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중)

2020. 7. 30. 13:08일본서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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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은 전후 사건과 연계하여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첫 단계가 바로 중애천황 생전의 웅습(熊襲)[쿠마소] 토벌입니다. 웅습이 반역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고 해서 시작된 이 전쟁은 중애천황이 죽고 난 이후, 신공황후가 마무리하면서 끝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삼한 정벌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신공황후가 백제의 근초고왕과 함께 가야 7국과 남만의 침미다례를 정복했다는 기사입니다. 이 세 사건 중, 전후의 두 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글을 따로 쓴 적이 있습니다. 다음 두 글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56

 

중애천황과 신공황후의 웅습 토벌(일본서기 중애천황본기 중)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얼마 전에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를 통해, 근초고왕 재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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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54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남방 국경(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중)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영토를 분석하려면 크게 삼국사기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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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 각 사건들의 인과 관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대화 정권이 구주 중북부 일대를 확실히 점유하게 된 것은 늦어도 반정(磐井)의 난이 일어났던 521년 전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 기록상 중애천황의 웅습 토벌은 200년 전후이고, 120년을 보정한다고 하더라도 320년이므로 반정의 난 보다 200여 년, 혹은 320여 년을 앞섭니다. 따라서 웅습이 대화 정권에 반역을 일으켰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조공을 바치니 마니 하는 말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일본서기 기록에 대해 실제 사건 모델이 있었다면, 북구주에 있던 정권에 있었던 내부 사건이 정당성을 위해 주체가 대화 정권인 것으로 날조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웅습 토벌 사건은 중애천황본기와 신공황후본기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때 신공황후에게 귀신이 내려, 웅습은 하찮은 것이니 바다 건너에 있는 저금신라국(栲衾新羅國)을 쳐야 한다고 귀신이 주장했습니다. 중애천황은 이 귀신의 '계시'를 무시하고 웅습을 쳤다가 패사했으며, 중애천황이 죽은 뒤 신공황후가 직접 웅습을 토벌했습니다. 신공황후는 토벌 과정의 사건들로 귀신의 계시에 영험이 있음을 확인하며, 이에 따라 웅습 토벌이 끝난 직후 저금신라국을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웅습 토벌 자체는 중애천황본기에서 신공황후본기에 이르기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웅습 토벌에서 신공황후는 신라를 공격하라는 계시를 받게 되고, 실제로 영험을 확인하고, 결국 원정에 나서고, 결과적으로 성공하게 됩니다. 즉, 서사 구조상, 웅습 토벌은 철저하게 삼한 정벌 사건을 보조하는 서사적 근거로써 등장할 뿐이지, 그 자체가 당시의 실제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사적 구조'를 이후 근초고왕의 남방 정벌에도 대입해 볼 수 있습니다. 삼한 정벌 사건은 정벌 약 50여 년 뒤에 근초고왕과 신공황후가 힘을 합쳐 가야 7국과 남만의 침미다례를 복속시킨 사건의 서사적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삼한 정벌이 없으면 대화 정권과 백제 사이의 통교나 연합이 어떻게 가능했을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당시 본주(本州)[혼슈]조차도 탈출하지 못했을 대화 정권이 상식적으로 해외로 원정을 떠나 신라를 이겼을 리는 아주 만무합니다. 하지만 칠지도를 생각하면, 당시 백제와 왜가 실제로 연합군을 이루어 함께 원정을 떠났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이왕 삼한 정벌을 설명하려 한다면, 이 점들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생각될 수 있도록 기록과 사실 관계를 구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저는 노력이라도 그렇게 해 보려 합니다.

 

 

 

신공황후가 우백웅취(羽白熊鷲)[하시로쿠마와시]와 전유진원(田油津媛)[타부라츠히메]을 잡아 죽인 것으로 웅습 토벌을 마무리지은 것은 중애천황 9년이었습니다. 이 때는 중애천황이 이미 죽은 뒤로, 신공황후 집권기이지만 신공황후가 스스로를 섭정으로 선포하지 않았다 하므로 특별히 중애천황 9년으로 해를 셉니다. 신공황후는 중애천황이 정리하지 못한 전쟁을 이어 받아 3월 한 달 도 안 되어 마무리해 버렸습니다.

 

 

辛卯, 至層增岐野, 即擧兵擊羽白熊鷲而滅之. 謂左右曰, 取得熊鷲. 我心則安. 故號其處曰安也.(신공황후, 200?+120)

 

丙申, 轉至山門縣, 則誅土蜘蛛田油津媛. 時田油津媛之兄夏羽, 興軍而迎來. 然聞其妹被誅而逃之.(신공황후, 200?+120)

 

 

파랑은 강일궁 / 노랑은 좌측부터 층증기야, 안, 하지전촌 / 회색은 좌측 상단부터 옥도리, 적경강, 가장 아래는 산문현 / 빨강은 신공황후의 웅습 토벌 진행 방향

 

 

전유진원을 잡아 죽인 신공황후는 옥도리(玉嶋里)[다마시마노사토]와 적경강(迹驚岡)[토도로키노워카]에서 신라를 공격하라고 했단 귀신의 계시가 영험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강일포(橿日浦)[카시히노우라]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이 과정은 지난 글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으므로 굳이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계시를 확신한 신공황후는 '여걸'처럼 군신들에게 신라 정벌을 선언했습니다.

 

 

夏四月壬寅朔甲辰 ... 因以, 謂群臣曰, 夫興師動衆, 國之大事. 安危成敗, 必在於斯. 今有所征伐. 以事付群臣. 若事不成者, 罪有於群臣. 是甚傷焉. 吾婦女之, 加以不肖. 然暫假男貌, 强起雄略. 上蒙神祇之靈, 下藉群臣之助, 振兵甲而度嶮浪, 整艫船以求財土. 若事成者, 群臣共有功. 事不就者, 吾獨有罪. 旣有此意. 其共議之. 群臣皆曰, 皇后爲天下, 計所以安宗廟社稷. 且罪不及于臣下. 頓首奉詔.(신공황후, 200?+120)

 

秋九月庚午朔己卯, 令諸國, 集船舶練兵甲. 時軍卒難集. 皇后曰, 必神心焉, 則立大三輪社, 以奉刀矛矣. 軍衆自聚. ... 又遣磯鹿海人名草而令視. 數日還之曰, 西北有山. 帶雲橫絚. 蓋有國乎. ... 時皇后親執斧鉞, 令三軍曰.(신공황후, 200?+120)

 

 

여기서도 신공황후는 앞서 웅습 토벌에서 보인 것처럼 신묘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묘사됩니다. 신공황후는 자신이 여자이고, 불초하다 할 수 있겠으나, 남자의 모습으로 정벌군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吾婦女之加以不肖然暫假男貌强起雄略) 이것이 4월입니다. 이어 9월에는 드디어 여러 국(國)에 배를 모으고 군대를 훈련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國'은 일종의 행정 단위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나라를 봉건적인 체제로 다스렸습니다. 중앙 정권이 있으면, 나머지 지역들은 그 지역의 지도자를 회유해 간접적으로 통치했던 거죠. 여기서 좀 더 진보하면 지방의 지도자를 중앙에서 파견하게 됩니다. 처음에 병력을 모으라고 명을 내렸을 때, 병사들이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時軍卒難集) 그러자 신공황후는 대삼륜사(大三輪社)[오호미와노야시로]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그러니 사람들이 모이더라는 겁니다. 바다 건너를 공격해야 하지만 사실 어디에 나라가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자, 몇 번이고 사람을 다시 보내 바다 건너에 나라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냈습니다. 이상하죠? 그리고는 스스로 도끼(斧鉞)를 들고는 3군에 출진의 명을 내렸습니다.

