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 1 - 경

2022. 3. 11. 14:27개인 공부(추후 재배치 예정)/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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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집주>

 

子程子曰:「大學,孔氏之遺書,而初學入德之門也。」於今可見古人爲學次第者,獨賴此篇之存,而論、孟次之。學者必由是而學焉,則庶乎其不差矣。

 

자정자(子程子, 程子를 다시 높이기 위해 子를 앞에 붙여 子程子라고 했다. 세주를 보면, 《춘추공양전》의 주에서 子沈子라고 한 것을 본떠서 子程子라고 한 것이라고 한다. 후학이 선유를 높이는 칭호라고 한다.)가 말했다.

 

"대학(大學)은 공씨(孔氏, 공자를 뜻한다.)가 남긴 글(遺書)이니, 초학(初學,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입덕하는 문(入德之門)이다."

 

지금에 이르러(於今), [우리가] 옛 사람들(古人)이 공부하던(學) 과정(次第, '순서', '차례')을 살필 수 있는(可見) 것은 오로지(獨) 이 편(此篇, 「대학」을 이른다. 「대학」이 원래 《예기》의 한 편이기 때문에 篇이라고 지칭한 듯하다. 「대학」을 분리해서 독립적인 책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한 사람이 朱熹였다.)이 존재하기(存) 때문이니(賴, '의지하다', '힘입다'), 《논》(論, 《論語》를 이른다.)과 《맹》(孟, 《孟子》를 이른다.)은 이 다음이다. [따라서 만약] 배우는 자들이(學者) 반드시(必) 이 글에 근거하여(由是, 是는 「대학」을 이른다.) 공부한다면(學), 그러면(則) 학문의 길이(其) [올바른 길에서] 거의(庶, '거의') 어긋나지 않게 될(不差, '다르다', '차이가 있다', '어긋나다') 것이다.

 

 

<경>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대학」의 도(道)는 명덕을 밝히는(明明德, 뒤의 明은 德을 수식하는 관형어고, 앞의 明은 明德에 대한 용언이다.) 데 있고(在), [또] 백성을 쇄신하는(親民, 程頤는 親을 當作新, '마땅히 新이라고 써야 한다'라고 하였다. 「대학」은 본래 大學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親 보다는 新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親은 원래 '가깝다'는 의미다. 게다가 「大學章句序」에서 朱熹는 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 '사람들에게 이치를 궁구하는 법, 마음을 바로잡는 법, 자신을 수양하는 법,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법의 도리에 대해 가르쳤다'라고 하여, 大學에서 정치에 대해 가르쳤음을 분명히 기술해 두었다. 이에 따라, 大學에서 이 덕목들을 가르치기 위해 「대학」라는 글을 썼다면, 「대학」은 위정자로서의 자세를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국어》 「周語」에 慈保庶民/親也, '자애롭게 庶民을 보호하는 것을 親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보면 親은 고대에 '가깝다'를 넘어서 '사랑하다', '자애롭게 대하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비롭게 대하는 것은 위정자의 덕목이다. 또 《논어》 「학이」에서도 節用而愛人, '節用하여서 愛人한다'라고 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위정자의 덕목으로 꼽고 있으니, 이로써 공자와 그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親도, 글자를 고칠 필요 없이 親으로 보고, '사랑하다', '아끼다'라고 하면 의미가 잘 통한다. 여기서는 程頤를 따라 新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데 있으며, [끝으로] 지선에 [이르러서] 머무는(止於至善, 止는 '머물다') 데 있다.

 

 

<대학집주>

 

程子曰:「親,當作新。」大學者,大人之學也。明,明之也。明德者,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但爲氣稟所拘,人欲所蔽,則有時而昏;然其本體之明,則有未嘗息者。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以復其初也。新者,革其舊之謂也,言既自明其明德,又當推以及人,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污也。止者,必至於是而不遷之意。至善,則事理當然之極也。言明明德、新民,皆當至於至善之地而不遷。蓋必其有以盡夫天理之極,而無一毫人欲之私也。此三者,大學之綱領也。

 

정자(程子)가 말했다.

 

"친(親)은 마땅히(當)(新)이 되어야(作, '쓰다', '되다') 한다."

