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5. 10:05ㆍ순자 이야기(** 수신편 번역 중 잠정 중단)/원문 번역(하단 주석)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보기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원래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숫자로 바꾸고 하단으로 내려 두었습니다. 원래 글은 물론 원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주석을 하단으로 내리니까 정작 중요한 주석과 중요하지 않은 주석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어 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에다가 '*' 같은 것으로 표시해 둘까, 혹은 다르게 어떻게든 표시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느니 원안을 보존하고 새로 글을 파 두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기가 편한 것이 우선이냐, 주석이 우선이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 편한 방식에 맞게 글을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주석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습니다.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安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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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0년 5월 7일 12시 24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98
순자 - 2 - 수신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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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본문과 함께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93
순자 - 2 - 수신 - 7 - 왜 하필 유학을 공부해야 할까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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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驥一日而千里,駑馬十駕則亦及之矣。將以窮無窮,逐無極與?其折骨絶筋,終身不可以相及也。將有所止之,則千里雖遠,亦或遲或速、或先或後,胡爲乎其不可以相及也?不識步道者,將以窮無窮逐無極與?意亦有所止之與?夫堅白、同異、有厚無厚之察,非不察也,然而君子不辯,止之也;倚魁之行,非不難也,然而君子不行,止之也。故學曰︰遲彼止而待我,我行而就之,則亦或遲或速,或先或後,胡爲乎其不可以同至也?故蹞步而不休,跛鼈千里;累土而不輟,丘山崇成;厭其源,開其瀆,江河可竭;一進一退,一左一右,六驥不致。彼人之才性之相縣也,豈若跛鼈之與六驥足哉?然而跛鼈致之,六驥不致,是無他故焉,或爲之,或不爲爾。道雖邇,不行不至;事雖小,不爲不成。其爲人也多暇日者,其出入不遠矣。
무릇, 기기가 하루에 천 리를 간다고 하지만, 노마 1도 십 가를 가면 2 [느리기는 해도] 그래도 3 천 리를 갈 수 있는 4 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자. 기기와 노마가] 앞으로 5 무궁한 길을 궁리하고 6, 무극한 길을 쫓는다고 7 하면 어떨까. 8 [그렇다면] 기기든 노마든 9 [열심히 달려서] 뼈가 부러지고 10, 근육이 끊어지더라도 11, 죽을 때까지 12 모두 13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기기와 노마가 가려는 곳이] 언젠가 14 [도달하여] 멈출 지점이 있다고 한다면 15 [어떨까.] 비록 천 리가 멀기는 16 하지만, 그래도 17 [기기와 노마는] 가끔은 천천히 가기도 하고, 빨리 가기도 할 것이고 18, 때로는 앞서거니 하고, 뒷서거니 하기도 하겠지만 19, 둘 다 20 [목표한 곳에] 어찌 21 이르지 22 못할 수 있겠느냐. 23 [그러나] 모르겠구나. 24 [학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25 앞으로 26 무궁한 길을 궁구하고, 무극한 길을 쫓[아야 하]는 27 것일까 28, [아니면 학문의 길에는] 그래도 29 [공부가] 끝나는 지점이 존재하는 30 것일까. 31 32
