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남방 국경(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중)

2020. 7. 21. 15:18일본서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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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영토를 분석하려면 크게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필요합니다. 삼국사기의 근초고왕본기에는 369년부터 375년에 이르기까지 근초고왕이 고구려와 어떻게 전쟁을 벌였는지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에는 근초고왕이 '신공황후'와 협력해 어떻게 남부 마한 지역을 정복했는지가 나와 있죠. 두 사료가 담고 있는 내용은 '방위'로써 상반되지만, 이들 정보가 모두 존재함에 따라 우리는 백제 전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의 치세에서 백제의 통치가 어디에까지 미쳤는지를 북방과 남방으로 각각 알 수 있게 됩니다. 북방 국경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를 이용해 당시 백제의 남방 국경에 대해 추론해 보고자 합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53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북방 국경(삼국사기 근초고왕본기 중)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우리가 '삼국'을 칭할 때는 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즉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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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를 통해 근초고왕을 이해하려면, 당시 왜가 어떻게 바다 건너의 백제와 통교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큰 배경은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입니다. 큰 줄거리만 말 하자면 이렇습니다. 중애천황 당시 웅습(熊襲)[쿠마소]이 반란을 일으켜 중애천황과 그 와이프인 신공황후가 함께 웅습을 토벌하러 갔습니다. 웅습은 구주(九州) 중남부에 있던 이민족입니다.

 

 

웅습

 

 

그래서 지금의 복강(福岡)[후쿠오카]에 있는 강일궁(橿日宮)[카시히노미야]에 두 사람이 도착해서 반란을 어떻게 진압할지 논의하려 했는데, 갑자기 신공황후에게 귀신이 씌어 버렸습니다. 귀신은 신공황후를 통해, 웅습을 공격하는 것이 급한 게 아니라, 바다 건너 신라를 공격해야 한다고 뜬금 없이 조언합니다. '상식적'이었던 중애천황은 이 말을 무시하고 웅습을 공격했다가, 공격도 실패하고, 본인도 이듬해 죽어 버립니다. 그리고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이 죽은 뒤 '귀신'의 '유지'를 이어 신라를 공격해 항복시키고, 뒤이어 고구려와 백제에게까지 항복을 받아 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입니다.

 

 

 

 

내용을 정리하며 쓰면서도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사건들은 중애천황 8년, 9년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각각 199, 200년인데, 120년을 더하면 319년과 320년이죠. 역사적으로는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합병한 직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 당시 대화 정권이 과연 신라를 원정하고, 단 번에 항복을 받을 정도의 '국가'였냐고 한다면 저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신라가 세 나라 중 가장 쩌리였다고 하더라도 고작 그 당시 왜놈들에게 나라를 넘길 정도의 바보들인가 하면, 그것도 아닐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삼한 정벌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지금은 근초고왕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신공황후는 세 나라의 항복을 받고, 세 나라를 내관가(內官家), 즉 왜의 실질적 영토라고 선언하고 돌아갔습니다. 일본서기에서 내관가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통치를 어떻게 했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왜 안 나오겠어요? 구라니까 안 나오죠. 가끔 사신들이 왕래했다는 말이 보이긴 하지만요. 그러다 신공황후 46년에 사건이 생깁니다. 왜놈들이 탁순국(卓淳國)에 사자를 파견했다가, 거기서 백제 사람들의 소식을 들은 것이죠.