 

 

 

 

요즘도 여군이 적합하니 마니 하는 마당에, 1800여 년 전에 여자가 스스로 장군이 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중애천황 사후, 중애천황의 직계 후사가 아직 없었다 하더라도 황후의 신분인 신공황후가 정벌군을 이어 받아 정벌을 완수한 것부터가 아주 이례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국내 반란도 아니고, 해외로, 심지어는 이전까지 '한 번도 교류하지 않았던' 미지의 국가로 원정을 떠난다는데 그 일을 황후의 신분으로서 주도한다는 것 역시 아주아주 이례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신공황후는 저금신라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귀신의 계시를 아주 철두철미하게 믿어, 수색해도 나오지 않는다는 나라를 재차 수색해 찾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건들을 '정상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벌 준비 과정은 역사 기록이라기 보다는 소설 기록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합니다. 비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소설 안에서 이야기 구조가 완결되어야 하듯, 신공황후의 준비 과정 역시 잡음, 잡티 없이 아주 깔끔하게 흘러갑니다. 군대가 모이지 않는 것 때문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요? 신공황후는 귀신과 인간 세상의 매개체로서, 귀신의 계시를 이행하기 위해 '신적인 방법', 즉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난관을 해결해 나갑니다. 아기 장수 우투리도 그렇잖아요? 우투리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신공황후는 신공황후 입장에서 '희극'으로 끝난다는 게 유일한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于時也, 適當皇后之開胎. 皇后則取石揷腰, 而祈之曰, 事竟還日, 産於玆土. 其石今在于伊覩縣道邊.(신공황후, 200?+120)

 

 

그 다음 기록에서 이 이야기의 '이상함'은 극에 달합니다. 중애천황은 죽었지만, 신공황후에게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점은 중애천황 생전에 신공황후에게 귀신이 씌였을 때, 이미 귀신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중애천황이 귀신의 말을 의심하고, 확인하려 하자 귀신이 중애천황에게 '너는 안 되겠다'고 했던 말이었죠. 귀신은 그 때 중애천황 대신 신공황후가 베고 있던 중애천황의 아이가 저금신라국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9월, 신공황후가 출정할 때가 되었을 때, 마침 신공황후에게 산기(氣)가 있었던 것입니다. 원정 준비를 다 해 두었는데 애를 낳는다고 주저 앉으면 지금까지의 준비가 다 헛된 것이 되겠죠? 그래서 신공황후는 아예 출산을 막아 버립니다. 신공황후는 돌을 허리에 차고(取石揷腰), 원정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태어나도록(事竟還日産於玆土) 기도했습니다.

 

 

이도현?

 

 

十二月戊戌朔辛亥, 生譽田天皇筑紫. 故時人號其産處曰宇瀰也.(신공황후, 200?+120)

 

 

결국 신공황후는 원정에서 돌아온 다음인, 그해 12월에 축자(筑紫)[츠쿠시]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축자는 지금의 복강福岡[후쿠오카]를 이른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예전천황(譽田天皇)[호무타노스메라미코토]입니다. 이것은 왜식 시호이고, 한식으로는 응신천황(應神天皇)이라고 합니다. 응신천황 이후부터 일본서기는 그나마 믿을 만해집니다. 한편 일본서기에서는 신공황후가 출산을 미룰 때 썼던 돌이 당시에도 이도현(伊覩縣)[이토노아가타]에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무안단물과 이 전설 중 어느 것이 더 오래된 것인지 비교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일본서기에는 이소국伊蘇國[이소노쿠니]이라는 곳이 나오고,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에는 이도국伊都國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나오는 이도현도 같은 곳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산도를 틀어 막든, 주술을 걸든, 애가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어쩌면 이 사건이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비유한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놈들은 천황들이 만세일계라고 하지만, 사실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만세일계가 아니라면 왕조가 바뀐 시점도 있겠죠. 혹시 응신천황의 출생 이력이 이상한 것이, 그 시점에서 왕조가 끊어졌거나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예를 들어 중애천황과 응신천황은 전혀 혈연적으로 관계가 없는데, 그 둘을 만세일계로 이으려 하다가 신공황후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다각도의 추론이 가능합니다. 응신천황 이전의 천황들이 실존했느냐, 혹은 응신천황이나 그 이전 천황들이 대화 정권의 천황들이냐, 혹은 별개 국가가 있느냐처럼 말입니다. 하나가 맞고 나머지가 틀렸을 수도 있고, 혹은 여러 가정이 함께 참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글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렇듯 가지각색의 '난관'들을 해결한 신공황후는 10월에 드디어 원정을 떠났습니다.

 

 

冬十月己亥朔辛丑, 從和珥津發之.(신공황후, 200?+120)

 

 

일단 기록상 신공황후가 출병한 곳은 화이진(和珥津)[와니노츠]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정 시작 위치가 좀 이상합니다. 화이진은 지금의 대마도 가장 북단입니다. 그런데 이 이전의 9월 기사까지 신공황후와 친구들은 모두 축자 지역에서 전쟁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축자에서 대마도까지 어떤 경위로 사령부를 옮겼는지, 군대는 어떻게 옮겼는지 등등의 말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축자, 화이진을 거쳐 경주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에도 항해는 충분히 가능했을 겁니다. 중규모, 대규모 원정군도 보낼 수는 있었을 거에요. 그 원정군을 준비하고 보낼 역량이 되느냐가 문제죠...

 

 

아래에서부터 축자, 화이진, 경주

 

 

時飛廉起風, 陽侯擧浪, 海中大魚, 悉浮扶船. 則大風順吹, 帆舶隨波. 不勞櫨楫, 便到新羅. 時隨船潮浪, 遠逮國中. 卽知, 天神地祇悉助歟.(신공황후, 200?+120)

 

 

원정을 가는 와중에도 신공황후는 지속적으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원정군이 출진하자 비렴(飛廉)은 바람을 일으켰고, 양후(陽侯)는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에서 큰 물고기들이 나와 배를 떠받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비렴은 바람의 신, 양후는 물의 신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왜군은 노를 젓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편하게 신라에 이르렀으니(不勞櫨楫便到新羅), 이 때 일어난 파도가 저 멀리 나라 안(國中), 즉 왜에까지 이르러 백성들은 천신지기(天神地祇)가 이 원정을 돕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신공황후에 대의명분과 신성을 주기 위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침략을 한 쪽은 그렇다 치고, 침략을 받았다는 저금신라국, 즉 신라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신공황후본기에는 신라왕의 반응 역시 자세히 싣고 있습니다. 

 

 

新羅王, 於是, 戰戰慄慄厝身無所. 則集諸人曰, 新羅之建國以來, 未嘗聞海水凌國. 若天運盡之, 國爲海乎. 是言未訖之間, 船師滿海, 旌旗耀日, 鼓吹起聲, 山川悉振. 新羅王遙望以爲, 非常之兵, 將滅己國. 警焉失志. 乃今醒之曰, 吾聞, 東有神國. 謂日本. 亦有聖王. 謂天皇. 必其國之神兵也. 豈可擧兵以距乎, 卽素旆而自服. 素組以面縛. 封圖籍, 降於王船之前.(신공황후, 200?+120)

 

 

이 때 신라왕은 군대가 몰려 온다는 말을 듣고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몇 가지 횡설수설 늘어 놓습니다. 첫 번째는 신라가 건국한 이래 바닷물이 나라 안으로 들어온 적이 아직 없었다는 말입니다. 왕은 이것을 두고 신라의 천운이 다해 나라가 바다로 잠겨 버리는 게 아닌지 걱정했습니다.(若天運盡之國爲海乎)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왜군이 바다에 '휘황찬란'하게 보였습니다. 이에 왕이 두려워하며 두 번째로 말을 하기를, 동쪽에 신국이 있으니 그 이름이 일본이며(東有神國謂日本), 그 나라에는 성왕이 있으니 이를 천황이라 한다고(亦有聖王謂天皇)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그 나라의 군대가 몰려 온 게 아닌가 걱정하죠. 신라왕은 이에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버렸습니다. 항복하는 방법도 상세합니다. 얼굴에는 흰 줄을 얽고(素組以面縛), 행정 문서들을 바치며(封圖籍) 대장선 앞에 가 항복했다고 합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일단 신라왕이 바닷물이 나라 안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는 말을 봅시다. 신공황후본기의 묘사를 따르면, 신공황후를 돕는 천신지기가 일으킨 바닷물이 내륙으로 역류해 경주 일대가 물에 잠길 듯 했다는 말로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바로 아래에는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라는 강이 역류했다는 말이 나오므로, 바닷물이 이 강을 따라 역류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맥락상 아리나례하는 지금의 경주 북천(北川)으로 보이고, 북천은 형산강으로 합류하므로, 끼워 맞추면 신공황후와 왜군이 형산강을 통해 경주로 함대를 이끌고 왔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아예 받아들이지 못할 말은 아닙니다. 이왕 신공황후를 띄워 주려는데 이런 말도 지어내지 못하겠습니까. 

