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산 전투와 730년대 국제 위기

2020. 4. 28. 10:59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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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 마도산 전투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성덕왕본기에 이 당시 국제전의 단면만이 나와 있습니다.

 

 

지난 번에 성덕왕 시기 발해 공격을 설명하면서 발해와 탁발부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등주를 네이팜으로 폭격한 사건은 말씀드렸는데 정작 중요한 마도산 전투는 빼먹었죠. 이번엔 마도산 전투를 중심으로 730년대에 발해, 탁발부 사이의 분쟁이 동북아 국제전으로 번질 수 있었다는 걸 설명해 보려 합니다.

 

 

 

 

발해와 탁발부는 발해 건국 당시부터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발해가 탁발부가 점령했던 고구려 영토를 수복하며 생겼으니 당연했겠죠.

 

고왕(최수종)이 훙하시고 무왕이 왕위에 오르고 발해와 탁발부 사이의 갈등은 심해집니다. 무왕대의 갈등은 주로 흑수말갈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졌다고 합니다.

 

탁발부에 인질로 가 있었던 대문예(무왕 동생)는 당시 탁발부가 세계적으로 흥성한 야만좇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왕이 흑수말갈을 공격하라고 한 명령을 씹고 탁발부로 망명해 스스로 선비족이 되고 맙니다. 이게 726년입니다.

 

이후 탁발부에서는 흑수말갈을 유주도독의 관할로 형식적으로 집어 넣으며 발해를 도발합니다. 728년입니다.

 

이 때까지 발해와 탁발부 사이의 갈등은 그냥 이웃집 사람들끼리 손가락으로 엿을 날리는 정도였습니다. 서로 군사적으로 충돌한 건 아닌 것 같거든요.

 

 

 

그런데 730년에 탁발부에 예속해 있던 거란좇이 돌궐과 붙어 요서에서 탁발부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반란의 주모자는 가돌우可突于라는 사람이었어요. 가돌우는 칸이나 왕을 스스로 칭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세운 뒤 실질적으로 반란을 이끕니다.

 

가돌우의 반란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거란의 역사를 잘 정리해 놓으심.

 

https://blog.naver.com/jjoopark07/140161319532

 

 

 

문제는 730년의 반란이 발해와 탁발부 사이의 갈등이 한창 고조될 때 터졌다는 점입니다. 가돌우는 돌궐에 의탁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는데, 발해와도 뒤로 연결돼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반란이 터진 뒤에 아마 지원을 받긴 받았을 것입니다. 거란 반란군은 탁발선비에 대해 발해의 대리전을 치렀던 것이죠.

 

가돌우의 반란은 736년에는 대체로 정리됐다고 합니다. 반란군이 요서에서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자 발해도 732년에는 군사 행동을 시작하죠. 바로 장문휴를 보내 산동의 등주를 털어버린 겁니다.

 

등주 공격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발해는 등주를 불태우고 등주자사를 잡아 죽여 버렸는데, 등주는 산동의 중요한 항구 거점이었기 때문에 탁발부는 등주를 복구하는 데 재정을 막대하게 지출해야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듬해인 733년에 탁발부의 현종이 신라에 발해 공격을 요청한 계기(심국사기 성덕왕본기)도 등주 공격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산동 지역은 수양제, 짝눈이, 짝눈이 새끼가 고구려를 해군으로 공격할 때 출발지였기 때문에 후방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전략적인 판단도 개입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난 번 글에서 등주 공격 이후에 발해와 탁발부 사이에 큰 전투 없이 거란군 반란이 진압된 이후 화해했다고 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등주를 털린 탁발부는 733년 정월에 대문예를 유주(북경 근처)로 보내 군대를 모아 발해를 공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정월에 김사란을 신라에 돌려보내면서 성덕왕이 발해를 쳐 줄 것을 부탁합니다. 다만 이 요청 기사가 삼국사기에는 7337월에 기재돼 있는 걸로 보아 사신이 도착한 것은 1월과 7월 사이,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 것이 7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무왕은 대문예를 암살하려 했답니다. 암살은 실패했습니다. 733년이라는데 몇 월인지는 모르겠네요.

 

 

 

7333월에 양군은 마도산에서 모여 싸웁니다. 마도산은 지금의 산해관, 난하 근처라네요. 마도산에서는 탁발부와 해(우문선비의 일파라고 함)이 한 패였고, 거란, 돌궐, 발해가 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가 탁발부를 배신하면서 탁발부가 크게 패했다고 하네요.(한창려집이라는 책에서는 발해군이 도착한 게 전투 직후였다고 함.)

 

탁발부는 마도산 전투 직후 참호를 3장 깊이나 파서 400리를 이었다고 하는데, 3미터 정도라고 하니 참호를 9미터나 팠다는 걸까요? 아무튼 깊이 팠다는 거겠죠?

 

탁발부의 참호는 발해, 돌궐, 거란이 장성 이남의 하북 지역으로 내습해 오는 것에 대한 최후의 방어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발해 연합군이 더 진격하지는 않았던 것 같거든요.

 

 

 

한편 733년 정월에 현종이 성덕왕에게 한 부탁은 동년 7월 기사로 삼국사기 성덕왕본기에 등장합니다. 7월 기사로 신라군이 발해를 공격했다가 눈이 많이 내려서 그냥 퇴각했다고 합니다. 발해군에 패했는지, 아님 진짜 눈이 많이 와서 그랬는지는 교차검증할 기사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越海入寇登州, 遣太僕貟外卿金思蘭歸囯, 仍加授王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發兵擊靺鞨南鄙. 㑹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死者過半, 無㓛而還. 金思蘭夲王族, 先因入朝, 恭而有禮, 因留宿衛. 及是, 委以出疆之任.