 

 

卌六年 春三月乙亥朔, 遣斯摩宿禰卓淳國. 於是, 卓淳王末錦旱岐, 告斯摩宿禰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彌州流·莫古三人, 到於我土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 故求道路, 以至于斯土. 若能敎臣等, 令通道路, 則我王必深德君王. 時謂久氐等曰, 本聞東有貴國. 然未曾有通, 不知其道, 唯海遠浪嶮. 則乘大船, 僅可得通. 若雖有路津, 何以得達耶. 於是, 久氐等曰, 然卽當今不得通也. 不若, 更還之備船舶, 而後通矣. 仍曰, 若有貴國使人來, 必應告吾國. 如此乃還. 斯摩宿禰卽以傔人爾波移與卓淳人過古二人, 遣于百濟國, 慰勞其王. 時百濟肖古王, 深之歡喜, 而厚遇焉.(신공황후, 246?+120)

 

卌七年 夏四月, 百濟王使久氐·彌州流·莫古, 令朝貢. 時新羅國調使, 與久氐共詣. 於是, 皇太后·太子譽田別尊, 大歡喜之曰, 先王所望國人, 今來朝之. 痛哉, 不逮于天皇矣. 群臣皆莫不流涕.(신공황후, 247?+120)

 

 

탁순국

 

 

탁순국은 지금의 칠원, 의령 방면으로 추정합니다. 왜놈 사신이 탁순국에 가자, 탁순왕 말금한기(末錦旱岐)가 사신에게 백제에서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라는 사신들을 보내 '일본'과 통교하고 싶어 했었지만, 바다 건너 가 본 적이 없어 그냥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앞에서 백제, 고구려를 내관가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왕래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에 왜놈의 사신이었던 사마숙녜(斯摩宿禰)[시마노스쿠네]는 백제에 사람을 보냈고, 백제의 왕인 초고왕(肖古王)은 사마숙녜의 사신들을 잘 대접해 주었다고 합니다. 초고왕은 이 인편을 통해 왜놈들에게 조공하겠다고 했고, 명년 4월에 초고왕은 구저, 미주류, 막고를 보내 왜놈들에게 '조공'했습니다.

 

일단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초고왕은 근초고왕일까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백제 5대 왕이 바로 초고왕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사람은 13대 근초고왕입니다. 근초고왕과 초고왕은 한자도 같습니다. '近'이 붙고, 안 붙고만 다릅니다. 초고왕의 재위 기간은 삼국사기를 따르면 166년에서 214년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신공황후 46년은 246년이고, 120년을 더하면 366년입니다. 어떻게 보아도 초고왕과는 맞지 않죠. 따라서 여기서의 초고왕은 근초고왕으로 보는 편이 맞겠습니다. 따라서 신공황후 46년, 47년의 기록은 근초고왕이 일본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기사입니다.

 

그런데 조공했다는 말이 끝은 아닙니다. 바로 사건이 생기거든요.

 

 

仍檢校二國之貢物. 於是, 新羅貢物者, 珍異甚多. 百濟貢物者, 少賤不良. 便問久氐等曰, 百濟貢物, 不及新羅, 奈之何. 對曰, 臣等失道, 至沙比新羅. 則新羅人捕臣等禁囹圄. 經三月而欲殺. 時久氐等, 向天而呪詛之. 新羅人怖其呪詛而不殺. 則奪我貢物, 因以, 爲己國之貢物. 以新羅賤物, 相易爲臣國之貢物. 謂臣等曰, 若誤此辭者, 及于還日, 當殺汝等. 故久氐等恐怖而從耳. 是以, 僅得達于天朝. 時皇太后·譽田別尊, 責新羅使者, 因以, 祈天神曰, 當遣誰人於百濟, 將檢事之虛實. 當遣誰人於新羅, 將推問其罪. 便天神誨之曰, 令武內宿禰行議. 因以千熊長彥爲使者, 當如所願. 於是, 遣千熊長彥于新羅, 責以濫百濟之獻物.(신공황후, 247?+120)

 

 

