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순자 - 1 - 권학 - 7 - 군자는 왜 공부하고, 소인은 왜 공부할까

2021. 9. 24. 10:12순자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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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보기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원래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숫자로 바꾸고 하단으로 내려 두었습니다. 원래 글은 물론 원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주석을 하단으로 내리니까 정작 중요한 주석과 중요하지 않은 주석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어 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에다가 '*' 같은 것으로 표시해 둘까, 혹은 다르게 어떻게든 표시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느니 원안을 보존하고 새로 글을 파 두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기가 편한 것이 우선이냐, 주석이 우선이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 편한 방식에 맞게 글을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주석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습니다.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李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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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0년 5월 1일 16시 46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6

 

순자 - 1 - 권학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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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본문과 함께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2

 

순자 - 1 - 권학 - 7 - 군자는 왜 공부하고, 소인은 왜 공부할까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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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之學也,入乎耳,箸乎心,布乎四體,形乎動静。端而言,蝡而動,一可以爲法則。小人之學也,入乎耳,出乎口。口耳之間則四寸耳,曷足以美七尺之軀哉!

古之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君子之學也,以美其身;小人之學也,以爲禽犢。故不問而告謂之傲,問一而告二謂之囋。傲、非也;囋,非也;君子如嚮矣。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서, 내면에 각인되니, [학문이] 온몸에 [골고루] 퍼져서, 움직이고 있을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배운 바가] 드러난다.[각주:1] [그러므로 군자가 간혹] 헐떡거리듯 말하거나, 꾸물거리며 움직이더라도, 모두 법도[에 맞아 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하다.[각주:2] [반면 소인의 경우는 이렇다.]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서, 입에서 튀어 나온다.[각주:3] [그런데] 입과 귀 사이는 네 치밖에 되지 않으니, [되새기지도 않고 바로 내뱉는 말들로, 소인이] 어떻게 일곱 자나 되는 몸 전체를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각주:4]

 

옛날에 공부하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였지만,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공부하]고 있다.[각주:5] 군자는 공부해서 [옛 사람들처럼] 자신을 바로잡지만, 소인은 공부함으로써 날짐승이나 송아지를 보답으로 바라기나 한다.[각주:6] [이처럼 소인들은 공부해서 이익을 바라기 때문에, 이에 예에 맞지 않는 짓들을 벌인다.] 그래서 묻지 않았는데도 알려 주기도 하니, 이런 짓을 성급하다고 하고, 하나를 물었는데 두 가지를 알려 주기도 하니, 이런 짓을 말이 많다고 한다.[각주:7] [그러나] 성급해서도 안 되고, 말이 많아도 안 된다. [남에게 바라는 것 없이 자신을 바로잡는 일이 중요하니,] 군자는 [누가 물어 오더라도] 메아리처럼 [묻는 말에] 대답해 줄 뿐이다.[각주:8]

 

 

