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 1 - 학이 - 10 - 부자지어시방야

2024. 4. 12. 22:36논어 이야기/원문 번역

반응형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논어》 번역에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정태현(鄭泰鉉)의 2013년 번역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皇侃의 《論語集解義疏》, 陸德明의 《經典釋文》, 韓愈의 《論語筆解》, 邢昺의 《論語註疏》, 朱熹의 《論語集註》,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劉寶楠의 《論語正義》,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주석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何晏의 《論語集解》를 참고하였습니다. 본래 《논어》의 주석으로는 朱熹의 《集註》가 유명하지만, 皇侃의 《義疏》에는 南北朝 시대 학자들의 견해가 수록되어 있고, 邢昺의 《註疏》에는 唐代까지의 정통 官學적 관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經典釋文》과 《校勘記》에는 판본에 따라 글자가 어떻게 다른 사례들이 있는지가 소개되어 있고, 劉寶楠의 《正義》에는 이전까지의 연구 성과들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고, 또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俞樾의 《群經平議》에는 여러 가지 이설들이 논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모두 참고하여, 이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설을 택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劉寶楠의 설을 소개하고, 또 俞樾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논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 박정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4년 4월 12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다면 다음 글을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24

 

<하단 주석> 논어 - 1 - 학이 - 10 - 부자지어시방야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philosophistory.tistory.com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必聞其政,求之與?抑與之與?」

子貢曰: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其諸異乎人之求之與?」

 

 

 