위에서 초고왕이 조공했다는 기사에 바로 이어지는 말입니다. 이 때 백제만 조공한 것이 아니라 신라도 조공했는데, 신라의 조공품은 좋고, 백제의 조공품은 볼품이 없었다는 말이죠. 왜 그랬는지 물어 보니 백제인들이 길을 잃어 사비신라(沙比新羅)에 갔다가 감금당하고, 조공품을 바꿔치기 당했다고 합니다. 즉, 원래 백제의 조공품이 지금 신라의 좋은 조공품이고, 원래 신라의 조공품이 지금 백제의 볼품 없는 조공품이라는 말입니다. 이 때문에 왜놈 조정에서는 신라를 공격해 '응징'하기로 합니다. 우리가 찾는 남부 마한과 관련된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2년 뒤인 신공황후 49년 3월에 백제와 왜놈들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卌九年 春三月, 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 奉上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沙沙奴跪[是二人, 不知其姓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 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신공황후, 249?+120)

 

 

왜놈들은 처음에 황전별(荒田別)[아라타와케]과 녹아별(鹿我別)[카가와케]을 장군으로 삼았습니다. 백제군과는 탁순국에서 만나기로 했죠. 맥락상 원래 백제군은 사백개로(沙白蓋盧)가 지휘하였으나, 신라를 치기에 군대가 모자라다고 하여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를 백제에서 증원한 것 같습니다. 사백개로, 목라근자, 사사노궤는 탁순국에서 황전별, 녹아별과 합류했겠죠. 특이한 것은 문맥상 사백개로, 목라근자, 사사노궤는 모두 백제인인 것 같은데, 목라근자만 유독 백제의 장군이라고 명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木羅斤資者百濟將也) 왜 이렇게 혼란스럽게 기술해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라근자의 아들인 목만치(木滿致) 때문에 일부러 명시해 둔 것일까요?

 

백제와 왜는 탁순국에 집결한 뒤, 먼저 신라를 깨뜨리고, 이어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일곱 나라를 평정했습니다. 탁순국은 원래 백제와 왜 양측에 모두 우호적이었던 것 같은데 왜 공격했을까요? 여기서 비자발은 창녕이 아닐까 싶습니다. 창녕은 삼국사기에서 비자화(比自火) 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고 했거든요. 남가라는 김해의 금관가야입니다. 탁국은 영산이나 경산으로 보는데, 저는 영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라는 함안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아나가야(阿那加耶)라고 하고, 삼국지 위지에는 안야국(安邪國)으로 나옵니다. 다라는 합천으로 봅니다. 나중에 신라의 대량주(大良州)가 됩니다. 끝으로 가라는 고령의 대가야(大伽倻)를 의미할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가라, 다라, 비자발, 탁국, 탁순, 안라, 남가라

 

 

생각해 보면 상기한 지명들은 모두 경상도 중남부 지역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아는 변진 또는 변한 지역이죠. 다른 이야기이지만, 포상팔국의 난 때 금관가야는 경남 중부의 다른 가야들에게 공격을 받았다가 신라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망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포상팔국은 골포(骨浦) 등 몇 나라이지만, 이들의 이름은 백제와 왜의 공격을 받은 일곱 나라와 겹치지 않습니다. 또한 포상팔국의 난은 나해왕 때 사건으로 209년의 일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한지의 문제가 있겠으나, 일본서기의 사건과는 양상이 전혀 달라 아마 같은 사건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두 사건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명목상 백제와 왜의 연합 공격 목표는 신라였으니까요.

 

 

 

그런데 백제와 왜의 원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갑자기 서쪽으로 가서 남부 마한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 四邑, 自然降服. 是以, 百濟王父子及荒田別·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今云州流須祇.]. 相見欣感. 厚禮送遣之. 唯千熊長彥與百濟王, 至于百濟國, 登辟支山盟之. 復登古沙山, 共居磐石上. 時百濟王盟之曰, 若敷草爲坐, 恐見火燒. 且取木爲坐, 恐爲水流. 故居磐石而盟者, 示長遠之不朽者也. 是以, 自今以後, 千秋萬歲, 無絶無窮. 常稱西蕃, 春秋朝貢. 則將千熊長彥, 至都下厚加禮遇. 亦副久氐等而送之.(신공황후, 249?+120)