 

 

 

그런데 마도산 전투가 7333월이고, 성덕왕의 공격이 7337월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무왕이 장성 이남으로 진격하지 못한 것이 어쩌면 성덕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현종이 설마 정월에 당군이 마도산에서 패할 것을 예견해서 성덕왕에게 발해의 후방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결과론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긴 하니까요.

 

가돌우는 734년에 죽는다고 합니다.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그렇게 나와 있는데 제가 직접 기록을 본 건 아니라서 확실하진 않습니다.

 

거란족의 반란은 736년이면 대체로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발해와 탁발부도 그 이후 포로를 돌려 보내며 휴전했다고 합니다. 양측 다 전면전을 벌이기엔 그 당시엔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보면 730년 당시 발해와 탁발부 사이의 분쟁은 당사국 외에도 거란, (우문부), 돌궐, 신라가 끼어들었던 국제적 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빠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속왜놈기를 보면, 728년에 왜와 발해가 서로 사신을 주고 받습니다. 730년에는 왜의 사신이 발해에서 왜로 돌아가죠.

 

그런데 삼국사기 성덕왕본기 731년 기록을 보면, 왜놈들이 병선 300척을 보내 신라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짤막하게 막았다고만 나와 있어 그 전말이나 전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300척이라는 규모를 볼 때 해적 찌끄레기가 아니라 정규군이라고 봐야 하겠죠.

 

 

日夲國兵舩三百艘, 越海襲我東过, 王命将出兵, 大破之.

 

 

어쩌면 왜놈들이 발해의 사주를 받고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정황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데, 근데 정작 속일본기에는 이런 기록이 없는 것 같아요. 730년 전후로 발해와 왜 사이에 사신이 빈번히 오가긴 했거든요. 반약 발해에서 신라를 공격해 달라고 했으면 속일본기에도 아마 좋다고 적어 놨을 텐데 그런 말이 없는 것 같아서 좀 의아합니다.

 

하지만 만약 억측해서, 발해가 탁발부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탁발부의 편을 들 수 있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왜놈들에게 신라에게 깝쳐 달라고 부탁했다면, 730년경의 '위기'에는 왜놈들도 한 숟가락 올린 셈이 되겠죠. 드라마 작가들이 좋아할 소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역사의 영역입니다.

 

1. 730년대의 발해, 탁발부의 분쟁은 돌궐, 거란, , 신라가 개입된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2. 발해는 탁발부의 등주를 전소시켜 엿을 크게 먹였다.(732)

 

3. 발해, 돌궐, 거란 연합군은 마도산에서 크게 이겼다.(733)

 

4. 대문예 남생이 같은 새끼.

 

5. 발해는 장성 이남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6. 성덕왕은 현종의 부탁으로 발해를 공격했지만 돌아왔다.(733)

 

7. 왜놈들이 신라를 공격했다가 깨졌다. 아마도 정규군?(731)

 

 

이하는 드라마의 영역입니다.

 

8. 730년대 분쟁에서 발해 등은 장성 이남으로 진격하여 탁발부와 전면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아마 그러려 했던 것 같지만 성덕왕의 공격 때문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9. 왜놈들의 731년 신라 공격은 발해의 사주 또는 충동질 때문이었다.

 

10. 신라-당 동맹, 돌궐-거란-발해-일본의 동맹이 서로서로를 견제했다.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하십쇼.

 

726년 발해가 대문예에게 흑수말갈 공격 명령. 대문예 항명 이후 탁발선비로 망명.(신탁발서?)

 

728년에 발해가 왜놈들에게 고제덕을 사신으로 보내고, 다시 왜놈들이 발해로 사신을 보냄.(속왜놈기)

 

728년 탁발선비, 흑수말갈을 유주도독 관할 하에 둠.(형식적)

 

730년에 발해서 왜놈 사신이 돌아감.(속왜놈기)

 

730년에 거란족이 돌궐에 붙어 탁발부에 반란을 일으킴.

 

731년에 왜놈들이 병선 300척으로 신라 공격. 신라 승리.(삼국사기 경덕왕본기)

 

732년 발해가 장문휴를 보내 등주를 공격. 자사 위준 뒈짐.(구탁발서)

 

733?월 무왕이 대문예를 암살하려 함. 실패.(구탁발서)

 

7331월 탁발선비가 대문예를 보내 발해 공격(원정군 파견인 듯) (구탁발서?)

 

7333월 마도산 전투(발해 승) (구탁발서, 신탁발서?)

 

발해, 돌궐, 거란 대 탁발선비, (마지막에 배신)

 

7337월 현종이 성덕왕에게 발해 공격 요청. 신라가 공격했지만 실패.(삼국사기 성덕왕본기) 아마도 이 때 발해군 퇴각?

 

736년 거란족 반란 진압됨. 이후 발해와 탁발선비는 화친.

 

737년 무왕 훙하심. 성덕왕 훙하심.

 

 

 

* 이 글의 교훈은 사료를 하나만 읽지 말고 여러 개를 같이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읽으세여.

 

 

* 이 글도 참고하세요.

 

https://blog.naver.com/kin123sa9510/221424166664

 

ㅡㅡㅡ 근데 이 글에서는 발해가 아니라 돌궐을 주체로 보네요.

 

찾아 보니 이 때가 돌궐 2제국 시대인데, 아마 링크의 관점이 좀 더 타당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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