자금이 자공에게 물었다.(子禽問於子貢曰, ◈ 子禽은 아마 孔子의 제자일 것이다. 그러나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따로 설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論語》의 이 일화가 「仲尼弟子列傳」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 부분에는 陳子禽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陳子禽은 아마 陳나라의 子禽이라는 말이거나, 아니면 子禽의 氏가 陳이라는 말일 텐데, 따로 열전이 없으니 분명히 구분할 수가 없다.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는 陳亢/陳人/字子元/一字子禽//少孔子四十歲, ‘陳亢은 陳나라 사람으로, 字는 子元이다. 字가 子禽이라고 하기도 한다. 孔子 보다 40살 어렸다’라는 말이 있다. 이 陳亢이 본문의 子禽일 수 있겠다. 다만, 「仲尼弟子列傳」에는 陳亢이라는 사람이 나오지 않고, 이름에 亢이 들어간 사람으로는 原亢籍이라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子禽에 대해, 鄭玄은 陳亢이라고 하였고, 朱熹 역시 陳亢으로 보았다. 다만 朱熹는 孔子의 제자라는 말도 있고, 子貢의 제자라는 말도 있다고 하였다. 劉寶楠은 臧庸이, 「仲尼弟子列傳」에 나오는 原亢籍이 陳亢이라고 한 설을 인용해 두었고, 또 그 말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내가 비교해 보건대, 여러 설 중에 臧庸의 설이 가장 타당하고, 또 臧庸은 자기 설에 대해 근거 역시 들고 있다. 참고할 만하다. ▼ 鄭玄은 子禽/弟子陳亢也, ‘子禽은 弟子인 陳亢이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이 주석 중 亢에 대해, 亢音剛/又苦浪反, ‘亢은 剛이라고 발음한다. 苦와 浪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家語/七十二弟子篇云/陳亢/陳人/字子禽/少孔子四十歲///史記/弟子傳云/端木賜字子貢/少孔子三十一歲, ‘《家語》 「七十二弟子」에 “陳亢은 陳나라 사람으로, 字는 子禽이다. 孔子 보다 40살 어리다”라는 말이 있고, 《史記》 「弟子傳」에는 “端木賜는 字가 子貢이다. 孔子 보다 31살 어리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家語》 「七十二弟子」는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를 이른다. 「七十二弟子解」에는 陳亢/陳人/字子元/一字子禽//少孔子四十歲, ‘陳亢은 陳나라 사람으로, 字는 子元이다. 子禽이라고 하기도 한다. 孔子 보다 40살 어리다’라고 되어 있다. 「弟子傳」은 「仲尼弟子列傳」이다. 「仲尼弟子列傳」에는 端木賜/衛人/字子貢//少孔子三十一歲, ‘端木賜은 衛나라 사람이다. 字는 子貢이다. 孔子 보다 31살 어리다’라고 되어 있다. ▼ 朱熹는 子禽/姓陳/名亢//子貢/姓端木/名賜//皆孔子弟子//或曰/亢/子貢弟子///未知孰是. ‘子禽은 姓이 陳이고, 이름이 亢이다. 子貢은 姓이 端木이고, 이름이 賜다. 모두 孔子의 제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亢은 子貢의 제자다”라고 하였는데, 누가 옳은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臧氏庸/拜經日記/史記/弟子列傳/有原亢籍/無陳亢//蓋原亢即陳亢也//鄭注/論語/檀弓/俱以陳亢爲孔子弟子//當是名亢/字籍//一字子禽//籍/禽也//故諱籍字禽//否則亢言三見論語/弟子書必無不載/太史公亦斷無不録//家語既有原抗/字禽籍/不當複有陳亢子禽矣//明係王肅竄入/原陳之所以不同/何也//蓋原氏出於陳/原陳同氏也//詩/陳風/東方之原///毛傳/原/大夫氏///春秋/莊二十七年/公子友如陳/葬原仲///則原亢之爲陳亢信矣//漢書/古今人表/中中分陳亢陳子禽二人//與魯太師/公明賈/子服景伯/林放/陳司敗/陽膚/尾生高/申棖/師冕同列//又以陳子亢隸下/上與陳棄疾/工尹商陽/齊禽敖/餓者同列//分爲三人/與申棖皆不以爲弟子//此不足據///案/臧說是也//檀弓/陳子車死於衛/其妻與其家大夫謀以殉葬//定/而後陳子亢至///鄭注/子車/齊大夫//子亢/子車弟///則亢亦齊人也//弟子傳/原亢籍/少孔子四十歲///又云/端木賜/衛人//少孔子三十一歲///皇疏本/陳亢也下有字子禽也四字/名賜句/下有字子貢也四字//於文爲複/當是皇所增, ‘臧庸의 《拜經日記》에는 “《史記》 「弟子列傳」에는 原亢籍이라는 사람은 나오지만, 陳亢이라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原亢이 곧 陳亢일 것이다. 《論語》와 「檀弓」에 대해 鄭玄은 모두 陳亢을 孔子의 제자라고 풀이했다. 분명 이름이 亢일 것이고, 字는 籍이었을 것이다. 子禽이라는 字도 있었을 것이다. 籍은 禽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籍을 피하기 위해 禽을 썼을 것이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亢이 《論語》에 세 번이나 나오는데, 제자에 대한 글에 실리지 않았을 리가 없고, 太史公 역시 기록하지 않을 리가 없다. 《家語》에는 原抗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字는 禽籍라고 하였다. 그러나 陳亢, 子禽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으니, 王肅이 原과 陳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잘못 기입했음이 분명하다. 어떻게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原氏가 陳나라에서 나왔을 것이니, 原氏와 陳氏는 같은 氏일 것이다. 《詩》 「陳風」에 ‘東方의 原’이라는 말이 있는데, 毛亨은 傳에서 ‘原은 大夫의 氏다’라고 하였다. 또, 《春秋》 「莊」 27년에 ‘公子 友가 陳나라에 가서 原仲을 장사지냈다’라는 말이 있으니, 原亢이 陳亢이라는 점을 믿을 만하다. 《漢書》 「古今人表」에는 陳亢과 陳子禽 두 사람으로 나뉘어 있으며, 魯太師, 公明賈, 子服景伯, 林放, 陳司敗, 陽膚, 尾生高, 申棖, 師冕과 같은 열에 있다. 또, 陳子亢이라는 사람이 下上에 기재되어 있는데, 陳棄疾, 工尹商陽, 齊禽敖, 餓者와 같은 열이다. 이처럼 세 사람으로 나뉘어 있는데, 申棖과 비교해 볼 때 弟子로 간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점만 가지고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라는 말이 있다. 내 생각에는 臧庸의 설이 타당하다. 「檀弓」에 “陳子車가 衛나라에서 죽었다. 그 妻가 家大夫와 순장할 일을 모의하고, 정하였는데, 그 뒤에 陳子亢이 왔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鄭玄은 “子車는 齊나라의 大夫다. 子亢은 子車의 동생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즉, 子亢 역시 齊나라 사람이다. 「弟子傳」에는 “原亢籍은 孔子 보다 40살 어렸다”라는 말이 있고, 또 “端木賜는 衛나라 사람이다. 孔子 보다 31살 어렸다”라는 말이 있다. 《皇侃本》에는 陳亢也 다음에 字/子禽也라는 네 글자가 더 있고, 名/賜 다음에는 字/子貢也라는 네 글자가 더 있다. 글이 중복되니, 字/子禽也와 字/子貢也는 분명 皇侃이 추가한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臧庸은 江蘇 사람으로, 淸나라 때의 학자다. 盧文弨에게 배웠다. 《史記》 「弟子列傳」은 《史記》 「仲尼弟子列傳」을 이른다. 「檀弓」은 《禮記》의 편이다. 太史公은 司馬遷을 이른다. 《家語》는 王肅의 《孔子家語》를 이른다. 原抗은 「七十二弟子解」에 나온다. 「七十二弟子解」에는 陳亢/陳人/字子元/一字子禽//少孔子四十歲, ‘陳亢은 陳나라 사람으로, 字는 子元이다. 子禽이라는 字도 있다. 孔子 보다 40살 어렸다’라는 말이 있고, 또 저 뒷편에 原抗/字子藉, ‘原抗은 字가 子藉이다’라는 말이 있다. 《詩》 「陳風」이라고 인용된 詩는 《詩》 「國風 陳風」의 「東門之枌」이다. 또, 「東門之枌」 안에 東方之原이라는 말은 없고, 南方之原이라는 말이 있다. 인용된 毛亨의 주석 역시 南方之原에 달려 있다. 《春秋》 「莊」은 《春秋》 「莊公」이다. 인용된 《春秋》 「莊公」 27년 기사에 대해, 杜預는 原仲/陳大夫//原/氏/仲/字也, ‘原仲은 陳나라의 大夫다. 原은 氏고, 仲은 字다’라고 하였다. 《漢書》 「古今人表」의 陳亢에 대해서 顏師古는 音岡/又音抗, ‘音은 岡이다. 抗이라고 읽기도 한다’라고 하였고, 陳子禽에 대해서는 따로 주석을 남기지 않았다. 陳子亢이 下上에 속해 있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班固는 《漢書》 「古今人表」에서 사람을 上上, 上中, 上下, 中上, 中中, 中下, 下上, 下中, 下下의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시대순으로 배치해 두었다. 이 중 上上은 聖人이며, 上中은 仁人이고, 上下는 智人이다. 그리고 下下는 愚人이다. 陳亢과 陳子禽 등은 中中에 속해 있고, 陳子亢은 中下에 속해 있다. 따라서 下上이 아니다. 