  1. 君子之學也/入乎耳/箸乎心/布乎四體/形乎動静, ◈ 君子는 체언으로, ‘군자’다. 아래에 있는 小人과 대비되고 있다. ◈ 君子之學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된다. ◈ 學은 체언으로, ‘공부’, ‘학문’이다. ◈ 君子之學也의 也는 者와 같다.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따로 번역하지 않았다. 《禮記》 「檀弓」에 古者冠縮縫/今也衡縫, ‘옛날에는 冠을 세로로 꿰맸는데, 요즘은 가로로 꿰맨다’라는 말이 있고, 《論語》 「陽貨」에는 古者民有三疾/今也或是之亡也, ‘옛날에는 백성들에게 문제가 세 가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듯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들에는 모두 古者와 今也가 대구를 이루고 있으니, 이로써 볼 때 今也는 앞의 句를 따라 今者가 되어야 함이 분명하고, 실제로 의미 자체도 그렇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예시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也」에 들어 있다. ◈ 入은 용언으로, ‘들어 가다’는 말이다. 학문이 귀로 ‘들어 가다’는 뜻이다. ◈ 入乎耳의 乎는 ‘~에’, ‘~로’다. 於와 같다. 箸乎心, 布乎四體, 形乎動静의 乎도 모두 그렇다. ◈ 耳는 체언으로, ‘귀’다. ◈ 箸은 용언으로, ‘붙다’는 말이다. 이 때는 ‘착’이라고 읽는다. 학문이 마음에, 내면에 ‘붙는다’는 뜻이다. 나는 ‘각인되다’라고 의역하였다. 《戰國策》 「趙策」에 兵箸晉陽三年矣, ‘군대가 晉陽에 3년 동안 箸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箸는 ‘묶여 있다’, 즉 ‘붙어 있다’는 뜻이다. 《戰國策》의 箸는 판본에 따라 著라고 되어 있기도 한데, 이 역시 ‘붙어 있다’는 뜻이다. 앞에 있는 巢非不完也/所繫者然也 부분의 楊倞의 주석에 대한 盧文弨의 주석에 설명되어 있듯, 箸와 著는 모양이 비슷해서 서로 혼용된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 心은 체언으로, ‘마음’이다. 나는 ‘내면’이라고 번역하였다. ◈ 布는 용언으로, ‘펴다’, ‘퍼지다’라는 말이다. 학문이 온몸에 ‘퍼지다’는 뜻이다. ◈ 四體는 四肢와 같은 말이다. ‘팔과 다리’를 이른다. 여기서는 ‘온몸’이라고 의역하였다. ◈ 形은 용언으로, ‘나타나다’, ‘드러나다’라는 말이다. ◈ 動静은 체언으로, ‘움직이는 것과 가만히 있는 것’을 이른다. ‘상대의 동정을 살핀다’라고 할 때의 ‘동정’이 바로 이 動静이다. 動은 ‘움직이는 것’이고, 静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만히 있게 되고, 가만히 있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게 되므로, 動静은 사실 모든 시간을 뜻하는 말이다. 몸가짐에 학문을 배웠다는 효험이 ‘언제나’ 드러난다는 말이다. ◈◈ 楊倞은 所謂古之學者爲己, ‘이 부분에서는 옛날 공부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 공부했다는 말이 설명되고 있다’라고 하였고, 또, 入乎耳/箸乎心/謂聞則志而不忘也//布乎四體/謂有威儀潤身也//形乎動静/謂知所措履也, ‘귀에 들어와서 마음에 각인된다는 말은, 들으면 뜻과 합치되어 잊지 않게 된다는 뜻이요, 온몸에 퍼진다는 말은 威儀가 온몸을 덮는다는 뜻이요, 動静에 드러난다는 말은 해야 할 일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옛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공부했다는 말은 《論語》에도 나오고, 본문 뒷부분에도 나온다. 《論語》 「憲問」에 古之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 ‘옛날 공부하던 사람들은 자신을 위했고,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을 위한다’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위한다는 말은, 곧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뜻이다. ◈◈ 蜀虎案 : 귀로 들으면, 내면에 각인되어서, 온몸으로 배운 바를 지키게 되고, 또 그 점이 행실로 드러나서,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배운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즉, 학문이 체화되어,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법도에 맞아 들어 가게 된다는 말이다. 《論語》 「爲政」에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일흔이 되자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도 법도를 어기지 않게 되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의미가 같다. [본문으로]