 

 

노랑은 아리나례하 / 빨강은 경주의 당시 중심부

 

 

근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 다음의 말입니다. 신라왕은 동쪽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왕을 '천황'이라고 하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 관계가 이상합니다. 왜냐면, '일본'이나 '천황'이라는 말이 사용된 시기는 훨씬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늦어도 702년, 빠르면 670년 내외로 봅니다. 이 시기 왜에는 정치 변동이 많았습니다. 646년에 대화개신(大化改新)[다이카개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천지천황이 쿠데타를 일으켜 소아씨를 축출하고 일단의 개혁을 진행했습니다. 그 뒤에는 삼국 통일 전쟁에 개입해 백제를 도왔습니다. 천지천황 사후인 672년에는 임신의 난이 있었습니다. 대우천황을 축출하고 삼촌인 천무천황이 즉위했습니다. 702년에는 대보율령(大寶律令)[다이호리츠료]을 반포했습니다. 이 중 대화개신은 일본서기 편찬시 윤색의 정황이 보이기 때문에, 실제로 생각해 볼 만한 시점은 672의 임신의 난에서 702년 대보 율령 사이입니다. 즉,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것은 672년에서 702년 사이의 어느 시점일 것이고, 바꿔 말 하면 그 이전에 자기를 보고 일본이라고 운운한 것은 다 구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공황후본기에서 신라왕이 일본국 운운하는 것도 전부 구라입니다. 역사책을 이 따위로 만들어 두었으니, 제가 왜놈들을 보고 자기 스스로 자기 역사를 역사의 영역에서 문학의 영역으로 바꾼 놈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황은 그럴 듯한데, 실제로 기록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大寳元年春正月 ... 丁酉, 以守民部尚書, 直大貳, 粟田朝臣眞人, 爲遣唐執節使. ... 五月... 己夘, 入唐使粟田朝臣眞人授節刀.(속일본기 문무천황본기, 701)

 

二年 ... 六月 ... 乙丑, 遣唐使等去年從筑紫而入海, 風浪暴險不得渡海, 至是乃發.(속일본기 문무천황본기, 702)

 

慶雲元年 ... 秋七月甲申朔, 正四位下粟田朝臣眞人自唐國至. 初至唐時, 有人來問曰, 何處使人. 荅曰, 日本國使, 我使反問曰, 此是何州界. 荅曰, 是大周楚州塩城縣界也, 更問, 先是大唐, 今稱大周, 國号縁何改稱. 荅曰, 永淳二年, 天皇太帝崩, 皇太后登位, 稱号聖神皇帝, 國号大周, 問荅畧了. 唐人謂我使曰, 亟聞, 海東有大倭國, 謂之君子國, 人民豊樂, 禮義敦行, 今看使人, 儀容大淨, 豈不信乎, 語畢而去.(속일본기 문무천황본기, 703)

 

大足 ... 二年 ... 冬十月, 日本國遣使貢方物.(구당서 측천황후본기, 702)

 

 

701년에 견당사로 갔던 율전조신진인(粟田朝臣眞人)의 이야기입니다. 속일본기에는 이 때 율전조신진인이 탁발부 사람들과 했던 말들이 남아 있어요. 율전이 탁발부에 이르렀을 때 어디에서 온 사신인지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에 율전이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이라고 대답했거든요. 이 대화에는 탁발부의 국호가 대당(大唐)에서 대주(大周)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들어 있습니다. 바로 측천이 제위를 찬탈한 사건입니다. 그 사람은, 바다 동쪽에 대왜국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고(海東有大倭國), 그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들었는데, 이제 사신을 진짜 봤다고 하고는 가 버렸습니다. 속일본기 만큼은 아니지만 구당서에도 이 때 견당사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측천황후본기의 대족 2년, 즉 702년 10월 기록에는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고(日本國遣使貢方物) 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일관되게 702년 당시에는 왜놈들이 대외적으로 '일본'이라고 칭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十二月 ... 國更号日夲, 自言近日所出, 以爲名.(삼국사기 문무왕본기, 670)

 

日本, 古倭奴也. ... 咸亨元年 ... 惡倭名, 更號日本. 使者自言, 國近日所出, 以為名. 或云日本乃小國, 為倭所并, 故冒其號. 使者不以情, 故疑焉.(신당서 열전 동이, 일본)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併倭國之地.(구당서 열전 동이, 일본국)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모두에 '日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시기 즈음하면 다른 기록들에도 일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에서는 왜가 자기들이 해 뜨는 곳에 있다고 해서 일본으로 국호를 바꿨다고 했습니다. 한편 신당서에서는 함형 원년에 사신이 와서 '倭'라는 말이 싫어서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함형 원년은 670년입니다. 아마 삼국사기 기록은 신당서를 베낀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필 일본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 사신은 해가 있는 곳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구당서에서는 일본이라는 국호에 대해, 해가 뜨는 가장자리에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구당서에서는 이에 대해 이설들을 소개해 두었습니다. 혹자는 '倭國'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본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670년에서 702년 사이에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기록들에는 당시 왜놈들이 일본과 왜라는 별개 국가로 존재하다가 통일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정황이 있습니다. 편하게 생각하면 임신의 난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석연치 않죠.

 

천황이라는 명칭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1대인 신무천황에서부터 '천황'이라 칭했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초기 천황들이 메치니코프를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의 문제도 해명하지 못하고, 사실 그 이전의 실존 문제 그 자체도 부정적입니다. 그 때부터 천황이라는 말을 썼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겠죠. 사실 일본서기에서는 왜 '天皇'이라고 했는지도 설명이 안 돼 있습니다.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같은 옛 왕호들이 기록되어 있는 삼국사기와는 아주 상이하죠? 추측하기로는 왜왕(倭王)이나 대왕(大王)[오키미]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천황이라는 말이 실제로 사용된 때는 아무리 일러도 추고천황, 늦어도 천무천황이나 지통천황 전후로 보입니다.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것을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이해한 것처럼, 왕호를 천황으로 바꾼 사건도 국호를 바꾼 것과 함께 진행된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보는 게 맞지 않겠나 싶습니다.

 

국호와 왕호의 변화, 그리고 그 기록들에서 따라 나오는 의뭉스러운 정황들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672년에서 702년 사이에 국호와 왕호가 바뀌었고, 따라서 신공황후본기에서 신라왕이 일본국, 천황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만 분명히 하겠습니다. 더우기, 자기들 입장에서 그렇게 적는 건 차치하더라도, 외국인인 신라왕이 일본, 천황 운운하는 것은 정말 앞뒤게 맞지 않지요.

 

 

 

아무튼, 갑자기 바다 건너편에서 홍수를 일으키며 우르르쾅쾅쾈 하며 나타난 '일본'군과 '황후'를 본 신라왕은 혼비백산했습니다. 신라왕은 신공황후에게 고두(叩頭)했습니다.

 

 

因以, 叩頭之曰, 從今以後, 長與乾坤, 伏爲飼部. 其不乾船柂, 而春秋獻馬梳及馬鞭. 復不煩海遠, 以每年貢男女之調. 則重誓之曰, 非東日更出西, 且除阿利那禮河返以之逆流, 及河石昇爲星辰, 而殊闕春秋之朝, 怠廢梳鞭之貢, 天神地祇, 共討焉.(신공황후, 200?+120)

 

時或曰, 欲誅新羅王. 於是, 皇后曰, 初承神敎, 將授金銀之國. 又號令三軍曰, 勿殺自服. 今旣獲財國. 亦人自降服. 殺之不祥, 乃解其縛爲飼部.(신공황후, 200?+120)

 

遂入其國中, 封重寶府庫, 收圖籍文書. 卽以皇后所杖矛, 樹於新羅王門, 爲後葉之印. 故其矛今猶樹于新羅王之門也.(신공황후, 200?+120)

 

 

신라왕은 항복하며, 스스로 일본의 사부(飼部)[미마카이]가 되며, 말을 빗는 빗과 채찍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대손손 복종해 조공을 거르지 않겠다고 하죠. 여기서 사부는 관직 이름으로, 말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결부지어 이 말을 말이 한국에서 왜로 전래된 것과 관련된 설화가 신공황후와 얽혀 왜곡되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긴 한데, 실제로 말이 어느 시기에 처음 왜로 건너갔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어서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때 누군가가 신라왕을 잡아 죽이라고 하자, 신공황후는 보물을 취하러 왔는데 보물의 나라(財國)를 얻었으니 사람을 쓸 데 없이 더 죽일 필요는 없다고 하며 살려 줍니다. 그리고는 신라왕이 '원한' 대로 사부의 일을 맡기죠.

 

이어 신공황후는 신라로 들어가 중요한 보물이 있는 창고를 봉하고(封重寶府庫), 도적문서(圖籍文書), 즉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서류들을 이것저것 챙겼습니다. 그리고 신공황후 자신이 갖고 있던 창(杖矛)을 신라왕문(新羅王門)에 나중 사람들을 위해 남길 표식으로써 세워 두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지금'도 그 창이 거기 서 있다고 했지만, 당연히 그런 건 없습니다. 아마 700년 즈음에도 없었을 겁니다. 다만 천무천황 이후 왜인들이 신라로 패키지 여행을 떠날 때, 이 창으로 등처먹는 일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仍齎金銀彩色及綾·羅·縑絹, 載于八十艘船, 令從官軍. 是以, 新羅王, 常以八十船之調貢于日本國, 其是之緣也.(신공황후, 200?+120)

 

 

바로 신라왕을 보고 파사매금(波沙寐錦)이라고 한 것입니다. 파사매금은 아마 말 할 것도 없이 파사왕일 것입니다. 신라왕 파사매금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質)로 하고, 갖가지 보물들을 배 여든 척에 실어 '일본'에 조공하기로 했습니다. 미질기지파진간기에서 파진간기(波珍干岐)는 아마 관직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일본서기에는 한기(旱岐)라는 관직이 많이 나오는데, 간기도 한기와 같은 것, 혹은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미질기지(微叱己知)만을 떼어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질기지는  아마 미사흔(未斯欣)일 겁니다. 박제상 설화 들어 보셨죠? 바로 거기 나오는 미사흔 말입니다.

