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천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일본서기 지통천황본기 중)

2020. 8. 6. 14:31일본서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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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 이 글에 인용된 비조 목간에 관한 보고서를 찾는 데는 신민(臣民)인 Selecao가 도움을 줬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저는 왜놈이 언제부터 '일본놈'이 되었는지 분석해 보았습니다. 670년에서 늦어도 702년이면, 왜놈들이 대외적으로 '日本'이라고 칭했다는 것을 왜 국내외 사료들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호를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해 뜨는 곳 근처에 있다고 하는 시덥잖은 사유에서, 구주 정권을 대화 정권이 합병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론에까지, 여러 가지를 가정해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 글을 보시면 됩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58

 

언제부터 '일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일본서기 추고천황본기 중)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저는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을 다룬 글에서, '日本'이나 '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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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천황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언제부터 왜왕을 '천황'이라 불렀는지 말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1대인 신무천황에서부터 '천황'이라 칭했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초기 천황들이 메치니코프를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의 문제도 해명하지 못하고, 사실 그 이전의 실존 문제 그 자체도 부정적인 마당에, 천황이라는 말을 썼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일본서기에서는 왜 '天皇'이라고 했는지도 설명이 안 돼 있습니다. 시조라는 신무천황이 처음 천황으로 즉위한 때가, 일본서기로 따지면 기원전 660년입니다. 한자가 뭔지도 모르고, 제도가 뭔지도 몰랐을 왜놈들이 왕을 두고 천황 운운했을 수가 없죠. 따라서 신무천항이 실제로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아마 그 당시 쓰였던 칭호는 천황과는 아주 달랐을 겁니다.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같은 옛 왕호들이 기록되어 있는 삼국사기와는 아주 상이하죠? 실제로 천황이라는 말이 실제로 사용된 때는 아무리 일러도 추고천황, 늦어도 천무천황이나 지통천황 전후로 보입니다.

 

그럼 천황 칭호를 쓰기 이전에 사용한 왕호는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삼국지, 후한서에 나왔던 대로 왜왕(倭王) 또는 왜국왕(倭國王)이라는 칭호가 있습니다. 물론 상술한 대로, 왜와 일본이 분리되어 있고, 왜가 구주 지역에 있었다면, 왜왕은 그 지역의 종주인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겁니다. 왜왕이라는 표현은 남조에 조공했다는 왜의 5왕, 즉 왜왕 찬(讚), 왜왕 진(珍), 왜왕 제(濟), 왜왕 흥(興), 왜왕 무(武)에도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송서와 양서 등에 나오는 소위 왜 5왕은 중국 사서에 직접 이름이 드러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고, 이들이 중국에 요청한 작위에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다섯 나라의 제군사가 포함되어 있어서(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항상 '증거'로 거론되는 놈들이기도 합니다. 이 왜 5왕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 해 보기로 하고, 지금은 이들이 '왜왕'으로서 기사에 드러난 부분만 간략히 인용하고 지나가겠습니다.

 

 

高祖永初二年, 詔曰: 「萬里修貢, 遠誠宜甄, 可賜除授.」 ... 死, 弟立, 遣使貢獻, 自稱 ... 倭國王 ... 二十年, 倭國王遣使奉獻 ... 死, 世子遣使貢獻 ... 死, 弟立, 自稱 ... 倭國王.(송서 열전 만이, 왜국)

 

安帝時, 有倭王. 死, 立弟. 死, 立子. 死, 立子. 死, 立弟.(양서 열전 제이, 왜)

 

 