  2. 端而言/蝡而動/一可以爲法則, ◈ 端은 아마 喘의 오기인 듯 보인다. 모양이 비슷하고, 또 《荀子》 안에서 端이 사용된 다른 사례들이 많아서 잘못되었을 듯하다. 喘은 ‘숨을 헐떡거리다’는 뜻이다. 《說文解字》 「口部」에 喘/疾息也//从口耑聲, ‘喘은 빠른 숨이다. 口가 들어 있고, 耑이라고 발음한다’라고 되어 있다. 숨을 헐떡이는 천식의 ‘천’이 바로 이 喘이다. 이 句에서 荀子는 君子가 조금 부족하거나, 실수하더라도, 그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端은 ‘단정하다’, ‘올바르다’는 말이고, 喘은 ‘숨을 헐떡이다’는 말이니, 喘이라고 보아야 문맥에 합치된다. 楊倞과 王先謙 모두 端을 喘으로 보고 풀이하고 있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端/讀爲喘//喘/微言也, ‘端은 喘으로 읽는다. 喘은 微하게 말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또 或曰/端而言/謂端莊而言也, ‘어떤 사람은 端而言이 단정하고 엄중하게 말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아마 微言은 ‘또렷하지 않게 말하다’는 말일 듯하다. 王先謙은 臣道篇云/喘而言/臑而動/而一皆可爲法則///與此文同/則讀端爲喘是也//說文/喘/疾息也//蝡/動也, ‘「臣道」에 “喘하게 말하고, 臑하게 움직이더라도, 모두 法則에 맞다고 생각할 만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글과 같다. 즉, 端을 喘으로 읽는다는 설이 타당하다 하겠다. 《說文》에는 喘을 빠른 숨이라고 되어 있고, 蝡은 움직인다는 뜻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楊倞과 王先謙은 모두 端을 喘으로 보고 있다. 楊倞은 또 端을 글자 그대로 보고, 端莊, ‘단정하고 엄중하다’라고 해석한 설을 소개해 두기도 하였는데, 端을 端 그대로 해석하면 문맥에 맞지 않다. 「臣道」는 《荀子》의 편이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 端而言의 而는 아마 然과 같은 말로, 형용하는 말로 바꾸어 주는 표현인 듯하다. 蝡而動의 而도 그렇다. 그러면 端而言은 端然言, ‘端하게 言한다’는 말이 되고, 蝡而動은 蝡然動, ‘蝡하게 動한다’라는 말이 된다. 아니면, 而를 ‘~하면서’처럼 해석해도 좋다. 而가 然처럼 해석되는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書》 「虞書 益稷」에 啟呱呱而泣, ‘啟는 呱呱하게 울었다’라는 말이 있고, 《詩》 「國風 召南」에 舒而脫脫兮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이를 脫脫然舒也, ‘脫脫하게 舒한다’라고 풀이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 17년에는 鋌而走/險急何能擇, ‘鋌하게 도망가는데, 위험하고 시급한 상황에 무엇을 가릴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鋌/疾走貌, ‘鋌은 빨리 달리는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에서 而는 모두 然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 言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 蝡은 아마 벌레처럼 ‘꾸물거리다’는 말 같다. 端 부분에서 인용한 王先謙의 주석에 나와 있듯, 《說文解字》 「虫部」에는 蝡/動也//从虫耎聲, ‘蝡은 움직이다는 뜻이다. 虫이 들어 있고, 耎이라고 발음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자는 단순하게 ‘움직이다’라고 보면 본문의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廣韻》 「上聲 獮 輭」에는 蝡/蟲動, ‘蝡은 벌레가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의미가 본문과 합치된다. 蝡은 벌레가 움직이듯 ‘꾸물댄다’, ‘꿈틀거린다’는 말이다. 《漢書》 「匈奴傳 上」에 元元萬民/下及魚鱉/上及飛鳥/跂行喙息蝡動之類/莫不就安利/避危殆, ‘元元한 백성들에서, 아래로는 魚鱉, 위로는 飛鳥, 그리고 跂하게 움직이고, 喙하게 숨을 쉬며, 蝡하게 움직이는 것들까지, 모두 편안하고, 화를 피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跂行, 喙息, 蝡動은 문맥상 모두 물고기나 새만도 못한 미미한 벌레들을 이르는 말들이다. 