 

익숙한 이름들이 나오니 반갑긴 한데, 생각해 보면 이들의 연대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파사왕의 재위 기간은 80년에서 112년까지입니다. 일본서기 기록은 200년이고, 120년을 더하면 320년입니다. 연대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인질로 보냈다는 미사흔은 훨씬 나중 사람입니다. 미사흔은 내물왕의 3남, 눌지왕의 동생입니다. 미사흔의 생년은 알 수 없지만, 433년에 죽었으며, 박제상과 함께 왜에서 탈출했다고 하는 시기는 눌지왕 2년인 418년이었습니다. 즉, 파사왕, 일본서기, 일본서기 120년 보정, 미사흔의 연대가 각각 100여 년 정도씩 차이가 난다는 말입니다. 파사왕과 미사흔이 같은 시대에 살았을 수 없고, 파사왕이 다스리는 신라에 신공황후가 처들어 갈 수도 없습니다. 애초에 매금은 마립간(麻立干)을 가리키는 말로, 파사이사금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의 기술은 신공황후가 중심이지만, 신공황후를 신격화, 혹은 '창조'하면서 신라와 관계된 설화를 막 갖다 섞어 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까 신라왕이 스스로 말을 관리하는 사부가 되겠다고 한 것을 왜에 말이 전래된 것과 연관지어 이해하기도 한다고 했잖아요? 아마 이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끼워 맞춘 것은 분명한데, 왜 하필 연대가 전혀 맞지 않는 파사왕과 미사흔을 끌고 왔을까요? 사실 파사왕은 왜놈들과 접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삼국사기 파사왕본기에는 그 신빙성과는 별개로, 백제, 가야와 싸웠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전쟁을 했다면 두 나라와 했던 것이지, 바다 건너 왜놈들과는 안 했다는 것이죠. 왜놈들이 공격해 왔다는 기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가야가 바로 왜(倭)이거나 그 모체가 아니냐, 그러면 이 접점의 유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야를 왜로 두면 확실히 문제가 많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없어지는 문제 보다 새로 생기는 문제가 훨씬 더 많게 되죠. 미사흔도 문제입니다. 미사흔, 박제상 전설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모두 나옵니다. 사실 일본서기에도 나오죠.

 

 

五年 春三月癸卯朔己酉, 新羅王遣汙禮斯伐·毛麻利叱智·富羅母智等朝貢. 仍有返先質微叱許智伐旱之情.(신공황후, 205?+120)

 

 

신라에서 오례사벌(汙禮斯伐),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부라모지(富羅母智)를 보내 조공했는데, 이 틈을 타 인질로 와 있던 미지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 즉 미질허지를 탈출시키려 했다는 말입니다. 미질허지는 미사흔이고, 모마리질지가 바고 박제상입니다. 다만 자세하게는 나중에 소개해 보려 합니다. 지금은 미사흔이 뒤에 미질허지로 다시 등장하고, 박제상과 함께 탈출한다는 말도 신공황후본기에 적혀 있다는 점만 알고 넘어갑시다. 미사흔의 탈출 설화는 당대의 왜인들에게도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전술한 것처럼, 당대의 유명한 설화들을 신공황후에게 몰아 주려 하다 보니, 실제 연대와는 크게 어긋나는 경우도 생겼고, 그 결과가 파사왕과 미사흔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대화 정권과 별개인 구주 또는 기타 정권의 설화들을, 대화 정권이 주체인 것처럼 날조하다가 연대가 어긋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공황후는 신라로 건너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원정을 완수하고, 배 80척 분량의 보물을 받았습니다. 성공도 이 만한 성공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삼한' 정벌이잖아요. 신라 외에도 고구려, 백제가 남아 있습니다.

 

 

於是, 高麗·百濟二國王, 聞新羅收圖籍, 降於日本國, 密令伺其軍勢. 則知不可勝, 自來于營外, 叩頭而款曰, 從今以後, 永稱西蕃, 不絶朝貢. 故因以, 定內官家屯倉. 是所謂之三韓也. 皇后從新羅還之.(신공황후, 200?+120)

 

 

신라가 '일본'에게 신나게 당하고 있을 때, 고구려와 백제는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신라가 '일본'에 항복했으니, 두 나라는 '일본'에 대적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기 위해 군세를 살펴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쩔까요. '일본'의 군세가 킹왕짱 쎄서 도저히 이길 만하지가 않았습니다.(則知不可勝) 결국 고구려, 백제는 스스로 찾아 와서 고두(叩頭)하고, 스스로 서쪽 울타리, 즉 서번(西蕃)이라 칭하여 영원토록 조공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신공황후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내관가(內官家)이자 둔창(屯倉)으로 삼았으니, 이로써 삼한(三韓)이라 했다고 합니다. 삼한은 처음엔 마한, 진한, 변한을 일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식민지'로 삼은 신공황후는 드디어 왜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 상기한 것처럼 응신천황을 낳습니다.

 

내관가, 둔창은 말 할 것도 없이 식민지 같은 개념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 즉 가야를 보고 '內官家' 또는 '官家'라고 많이 부릅니다. 그런데 관가, 내관가에 대한 일본서기의 집착은 다소 병적입니다. 예를 들어 지우개를 들고 다니며 길가에 다니는 아무 사람에게 자기 지우개라고 확인을 받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지우개라면 그렇게 유난 떨지 않겠죠.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둔창은 원래 식량 창고를 의미하는데, 고대에는 동사무소, 구청, 시청 같은 행정 통치의 거점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서기에 나오는 둔창은 왜 정권이 다스리던 통치 범위를 실제로 의미한다고 보통 생각합니다. 즉, 어디어디에 둔창을 두었다는 기사가 있으면, 왜 정권의 힘이 이 때는 여기까지 미쳤구나 하는 거죠. 따라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둔창을 두었다는 말은, 이 지역을 왜놈들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정리하면, 신공황후의 원정은 80척 분량의 조공을 신라에게서 계속 받기로 하고, 백제 고구려에게서도 받기로 했으며, 이들을 모두 내관가로 삼고 둔창을 두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卌六年 春三月乙亥朔, 遣斯摩宿禰于卓淳國. 於是, 卓淳王末錦旱岐, 告斯摩宿禰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彌州流·莫古三人, 到於我土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 故求道路, 以至于斯土. 若能敎臣等, 令通道路, 則我王必深德君王. 時謂久氐等曰, 本聞東有貴國. 然未曾有通, 不知其道, 唯海遠浪嶮. 則乘大船, 僅可得通. 若雖有路津, 何以得達耶. 於是, 久氐等曰, 然卽當今不得通也. 不若, 更還之備船舶, 而後通矣. 仍曰, 若有貴國使人來, 必應告吾國. 如此乃還. 爰斯摩宿禰卽以傔人爾波移與卓淳人過古二人, 遣于百濟國, 慰勞其王. 時百濟肖古王, 深之歡喜, 而厚遇焉.(신공황후, 246?+120)

 

 

탁순국

 

 

그런데 46년이나 지난 시점에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왜 사신이 탁순국에 갔다가 백제와 '처음' 통교하게 된 것입니다. 탁순왕 말금한기(末錦旱岐)가 사신에게 백제에서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라는 사신들을 보내 '일본'과 통교하고 싶어 했었지만, 바다 건너 가 본 적이 없어 그냥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분명 백제, 고구려는 46년 전에 신공황후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했는데, 이 때 이르러 처음 만나 사귀고 싶다고 쑥쓰럽게 고백한다뇨. 신공황후본기 안에서도 말이 안 맞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전설 등을 막 섞어서 신공황후에 우겨 넣었다는 정황 아닐까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삼한 정벌이 다른 형태로 전해지기도 하거든요. 모두 일본서기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조는 비슷합니다. 세부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一云, 足仲彥天皇, 居筑紫橿日宮. 是有神, 託沙麽縣主祖內避高國避高松屋種, 以誨天皇曰 ... 時天皇對神曰, 其雖神何謾語耶 ... 於是, 神謂天皇曰, 汝王如是不信 ... 是夜天皇忽病發以崩之. 然後, 皇后隨神敎而祭. 則皇后爲男束裝, 征新羅 ... 於是, 新羅王宇流助富利智干, 參迎跪之, 取王船卽叩頭曰, 臣自今以後, 於日本國所居神御子, 爲內官家, 無絶朝貢.(신공황후, 246?+120)

 

 

이 것이 첫 번째 이설입니다. 족중언천황(足仲彥天皇)은 중애천황의 왜식 시호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귀신이 신공황후가 아니라 사마현주(沙麽縣主)[사바노아가타누시]의 조상인 내피고국피고송옥종(內避高國避高松屋種)[우츠히코쿠니히코마츠야타네]에게 내렸습니다. 귀신은 신공황후에게 금(琴)을 가져다 주라고 했는데, 신공황후가 금을 타자 이번엔 신공황후에게 귀신이 내렸습니다. 이후 내용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중애천황은 상식적이라서 귀신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귀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인지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是夜天皇忽病發以崩之) 중애천황이 죽은 뒤 신공황후는 남장하고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바닷물이 경주로 범람하고, 신라왕이 바로 항복했다는 것은 같습니다. 고구려, 백제는 양심상 넣지 않았나봐요.