송서에서는 비록 '자칭'이긴 하지만, 스스로 왜국왕(倭國王)이라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왕 찬에서 무에 이르기까지, 왜놈들은 동생(弟) 또는 아들(世子)로 왕통을 이어가면서 지속적으로 조공했습니다. 양서에서는 왜왕(倭王)으로 나옵니다. 670여 년에 일본을 칭하기 전까지, 왜놈들은 대외적으로 '왜'라고 칭했다는 말이겠죠. 하지만 왜왕이 '국내용'으로도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대내적 칭호와, 대외적 칭호가 다른 경우는 왕왕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밖으로는 왜왕이라고 하고는, 안으로 천황이나 '성성이왕'이라 그랬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살필 사료인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모두 '오염'되었으니, '오염'되지 않은 사료를 찾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게 있을까요? 바로 금석문, 즉 명문(銘文)이 있습니다. 책으로 남기는 기록이야, 상대적으로 쉽게 없애거나 조작할 수 있지만, 돌이나 금속에 새긴 글, 즉 명문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게다가 글, 특히 삼국사기 같은 1차 사료의 경우, 선대 왕조에 대한 후대의 인식이 반영되고, 후대에 남아 있는 자료에 편찬 범위가 한정될 수밖에 없지만, 당대의 명문들은 당대의 인식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남다릅니다. 예전에 신라의 '태조 성한왕'이나 촌주와 도사에 대해 글을 썼을 때, 이것저것 비문을 많이 참고한 것이 바로 그 예입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41

 

태조 성한왕(삼국사기 제사지 중)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제사지 처음 부분에는 왕실의 오묘에 대한 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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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48

 

촌주와 도사(삼국사기 옥사지 중)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역사 기록은 대체로 '중앙'을 향합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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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 이런 명문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옥현(埼玉縣)[사이타마켄]의 도하산(稲荷山)[이나리야마] 고분에서 발견된 칼에 있던 명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웅본현(熊本)[쿠마모토켄]의 강전선산(江田船山)[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칼에 있던 명문입니다.

 

 

우측부터 도하산 고분, 사귀궁

 

 

도하산 고분

 

 

일단 도하산 고분의 칼부터 생각해 봅시다. 도하산 고분은 전방후원분이고, 5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칼 자체는 1968년에 발견되었으나, 명문은 1978년에 X선을 이용하고서야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칼의 전면, 후면에 한자 115자가 상감되어 있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辛亥年七月中記. 乎獲居臣, 上祖名意富比垝, 其児多加利足尼, 其児名互已加利獲居, 其児名多加披次獲居, 其児名多沙鬼獲居, 其児名半互比.(기옥현 도하산 고분 출토 검, 전면)

 

其児名加差披余, 其児名乎獲居臣. 世々為杖刀人首, 奉事来至今. 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 吾左治天下, 令作此百練利刀, 記吾奉事根原也.(기옥현 도하산 고분 출토 검, 후면)

 

 

명문을 따르면, 이 글은 신해년 7월에 작성되었으며, 이 검을 만든 호획거신(乎獲居臣)이라는 사람이 검을 만든 배경과 자신의 집안 내력을 밝히기 위해 쓴 것으로 보입니다. 시조는 의부비궤(意富比垝), 2대는 다가리족니(多加利足尼),  3대는 호이가리획거(互已加利獲居), 4대는 다가피차획거(多加披次獲居), 5대는 다사귀획거(多沙鬼獲居), 6대는 반호비(半互比), 7대는 가차피여(加差披余), 그리고 8대가 바로 호획거신입니다. 대대로 장도인의 우두머리를 지냈다(世々為杖刀人首)고 했는데, '杖刀'는 칼을 짚다는 의미이므로, 아마 문지기나 위병, 또는 하급 문관 같은 하급 관리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호획거신 '족보'의 진위 자체도 따지려면 따질 가치가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獲加多支鹵大王'입니다. 호획거신이 모셨다는 왕이 바로 획가다지로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고, 이 말은 '大王'이 국내에서 왕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는 거거든요. 호획거사가 획가다지로대왕을 모신 곳은 사귀궁(斯鬼宮)인데, 사귀궁은 내량현(奈良縣)[나라켄]의 기성군(磯城郡)[시키군]에 있었다고 봅니다. 획가다지로대왕은 보통 웅략천황과 동일한 사람으로 봅니다. 웅략천황은 한문식이고, 왜식 시호는 대박뢰유무존(大泊瀬幼武尊)[오하쓰세와카타케루노미코토]인데, '幼武'의 발음인 '와카타케루'가 '獲加多支鹵'의 발음인 '와카타케루'와 같기 때문입니다. 같은 음을 다른 식으로 한자로 적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기옥현의 도하산 고분은 지금의 동경 북쪽이니까, 만약 이 명문이 맞다면 웅략천황 시대에 관동 지역 일대가 대화 정권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그 현지인이 등용되어 내량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본서기상, 웅략천황은 456년에서 479년까지 재위했으므로, 고분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도 같습니다. 맞아 떨어지는 게 많네요.