즉, 蝡은 벌레들이 ‘꾸물거린다’라는 의미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顏師古는 蝡蝡/動貌, ‘蝡蝡은 움직이는 모습이다’라고 하였고, 또 蝡音人兖反, ‘蝡은 人과 兖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蝡/微動也//蝡/人允反, ‘蝡은 미미하게 움직인다는 말이다. 蝡은 人과 允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이 말 또한 ‘벌레처럼 움직인다’는 말과 같다. ◈ 動은 용언으로, ‘움직이다’는 말이다. ◈ 一은 부사어로, ‘모두’, ‘전부’다. 端而言과 蝡而動을 가리킨다. 楊倞은 一/皆也, ‘一은 전부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可以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可와 以는 둘 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以를 어떻게 ‘~할 수 있다’처럼 풀이할 수 있을까. 《論語》 「季氏」에 不學詩/無以言, ‘詩를 배우지 않으면 言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고, 또 不學禮/無以立, ‘禮를 배우지 않으면 立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또, 《論語》 「子張」에 無以爲也, ‘爲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또, 《論語》 「堯曰」에는 不知命/無以爲君子也//不知禮/無以立也//不知言/無以知人也, ‘命을 모르면 君子라고 爲할 수가 없고, 禮를 모르면 立할 수가 없으며, 言을 모르면 사람을 知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또, 《莊子》 「逍遙遊」에는 瞽者無以與乎文章之觀/聾者無以與乎鍾鼓之聲, ‘瞽者는 文章의 경관에 기뻐할 수가 없고, 聾者는 鍾鼓의 소리에 기뻐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以는 모두 ‘~할 수 있다’라고 해석된다. ◈ 爲는 용언으로, ‘~라고 여기다’, ‘~라고 생각하다’는 말이다. 法則을 받는다. ◈ 法則은 체언으로, ‘법도’, ‘법칙’, ‘법도와 준칙’을 이른다. 法과 則은 모두 ‘법도’, ‘규칙’을 이른다. ◈◈ 楊倞은 或喘息微言/或蝡蠢蝡動/皆可以爲法則, ‘간혹 숨을 헐떡이며 또렷하지 않게 말하거나, 꾸물거리면서 분명하지 않게 행동하더라도, 모두 법도에 맞다고 생각할 만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앞의 句에서는 君子가 학문을 배우면 내면에 각인시키고, 또 체화하니, 君子의 행동으로도 배운 바가 드러난다고 하였다. 이 句는 혹시나 君子가 조금 부족해 보이거나 실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모자란 행동마저도 모두 법도와 준칙에 합치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3. 小人之學也/入乎耳/出乎口, ◈ 小人은 체언으로, ‘소인’이다. 위에 있는 君子와 대비되고 있다. ◈ 小人之學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된다. ◈ 學은 체언으로, ‘공부’, ‘학문’이다. ◈ 小人之學也의 也는 者와 같다.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따로 번역하지 않았다. 也가 者와 같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君子之學也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入은 용언으로, ‘들어 가다’는 말이다. 학문이 귀로 ‘들어 가다’는 뜻이다. ◈ 入乎耳의 乎는 ‘~에’, ‘~로’다. 於와 같다. 出乎口의 乎도 그렇다. ◈ 耳는 체언으로, ‘귀’다. ◈ 出은 용언으로, ‘나오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튀어 나오다’라고 번역하였다. ◈ 口는 체언으로, ‘입’이다. ◈◈ 楊倞은 所謂今之學者爲人/道聽涂說也, ‘이 부분에서 지금 사람들이 남을 위해 공부한다는 말이 설명되고 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해 버린다’라고 하였다. 앞에서 인용하였듯, 지금 사람들이 남을 위해 공부한다는 말은 본문 뒷부분에도 나오고, 《論語》 「憲問」에도 나온다. ◈◈ 蜀虎案 : 君子는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공부하지만, 小人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공부가 체화되어 내면에 각인되지 못하고, 겉으로 돌면서 입으로 튀어 나와 다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는 데 사용된다. [본문으로]