 

그런데 이번엔 신라왕의 이름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파사왕이 아니라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거든요. 우류조부리지간은 아마도 석우로(石于老)로 보입니다. 석우로는 신라의 장군이었습니다. 사방으로 크게 활약했는데, 동천왕이 신라를 공격해 왔을 때 이를 막은 것도 석우로라고 합니다. 나중의 흘해왕의 아빠이기도 하죠. 하지만 왕은 아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석우로에 관한 기술이 남아 있습니다.

 

 

三年, 夏四月, 人殺舒弗邯于老.(삼국사기 첨해왕본기, 249)

 

七年癸酉, 倭國使臣菖那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戲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爨婦.” 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兹之患, 由吾言之不慎, 我其當之.” 遂抵軍謂曰, “前日之言, 戲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人不荅, 執之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㓜弱不能歩, 人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삼국사기 열전 석우로, 253)

 

未鄒王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曵下庭焚之, 以報前怨. 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삼국사기 열전 석우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석우로는 왜놈 사신 갈나고(葛那古)와 서로 놀면서, 왜왕을 염전 노예로, 왕비는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왜왕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가, 왜놈들이 우도주군(于道朱君)이라는 장군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기까지 했던 것이죠. 이에 석우로는 자기 때문에 사건이 터진 것이므로, 스스로 왜군에게 가 사과했지만, 속이 좁은 왜놈들은 석우로를 불태줘 죽이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첨해왕본기와 열전의 몰년이 서로 다릅니다. 본기에서는 249년, 열전에서는 253년이라고 했으니까요. 이후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석우로의 와이프는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고 기다렸습니다. 미추왕 때 왜국의 대신이 왔는데, 석우로의 와이프가 사사로이 사신을 대접하다가 불태워 죽여 버린 것입니다. 왜놈들은 빡쳐서 다시 금성(金城)을 공격했지만, 결국 이기지는 못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상술한 것처럼 석우로는 신라의 유명한 장군이었고, 그 지위 역시 제 1관등인 서불한(舒弗邯)에 이를 정도의 권신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서처럼, 설사 실언했다고 하더라도 붙잡혀 불 타 죽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왜 석우로가 이런 입장에 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석씨들 사이의 권력 다툼 와중에 일이 꼬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 아들이 나중에 왕위에까지 오른다는 점을 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죠... 나중에 따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다만 상기한 정벌 이야기에서는 우류조부리지간이 죽은 것이 아니거니와, 상해를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본서기에 전하는 삼한 정벌 이야기에는 한 가지 설이 더 있습니다. 이 설은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一云, 禽獲新羅王, 詣于海邊, 拔王臏筋, 令匍匐石上. 俄而斬之, 埋沙中. 則留一人, 爲新羅宰而還之 ... 則王妻與國人, 共議之殺宰. 更出王屍葬於他處 ... 於是, 天皇聞之, 重發震忿, 大起軍衆, 欲頓滅新羅. 是以, 軍船滿海而詣之. 是時, 新羅國人悉懼, 不知所如. 則相集共議之, 殺王妻以謝罪.(신공황후, 246?+120)

 

 

이 이야기에서는 왜놈들이 신라왕을 포로로 잡고 해변가로 끌고 가서는 다짜고짜 왕의 무릎뼈를 뽑아 버립니다.(拔王臏筋) 그러고는 돌 위를 기어 다니게 합니다.(令匍匐石上) 그리고는 갑자기 베어 죽이고는 해변가에 묻었습니다. 왜군은 돌아가고, 다만 재()를 남겨 신라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재는 재상, 총독 같은 거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죽은 신라왕의 와이프와 신라 사람들이 공모해서 왜놈의 재를 죽여 버리고는, 왕을 제대로 장사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천황'이 듣고 빡쳤습니다. 왜놈들은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아예 멸망시키려 했습니다. 이에 신라 사람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워하다가, 결국 신라왕의 와이프를 죽이는 것으로 사죄했다고 합니다.

 

이 세 번째 설은 앞의 두 설과 아주 상이합니다. 일단 신공황후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황후라는 표현 대신, 오히려 '천황'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중애천황인지, 응신천황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여자 대신 남자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신라왕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두 설에서는 신라왕의 이름이 달랐지만 모두 나왔죠. 첫 번째 설에서는 신공황후가 아주 자비롭게 표현됩니다. 두 번째 설에서는 자비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포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조공 받았다는 게 끝이니까요. 하지만 세 번째 설에서는 신라왕을 아주 잔인하고 간악하게 대합니다. 무릎뼈를 뽑고, 돌을 기어다니게 하다가 죽였다는 것은, 단순히 적군을 잡아 죽이는 것을 넘어섭니다. 못되게 괴롭히는 것이죠. 일부러 적개심을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세 번째 설에서의 신라왕은, 비록 이름이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두 번째 설과 같이 석우로라고 보아야 합니다. 석우로가 왜군에게 잡혀 죽고, 그 와이프가 사후 왜놈들에게 복수했다는 사실이 같습니다. 게다가 석우로의 실언 때문에 왜군이 신라를 공격했고, 석우로의 와이프가 복수하자 다시 왜놈들이 공격해 온 것도 구조적으로 같습니다. 삼국사기를 믿는다면, 석우로는 왕도 아니고, 무릎뼈를 뽑히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석우로는 서불한, 즉 왕 바로 지위에 있던 '왕족'이었고, 생전에 공을 아주 많이 세운 장군이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봅시다. 삼한 정벌 전설은 석우로 이야기가 와전되고 와전되어서, 처음엔 고관대작을 잡아 죽였더라는 말이 왕을 잡아 죽였다는 말로 바뀌고, 신라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그 방법은 끔찍하게 바뀌어 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 이 설의 모델이 누구였는지, 즉 삼한 정벌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주체가 '신공황후' 또는 대화 정권으로 바뀌어 있는 이야기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200년, 또는 320년 경 대화 정권은 북구주에 있지도 않았고, 해외로 원정군을 보낼 여력도 없었을 겁니다. 좋게 봐 줘야 신생 정권이었거나, 대판(大阪)[오사카]과 내량(奈良)[나라]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겠죠. 따라서 우리가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을 단지 석우로 이야기가 와전된 결과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보를 더 얻으려면 생각해 볼 것이 더 있습니다. 

 

 

 

일단 첫 번째 문제는 '왜'가 누구냐는 겁니다. 삼국사기에도 그렇지만 '倭'는 초기 기록에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신라를 공격했다가 크게 깨졌다는 말로 신라본기에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보통 왜놈이라고 하면, 일본을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일본이 1개의 국가로 통일되어 있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수많은 소국들로 나뉘어 있었을 테니까요. 다만 우리가 마한, 진한, 변한이 각각 수십 개의 소국들로 이뤄져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삼국사기에 그 나라들의 역사가 잘 적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에 그 소국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왜놈들도 등장합니다. 사실 왜놈들의 열전이 중국 정사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지, 후한서가 처음입니다. 한서에는 없거든요. 사실 생각해 보면, 다루는 시대는 후한서가 앞인데, 편찬 연대는 삼국지가 앞이기 때문에, 당대 자료에 대해서는 삼국지가 더 정확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삼국지를 기본으로 하되, 필요할 시 후한서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생각엔 삼국지가 더 세세해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 對馬國 ... 一大國 ... 末盧國 ... 伊都國 ... 奴國 ... 不彌國 ... 投馬國 ... 邪馬壹國, 女王之所都 ... 斯馬國 ... 已百支國 ... 伊邪國 ... 都支國 ... 彌奴國 ... 好古都國 ... 不呼國 ... 姐奴國 ... 對蘇國 ... 蘇奴國 ... 呼邑國 ... 華奴蘇奴國 ... 鬼國 ... 爲吾國 ... 鬼奴國 ... 邪馬國 ... 躬臣國 ... 巴厘國 ... 支惟國 ... 烏奴國 ... 奴國 ... 此女王境界所盡, 其南有狗奴國, 男子爲王 ... 不屬女王.(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왜인)