대저, [군자는] 견백이나 동이, 유후무후[와 같은 명제]에 33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을 34 [제대로] 고찰하지 않는 것이라고 [폄하]하지는 않는다. 35 그러나 36 군자는 견백이나 동이, 유후무후 같은 설들을 [직접] 따지지 않고 [가만히] 내 버려 둘 뿐이다. 37 [한편] 기괴한 짓을 벌이는 것에 대해서도 38 [군자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비방]하지는 않는다. 39 그러나 40 군자는 기괴한 짓을 [직접] 벌이지 않고 [가만히] 내 버려 둘 41 [뿐이다. 왜 그럴까. 견백이나 동이, 유후무후 같은 설이나, 기괴한 짓은 모두 종착점이 없기 때문에, 이 설들을 증명하거나 반박하려고 발버둥친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부러져도 결코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는 이 설들을 논박하지 않고, 그대로 둘] 뿐이다. 42
그[러나 올바른 학문의 길에는 종착점이 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공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43 44
'[내가] 뒤쳐지더라도 [학문의 길을 함께 걸어 가는] 저 학우들은 45 멈추어서 46 나를 기다려 줄 것이니 47, 나도 48 [바삐] 움직여서 49 저 학우들을 따라 잡아야 하겠다. 50 그러다 보면 51 [서로서로] 천천히 가기도 하고, 빨리 가기도 하며 52, 때로는 앞서기도 하고, 뒷서기도 할 것이지만 53, [학문의 종착점에는 언젠가] 어찌 54 함께 이르지 55 못할 리가 있겠느냐.' 56
그러므로 쉬지 않고 57 반걸음씩이라도 걸어 가면 58, 파별이라도 59 [언젠가는] 천 리를 갈 수 있을 것이요, 멈추지 않고 60 흙을 쌓다 보면 61, [흙을] 언덕이나 산처럼 높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62 강하의 수원을 막고 63 강하에 물길을 터 버리면 64 강하[에 물이 아무리 많더]라도 65 [언젠가는] 말라 버릴 66 것이요, [수레가] 한 번은 앞으로 갔다가, 한 번은 뒤로 갔다가 67, 한 번은 왼쪽으로 갔다가, 한 번은 오른쪽으로 갔다가 하면 68, [그 수레는] 기기 여섯 마리가 끌더라도 69 [목적한 곳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70
[그런데] 저 [보통] 사람들의 재능과 성정이 71 각각 72 다르기는 하겠지만 73, 어찌 파별이나 육기 만큼이[나 다르]겠느냐. 74 [그러나 파별과 육기의 재능과 성정이 이다지도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파별은 천 리를 가고 75, 기기 여섯 마리는 [목적한 곳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76 이렇게 되는 데에는 77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78 파별은 [목표한 곳으로 가기 위해 곧게] 실천하고, 기기 여섯 마리는 [곧게] 실천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79 80
[이처럼] 도에 아무리 가깝더라도, [도에] 정진하지 않으면 [도에] 이를 수는 없고 81, 일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82,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을] 해 낼 수 없는 법이다. 83 [어떤 사람을 가정해 보건대,] 그 됨됨이가 [꾸준하게 노력하지는 않고 놀기를 좋아해서,] 빈둥거리는 날만 많다고 하자. 84 [아무리 재능과 성정이 뛰어나다고 한들,] 이런 놈이 내는 성과는 다른 사람[의 공적]과 [겨우] 엇비슷할 뿐일 85 것이다. 86 87
- 驥, 「권학」에 騏驥라는 천리마가 나와서 駑馬와 대조되었던 적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驥라고만 했지만, 뒤에 駑馬가 나오고, 그 내용 역시 똑같으므로, 驥도 騏驥와 같다고 보면 타당하겠다. 騏驥는 유명했던 천리마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 駑馬, '둔한 말' [본문으로]
- 十駕, 駕는 '멍에를 한 번 쓰고 벗을 동안 이동한 거리'를 뜻한다. [본문으로]
- 亦 [본문으로]
- 及之, 及은 '미치다', '이르다' 之는 千里를 가리킨다. 之를 驥로, 及을 '비견하다'로 보고 '노마도 기기에 비견할 만하다'라고 할 수도 있으나, 뒤의 終身不可以相及也에서 及이 뜻하는 바가 '어떤 지점에 이르다'임이 명백하므로, 이 부분의 及之 역시 이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본문으로]
- 將, '장차' [본문으로]
- 窮無窮, 뒤의 窮은 '끝'이고, 앞의 窮은 '추구하다', '좇다', '궁구하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逐無極, 極은 '끝', 無窮의 窮과 같다. 逐은 '쫓다' [본문으로]
- 與, 일반적인 의문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따져 보려고 반문하거나 되묻는 경우에 사용된다. [본문으로]
