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 2 - 수신 - 3 - 군자는 무엇을 따르고, 따르지 말아야 할까(재번역 예정)

2021. 10. 5. 07:53순자 이야기/원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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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安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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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0년 5월 7일 12시 24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98

 

순자 - 2 - 수신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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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201

 

<하단 주석> 순자 - 2 - 수신 - 3 - 군자는 무엇을 따르고, 따르지 말아야 할까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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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善先人者謂之教,以善和人者謂之順;以不善先人者謂之諂,以不善和人者謂之諛。是是、非非謂之知,非是、是非謂之愚。傷良曰讒,害良曰賊。是謂是、非謂非曰直竊貨曰盜,匿行曰詐,易言曰誕 趣舍無定謂之無常,保利棄義謂之至賊。多聞曰博,少聞曰淺;多見曰閑,少見曰陋。難進曰偍,易忘曰漏。少而理曰治,多而亂曰秏。

 

선으로(以善, 以는 '~로써') 남을 이끌어 주는(先人, 人은 '다른 사람', 先은 '이끌다', '이끌어 주다') 것을 교(教, '교화하다')라고 하고, 선으로 남과 어우러지는(和人) 것을 순(順, '따르다', '거스르지 않다')이라고 한다. [반면에] 불선으로(以不善) 남을 이끌어 가는 것을 첨(諂, 사실 諂과 뒤에 나오는 諛는 둘 다 '아첨한다'는 말로, 일견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장자 잡편》의 「어부」에서는 '希意道言/謂之諂//不擇是非而言/謂之諛라고 하여 둘을 구분했다. 즉, '남이 바라는 것에 맞게 말을 하는 것'이 諂고,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말하는 것'이 諛다. 나는 「어부」를 따라 諂를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라고 본다. 楊倞은 諂을 陷으로 보아서, '말로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렇게 해석하면 너무 멀리 돌아가게 된다.)이라고 하고, 불선으로 남과 작당하는(和人) 것을 유(諛, 나는 《장자 잡편》의 「어부」를 따라 '자기 잇속에 눈이 뒤집혀서 옳고 그른 것도 구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王念孫은 「어부」를 인용해서 導人以不善, 즉 '남을 불선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러면 以不善和人者라는 설명에 맞지 않게 되고, 오히려 不善先人者라는 諂에 대한 설명에 더 잘 맞게 된다. 楊倞은 諛가 俞와 같다고 했으나 王念孫이 지적한 것처럼 어떤 뜻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라고 한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是是),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非非) 것을 지(知, '식견이 있다', '변별할 수 있다', '분별할 수 있다')라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非是), 그른 것을 옳다고 하는(是非) 것을 보고 우(愚, '어리석다', '멍청하다')라고 한다.

 

양민을 다치게 만드는 것을 참이라고 하고(傷良曰讒, 良은 '양민', '못됐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이른다. 傷은 '다치게 하다', '신체적인 피해를 끼치는 것', 讒은 '참소하다', '중상하다', 이 부분에서는 讒과 賊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諂과 諛처럼, 《장자 잡편》의 「어부」에서도 讒과 賊에 대해 설명하는 말이 나온다. 「어부」에서는 好言人之惡, 즉 '남을 나쁘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讒이라고 했고, 析交離親, 즉 '우정을 가르고, 친구를 떨어뜨려 놓는 것'을 賊이라고 했다. 참고할 만하다. 그런데 《춘추번로》 「인의법」에서는 稱人之惡, 즉 '남을 나쁘다고 하는 것'을 賊이라고 하였으니, 「어부」에서 讒을 설명한 뜻과 같다. 《순자》와 《장자》에서는 讒과 賊 등을 구별하고 있고, 《춘추번로》에는 그 뜻이 뒤섞인 것은, 고대에는 표현이 달리 쓰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단어의 뜻이 통섭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순자》가 傷과 害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害라는 한 단어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 양민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적이라고 하며(害良曰賊, 앞에서 傷의 뜻이 '신체적인 피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害는 '손해', '재해', '훼방하다', '해치다'는 뜻이다. 賊은 '적대적', '원수 같은 짓을 하다', '학대하다'), [반대로]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是謂是),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非謂非) 것을 직(直, '곧다', '올곧다', '공정하다', '꾸밈이 없다', '바르다')이라고 한다. 재물을 훔치는 것을(竊貨, 竊은 '훔치다') (盜, '도둑질하다')라고 하고, [자기가] 한 짓을 숨기려 드는 것을(匿行, 匿은 '숨기다', '감추다', '숨겨서 나타내지 않다') (詐, '속이다', '기만하다', '거짓말하다', 匿行을 고려하면 '말을 꾸며 대다'가 이 부분에서 가장 적합하겠다.)라고 하며, [자기] 말을 바꿔 대는 것을(易言, 앞에서 詐가 '말을 꾸며 대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易言의 易가 '바꿀 역'이면 앞의 내용과 뜻이 중복된다. 따라서 易는 '쉬울 이'여야 한다. 그러면 易言은 '말을 쉽게 내뱉는 것', '말에 무게감이 없는 것',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보고 탄(誕, '황당하다', '불합리하다', '엉터리다', '허풍 떤다')이라고 한다. 취하고 버리는 것에 일정한 기준이 없는 것을(趣舍無定, 趣舍는 取舍와 같다. '취하거나 취하지 않는 것',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보고 무상(無常, 常은 恒과 같다. '일정함', '일정한 법칙', '일정한 규칙', '항상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그래서 無常은 쉽게 말해 '줏대 없는 놈'이라는 뜻이다.)이라고 하고, [자기] 잇속에 안주한답시고 의를 져 버리는 것을(保利棄義, 楊倞은 保를 安이라고 했다. 그러면 '안주하다'는 뜻이다.) 지적(至賊, 至는 極, 賊은 '나쁜 짓', '도리를 지키지 않으려 하는 것'을 뜻한다.)이라고 한다.

