권학」에서 순자가 많이 했었고, 또 「수신」에서 반복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천리마(驥)가 아무리 빨라도, 둔한 말도(駑馬) 열흘 만큼 가면 천리마가 하루 간 거리를 따라 잡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목표 자체가 끝이 없다면, 천리마이든, 노둔한 말이든 상관이 없이 둘 다 이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 계산기에다가 계속 1을 더해서 숫자가 커지는 모습을 보면서 놀았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끝까지 가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계산기에는 표기할 수 있는 자릿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하다 보면 끝났을 겁니다. 그런데 계산기에 표기할 수 있는 자릿수가 한정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제가 늙어 죽을 때까지 1을 더해 가더라도 저는 그 작업을 끝낼 수 없을 겁니다. 수는 무한하니까요. 그래서 칸토어(Cantor)가 처음 무한을 세겠다고 했을 때, 모두 다 미쳤다고 했던 겁니다. 장자는 「양생주」를 가장 처음 시작하면서, 우리 삶은 끝이 있고, 지식에는 끝이 없는데, 유한한 삶을 살면서, 무한한 지식을 좇는 것은 위태롭다(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以有涯隨無涯/殆已//已而爲知者/殆而已矣)라고 이야기합니다. 순자와 비슷하죠? 논증 방식이 같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순자 같은 유학자, 그리고 묵가를 비판하기 위해 그 말을 한 것이고, 순자는 명가도 명가이지만, 사실 도가도 명가와 같은 부류로 생각했을 것이니,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이처럼 순자는 숫자를 1씩 더해 가는 대신, 논증이 끝이 날 것인지, 아니면 끝이 나지 않을 것인지로 학문을 구별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와 같습니다. 지금은 물론 우리 모두 닭이 먼저라고 하겠지만, 옛날에는 이 점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논쟁'을 비유할 때 이 말을 빌리곤 했습니다. 순자는 명가의 논쟁도 이런 부류라고 했습니다. 상기한 것처럼, 한비자는 아열의 '白馬非馬'를 헛소리일 뿐, 실제적으로는 가치가 없다고 평했습니다. 순자는 '白馬非馬' 대신 견백(堅白), 동이(同異), 유후무후(有厚無厚)를 예로 들었습니다. 이 설들은 아마도 모두 혜자(惠子)가 처음 주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신」에는 출전이 나오지 않지만, 견백(堅白)은 《장자 내편》 곳곳에서 혜자의 설이라고 이야기가 나오고, 또 동이(同異)와 유후무후(有厚無厚) 역시 《장자 천하》 「잡편」에 혜자의 역물지의(歷物之意)로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손룡자》에도 물론 소개되어 있지만, 공손룡이 가장 후대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공손룡 때 이르러서 명가의 설들이 《공손룡자》로 취합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각 설에 대해 약간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견백(堅白)은 '딱딱하고 흰 돌은 존재할 수 없다'이고, 동이(同異)는 '같고 다르다는 관념을 한 데 합쳐 두는 설'이며, 유후무후(有厚無厚)는 '얇아서 두께는 없더라도, 그 크기는 천 리일 수 있다'는 설입니다. 이 설들의 진위 자체는 제가 따지지 않겠습니다. 글을 아주 길게 써야 할 뿐더러, 견백(堅白), 동이(同異), 유후무후(有厚無厚)의 타당성 그 자체가 순자의 논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설을 보고 '말이 안 되는구나' 혹은 '어떻게 논증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느끼셨다면 충분합니다.