 

 

 

강전선산 고분

 

 

강전선산 고분

 

 

이번에는 강전선산 고분의 칼을 생각해 봅시다. 강전선산 고분 역시 전방후원분이고, 5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강전선산에서 출토된 검에는 한자 75자가 상감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治天下獲□□□鹵大王世奉事典曹人名无利弖八月中用大鐵釜幷四尺廷刀八十練六十捃三寸上好刊刀服此刀者長壽子孫洋々得□恩也不失其所統作刀者名伊太和書者張安也.(웅본현 강전선산 고분 출토 검)

 

 

이 검을 만든 사람은 전조인(典曹人)이던 무리저(无利弖)입니다. 대장장이는(作刀者) 이태화(太和)이고, 글을 쓴 사람은(書者) 장안(張安)이라고 했습니다. 이 외에는 몇 번을 두드렸니, 이 검을 가지면 축복을 받을 것이니 같은 말이 적혀 있습니다. 아마 맥락상 무리저는 이 검을 만들도록 의뢰한 사람이고, 이태화와 장안이 검을 직접 만들고, 글을 지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앞에 천하를 다스리던 '獲□□□鹵大王'의 때라는 말이 나옵니다. ''과 '鹵大王'은 익숙하죠? 바로 앞에 나왔던 획가다지로대왕(獲加多支鹵大王)일 것입니다. 획가다지로대왕은 웅략천황과 같다고 보므로, 이 검 역시 웅략천황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전조인으로 웅략천황을 섬겼다는 무리저 역시 아마 이 지방 사람으로서 내량에 들어가 대화 정권을 섬기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또한, 여기에도 '대왕'이라는 말이 나오죠.

 

강전선산 고분이 5세기 후반에 조성되었고, 명문의 획 뭐시기 대왕이 획가다지로대왕, 즉 웅략천황이 맞다면, 웅략천황 시기 대화 정권이 구주 중부까지 정복했다는 말이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521년에 터졌던 반정의 난을 진압하면서 대화 정권이 구주 중북부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려 왔습니다. 상충되어 보이지만, 사실 두 설은 병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근초고왕 때 백제가 남부 마한을 정복했다는 것을 사실로써 무리 없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백제가 이 지역을 행정적으로 통치하게 된 시기는 그 보다 훨씬 뒤라고 알고 있죠. 개로왕이 죽고 웅진으로 남천한 뒤, 백제는 동성왕, 무령왕 대에 지속적으로 남쪽을 통치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군사적 정복은 4세기 중후반이었지만, 행정 통치는 5세기 후반이나 6세기 초나 되어서야 하게 된 것이죠.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것과, 그 지역을 통치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당연히 수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역에 원래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던 세력을 대신해 그 지역에 행정 권력을 행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티무르 같은 놈이 정복은 많이 하고 다녔지만, 통치하지 않아서 같은 곳을 수차례 원정해야 하기도 했던 것과 같죠. 정치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남천 이전까지 백제가 남부를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선진' 지역은 평양을 비롯한 낙랑, 대방 지역이었으니까요. 문주왕 때 남천하고, 위례 및 대방 수복이 아주 어려워지고서야 숨을 가다듬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왜놈들의 경우에도, 5세기 후반의 웅략천황 재위 중에 구주 중북부를 정복했으나, 그 뒤로 구주 지역이 아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정의 난은 구주 지역이 대화 정권에서 다시 이탈하려 했던 움직임이고, 그걸 진압하므로써 구주 중북부는 '완전히' 대화 정권 휘하에 들어가는 것이죠. 반정의 난이 터졌던 521년은 계체천황 15년인데, 무열천황에서 계체천황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혹시 왕조가 바뀌지 않았나 의심을 받기도 하는 때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계체천황이나 반정의 난을 다루며 따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웅략천황 재위 중, 즉 456년에서 479년 사이의 기간에는 적어도 천황이라는 명칭이 쓰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신 대왕(大王)이 쓰였습니다. 상기한 명문에 왜왕(倭王)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우연일까요?