찾아 보니 《拜經日記》 본문에도 下上이라고 되어 있다. 臧庸이 착각한 듯하다. 그러나 陳棄疾 등과 같은 열에 있다는 점은 맞다. 陳棄疾의 경우, 「古今人表」에는 陳弃疾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申棖은 孔子의 제자 72명 중 한 사람이다. 申棖과 비교한 까닭은 아마도 이렇다. 申棖이 孔子의 제자이므로, 陳亢, 陳子禽, 陳子亢이 孔子의 제자라면, 申棖과 같은 행에 있어야 할 텐데, 陳子禽은 세 행 위에, 陳亢은 열 행 위에, 陳子亢은 한 행 아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陳子車死於衛 이하 인용문은 「檀弓 下」에 나온다. 鄭玄은 子亢/子車弟라고 한 뒤에 孔子弟子, ‘孔子의 제자다’라고 더 설명하였다. 「弟子傳」은 《史記》 「仲尼弟子列傳」이다. ◈ 問은 용언으로, ‘묻다’는 말이다. 問 A 於 B라고 하면, ‘A를 B에게 묻다’라고 사용된다. ▼ 劉寶楠은 說文/問/訊也, ‘《說文》에는 “問은 묻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問은 「口部」에 기재되어 있다. ◈ 於는 ‘~에게’다. 子貢을 받는다. ◈ 子貢은 孔子의 제자인 端木賜다. 재물을 잘 다루었고, 언변에 뛰어났으며,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子路 등과 함께 孔子가 아주 아꼈던 사람이다. 그러나 2장, 4장에서 언급하였듯, 孔子가 죽은 뒤 有子와 曾子가 순차적으로 孔子의 뒤를 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데, 이렇게 보면 孔子 사후에는 제자들과 함께 공부에 전념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던 것 같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 端木賜/衛人/字子貢//少孔子三十一歲, ‘端木賜는 衛나라 사람으로, 字는 子貢이다. 孔子 보다 31살 어렸다’라는 말이 있고, 또 子貢利口巧辭/孔子常黜其辯, ‘子貢은 말을 잘했기 때문에 孔子는 언제나 子貢의 언변을 절제시켰다’라는 말이 있다. 또,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도 端木賜/字子貢/衛人//少孔子三十一歲/有口才著名/孔子每詘其辯, ‘端木賜는 衛나라 사람으로, 字는 子貢이다. 孔子 보다 31살 어렸다. 子貢은 말재주로 유명했기 때문에 孔子는 언제나 子貢의 언변을 절제시켰다’라는 말이 있다. 「七十二弟子解」에는 또, 子貢好販/與時轉貨/歷相魯衛而終齊, ‘子貢은 장사를 좋아해서, 때에 따라 물건을 사고 팔았다. 魯나라와 衛나라에서 재상을 역임하였었고, 齊나라에서 죽었다’라는 말이 있다. 端木賜의 木은 司馬貞의 《史記索隱》에는 沐으로 되어 있다. 司馬貞은 家語作木, ‘《家語》에는 木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家語》는 《孔子家語》다. 상기하였듯 子貢은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 일화는 「仲尼弟子列傳」에 기재되어 있다. 齊나라가 魯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子貢은 齊나라로 가서 魯나라 대신 吳나라를 치게 하였고, 吳나라로 가서는 齊나라를 치게 하였으며, 다시 越나라로 가서 吳나라를 치도록 하였고, 또 晉나라로 가서 齊나라를 이길 吳나라에 맞서 싸우도록 하였다. 그 이후 상황은 子貢이 의도한 대로 되었으니, 子貢이 한 번 움직여서, 당시 중국 동부의 외교 정세가 뒤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子貢의 말재주와 판단 능력은 허풍이 아니었으니, 孔子는 子貢이 교만해지거나, 정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늘 절제시켰다 하겠다. ▼ 鄭玄은 子貢/弟子/姓端木/名賜, ‘子貢은 弟子인데, 姓은 端木이고, 이름은 賜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貢에 대해, 貢/本亦作贛/音同, ‘貢은 판본에 따라 贛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발음은 같다’라고 하였다. ▼ 朱熹의 주석은 子禽 부분에 함께 기재되어 있다. ▼ 阮元은 貢에 대해, 釋文出子貢云/本亦作贛///案/隸釋載漢石經凡子貢字皆作𥫔//蓋𥫔贛竝當作贛//臧琳經義雜記云/說文貝部/貢/獻功也///贛/賜也///是貢贛不同//依說文當爲贛/𥫔卽贛之譌體//子貢名賜/故字子贛作貢者/字之省借耳//今禮記樂記/子贛見師乙而問焉///祭義/子贛問曰子之言祭///尙存古本餘/則多爲後人改易矣, ‘《釋文》에 子貢에 대한 말이 있는데, “貢은 판본에 따라 贛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隸釋》에 《漢石經》이 실려 있는데, 子貢이 모두 子𥫔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𥫔과 贛는 모두 마땅히 贛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臧琳의 《經義雜記》에는 “《說文》 「貝部」에서는 貢을 功을 바치다는 뜻이라고 하였고, 贛은 賜라는 뜻이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처럼 貢과 贛은 같지 않다. 《說文》에 근거해 본다면, 마땅히 贛이 되어야 할 것이다. 𥫔은 贛의 글자체가 잘못된 경우일 것이다. 子貢의 이름은 賜다. 따라서 子贛이 貢으로 되어 있는 경우들은, 글자를 고려해 볼 때, 가차자로 사용한 경우일 것이다. 지금 《禮記》 「樂記」에 “子贛이 스승 乙을 뵙고 물었다”라는 말이 있고, 「祭義」에는 “子贛이 ‘선생의 말에 제사는’이라고 말했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런 사례들이 옛 글자가 남아 있는 예일 것인 즉, 나중 사람들이 貢으로 고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隸釋》은 洪适이 저술한 책이다. 洪适은 趙宋 高宗 때 사람으로, 鄱陽 출신이다. 臧琳은 淸나라 江蘇 사람이다. 《經義雜記》를 저술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說文解字》에는 貢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贛에 대한 설명은 없다. ▼ 劉寶楠은 貢에 대해, 釋文/貢/本作贛/音同//隸釋載漢石經論語殘碑/凡子貢皆作子贛//說文/貢/獻功也//贛/賜也///子貢名賜/字當作贛//凡作貢/皆是省借//作𥫔則譌體也, ‘《釋文》에는 “貢은 판본에 따라 贛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발음은 같다”라고 되어 있다. 《隸釋》에는 《漢石經》과 「論語殘碑」가 기재되어 있는데, 子貢이 모두 子贛이라고 되어 있다. 《說文》에서는 “貢은 功을 바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또 “贛은 賜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子貢의 이름은 賜이므로, 이 글자는 마땅히 贛이 되어야 한다. 貢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는 모두 획을 생략한 가차자일 것이다. 𥫔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는, 글자체가 잘못된 사례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隸釋》은 洪适이 저술한 책이다. 洪适은 趙宋 高宗 때 사람으로, 鄱陽 출신이다. 貢과 贛은 각각 《說文解字》 「貝部」와 「口部」에 실려 있다. ◈ 曰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말을 인용할 때 사용한다. 지금의 따옴표처럼 사용된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鄭玄의 주석 중 弟子陳亢也에 대해, 皇本/此句下有字子禽也四字/下名賜下有字子貢也四字, ‘《皇侃本》에는 이 句 다음에 字子禽也라는 네 글자가 있고, 이 다음에 나오는 名賜 다음에 字子貢也라는 네 글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子禽/弟子陳亢也//子貢/弟子/姓端木/名賜가 子禽/弟子陳亢也/字子禽也//子貢/弟子/姓端木/名賜/字子貢也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 陸德明의 주석 중 本亦作贛에 대해, 舊𥫔作贛//盧本據說文校改, ‘옛 판본에는 𥫔이 贛으로 되어 있었다. 《盧本》에서는 《說文》에 근거하여 교정하고 고쳤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 邢昺은 此章明夫子由其有德與聞國政之事, ‘이 장에서는 夫子가 자신이 품은 德 덕분에 國政에 참여했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이 장에서는 子禽과 子貢의 대화를 통해, 孔子의 성품을 드러내고, 또 그 성품 덕분에 孔子가 제후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 표현되어 있다.)

