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애천황과 신공황후의 웅습 토벌(일본서기 중애천황본기 중)

2020. 7. 24. 14:55일본서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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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얼마 전에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를 통해, 근초고왕 재위 중 백제가 왜놈들과 연합해 마한 남부 및 경상도 중남부 지역을 공략했고, 따라서 당시 백제의 남방 국경이 어떠어떠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지금의 대판(大阪)[오사카]이나 경도(京都)[쿄토] 주변에서나 비실대고 있었을 대화(大和) 정권이 어떻게 바다 건너 백제와 접점이 있을 수 있는지, 혹은 원군이 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저는 같은 출전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을 그 근거로 들었습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54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남방 국경(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중)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영토를 분석하려면 크게 삼국사기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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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 '근거'라는 것은 문헌에 나오는 기록적 근거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그 이전까지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 같은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삼한 또는 삼국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중애천황이 죽고 신공황후가 섭정으로 집권하고나서 신라를 정벌하느니, 백제와 연합하느니 하는 말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로 왜놈들이 지속적으로 '임나' 및 백제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모습이 일본서기 자주 나오죠. 하지만 시기상, 그리고 주변 정황상 당시 대화 정권이 그런 '짓'을 할 여력은 없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만난 적도 없고, 그래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해외의 나라를 단기간에 정복한다는 것이 말이 될 수가 없죠. 민족 단위의 대이동이 아닌 이상 불가능합니다. 바이킹들도 그런 짓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서기는 신공황후는 물론, 그 이후로도 한동안 일본서기 기록들을 역사 기록으로 취급할 수 있네, 마네 하는 '역사서'이므로, '역사 시대' 이전 역사를 대화 정권에 끼워 맞춰 날조하고, 끼워 맞추다 보니 사건이 순차적이 아니라 갑작스레 진행되고,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온 게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즉, 백제 및 삼한과의 교류를 설명해야 하는데, 중애천황까지의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갑작스럽게 '삼한 정벌'을 그 사이의 징검다리로 넣어 둔 게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 '삼한 정벌'은 그 강호 시대에 들어 일본서기, 고사기가 다시 연구되면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가 되기도 하죠. 우리나라에 어떤 식으로든 끼친 해악이 아주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 중애천황본기에는 삼한 정벌의 '사료적 근거'로 중애천황의 웅습 토벌 사건이 등장합니다. 개략적으로만 말 하면, 웅습을 토벌하러 갔다가 신공황후가 귀신에 씌이고, 중애천황이 귀신의 조언을 안 들었다가 현지에서 '요절'해 버리고, 신공황후는 이에 섭정으로써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삼한을 정벌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삼한 정벌의 전 단계인 웅습 토벌에 대해 말을 해 보려 합니다. 정황들을 따져 타당성이나 모순, 만약 이것을 재구성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따져 보는 것입니다. 제 수준이 일천하기 때문에 고작 일본서기를 들어 따져 볼 수밖에 없겠으나, 그냥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신공황후는 왜식으로 읽으면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이라고 합니다. 일본서기상 14번째 천황인 중애천황의 와이프입니다. 중애천황 2년 정월에 '황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공황후의 삶이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황후로 책봉된 바로 그 해 3월에 웅습(熊襲)[쿠마소]이 반역해(叛) '조공'을 바치지 않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중애천황은 웅습을 토벌하려 했는데, 상식적인 지식인이었던 중애천황은 멀리 원정 가 있는 동안 와이프가 외로울까봐 이 전쟁에 신공황후도 불러 들였습니다.

 

 

三月癸丑朔丁卯. 天皇巡狩南國. ... 當是時. 熊襲叛之不朝貢. 天皇於是將討熊襲國. ... 勅皇后曰. 便從其津發之. 逢於穴門.(중애천황, 193?+120)

 

 

여기서 웅습은 지금의 구주(九州)[큐슈] 중남부 지역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 사람들을 대판의 대화인들과 다르게 취급하는 기술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는 저는 잘 모르겠네요. 구주 중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웅본(熊本)[쿠마모토]의 이름이 '熊本'인 것이 그런 이유 때문 아닐까요?

