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로치청의 난(삼국사기 헌덕왕본기 중)

2020. 5. 4. 16:16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반응형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 평로치청의 난은 신라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탁발부에서는 '절도사'라는 것을 두어 국경의 변경 지역들을 방어했습니다. 현종 경운 2년(711)에 처음 10개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탁발부의 역사를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찾아 보니 처음에는 절도사들이 국경 지역에만 있었고, 절도사의 권한도 군대 통솔권에만 있었다고 합니다. 철저히 방어적인 관점에서 말이죠. 그런데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절도사에게 행정권과 수세권이 넘어갔다고 합니다. 즉, 절도사들은 자기 관할 지역은 행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을 거치며 내지로도 절도사가 확대되고, 이 와중에 기존 행정 단위인 도를 절도사가 아예 대체해 버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외지, 내지는 만리장성 등을 경계로 하여 전통적인 중국 영토와 외부 영토를 구분한 것을 지칭합니다.

 

역설적인 것은 절도사를 처음 둔 것도 현종, 그리고 안사의 난 때문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 한 것도 현종 때라는 점이겠습니다. 이후에도 절도사들은 탁발선비의 아주 깊은 병폐로 남았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할 평로치청의 난 때도 그랬고, 탁발선비의 수명에 결정타를 날린 황소의 난 때도 그랬습니다. 다만 황소 본인은 절도사가 아니었고, 황소의 난을 진압한 절도사들이 결국 탁발 조정을 멸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절도사들의 세력은 탁발부 본진의 세력과 반비례하며 크고 작아졌는데, 한창 클 때는 엠페러가 장안 또는 낙양에서 성도 같은 곳으로 도망갈 때도 있었습니다. 아니, 문제가 생기면 없애 버리면 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들기는 쉬워도 없애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여튼, 자세한 건 저는 잘 모르니 선비사를 전공한 분들에게 물어 보시길 바랍니다.

 

 

우측부터 낙양, 장안, 성도

 

 

 

아무튼, 군권과 통치권을 함께 갖고 있었던 만큼, 절도사는 일종의 시한폭탄이었습니다. 주나라가 각 지역에 자기 따까리들을 분봉했다가 피를 본 것처럼, 탁발부의 절도사도 잊을 만하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 글에서 다룰 평로치청의 난도 절도사의 난 중 하나였습니다.

 

 

 

 

헌덕왕본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秋七月, 唐鄆州節度使李師道叛. 憲宗將欲討平, 詔遣楊州節度使趙恭, 徴發我兵馬, 王奉勑旨, 命順天軍將軍金雄元, 率甲兵三萬以助之.

 

 

대충, 가을 7월에 탁발부의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역을 일으켜서, 헌종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신라에다 병력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는 말입니다. 신라에서는 3만 명을 보내서 진압을 돕게 했습니다. 819년이죠.

 

그런데 사실 이 반란은 이사도가 죽으면서 진압되었습니다. 이사도는 819년 2월에 이미 잡혀 죽었습니다. 따라서 신라가 사신을 받아 군대를 징발할 즈음에는 이미 반란 지역은 사후 처리 중이었을 겁니다. 당시엔 위성 전화 같은 게 없었을 테니까, 2월 전에 보낸 사신이 어쩌어찌하다가 7월에 도착했거나, 그 전에 도착했지만 병력을 신라가 보낸 것이 7월이 아니었나 합니다. 따라서 신라군은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는 데 별 공훈을 세우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사도의 난은 탁발부 역사기 때문에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저 한 줄밖에 없습니다. 자세한 기록을 보시려면 구당서나 신당서를 뒤벼 볼 수밖에 없겠네요. 근데 전 안 봐서 모릅니다.

 

 

 

우측부터 평로절도사, 범양절도사, 하서절도사

 

 

이사도의 난은 평로치청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사도의 할아버지인 이정기가 평로군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평로군의 시작도 재밌습니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755) 평로절도사는 안녹산 본인이 맡고 있었습니다. 평로절도사는 현종 때 설치된 최초의 절도사 중 하나였는데, 요서 지역인 영주에 주둔하면서 동북방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겠죠. 사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안녹산은 범양절도사(북경과 그 부근)와 하동절도사(태원과 그 부근)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력이 아주 무지막지했습니다.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평로군이 모두 반란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회옥(나중의 이정기), 왕현지, 후희일이 반란군 안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노랑은 영주 / 파랑은 이회옥, 왕현지, 후희일의 탈출 방향 / 빨강은 좌상단부터 제주, 치주, 청주, 기주, 밀주, 해주

 

 

이 '반란군의 반란군'들은 안사의 난 중에 요서에서 산동으로 남하해서 산동의 여러 군들을 '탈환'해서 탁발부 조정의 편을 들었다고 합니다. 안사의 난은 762년에 마무리됐는데, 탁발 조정에서는 평로군에게 논공하며 치주(淄州), 청주(靑州), 기주(), 밀주(), 제주(), 해주()를 관할하게 했습니다. 이에 평로절도사에 치청절도사를 더해 평로치청절도사라고 했습니다. 즉, 원래 평로절도사의 관할이던 요서와 치청절도사의 관할인 산동을 모두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평로치청절도사 자체는 탁발선비가 멸망한 이후에도 쭉 유지됐던 것 같습니다. 굴곡이야 있었겠으나, 최종적으로는 북송 태종 연간에 짝눈이의 눈 한 짝처럼, 짝눈이 새끼가 사랑한 자기 아빠의 여자 무측천처럼, 현종이 사랑한 자기 며느리 양귀비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한편 '반란군의 반란군' 중 하나였던 이회옥은 원래 절도사가 아니었으나, 후희일을 축출하고 절도사직을 찬탈했다고 합니다. 탁발부의 대종은 이회옥에게 '정기'라는 이름도 주고 우대해 주었는데, 이정기는 이 때부터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776년에는 15개 주를 통치하는 거대 세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778년엔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의 '운주절도사 이사도' 운운은 아마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운주는 지금의 제녕(濟寧)입니다.