 

「대학」이라는 것은 대인이 배우는 것(大人之學)이다. [앞의] 명(明)은 어떤 것을 밝힌다(明之)는 말이다.(앞의 明이 용언으로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게서 얻은 것(所得乎天)으로, 허령하지만(虛靈, '포착할 수 없으나 신비로운 것') 어둡지는 않으니(不昧), [천지의] 뭇 이치들(衆理)을 갖추고(具, '갖추다') 있으며, [세상] 만사(萬事)에도 응할(應) 수 있는 것이다. 다만(但) [사람의] 기나 품(氣稟, '기질과 품성') 때문에 구애받기도(拘, '잡히다', '한정되다', '구애받다') 하고, 사람의 욕망(人欲)에 따라 가려지기도(蔽, '가려지다') 하니, 불분명해질(昏, '희미하다', '불분명하다')(時)가 있다.(有) 그러나 명덕의(其, 明德) 본체(本體)는 밝으니(明), [빛나기를] 일찍이 쉰 적이 없다.(未嘗息, 未嘗은 '일찍이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故) 배우는 사람이라면(學者) 마땅히(當) 명덕이 퍼지는 곳(其所發, 其는 明德)에 좇아서(因, '좇다') 이로써(以) 종국에는(遂, '마침내', '결국') [명덕의] 시원을 밝히고(明之, 之는 其所發를 지칭하는 듯하다.), [명덕을] 그 태초의 모습으로(其初, 其는 明德) 되돌려야(復) 한다. 신(新)이라는 것은 오래된 것을(其舊) 혁파한다는(革, '갈다', '고치다') 말이니, 이미(既) 자명한(自明) 명덕을(明德) 또한(又) 마땅히(當) 다른 사람에게 미치도록(以及人) 넓혀서(推, '넓히다', '확충하다'), 그 사람이(之, 及人의 人을 가리킨다.) 또한(亦) 자신의(其, 及人의 人을 가리킨다.) 구염한 때를(舊染之污, 污는 '더러운 것', '때'다. 染은 '물들다'는 뜻이다. 그래서 舊染은 '옛부터 물들어 있는 것'을 이른다.) 없애 버리도록(去, '없애다', '제거하다') 만들라는(使) 점을 뜻한다.(言)(止)라는 것은, 반드시(必) 이 경지(是)에 이르러서 [그 경지에서] 변해서는 안 된다(不遷)는 뜻이다. 지선(至善)은 사리(事理)가 지극히 당연하다(當然之極, '당연하기가 지극하다')는 말이다. 명명덕(明明德)이나 신민(新民)이라고 한(言) 것은 모두 마땅히 지선한 경지(至善之地)에 이르러야 한다는 뜻이요, [그 경지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不遷)는 뜻이다. 이런 경지는(其, 至善之地) 대체로(蓋) 분명(必) 천리의 지극함을 다하는 경지(盡夫天理之極), 그리고(而) 인욕의 사사로운 감정이(人欲之私) 터럭 하나 만큼도(一毫) 없는 경지에 있도다.(有) 이 세 가지(此三者, 본문에 있는 明明德, 親民, 止於至善을 이른다.)가 「대학」의 강령(綱領, 綱은 그물의 '벼리', 領은 '옷깃'이라는 말이다. '벼리'는 그물의 세세한 망이 아니라, 그 세세한 망을 모두 얽고 있는 큰 줄이다. 즉, '벼리'를 끌어 당기면 그물 전체가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옷깃을 들면 옷 전체를 들어 움직일 수 있다. 이처럼 綱領은 '대체적인 핵심', '큰 줄거리의 근본'을 뜻한다.)이다.

 

 

 

 

<경>

 

知止而后有定,定而后能靜,靜而后能安,安而后能慮,慮而后能得。

 

[마음을] 그칠 데를 깨달은(知止) 뒤에야(后는 後, '뒤')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고(有定, 定은 '바로잡다', 혹은 방향을 '정하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바로잡다'를 따른다.),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으며(靜, 靜은 '고요하다', '깨끗하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야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고(安), [마음이] 편안하게 된 뒤에야 [도를] 헤아릴 수 있으며(能慮, 慮는 '헤아리다', '생각하다'), [도를] 헤아리게 된 뒤에야 [도를] 깨달을 수 있다.(能得)

 

 

<대학집주>

 

止者,所當止之地,即至善之所在也。知之,則志有定向。靜,謂心不妄動。安,謂所處而安。慮,謂處事精詳。得,謂得其所止。

 