 

그런데 웅습의 '반역'에도 문제가 좀 있습니다. 사실 구주 지역은 늦게 보면 계체천황 시기인 521년이 되어서야 대화 정권의 통치 아래 들어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축자국조(筑紫國造)였던 반정(磐井)이 계체천황 정권에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반란은 애석하게도 왜놈들에게 진압되었으나, 반정의 배후에 신라가 있다는 정황이 보이는 등,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통상적으로는 이 시기 이후 대화 정권이 구주 중북부를 완전히 지배하게 됐다고 봅니다. 일본서기에는 시종일관 '반란'이라고 적혀 있지만요. 정작 대화 정권의 '시조'인 신무천황은 구주 동남부에서 '대업'을 시작했으나, 이후 12대 경행천황 때 일본무존(日本武尊)[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이 다시 '정복'하는 등, 대화 정권에 속해 있지만 사실 별개의 땅인 것처럼 취급하는 기술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같은 맥락에서, 중애천황 2년의 웅습 배신 기사도, 사실은 배신이고 반란이고 자시고 할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주아주 좋게 봐 주면 대화 정권과 구주 토착민들 또는 구주 정권 사이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르게 보면 구주에 있던 대화와는 별개인 정권에 중남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주어만 대화 정권으로 바꿔서 이런 식으로 적어 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엔 대화 정권의 영향력이 이 때 구주나 그 근방까지 미쳤을 리 없으므로, 구주 정권 내부의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웅습

 

 

 

어쨌거나 중애천황과 신공황후는 풍포진(豐浦津)[토유라노츠]을 거쳐 복강(福岡)[후쿠오카]의 강일궁(橿日宮)[카시히노미야]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중애천황은 당시 대판 남부 지역을 순수(巡狩)하는 중이었고, 신공황후는 왜인지 저 북쪽 각록(角鹿)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천황과 황후는 각각 길을 떠나 나중에 합류하게 됩니다.

 

 

빨강은 신공황후의 이동 방향 / 파랑은 중애천황의 이동 방향 / 노랑은 우측부터 각록, 정전문, 풍포진, 강일궁

 

일본서기에는 이 때 천황과 황후의 여정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습니다. 특히 신공황후가 신이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夏六月辛巳朔庚寅. ... 到渟田門. 食於船上. 時海鰤魚多聚船傍. 皇后以酒灑鰤魚. 鰤魚卽醉而浮之. 時海人多獲其魚而歡曰. 聖王所賞之魚焉. 故其處之魚. 至于六月常傾浮如醉. 其是之緣也.(중애천황, 193?+120)

 

秋七月辛亥朔乙卯. 皇后泊豐浦津. 是日. 皇后得如意珠於海中.(중애천황, 193?+120)

 

 

특히 이 두 사례가 그렇습니다. 6월에 신공황후가 정전문(渟田門)[누타노미나토]에 이르자 배 근처에 도미들이 많이 모였다고 합니다. 황후가 이를 보고 도미에게 술을 붓자 도미가 술에 취해 떠오르니 어부들이 이를 잡으며 성왕이 상으로 내린 물고기라고(聖王所賞之魚焉)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지역에 이러이런 전설이 '지금'도 내려온다고까지 말을 합니다. 7월에는 신공황후가 풍포진에 도착했는데, 바닷속에서 여의주를 얻었다고(如意珠於海中) 합니다. 일본서기에서 보통, 행로에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고, 그 전설이 지금까지 내려 온다는 말은 주로 천황에게 붙는 수사입니다. 뒤에 나오겠지만, 사실 중애천황본기에서 중애천황은 신의 말을 듣지 않는 우매한 사람으로 나오고, 신공황후야말로 신의 뜻을 받들어 왜를 이끌 수 있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사실 신공황후는 '삼한 정벌'이라는, 왜사 이래 '최고의 업적'을 달성했고, 그 이후에도 섭정으로 반백 년이 넘게 집권했으며, 섭정이면서 본기까지 일본서기 안에 떡하니 있는 사람이니, 신통하고 신이하다고 띄워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기록이 중애천황 2년이었던 것에 반해, 다음 기록은 갑자기 중애천황 8년으로 6여 년이나 건너 뛰어 버립니다.