 

 

연합군은 고해진(古奚津)으로 갔다가 남만침미다례(南蠻忱彌多禮)를 무찌르고(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만은 남쪽 오랑캐를 의미하는데, 누구 보다 진정한 '남만'인 왜놈들이 이런 말을 썼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백제의 남쪽에 있으니 백제 입장에서 그렇게 부른 것 같습니다. 고해진은 해남이나 강진으로 봅니다. 침미다례에 대해서는 이설들이 좀 있습니다. 강진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삼국지 위지의 신미국(新彌國)으로 보아 영산강 하류 지역으로도 봅니다. 아니면 아예 제주도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도의 경우는 탐라라는 다른 명칭이 나오기 때문에 아마 아닐 것 같습니다. 저는 나주, 영암, 해남 일대가 아닐까 합니다. 이 침미다례가 그러면 따로 기사가 있을 정도로 크거나 번성한 나라였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신미국과 침미다례가 같다고 생해 봅시다. 그러면 단서를 좀 엉뚱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乃出華 爲持節都督幽州諸軍事領護烏桓校尉安北將軍 撫納新舊戎夏懷之 東夷馬韓新彌諸國 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並遣使朝獻 於是遠夷賓服 四境 無虞 頻歲豐稔 士馬強盛(진서 열전제6 위관장화, 장화)

 

 

장화를 보내 '지절 도독 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안북장군'으로 임명해 보내니, 즉 유주로 보내니, 주변 '오랑캐'들이 귀부해 왔다는 말입니다. 그런 '오랑캐' 중 대대로 귀부해 오지 않던 마한의 신미제국(新彌諸國)도 있었습니다. 이 기사의 요점은 장화가 짱짱 정치를 잘했다는 것이지만, 여기에 바로 '신미제국'이 나온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신미제국은 신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를 의미할 텐데, 이것은 이 나라들이 함께 서진에 조공했다는 말이고, 그 중 신미국이 대표로 언급된 것은 신미국이 그 주변 여러 나라 중 가장 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기사 자체에는 연도가 나와 있지 않지만, 다른 기사들과 교차하면 적어도 282년이나 그 이후 시점입니다. 근초고왕과 신공황후의 원정은 120년을 더하면 369년이므로, 일본서기를 믿는다면 꾸준히 마한 잔존 세력이 영산강 하류에서 꾸준히 세력을 유지하다가 350~360년 전후로 백제에게, 혹은 백제와 왜에게 군사적으로 박살나 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침미다례가 무너지자, 백제에서는 근초고왕과 왕자인 귀수(貴須)가 군대를 거느리고 연합군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귀수는 말할 것도 없이 나중의 근구수왕이겠죠. 그러자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의 네 고을이 스스로 항복해 왔다고 합니다. 이후 연합군은 의류촌(意流村)에 모여 함께 쉬었습니다.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는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맥락상 전라도 중서부 또는 전라북도 남부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들이 항복한 것은 침미다례가 무너진 결과일 테니까요. 일반적으로는 비리는 전주, 벽중은 김제, 포미지, 반고는 나주 및 반남 일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침미다례가 전라도 남서부 마한 세력의 구심점이었다면, 침미다례가 무너지고 나머지 마한 세력이 백제에 복속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의류촌은 나중의 주류성인데, 부안의 위금암산성으로 보통 봅니다.

 

 

우측 상단에서부터 비리, 벽중, 의류촌, 포미지, 반고, 침미다례, 고해진

 

 

양국은 벽지산(辟支山)에서 회맹하고, 다시 고사산(古沙山)에서 맹약했습니다. 벽지산은 앞의 벽중처럼 김제로 보고, 고사산은 정읍의 고부로 봅니다. 바로 정읍의 고부가 원래 고사부리(古沙夫里)였기 때문입니다. 지도에 보이는 산 두개가 각각 벽지산과 고사산을 추정한 것입니다. 이 두 차례의 맹약에서 근초고왕은 '천추만세' 동안 '서번'이라 칭하며 조공하겠다고 왜에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自今以後千秋萬歲無絶無窮常稱西蕃春秋朝貢) 물론 믿을 수 없습니다. 믿으면 골룸입니다.