 

“선생은 [수많은 곳을 다녔지만,] 어떠한 나라들에 도착하든,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 반드시 들었다. [이는 선생이]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 듣기]를 원하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나라의 제후가 선생에게] 자기 나라의 정치를 알려 주었기 때문인가.”(夫子至於是邦也/必聞其政//求之與/抑與之與, ◈ 夫子는 상대에 대한 경칭이다. 孔子를 이른다. 나는 ‘선생’이라고 번역하였다. 皇侃은 大夫에 대한 경칭이라고 하였다. ▼ 皇侃은 夫子/即孔子也//禮身經爲大夫者/則得稱爲夫子//孔子爲魯大夫/故弟子呼之爲夫子也, ‘夫子는 곧 孔子다. 禮法에 따르면, 大夫의 지위를 거쳐 간다면, 夫子라고 불릴 수 있게 된다. 孔子는 魯나라의 大夫가 되었으므로, 제자들이 孔子를 夫子라고 불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의 이 주석은 본래 이 아래의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의 夫子에 붙어 있지만, 이 夫子가 보다 앞에 나오므로 내가 임의로 이 곳에 배치하였다. ▼ 劉寶楠은 夫子/即孔子//夫者/人所指名也//子者/孳也/人之別稱也//皇疏云/禮/身經爲大夫/得稱爲夫子//孔子/魯大夫/故弟子呼爲夫子也, ‘夫子는 곧 孔子다. 夫라는 말은, 사람이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子는 孳라는 뜻이니, 사람을 부르는 표현이다. 皇侃은 “禮法에 따르면, 大夫의 자리를 거쳐 간 사람은 夫子라고 불릴 수 있게 된다. 孔子는 魯나라의 大夫였으니, 그래서 제자들이 孔子를 夫子라고 불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至는 용언으로, ‘이르다’, ‘도달하다’, ‘도착하다’는 말이다. ▼ 劉寶楠은 字林/至/到也, ‘《字林》에는 “至는 이르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於는 ‘~에’다. 是邦을 받는다. ◈ 是는 아마 관형어로, ‘어떠한 것이든’이라는 말일 것이다. 是는 본래 此처럼, ‘이’, ‘이러한’이라는 말이다. 다만 이 글에서 是邦의 是는 한 나라만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孔子는 여러 지방을 다녔고, 가는 곳마다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 들었으니, 이 모든 나라를 이르는 말이 바로 是다. 柳種睦은 是가 불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타당하다. 《南齊書》 「列傳第十五」에 填街溢巷/是處皆然, ‘길을 메우고 거리를 넘치게 하였으니, 是한 處이든 전부 그러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是가 바로 ‘어떠한’이다. 즉, ‘어떤 곳이든 모두 그랬다’는 말이 된다. 또, 陶潛의 「飮酒」 중 열 여덟 번째 詩에 是諮無不塞, ‘是한 질문이든 塞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 是 역시 ‘어떠한’이다. 즉, ‘어떤 질문이든 塞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라는 뜻이 된다. 이 두 사례는 모두 柳種睦의 《논어의 문법적 이해》에 수록되어 있다. 아마 옛날 사람들이 是를 사용하던 방식의 하나일 것이다. 이 점은 주석가들 중에는 皇侃이 유일하게 지적해 두었다. ▼ 皇侃은 是/此也//此邦/謂每邦/非一國也, ‘是는 이것이라는 뜻이다. 此邦은 들리는 모든 나라를 뜻하는 말로, 하나의 나라만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廣雅/釋言/是/此也, ‘《廣雅》 「釋言」에는 “是는 이것이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邦은 체언으로, ‘나라’, ‘국가’다. 본래는 邦과 國이 모두 ‘나라’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西漢 高祖가 劉邦이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피휘한답시고 國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周禮》 「天官冢宰」에 以佐王治邦國, ‘王을 보좌함으로써 邦國을 다스린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大曰邦/小曰國, ‘크면 邦이라고 하고, 작으면 國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說文/邫/國也//從邑/丰聲///周官/太宰注/大曰邦/小曰國///此對文/若散言/亦通稱也, ‘《說文》에는 “邫은 나라라는 뜻이다. 邑이 들어가 있고, 丰이라고 발음한다”라는 말이 있다. 《周官》 「太宰」에 대한 주석에서는 “크면 邦이라고 하고, 작으면 國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글은 대구를 이루고 있는데, 별개의 말 같지만, 마찬가지로 말이 돤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邫은 邦과 같은 글자다. 지금 《說文解字》에는 「邑部」에 邦이 기재되어 있다. 《周官》 「太宰」는 《周禮》 「天官冢宰」의 일부분이다. 저 주석은 鄭玄의 것으로, 以佐王治邦國, ‘王을 보좌함으로써 邦國을 다스린다’에 붙어 있다. ◈ 也는 아마 의미 없는 조사 같다. 句를 끊는 역할일 것이다. ◈ 必은 부사어로, ‘꼭’, ‘반드시’다. ◈ 聞은 용언으로, ‘듣다’는 말일 것이다. 其政을 받는다. ▼ 주석을 참고하면, 鄭玄은 聞을 與聞이라고 해석하였다. 與聞은 아마 ‘참여하다’, ‘관여하다’는 말인 듯하다. ▼ 劉寶楠은 說文/聞/知聞也. ‘《說文》에 “聞은 알아 듣는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聞은 「耳部」에 기재되어 있다. 劉寶楠은 또, 時人君有大政事/皆就夫子諮度之//故言必聞其政也, ‘군주들에게 가끔 큰 정무가 생기면, 모두 夫子에게 나아가 이에 대해 자문을 구하였다. 그래서 “정사에 대해 꼭 들었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제후들이 孔子에게 가서 ‘자문을 구했다’라고 해석하였고, 따라서 孔子가 정치에 대해 ‘들었다’고 했다고 풀이하였다. ◈ 其政의 其는 是邦을 가리킨다. ‘이 나라들의’처럼 해석된다. 政을 받는다. ◈ 政은 체언으로, 국가의 ‘政事’, ‘政務’, ‘정치’를 이른다. ▼ 劉寶楠은 下篇云/政者/正也, ‘뒷편에는 “政이라는 것은 바로잡는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政者/正也는 《論語》 「顏淵」에 나온다. ◈ 求는 용언으로, ‘구하다’, ‘원하다’, ‘바라다’는 말이다. 이 求의 주체는 夫子, 즉 孔子다. 孔子 본인이 정치에 대해 듣기를 ‘원했다’, ‘바랬다’는 말이다. 劉寶楠은 ‘요청하다’라고 해석하였다. 이 역시 좋겠다. ▼ 劉寶楠은 穀梁/定元年傳/求者/請也, ‘《穀梁》 「定」 원년에 대한 傳에는 “求는 요청하다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穀梁》 「定」은 《春秋穀梁傳》 「定公」이다. ◈ 求之의 之는 其政을 가리킨다. 즉 孔子가 이른 나라의 정사를 이른다. 與之의 之도 그렇다. ◈ 求之與의 與는 의문사다. 반문하는 말은 아니다. 抑與之與 중 뒤의 與도 의문사다. 즉, 求之與는 ‘孔子가 그 나라의 정사를 원하였기 때문인가’라는 말이다. ▼ 皇侃은 與/語不定之辭也, ‘與는 말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뜻한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이 與를 반문하는 의문사로 이해한 듯한데, 내 생각에 이 與는 그냥 의문사다. ▼ 陸德明은 之與/音餘/下之與同, ‘之與의 與는 餘라고 발음한다. 다음 글에 있는 與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抑 부분의 주석을 참고하면, 邢昺은 與를 語辭, 즉 ‘어조사’라고 하였다. ▼ 朱熹는 之與之與/平聲/下同, ‘之與의 與는 平聲으로 읽는다. 