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일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일본서기 추고천황본기 중)

2020. 8. 3. 13:04일본서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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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인용된 속일본기 기록의 원문을 찾는 데는 신민(臣民)인 slugnoid가 도움을 줬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을 다룬 글에서, '日本'이나 '天皇'이라는 말이 삼한 정벌 시기, 즉 200년 경에 쓰이지 않았을 것임에도 기록에 등장한다고 비판했었습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57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중)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일본서기에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은 전후 사건과 연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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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王, 於是, 戰戰慄慄厝身無所 ... 乃今醒之曰, 吾聞, 東有神國. 謂日本. 亦有聖王. 謂天皇. 必其國之神兵也. 豈可擧兵以距乎, 卽素旆而自服.(신공황후, 200?+120)

 

 

보시다시피 신공황후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왕은 자기가 듣기로 동쪽에 신의 나라가 있는데(東有神國), 그 이름은 일본이라 했고(謂日本), 또한 일본에는 성왕이 있으니(亦有聖王), 이를 천황이라 했다고 했습니다.(謂天皇) 저는 삼한 정벌 글에서 일본이라는 말이 일러도 7세기 중반, 늦으면 후반에나 쓰였기 때문에, 200년 경의 기록에는 등장할 수 없는 말이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정황 증거로써, 속일본기와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를 제시했습니다. 또한, 7세기 중반에서 후반, 혹은 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천황으로 따진다면 제명천황 말기에서 천무천황과 그 직후 천황들에 이르기까지, 왜놈 조정에서는 정치 개혁과 쿠데타가 이리저리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이라는 표현이 국내에 정착하고, 국외에 공표되지 않았나 저는 생각이 듭니다. 그 후보로 꼽히는 사건이 바로 646년의 대화개신(大化改新)[다이카개신], 672년의 임신의 난, 702년의 대보율령(大寶律令)[다이호리츠료]입니다.

 

천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천황에 대해서는 목간이나 금석문을 추가로 살펴 보려 합니다. 추고천황 대 만들어진 법륭사(法隆寺)[효류지]의 약사여래상광배명(藥師如來像光背銘), 효덕천황 대 만들어진 원흥사탑로반명(元興寺塔露盤銘)에는 모두 '天皇'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편 1983년에 비조(飛鳥)[아스카]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황자(皇子)나 대진황(大津皇)이라는 표현이 나오며, 1997년에 비조지(飛鳥池)[아스카이케]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天皇聚□弘寅□' 운운하는 말이 또 나옵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59

 

언제부터 '천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일본서기)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 이 글에 인용된 비조 목간에 관한 보고서를 찾는 데는 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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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일본, 천황 중 일본에 대해 먼저 분석해 볼 것입니다. 천황에 대해서는 위의 링크를 보셔야 합니다. 제가 일자무식에, '낳 노코 기윽쟈도 모르는' 사람이라 잘 분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노력이나 해 보겠습니다.

 

 

 

일단 실제로 '日本'이라는 말이 제대로 된 기록에 언제 처음 등장하는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삼한 정벌을 다룰 때 대체로 언급했으나 다시 한 번 상세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일단 '日本'은 해의 근본,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니, 한국,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쪽에 있는 왜놈들이 자기를 일본이라고 부른다는 게 아주 의미 없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왜인들이 자기들 보다 또 동쪽에 있는 하이(蝦夷)[에미시]들에게 일본인이라고 해 준 건 아니지만요.