 

이듬해 소식을 들은 신공황후는 또 여기에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다사성(多沙城)을 백제에게 더해 '하사'해 주기로 했습니다.

 

 

다사성

 

 

夏五月, 千熊長彥·久氐等, 至自百濟. 於是, 皇太后歡之問久氐曰, 海西諸韓, 旣賜汝國, 今何事以頻復來也. 久氐等奏曰, 天朝鴻澤, 遠及弊邑, 吾王歡喜踊躍, 不任于心, 故因還使, 以致至誠. 雖逮萬世, 何年非朝. 皇太后勅云, 善哉汝言. 是朕懷也. 增賜多沙城, 爲往還路驛.(신공황후, 250?+120)

 

 

다사성은 하동으로 봅니다. 하동은 섬진강 하구 지역이고, 따라서 가야 제국 입장에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실제로 백제가 이 지역을 확보한 것은 무령왕이나 성왕 때일 것이기 때문에, 다른 기록들은 차치하더라도 이 부분은 믿을 수 없습니다. 나중의 사실을 가지고 윤색했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구라를 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후 2년 뒤인 신공황후 52년에 백제는 왜에게 칠지도를 하사합니다. 다시 3년 뒤인 신공황후 55년엔 근초고왕이 죽습니다. 120년을 더했을 때,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서 근초고왕이 죽는 연도는 모두 375년으로 같습니다. 우리가 일본서기 기사를 덮어 놓고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죠.

 

 

 

이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완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 내용이 한국과 왜놈들 중 누구에게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떠나, 덮어 놓고 뻔히 구라를 치려는 대목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신공황후 자체도 실존한 사람이 아니라 전설 속에서 가공된 사람이라고 하는 판에 신공황후기를 어떻게 곧이 곧대로 믿겠습니까? 하지만 신공황후기에는 백제가 남부 마한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고, 무엇 보다 침미다례, 즉 신미국 같은 다른 나라들이 백제에게 언제 꺾였는지가 기술되어 있으며, 진서에 나와 있는 조공 연대와 비교해 보면, 그 성몰의 시점이 정황상 잘 맞아 떨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를 들어 백제에게 당한 이후에 조공했다는 것과 같이 모순적인 정황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백제와 왜가 연합해 남부 마한을 공략한 사실은 아마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제의 입장에서 이 전황이 어땠는지를 상세하게 알 수는 바는 아쉽지만,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남부 마한을 공략했다는 말이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에 이 기록에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신공황후본기에 나와 있는 남부 마한에 대한 정황이 대체로 사실이라면, 이 때 백제는 남부 마한을 완전히 통치하는 데 성공했을까요? 그렇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근초고왕 이전에 마한 남부 지역을 백제가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아주 짧게 하나 남아 있습니다.

 

 

八月, 修葺圎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삼국사기 시조 온조왕본기, 18)

 

 

온조왕 때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는 말입니다. 원산과 금현은 당시 백제가 정복했다는 아산 천안, 진천 방면의 마한 중부 지역입니다. 그런데 고사부리성은 그 보다 남쪽인 정읍의 고부입니다. 근초고왕과 왜군이 맹약했던 두 산 중 하나가 고사산이었죠? 고사산도 정읍의 고부로 봅니다. 온조왕본기의 해당 기사를 믿을 수 있다면, 이미 온조왕대에 백제는 아산에서 훨씬 남하해 고사부리에도 축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남부 마한의 주도권이 침미다례에 있었던 것처럼, 중부 마한의 주도권이 온조왕이 무너뜨린 아산 지역이었다면, 좀 멀긴 하지만 고부가 그 영향력이 끼쳤던 남쪽 하한선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사부리성은 온조왕대에는 남부 마한 세력에 대한 최전선 방어 기지이자, 남부 마한을 정복하기 위한 전초 기지였을 것입니다.