 

 

 

천황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 '大王'이 쓰였다는 것은 위의 두 명문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天皇'을 사용한 때는 언제부터일까요? 사실 이 쟁점이 이 글의 주제와 더 잘 맞을 것입니다. 적어도 천무천황 이전 시기에 천황이 사용된 예가 제가 알기로 세 가지 있습니다. 법륭사(法隆寺)[효류지]의 약사여래상광배명(藥師如來像光背銘)이 하나이고, 원흥사탑(元興寺)의 노반명(露盤銘)이 둘입니다. 원흥사탑로반명은 원흥사탑복반명(元興寺塔覆盤銘)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실물이 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비조(飛鳥)[아스카]와 비조지(飛鳥池)[아스카이케] 일대에서 출토된 목간들이 셋입니다.

 

 

위로부터 법륭사, 원흥사

 

 

일단 법륭사의 약사여래상광배명부터 확인해 봅시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池邊大宮治天下天皇. 大御身. 勞賜時. 歳次丙午年. 召於大王天皇與太子而誓願賜我大御病太平欲坐故. 将造寺薬師像作仕奉詔. 然當時. 崩賜造不堪. 小治田大宮治天下大王天皇及東宮聖王. 大命受賜而歳次丁卯年仕奉.(법륭사 약사여래상광배명, 607?)

 

 

여기서 정묘년은 607년으로, 추고천황 15년입니다. 지변대궁치천하천황(池邊大宮治天下天皇)은 추고천황의 오빠인 용명천황을 의미합니다. 내용은 대략 용명천황이 몸이 좋지 않아 즉위 전이던 추고천황과 성덕태자를 불러 병이 낫길 빌게 하니, 약사여래불상을 만들어 바치겠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용명천황은 죽고 말았고, 한참 뒤인 정묘년, 즉 607년에야 약사여래상을 법륭사에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 명문에서는 용명천황을 분명 '천황'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다만, 용명천황이 실제로 천황이라 칭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불상은 추고천황 때 바쳤다고 하니까요. 만약 이 불상과 명문이 위작이 아니라면, 적어도 추고천황 때부터는 '천황'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문장의 형식이나 그 용어가 추고천황 당대의 것인지 의뭉스럽고, 불상 주조 기법은 607년인 7세기 초가 아니라 7세기 후반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러 정황상 법륭사 약사여래상광배명은 추고천황 당대의 것으로 보기 힘듭니다. 7세기 후반이면 오히려 천지천황이나 천무천황 때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와 별개로, 마찬가지로 법륭사(法隆寺)[호류지]에 있는 금당석가불광배명문(金堂釋迦佛光背銘文)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는 천황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법황(法皇)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법황은 성덕태자를 가리킵니다.

