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 4 - 전 3장

2022. 3. 20. 19:55개인 공부(추후 재배치 예정)/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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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3장>

 

詩云:「邦畿千里,惟民所止。」

 

《시》에 이런 말이 있다.

 

"방기 천 리(邦畿千里, 邦은 '나라', 畿는 '경기', 즉 '수도 주변'을 뜻한다. 그러나 畿를 '경계'로 생각해도 괜찮을 듯하다. 《설문해자》에서는 天子千里地//以遠近言之/則言畿也, '天子의 땅 천 리이다. 이를 멀거나 가깝다는 뜻으로 표현하여 畿라고 하였다'라고 했으니, 여기에서는 '경기'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周禮》 「夏官司馬」에 制畿封國/以正邦國, '封國의 畿를 다스려서 邦國들을 바로잡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경계'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백성들이 머물러 사는 곳이로다.(惟民所止, 惟는 의미 없는 조사로 보인다. 止는 '머물러 살다'라고 보면 타당하겠다.)"(원문은 《시》 「商頌」의 「玄鳥」다. 商頌」은 적어서 什 같은 분류가 따로 없다. 商나라의 대체적인 역사와, 商나라의 위대함에 대해 노래하는 시다.)

 

 

<대학집주>

 

詩商頌玄鳥之篇。邦畿,王者之都也。止,居也. 言物各有所當止之處也。

 

《시》 「상송」(商頌)의 「현조」(玄鳥)편이다. 방기(邦畿)는 왕의 수도(王者之都, '왕된 사람의 도읍')다. 지(止)는 산다(居)는 말이다. [이 부분은] 만물이 각자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이 있다는 점(物各有所當止之處, '만물이 각자 마땅히 머물러야 할 장소라는 것이 있다')을 뜻한다.(言)

 

 

 

 

<전 3장>

 

詩云:「緡蠻黃鳥,止于丘隅。」子曰:「於止,知其所止,可以人而不如鳥乎!」

 

《시》에 이런 말이 있다.

 

"꾀꼴꾀꼴 꾀꼬리(緡蠻黃鳥, 黃鳥는 '꾀꼬리'다. 《시》의 「綿蠻」 원문에는 緡蠻이 아니라 綿蠻이라고 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판본에 따라 글자가 바뀌었나 보다. 朱熹는 綿蠻을 鳥聲, '새 소리'라고 하였다. 黃鳥는 '꾀꼬리'이므로, 緡蠻은 '꾀꼴꾀꼴'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구우에 머물러 있도다.(止于丘隅, 丘와 隅는 모두 '언덕'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언덕에 꾀꼬리가 있다'라고 하면 말이 잘 안 맞는다. 「시집전」에는 丘와 隅에 대해 별 다른 설명이 없다. 그런데 「대학집주」에서 朱熹는 丘隅를 岑蔚이라고 하였다. 岑은 '봉우리', '작고 높은 산'이다. 蔚은 여기서는 鬱과 같으니, '초목이 우거져 있다', '울창하다'는 말이다. 《회남자》 「兵略訓」에서 設蔚施伏/隱匿其形/出於不意, '蔚한 곳에 복병을 두고, 형세를 숨겨 놓고는, 불의에 뛰쳐 나간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蔚은 鬱, '울창하다'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岑蔚은 '울창한 숲', '울창한 산', '울창한 봉우리' 따위의 말이겠다. '언덕' 보다는 꾀꼬리에게 잘 어울리리라 생각한다. 「대학집주」의 세주에서는 岑蔚二字本古註, '岑과 蔚 두 글자는 원래 옛날 註에 있던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朱熹가 무엇을 참고하였는지는 모르겠다.)"(원문은 《시》의 「소아 都人士之什」의 「綿蠻」이다. 상기하였듯, 지금 전하는 《시》에는 緡蠻이 아니라 綿蠻이라고 되어 있다. 뜻은 같을 것이다. 「綿蠻」은 어딘가로 가고 있는데, 갈 길이 멀어 고생하는 내용이다. 꾀꼬리는 가는 길에 보이는 대상으로만 등장한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자신이] 있을 [만한] 곳에 대해(於止, 於는 '~에 대해서는'), 꾀꼬리는 있을 [만한] 곳을 알고 있으니(知其所止, 其는 黃鳥), 사람이 새만도 못하다(人而不如鳥) 할 수(可) 있겠느냐.('꾀꼬리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데, 사람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모르니, 새가 사람 보다 낫다')"

 

 