 

[사람이] 들은 것이 많으면(多聞) 박하다(博, '넓다', 博學이라는 말처럼 '학문이나 식견이 넓은 것'을 뜻한다.)고 하고, 들은 것이 적으면(少聞) 천하다(淺, '얕다', 원래는 '물이 얕은 모습'을 뜻한다. 淺見처럼, '학문이나 식견이 좁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본 것이 많으면(多見) 한하다(閑, 뜻이 많으나, 이 구문에서는 陋와 대조되는 뜻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陋는 淺과 뜻이 같아야 하기 때문에, '좁다'는 뜻이 된다. 閑의 뜻은 陋의 반대여야 하므로 '여유롭다', 즉 '식견이 넓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楊倞은 習과 같다고 했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고, 본 것이 적으면(少見) 누하다(陋, '좁다', 즉 '식견이 좁다'는 뜻이다. 《한서》 「동중서전」에서는 此臣淺陋之罪也라고 하여 淺과 陋가 같이 쓰였다. 두 글자가 같은 뜻으로 한 단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고 한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것을(難進, 難은 '곤란해 하다', '꺼리다', 進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 難進은 '무언가를 하기 싫어하는 것', '하기 주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偍, '머뭇거리다', 楊倞은 提, 媞와 같이 弛緩, 즉 '헤이하다', '태만하다'라고 풀이했다.)라고 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쉽게 까먹어 버리는 것을(易忘) (漏, '빗물이 새는 모습'을 뜻한다. '새다', '빠져나가다'는 말이다. '기억을 잡아 두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라고 한다. [통치를 위한 강령이] 적은데도 [정치가 잘] 다스려지는 것을(少而理, 少는 '적다', 理는 '다스리다', 그런데 사실 무엇이 적다는 말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楊倞은 舉其要, 즉 '요점', '근본'이라는 투로 해석했다. 문맥상 이 문장에서 설명하려는 대상이 理, 즉 '정치'이기 때문에, 정치하기 위한 '강령', '법규', '규칙'이라고 하면 제일 타당하겠다. 金學主는 '노력이 적다'라고 했고, 李止漢은 '일을 적게 하다'라고 했으며, 宋基采는 '조치가 간소하다'라고 했다.) (治, 治는 秏와 대조되는 말이다. 秏는 '정치가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뜻하므로, 治는 '정치가 올바르게 선 모습'이다.)라고 하고, [강령은] 많지만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多而亂) (秏, 楊倞은 秏를 物多而易盡, '무언가 많은데 쉽게 소진되는 것', '소진된 모습'이라고 했고, 郝懿行은 《경전석문》에서 《한시외전》을 인용해서 秏를 多而雜亂, 즉 '무언가 많고 난잡한 모습'이라고 했다. 王念孫은 秏를 眊와 같다고 보고, '어지럽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내가 살펴 보니, 秏라는 글자도 있고, 耗라는 글자도 있다. 글자 모양이 비슷해서 혼용되지 않았나 하다. 「수신」에는 秏가 쓰였다. 《사기》를 찾아 보니, 秏가 쓰인 것이 16번인데, 衰秏라고만 쓰인 경우가 세 번이고, 衰秏가 아니어도 '쇠하다', '소모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 가장 많다. 그 다음이 虛秏처럼 '텅 비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다. 사실은 크게 보면 '쇠하다', '소모하다'는 뜻의 하위 의미이다. 그 다음으로 秏亂이라고 하여, 王念孫의 말처럼 '어지럽다', '혼란스럽다'라고 사용된 경우가 있다. 물론 이 뜻 역시 '쇠하다'는 의미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반면 《사기》 안에서 耗가 쓰인 예는 한 번도 없다. 《한서》는 다르다. 《한서》에는 秏가 11번 쓰였고, 耗는 25번 쓰였다. 秏의 경우 《한서》에서의 쓰임새는 《사기》와 비슷하다. 그런데 耗는 《한서》에서 耗減, 耗亂, 虛耗, 衰耗와 같이 사용되고 있다. 《사기》에서 秏가 쓰인 용례와 같다. 따라서 秏와 는 아마 같은 글자일 것이고, 후대로 갈수록 차차 耗가 秏를 대체해 나가지 않았나 하다. 秏와 耗의 뜻은 상기한 것처럼 '쇠하다', '소모되다', '소진되다', '텅 비다', '어지럽다', '혼란스럽다'이나, 본문의 문맥에 맞추려면 '정치가 어지럽다', '정치가 올바르지 못하다', '정치가 혼란스럽다'라고 해석해야 가장 타당하겠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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