 

순자는 이런 설들을 논증하는 작업이 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설들을 논증하는 것은 재미있고, 그리고 아주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 사실 군자에게는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들이 눈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이런 설들을 두고 볼 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순자는 군자들이 이런 설들을 고찰해 보는 것에 대해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폄하하지는 않지만(非不察), 직접 따지지 않고 내 버려 둔다고 했습니다.(不辯止之) 또한, 기괴한 짓(倚魁之行)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은 일이나 한다고 비방하지는 않지만(非不難), 기괴한 짓을 직접 벌이지는 않고 내 버려 둔다고 했습니다.(不行止之) '倚魁之行'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견백(堅白), 동이(同異), 유후무후(有厚無厚)와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합니다. 군자는 이런 것들을 왜 내 버려 둘까요? 끝이 없는 길을 가려면, 천리마든, 노둔한 말이든,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터지더라도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군자든, 성인이든, 어떻게 무한한 길을 걸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논박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유학은 끝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순자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유학을 공부하라고 하는 것은 순자가 유학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게 끝이 있을까요? 제가 앞에서 순자가 스승, 즉 '師'를 예의 판단 근거로 삼았던 점을 설명할 때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선왕(先王)이 이미 이루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유학자들의 목표는 논리학적, 혹은 인식론적 논증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유학자들에게는 올바른 정치를 천하에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런데 옛 선왕들이 이미 정치를 세우는 길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유학자들은 공자를 통해 내려 오는 '올바른 길'을 따라 가면 그만인 것이죠. 공자가 '述而不作'이라고 했던 것처럼, 유학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보다는, '이미 나 있는 길을 충실히 따라 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천리마든, 노둔한 말이든, 모두 전일하게, 일관되게, 한결같이 노력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군자든, 성인이든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기하였듯, 세 번째 주제까지가 「수신」의 주요 화제입니다. 순자는 나머지 문단들에서는 비교적 평이한 이야기들만을 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나머지 이야기들을 가볍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자기 반성은 유학자의 길에서 항상 중요한 과정입니다. 반성이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노선을 수정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남이 자기 보다 낫다면 질투하지 말고 자신도 나아지도록 노력하면 되고, 남이 자기 보다 못하다면 깔보지 말고 조용히 자족하든지, 그 사람을 이끌어 주면 됩니다. 밖에서 선(善)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도 그 선이 내재해 있는지 돌아 봐야 하고, 밖에서 불선(不善)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도 혹시 불선이 내재해 있는지 다시 보아야 합니다. 선이 있으면 자기 스스로 만족하면 됩니다. 자만할 것도 없고, 떠벌일 것도 없습니다. 선이 있으면 좋고, 그 뿐입니다. 만약 불선이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쳐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선이 내재해 있느냐, 불선이 내재해 있느냐는 것은 자기가 잘 수양하고 있는지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친구가 그 점을 솔직히 '나 자신'에게 이야기해 준다면, '나'는 '나 자신'을 반성할 수고를 덜게 됩니다. 순자는 자기 결점을 솔직히 올바로 진단해 주는 사람을 '師', 즉 '스승'이라고 했고, 자기 장점을 솔직하게 올바로 진단해 주는 사람을 '友', 즉 '친구'라고 했습니다. 장점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고, 결점은 내가 앞으로 고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점을 아는 것 보다 단점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짓으로 장점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 즉 아부하는 놈들도 있습니다. 순자는 이것을 '諂諛'라고 했습니다. '아첨', '아부'라는 뜻입니다. 이런 놈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가 않습니다. 장점을 짚어 주는 것도 아니고, 단점을 말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없는 장점이 자기에게 있다고 믿게 되니, 자만하게만 됩니다. 순자는 이런 놈을 '賊', 즉 '원수'라고 했습니다. '나를 망치는 놈'이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자기 결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군자입니다. 순자가 시종일관 본 받을 만한 사람을(師) 따르는 것이 공부하는 데 가장 가깝고 편한 길이라고 한 말과 잘 합치됩니다. 

 

반면 소인(小人)은 자신을 되돌아 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난잡하면서 자기 결점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 즉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미워하죠. 자기 자신은 불초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현명하게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순자가 '賊'이라고 한 부류, 즉 자기에게 아첨하는 부류와는 가까이 지내고, 자신을 진정 위하는 자들은 멀리 하게 됩니다. 이러다 보면 소인은 망하게 될 겁니다.(滅亡) 딱 저를 집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좀 찔립니다.