아래의 경우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抑은 부사어로, ‘아니면’, ‘~가 아니라면’이다. A인가, ‘아니면’ B인가라고 할 때의 ‘아니면’이다. ▼ 皇侃은 抑/語助也, ‘抑은 어조사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抑與/上於力反, ‘抑與에서, 抑은 於와 力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抑與/皆語辭, ‘抑과 與는 모두 語辭다’라고 하였다. 邢昺이 지칭한 與는 아마 의문사로 사용된 與를 지칭하는 말인 듯하다. ▼ 朱熹는 抑/反語辭, ‘抑은 말을 뒤집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아마 ‘아니면’을 뜻하는 듯하다. ▼ 阮元은 漢石經/抑作意, ‘《漢石經》에는 抑이 意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抑者/更端之辭//漢石經/抑與作意與//案/周語/抑人故也///賈子/禮容語下作意人//又詩/十月之交/抑此皇父///鄭箋/抑之言噫///釋文引韓詩云/抑/意也//則抑意音近義同/故二文互用, ‘抑은 更端하는 말이다. 《漢石經》에는 抑與가 意與라고 되어 있다. 내 생각은 이렇다. 「周語」에 “抑 사람 때문이냐”라는 말이 있는데, 《賈子》 「禮容語 下」에는 이 말의 抑人이 意人으로 인용되어 있다. 또, 《詩》 「十月之交」에는 “抑 이 皇父는”이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의 箋에서는 이에 대해 “抑은 噫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釋文》에서는 《韓詩》를 인용하여서, “抑은 意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즉, 抑과 意는 발음이 비슷하고, 의미도 같으니, 두 글 자를 바꾸어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更端이란, 아마 ‘말을 시작하다’라는 말인 듯하다. 「周語」는 《國語》 「周語 下」를 이른다. 《賈子》는 賈誼의 《新書》를 이른다. 「十月之交」는 《詩》 「小雅 祈父之什」에 속해 있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經典釋文》에는 抑如字/辭也//徐音噫//韓詩云/意也, ‘抑은 글자 그대로 읽는다. 어조사다. 徐邈은 噫로 읽는다고 했다. 《韓詩》에는 “意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돼 있다. 아마 이 주석에 나오는 意은 ‘의’가 아니라 ‘억’이라고 읽을 것이다. 그래서 意와 抑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한 것이다. 또, 이 意은 아마 ‘생각하건대’, ‘생각해 보건대’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면, 抑은 朱熹의 풀이처럼 ‘아니면’이라는 뜻인데, 劉寶楠이 사례로 든 意이 抑의 가차자로 쓰인 사례일 수도 있겠다. 본문에서는 抑을 ‘아니면’이라고 해석해야 가장 타당하다. ◈ 抑與之與 중 앞의 與는 용언으로, ‘주다’, ‘알려 주다’는 말이다. 授與라고 할 때의 與와 같다. 그런데 앞에 나온 求의 주체가 孔子였던 점에 반해, 이 與의 주체는 바로 그 나라의 제후다. 즉, 그 나라의 제후가 孔子에게 정치에 대해 ‘알려 주었다’라는 말이다. ▼ 劉寶楠은 與/猶言告也//石經作予/亦通用字//下篇/君孰與足/漢書/谷永傳作予足/可證也, ‘抑與의 與는 알려 주다는 말과 같다. 《石經》에는 與가 予로 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통용하는 글자다. 뒷편에 “군주가 누구와 與하여 만족하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與足이 《漢書》 「谷永傳」에 予足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렇게 증명할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君孰與足은 《論語》 「顏淵」에 나온다. 《漢書》 「谷永傳」은 「谷永杜鄴傳」을 이른다. ◈◈ 鄭玄은 亢怪孔子所至之邦必與聞其國政/求而得之邪/抑人君自願與之爲治, ‘亢은 孔子가 이르는 나라에서 꼭 그 나라의 정무에 與聞하였는데, 孔子가 이를 바래서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의 군주가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알려 주기를 원한 것인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이 주석 중 必與聞其國政에 대해, 乃與逆也, ‘군주를 만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이 주석 중 必與의 與에 대해, 必與/音預, ‘必與의 與는 預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고, 또 爲治의 治에 대해 治/直吏反, ‘治는 直와 吏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邢昺은 이 주석 중 求而得之邪에 대해, 邪/未定之辭, ‘邪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반문하는 표현이라는 뜻일 것이다. ◈◈ 皇侃은 이 질문에 대해 禽問子貢//怪孔子每所至之國/必早逆聞其國之風政也//故問云/求之與者, ‘子禽이 子貢에게 질문하는 말이다. 子禽은 孔子가 들리는 나라마다, 꼭 먼저 군주를 만나서는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 듣는 점을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孔子가 원해서 그러한 것이냐고 물었다’라고 하였고, 또 問言孔子每所至國必先逆聞其風政/爲是就其國主求而得之否乎, ‘이 질문은 孔子가 이르는 나라마다 먼저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 꼭 듣는데, 이것이 그 나라의 군주에게 나아가 들려 달라고 해서 그런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逆을 ‘만나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皇侃은 抑與之與에 대해, 亢又問言爲是孔子不就國主求而國主自呼與孔子爲治而聞之否乎, ‘亢은 또, 孔子가 그 나라의 군주에게 나아가 정사에 대해 들려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군주가 스스로 孔子를 불러, 孔子와 함께 자기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정사에 대해 들려 준 것인지, 아닌지를 물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子禽疑怪孔子所至之邦必與聞其國之政事/故問子貢曰/此是孔子求於時君而得之與/抑人君自願與夫子爲治與, ‘子禽은 孔子가 어떤 나라에 이르면, 반드시 그 나라의 政事에 참여하였다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子貢에게 “이렇게 되는 것은 孔子가 가끔 군주에게 요구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냐, 아니면 군주가 夫子와 정치를 돌보기를 스스로 원한 것이냐”라고 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鄭玄의 주석 중 抑人君自願與之爲治에 대해, 皇本作/抑人君自願與爲治耶, ‘抑人君自願與之爲治가 《皇侃本》에는 抑人君自願與爲治耶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孔子는 본국인 魯나라에 있으며 정치에 참여하거나, 후학들을 가르칠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여러 나라들을 돌아 다녔는데, 돌아 다닐 때마다 제후들이 孔子를 존경하고, 또 孔子에게 자기 나라의 정사를 알려 주었다. 그런데 본래 孔子는 잘 봐 주어 봤자 大夫에 불과하고, 제후들은 제후이므로, 子禽은 제후들이 오히려 孔子를 존경한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아 이렇게 물은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子貢曰)