 

 

八年 春正月己卯朔壬午. 幸筑紫. 時岡縣主祖熊鰐. 聞天皇之車駕. 豫拔取五百枝賢木. 以立九尋船之舳. 而上枝掛白銅鏡. 中枝掛十握釰. 下枝掛八尺瓊. 參迎于周芳沙麽之浦而獻魚鹽地. 因以奏言. 自穴門向津野大濟爲東門. 以名蘢屋大濟爲西門. 限沒利嶋. 阿閇嶋爲御筥. 割柴嶋爲御甂[御甂. 此云彌那陪.]. 以逆見海爲鹽地. 旣而導海路. 自山鹿岬. 廻之入崗浦. 到水門御船不得進. 則問熊鰐曰. 朕聞. 汝能鰐者有明心以參來. 何船不進. 熊鰐奏之曰. 御船所以不得進者. 非臣罪. 是浦口有男女二神. 男神曰大倉主. 女神曰菟夫羅媛. 必是神之心歟. 天皇則禱祈之. 以挾抄者倭國菟田伊賀彦爲祝令祭. 則船得進. 皇后別船自洞海[洞. 此云久岐.]入之. 潮涸不得進. 時熊鰐更還之. 自洞奉迎皇后. 則見御船不進. 惶懼之. 忽作魚沼, 鳥池. 悉聚魚鳥. 皇后看是魚鳥之遊而忿心稍解. 及潮滿卽泊于崗津. 筑紫伊覩縣主祖五十迹手. 聞天皇之行. 拔取五百枝賢木. 立于船之舳艫. 上枝掛八尺瓊. 中枝掛白銅鏡. 下枝掛十握釰. 參迎于穴門引嶋而獻之. 因以奏言. 臣敢所以獻是物者. 天皇如八尺瓊之勾以曲妙御宇. 且如白銅鏡以分明看行山川海原. 乃提是十握釰平天下矣. 天皇卽美五十迹手曰伊蘇志. 故時人號五十迹手之本土. 曰伊蘇國. 今謂伊覩者訛也.(중애천황, 199?+120)

 

 

중애천황 8년 정월 기록입니다. 길지만 제게 필요한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중애천황과 신공황후가 각각 마침내 축자(筑紫), 즉 구주에 이르렀는데, 그 지역 토호인 웅악(熊鰐)[와니]이라는 사람이 둘을 지극정성으로 잘 대접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배가 나아가지 않아 그 지역 신에게 제사도 지내고, 이것저것 하지만, 이런 부류의 기록들은 일본서기 안에 아주 많이 있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다만 웅악을 강현주(岡縣主)[워카노아가타누시]의 선조라고 했는데, 여기서 강현주라는 것은 일본서기가 작성될 때인 8세기 초엽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말은 아마도 8세기에 일본서기를 정리하면서 그 당시 귀좇들의 선조를 끼워 맞추고, 날조하는 작업 때문에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술된 사람들이 일본서기 안엔 많은데, 그 '선조'들의 후손들이 8세기까지 전혀 교체되지 않고 남아 있을 리도 없고, 그 계승 과정도 아주 불분명하니까요. 대부분 구라일 것 같습니다.

 

 

6년 거리

 

 

또 하나 이상한 점은, 풍포진에 도착한 이후 축자로 건너 오는데 왜 6년이나 걸렸나는 것입니다. 연대를 일부러 길게 하려고, 즉 역사 연대를 올리려고 일부러 엿가락처럼 늘리다가 실수한 것 아닐까요? 애초에 이 시기 기록들은 연대를 곧이 곧대로 믿는 게 아니라 2갑자인 120년을 더한다느니, 3갑자인 180년을 더한다느니 해야 연대가 삼국사기와 일치하거나 비슷합니다.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풍포진에서 강일궁까지는 멀지 않기 때문에, 조각배로 가도 표류하면 표류했지 몇 달 걸리지 않을 거거든요.

 

 

 

어쨌거나 길고 지리멸렬한 여정 끝에, 중애천황과 신공황후는 모두 강일궁에서 만났습니다. 둘은 강일궁에서 웅습을 어떻게 토벌해야 할지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공황후에게 귀신이 씌여 버립니다.