<대학집주>

 

詩小雅綿蠻之篇。緡蠻,鳥聲。丘隅,岑蔚之處。子曰以下,孔子說詩之辭。言人當知所當止之處也。

 

《시》 「소아」(小雅)의 「면만」(綿蠻)편이다. 면만(緡蠻)은 새 소리(鳥聲)다. 구우(丘隅)는 울창한 산(岑蔚之處, 岑은 '작고 높은 산', '봉우리', 蔚은 鬱, '울창하다')이다. 자왈(子曰) 이하는 공자가 《시》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한(說詩之辭) 말인데, 사람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所當止之處)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當知)는 점을 언술하였다.(言)

 

 

 

 

<전 3장>

 

詩云:「穆穆文王,於緝熙敬止!」爲人君,止於仁;爲人臣,止於敬;爲人子,止於孝;爲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

 

《시》에 이런 말이 있다.

 

"찬란하신 문왕이시여(穆穆文王, 穆은 '화목하다', '아름답다', '공경스럽다', '온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穆穆은 '아름다운', '공경스러운' 등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朱熹는 深遠之意, '심원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毛亨은 美,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나는 毛亨을 따른다.), 아아, 끊임 없이 빛나시며 공경스러운 모습으로 머무르[셔야 할 곳에 계]시는구나.(於緝熙敬止, 於는 감탄사로 보인다. 감탄사일 때는 '오'로 읽는다. 緝은 '계속', '이어서', 熙는 '빛나다'는 말이다. 따라서 緝熙는 '계속 빛나다'는 뜻이다. 朱熹는 緝을 續, '계속', 熈를 明, '밝다'로 보고는, 亦不已之意, '또한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즉, 朱熹는 緝熙를 '끊임 없이 빛나다'라고 보았다. 毛亨은 光明, '밝게 빛나다'라고 하였다. 朱熹의 설이 글자의 원의에 더 맞으므로, 나는 朱熹를 따른다.)"(원문은 《시》 「大雅 文王之什」의 「文王」이다. 제목처럼 文王의 정치를 찬미하는 내용이다.)

 

[문왕께서는] 군주가 되었을 때는(爲人君, '남의 군주가 되었을 때', 의역하였다. 이하 같다.) 인으로 일관하셨고(止於仁, 仁를 '머무르다' 대신 '어떠한 자세로 일관하다'라고 의역하였다.), 신하가 되셨을 때는(爲人臣) 공경으로 일관하셨으며(止於敬), 아들이 되셨을 때는(爲人子) 효로 일관하셨고(止於孝), 아비가 되셨을 때는 자애로 일관하셨다.(止於慈, 慈는 '자애') [그리고] 나라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는(與國人交) 신의로 일관하셨다.(止於信)

 

 

<대학집주>

 

詩文王之篇。穆穆,深遠之意。於,歎美辭。緝,繼續也。熙,光明也。敬止,言其無不敬而安所止也。引此而言聖人之止,無非至善。五者乃其目之大者也。學者於此,究其精微之蘊,而又推類以盡其餘,則於天下之事,皆有以知其所止而無疑矣。

 

《시》의 「문왕」(文王)편이다. 목목(穆穆)은 심원하다는 뜻(深遠之意)이다. 어(於)는 탄미사(歎美辭)다. 집(緝)은 계속된다(繼續)는 말이다. 희(熙)는 밝게 빛난다(光明)는 말이다. 경지(敬止)는 문왕이(其, 文王) 공경스러운 모습으로 있어야 할 곳에 언제나 편하게 있다(無不敬而安所止, '공경스러운 모습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다.(言) [이 부분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서(引此) 성인이 계시는 곳은(聖人之止) 지선하지 않는 곳이 없다(無非至善)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言) [문왕이 일관하신] 다섯 가지 자세는(五者, 본문의 仁, 敬, 孝, 慈, 信을 이른다.)(乃) 지선함에 대한 조목의 큰 범주(其目之大者, 其는 至善)라 하겠다. [따라서] 배우는 자들이(學者) 이 다섯 가지에 대해서(於此, 此는 五者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에 정미하게 숨겨진 이치를(其精微之蘊, 其는 五者를 가리키는 듯하다. 精은 '정밀하다', 微는 '미세하다', 즉 精微는 '정밀하고 미세하다'는 말이다. 아주 '세세한 부분'을 뜻한다. 蘊은 '간직하다', '숨기다'로 보아야 타당하다. 《후한서》 「袁張韓周列傳」에 蘊匵古今/博物多聞/三墳之篇/五典之策/無所不覽, '고금의 서적들을 궤짝에 蘊하고 있는데,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은 것이 많고, 三墳에 대한 책이나 五典에 대한 책을 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李賢은 蘊을 藏, '간직하다'라고 하였다. 蘊은 본래 뜻처럼 '쌓다', '쌓여 있다'라고 보아도 타당하다.) 궁구하고(究), 또(又) 그 외의 부분들도 극진히 유추한다면(推類以盡其餘, 其는 五者를 가리키는 듯하다. 推類는 類推, '유추하다'는 말이다.), 천하의 일들에 대해(於天下之事) 그 무엇이든 간에(皆) 자신이 일관해야 할 자세를 깨달아(知其所止, 其는 學者를 가리킬 것이다.) 의심하지 않을(無疑) 경지에 오를 것이다.

