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의 난(삼국사기 헌덕왕본기 중)

2020. 5. 4. 17:40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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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무열왕계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 때 귀족 반란이 여러 번 있었다는 점은 기억하실 겁니다. 모르는 분들은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4

 

혜공왕대의 귀족 반란들(삼국사기 혜공왕본기 중)

혜공왕은765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8살이랬습니다. 8살이 정치를 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태후가 섭정했답니다. 아마도 태후는 혜공왕의 엄마인 만월부인일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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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이 어리기도 어렸고, 정치도 잘 못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780년에 터진 반란 때 혜공왕은 와이프와 함께 죽고 맙니다. 이것이 김지정의 난입니다.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 사람이 김양상과 김경신입니다. 김양상, 김경신이 사실 혜공왕을 반란 중에 잡아 죽인 게 아니냐는 말도 있죠. 이에 대해서도 위의 글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김지정의 난 진압 후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왕위에 오르지만 얼마 안 가 죽고, 이어 김경신과 김주원이 왕위를 두고 경쟁했습니다. 그런데 기상청의 오보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죠. 바로 원성왕입니다. 김주원은 무열왕계, 김경신은 내물마립간계입니다. 이후 왕위 경쟁에서 밀려난 김주원은 명주(강릉)로 가서 조용히 살게 됩니다. 그리고 원성왕 이후 신라 왕은 원성왕의 후손들이 거의 독점하게 되죠. 이에 대해선 다음 글을 참고해 주세요.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6

 

명주군왕 김주원(삼국사기 원성왕본기 중)

김지정의 난 중에 혜공왕과 그 와이프가 죽습니다.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 것은 김양상과 김경신입니다. 혜공왕이 후사 없이 시해되고 왕위에 오른 것은 쿠데타의 주체였던 김양상(선덕왕)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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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쌓이니까 자기 인용도 하고 좋네요.ㅋ

 

김주원 본인의 생각이 어땠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남아있는 게 없으니까요. 다만 김주원의 아들을 비롯한 후손들은 신라의 정계에 계속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명인만 꼽아 보면 반골의 다크호스 김헌창, 김범문 부자도 있고, '구국의 충신'이자 유능한 정치인인 김양도 있죠. 여기서는 아들인 김헌창, 그리고 손자인 김범문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 겁니다.

 

 

 

원성왕이 왕위에 오른 것이 785년 1월입니다.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은 원성왕, 소성왕을 지나 애장왕 때에 이르러 요직에 임명됐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모두 삼국사기입니다.

 

 

八年, 春正月, 伊湌憲昌 一作.爲侍中.(807, 애장왕)

 

五年, 春正月, 以伊湌憲昌武珍州都督.(813, 헌덕왕)

 

武珍州都督憲昌入爲侍中.(814, 헌덕왕)

 

八年, 春正月, 侍中憲昌出為菁州都督, 璋如為侍中.(816, 헌덕왕)

 

菁州都督憲昌, 攺爲熊川州都督.(821, 헌덕왕)

 

 

위로부터 차례대로 시중, 무진주(광주와 전남 일대?) 도독, 시중, 청주(진주와 경남 서부 일대?) 도독, 웅천주(공주, 부여 및 충청도 일대? 옛 백제 수도권) 도독으로 임명되었다는 기사입니다. 주의 도독이면 지금의 광역시장이나 도지사급인데, 제 생각엔 홀대 받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중앙 최고직인 시중에도 임명됐었고요. 소방관한테 관등성명도 물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김헌창은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822년 3월에 갑자기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反叛, 國號長安, 䢖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 菁州都督向榮, 脫身走推火郡, 漢山·牛頭·歃良·浿江·北原等, 先知憲昌逆謀, 舉兵自守.

 

 

김헌창의 명분은 아빠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반란 이후 김주원 등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없고, 김주원의 증손인 김양이 멀쩡히 신무왕을 도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볼 때 김주원의 후손을 비롯한 보통 무열왕계가 반란에 가담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김헌창의 명분은 그냥 생색 내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당시의 민심입니다. 헌덕왕 즉위 중 상당한 기간 동안 신라는 기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즉위 직전인 809년부터 가뭄(애장왕), 815년에 기근 때문에 민란, 816년엔 기근 때문에 백성들이 절강 레이드, 817년에 또 가뭄, 820년에 가뭄과 기근, 821년엔 기근 때문에 자식까지 팔았다고 하고, 김헌창의 난이 터지기 직전인 822년 2월에도 대설과 나무 피해가 있었습니다.