 

 

고사부리성

 

 

하지만 이후 백제본기에서는 남부 마한을 어떻게 정복하니 마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고, 대개 신라와 괴산 및 경상북도 서북부에서 전쟁을 벌였다는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기 때문에 마한 남부는 한동안 백제의 관심사 밖이었던 것 같습니다. 혹은, 사건이 있었는데 기록이 없었거나요. 그렇게 '방치'되어 있던 남부 마한은 마침내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백제와 왜의 연합군의 원정으로 백제에게 군사적으로 병탄되었으며, 이 때의 지배는 아마 군사적인 복속의 형태로 마무리되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이후에는 신미국의 예처럼 중국에 독자적으로 조공 사절을 보냈다는 남부 마한 국가들이 등장하지 않고, 삼국사기에도 나오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근초고왕이 말년에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것, 그리고 이후 왕들 역시 고구려와 격렬하게 전쟁을 벌인 것과 같이, 백제의 주요 관심사는 북방에 있었고, 남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제가 이 지역을 완전히 지배하고 통치하게 된 것은 웅진, 사비로 남천한 이후인 동성왕, 무령왕, 성왕 이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령왕, 성왕 시기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본기에서처럼 백제에게 어떠어떠한 땅을 주었다는 말이 많은데, 그게 그 증거겠죠. 실제로는 백제가 가야 제국에게서 빼았고, 남부 마한을 개발한 것이겠지만요.

 

 

 

 

정리하자면, 근초고왕대의 북방 국경이 고구려 때문에 훨씬 명확하고, 팽팽했던 것과 달리, 남방 국경은 아주 느슨했던 것 같습니다. 통치 보다는 군사적인 지배, 복속을 성공시켰던 것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검증해 볼 사료가 일본서기밖에 없어서 더 정확한 내막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온조왕본기의 기록이 맞다면, 근초고왕 시대의 백제의 실질 통치 영역은 정읍이나 전주 이북으로 한정될 것 같습니다. 전라남도도 서부는 평평하고, 동부에는 산이 많으니, 동부 지역에는 가야계 세력의 입김이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서부는 상대적으로 백제가 다스리기 쉬웠을 것인데, 만약 군사적인 복속으로 끝나지 않고 근초고왕 시기에 이미 행정적으로 통치가 이뤄졌었다면, 전라남도 서부의 평야 지대 중심으로 백제령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끝으로 조금만 더 생각해 봅시다. 혹시 남부 마한을 왜군이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백제만의 힘으로 정복한 것인데, 일본서기에서 왜군이 다 해 먹은 거라고 윤색한 것이 아닐까요? 일단 저는 왜군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던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공황후 52년에 근초고왕이 왜에 칠지도를 보냈다는 말이 신공황후본기에 남아 있습니다.

 

 

五十二年 秋九月丁卯朔丙子, 久氐等從千熊長彥詣之. 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 及種種重寶.(신공황후, 252?+120)

 

 