 

 

 

 

秋九月乙亥朔己卯. 詔群臣以議討熊襲. 時有神託皇后而誨曰. 天皇何憂熊襲之不服. 是膂完之空國也. 豈足擧兵伐乎. 愈茲國而有寶國. 譬如處女之睩. 有向津國. 眼炎之金銀彩色多在其國. 是謂栲衾新羅國焉. 若能祭吾者. 則曾不血刃. 其國必自服矣. 復熊襲爲服. 其祭之. 以天皇之御船及穴門直踐立所獻之水田名大田. 是等物爲幣也.(중애천황, 199?+120)

 

天皇聞神言. 有疑之情. 便登高岳遙望之. 大海曠遠而不見國. 於是. 天皇對神曰. 朕周望之. 有海無國. 豈於大虛有國乎. 誰神徒誘朕. 復我皇祖諸天皇等盡祭神祇. 豈有遺神耶.(중애천황, 199?+120)

 

時神亦託皇后曰. 如天津水影押伏而我所見國. 何謂無國. 以誹謗我言. 其汝王之. 如此言而遂不信者. 汝不得其國唯今皇后始之有胎. 其子有獲焉. 然天皇猶不信. 以强擊熊襲. 不得勝而還之.(중애천황, 199?+120)

 

九年 春二月癸卯朔丁未. 天皇忽有痛身. 而明日崩. 時年五十二. 卽知. 不用神言而早崩[一云. 天皇親伐熊襲中賊矢而崩也.].(중애천황, 200?+120)

 

 

다 따로 인용했는데, 사실 모두 이어지는 기사입니다. 중애천황 8년의 9월입니다. 마지막 기사도 8년 9월에서 바로 이어지는 기사로, 이듬해인 중애천황 9년 2월 기사죠. 신공황후에게 씌인 귀신은 웅습 같은 것을 칠 게 아니라, 바다 건너에 있는 저금신라국(栲衾新羅國)을 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금신라국은 당연히 신라겠죠? 또한 귀신은 저금신라국에는 금, 은, 비단이 넘치니, '처녀의 눈썹' 같다고 했습니다. 아름답고 탐낼 만하다는 말일 것 같습니다. 왜 귀신이 하필 이렇게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일단 공격하라고 해야 하니까 매력적으로 보여야겠습니다. 볼품 없다면 뭐하러 공격하려고 하겠어요. 또한, 신라가 부럽다는 열등감 또는 적대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서기가 만들어진 시기가 바로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탁발부까지 이겨 버린 상황이었으니, 그 동안 백제를 등에 업고 깝치던 왜놈들은 기가 많이 죽어 있었을 거거든요.

 

그런데 '상식적인 지식인'인 중애천황은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합니다. 강일궁에서 바다 건너를 처다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죠. 결국 중애천황은 직접 바다를 보아도 아무 나라도 보이지 않는데(朕周望之有海無國) 무슨 말이냐, 왜 황실의 천황들이 이미 모든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이제 와서 제사를 올리지 않은 신이 있다고 하니(復我皇祖諸天皇等盡祭神祇豈有遺神耶) 이것은 또 무슨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러자 귀신은 다시 황후에게 씌여, 줘도 못 먹는다고 중애천황을 비난하고, 중애천황은 저금신라국을 얻지 못할 것이라며 저주했습니다. 다만 신공황후가 임신을 했으니, 그 아이가 비로소 신라를 얻게 되리라고 하고 사라집니다.

 

상식적인 중애천황은 귀신의 저주를 무시하고 원래 계획처럼 웅습을 공격했지만 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갑자기 병을 얻어 죽고 말죠. 52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중애천황이 죽은 이유를 신공황후에게 씌인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혹은, 웅습을 공격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伐熊襲中賊矢而崩也)

 

 

 

중애천황이 사망한 것에는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가 있습니다. 일단 중애천황은 중애천황 이전 기타 천황들에 비해서 수명이 아주 짧습니다. 52살이면 당시에 그럭저럭 살다 간 게 아닌가 싶지만, 일본서기에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일본서기는 고의로 왜놈들의 역사 연대를 늘리기 위해 조미료를 뿌린 책입니다. 신무천황에서 계체천황까지의 수명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호 일본서기상 대수 나이
신무천황 1 127
수정천황 2 84
안녕천황 3 68
의덕천황 4 77
효소천황 5 114
효안천황 6 137
효령천황 7 128
효원천황 8 116
개화천황 9 111
숭인천황 10 120
수인천황 11 138
경행천황 12 141
성무천황 13 107
중애천황 14 52
신공황후 응신천황의 섭정 100?
응신천황 15 102
인덕천황 16 143
이중천황 17 70
반정천황 18 75
윤공천황 19 78
안강천황 20 56?
웅략천황 21 62
청녕천황 22 41
현종천황 23 38
인현천황 24 50
무열천황 25 19
계체천황 26 67