- 其, 騏驥와 駑馬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 折骨 [본문으로]
- 絶筋, 筋은 '근육' [본문으로]
- 終身 [본문으로]
- 相, 騏驥와 駑馬를 뜻한다. [본문으로]
- 將, '장차' [본문으로]
- 有所止之, 앞에서는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無窮하고 無極한 상황'을 가정하여서 논지를 전개했다. 이번에는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유한한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 遠 [본문으로]
- 亦 [본문으로]
- 或遲或速 [본문으로]
- 或先或後 [본문으로]
- 相 [본문으로]
- 胡 [본문으로]
- 及 [본문으로]
- 가야 할 거리가 無窮하고 無極하다면, 즉 끝이 없다면, 騏驥나 駑馬나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시간을 쓴들 둘 다 도달할 수가 없겠지만, 천 리를 간다고 하면, 騏驥든 駑馬든, 충분한 시간을 들이면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 不識, 《장자 내편》 「대종사」에서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 步道者, 道는 '길', '과정'을 뜻한다. [본문으로]
- 將 [본문으로]
- 窮/無窮//逐/無極 [본문으로]
- 與 [본문으로]
- 意亦, 意는 '생각하건대', '혹은', 亦은 '그래도', 意亦은 '그래도' 정도로 보면 좋겠다. [본문으로]
- 有/所止之 [본문으로]
- 與 [본문으로]
- 夫 [본문으로]
- 堅白/同異/有厚無厚, 모두 名家의 주장이다. 名家의 설들은 先秦 시대 문헌에서 주로 '고려할 가치가 없는 헛소리', 혹은 '말장난'으로 치부된다. 《장자 내편》에서는 莊子 자신이 惠子와 친하였기 때문에, 惠子의 方生之說이나 堅白說을 간혹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제물론」에는 方生之說과 白馬非馬說을 莊子가 직접 비판하면서 道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밝히는 데 중요한 디딤돌로 사용하기도 했다. 상기한 것처럼 堅白은 惠子의 설이다. 堅은 '단단하다', 白은 '희다'는 말이다. 이 설의 요지는 '하얗고 딱딱한 돌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惠子는 아마 '하얀 것'과 '딱딱한 것'은 서로 다른 성질이므로, 분리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惠子의 저서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공손룡자》 「견백」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토대로 원래 의미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공손룡은 趙나라 사람으로, 名家의 학자로 유명하다. 惠子 보다 뒷세대 사람이다. 《공손룡자》에 名家의 설들이 이것저것 남아 있는 것을 보면, 惠子 같은 선대 학자들이 名家의 학설을 대체로 완성하고, 그 뒤에 공손룡이 이 설들을 모아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同異와 有厚無厚 역시 惠子의 설인데, 《공손룡자》에는 없고 《장자 잡편》 「천하」에 소개돼 있다. 「천하」에는 歷物之意라고 하여 惠子의 학설들이 소개되어 있다. 요점만 이야기하자면, 惠子의 설은 '상대주의적으로 볼 때 천하의 만물이 모두 같다'는 주장이다. 莊子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歷物之意 중에서 無厚/不可積也/其大千里이라는 말이 있으니, '두께가 없어서 쌓을 수조차 없는 것도 그 크기는 천 리나 된다'는 뜻이다. 이 문장만으로는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면, 惠子의 초점은 두께는 없지만, 옆으로 넓적한 크기는 천 리나 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사물의 '이모저모'는 상이하지만, 같은 사물의 속성이라는 뜻이다. 아주 상대주의적인 관점이다. 이것이 순자가 말한 有厚無厚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歷物之意 중에서 大同而與小同/異/此之謂小同異//萬物/畢同/畢異/此之謂大同異라는 말이 있으니, '만물이 大同한 점과 小同한 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으니, 이를 小同異라고 하고, 만물은 畢同하기도 하고, 畢異하기도 하니, 이를 大同異라고 한다'라는 뜻이다. 大同과 小同, 그리고 畢同과 畢異는 무엇을 뜻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부연이 없기 때문이다. 莊子는 '道 앞에서 만물이 모두 같다'고 했는데, 大同이나 畢同의 뜻이 이러하지 않을까 추측만 될 뿐이다. 그런데 다행히 同異說의 요지를 유추할 수 있게 도와 주는 단서가 있다. 