 

 

大旱.(애장왕, 809)

 

西邉州郡大飢, 盗賊蜂起. 出軍討平之.(헌덕왕, 815)

 

年荒民飢, 抵浙東求食者一百七十人.(헌덕왕, 816)

 

夏五月, 不雨, 遍祈山川, 至秋七月乃雨. 冬十月, 人多飢死, 教州郡, 發倉穀存恤.(헌덕왕, 817)

 

十二年, 春夏旱, 冬飢.(헌덕왕, 820)

 

十三年, 春, 民饑, 賣子孫自活.(헌덕왕, 821)

 

二月, 雪五尺, 樹木枯.(헌덕왕, 822)

 

 

통치 자첵가 흔들리지는 않았으나, 배를 계속 굶는데 민심이 흔들리는 건 예상 가능한 일입니다. 815년과 819년에는 민란과 도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아마 기근의 여파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민란이 일어난 곳은 나라의 서부라고 했으니, 아마 전라도나 충청도 같이 옛 백제 지역이 아니었을까요? 즉, 반란은 계기에는 김헌창 개인의 욕심도 있었겠으나, 지속된 기근 때문에 조정에서 민심이 떠날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김헌창의 반란에 무진주, 완산주, 사벌주, 청주 도독이 협박에 굴복해 가담했다고 합니다. 이 영역을 모두 합치면 지금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남북도 서부 전부가 가담한 것입니다. 이에 국원경(충주), 서원경(청주), 금관경(김해)의 사신(소경의 통치자인 듯)들까지 가담한 걸 보면, 경남 동부 일부 지역도 반란군에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신라 영토의 2/3 정도가 반란군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반면 한산주(경기도 및 황해도), 우두주(영서 지방), 삽량주(당시 신라의 수도권), 패강진(평양? 우봉?), 북원경(원주)에서는 반란 사실을 미리 알고 싸울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는 협박에 넘어가고, 어떤 주는 미리 대비했다는 것을 보면 당시 김헌창의 반란 계획은 헌덕왕 빼고? 전부 다 아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헌창이 얼마나 자신만만했길래 반란 계획을 그렇게 짰는지 모르겠지만, 정황상 신라 조정에서는 반란에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벌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조정에서는 아주 신속하게 진압을 시작합니다.

 

 

十八日, 完山長史崔雄·助阿湌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即授崔雄位級湌·速含郡守, 令忠位級湌, 遂差貟將八人, 守王都八方, 然後出師. 一吉湌張雄先發, 迊衛恭·波珍湌悌凌繼之, 伊湌均貞·迊湌雄元·大阿湌祐徴等, 掌三軍徂征. 角干忠恭·迊湌允膺守蚊火關門. 

 

 

이 기사는 822년 3월 18일 기사입니다. 반란이 3월 중에 터졌는데 같은 달 18일에 바로 행동에 나서죠. 진압군에는 일길찬 장웅, 잡찬 위공, 파진찬 제릉, 이찬 균정(신무왕 아빠), 잡찬 웅원, 대아찬 우징(신무왕)이 나섰습니다. 각간 충공(민애왕 아빠)과 잡찬 윤응 문화관문을 지켰다고 하네요. 문화관문은 경남 동부에서 경주로 북상하는 길목입니다.

 

 

明基·安樂二郎各請從軍, 明基與徒衆赴黄山, 安樂施彌知鎮. 於是, 憲昌遣其將, 據要路以待. 張雄遇賊兵於道冬峴, 擊敗之, 衛恭·悌凌張雄軍, 攻三年山城, 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均貞等與賊戰星山滅之. 