 

東南大海 ... 凡百餘國. 自武帝朝鮮, 使驛通於者三十許國, 國皆稱王, 世世傳統. ... 其大倭王居邪馬臺國 ... 奴國 ... 女王國東度海千餘里至拘奴國, 雖皆種, 而不屬女王. 女王國南四千餘里至朱儒國, 人長三四尺. 自朱儒東南行船一年, 至裸國·黑齒國, 使驛所傳, 極於此矣.(후한서 열전 동이, 왜)

 

 

여기에서는 풍속 같은 것 보다, 이 지역에 있었다는 나라들의 이름들에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나라 이름들은 삼국지에 세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왜놈들은 대방 동남쪽 바다에 있었습니다. 여기엔 여왕국, 즉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고, 이에 복속해 있는 나라, 그렇지 않은 나라로 나뉘어 있습니다. 오환선비동이전의 기술은 여왕국과 그 친구들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마 여왕국과 친구들이 예전부터 대방군과 교류해 왔기 때문에, 그나마 여왕국 등에 대해서라도 아는 바가 있었던 같습니다. 대방 동남쪽 바다라는 것도, 대방군이 왜놈들에 대한 정보를 모은 주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적어 둔 게 아닐까 합니다. 위에 나온 나라 이름을 열거하면, 대마국, 일대국, 말로국, 이도국, 노국, 물미국, 투마국, 야마일국, 사마국, 이백지국, 이야국, 도지국, 미노국, 호고도국, 불호국, 저노국, 대소국, 소노국, 호읍국, 화노소노국, 귀국, 위오국, 귀노국, 야마국, 궁신국, 파리국, 지유국, 오노국, 노국입니다. 노국(奴國)이 두개 있네요? 여기까지가 여왕국에 속하는 나라들이며, 이 중 야마일국(邪馬壹國)이 바로 여왕국입니다. 야마일국과 친구들 남쪽에는 구노국(狗奴國)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이 나라는 남자가 왕이 되며, 야마일국에 종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편 후한서에서는 대방이 아니라 한(韓)의 동남쪽 바다 가운데 왜가 있다고 했습니다. 총 100여 나라가 있으나, 한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위씨조선이 망하고서부터라고 합니다. 위씨가 망한 이후, 통역을 통해 한나라와 통교했는데, 30개 국가가 교류에 참여했다고 하네요. 그 우두머리들은 모두 왕을 칭했습니다. 대왜왕(大倭王)은 야마일국에 있다고도 하네요. 삼국지에서는 왜의 제국들이 대방과 통교하고 있을 뿐이라 했는데, 후한서에서는 위씨조선 멸망시부터 한나라와 왜놈들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위씨조선이 망한 것이 기원전 108년이므로, 반대로 생각하면 그 이전부터 위씨조선 및 한반도의 열국들과 왜놈들 사이에는 꾸준히 교류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야마일국의 왕을 대왜왕, 즉 그 지역의 종주라고 했는데, 이 기사의 시점이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후한서는 후한 시대 기준이므로, 삼국시대 이전, 후한 중후기에도 야마일국이 왜 제국의 패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후한서에는 나라 이름이 많이 나오진 않습니다. 하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구노국(拘奴國)이 나오는데, 삼국지에서는 구노국이 야마일국 남쪽에 있다고 했지만, 후한서에서는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가야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야마일국에서 남쪽으로 가면 주유국(朱儒國)이라는 소인국이 나오고, 다시 동남쪽으로 바다를 타고 가면 나국(裸國)과 흑치국(黑齒國)이 나온다고 합니다. 다만 후한서 구노국은 ''가 아니라 ''를 씁니다. 주유국은 삼국지에서는 소인국이라고만 나옵니다. 아마 둘은 같은 나라일 겁니다. 나국, 흑치국은 삼국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노랑은 좌측부터 축자, 대우, 내량 / 파랑은 웅본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온 나라들의 위치는 사실 알기 힘듭니다. 하지만 설은 있는 법입니다. 일단 이 나라들이 모두 구주(九州)[큐슈]에 있었다는 설이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설도 다시 두 개로 나뉘니, 구주 북부에 있었다는 설, 그리고 저 남쪽 끝 대우(大隅)[오스미]에 있었다는 설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만약 전자라면, 여왕국과 친구들에 속하지 않는다는 구노국은 웅본(熊本)[쿠마모토]이나 저 남부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쪽에 있다는 삼국지의 설을 따를 때 말이죠. '구노'는 '쿠마소'로 볼 여지가 있으니까요. 기록에는 몇 천 리니, 몇 만 리니 하는 말이 있지만, 아마 대방군에서 처음 취합되었을 '거리' 정보가 실제와 오차 없이 같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두 번째 설은 이 나라들이 대판, 내량 지역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몇 만 리 정도 된다는 본문 설명과는 상대적으로 잘 합치되지만, 이 설을 따르려면 결국 왜놈들에게 제대로 된 정권은 대화 정권 하나이고, 그 정권이 '유일'하게 커서 지금의 왜놈들이 되었다는 점 역시 따르는 것이 됩니다. 상식적으로, 왜놈들 땅이 얼마나 넓은데,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소국들의 경쟁이 모두 무시되고, 오로지 섬 한 중간에 있는, 정말 딱 중간에 있는 대화 정권이 헤게모니를 잡았다는 주장을 믿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왕 믿는다면 구주 북부에 야마일국과 친구들이 있었다는 설을 믿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설명되는 점들이 더 있습니다. 저는 중애천황과 신공황후의 웅습(熊襲)[쿠마소] 토벌을 설명할 때, 이 사건이 대화 정권과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은 실재했는지도 알 수가 없고, 실재했다 하더라도 구주에 있었을 다른 정권들 사이의 전쟁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었죠. 야마일국과 친구들의 위치를 축자에 두고, 구노국을 웅본에 두면, 중애천황과 신공황후의 웅습 토벌은 야마일국과 구노국 혹은 이에 준하는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연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중애천황본기와 신공황후본기에는 200년에 웅습을 토벌하고, 삼한을 정벌했다고 했지만, 전쟁의 주체를 대화 정권이 아니라 야마일국으로 보면, 꼭 일본서기의 연대에 행적을 끼워 맞출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삼국지가 작성된 때가 3세기 중후반이고, 진수가 왜인에 대해 참고한 책들, 자료들의 원전은 대방군에서 왔을 것입니다. 따라서 삼국지의 왜인 정보는 적어도 3세기 중반이나, 차이가 많이 난다면 그 이전 시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웅습 토벌 사건은 삼한 정벌로 이어지는 '서사적 근거'로써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비로소 구주 지역의 역사적 사건으로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야마일국은 여왕국이므로, 신공황후와 그 상(像)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다행히도 그 여왕에 대한 정보도 남아 있습니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婿,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飲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왜인)

 

建武中元二年, 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安帝永初元年, 倭國王 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間, 倭國大亂, 更相攻伐, 歷年無主.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 侍婢千人, 少有見者,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語. 居處宮室樓觀城柵, 皆持兵守衛. 法俗嚴峻.(후한서 열전 동이, 왜) 

 

 

삼국지에서는 원래 왜왕은 남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7, 80년이 지나자 왜국에 난리가 났다고(倭國亂) 합니다. 그리하여 몇 년 동안 서로 치고 받았는데, 이렇게 싸우다가는 다 뒤지겠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비미호(卑彌呼)라는 여자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비미호는 원래 귀도(鬼道)를 섬기는 사람으로, 이로써 사람들을 미혹시켰습니다. 여기서 왜국이란, 야마일국에서 군소국들, 그리고 그 외의 국가들을 모두 이르는 말인 듯 합니다. 비미호가 왕이 된 나라는 야마일국일 것입니다. 야마일국을 여왕의 나라라고 했으니까요. 삼국지에서는 난리가 무엇인지, 비미호 이전에는 누가 왕이었는지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후한서도의 기술도 비슷하지만, 후한서에서는 비미호 이전 한나라와 왜놈 사이의 교류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건무중원은 후한 광무제 때의 연호입니다. 2년이면 57년입니다. 이 때 왜노국(奴國)이 조공해 왔습니다. 삼국지에는 왜의 소국 중 하나로 노국(奴國)이 나오므로, 왜노국은 왜의 노국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이 나라는 왜국 중 가장 남쪽에 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서는 대마국부터 남쪽으로 옮아 가며 나라를 열거하는데, 구노국 바로 이전에 노국이 나오거든요. 그 내용과 합치됩니다. 광무제는 왜놈들이 기특하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도장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복강(福岡)[후쿠오카]의 지가도(志賀島)[시카노시마]에서 '漢委奴國王'이 새겨진 금도장이 발굴됐다고 하니, 이 도장이 그 도장 아닐까요? 그런데 남쪽에 있다는 노국에 하사한 도장이 왜 북구주에서 발굴되었을까요?