《장자 외편》 「추수」를 보면, 공손룡이 合同異/離堅白/然不然/可不可/困百家之知/窮眾口之辯이라고 하며 자만하는 말이 있다. '동이를 합치고, 견백을 떨어뜨려 놓았으며, 그러한 것을 그렇지 않다고 하고, 옳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하여서, 백가의 학설을 곤란하게 하였고, 뭇사람들의 변설을 비루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合同異/離堅白에 주목해 보자. 離堅白은 뜻이 명백하다. 상기하였던 것처럼, 惠子는 堅과 白이라는 성질을 분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離堅白은 堅白說의 요지이다. 동등하게 생각하면, 合同異, 즉 '사람들이 같다고 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합친다', 즉 '다르다는 개념과 같다는 개념을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를 同異說의 요지로 볼 수 있겠다. 大同, 小同, 畢同, 畢異를 어떻게 해석해야 타당할지는 다소 미뤄 둘 수 있을 것 같다. '대체로 같다'는 뜻의 大同小異라는 말의 의미가 同異說과 같을까. 大同小異는 동한 시대 蔡邕이 쓴 《獨斷》 「권 상」에 처음 나오고, 이후 《포박자》 「登涉」에 또 등장한다. '같다는 개념과 다르다는 개념'이 같아지면, 즉 그 차이가 사소해지면, '크게 다를 것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것이 同異說의 요지일 것이다. 한편 楊倞은 《공손룡자》 「견백」과 《장자 잡편》 「천하」를 인용하여 각 설에 대해 설명해 두었다. 참고할 만하다. 나는 歷物之意의 다른 명제들에 대해서는 「비십이자」에서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다. [본문으로]
- 察, '깊게 생각하다', '따지다' [본문으로]
- 非不察, 察이 '깊게 생각하는 것'이므로, 不察은 '제대로 논증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본문으로]
- 然而 [본문으로]
- 不辯止之, 辯은 '따지다', '논증하다', 之는 堅白과 同異, 有厚無厚를 지칭한다. 止에는 이견이 있다. 楊倞은 不爲, 즉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 王先謙은 '머무르다'라고 보았다. 王先謙의 의도는 '堅白, 同異, 有厚無厚 같은 설들은 君子가 따질할 만한 것이 아니므로, 君子는 자기가 해야 할 것에나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 구조상 之가 堅白과 同異, 有厚無厚를 가리키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에 나는 王先謙을 따르지 않고 楊倞을 따른다. [본문으로]
- 倚魁之行, 倚는 '기'로 읽고, 奇로 본다. '기이하다'는 말이다. 魁는 怪, 마찬가지로 '괴이하다'는 뜻이다. 倚魁之行은 堅白/同異/有厚無厚之察와는 독립적이고 병렬적인 말로 이해해야 한다. [본문으로]
- 非不難, 難은 '어렵다', 따라서 不難은 '어렵지 않다', '쉽다', 그러므로 非不難은 '쉬운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다'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 然而 [본문으로]
- 不行止之, 之는 倚魁 [본문으로]
- 故 [본문으로]
- 學曰 [본문으로]
- 遲, '늦다', '더디다' [본문으로]
- 彼 [본문으로]
- 止 [본문으로]
- 待我, 待는 '기다리다' [본문으로]
- 我 [본문으로]
- 行 [본문으로]
- 就之, 之는 彼, 就는 '좇다' [본문으로]
- 則亦 [본문으로]
- 或遲或速 [본문으로]
- 或先或後 [본문으로]
- 胡 [본문으로]
- 同至 [본문으로]
- 故 [본문으로]
- 不休 [본문으로]
- 蹞步, 蹞는 '반걸음' [본문으로]
- 跛鼈, 跛는 '절름발이', 鼈은 '자라'다. 자라는 원래 느린데, 절름발이면 더더욱 느릴 것이다. [본문으로]
- 不輟, 輟은 '그치다', '멈추다' [본문으로]
- 累土, 累는 '포개다', '쌓다' [본문으로]
- 崇成, 崇은 '높다', 成은 '이루다', '만들다' [본문으로]
- 厭其源, 其는 뒤의 江河를 가리킨다. 源은 '물이 나오는 원천', 즉 '수원'이다. 厭은 '엽'으로 읽는다. '누르다', '막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 開其瀆, 其는 뒤의 江河를 가리킨다. 瀆은 '도랑', '물길'이다. [본문으로]
- 江河 [본문으로]
- 竭, '물이 마르다' [본문으로]
- 一進一退 [본문으로]
- 一左一右 [본문으로]
- 六驥, 驥는 騏驥일 것이다. 천리마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 彼人 [본문으로]
- 才性 [본문으로]
- 相 [본문으로]
- 縣, '떨어져 있다', '거리가 있다', '다르다', '수준 차이' [본문으로]
- 豈若跛鼈之與六驥足哉, 豈는 '어찌', 足은 '만큼'을 뜻한다. 跛鼈은 '절름발이 자라'로 아주 느린 동물이고, 六驥는 '騏驥 여섯 마리', '천리마 여섯 마리'로 아주 빠른 동물이다. '사람들의 자질이 서로 차이가 난다고 해도 跛鼈과 六驥 만큼이나 현격하겠느냐'는 말이다. [본문으로]