 

 

法興元世一年歳次辛巳十二月. 鬼前大后崩, 明年正月廿二日上宮法皇枕病弗悆, 干食王后仍以勞疾並著於床. 時王后王子等及與諸臣深懐愁毒, 共相發願, 仰依三寶, 當造釋像尺寸王身, 蒙此願力, 轉病延壽, 安住世間. 若是定業以背世者往登浄土, 早昇妙果. 二月二十一日癸酉, 王后卽世, 翌日法皇昇遐, 癸未年三月中, 如願欲造釋迦尊像幷侠侍及莊嚴具竟, 乘斯微福, 信道知識現在安隱, 出生入死随奉三主紹隆三寶遂共彼岸普遍六道, 法界含識得脱苦緣同趣菩提, 使司馬鞍首止利佛師造.(법륭사 금당석가불광배명문, 623?)

 

 

 

 

처음에 있는 법흥원(法興元)은 연호입니다. 621년이죠. 하지만 왜놈들이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대화개신 이후의 일입니다. 대화개신 때 처음 사용한 연호가 바로 대화(大化)[다이카]로, 대화 원년은 645년이기 때문에, 법흥원이라는 것은 글은 남아 있긴 하지만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금당석가불광배문은 성덕태자의 엄마, 성덕태자의 와이프, 그리고 성덕태자 본인이 연이어 죽은 것을 추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내용의 진실성은 약사여래상광배명 보다는 아주 확실하지만, 법흥원이라는 연호가 쓰인 점, 법황이라는 '때에 맞지 않는' 말이 쓰인 점 등을 들어, 이것도 혹시 구라가 아닐까 의심을 받았습니다. 상기한 것처럼, 최초의 연호는 645년의 대화니까요. 법황이라는 말은 성덕태자가 불교를 섬기고, 그리고 성덕태자 본인도 나중에 그와 관련하여 숭배를 받았기 때문에 붙은 칭호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당대에 법황이라는 말이 쓰였을 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夏四月庚午朔己卯. 立廐戶豐聰耳皇子爲皇太子. 仍錄揶政, 以萬機悉委焉.(추고천황, 593)

 

 

일본서기에서는 추고천황 원년 4월에 구호풍총이황자(廐戶豐聰耳皇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구호풍총이황자는 성덕태자입니다. 성덕태자는 용명천황의 아들이고, 추고천황은 용명천황의 동생이므로, 성덕태자는 추고천황의 조카가 됩니다. 일본서기가 맞다면, 성덕태자는 추고천황 즉위 때부터 아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정사를 보좌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덕태자는 소아씨와 함께 불교를 높이고, 후대에도 그와 관련하여 숭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법황이라는 말이 일본서기에 등장하지 않는 이상, 저 비문도 의심해 볼 만한 것이죠. 띄워 주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법황이라는 말만 적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이상하니까요. 따라서 이 명문 역시 7세기 후반인 천무천황 즈음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고, 적어도 천무천황 때는 '皇'이라는 말이 왜놈들 사이에서 쓰였다는 증거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이번엔 원흥사탑로반명(元興寺塔露盤銘)을 살펴 봅시다. 원흥사는 법흥사(法興寺)라고도 합니다. 일본서기에는 법흥사로 나오죠. 정작 원흥사탑 자체는 지금 실전하지 않습니다. 원래 5층탑으로, 왜에서 제일 높았는데, 1859년에 불에 타 버렸다고 하더라고요. 다만 원흥사연기(元興寺縁起)라는 책에 그 글이 전하고, 내용이 일본서기의 정황과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어 사료로서 중요하게 취급된다고 합니다.