 

 

하이

 

 

왜놈들이 자기들을 '해 뜨는 곳 사람들'이라고 부른 최초의 기록은 왜놈들 기준으로는 추고천황, 중국 기준으로는 수나라 양제 때 있습니다. 추고천황은 신공황후를 제외하면 대화 정권에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하지만 실권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당시 실질적인 집권 세력은 소아씨로, 소아마자(蘇我馬子)[소가노우마코]가 선대의 숭준천황을 암살하고 추고천황을 다음 왕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추고천황 시기에는 유명한 성덕태자(聖徳太子)[쇼토쿠타이시]가 섭정으로써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기록을 살펴 봅시다. 일본서기 추고천황본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秋七月戊申朔庚戌, 大禮小野臣妹子遣於大唐. 以鞍作福利爲通事.(추고천황, 607)

 

十六年 夏四月, 小野臣妹子至自大唐. 唐國號妹子臣蘇因高. 卽大唐使人裴世淸·下客十二人, 從妹子臣至於筑紫. 遣難波吉士雄成, 召大唐客裴世淸等. 爲唐客, 更造新舘於難波高麗館之上.(추고천황, 608)

 

 

왜 조정에서는 추고천황 15년에 안작복리(鞍作福利)[쿠라쓰쿠리노후쿠리]를 통사(通事)로 삼아 소야신매자(小野臣妹子)[오노노오미이모코]를 대당(大唐)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통사는 통역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 시기는 수나라 양제 때로, 탁발부가 아직 중국을 찬탈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수나라를 '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사신으로 갔던 소야신매자는 이듬해에 배세청(裴世淸)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이 기사들에는 일본이니, 해가 뜨는 곳이니 하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런데 수서에 이 일본서기 기사에 대응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大業三年, 其王多利思比孤遣使朝貢 ... 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 帝覽之不悅, 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明年, 上遣文林郎裴使於倭國.(수서 열전 동이, 왜국)

 

 

대업 3년은 607년으로, 수나라의 양제 때입니다. 일본서기 기록과 시간이 맞아 떨어지죠? 일본이라는 표현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왜놈들이 보낸 국서에 '日出處天子'와 '日沒處天子'라는 말이 나옵니다. 해 뜨는 곳의 천자, 해 지는 곳의 천자라는 말입니다. 왜놈들이 조공 사절을 보내면서, 그 국서를 통해 깝쳤던 것이죠. 양제는 용하게도 사신을 죽이지 않았고, 싸가지가 없다고 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고구려한테는 안 참았으면서요. 고구려는 가깝고, 왜놈들은 멀어서 그랬을까요? 수나라에서는 초인과 같은 인내심을 보여서, 608년(明年)에 배청(裴淸)을 답사로 왜국에 보냈다고 합니다. 이 배청이 바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배세청입니다. 탁발부의 태종 이름이 이세민이기 때문에, 수서에서는 '世'를 이세민이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쓰지 않은 것 같거든요. 배청, 배세청이 동일인일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사신도 소야신매자(小野臣妹子)로 같은 사람인 것이 확인 가능합니다.

 

일출처천자라는 표현을 사건을 추고천황이 주도한 것인지, 섭정 중이었던 성덕태자가 주도한 것인지, 아니면 사실상 권력의 실세였던 소아마자가 주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한 번 깝쳐 보겠다는 도전 의식이 당시 왜놈들에게 있긴 있었던 모양입니다. 수나라가 진나라(陳)를 멸망시킨 것이 589년이므로, 소야신매자가 사신으로 간 607년은 수나라가 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한나라 이래 오랜만에 중국을 통일한 지 10여 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반대로 왜놈들 입장에서는, 세도가였던 물부씨(物部氏)[모노노베우지]를 소아씨가 멸문시켜 권력이 소아씨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또한, 이 때는 이미 7세기 초였으니, 서남 지방의 준인(準人)[하야토]과 동북 지방의 하이를 제외하면, 지금의 왜 전역이 대화 정권에 복속되었을 때이기도 하지요. 실질적으로 본주(本州)[혼슈] 동북 지역이 '중앙 정부'의 통치 아래 복속된 것은 겸창막부(鎌倉幕府)[가마쿠라바쿠후]가 들어선 직후였습니다. 구주 남부는 8세기 초 즈음에는 대화 정권에 복속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배 부르고 등 따실 때'인 데다 왜놈들은 중국에서 아주 멀리 있었으니, 한 번 깝쳐 보겠다고 생각할 만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日出處天子' 같은 '깝침'을 넘어서, 정말 '日本'이라고 칭한 것은 그로부터 100여 년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일단 왜놈 기록 중에서는 속일본기에서 '日本'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문무천황 때인 702년에 왜 조정에서는 견당사(遣唐使)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大寳元年春正月 ... 丁酉, 以守民部尚書, 直大貳, 粟田朝臣眞人, 爲遣唐執節使. ... 五月... 己夘, 入唐使粟田朝臣眞人授節刀.(속일본기 문무천황본기, 701)