 

정리하자면, 이 부분의 초점은 '자신을 타당하게 비판해 주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그 말을 새겨 들으며, 자신을 근거 없이 칭찬하는 사람을 멀리 하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 반성이 중요합니다.

 

 

 

순자는 군자가 좇아야 할 태도, 좇지 말아야 할 태도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이야기했습니다. 다소 많긴 하지만, 한 번 짚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원래는 순서가 뒤섞여 있지만, 저는 따라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재분류해 봤습니다.

 

선(善)을 가지고 남을 이끌어 주는 것을 '敎'라고 합니다.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선으로 남과 어울리는 것을 '順'이라고 합니다. '順'은 '和'와 통합니다. '조화를 이룬다', '남을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是是),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을(非非) '知'라고 합니다. '식견이 있다'는 뜻입니다. '直'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올곧다'는 말이죠. 들은 것이 많으면 '博'이라고 합니다. '박학하다'는 말 아시죠? 본 것이 많으면 '閑'이라고 하는데, '식견이 여유롭다'는 뜻입니다. 통치를 위한 강령이 적은 데도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을 '治'라고 합니다. '治' 자체가 '잘 다스려진다'는 말입니다.

 

반면, 불선으로 남을 이끌어 가는 것을 '諂'이라고 하고, 불선으로 남들과 작당하는 것을 '諛'라고 합니다. '諂'과 '諛'는 모두 '아첨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고대에는 뜻을 구별했던 것 같습니다.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非是), 그른 것을 옳다고 하는 것을(是非) '愚', 즉 '어리석다'라고 합니다. 양민을 다치게 하는 것을 '讒'이라고 합니다. '참소하다'는 뜻입니다. 양민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賊'이라고 합니다. '원수 같은 놈', '도적 같은 놈', '학대하다'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한 짓을 숨기려 드는 것을 '詐', '기만하다'고 하고, 자기 말을 바꿔 대는 것을 '誕'이라고 합니다. '誕'은 '허풍'입니다. 태도의 일정한 기준이 없는 것을 보고 '無常'이라고 합니다. '일관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잇속을 위해 의(義)를 져 버리는 것을 보고 '至賊', '아주 못된 짓'이라고 합니다. 들은 것이 적으면 '淺'이라고 합니다. '일천하다'는 말 아실 겁니다. 본 것이 적으면 '陋'라고 하는데, '식견이 좁다'는 뜻입니다. 행동을 주저하는 모습을 '偍'라고 합니다. '머뭇거리다'는 뜻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을 쉽게 까먹는 것을 '漏'라고 합니다. '빗물이 질질 새는 모습'을 뜻합니다. 통치를 위한 강령이 많은데도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秏'라고 합니다. '秏'는 '정치가 어지러운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19개입니다. 그 중 좇아야 할 덕목이 7개, 좇지 말아야 할 폐습이 12개입니다. 내용은 사실 뻔합니다. 군자가 일관되게 '善'을 좇을 것, 그리고 정치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짚어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초점은 좀 다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글자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 보고 싶습니다. 선진 시대 문헌에는 간혹 이렇게 '글자 단위'로 글자의 뜻을 해설해 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기법은 자기 뜻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표현 그대로 '조목조목' 따지는 말이니까요. 《장자 잡편》의 「어부」에도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장자 내편》의 「제물론」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었고요. 찾아 보면 많습니다. 고대의 한자와 지금 한자는 쓰임이 다를 때가 많고, 그 세세한 의미도 다를 경우가 많습니다. 《순자》를 읽다 보면 유월(俞樾)이나 왕염손(王念孫) 같은 학자들이 A라는 글자를 B나 C 같은 전혀 다른 글자로 바꿔서 이해하려 들려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겉으로 보면 얼토당토 않은데, 전후의 의미를 따져 보면 그 의견이 타당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권학」에 '傲'라는 말이 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傲'는 '거만하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유월은 '傲'를 '거만하다'가 아니라, '경박하다', '조급하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유월은 《논어》의 「계씨」를 가지고 와서, 지금 '言未及之而言/謂之傲'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판본에 따라 '言未及之而言/謂之躁'라고 되어 있음을 보이고, 그래서 '躁'와 '傲'가 같고, 고대에는 '傲'와 '躁'가 통용되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언어는 변하기 때문입니다. 한자 자체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생겼고, 지역에 따라서 글자가 다르기도 했으며, 우리에게 사투리가 있는 것처럼, 중국에도 사투리가 있어서 같은 의미인데 글자를 전혀 다르게 쓰기도 했습니다. 문체도 변했습니다. 《순자》나 《장자》 같은 고대 한문과, 명나라나 청나라 때 글을 보면 쓰이는 표현이나 조사 같은 것들이 많이 바뀌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傲'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 '傲'의 의미가 아닌 것처럼, 고대 한문에 사용된 글자들이 지금 글자와 뜻이 같을 것이라고 간주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시대별로 옥편을 편찬해서 교범으로 만들어 둔 것도 아닌데, 지금 고대의 뜻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요? 다른 거 없습니다. 뒤져야 합니다. 앞뒤 문맥을 살펴서 이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유추해야 합니다. 물론 책 한 권이 아닙니다. 시대에 맞게 여러 표본들을 모아야 합니다. 「수신」의 이 부분처럼 글자별로 의미를 설명해 둔 부분이 있다면 이런 작업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조어의 특성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한대 이후에는 단어를 만들 때 보통 두 글자 이상을 모아서 만듭니다. 그 이전엔 한 글자와 두 글자가 섞여 있죠. 그런데 단어가 만들어질 때는 비슷한 뜻인 글자를 두 개 모아서 단어를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損害'는 '피해를 입다'는 뜻인데, 단어를 구성하고 있는 '損'과 '害' 모두 '피해를 입다'는 말인 것처럼요. 본문에 나온 '秏'를 예로 들어 봅시다. 《사기》에는 '秏'가 16번 나옵니다. 그 중 '衰秏'라고 쓰인 경우가 세 번인데, '衰'는 '쇠약해지다', '쇠하다'는 말이므로, 함께 단어를 구성하고 있는 '秏'도 '쇠하다'는 뜻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虛秏'라고도 쓰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秏'는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뜻할 것입니다. '秏亂'이라고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때 '秏'는 '혼란스럽다', '질서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렇게 유추합니다.