 

 

難波天皇之世辛亥正月五日授塔露盤銘. 大和國天皇, 斯歸斯麻宮治天下名阿末久爾意斯波羅岐比里爾波彌己等之, 奉仕巷宜名伊那米大臣時, 百濟國正明王上啓云万法之中佛法最上也. 是以天皇幷大臣聞食之宣善哉則受佛法造立倭國, 然天皇大臣等受報之盡. 故, 天皇之女佐久羅韋等由良宮治天下名等己彌居加斯夜比彌乃彌己等世, 及甥名有麻移刀等刀彌々乃彌己等時, 奉仕巷宜名有相明子大臣為領. 及諸臣等讃云, 魏々乎, 善哉々々, 造立佛法父天皇父大臣也. 卽發菩提心, 誓願十方諸佛, 化度衆生, 國家太平, 敬造立塔廟, 緣此福力, 天皇臣及諸臣等, 過去七世父母, 廣及六道四生々々處々十方淨土, 普因此願皆成佛果, 以為子孫世々不忌莫絶綱紀, 名建通寺. 戊申, 始請百濟王名昌王法師及諸佛等, 改遣上釋令照律師, 惠聡法師, 鏤盤師將德自昧淳, 寺師丈羅未大文賈古子, 瓦師麻那文奴陽貴文布陵貴昔麻帝彌, 令作奉者, 山東漢大費直名麻高垢鬼名意等加斯費直也. 書人百加博士陽古博士, 丙辰年十一月既, 爾時使作金人等意奴彌首名辰星也. 阿沙都麻首名未沙乃也. 鞍部首名加羅爾也. 山西首名都鬼也. 以四部首為將諸手使作奉也.(원흥사탑로반명, 651?)

 

 

원흥사탑로반명에는 천황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7번이나 나오죠. '難波天皇', '大和國天皇'이라는 말이 나오고, 이 외에는 모두 일반명사로 쓰인 듯합니다. 난파천황은 여기서 효덕천황을 지칭하는 것 같고, 대화국천황은 효덕천황의 고조부인 흠명천황인 것 같습니다. 재밌는 점은 본문에 백제국의 정명왕(百濟國正明王)과 백제의 창왕(百濟王名昌王)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흠명천황 때 불교가 처음 백제를 통해 왜놈들에게 들어왔고, 그 때 백제의 왕은 바로 성왕입니다. 성왕은 왜놈 기록에서는 성명왕(聖明王)이라고 주로 나오는데, '정명왕', '성명왕'이 비슷하니 아마 정명왕도 성왕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창(昌)은 위덕왕의 이름입니다. 이 '명문'은 즉, 백제 성왕과 위덕왕 시기, 백제에서 왜놈들에게 불교가 어떻게 전래되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정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또한, 처음에는 절 이름을 원흥사가 아니라 건통사(建通寺)라고 했다는 점도 볼 만하네요. 국내에는 원흥사에 대한 연구 자료가 많지 않지만, 성왕, 위덕왕, 흠명천황이 관련된 것과 같이, 백제에서 왜놈들에게 불교가 어떻게 전래되었는지, 혹은 이 기록으로 백제의 상황을 역추적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연구가 소수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명문의 작성 연대는 첫 문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명문이 '내려온 것', 즉 명문을 새기라고 명령이 하달된 때는 효덕천황의 치세 중 신해년 정월 5일이었습니다. 효덕천황 치세 중 신해년은 백치 2년인 651년밖에 없기 때문에, 이 비문이 작성된 때도 651년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화개신이 645년이었기 때문에, 원흥사탑로반명이 위작이 아니라면 정황상 적어도 대화개신 이후에는 천황이라는 말을 써 오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원흥사탑로반명은 법륭사의 경우 보다는 위작 논란이 적은 편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여기에는 법황 같은 말도 없고, 성덕태자를 덮어 놓고 높이는 말도 없거니와, 그 당시 쓰이지 않았을 말이 들어 있다고도 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추고천황이 죽은 것이 628년이므로, 백치 2년이면 그로부터 20년이 조금 더 지난 때입니다. 추고천황은 너무 이르고, 천무천황이 너무 늦다면, 그 사이에서 천황의 기원을 찾아 보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노반명의 원문이 소실되었다는 점입니다. 법륭사 명문이 나중의 위작이라고 추정하는 근거 중 하나에 탑의 건축 양식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원흥사탑도 혹시 그럴지도 모르니까요. 상기한 것처럼 이 글은 원흥사연기라는 책을 통해서만 전하지, 실제 명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추고천황은 이르고, 효덕천황은 어중간했다면, 천무천황 때 천황이 쓰였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왜 천무천황 때는 확실하다고 할까요? 80년대 이후로 비조, 비조지, 등원궁 지역을 꾸준히 조사한 결과, '皇'이 여기저기 사용된 목간들이 많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이 목간들이 발견된 퇴적층은 바로 등원궁(藤原宮)[후지와라노미야] 시대로 추정되는데, 등원궁 시대는 천무천황의 조카이자 와이프, 그리고 다음 왕인 지통천황 때부터 원명천황 때까지입니다. 즉,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이죠. 일본서기에 기술되어 있는 마지막 천황이 바로 지통천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목간들에 대한 연구 자료는 대체로 현지 자료밖에 없고, 제가 알기로, 그리고 찾아 보기로는 국내에 번역되어 있거나 국내에서 연구한 결과는 전무한 바, 제가 이 부분에서 설명 드리는 것 역시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등원궁