 

二年 ... 六月 ... 乙丑, 遣唐使等去年從筑紫而入海, 風浪暴險不得渡海, 至是乃發.(속일본기 문무천황본기, 702)

 

慶雲元年 ... 秋七月甲申朔, 正四位下粟田朝臣眞人自唐國至. 初至唐時, 有人來問曰, 何處使人. 荅曰, 日本國使, 我使反問曰, 此是何州界. 荅曰, 是大周楚州塩城縣界也, 更問, 先是大唐, 今稱大周, 國号縁何改稱. 荅曰, 永淳二年, 天皇太帝崩, 皇太后登位, 稱号聖神皇帝, 國号大周, 問荅畧了. 唐人謂我使曰, 亟聞, 海東有大倭國, 謂之君子國, 人民豊樂, 禮義敦行, 今看使人, 儀容大淨, 豈不信乎, 語畢而去.(속일본기 문무천황본기, 703)

 

大足 ... 二年 ... 冬十月, 日本國遣使貢方物.(구당서 측천황후본기, 702)

 

 

견당사는 율전조신진인(粟田朝臣眞人)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입당사(入唐使)라는 표현도 보이는군요. 율전조신진인은 702년에 축자에서 바다로 들어가 703년 7월에 왜로 돌아 왔습니다. 속일본기에는 이 때 율전조신진인이 탁발부 사람들과 했던 말들이 남아 있어요. 율전이 탁발부에 이르렀을 때 어디에서 온 사신인지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에 율전이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이라고 대답했거든요. 이 대화에는 탁발부의 국호가 대당(大唐)에서 대주(大周)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들어 있습니다. 바로 측천이 제위를 찬탈한 사건입니다. 그 사람은, 바다 동쪽에 대왜국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고(海東有大倭國), 그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들었는데, 이제 사신을 진짜 봤다고 하고는 가 버렸습니다. 율전조선진인이 견당사로 갔다는 것은 구당서 측천황후본기에서 교차 검증됩니다. 다만 구당서에는 대화 같은 것이 실려 있지는 않습니다. 대족 2년, 즉 702년 10월 기록에는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고(日本國遣使貢方物) 간단하게 나와 있죠. 속일본기와 구당서의 이 기록들은 일관되게 702년 당시에는 왜놈들이 대외적으로 '일본'이라고 칭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럼 다른 기록들에서도 '日本'을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모두에 등장합니다.

 

 

十二月 ... 國更号日夲, 自言近日所出, 以爲名.(삼국사기 문무왕본기, 670)

 

日本, 古倭奴也. ... 咸亨元年 ... 惡倭名, 更號日本. 使者自言, 國近日所出, 以為名. 或云日本乃小國, 為倭所并, 故冒其號. 使者不以情, 故疑焉.(신당서 열전 동이, 일본)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併倭國之地. 其人入朝者, 多自矜大, 不以實對, 故中國疑焉.(구당서 열전 동이, 일본국)

 

倭國者, 古倭奴國也. 去京師一萬四千里,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其國, 居無城郭, 以木爲柵, 以草爲屋.(구당서 열전 동이, 왜국)

 

 