 

 

지가도

 

 

왜놈들의 조공이 여기서 끊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후한 안제 때인 영초 원년, 즉 107년에는 왜국왕(倭國王) 수승(帥升)이라는 사람이 산 사람(生口) 160명을 바치고 알현하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수승은 왜노국왕이라고 하지 않고 왜국왕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야마일국의 왕이 아닐까 합니다. 수승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습니다. 정상수웅(井上秀雄)[이노우에히데오]은 왜국왕 수승이 아니라 '倭國 王帥 升', 즉 왜의 왕사 승이라고 보았고, 주봉(周鳳)과 송하견림(松下見林)은 수승이 바로 경행천황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경행천황이 누구냐고요? 141살로 죽으면서, 일본무존을 보내 일본 전토를 정복하고 다녔다고 하는 기적의 천황입니다. 중애천황 전전대 천황이죠. 저는 안 믿습니다. 어쨌거나, 만약 수승이 여자였다면 여왕이 신기하다고 적어 놨을 텐데, 그런 말은 없으므로 수승은 남자일 것입니다. 107년경 왜는 남자를 왕으로 세우는 '평범한' 부족 국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후한 환제와 영제 연간()에 왜국에는 대란이 터졌다고 합니다.(倭國大亂) 삼국지에서는 원래 남자가 왕이었는데, 7, 80년 뒤에 난리가 터져서 여왕을 세웠다고 했죠? 수승이 조공했던 107년에서 7, 80년 뒤라면 180, 190년입니다. 환제의 치세가 146년이서 167년까지, 영제의 치세가 167년에서 189년까지이므로 대체로 맞아 떨어지겠네요. 후한서에서도 삼국지와 같이, 대란 중 서로서로 쥐 패다 보니 오랫동안 '주인'이 없었다고 합니다.(歷年無主) 여기서 '主'는 각 소국들의 왕이 아니라, 야마일국의 왕처럼 '왜국왕'이라고 칭할 만한 종주국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국들은 비미호(卑彌呼)를 세워 여왕으로 삼았습니다. 이 점은 삼국지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좌측부터 구주 북부, 뇌호내해, 기내, 동해, 관동

 

 

삼국지, 후한서 모두에 등장하는 '亂'에 대해, 별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고학적 정황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근데 저는 여기 대해 상세하게 말씀드릴 만한 식견은 없습니다. 기록만 갖고 깔짝대기 때문에 아는게 많이 없거든요. 하지만 개략적으로라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80년 전후로, 구주에서 관동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중간'을 관통하는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전쟁 또는 전쟁 준비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구주 북부에는 전쟁 흔적이 없으나, 구주 북부와 구주 동부를 잇는 지역에서는 봉수대 같은 군사 시설들이 발굴되었습니다. 구주 자체가 외부에서 침략을 받진 않은 것 같지만, 적어도 그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동쪽에서 공격을 받진 않았지만 동쪽으로 침략을 해 나갔을 수는 있겠죠. 뇌호내해(瀨戶內海)[세토나이카이]의 연안에서도 비슷한 시설들이 발굴됩니다. 좀 더 동쪽으로 가서, 내량(奈良)[나라]의 앵정시(櫻井市)[사쿠라이시]에 있는 전향유적(纏向遺跡)[마키무쿠이세키]에는, 2세기 말에서 3세기 전반에 걸쳐, 동쪽으로는 관동에서, 서쪽으로는 구주 북부에서 반입된 토기들이 많이 발굴됩니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의 15%나 된다고 하네요. 이것은 내량의 앵정시 부근이 당시 물자가 교환되는 주요 통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동쪽의 명고실(名古屋)[나고야]을 비롯한 동해(東海)[도카이] 지역에서는, 2세기 말쯤 되면 그 지역의 고유 물품 양식이 사라지고, 내량 지역의 양식을 따르는 양태를 보인다고 합니다. 이것은 2세기 말 경에 내량의 세력이 명고실을 굴복시켰거나, 병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처럼,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구주 지역은 물론, 기내 지방, 동해 지방, 그리고 저 관동 지방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고 할 수 있는 정황은 충분합니다. 다만, 멍청한 왜놈들이 일본서기 같은 책을 편찬하면서 이런 '역사'를 싹 지워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오로지 고고학에 의존해 확인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토기는 말을 못 하지만, 글자는 하잖아요? 남아 있었을 기록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지우는 꼴이 얼마나 한심합니까?

 

군사적 긴장 자체에 무식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이 정황은 대화 정권 외에 수많은 독립 세력들이 일본 곳곳에 산재해 있었고, 서로 교류하고 있었으며, 특정 영역에서 발생한 국부적 군사 활동에 대해서도, 그 규모와 파급력만 크다면, 각 정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로 치면 가야 남부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면, 이에 대해 신라, 백제, 저 멀리 있는 고구려까지 그 군사 행동을 인지하고, 대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왜놈왜놈 하면서 왜놈들이 많이 무시하기는 하지만, 이 말은 2세기에서 3세기 즈음의 왜놈들이, '우하하하, 팡파레!'를 외치며 독주하는 대화 정권과 머저리들이 아니라, 유비, 조조, 해좇, 동탁처럼 서로 대등하게 잽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세력들이 병립하는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꿔 말 하면, 중국 및 한국으로부터의 문화 전래는 늦었지만, 그와 별개로 스스로 갖출 만한 것은 갖추고 있었고, 따라서 '우가우가'하는 수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갑시다. 만약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처럼, 실제로 왜놈들이 신라에 군사 활동을 했다면, 그 주체는 누구였을까요? '여왕'만 보면 야마일국일 것 같습니다. 기록상, 비미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80년 경의 군사적 긴장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이후일 것입니다. 비미호가 죽은 이후에도 다시 다른 여왕이 집권했으므로, 대략 190에서 200여 년부터, 50에서 60여 년 동안은 여왕이 집권했을 것이라고 어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 기간에 야마일국과 남부의 구노국 사이에 전쟁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웅습 토벌 기사의 모태는 아닐까요?

 

또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왜(倭)를 가야계가 아니라 진짜 왜놈들이라고 간주한다면, 3세기 초엽 같은 이른 시기에도 신라와 왜놈들 사이의 교류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꾸준히 있어 왔고, 실제로 삼한 정벌의 모태로 보이는 석우로 피살 사건은 3세기 중반 즈음에 있었던 사건이므로, 삼한 정벌 전설 역시 야마일국 또는 그에 준하는 국가와 신라 사이의 교류, 분쟁의 결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신라왕이 스스로를 말을 다루는 관리인 사부로 삼아 달라고 운운한 점, 신라왕의 비참한 죽음이 석우로와 겹쳐 보이는 게 많다는 점, 와이프가 복수한다는 내용도 거의 같다는 점을 볼 때, 신라와 왜놈들은 당시 활발히 교류하였지만, 동시에 서로 발길질을 날리는 일도 많았고, 그 와중에 신라 내부의 왕위 쟁탈 및 귀족 분쟁과 맞물려 석우로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왜놈들은 그 사건을 나중에 자기네들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기술해 전승해 갔다는 점 등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고구려, 백제를 모두 굴복시켰다는 것은 과장이 섞인 일이고, 삼한 정벌 전설의 세 가지 다른 형태 중 두 가지에는 백제, 고구려가 나오지 않으므로, 이 점은 후대에 윤색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후한서에 따르면, 위씨조선이 망했을 기원전 108년에 이미 한나라와 통교한 왜놈들이 많았다는 것은 이미 그 시기에 중국과 교류할 수 있을 만한 정치 집단이 적어도 구주에 존재했다는 말이고, 중국과 교류하기 이전에 훨씬 가까운 진한, 변한, 마한과도 교류에 왔을 터, 상고 및 고대에 대한해협 건너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가까웠을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석우로가 피살된 사건이 신공황후본기의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끔찍하고 잔인하게 전승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듯이, 석우로는 왜왕을 모욕했습니다. 여기서 왜왕, 또는 왜는 대화 정권이 아니라 아마 구주 지역 혹은 그 근처의 정권을 의미할 것입니다. 누가 모욕을 해도, 가까이 있어야 가서 때리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 대통령을 욕해도 브라질에서 뭐라 하긴 좀 그렇죠. 똑같습니다. 만약 이 사건이 삼국사기 기술처럼, 250년 전후에 있었던 신라와 구주 지역 또는 그 주변 정권 사이의 대립, 갈등, 전쟁이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엄밀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신라와 그 정권 사이의 갈등이고, 대립이지, 그 의식이 나중에 그 지역으로 들어올 대화 정권에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기 위해, 우선 구주 정권이 신라와 서로서로 증오할 만한 정황이 있었는지를 살펴 보고, 그 이후에 그 의식이 대화 정권으로 '계승'될 여지가 있었는지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구주 정권의 역사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상기한 것처럼, 적어도 기원전 108년, 그리고 그 이전부터 그곳에 사람이 군락을 이루어 살았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분명 이들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한반도 남부와 교류가 많았을 겁니다. 그럼 신라와의 '악연'은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에는 왜인들과 '조우'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八年, 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삼국사기 혁거세왕본기, 기원전 50)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𧴨,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𢈔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諌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夲人, 初以瓠繋腰, 度海而來, 故稱瓠公.(삼국사기 혁거세왕본기, 기원전 20)