 

 

수정천황, 안녕천황, 의덕천황, 중애천황을 제외하면, 1대 신무천황부터 16대 인덕천황까지, 섭정이었던 신공황후를 포함해서 모두 100살이 넘어 죽었습니다. 요즘 대구가 '메디시티, 메디시티' 꼴값을 떠는데, 대구 시민 평균 수명 보다 훨씬 길죠? 하지만 제외한 수정, 안녕, 의덕천황도 모두 70여 살이 넘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141살을 살았다는 경행천황의 재위 연도는 일본서기 기준으로 하면 71년에서 130년까지입니다. 우리 기준으로 하면 마, 변, 진한 소국들이 아직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을 때죠. 그런데 그런 시대에 141살을 산다고요? 그런데 그 중 홀로 중애천황만 52살로 '단명'했습니다. 중애천황의 수명은 나름 현실적이지만, 천황의 수명이 중애천황처럼 현실감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이중천황이나 안강천황까지는 내려 가야 합니다. 일본서기 기준으로, 이중천황과 안강천황의 재위 연도는 각각 400년에서 405년, 531년에서 535년입니다. 즉, 적어도 5세기나 6세기까지는 가야 일본서기 기록이 '역사 기록'으로써 상식적인 이해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역사 연대를 높이려고 무리하게 없는 사실을 날조하려 하니까 그렇습니다. 아예 지어내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 전설, 신화 등등 모든 것을 다 집약해서 소설을 써야 하는데, 그래도 수백 년의 간격을 메우기는 힘들었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나중 사건을 옛날에 일어난 것처럼 쓰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비슷한 사건이 수백 년 시간 차이를 두고 여러 번 터지기도 하며, 아예 없는 사실을 날조하기도 하고, 주변 나라들과 연대가 잘 안 맞거나 맞더라도 120년, 180년을 더해야 하는 등 엉망이 됩니다. 중애천황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중애천황은 '요절'이라고 할 정도로 당대 천황들 중에서는 단명했고, 그 죽은 이유도 중애천황본기에 직접 귀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애천황 자체도 실존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전통적 가치관에 '역사'를 끼워 맞추려 하니, 신의 뜻을 받아 잇는 신공황후는 띄워 줘야 하고, 그걸 무시하는 중애천황은 신의 뜻으로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중애천황이 죽고나서야 신공황후는 드디어 실질적으로 '천황'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중애천황을 이을 응신천황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응신천황은 삼한 정벌이 끝난 뒤인 201년에야 태어납니다. 하지만 응신천황이 즉위한 것은 훨씬 나중이었습니다. 응신천황 즉위년은 일본서기 기준 270년으로, 중애천황이 죽은 지 70여 년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즉, 신공황후가 70여 년이나 섭정을 해 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공황후는 '섭정을 해 먹기' 위해서 바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於是皇后及大臣武內宿禰. 匿天皇之喪. 不令知天下. 則皇后詔大臣及中臣烏賊津連. 大三輪大友主君. 物部膽咋連. 大伴武以連曰. 今天下未知天皇之崩. 若百姓知之有懈怠者乎. 則命四大夫. 領百寮令守宮中. 竊收天皇之屍. 付武內宿禰. 以從海路遷穴門. 而殯于豐浦宮. 爲无火殯斂[无火殯斂. 此謂褒那之阿餓利.].(중애천황, 200?+120)

 

 

일단 신공황후는 대신 무내숙녜(武內宿禰)[타케시우치노스쿠네]와 공모해 중애천황이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 천하에 알리지 않기로 협의했습니다. 그리고 무내숙녜, 중신오적진련(中臣烏賊津連)[나카토미노이카츠노무라지], 대삼륜대우주군(大三輪大友主君)[오호미와노오호토모누시노키미], 물부담사련(物部膽咋連)[모노노베노이쿠히노무라지], 대반무이련(大伴武以連)[오호토모노타케모츠노무라지]을 모아 상사를 일단 공포하지 않기로 하고 풍포궁에 빈소를 차려 두었습니다.