각 사서에는 왜가 왜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는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에서는 왜가 자기들이 해 뜨는 곳에 있다고 해서 일본으로 국호를 바꿨다고 했습니다. 한편 신당서에서는 함형 원년에 사신이 와서 '倭'라는 말이 싫어서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함형 원년은 670년입니다. 하필 일본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 사신은 해가 있는 곳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당서의 그 기록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일본은 작은 나라였는데(日本乃小國), 왜가 일본을 잡아 먹어 버리고는(為倭所并), 이에 일본의 탈을 썼다고 했거든요.(故冒其號) 뒤이어 사신이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아(使者不以情) 의심간다고 했습니다. 열전 첫머리에는 일본을 보고 옛날 왜노(倭奴)라고 한 것을 보면 의미심장한 점이 있습니다. '奴'는 노예나 아님 '그 새끼들'처럼 비하하는 표현으로 보통 쓰이기 때문에, 왜노를 '왜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나오는 왜의 소국들 이름 중에 '奴國'이 있었거든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 對馬國 ... 一大國 ... 末盧國 ... 伊都國 ... 奴國 ... 不彌國 ... 投馬國 ... 邪馬壹國, 女王之所都 ... 斯馬國 ... 已百支國 ... 伊邪國 ... 都支國 ... 彌奴國 ... 好古都國 ... 不呼國 ... 姐奴國 ... 對蘇國 ... 蘇奴國 ... 呼邑國 ... 華奴蘇奴國 ... 鬼國 ... 爲吾國 ... 鬼奴國 ... 邪馬國 ... 躬臣國 ... 巴厘國 ... 支惟國 ... 烏奴國 ... 奴國 ... 此女王境界所盡, 其南有狗奴國, 男子爲王 ... 不屬女王.(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왜인)

 

建武中元二年, 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후한서 열전 동이, 왜) 

 

 

가장 끝 구노국 앞에 노국이 있죠? 후한서에도 왜노국이 나옵니다. 광무제 때인 건무중원 2년으로, 서기 57년입니다. 이 때 왜노국이 후한에 조공했는데, 왜국(倭國)의 가장 남쪽 경계에 있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삼국지의 나라 순서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열거된 것이라면, 아마 삼국지와 후한서의 노국, 왜노국은 같은 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노국이 신당서에 나오는 왜노와 같은 나라일까요? 

 

한편 구당서는 또 특이합니다. 구당서에서는 일본국과 왜국이 따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왜국은 옛 왜노국(倭奴國)이며, 신라 동남쪽의 바다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왜국에는 성곽이 없고, 목책을 세워 뒀을 뿐이며, 풀을 이어 집으로 삼았다는 말도 있네요. 근데 아무리 왜놈왜놈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테니, 이 뒷 부분은 아마 와전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국을 보고는 왜국의 별종이라 했습니다.(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또한 일본이라는 국호에 대해, 해가 뜨는 가장자리에 나라가 있기 때문에 일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설도 있습니다. 혹자는 '倭國'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본으로 바꾸었다고 했고, 또 혹자는 신당서에서처럼, 일본이 원래 작은 나라였으나(日本舊小國), 왜국의 땅을 잡아 먹었다(併倭國之地)고도 했습니다. 다만 잡아 먹은 것은 신, 구당서가 서로 반대입니다. 일본이 작은 나라였다는 것은 같으나, 신당서에서는 왜가 일본을 먹었다고 했고, 구당서에서는 일본이 왜를 먹었다고 했으니까요.

 