 

 

 

 

<전 3장>

 

詩云:「瞻彼淇澳,菉竹猗猗。有斐君子,如切如磋,如琢如磨。瑟兮僩兮,赫兮喧兮。有斐君子,終不可諠兮!」如切如磋者,道學也;如琢如磨者,自脩也;瑟兮僩兮者,恂慄也;赫兮喧兮者,威儀也;有斐君子,終不可諠兮者,道盛德至善,民之不能忘也。

 

《시》에 이런 말이 있다.

 

"저 기가 굽은 곳을 보니(瞻彼淇澳, 瞻은 '보다', 淇는 지금의 河南省에 있는 강 이름이다. 《설문해자》에서는 澳隈/厓也//其內曰澳/其外曰隈, '澳와 隈는 물의 가장자리다. 강 안쪽에 있으면 澳라고 하고, 바깥쪽에 있으면 隈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즉, 澳와 隈는 모두 '강이 굽은 지점'을 뜻한다. 「淇奧」 원문에는 澳가 아니라 奧라고 되어 있다. 의미는 같게 본다.), 푸른 대나무 의의하도다.(菉竹猗猗, 菉은 원래 '녹두'인데, 여기서는 竹을 수식하므로 綠으로 보고, '푸르다'라고 해야 한다. 「淇奧」 원문에는 菉이 아니라 綠으로 되어 있다. 猗猗에 대해서는 毛亨은 美盛貌, '아름답고 성대한 모습', 朱熹는 始生柔弱而美盛, '처음 자라 유약하면서도 아름답고 무성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군자여(有斐君子, 朱熹는 斐가 文章著見之貌, '文章이 뚜렷하게 보이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文章은 글이라기 보다는 '무늬', '그림' 혹은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淇奧」 원문에는 斐가 아니라 匪라고 되어 있는데, 두 글자는 서로 통용된다. 毛亨은 匪에 대해 文章貌,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였다. 有는 의미 없는 조사 같다.), 자른 것 같기도 하고, 쓴 것 같기도 하며(如切如磋, 切은 '자르다', '끊다', 磋는 '줄로 쓸다'), 쫀 것 같기도 하고, 간 것 같기도 하구나.(如琢如磨, 琢은 '쪼다', 磨는 '갈다') 엄숙하기도 하고, 위엄 있기도 하며(瑟兮僩兮, 毛亨과 朱熹는 모두 瑟을 矜莊貌, '삼가 엄숙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僩에 대해서 毛亨은 寬大, '관대한 모습'이라고 하였고, 朱熹는 威嚴貌, '위엄 있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살펴 보면, 瑟兮僩兮와 뒤의 赫兮喧兮는 비슷한 의미의 글자를 둘씩 묶어서 앞뒤로 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 僩에 대해서는 毛亨과 朱熹의 설이 배치되는데, 赫과 喧에 대해서는 둘의 설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赫와 喧의 의미가 같으니, 瑟과 僩도 같은 의미로 보아야 대구가 맞게 된다.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빛나기도 하고, 너그럽기도 하다.(赫兮喧兮, 毛亨은 赫을 有明德赫赫然, '밝은 덕이 빛나는 모습'이라고 하였고, 喧을 威儀容止宣著, '위엄 있는 儀容을 그만 두고 은택을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朱熹는 喧을 宣著貌, '밝게 드러나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군자여(有斐君子), [나는 그대를] 끝내 잊을 수가 없도다.(終不可諠兮, 「淇奧」 원문에는 諠이 아니라 諼이라고 되어 있고, 毛亨과 朱熹 모두 諼을 忘, '잊다'라고 하였다. 「대학집주」에서 朱熹는 諠에 대해서도 忘, '잊다'라고 설명하였다.)"(원문은 《시》 「國風 衛風」의 「淇奧」다. 강을 배경으로 君子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내용이다.)