 

옥편을 찾아 보면 되지 않을까요? 옥편을 아무리 뒤져 봐도 '傲'에는 '조급하다' 같은 의미가 없습니다. 《설문해자》나 《강희자전》 같은 옥편에 뜻을 수록할 때도 아마 이런 방식을 사용했을 겁니다. 지역별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니, 《방언》 같은 책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작업이라는 것이 완벽할 수가 없고, 그리고 《순자》, 《장자》 같은 고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이 또 달라질 수가 있으므로, 옥편을 찾더라도 고대 한문을 보다 보면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다 못해 《시》에 기록되어 있는 의미를 차용하기도 하는데,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뜻으로 글자가 쓰이기도 합니다. 저는 「권학」을 읽기 전까지 '匪'가 '비적', '도적'처럼 나쁜 뜻으로만 사용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소아 상호지십」의 「采菽」에서는 '彼'처럼 대명사로 쓰이기도 하더군요. 저처럼 직접 번역에 도전해 '본', 혹은 '볼' 분들은 아마 한 번 이상 마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라도 하게 되더라고요.

 

 

 

《순자》에서 「권학」과 「수신」은 입문 단계입니다. 장자가 「소요유」에서 생각을 열어야 자기 말을 따라 올 수 있다고 한 것처럼요. 공부하고, 또 자기 자신을 갈고 닦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순자의 말을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겨우 첫 단계를 넘었습니다. 저도 '예를 따르고', '순자를 본 받으며', '일관되게' 번역을 이어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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