 

 

반란은 크게 두 갈래로 진압되었습니다. 크게 장웅, 위공, 제릉의 군대가 하나, 균정, 웅원, 우징의 군대가 하나입니다. 장웅은 도동현(대구, 영천 사이?)에서 반란군을 이기고, 이에 위공과 제릉이 합세해 삼년산성(보은)을 공략하고, 이어 속리산에서 다시 이겼습니다. 즉, 경주에서 상주 쪽으로 북상해 속리산 일대(충청도)를 평정한 뒤 웅진으로 갔습니다. 균정, 웅원, 우징은 성산(성주, 고령)에서 이겼다고 합니다. 균정, 웅원, 우징의 군대는 경주에서 대구 방향으로 서진해 88고속도로를 타고 휴게소에서 끼니를 때운 뒤, 아마도 전북 지역 지나 웅진으로 갔던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주공 외에도 명기와 안락이라는 랑(郎, 화랑?)도 참전했습니다. 이들을 따르는 무리를 각각 황산(논산?)과 시미지진(상주 화서)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후에 어찌 되었는지는 본기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주공 두 군세에 합류해 같이 행동했을 수 있겠습니다...

 

 

諸軍共到熊津,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憲昌僅以身免, 入城固守, 諸軍圍攻浹旬, 城將䧟. 憲昌知不免自死, 從者斷首與身各藏. 及城䧟, 得其身於古塚誅之, 戮宗族·黨與凢二百三十九人, 縦其民. 後論㓛爵賞有差. 阿湌禄眞授位大阿湌, 辝不受. 以歃良州屈自郡, 近賊不汙於亂, 復七年. 先是, 菁州太守廳事南池中, 有異鳥, 身長五尺, 色黒, 頭如五歳許兒, 喙長一尺五寸, 目如人. 嗉如受五升許噐, 三日而死, 憲昌敗亡兆也.

 

이후 모든 군대가 모여 웅진에서 반란군을 깨고, 반란에 가담한 239명을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논공행상이 어쨌느니, 김헌창이가 패할 징조가 있었느니 하는 말이 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보시는 것처럼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에 일어난 반란 중, 견훤이나 궁예를 제외하면 규모가 가장 컸던 반란입니다. 순식간에 영토의 2/3이 날아갔으니까요. 하지만 조정에서는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당시 지휘관들이 아마 유능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헌덕왕이 자기 조카인 애장왕을 때려 죽이는 와중에도, 그것은 중앙 귀좇들끼리의 문제였지, 지방 통치가 흔들릴 정도로 신라의 행정 통치 체제가 붕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주의 도독들이 이탈하기도 했지만, 본기에 ''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들도 신라 조정에 반란을 일으킬 뜻이 분명해서 가담했다고 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또한 김헌창의 난은 순수하게 신라의 중앙군만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점은 신무왕의 쿠데타와 대조적입니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청해진에 의탁해, 김양과 함께 민애왕을 잡아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민애왕의 시점에서 보면, 반역자들이 중앙군을 이기고 외부의 군대를 끌어들여 조정을 뒤엎은 것이 됩니다. 신무왕 이후 신라가 바로 뒤집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분명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은 아빠의 꿈을 마저 이루기 위해 825년 1월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十七年, 春正月, 憲昌梵文髙逹山夀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 攻北漢山州, 都督聦明率兵, 捕殺之.

 

 

마찬가지로 헌덕왕 때입니다. 김범문이 고달산(여주 소재)의 도적들과 반란을 일으키고 평양(여기서는 남평양, 지금의 서울)을 점령하려다가 한산주 도독 총명에게 잡혀 죽었다는 말입니다. 김헌창과는 달리 그 아들은 별로 포스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혹자는 김헌창이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 때문에 혹시 100여 년 앞선 후백제의 탄생이 아닌가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김헌창이 신라의 왕족이었다는 점, 특히 백제를 멸망시킨 무열왕의 직계라는 점, 김헌창이 백제왕을 칭하거나 나라 이름을 백제로 칭하지 않은 점, 그리고 기록상 백제인들이 이에 호응했다는 말이 전혀 없는 점을 토대로 볼 때, 이는 무리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김헌창의 난이 백제의 재탄생이라면, 김범문의 난은 고구려의 재탄생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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