 

자른 것 같기도 하고, 쓴 것 같기도 하다고 한 점은(如切如磋者) [군자가] 학문을 닦는 것(道學, 道는 '행하다'로 봐야 할 듯하다. 朱熹는 言, '말하다'라고 보았다.)을 이르고, 쫀 것 같기도 하고, 간 것 같기도 하다고 한 점은(如琢如磨者) [군자가] 자신을 수양하는 것(自脩, 脩는 修)을 이른다. 엄숙하기도 하고 위엄 있기도 하다고 한 점은(瑟兮僩兮者) [사람들이 군자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恂慄, 두 글자 모두 '두려워서 떤다'는 말이다. 전후 내용상 恂慄의 주체는 君子가 되어서는 안 된다.)을 이르고, 빛나기도 하고 너그럽기도 하다고 한 점은(赫兮喧兮者) [군자의] 위의(威儀, '위엄 있는 거둥', '위엄 있는 몸가짐')를 이른다. 아름다운 군자여, [나는 그대를] 끝내 잊을 수 없다고 한 점은(有斐君子/終不可諠兮者), [군자의] 도가 왕성하고, 덕이 지선하여서(道盛德至善) 백성들이 [군자를] 잊지 못한다는 것(民之不能忘)을 이른다.

 

 

<대학집주>

 

詩衛風淇澳之篇。淇,水名。澳,隈也。猗猗,美盛貌。興也。斐,文貌。切以刀鋸,琢以椎鑿,皆裁物使成形質也。磋以鑢鐋,磨以沙石,皆治物使其滑澤也。治骨角者,既切而復磋之。治玉石者,既琢而復磨之。皆言其治之有緒,而益致其精也。瑟,嚴密之貌。僩,武毅之貌。赫喧,宣著盛大之貌。諠,忘也。道,言也。學,謂講習討論之事,自脩者,省察克治之功。恂慄,戰懼也。威,可畏也。儀,可象也。引詩而釋之,以明明明德者之止於至善。道學自脩,言其所以得之之由。恂慄、威儀,言其德容表裏之盛。卒乃指其實而歎美之也。

 