 

“선생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정중하고, 검소하며, 겸양하였기 때문에 그 나라의 정사를 들을 수 있었다.”(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 夫子는 상대에 대한 경칭이다. 孔子를 이른다. ◈ 溫, 良, 恭, 儉, 讓은 모두 孔子의 모습과 태도를 형용하는 말들이다. 皇侃, 邢昺, 劉寶楠이 구체적으로 해설해 두었고, 朱熹는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해설해 두었다. 나는 이 설들 중 취사하거나, 절충하여 번역하였다. ◈ 溫은 ‘온화한 모습’이다. ▼ 皇侃은 敦美潤澤謂之溫, ‘훌륭하고 은혜로운 모습을 溫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敦柔潤澤謂之溫, ‘부드럽고 여유가 있는 모습을 溫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溫/和厚也, ‘溫은 온화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溫이 𥁕의 가차자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說文/𥁕/仁也///溫/水名///義別//經典悉叚溫爲𥁕//爾雅/釋訓/溫溫/柔也///詩/燕燕箋/溫謂顔色和也///下篇/子溫而厲/是溫指貌言, ‘《說文》에는 “𥁕은 어질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고, “溫은 강의 이름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두 글자의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經典들에서는 모두 𥁕을 가차해서 溫이라고 사용하고 있다. 《爾雅》 「釋訓」에는 “溫溫은 부드럽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고, 《詩》 「燕燕」에 대한 箋에는 “溫은 낯빛이 따뜻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뒷편에 “선생은 溫하지만 厲하였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溫도 용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說文》는 《說文解字》다. 𥁕과 溫은 각각 「皿部」와 「水部」에 기재되어 있다. 《爾雅》 「釋訓」에는 晏晏/溫溫/柔也, ‘晏晏과 溫溫은 부드럽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燕燕」은 《詩》 「國風 邶風」에 속해 있다. 箋은 鄭玄의 주석을 이른다. 이 주석은 終溫且惠, “끝까지 溫하고 또 惠하다”라는 말에 달려 있다. 子溫而厲는 《論語》 「述而」에 나온다. ◈ 良은 ‘부드러운 모습’이다. ▼ 皇侃은 敦美潤澤謂之溫, ‘행실이 外物을 범하지 않는 모습을 良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行不犯物謂之良, ‘행위가 外物을 침범하지 않는 모습을 良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良/易直也, ‘良은 화평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說文云/𥭣/善也///今隸亦爲良//賈子/道術篇/安柔不苛謂之良///良謂心之善也, ‘《說文》에는 “𥭣은 좋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𥭣은 지금은 隸書로 良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賈子》 「道術」에는 “부드럽고 까다롭게 굴지 않는 태도, 이를 良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良은 마음이 훌륭한 모습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𥭣은 《說文解字》 「畗部」에 기재되어 있다. 《賈子》는 賈誼의 《新書》를 이른다. ◈ 恭은 ‘정중한 모습’이다. ▼ 皇侃은 和從不逆謂之恭, ‘순종하고 거스르지 않는 모습을 恭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和從不逆謂之恭, ‘화순하고 거스르지 않는 모습을 恭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恭/莊敬也, ‘恭은 공경스럽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爾雅/釋詁/恭/敬也///說文/恭/肅也, ‘《爾雅》 「釋詁」에 “恭은 공경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說文》에는 “恭은 정중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詁」에는 儼/恪/祇/翼/諲/恭/欽/寅/熯/敬也, ‘儼, 恪, 祇, 翼, 諲, 恭, 欽, 寅, 熯은 공경하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恭은 《說文解字》 「心部」에 기재되어 있다. ◈ 儉은 ‘검소한 모습’이다. ▼ 皇侃은 去奢從約謂之儉, ‘사치를 멀리하고 검약을 따르는 모습을 儉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去奢從約謂之儉, ‘사치하지 않고 절약하는 모습을 儉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儉/節制也, ‘儉은 절제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又/儉/約也///易/象傳/君子以儉德辟難, ‘또, 《說文》에는 “儉은 검약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易》 「象傳」에는 “君子는 儉한 마음을 품고, 難을 피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儉은 《說文解字》 「人部」에 기재되어 있다. 《易》 「象傳」은 「否」에 대한 象傳을 이른다. ◈ 讓은 ‘겸양한 모습’이다. ▼ 皇侃은 推人後己謂之讓, ‘남을 공경하고, 자신을 뒷세우는 모습을 讓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先人後己謂之讓, ‘다른 사람을 앞세우고, 자신은 뒷따르는 모습을 讓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讓/謙遜也, ‘讓은 겸손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朱熹는 다섯 가지를 종합하여서, 五者/夫子之盛德光輝接於人者也, ‘이 다섯 가지는 夫子의 盛德이 빛난 바로,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준 바이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宋石經/避諱讓作遜/後放此//唯先進篇/其言不讓///但闕末筆, ‘《宋石經》에는 讓을 피휘하여서 遜이라고 해 놓았다. 이후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누구를 피휘한 걸까. 趙宋 황제 중에 이름이 讓인 사람은 없다. ▼ 劉寶楠은 讓이 攘의 가차자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左/襄十三年傳/讓者/禮之主也///說文/攘/推也//讓/相責讓也///凡謙讓/揖讓字當作攘//今經典亦假讓爲攘, ‘《左》 「襄」 13년에 대한 傳에는 “讓은 禮의 핵심이다”라는 말이 있다. 《說文》에는 “攘은 밀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고, 또 “讓은 서로 질책하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謙讓이나 揖讓 같은 말들의 讓은 마땅히 攘이 되어야 한다. 지금 經典들에는 攘이 讓으로 가차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左》 「襄」은 《春秋左氏傳》 「襄公」을 이른다. 攘과 讓은 각각 《說文解字》 「手部」, 「言部」에 기재되어 있다. 劉寶楠은 또, 宋石經避諱/凡讓字作遜, ‘《宋石經》에는 피휘 때문에 讓이 모두 遜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以는 ‘~함으로써’, ‘~하기 때문에’다. 溫良恭儉讓을 받는다. 즉, 溫良恭儉讓以는 ‘溫, 良, 恭, 儉, 讓함으로써’, ‘溫, 良, 恭, 儉, 讓하였기 때문에’, ‘溫, 良, 恭, 儉, 讓한 덕분에’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以, 즉 ‘~로써’, ‘때문에’를 해석하는 방식은 학자마다 달랐다. 皇侃은 孔子가 이 五德을 가지고, 남들을 가늠할 수 있었으니 이에 들리는 나라마다 정사를 들었다고 하였다. 顧歡은 孔子가 五德을 가지고 들리는 나라들의 정사를 스스로 알게 되었다고 보았다. 皇侃이 인용한 어떤 사람과 梁冀는, 백성들의 五德을 살펴서 그 나라의 정사를 알게 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백성들이 溫하면, 그 제후의 정치도 溫할 것이라는 식이다. 邢昺, 朱熹, 劉寶楠은 제후가 孔子에게 자기 나라의 정사를 말해 주었다고 하였다. 나는 邢昺, 朱熹, 劉寶楠의 설을 따랐다. ◈ 得은 용언으로, ‘얻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得은 사실 必聞其政의 聞을 뜻하기에, 나는 聞처럼 보고 번역하였다. ▼ 劉寶楠은 又/說文/彳部/得/行有所得也, ‘또, 《說文》 「彳部」에는 “得은 행동하여 얻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 得之의 之는 必聞其政의 其政을 가리킨다. 즉, ‘그 나라의 정사’를 뜻한다. ◈◈ 皇侃은 子貢荅禽/說孔子所以得逆聞之由也, ‘子貢이 子禽에게 대답하는 말이다. 孔子가 군주를 만나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 들은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또, 言夫子身有此五德之美/推己以測人/故凡所至之邦必逆聞之也//故顧歡云/此明非求非與/直以自得之耳//其故何也//夫五德內充/則是非自鏡也///又一通云/孔子入人境/觀其民之五德/則知其君所行之政也///故梁冀云/夫子所至之國/入其境/觀察風俗/以知其政敎//其民溫良/則其君政敎之溫良也//其民恭儉讓/則政敎恭儉讓也//孔子但見其民/則知其君政敎之得失也, ‘夫子는 이 五德을 품고 있으니, 자신을 推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들리는 나라마다 꼭 군주를 만나 정사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顧歡은 “이 문장에서는, 孔子가 원한 것도 아니고, 군주가 알려 준 것도 아니며, 孔子가 직접 스스로 깨달았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왜 그러할까. 저 五德이 마음 속에 충만하니, 是非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이를 설명하면서 “孔子는 다른 나라의 국경에 들어가면, 그 나라 백성들의 五德을 살펴서, 그 나라 군주가 이행한 정사가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梁冀는 “夫子가 어떤 나라에 들릴 때, 국경에 들어 가면, 그 나라의 풍속을 살폈는데, 이로써 그 나라의 정치와 교화를 알 수 있었다. 그 나라 백성들이 溫良하면, 군주의 정치와 교화도 溫良하였을 것이요, 백성들이 恭儉讓하면, 군주의 정치와 교화도 恭儉讓하였을 것이다. 孔子는 다만 그 백성들을 살피고, 군주의 정치와 교화가 성공하였는지, 실패하였는지를 알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邢昺은 此子貢荅辭也, ‘이 말은 子貢의 대답이다’라고 하였고, 또 言夫子行此五德而得與聞國政, ‘夫子가 이 다섯 가지 德을 실천하였기에 그 나라의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論衡/知實篇/引此文解之云/溫良恭儉讓/尊行也//有尊行與人/人親附之/則人告語之矣///但其迹有似於求而得之/故子貢就其求之之言/以明其得聞之故//明夫子得聞政/是人君與之/非夫子求之矣//吳氏嘉賓/論語說/君所自擅者謂之政/常不欲使人與聞之//況遠臣乎//溫良恭儉讓/是誠於不干人之政也/誠於不干人之政/則入人之國/無有疑且忌焉者/其視聖人如己之素所師保/安忍不以告焉//今之人求以聞人之政/不知其身且將不之保/韓非/說難/是也, ‘《論衡》 「知實」에서는 본문의 이 글을 인용하고 해설하면서, “溫, 良, 恭, 儉, 讓은 공경스러운 행동거지다. 다른 사람에게 공경스럽게 행동하면, 그 상대는 그렇게 행동한 사람을 가까이 하게 되니, 이것저것 말을 해 주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孔子의 행동거지에 정사를 求하여 얻고자 하는 모습과 유사한 면이 있었기에, 子貢이 求之라는 표현을 就하여서 孔子가 정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까닭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또, 夫子가 정사를 들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 군주가 주었기 때문이지, 夫子가 求해서는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吳嘉賓은 《論語說》에서 “군주가 멋대로 하는 것을 政이라 한다. 그러니 政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고 싶은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물며 타국의 신하에게야 어떻겠는가. 孔子는 溫, 良, 恭, 儉, 讓하였는데, 이런 태도는 진정 다른 나라 군주의 政을 범하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다른 나라 군주의 政을 진정 범하려 하지 않으니, 孔子가 다른 나라에 들어가도 의심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요, 그 나라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聖人을 자신이 본래 모셨던 스승인 것처럼 인식할 것이니, 어찌 나라의 政에 대해 알려 주지 않고서 배길 수 가 있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政을 들으려고 求하고 다니는데, 그러면서도 그 자신이 장차 위태로울 수 있다는 점도 자각하지 못하니, 《韓非》 「說難」의 논지가 이와 같다”라고 풀이하였다’라고 하였다. 吳嘉賓은 江西 사람으로, 淸나라 道光帝 때의 학자다. 《韓非》는 《韓非子》를 이른다. 「說難」는 유세가 어렵다는 점에 대해 기술돼 있는 편이다. 吳嘉賓은, 孔子는 덕목을 갖추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존중받았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무에 대해 알려 주었는데, 실은 정무란, 군주의 고유한 권한이므로, 함부로 들을 수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 吳嘉賓은 韓非子가 「說難」에서 기술한 것처럼, 군주에게 유세하면서, 군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 내기는 아주 어려운데, 사람들이 이 일을 쉽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어떤 난관이 닥칠지도 모르는 채로 孔子를 따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 蜀虎案 : 孔子가 그 나라의 정사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孔子의 품성이 溫, 良, 恭, 儉, 讓하였기 때문에 제후들이 자연스레 孔子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래서 자기 나라의 정사를 孔子에게 들려 주었다는 말이다. 아마 제후들은 정사를 들려 주면서,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 孔子의 의견을 구했을 것이다.)