- 致之, 之는 千里 [본문으로]
- 不致 [본문으로]
- 是, 跛鼈致之/六驥不致 [본문으로]
- 無他故焉, 故는 '이유', 他는 '다르다', 그래서 無他故焉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이유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他를 它로 바꾸어서 無它故焉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표현은 《순자》에 아주 많이 나온다. [본문으로]
- 或爲之/或不爲爾, 或은 '두 편 중 한쪽 편'을 뜻한다. 그래서 앞의 或은 跛鼈, 뒤의 或은 六驥다. 之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걷는 것'을 뜻한다. 爲는 '하다', '실천하다', '이행하다'는 말이다. 跛鼈의 예를 따르자면 蹞步일 것이다. 爾는 耳, '~할 뿐이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之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든, 이 문장의 요점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실천하는 것' 그 자체이다. 그래서 之 보다는 爲와 不爲에 초점이 있다. [본문으로]
- 道雖邇, 邇는 '가깝다' [본문으로]
- 不行不至 [본문으로]
- 事雖小 [본문으로]
- 不爲不成, 成은 '완성하는 것'을 이른다. [본문으로]
- 其爲人也多暇日者, '어떤 사람'이라는 주어가 문장에서 생략되어 있다. 其는 생략된 주어인 '어떤 사람'을 지칭한다. 爲人은 '사람됨', '됨됨이'이다. 暇는 '느긋한 것', '여가', '여유'다. 그래서 暇日은 '한가한 날', '빈둥대는 날'을 뜻한다. [본문으로]
- 其出/入不遠矣, 其는 앞문장에서 상정한 사람을 지칭한다. 不遠은 '멀지 않다', 즉 '비슷하다'는 말이다. 出入에 대해 이견이 있다. 楊倞은 道路所至, 즉 '길에 이른다'라고 했는데,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郝懿行과 王念孫은 出入을 出人으로 보았다. 郝懿行은 出人을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는 것'이라고 했으나, 이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王念孫은 言爲學而多暇日/則或作或輟/其出人必不遠也라고 하였는데, '공부하면서 노는 날이 많다고 한 것은, 공부를 하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다는 말이니, 이런 놈이 공부해서 내는 성과는 다른 사람과 분명 비슷할 것이다'라고 했다. 王念孫이 타당하다. 여기서 出은 공부를 해서 '내는 것', '생산한 것', '산출한 것', '발생한 것', 즉 '성과'를 뜻한다. '재능과 성정이 뛰어나도 꾸준히 해 나가지 않으면 결국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게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入은 人으로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 이 부분의 주된 주제는 '일관되게 노력하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 아니다. 주제는 오히려 '끝이 없는 길을 가려 하면, 결국 아무리 노력한들 이뤄 낼 수가 없고, 끝이 있는 길을 가면, 아무리 천천히 가도 언젠가는 이뤄 낼 수가 있다'는 점이다. 순자는 유학자의 길은 끝이 있고, 堅白, 同異, 有厚無厚 같은 길은 끝이 없기 때문에, 名家의 설 같은 데 빠지지 말고 '올바른 학문의 길'을 닦으라고 독자들에게 권장하고 있다. 《장자 내편》 「양생주」 첫 부분에서 莊子는 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以有涯隨無涯/殆已//已而爲知者/殆而已矣라고 하여, '우리 삶에는 끝이 있지만, 지식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써 끝이 없는 것을 좇는 것은 위태롭다. 그러한데도 살아가면서 지식을 추구하려 하는 것은 위태로운 짓일 뿐이다'라고 하여, 道를 좇지 않고, 知, 즉 학문에 매달리는 것을 殆, 즉 위태롭다고 비판하고 있다. 순자와 莊子는 둘 다 '끝이 없는 것을 좇는 것은 위태롭다'라고 하지만, 무엇이 유의미하고, 무엇이 무의미한지에 대해서는 정반대적인 의견을 보인다. 참고할 만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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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주석> 순자 - 2 - 수신 - 4 - 예를 따르면 기운이 다스려지고 마음가짐이 길러진다(재번역 예정) (0) | 2021.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