 

'불경한' 중애천황의 일을 대충 마무리지은 신공황후는 다시 귀신의 뜻을 받들기로 했습니다.

 

 

三月壬申朔, 皇后選吉日, 入齋宮. 親爲神主. ... 時得神語, 隨敎而祭.(신공황후, 200?+120)

 

 

이어 신공황후는 귀신의 뜻을 받들어 중애천황이 실패했던 웅습을 다시 토벌하기로 했습니다.

 

 

然後, 遣吉備臣祖鴨別, 令擊熊襲國. 未經浹辰, 而自服焉.(신공황후, 200?+120)

 

 

그런데 중애천황이 칠 때는 저항하던 웅습이, 신공황후가 치자 토벌군이 전장에 이르기도 전에 스스로 항복해 왔습니다.(自服) 그런데 '영웅'이 적에게 그냥 항복을 받았다고 하면 영웅의 느낌이 잘 안 살죠? 그래서 일본서기 '작가'들은 우백웅취(羽白熊鷲)[하시로쿠마와시]라는 사람을 들어 신공황후를 또 띄어 주기로 합니다.

 

 

파랑은 강일궁 / 노랑은 좌측부터 층증기야, 안, 하지전촌 / 회색은 좌측 상단부터 옥도리, 적경강, 가장 아래는 산문현 / 빨강은 신공황후의 웅습 토벌 진행 방향

 

 

荷持田村, 羽白熊鷲者. 其爲人强健. 亦身有翼, 能飛以高翔. 是以, 不從皇命. 每略盜人民.(신공황후, 200?+120)

 

 

우백웅취는 하지전촌(荷持田村)[노토리타노후레] 사람으로, 강건한 데다 몸에는 날개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위세를 믿고 왜 조정을 따르지 않으며, 백성들에게 삥을 뜯고 다녔다고 하네요.(不從皇命每略盜人民) 아주 전형적인 악당이죠? 물론 신공황후가 실존했는지 아닌지 모르는 것처럼, 우백웅취도 진짜 있던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있었다면 날개는 없었겠죠. 아마 없었을 겁니다.

 

 

戊子, 皇后欲擊熊鷲, 而自橿日宮遷于松峽宮. 時飄風忽起, 御笠墮風. 故時人號其處曰御笠也. ... 辛卯, 至層增岐野, 即擧兵擊羽白熊鷲而滅之. 謂左右曰, 取得熊鷲. 我心則安. 故號其處曰安也.(신공황후, 200?+120)

 

 

신공황후는 신속하게 '토벌'했습니다. 무자일에 강일궁에서 송협궁(松峽宮)[마츠오노미야]으로 옮겼는데, 갑자기 인 회오리 때문에 갓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어립(御笠)[미카사]이라 했습니다. 사흘 뒤엔 신묘일에는 층증기야(層增岐野)[소소키노]에서 우백웅취를 이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했다는데, 우백웅취를 죽였다는 건지, 쫓았다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백웅취를 이긴 뒤, 마음이 편하다고 해서 그곳을 안(安)[야스]이라고 했습니다.

 

 

丙申, 轉至山門縣, 則誅土蜘蛛田油津媛. 時田油津媛之兄夏羽, 興軍而迎來. 然聞其妹被誅而逃之.(신공황후, 200?+120)

 

 

우백웅취를 이겼어도 '토벌'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닷새 뒤인 병신일에 남쪽으로 산문현(山門縣)[야마토노아가타]으로 가 토지주(土蜘蛛)[츠치구모]인 전유진원(田油津媛)[타부라츠히메]을 죽였습니다. 여기서 토지주는 웅습처럼 구주 지역의 선주민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토지주라는 말에 거미 요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을 보면, 요즘 왜놈들이 부락민이나 재일조선인 운운하며 남을 차별하는 것처럼, 2천 년 전에도 똑같이 굴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공황후본기 내용상 이 3월의 기사까지가 실질적으로 웅습을 토벌한 기록입니다. 4월 기사부터는 다시 그 '귀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夏四月壬寅朔甲辰, 北到火前國松浦縣, 而進食於玉嶋里小河之側. 於是, 皇后勾針爲鉤, 取粒爲餌, 抽取裳縷爲緡, 登河中石上, 而投鉤祈之曰, 朕西欲求財國. 若有成事者, 河魚飮鉤. 因以擧竿, 乃獲細鱗魚. 時皇后曰, 希見物也. ... 旣而皇后, 則識神敎有驗, 更祭祀神祇, 躬欲西征.(신공황후, 200?+120)