《시》 「위풍」(衛風)의 「기오」(淇澳, 《시》에는 「淇奧」라고 되어 있다.)편이다. 기(淇)는 강 이름(水名)이다. 오(澳)는 물굽이(隈)다. 의의(猗猗)는 아름답고 성대한 모습(美盛貌)이다. [글의 종류는] 흥(興, 원래 《시》는 민간 가요인 「風」, 귀족적인 「雅」, 제사 지낼 때 부르던 「頌」으로 나뉜다. 「雅」를 「大雅」와 「小雅」로 나누고, 이 네 가지를 四始라고 한다. 그러나 문체나 서술 방식에 따라 또 분류하기도 한다. 興은 흥미나 감동을 주는 글, 賦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글, 比는 비유한 글이다. 「風」, 「雅」, 「頌」과 興, 賦, 比를 합쳐서 六義라고 한다. 六義는 고대부터 있었다.)이다. 비(斐)는 화려한 모습(文貌)이다. 자를 때는 칼과 톱을 쓰고(切以刀鋸, '자르는 것은 칼과 톱으로써 하고', 切은 '자르다', 鋸는 '톱'), 쫄 때는 망치와 끌을 쓰니(琢以椎鑿, '쪼는 것은 망치와 끌로써 하니'), 모두(皆) 사물을 잘라서(裁物, 裁는 '자르다') 형질을 구성해(成形質) 주는(使) 일이다. 쓸 때는 줄과 대패를 쓰고(磋以鑢鐋, '쓰는 것은 줄과 대패로써 하고', 磋는 '쓸다', '갈다', 鑢는 '줄', 鐋은 '대패'), 갈 때는 모래나 돌을 쓰니(磨以沙石, '가는 것은 모래와 돌로써 하니', 磨는 '연마하다', '갈다'), 모두 사물을 다스려서(治物) 윤을 내는(使其滑澤, 其은 治物의 物, 滑과 澤은 모두 '윤택이 나다', '윤이 나다'는 뜻이다.) 일이다. 뼈나 뿔을 다루는 사람은(治骨角者) 먼저 자르고(既切, 既는 復과 대구를 이루는 말로, 일의 선후 관계를 뜻한다. 여기서는 '먼저'라고 보았다.) 다시 쓸며(復磋之, 之는 骨角), 옥이나 돌을 다루는 사람은(治玉石者) 먼저 쪼고(既琢) 다시 가니(復磨之, 之는 玉石), [이 사례들은] 전부(皆) 어떤 일에든(其治, 其는 治骨角과 治玉石을 가리킨다.) 순서가 있어서(有緒, 緒는 序, '차례'), [이 순서를 지켜야] 더욱(益) 정밀한 경지에까지 도달하게(致其精, 其는 治骨角과 治玉石을 가리킨다.) 된다. 슬(瑟)은 엄밀한 모습(嚴密之貌)이다. 한(僩)은 굳건한 모습(武毅之貌, 武와 毅는 모두 '굳세다'는 말이다.)이다. 적(赫)과 훤(喧)은 [은택을] 베풀어서 드러나는 것이 성대한 모습(宣著盛大之貌, 宣은 '베풀다', 著는 '드러나다')이다. 훤(諠)은 잊다(忘)는 말이다. 도(道)는 말하다(言)는 뜻이다. 학(學)은 강습하거나 토론하는 일(講習討論之事)을 이른다. 자수(自脩)라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거나 극치하는 일(省察克治之功, 省察은 '생각하고 반성한다'는 말이다. 克은 '이기다', 治는 '바로잡다'이므로, 克治는 '자기 욕구를 이기고 자신을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을 이른다. 순율(恂慄)은 두려워서 떤다(戰懼, 두 글자 모두 '무서워서 떤다'는 말이다.)는 뜻이다. 위(威)는 두려워할 만하다(可畏)는 뜻이다. 의(儀)는 본받을 만하다(可象, 象은 '본받다')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시》를 인용하여(引詩) 풀이하면서(釋之, 之는 詩), 명명덕을 밝힌 자(明明明德者, 가장 앞의 明은 '밝히다', 明明德은 經에 나왔던 明明德이다.)(之) 지선한 경지에 머문다(止於至善)고 하고 있다. 도학과 자수(道學自脩)는 명명덕을 밝힌 사람이(其, 明明明德者) 지선한 경지에 머물 수 있게 된 이유(所以得之之由, '지선한 경지에 말미암은 것', 所以는 '~하는 것'이라고 보면 좋겠다. 得之의 之는 止於至善 혹은 至善을 가리킨다. 由는 '말미암다', '원인'이다.)에 대한 말이다.(言) 순율(恂慄)은 위의(威儀, '위엄 있는 몸가짐', '위엄 있는 거둥')인데, 군자의 덕용이(其德容, 其는 君子, 德容은 '덕스러운 용모', '덕이 있어 보이는 용모') [군자의] 안팎으로 왕성하다(表裏之盛)는 점을 뜻하니(言), 마침내(卒) 이를 가지고(乃) 군자의 행적을 드러내어(指其實, 指는 '가리키다', '지칭하다', 其는 君子, 實은 行實이라고 보면 타당하겠다.) 군자를 탄미하였던(歎美之, 之는 君子, 歎은 '탄복하다', 따라서 歎美는 '아름다움에 탄복하다'는 말이다.) 것이다.

 

 

 

 

<전 3장>

 

詩云:「於戲前王不忘!」君子賢其賢而親其親,小人樂其樂而利其利,此以沒世不忘也。

 

《시》에 이런 말이 있다.

 

"아아, 옛 왕을 잊을 수가 없도다.(於戲前王不忘, 지금 《시》에는 於戲가 於乎라고 되어 있다. 뜻이 같다고 보면 감탄하는 말이라 하겠다. '오호'라고 읽는다.)"(원문은 《시》 「周頌 淸廟之什」의 「烈文」이다. 周나라의 정치와 德을 찬미한 시다.)