 

<자공의 말 이어짐>

 

“[설혹 선생이 듣기를 바랬다고 하더라도,] 선생이 정사에 대해 듣기를 원한 방식은 아마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방식과는 달랐지 않았겠느냐.”(夫子之求之也/其諸異乎人之求之與, ◈ 夫子는 상대에 대한 경칭이다. 孔子를 이른다. ◈ 夫子之의 之는 주격 조사일 것이다. 주어는 夫子다. 이 之는 주격 조사로 볼 수도 있고, 관형격 조사로 볼 수도 있다. 관형격 조사로 해석한다면 ‘~의’라고 번역된다. 夫子之求之는 주격 조사라면 ‘夫子가 之를 求한다’는 말이 되고, 관형격 조사라면, ‘夫子의 之를 求한 일’이 된다. 나는 주격 조사로 보고 번역하였다. ◈ 求는 용언으로, ‘원하다’, ‘구하다’, ‘바라다’는 말이다. 求之의 之를 받는다. ◈ 求之의 之는 必聞其政의 其政을 가리킨다. 즉, ‘그 나라의 정사’를 뜻한다. ◈ 夫子之求之也의 也는 아마 ‘~한 것’, ‘~한 방식’이라는 말일 것이다. 者와 같다. 관형어절 夫子之求之이 也를 한정한다. 즉, 夫子之求之也는 夫子之求之者로, ‘夫子가 其政을 求한 방식’이다. 夫子之求之也는 명사구로, 夫子之求之也/其諸異乎人之求之與 전체의 주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 也를 어떻게 者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禮記》 「檀弓」에 古者冠縮縫/今也衡縫, ‘옛날에는 冠을 세로로 꿰맸는데, 요즘은 가로로 꿰맨다’라는 말이 있고, 《論語》 「陽貨」에는 古者民有三疾/今也或是之亡也, ‘옛날에는 백성들에게 문제가 세 가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듯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들에는 모두 古者와 今也가 대구를 이루고 있으니, 이로써 볼 때 今也는 앞의 句를 따라 今者가 되어야 함이 분명하고, 실제로 의미 자체도 그렇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예시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也」에 들어 있다. ◈ 其諸는 부사어로, 아마 ‘아마도’라는 말일 것이다. 其는 ‘아마도’라는 말이다. 이 때 其는 殆와 같다. 諸는 아마 실질적인 의미 없이, 其 뒤에 붙은 말 같다. 즉, 其도 ‘아마도’이고, 其諸 역시 ‘아마도’다. 柳種睦은 諸가 其 뒤에 붙어서 其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하였는데, 그럴 듯하다. 우선 其가 ‘아마도’라고 사용된다는 점부터 설명해 보겠다. 《禮記》 「檀弓 上」에 子張病/召申祥而語之曰/君子曰終/小人曰死/吾今日其庶几乎, ‘子張이 병이 나자 申祥을 불러서는 “君子를 보고는 終한다고 하고, 小人을 보고는 死한다고 한다. 내가 지금 君子이기를 其 바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其는 殆처럼 ‘거의’ 혹은 ‘아마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春秋左氏傳》 「隱公」 6년에 善不可失/惡不可長/其陳桓公之謂乎, ‘善을 잃어서도 안 되고, 惡을 키워서도 안 된다고 하는데, 其 陳나라의 桓公을 보고 한 말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고, 《國語》 「周語」에는 我又章之/懼長及子孫/王室其愈卑乎, ‘우리가 또 그것을 章하면, 子孫에까지 미칠까 걱정된다. 그러면 왕실의 입지가 其 더욱 낮아지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두 글에서 其는 모두 ‘아마도’, ‘거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其와 殆의 의미가 같기 때문에, 두 글자를 붙여서 한 단어처럼 사용한 사례도 있다. 《易》 「繫辭 下」에 顏氏之子/其殆庶幾乎, ‘顏氏의 자제가 其殆 경지에 가깝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其殆는 ‘거의’ 혹은 ‘아마도’라는 뜻이다. 이 문장의 其는 아마 顏氏之子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가 아닐 것이다. 其가 지시대명사일 때는 항상 ‘~의’처럼 해석되고, 其 다음엔 체언이 오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그렇지 않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이번에는 其諸가 본문처럼 사용된 사례가 있을지 생각해 보자. 《春秋公羊傳》 「桓公」 6년에 ‘其諸 桓公을 病한 일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劉寶楠도 인용해 두었다. 또, 《春秋公羊傳》 「閔公」 원년에 齊無仲孫/其諸吾仲孫與, ‘齊나라에는 仲孫이 없으니, 其諸 우리 나라의 仲孫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또, 《春秋公羊傳》 「僖公」 2년에 寢不安與/其諸侍御有不在側者與, ‘잠자리가 편하지 않느냐. 其諸 시중 드는 자가 옆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또, 《春秋公羊傳》 「僖公」 24년에는 不能乎母者/其諸此之謂與, ‘不能乎母라는 말은 其諸 이를 이르는 말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其諸는 모두 ‘아마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其諸가 其者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漢書》 「武五子傳」에 寡人束帶聽朝三十餘年/曾無聞焉/其者寡人之不及與, ‘寡人이 띠를 매고 정사를 돌본 지 30여 년이 되었는데, 일찍이 들어 본 일이 없으니, 其者 寡人이 及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고, 또 《揚子法言》 「重黎」에 蔡生欲安項咸陽/不能移/又亨之/其者未辯與, ‘蔡生은 項을 咸陽에 安하려 하였는데, 移할 수 없었고, 또 亨하였으니, 其者 말을 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글들에서 其者는 其諸와 같이 ‘아마도’라고 해석된다. 다만, 其諸라는 말이 ‘아마도’로 사용되는 경우는, 본문의 이 문장과 상기한 《春秋公羊傳》의 사례들을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었을 것이다. ▼ 皇侃은 諸/猶之也, ‘諸는 之와 같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아마 其를 지시대명사로 보고, 諸를 주격 조사로 해석한 듯하다. ▼ 邢昺은 諸與/皆語辭, ‘諸와 與는 모두 語辭다’라고 하였다. 邢昺도 其를 지시대명사로 간주한 듯하다. ▼ 朱熹는 其諸/語辭也, ‘其諸는 어조사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公羊/桓六年傳/其諸以病桓與///何休注/其諸/辭也, ‘《公羊》 「桓」 6년의 傳에 “其諸 桓公을 모욕하려 한 일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何休는 주석에서 “其諸는 어조사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상기하였듯 劉寶楠이 인용한 글에서도 其諸는 ‘아마도’처럼 해석된다. ◈ 異는 용언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비범하다’, ‘특별하다’처럼 볼 수도 있을 듯하다. 劉寶楠은 ‘구분되다’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타당하다. ▼ 劉寶楠은 說文/異/分也, ‘《說文》에는 “異는 구분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異는 「異部」에 기재되어 있다. ◈ 異乎人之求之의 乎는 ‘~와는’이라는 말이다. 비교하는 말이라고 보면 좋겠다. 於와 같다. 명사절인 人之求之를 받는다. 즉, 異乎人之求之는 ‘人이 之를 求하는 방식과는 異하다’라는 말이 된다. ◈ 人은 체언으로, ‘다른 사람’, ‘남’을 이른다. 孔子 외의 ‘보통 사람들’을 가리킨다. ▼ 朱熹는 人/他人也, ‘人은 다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 人之求의 之는 주격 조사다. 이 之는 夫子之의 之처럼 주격 조사로 볼 수도 있고, 관형격 조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주격 조사로 보고 번역하였다. ◈ 人之求의 求는 용언으로, ‘구하다’, ‘원하다’, ‘바라다’는 말이다. ◈ 人之求之의 之는 必聞其政의 其政을 가리킨다. 