 

爰定神田而佃之. 時引儺河水, 欲潤神田, 而掘溝. 及于迹驚岡, 大磐塞之, 不得穿溝. 皇后召武內宿禰, 捧劒鏡令禱祈神祇, 而求通溝. 則當時, 雷電霹靂, 蹴裂其磐, 令通水, 故時人號其溝曰裂田溝也.(신공황후, 200?+120)

 

皇后還詣橿日浦, 解髮臨海曰, 吾被神祇之敎, 賴皇祖之靈, 浮涉滄海, 躬欲西征. 是以, 今頭滌海水. 若有驗者, 髮自分爲兩. 卽入海洗之, 髮自分也. 皇后便結分髮, 而爲髻.(신공황후, 200?+120)

 

 

토벌을 대체로 마무리한 신공황후는 서북쪽으로 가 옥도리(玉嶋里)[다마시마노사토]로 가서 '서쪽의 재물이 많은 나라'를 얻고자 한다고 점을 봅니다. 그리고는 낚시를 던져 은어가 낚이자 '希見物也'이라고 합니다. ''는 바라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고, 드물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신공황후는 이 결과로써 귀신을 신통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귀신의 말을 따라 저금신라국을 치고자 결심했습니다. 신공황후는 그 귀신에게 경작지를 올리려고 강물을 끌어 오려 했는데, 적경강(迹驚岡)[토도로키노워카]에서 바위를 만나 도랑을 더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공황후는 무내숙녜에게 귀신들에게(神祇) 검과 거울을 바치고 빌게(禱祈) 하니, 과연 하늘에서 우루르쾅쾅쾅쾈 벼락이 쳐서(雷電霹靂) 바위를 깨 버렸습니다. 놀랍죠? 인공 강우 기술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기도만 잘 하면 됩니다. 기상청에서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신공황후는 다시 강일포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점을 쳐 보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 바다를 건너 원정을 떠나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양쪽으로 나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머리카락이 저절로 나뉘자, 이로써 삼한 정벌의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못 믿죠. 아기 장수 우투리 이야기도 이것 보단 현실성 있겠습니다. 일단 이야기 구조를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 백제와 왜의 통교 사실의 사료적 근거가 삼한 정벌이고, 다시 삼한 정벌의 사료적 근거가 웅습 토벌이라 했습니다. 이 중 확실하게 실재한 사건은 마지막에 발생한 백제와 왜가 통교한 사실입니다. 칠지도가 있는 한, 왜놈들은 백제가 적어도 남부 마한을 쳤을 때 연합군으로써 분명히 참전한 것 같습니다. 가야 7국 공격이 사실이라면, 그 때도 참전했겠죠. 하지만 그 사료적 근거들인 삼한 정벌, 웅습 토벌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이 둘은 백제와의 연관점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흔적이 역력합니다. 웅습이 모반을 일으켰댔지만, 중애천황본기와 신공황후본기에서 웅습의 비중은 정말 얼마 되지 않습니다. 웅습이 이후, 또는 이전 일본서기 본문에 자주, 중요하게 나온다고 하지만, 상기했던 것처럼 대화 정권이 구주 중북부 일대를 점유했다는 연대의 하한선은 반정의 난이 터졌던 521년 내외입니다. 따라서 중애천황 및 신공황후 시기의 대화 정권은, 만약 '존재'했다면 구주 일대의 웅습과는 접점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웅습이 반역을 일으켰거나, 혹은 '내부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면 대화 정권 보다는 당시 구주에 있던, 구주인들의 독립적인 정권의 일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민족 '웅습'이 반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웅습 왕국' 안에서 내부적인 분열 사건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소한 내전은 항상 있잖아요? 그런 사건의 주체를 대화 정권으로 바꿔 윤색하기는 쉬운 일일 겁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웅습 토벌 자체도 웅습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데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중애천황만이 그 본질에 집중할 뿐, 중애천황 사후 신공황후의 웅습 토벌은 웅습 자체를 진압하는 게 아니라 웅습 토벌을 통해 자기에게 씌인 귀신이 얼마나 영험한지를 확인하는 데 쓰고 있으니까요. 귀신은 처음에 나와서 웅습을 토벌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저금신라국을 삼키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중애천황은 그 말을 어기고 웅습을 공격했다가 단명했습니다. 그런데 신공황후도 중애천황 사후 신라를 공격한 게 아니라, 웅습을 공격했지만, 즉 행위는 같았지만 오히려 신공황후는 대성하고, 중애천황은 죽었죠. 의도적으로 신공황후는 귀신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았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하는 겁니다.