(止)라는 것은 마땅히 그쳐야 할 지점(所當止之地,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의 지점')이니, 곧 지선한 경지이다.(至善之所在, '지선이 있는 곳')(知)라는 것은 의지가 방향성을 갖췄다(志有定向, 定向은 '정해진 방향', '일정한 방향')는 말이다. 정(靜)은 마음이 망동하지(妄動, '망령되게 움직이다') 않는다는 점을 이른다. 안(安)은 처한 곳이 안정되어 있음(所處而安)을 뜻한다. 여(慮)는 일을 처리하는 모습(處事)이 정밀하고 상세함(精詳)을 이른다. 득(得)은 그 사람이 그칠 곳을 알았다(得其所止) 점을 이른다.

 

 

 

 

<경>

 

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

 

사물에는 본말이 있고(物有本末), 사건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事有終始), 깨닫을 때에는 먼저 깨닫기도 하고 나중에 깨닫기도 하니(知所先後), [이 점을 알면] 도에 가깝다(近道) 하겠다.

 

 

<대학집주>

 

明德爲本,新民爲末。知止爲始,能得爲終。本始所先,末終所後。此結上文兩節之意。

 

덕을 밝히는 것이 본이고(明德爲本, 爲는 '~이다', 이하 能得爲終까지 모두 같다.), 백성들을 깨우치는 것이 말이며(新民爲末), [마음이] 그칠 곳을 아는 것이 시작이고(知止爲始), [도를] 깨닫는 것이 끝이다.(能得爲終) 본과 시작이 먼저 해야 할 것이며(本始所先), 말과 끝이 나중에 해야 할 것이다.(末終所後) 이 글로(此, 知所先後/則近道矣까지의 본문을 이른다.) 윗글(上文) 두 절(兩節)의 의미(意)가 맺어진다.(結, '맺다')

 

 

 

 

<경>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欲齊其家者,先脩其身;欲脩其身者,先正其心;欲正其心者,先誠其意;欲誠其意者,先致其知;致知在格物。

 

옛날, 천하에(於天下) 명덕을 밝히고자(明明德) 하였던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고(治其國), 자기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였던 사람은 먼저 자기 집안을 정돈하였으며(先齊其家), 자기 집안을 정돈하고자 했던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하였고(先脩其身, 脩는 修, '수양하다', '닦다'),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였던 사람은 먼저 자기 마음을 바로잡았으며(先正其心), 자기 마음을 바로잡으려 하였던 사람은 먼저 뜻을 세우기에 성의를 쏟았고(先誠其意), 뜻을 세우기에 성의를 쏟고자 하였던 사람은 먼저 자기 식견을 지극히 하였다.(先致其知) [그런데] 식견을 지극히 한다는 것은 만물을 궁구하[기를 얼마나 잘 하느냐]는(格物) 데 달려 있다.(在)

 

 

<대학집주>

 

明明德於天下者,使天下之人皆有以明其明德也。心者,身之所主也。誠,實也。意者,心之所發也。實其心之所發,欲其一於善而無自欺也。致,推極也。知,猶識也。推極吾之知識,欲其所知無不盡也。格,至也。物,猶事也。窮至事物之理,欲其極處無不到也。此八者,大學之條目也。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明明德於天下)는 말은, 천하 사람들이 전부(天下之人皆) 자신의 명덕을 밝히게(有以明其明德, '자신의 명덕을 밝히는 바가 있다') 만든다(使)는 뜻이다. 심(心)이라는 것은 신체를 주관하는 것(身之所主, 主는 '주관하다')이다. 성(誠)은 실하다(實)는 말이다. 의(意)라는 것은 심이 생겨나는 곳(心之所發)이니, [만약] 선을 가지고 의를 보전하고(一於善, 其는 意를 가리킨다. 一은 '합치다', '같게 하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보전하다', 즉 全이라고 해야 가장 타당하겠다.) 싶다면(欲), [자기]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無自欺, 無는 勿, 欺는 '속이다', '기만하다')(致)는 지극하게 궁구한다(推極)는 말이다. 지(知)는 식견(識)과 같다. [본문에서] 우리의 지식(吾之知識)을 지극하게 궁구하라고(推極) 하였던 것은, 우리가 아는 것들을(其所知, 其는 吾) 극진히(無不盡,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게') 해 주고자 하기(欲, 이 문구는 「대학」의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다. 「대학」이 사람들을 왜 이렇게 가르치고자 하는지에 대한 말이기 때문에 欲이라고 표현하였다. 아래의 窮至事物之理/欲其極處無不到也도 같다.) 때문이다. 격(格)은 지극하다(至)는 말이다. 물(物)은 세상사(事)와 같다. [본문에서] 사물의 이치(事物之理)를 지극하게 궁구해야 한다고(窮至) 한 것은, [사람들이] 사물의 이치의 극진한 경지(極處, 其는 事物之理를 가리킨다.)에 이르도록(無不到, '이르지 않음이 없게') 해 주고 싶기(欲) 때문이다. 이 여덟 가지(此八者, 본문에 나왔던 明明德於天下, 治其國, 齊其家, 脩其身, 正其心, 誠其意, 致其知, 格物을 이른다.)「대학」의 조목(條目, 앞의 나왔던 綱領과 대비된다. 條目은 '그물눈'이다. 그물의 촘촘한 부분을 뜻한다. 綱領이 '큰 줄거리의 핵심'이라면, 條目은 '세세한 내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다.