구당서와 신당서,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공통적으로 해가 뜨는 곳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했습니다. 또, 왜라는 국호를 싫어했기 때문에 일본이라 바꿨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와 일본이 원래 별개의 나라라는 말이 이상합니다. 주체는 반대지만, 어쨌건 두 기록 다 서로서로 잡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왜'와 '일본'이 서로를 잡아 먹은 사건은 언제 터진 걸까요? 신당서에서는 함형 원년인 670년에 사신이 왔다고 했습니다. 사신은 국내 사정을 전한 것일 테니, 이 사건은 적어도 670년 이전일 것입니다. 670년에 일본으로 국호를 바꿨다고 했고, 702년에는 아예 일본국에서 사신이 왔다고 했죠. 그럼 왜와 일본의 전쟁은 670년 전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670년 이전에 왜놈들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2년 뒤인 672년에 임신의 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신의 난은 독립적인 두 세력 사이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천무천황이 조카인 대우천황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죠. 대화 정권의 대화 외부 정복을 아무리 늦게 보더라도 672년까지 끌고 내려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아마 구, 신당서의 말들은 임신의 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좀 멀긴 하지만, 521년에 있었던 반정의 난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대화 정권이 구주 중북부를 '완전히' 정복한 때가 이 때일 거라고 제가 가끔 말씀드리는 사건입니다. 지금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웅략천황 시기에 이곳저곳을 정복하고 다녔다는 말이 있는데, 이 기록이 나중에 천황 명칭에 대해 설명할 때 찾아 볼 도하산(稲荷山)[이나리야마] 고분과 강전선산(江田船山)[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나온 검들의 명문에서 보이는 정황과 대체로 일치하므로, 최초의 군사적 정복은 웅략천황 때, 그 지역을 대화 정권의 직할로 완전히 다스리게 된 때가 바로 반정의 난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일본'이 '왜'를 잡아 먹은 대규모 전쟁의 시기가 바로 웅략천황 또는 521년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죠. 아무튼, 삼국지, 후한서에는 공통적으로 왜놈 소국들의 중주국으로 야마일국(邪馬壹國)이 등장하는데, 야마일국의 왕을 왜왕(倭王) 또는 왜국왕(倭國王)이라 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왜국의 위치는 구주 중북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측부터 도하산 고분, 강전선산 고분

 

 

만약 야마일국을 중심으로 한 왜국 집단이 '구주 정권'이고, 스스로를 '일본'이라 칭하던 사람들이 대화 정권이라 합시다. 반정의 난을 저처럼 해석한다면, 521년에 대화 정권이 구주 정권을 '완전히' 잡아 먹었습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당서, 신당서 기록은 왜가 일본을 잡아 먹었다고 하기도 하고, 일본이 왜를 잡아 먹었다고 하기도 하죠. 하지만 만약 왜인들이 일본을 합병하고 스스로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바꾸었다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중국인들이 이전 왕조를 찬탈한 다음에도 '천자'라 칭하긴 했지만, 나라 이름은 제각기 달랐던 것과 같죠. 승자가 왜 패자의 이름을 따릅니까? 일본이 더 근사해서? 구주 정권이, 즉 왜가 그 때까지 왜라는 국호를 꾸준히 써 왔다면, 왜는 그 자신들에게도 충분히 근사하고 자랑스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구당서, 신당서의 '병탄' 기록이 사실이고, 이것이 521년의 사건을 의미한다면, 아마 일본이 왜를 잡아 먹었다고 할 수 있겠죠. 왜가 일본을 잡아 먹고 국호를 일본이라 고쳤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왜 일본이 왜를 대체했는데도 670년이 되어서야 국호가 바뀌었다고 했을까요? 그 이전까지는 왜가 대 중국 창구를 독점하고 있다가, 일본이 왜의 자리를 찬탈하고나서는 찬탈했다고 보고하기엔 궁색해서, 조공 사절에는 한동안 '왜'를 유지하다가 한 숨 돌릴 때가 되어서야 말을 한 것 아닐까요? 쓰고 보니 제 생각도 비루하긴 마찬가지네요. 저처럼 말만 번지르르한 헛똑똑이 안 되시려면 열심히, 폭 넓게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처럼 고작 기록 몇 줄 가지고 글을 끄적이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적어도 670년에는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것은 분명하고, '일본'이라는 국호는 702년에는 확실하게 중국인들에게도 정착된 것 같습니다. 신라에게도 그랬겠죠. 이 때의 일본이 온전히 우리가 아는 '파시스트' 일본은 아니었을 것이나, 지금까지 그 이름은 내려 오고 있습니다. 천무천황이 조카에게 왕위를 찬탈한 뒤에는 국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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