 

이번에는 소설 구조에서 벗어나, 사건 자체를 생각해 봅시다. 만약 이것이 대화 정권과 관계 없이, '구주 정권'에서 발생했던 독립적인 사건을 삼한 정벌과 억지로 잇기 위해 윤색했다고 하면 생각하기는 다소 쉬워집니다. 중애천황, 신공황후 교체기의 일본서기상 연도는 200년 내외이고, 웅습 토벌 자체도 200년 즈음인데, 이 시기에는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에 구주의 왜놈들에 대해 기술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그 글에는 말로국(末盧國), 이도국(伊都國), 노국(奴國), 불미국(不彌國), 투마국(投馬國), 야마일국(邪馬壹國) 같은 나라 이름이 나옵니다. 특히 여기서 이도국은 중애천황본기에 나오는 이소국伊蘇國[이소노쿠니]과 같은 곳으로 봅니다. 중애천황이 풍포궁에서 축자로 넘어 올 때 그 지역 토호들이 환대해 줬다고 했죠? 그 중에 '伊蘇國'이 나옵니다. 제가 인용한 곳에도 있어요. 야마일국은 여왕이 다스리는데, 정황상 상기한 나라들의 종주국인 것으로 보이죠. 이 외에도 나라들이 많이 나오는데, 상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습니다. 진수가 삼국지를 쓸 때가 3세기 중후반이고, 따라서 이 때 진수가 모은 '외국' 기록들은 대개 200년 전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구려는 비교적 가깝고, 위나라와 전쟁까지 했기 때문에 상세하고, 가까운 시일의 기록이 남아 있지만, 왜놈들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 낙랑이나 대방에서 수집한 정보를 베껴다 적었을 것이고, 따라서 삼국지 작성 시기와 실제 정보 사이의 간격이 조금 있겠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웅습 토벌 사건을 중애천황이나 신공황후의 대화 정권의 사건이라 하지 않고, 구주에 있던 야마일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사이의 투쟁, 또는 종주권에 대한 반역, 또는 구주 중남부 세력으로부터의 공격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일본서기에서는 이걸 베끼고, 주체를 대화 정권으로 다시 윤색하며, 자기네들의 사실 관계, 사건 등에 끼워 맞추다 보니 사건의 선후 관계, 인과 관계가 이상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웅습 토벌하고 삼한 정벌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 웅습을 토벌한다는데 갑자기 잡신이 들어와서 신라를 공격한다고 깝친다는 말입니까? 아기 장수 우투리 보다 웅습 토벌 이야기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소설의 기본도 못 갖춘 놈들이 소설을 쓴답시고 깝친 거죠. 우투리를 지은 사람은 못해도 몽테스키외 정도의 역량은 있었을 겁니다.

 

 

 

정리하자면, 일본서기 중애천황본기, 신공황후본기에 나오는 웅습 토벌은, 실제 사건 모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서기 자체의 내용만으로는 삼한 정벌을 기술하기 위한 인과적 사건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실제 사건이라 하더라도, 아마도 대화 정권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 주체는 대화 정권과 별개의 구주 정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구주 정권의 단면은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으로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일본서기 다른 부분의 외국 관계 기사에서와 같이, 중애천황 웅습 토벌 기사는 원래 대화 정권과 관계가 없거나, 아주 관계가 미약한 사건이었지만, 대화 정권 중심으로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볼 때 인과 관계에 주의하여 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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