 

 

다행히도 저는 출토된 목간들에 대한 보고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찾은 보고서를 토대로 기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91년, 비조지(飛鳥池)에서 출토퇸 목간에서는 '大伯皇子宮', '大伯皇子' 같은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또한 이 목간 외에도 겉면에 글씨를 쓴 토사기과(土師器鍋)도 발굴되었습니다. 토사기과는 흙으로 만든 솥일 겁니다. 이 솥은 7세기 말의 유물로, 천무천황이 686년에 죽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천무천황과 지통천황 시기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지통천황 때 등원궁으로 천도했다고는 하나,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등원궁 지역도 비조 지역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등원으로 천도할 것인지의 논의는 천무천황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是年. 將都新城. 而限內田薗者不問公私. 皆不耕悉荒. 然遂不都矣.(천무천황, 676)

 

辛卯. 天皇巡行於京師而定宮室之地.(천무천황, 684)

 

壬申, 高市皇子觀藤原宮地. 公卿百寮從焉.(지통천황, 690)

 

甲子, 遣使者鎭祭新益京.(지통천황, 691)

 

戊寅, 天皇觀新益京路.(지통천황, 692)

 

癸巳, 天皇觀藤原宮地.(지통천황, 692)

 

八月戊午朔, 幸藤原宮地.(지통천황, 693)

 

乙巳, 幸藤原宮. 卽日還宮.(지통천황, 694)

 

 

천무천황 때는 천도하지 않았고, 지통천황 때인 691년과 692년에 천도하려고 밑밥을 까는 모습이 보입니다. 본문에서 신성(新城)은 어디인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시기 천무천황이 천도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익경은 등원경을 의미합니다. 진제(鎭祭)는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입니다. 결국 지통천황 8년인 694년에 등원궁으로 천도했고, 원명천황 때인 710년까지 등원경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조금 북쪽이긴 하지만, 등원궁도 옛 수도인 비조 지역에 포함되고, 따라서 710년까지를 비조(飛鳥)[아스카] 시대라고 합니다. 배경이 이렇기 때문에, 등원궁 시대의 퇴적층에서 목간, 토기가 발굴되었다면, 일러도 천무천황, 늦어도 문무천황이나 원명천황 때겠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천무천황에서 원명천황에 이르기까지의 시대 중, 이 목간의 시간적 범위를 좀 더 줄일 수 없을까요? 있습니다. 이 목간들에는 군(郡)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대신 평(評)이 나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대화개신 때 군(郡)을 처음 두었다는 듯이 이야기 하지만, 이 목간들이 등원궁 시대의 것인데도 목간에 군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일본서기가 구라라는 말이겠죠.