 

十一年, 人遣兵舩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삼국사기 남해왕본기, 14)

 

夏五月, 與國結好交聘.(삼국사기 탈해왕본기, 59)

 

十七年, 人侵木出㠀, 王遣角干羽烏禦之, 不克, 羽烏死之.(삼국사기 탈해왕본기, 73)

 

夏四月, 人侵東邊.(삼국사기 지마왕본기, 121)

 

十一年, 夏四月, 大風東來, 折木飛瓦, 至夕而止. 都人訛言, “兵大來.” 爭遁山谷. 王命伊湌翌宗等, 諭止之.(삼국사기 지마왕본기, 122)

 

十二年, 春三月, 與國講和.(삼국사기 지마왕본기, 123)

 

 

혁겨세왕부터 지마왕까지의 기록입니다. 초기 기록을 아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원전 50년 기사는 왜놈들이 공격해 왔다가 혁거세의 덕을 보고 감응해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믿을 수 없죠. 남해왕 시기부터는 왜놈들이 공격해 왔거나, 혹은 화친했다는 기사가 지속적으로 있습니다. 기원전 108년 전후로도 이미 남부 한반도와 구주 사이의 교류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렇게 때리고, 막는 일은 이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바꿔 생각하면, 신라가 왜놈들을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면, 삼국 중 하나로 성장히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라도 이 기사들이 정황상 무리하지 않다고 받아들일 만합니다.

 

 

二十年, 夏五月, 女王卑彌乎遣使來聘.(삼국사기 아달라왕본기, 173)

 

 

왜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이런 기사들은 500년의 소지왕 때까지 이어집니다. 500년까지는 수십에서 백 년 정도의 큰 격차 없이 꾸준히 공격, 방어, 반격, 원정 시도 기사가 존재하죠. 그런데 500년의 장봉진 함락 기사를 끝으로 뚝 끊기더니, 그 이후 왜는 165년이나 지난 665년의 취리산 회맹에나 등장합니다. 취리산에서의 회맹이 끝나고, 신라, 탁발부, 웅진도독부, 탐라, 왜의 사신이 중국의 태산으로 들어가 제사를 지냈다는 말이 있거든요.

 

 

秋八月, 王與勑使劉仁願·熊津都叔扶餘隆, 盟于熊津就利山 ... 於是, 仁軌領我使者及百濟·躭羅·人四國使, 浮海西還, 以㑹祠泰山.(삼국사기 문무왕본기, 665)

 

 

아주 미심쩍죠? 왜 꾸준히 주먹과 정강이로 '교류'하던 신라와 왜의 관계가 500년을 기준으로 끊겼을까요? 기원전 50년 기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왜와 신라는 550여 년 동안이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신라와 '왜'는 충분히 서로 싫어할 만했습니다. 일본서기에서 신라와 왜가 처음 '조우'한 것은 바로 200년,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기사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왜'는 200년 보다 훨씬 이전부터 신라와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왜 일본서기에서 200년을 최초의 조우 시점으로 정해 놓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 뒤 근초고왕과의 협력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대화 정권으로 그 증오심이 '계승'될 만한 정황이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일본서기 편찬시에 모든 사건의 주체를 각 지역 정권들이 아니라 대화 정권으로 치환하고 윤색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이들 사이의 정서적 동질성을 보장할 수 있다면, 그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네요. 구주 정권, 또는 그 근처 정권이 언제 대화 정권에 복속했는지는 아주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521년의 반정의 난 이후 구주 중북부가 대화 정권에 들어간 것은 분명하죠. 구주 정권이든 뭐든, 이것 정권들이 나중에 그 지역을 접수한 대화 정권과 같이 '왜인'임은 분명합니다. 삼국지, 후한서에도 모두 왜 또는 왜의 별종이라고 하고, 일본서기에서도 구주 북부 사람들과 중부, 남부가 다를지언정, 북부는 다 같은 민족인 것처럼 기술하니까요. 따라서 구주 중부의 웅습, 그리고 남부의 준인(準人)[하야토], 그리고 저 동북 지역의 하이(蝦夷)[에미시] 같은 사람들을 빼고는, 조금씩 달라도 서로서로, 그리고 외부에서도 동질성이 있는 부류로 생각했다고 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민족적 정체성'을 보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감정의 갈래는 달라질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 북한하고 서로 발길질 많이 하잖아요? 대화 정권과 구주 정권이 공통적으로 신라를 증오할 만하다고 할 이유가 있을까요?

 

만약 521년의 반정의 난, 또는 500년을 기준으로 구주 정권이 대화 정권으로 교체되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면, 신라에 대한 구주 정권의 증오심은 500년에 끝났어야 합니다. 500년 이후 신라와 왜 사이의 전쟁, 교류 기록은 일절 등장하지 않다가, 취리산 회맹 이후에는 670년에서야 왜가 일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 것으로 오랜만에 나옵니다. 백강 전투가 663년이므로, 그 보다 7년이나 지난 시점입니다. 백제가 갑자기 망한 뒤, 천지천황은 축자에 직접 사령부를 차리고, 기내로 돌아가 제대로 즉위도 하지 않은 채 백제의 잔류 세력들을 지원했습니다.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백제와 왜의 관계는 아주 각별했던 것이죠. 그런 입장에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강에서 지원군을 이겼으며, 그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 눌러 앉은 탁발부마저 이겨 버린 신라는 왜에게 아주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백강 전투를 전후 해서, 구주를 비롯한 서부 지역, 기내 지역에까지 방어를 위한 백제식 산성을 많이 지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 산성들은 정황상,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와 탁발부 '오랑캐'들이 자기네들에게까지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지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 신라와 탁발부 사이에 전쟁이 터지고, 신라가 자기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제스쳐를 취하자 곧 누그러들었을 겁니다.

 

 

천지천황 시기 쌓은 백제식 산성 위치

 

 

秋八月, 遣達率答㶱春初, 築城於長門國. 遣達率憶禮福留·達率四比福夫筑紫國, 築大野及椽二城.(천지천황, 665)

 

是月, 築倭國高安城·讚吉國山田郡屋嶋城·對馬國金田城.(천지천황, 667)

 

 

하지만 그 난리를 견뎌낸 천지천황이 죽고, 임신의 난으로 천무천황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천지천황과 천무천황의 외교적 상황은 달랐습니다. 천지천황 때 왜놈들은 외부에서 물이 들어오는 것을 억지로 막고 있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천무천황 때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천무천황은 정당하지 않은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기 때문에,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기를 바랐습니다. 일본서기는 그런 맥락에서 작성된 겁니다. 일본서기의 편찬자는 천무천황의 아들인 사인친왕(舎人親王)[도네리신노]이었고, 천무천황, 지통천황, 문무천황을 거쳐 원명천황 시기인 720년에 완성했습니다. 지금까지 글을 읽으셨다면 아실 겁니다. 일본서기는 철저하게 천무천황 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당시 왜놈들에게 왜놈들의 '역사'가 위대하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천황'이나 '일본' 같은 근본 없는 표현들이 기원전 700년에서 600년 경의 신무천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했고, 자기들의 '정당한 정권'이 기내 지역에, 신무천황에서부터 유일하게 내려 오며, 그 외의 정권들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전부 대화 정권에 자연스레 복속했다고 기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구주 정권은 없었던 정권이 되었고, 그 지역 정권의 역사는 유리한, 또는 유리할 만한 부분만 떼 와서 대화 정권 중심으로 윤색했을 겁니다. 신공황후 전설은, 아마 있었을지도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 전설로 와전되고, 그리고 일본서기에 '역사적 사건'으로 들어갈 때 다시 한 번 윤색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적개심,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증오심, 동시에 신라에 대한 동경, 부러움이 함께 들어갔을 겁니다. 결국 이런 감정과 증오가 후대로 갈수록 신라에 대한 '우월감'으로 변질되어 가고, 나중엔 이 기록들을 왜곡해 임나일본부설 같은 괴설을 주장하게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배경을 감안하여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기록을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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