 

 

 

 

<경>

 

物格而后知至,知至而后意誠,意誠而后心正,心正而后身脩,身脩而后家齊,家齊而后國治,國治而后天下平。

만물이 궁구해진(物格) 뒤에야(后는 後) 식견이 지극해지고(知至), 식견이 지극해진 뒤에야 뜻이 정성스러워진다.(意誠) 똣이 정성스러워진 뒤에야 마음이 바로잡히고(心正),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야 자신이 수양되고(身脩), 자신이 수양된 뒤에야 집안이 정돈되며(家齊), 집안이 정돈된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國治),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야 천하가 평정될(天下平) 것이다.

 

 

<대학집주>

 

物格者,物理之極處無不到也。知至者,吾心之所知無不盡也。知既盡,則意可得而實矣,意既實,則心可得而正矣。脩身以上,明明德之事也。齊家以下,新民之事也。物格知至,則知所止矣。意誠以下,則皆得所止之序也。

 

물격(物格)이라는 것은, 만물 이치의 극진한 경지(物理之極處)에 이른다(無不到,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다. 지치(知至)라는 것은, 나의 마음이 아는 것(吾心之所知)을 극진히 한다(無不盡,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의] 식견이 이미 극진하다면(知既盡) [그 사람의] 뜻도 실해질 수 있게 되고(意可得而實), [그 사람의] 뜻이 이미 실하다면(意既實), [그 사람의] 마음도 바로잡힐 수 있게 된다.(心可得而正) 수신 이상[의 조목들]은(脩身以上, 脩身부터 物格까지를 이른다.) 명덕을 밝히는 일(明明德之事)이요, 제가 하단[의 조목들]은(齊家以下, 齊家에서 平天下까지를 이른다.) 백성을 깨우치는 일(新民之事)이다. 물격과 지치(物格知至)는 식견이 머무르는 것(知所止, 止를 '머무르다'로 의역하였다. 아마 '알고 있는 상태'를 이르는 듯하다.)이요, 의성 이하(意誠以下, 意誠과 心正에서부터 天下平까지를 이른다.)는 모두(皆) [식견이] 머물러야 할 곳의 순서(得所止之序)를 이른다.

 

 

 

 

<경>

 

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皆以脩身爲本。

 

천자로부터(自天子, 自는 '~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至於庶人), 모두 함께(壹은 一, '모두', '함께') 이 모든 덕목들을(是皆, 明明德부터 平天下까지를 모두 이르는 듯하다.) 자신을 수양할 근본적인 방법(脩身爲本)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대학집주>

 

壹是,一切也。正心以上,皆所以脩身也。齊家以下,則舉此而措之耳。

 

일은(壹是, 是는 '~는' 같은 주격 조사로 보인다.) 모두(一切)라는 말이다. 정심 이상[의 덕목들]은(正心以上, 正心부터 物格까지를 이르는 듯하다.) 모두 수신하는 것을 이른다.(所以脩身, 所以는 '~하는 것') 제가 하단[의 덕목들]은(齊家以下, 齊家부터 平天下까지를 이르는 듯하다.), [정심 이상의 덕목들에] 적용되는 사항에 불과하다.(則舉此而措之耳, 耳는 '~할 뿐이다', 직역하면 '이것을 들어서 두는 것에 불과하다'이다. 此와 之는 모두 齊家以下를 이른다. 措를 '처리하다'이므로, '적용하다'로 볼 수 있겠다. 그러면 '齊家以下을 들어서 齊家以下를 적용하는 것'이 된다. 이 말은 齊家, 治國, 平天下가 本이 아니라 末임을 뜻한다.)