즉, ‘그 나라의 정사’를 뜻한다. ◈ 人之求之與의 與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皇侃과 邢昺은 이 與를 어조사라고 하였는데, 의문사를 이렇게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與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다. ▼ 皇侃은 與/語助也, ‘與는 어조사다’라고 하였다. ▼ 其諸에 대한 주석을 참고하면, 邢昺은 與를 語辭, 즉 ‘어조사’라고 하였다. ▼ 阮元은 皇本/與下有也字//攷文引足利本作/夫子之求也/其諸異乎人求之與, ‘《皇侃本》에는 與 다음에 也가 있다. 《攷文》에는 《足利本》에 夫子之求也/其諸異乎人求之與라고 되어 있다는 점이 인용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皇本作/其諸異乎人之求之與也, ‘《皇侃本》에는 이 말이 其諸異乎人之求之與也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鄭玄은 言夫子行此五德而得之/與人求之異/明人君自與之, ‘이 말은 夫子가 이렇듯 다섯 가지 德을 이행하여서 그렇게 할 수 있었으니, 다른 사람이 원한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이로써 다른 나라의 군주가 스스로 알려 주었다는 점을 밝혔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이 주석에 대해 亦會兩通也//明不就人求/故云異也, ‘역시 부합하니, 두 가지 모두로 해석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 구하지 않았기에, “다르다”라고 하였음을 설명한 말이다’라고 하였고, 明人君自與之에 대해서는 此云人君自與之/非謂自呼與之也//政是人君所行見於民下/不可隱藏/故夫子知之是人君所行自與之也, ‘이 말은 군주가 孔子에게 정사를 자연스레 알려 주게 되었다는 뜻이지, 군주가 孔子를 직접 불러서 정사를 알려 주었다는 말이 아니다. 정사란, 군주가 백성에게 행하고, 드러내는 바이니, 숨길 수가 없다. 따라서 夫子가 그 나라의 정사를 안 것은, 군주가 행한 바를 통하여 자연스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의 이 설에 대해서는 溫良恭儉讓以의 以 부분에서 이미 소개하였었다. ◈◈ 皇侃은 此明夫子之求與人之求異也//人則行就彼君求之/而孔子至境推五德以測求之/故云其諸異乎人之求之也, ‘이 글에서는 夫子가 정치에 대해 듣기를 원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이 듣기를 원하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상대 군주에게 나아가 바라지만, 孔子는 그 나라의 국경에 이르기만 하더라도, 군주가 孔子의 五德을 공경하여서 孔子가 정치에 대해 듣기를 바란다는 점을 헤아리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바라는 모습과는 다르지 않겠느냐”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故顧歡云/夫子求知乎己而諸人訪之於聞/故曰異也///梁冀又云/凡人求聞見乃知耳/夫子觀化以知之/與凡人異也, ‘이에 대해 顧歡은 “夫子는 자기 자신을 통해 知를 求하였고, 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들음으로써 정사를 訪하였다. 그래서 다르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梁冀는 “보통 사람들은 정사에 대해 듣기를 바라면, 군주를 알현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夫子의 경우, 군주가 夫子의 化를 살핌으로써 夫子가 정사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보통 사람과는 달랐던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邢昺은 他人則就君求之/夫子則脩德/人君自願與之爲治/故曰/夫子之求之也/其諸異乎人之求之與, ‘夫子 외에 다른 사람들은 군주에게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였지만, 夫子는 德을 닦았기에, 군주가 夫子와 함께 정사를 돌보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子貢이 “夫子가 이를 원한 방식은, 다른 사람이 원한 방식과는 다르지 않았겠느냐”라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 朱熹는 言夫子未嘗求之/但其德容如是/故時君敬信/自以其政就而問之耳/非若他人必求之而後得也, ‘이 말은, 夫子가 원한 적이 없는데, 다만 夫子의 德이 이와 같이 관대하였기에, 군주들이 夫子를 공경하고, 믿었기에, 스스로 자기 나라의 정사에 대해, 夫子에게 나아가 물었을 뿐이니, 다른 사람들이 정사에 대해 듣기를 원한 뒤에야 들을 수 있었던 모습 같지 않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또 聖人過化存神之妙/未易窺測/然即此而觀/則其德盛禮恭而不願乎外/亦可見矣//學者所當潛心而勉學也, ‘聖人은 過化存神하듯 오묘하여, 예측하기 쉽지 않다. 그러한 즉,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聖人의 德이 盛하고, 禮가 공손하여, 다른 사람에게 원하지 않더라도, 역시 알 수가 있게 된다.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부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過化存神은 《孟子》 「盡心 上」의 夫君子所過者化/所存者神, ‘저 君子가 지나간 것은 교화되고, 있는 곳은 신묘해진다’라는 말에서 따 온 말이다. ◈◈ 謝良佐는 學者觀於聖人威儀之間/亦可以進德矣//若子貢亦可謂善觀聖人矣/亦可謂善言德行矣//今去聖人千五百年/以此五者想見其形容/尙能使人興起/而況於親炙之者乎, ‘배우는 자들은 聖人의 威儀를 살펴서, 자신의 德을 증진시킬 수 있다. 만약 子貢이 聖人을 잘 살폈다고 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德行에 대해 잘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聖人이 세상을 떠난 지 1500년이 되었지만, 이 다섯 가지로 그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고취시킬 수 있으니, 하물며 직접 배운 사람이야 어떠하였겠느냐’라고 하였다. 子貢이 든 다섯 가지 덕목에 대해 謝良佐 자신이 감동했다는 말이다. ◈◈ 張栻은 夫子至是邦必聞其政/而未有能委國而授之以政者//蓋見聖人之儀刑而樂告之者/秉彝好德之良心也/而私欲害之/是以終不能用耳, ‘夫子는 이러한 나라에 이르면, 반드시 그 정치에 대해 들었는데, 그런 나라들 중 夫子에게 나라를 위임해서 정무를 넘겨 버릴 수 있었던 경우는 있지 않았다. 이는 아마 聖人을 본받아서 정무에 대해 즐겁게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천성이 德을 좋아하는 좋은 마음일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私欲이 천성을 해쳤으므로, 이런 까닭 때문에 끝내 기용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孔子는 가는 나라마다 예우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요직에 중용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張栻은 이 점을 나름대로 설명하려 한 듯하다. 내 생각에, 孔子가 중용되지 못한 까닭은, 孔子의 명망이 제후 보다 더 높거나 맞먹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司馬遷도 《史記》에서 孔子를 列傳에 싣지 않고, 「孔子世家」에 실었던 것이다. 私欲이 천성을 해쳤기 때문이라는 말은 宋儒의 독단일 뿐이다. ◈◈ 劉寶楠은 夫子原不是求此/假言即以夫子得之爲求/亦與人異也, ‘夫子는 본래 이러하듯 정사를 들으려고 求하지 않았으나, 夫子가 求하여서 정사를 들었다는 점을 가정하여서, 그렇게 가정하더라도 夫子가 다른 사람과 구분된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鄭玄의 주석 중 明人君自與之에 대해, 皇本作/明人君自願求與爲治也, ‘明人君自與之가 《皇侃本》에는 明人君自願求與爲治也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劉寶楠이 옳겠다. 孔子의 성품이 溫, 良, 恭, 儉, 讓하였기 때문에 제후들이 孔子에게 찾아 와 자기 나라의 정치에 대해 의견을 구했으나, 만약 孔子가 직접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 알기를 바랬다면,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제후에게 나아가 정사를 요청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말인 것 같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