 

 

우측부터 치주, 운주

 

 

멀쩡하게 잘 살던 이정기는 781년에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이유악(李惟嶽)과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 양숭의(梁崇義)가 연합해 탁발부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란에 참여했습니다. 이 반란은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때, 반란군측 투항자였던 이보신이 죽자 이유악이 그 세력을 물려 받으려 한 것을 탁발씨가 거절했기 때문에 터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평로치청절도사도 안녹산, 사사명의 난의 배신자들이었죠. 반란군은 낙양으로 들어가는 수운을 막고 탁발 조정과 결전을 치를 태세까지 갔지만, 이정기가 781년에 병으로 죽으면서 인류가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양숭의는 781년에 죽었고, 이유악은 782년에 죽었습니다. 탁발부는 다른 절도사들을 동원해 이 반란을 진압했는데, 반란을 진압한 절도사들은 이후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아주 개판이죠? 하지만 이 상황은 제 글의 주제를 넘기 때문에 상세히 기술하지 않겠습니다. 잘 모르기도 하고요.

 

 

노랑은 좌측부터 장안, 낙양 / 빨강은 위에서부터 성덕절도사, 산남동도절도사 / 파랑은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의 병은 황달이라는 말도 있고, 종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정기의 '자리'는 아들인 이납이 물려받았는데, 이납은 제나라의 왕을 칭하며 여전히 반란을 이어갔습니다. 이 와중에 덕종은 783년 10월엔 봉천으로 도망가기까지 했다니 위세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봉천은 지금의 함양 건현입니다. 784년에는 이 반란을 묵인하고 절도사들을 군왕으로 봉했는데, 이납은 농서군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파랑은 평로치청절도사 / 빨강은 회서절도사

 

 

이납 이후에도 절도사들의 반독립 상태는 두 대나 더 이어졌습니다. 이납은 792년에 죽었고, '왕위'는 아들인 이사고에게 이어졌습니다. 이사고는 806년에 죽었고, '왕위'는 이복동생인 이사도에게 이어졌습니다. 그 중에 탁발부 조정에서는 덕종이 805년에 죽고, 그 아들 순종이 제위에 올랐으며, 순종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아들인 헌종에게 제위를 주었다가 다음해인 806년에 죽었습니다. 헌종이 제위에 오른 후 탁발부는 번진들의 반란에 다시 공세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15년부터 817년까지 회서절도사 오원제를 때려잡았는데, 이것이 충격이었는지 반독립상태였던 절도사들이 탁발부에 많이 귀부했다고 합니다. 818년부터는 평로치청절도사인 이사도를 공격해 상기한 것처럼 819년 2월에는 잡아 죽이는 데 성공하죠.

 

 

 

이것이 바로 이사도의 난, 또는 평로치청의 난의 전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냥 중국 안에서 일어난 내부 반란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예전에 장보고를 다룬 판타스틱 울트라캡숑 퓨죤 드래머틱 자본주의 샹댠만능주의 드라마 해신이 방영됐을 때 반짝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정기가 고구려계거든요. 이 때는 고구려가 망한 지 이미 150여 년이 지났을 때기 때문에 고구려계라는 게 의미가 있겠냐만은 구당서에서는 헌종이 이사도를 보고 '麗兇黨'라고 했답니다. 흉악한 고구려놈들이란 말이래요.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그랬던 모양입니다.

 

이 '반란', '건국' 사건이 발해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거나, 아님 정말 이정기와 그 가족들이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했음 충격이 남달랐을 텐데 싶습니다. 저는 무식해서 잘 모릅니다. 전공자에게 물어 보세요.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장보고가 바로 이 전쟁에서 출세했다는 점입니다. 장보고는 중국으로 건너간 뒤, 이 전쟁에서 조정의 편을 들었습니다. 이후 '무령군중소장'의 직위를 얻었죠. 어디서 보기로는 1~5천 여 명을 통솔하는 장군이라고 하더라고요. 장보고는 흥덕왕 때 신라에 돌아와 청해에 진을 만드는데, 아마 군중소장의 직책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장보고는 김씨도 아니고, 귀좇도 아니었으니까요. 신무왕이 되는 김우징은 쿠데타를 일으킬 때 장보고의 세력을 등에 업었었습니다.

 

 

청해

 

 

 

 

장보고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요.

 

philosophistory.tistory.com/33

 

장보고와 청해진(삼국사기 신무왕본기 중)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본기 외에 열전이 따로 있습니다. 신당서 동이전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삼국사기의 열전은 신당서의 열전을 베껴 온 것 같습니다. 내용이 거��

philosophistory.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