 

 

 

 

<경>

 

其本亂而末治者否矣,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

 

[사람이 수양하였다 한들] 그(其, 본문에 지칭 대상이 없다. '수양한 사람'이라고 보면 자연스럽다.) 본은 어지럽고(本亂) 말만 바로잡혀 있는(末治) 경우가 있을 수는 없으며(否, '없다', '~할 리가 없다'), [또한] 자신이 중요한 것을 하찮게 보고(其所厚者薄, 厚는 '두텁다', 薄은 '얇다', 각각 '중요하다', '하찮다'라고 의역하였다.), 하찮은 것을 중요하게 보는(其所薄者厚) 경우도 있을 수가 없다.(未之有, '있지 않다')

 

 

<대학집주>

 

本,謂身也。所厚,謂家也。此兩節結上文兩節之意。

 

(本)은 몸(身, 수)을 이른다. 소후(所厚)는 집안(家, 齊家의 家를 이르는 듯하다.)을 이른다. 이 두 절로 앞 두 절의 뜻(上文兩節之意, 兩節은 自天子以至於庶人과 其本亂而末治者否矣를 이르는 듯하다.)이 맺어진다.(結)

 

 

 

 

<대학집주>

 

右經一章,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其傳十章,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舊本頗有錯簡,今因程子所定,而更考經文,別爲序次如左。

 

위의(右)(經) 한 장(一章)은 대체로 공자의 말한 것이요(孔子之言), 증자가 이를 기술한 것이다.(曾子述之, 之는 孔子之言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에 대한(其, 經一章)(傳) 열 장(十章)은 증자의 뜻이요(曾子之意), 증자의 뜻을 [증자의]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다.(門人記之, 之는 曾子之意를 가리킨다.) [「대학」의] 옛 판본(舊本)에는 착간된(錯簡, 錯은 '섞이다', 簡은 '죽간', 즉 錯簡은 '죽간이 섞여서 뒤죽박죽되어 있는 것'을 이른다.) 경우가 꽤 있어서(頗有), 지금 [나는] 정자가 정한 바(程子所定)에 근거하여(因) 경문(經文)을 다시(更) 상고하고(考), [고본과는] 따로(別) 다음과 같이(如左) 차례를 정하였다.(爲序次, 序次는 두 글자 모두 '차례'라는 말이다.)

 

 

 

 

<대학집주>

 

凡傳文,雜引經傳,若無統紀,然文理接續,血脈貫通,深淺始終,至爲精密。熟讀詳味,久當見之,今不盡釋也。

 

무릇(凡) 전문(傳文)에는 경전들이(經傳) 뒤섞여서(雜, '섞이다') 인용되어(引) 있기에, 통기가 없는 것(無統紀, 統과 紀는 모두 '벼리'다. 따라서 統紀은 '큰 줄기', '큰 맥', '계통', '체계'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같다.(若) 그러나(然) 문리(文理, '글 속의 체계')는 이어지고(接續, 두 글자 모두 '잇다'는 말이다.), 혈맥(血脈, 아마 '핵심'이라는 뜻을 비유한 말이 아닐까 하다.)은 관통하여(貫通, '꿰뚫어 지나가다'), 심오하거나 천근하고, 시작되거나 끝나는(深淺始終) 양태가 [모두] 지극히 정밀하다 하겠다.(至爲精密) [그러므로] 곰곰이 읽어 보고 충분하게 음미하기를(熟讀詳味, 味는 '음미하다', 熟은 '곰곰이', '유심하게'라는 뜻이다. 《사기》 「제도혜왕세가」에서 灌將軍熟視笑曰, '灌將軍이 熟하게 쳐다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熟은 '유심히', '충분히', '지긋이'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래 하면(久) 분명(當) 핵심을 잡아 낼(見之, 之는 「대학」의 핵심을 이른다.) 수 있을 것이니, [그런 부분까지] 지금(今, 아마 經이 끝난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하다.) 해석을 다 하지는 않겠다.(不盡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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