 

군자(君子)는 옛 왕이 어지셨던 점을 존경하고(賢其賢, 其는 前王을 가리킨다. 뒤의 賢은 '어짐', '현명함', 앞의 賢은 '존경하다'는 말이다.), 옛 왕이 [백성을] 아끼셨던 점을 흠모하며(親其親, 其는 前王을 가리킨다. 뒤의 親은 '아끼다', '자애롭게 하다'는 말이다. 《국어》 「周語」에 慈保庶民/親也, '자애롭게 庶民을 보호하는 것을 親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보면 親은 고대에 '가깝다'를 넘어서 '사랑하다', '자애롭게 대하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언으로 해석해야 한다. 앞의 親은 '사랑하다', '가까이 하다'는 말이다. 나는 '흠모하다'라고 번역하였다.), 소인(小人)은 옛 왕이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던 점을 좋아하고(樂其樂, 其는 前王을 가리킨다. 앞의 樂는 '좋아하다'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자신을] 이롭게 만들어 주었던 점을 유익하게 여긴다.(利其利) 이처럼(此) [군자든 소인이든 모두, 옛 왕이] 세상을 떠나도 [옛 왕의 정치를] 잊지 못한다.(沒世不忘, 沒은 '죽다')

 

 

<대학집주>

 

詩周頌烈文之篇。於戲,歎辭。前王,謂文、武也。君子,謂其後賢後王。小人,謂後民也。此言前王所以新民者止於至善,能使天下後世無一物不得其所,所以既沒世而人思慕之,愈久而不忘也。此兩節詠歎淫泆,其味深長,當熟玩之。

 

《시》의 「주송」(周頌) 「열문」(烈文)편이다. 오호(於戲)는 탄식하는 말(歎辭)이다. 전왕(前王)은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文武)을 이른다. 군자(君子)는 후세의 현자와 왕(其後賢後王, 其는 前王을 이른다.)을 이른다. 소인(小人)은 후세의 백성들(後民)을 이른다. 이 부분은(此) 옛 왕(前王)이 백성들을 깨우쳐서 [백성들이] 지선한 경지에 머무르게 되었고(所以新民者止於至善, '백성들을 깨우침한 바로써 지선한 경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에 당시] 천하와 후세의 모든 만물이 자신의 자리를 찾도록 해 주 셨기에(能使天下後世無一物不得其所, '천하와 후세에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물이 하나도 없게 할 수 있었다', 其所는 '제 자리', '있어야 할 자리', '각자의 본분'이다. 그러면 得其所는 '제 자리를 얻다', '제 자리를 찾다'가 된다.), 이미 [옛 왕들이] 돌아가셨는데도 사람들은 왕들을 사모하고 있으며(所以既沒世而人思慕之, '이미 돌아가셨는데도 사람들이 옛 왕들을 사모하고 있는 것', 之는 前王), [시간이 흘러] 더욱 오래 되었음에도 [백성들이 옛 왕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愈久而不忘, 愈는 '더욱') 언술하고 있다.(言) 이 두 절(此兩節, 「기오」와 「열문」을 인용한 두 절을 뜻하는 듯하다.)은 읽었을 때 [표현은] 영탄하고(詠歎, '감동스럽다') [의미는] 음일하니(淫泆, 원래 淫과 泆은 모두 '음란하다', '방탕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의미로만 보아서는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국어》 「晉語」에 戾久將底/底著滯淫/誰能興之, '안주하기를 오래 하면 장차 기세가 막혀 버릴 텐데, 기세가 막기가 또 滯淫해지면, 누가 나라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韋昭는 滯를 廢, '망하다', '폐하다', 淫을 久, '오래되다'라고 하였다. 혹은 滯가 '막히다'는 말이므로, 滯淫 자체가 '오래 정체되어 있다' 같은 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淫泆의 淫도 이 경우처럼 久로 보아야 한다. 또, 《설문해자》에서 泆을 水所蕩泆, '물이 멋대로 구는 것', 즉 '물이 넘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泆은 '넘치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여운이 넘치는 모습'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즉, 淫泆은 '여운이 커서 오래 가는 모습'을 뜻한다.) 심장하게 음미하고(其味深長, 味는 '음미하다', 其는 此兩節을 가리키는 듯하다.), 익히고 또 익혀야(熟玩, 두 글자 다 '익히다'는 뜻이다. 《열자》 「황제」에 吾與若玩其文也久矣, '우리가 이 글을 玩한지 오래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陸德明은 玩을 習, '익히다'라고 하였다.) 할 것이다.

 

 

 

 

<대학집주>

 

右傳之三章。釋止於至善。

 

위는(右) 전의 3장으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을 풀이하였다.(釋)

 

 

 

 

<대학집주>

 

此章內自引淇澳詩以下,舊本誤在誠意章下。

 

이 장 내용(此章內自, 自은 '세목'을 뜻하는 듯하다.) 중 「기오」(淇澳)를 인용한 부분 이하는, 옛 판본에는 성의 장(誠意章) 아래에 잘못 기재되어 있었다.(誤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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