그런데 칠지도가 지금도 진짜 남아 있다는 것이죠. 아주 골 때립니다. 명문도 보이고요. 만약 칠지도나 칠자경이 남아 있지 않다면 신공황후본기의 왜군 기록은 전부 구라고, 다 백제가 한 거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칠지도가 남아 있잖아요. 따라서 왜군은 백제를 도왔을 겁니다. 왜군의 역할과 백제의 역할 중 어느 것이 더 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백제가 주도적이고, 왜가 보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제의 전쟁이고, 이 이후 남부 마한은 백제령으로 들어갔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다른 자료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백제와 왜가 접촉하고, 왜가 백제를 '대부님'처럼 모시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우호적이고, 상식적으로 백제가 우위에 있었을 텐데, 어느 정도 우위에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료가 너무 부족합니다. 정리하자면, 이 전쟁에 왜는 분명 참전했고, 어떤 식으로든 자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남부 마한 공격 이전 신라와 가야 공격 기사입니다. 이 기사가 맞다면 백제, 왜 연합군은 경상도 중남부 내륙 지방을 휩쓸고 다녔고, 동시에 신라까지 병탄해 버린 것이 됩니다. 일단 탁순국은 분명 처음 근초고왕과 신공황후 사이를 '중매'해 주던 역할로 나왔습니다. 백제군과 왜군이 합류한 곳이 탁순국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연합군이 공략한 가야 7국에는 탁순국도 포함됩니다. 내용이 왜 이렇게 모순적일까요? 또한, 당대 가야 제국들과 연합군이 전쟁을 벌일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신라는 일본서기에서 동경의 대상이자 적대의 대상이기 때문에 아무 이유 없이 공격당한다는 기사가 많이 있지만, 가야는 그렇지 않거든요. 이 기사에서도 신라를 공격한다는 명분은 '조공품 부실'과 백제 사신을 억류했다는 것으로, 비록 허구일지언정 분명하지만, 가야를 왜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근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적혀 있는 일본서기에 중요한 전쟁 명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혹시 가야 7국 공격은 아주 작은 일을 부풀려 적었거나, 마한 남부 원정에 왜군이 '동원'된 것을 합리화 하려고 디딤돌처럼 만들어 놓은 이야기 아닐까요? 저는 그래서 7국 원정 기사가 아주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설을 써 보는 건 어떨까요? 백제가 남부 마한과 가야 제국을 포괄하는 한반도 남부 지역을 병탄하기 위해, 백제의 힘만이 아니라 외부 세력을 끌어 들이기로 하여 왜군이 참전한 것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즉, 명분은 차치하고 일방적인 정복 전쟁이었다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남부 마한 지역이 이후에도 백제령으로 남은 것처럼, 가야 제국이 백제령으로 남았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아주 확실하지 않지만 정황이 있긴 합니다.

 

 

廿五年, 百濟直支王薨. 卽子久爾辛立爲王. 王年幼, 木滿致執國政. 與王母相婬, 多行無禮. 天皇聞而召之[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 討新羅時, 娶其國婦, 而所生也. 以其父功, 專於任那. 來入我國, 往還貴國. 承制天朝, 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朝聞其暴召之.].(응신천황, 294?+120)

 

 

응신천황 25년입니다. 백제의 직지왕이 죽어 그 아들인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말입니다. 직지왕은 전지왕으로 봅니다. 그런데 구이신왕이 어려,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휘어잡고 왕모와는 사통했다고 합니다. 이에 응신천황이 목만치를 '소환'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에 이어지는 백제기 주석을 보면, 목만치는 바로 목라근자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목만치가 목라근자의 공을 등에 업고 임나에서 전횡을 벌였다고 합니다.(以其父功專於任那) 목만치가 임나에서 깽판을 치려면, 목만치가 임나에서 지배자적인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임나는 일본서기에서 가야 제국을 이르는 말이므로, 만약 이 기록이 맞다면, 근초고왕과 신공황후 시기의 정복 전쟁으로 가야 제국이 백제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만치가 가야에 있을 수 있는 것이고요. 좀 더 소설을 써 보면, 목라근자는 해당 전쟁에서 아주 큰 공을 세웠거나, 아니면 자신이 주도해 왜와의 대화 창구를 열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야 지역이 마치 왜의 '임나 관가'인 것처럼 항상 기술해 두었지만, 우리가 근초고왕과 신공황후 당시의 정세를 생각해 본다면, 숙이면 백제에 숙였지, 왜놈들에게 숙였을 리 없겠죠.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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