 

 

 

 

二年 春正月甲子朔, 賀正禮畢, 卽宣改新之詔曰 ... 其二曰 ... 凡郡以四十里爲大郡. 三十里以下四里以上爲中郡, 三里爲小郡.(효덕천황, 646)

 

 

따라서 '郡' 제도가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702년의 대보율령(大寶律令)[다이호리츠료]으로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목간은 천무천황 때부터 적어도 702년 이전, 그 사이에 작성된 문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 하면, '皇'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도 적어도 이 시기, 혹은 이 시기 이전이라는 의미이므로, 아마도 천황 역시 천무천황, 지통천황 내외 즈음에는 확실하게 쓰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무천황과 지통천황은 서로 부부이자 삼촌, 조카 사이이고, 둘 사이에 특별히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정치적 변란도 없었으므로, 천황 명칭이 시작된 정치적 변동 사건을 천무천황 때의 임신의 난 이후로 간주하는 것도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즉, 이르게 보면 천무천황, 늦게 보면 지통천황 때가 천황이라는 말이 사용된 가장 확실한 하한선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점을 증명하는 목간 자료는 더 있으나, 제 능력이 모자라 이 이상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확인도 안 하고 어디서 본 말만 가지고 덥썩 받아 물 수는 없잖아요? 제가 할 수 있을 만큼은 부연했으니, 양해 부탁합니다.

 

 

 

정리해 봅시다. 왜놈들의 왕은 5세기까지는 확실히 왜왕(倭王) 또는 왜국왕(倭國王)을 표방했습니다. 물론 일본과 왜가 별개의 세력인지, 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로 기록되어 있는 왜와 일본은 무엇인지가 더 밝혀져야 하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면적인 사실은 그렇습니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대왕(大王)을 칭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기옥현의 도하산 고분과 웅본현의 강전선산 고분에 나온 웅략천황의 이칭인 획가다지로대왕(獲加多支鹵大王)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웅략천황은 5세기 후반 사람입니다. 6세기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7세기 초반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추고천황 때 견수사가 들고 간 국서에 왜놈들이 자기들을 해 뜨는 곳의 천자(日出處天子)라고 참칭했거든요. 정작 일본서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적어도 이 시기에는 '天皇'이 쓰이지 않았을지언정, '天子'라고 참칭할 만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왜놈들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법륭사와 원흥사의 명문을 토대로, 우리는 추고천황이나, 그 보다 2~30년 뒤인 효덕천황 때 천황을 참칭하지 않았나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륭사의 명문은 성덕태자에 대한 찬미, 시대에 맞지 않는 용어, 시대에 맞지 않는 불상 양식 때문에 후세의 위작이 아닌가 강하게 의심을 받습니다. 효덕천황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원흥사탑로반명은 그런 위작 시비에서는 훨씬 자유로우나, 명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원흥사연기라는 다른 책을 통해 내려 온다는 것이 약점으로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래 탑은 소실됐거든요. 효덕천황 때는 대화개신 같은 정치 개혁도 있었던 만큼,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천황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하한선은 아주 확실합니다. 천무천황이나 지통천황, 혹은 아주 늦어도 문무천황으로 볼 수 있거든요. 1980년대부터 비조 지역에서 등원궁 시대의 목간들이 대거 발굴되었는데, 이 목간은 702년의 대보율령 이전 시기의 것이었습니다. 즉, 지통천황 때로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늦어도 문무천황이겠죠. 그런데 여기에 '皇子' 같은 표현들이 등장하므로써, 적어도 지통천황 때는 천황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천무천황과 지통천황 연간에는 큰 정치 변동이 없었기 때문에, '천황'은 지통천황 이전인 천무천황 때부터, 혹은 그 앞인 천지천황 때는 확실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았나 하하선을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즉, 천황이라는 명칭은, 아주 이르면 효덕천황 때부터, 늦어도 천무천황이나 지통천황 때부터는 왜놈들이 쭉 사용하던 호칭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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