  4. 口耳之間則四寸耳/曷足以美七尺之軀哉, ◈ 口는 체언으로, ‘입’이다. ◈ 口耳의 耳는 체언으로, ‘귀’다. ◈ 口耳之間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된다. ◈ 間은 체언으로, ‘사이’, ‘간격’이다. 입과 귀 ‘사이의 간격’을 뜻한다. ◈ 則은 주격 조사로, ‘~는’, ‘~은’처럼 해석된다. 之와 같다. 之와 則은 통용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東略之不知/西則否矣, ‘동쪽을 정벌하는 일은 모르겠으나, 서쪽은 정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고, 《國語》 「晉語」에 華則榮矣/實之不知, ‘겉은 화려하였지만, 실체는 모르겠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之과 則은 모두 ‘~는’과 같이 사용되었으며, 같은 형식의 句에서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則과 之가 옛날에 서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之」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韓侍郎云/則/當爲財/與纔同, ‘韓侍郎은 “則은 財가 되어야 한다. 纔와 같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韓侍郎은 唐代의 儒生인 韓愈를 이른다. 宋基采는 韓愈가 禮部侍郞을 지냈다고 했다. 纔는 ‘겨우’라는 말이다. 그러면 口耳之間則四寸耳는 ‘입과 귀 사이의 간격은 겨우 네 치일 뿐이다’라고 해석된다. 이에 대해 劉台拱은 則字自可通/不必如韓說, ‘則 그대로 해석이 가능하니, 韓愈의 설처럼 해석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겨우’라고 보면 句의 의미가 분명해지지만, 상기하였듯 則을 주격 조사로 해석해야 더 자연스러우므로, 나는 주격 조사로 보고 번역하였다. ◈ 四寸은 ‘네 마디’다. 四는 관형어로, ‘네’, ‘넷의’다. 寸은 길이의 단위로, ‘마디’, ‘치’다. 10寸이 1尺인데, 1尺을 22.5cm라고 하면, 1寸은 2.25cm가 되고, 4寸은 9cm가 된다. ◈ 四寸耳의 耳는 ‘~일 뿐이다’라는 말이다. 而已와 같다. 盧文弨는 宋本/四寸下耳字無, ‘《宋本》에는 四寸 아래에 耳가 없다’라고 하였다. 耳의 유무와 상관 없이, 句의 의미는 같다. ◈ 曷은 의문사로, ‘어떻게’, ‘어찌’라는 말이다. 何, 惡 등과 같다. ◈ 足以는 아마 ‘~하는 것을 할 만하다’, ‘~하기에 충분하다’는 말 같다. 足은 용언으로, ‘~할 만하다’, ‘충분하다’는 말이다. 以는 所以처럼, ‘~하는 것’이다. 美七尺之軀를 받는다. 즉, 足以美七尺之軀는 ‘七尺의 軀를 美하는 것이 충분하다’, 즉 ‘七尺의 軀를 美하기에 충분하다’, ‘七尺의 軀를 美할 만하다’라는 말이 된다. 그러면 以가 所以로 해석된 사례에는 무엇이 있을까. 《孟子》 「梁惠王 上」에 無以異也, ‘異할 것이 없다’라는 말이 있고, 《荀子》 「彊國」에는 則無以異於桀紂/而求有湯武之功名/可乎, ‘따라서 桀이나 紂와 다를 것이 없는데, 湯이나 武 같은 공적이나 명성을 이루려고 하니, 될 일이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 美는 용언으로, ‘바로잡다’, ‘개선하다’는 말이다. 七尺之軀를 받는다. 美는 ‘훌륭하다’, ‘좋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좋게 만들다’, ‘훌륭하게 만들다’라고 해석된다. 곧, ‘바로잡다’, ‘개선하다’는 말이다. 美가 그 자체로 ‘올바르다’, ‘맞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禮記》 「學記」에 君子知至學之難易/而知其美惡, ‘君子는 至學의 難易를 깨우치고, 그 美惡을 깨우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美惡/說之是非也, ‘美惡라는 말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표현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옳다’라고 풀이될 수 있으니, 곧 ‘바로잡다’라고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 七尺之軀은 ‘일곱 자나 되는 몸’, 즉 ‘온몸’을 이른다. 七尺은 ‘일곱 자’다. 之는 관형격 조사다. ‘~한’처럼 해석된다. 軀는 ‘몸’이다. 이 말은 단순히 ‘온몸’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행실’, ‘거둥’ 등을 모두 포괄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宋基采는 사람의 言行과 儀表를 대신하는 말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타당하다. ◈ 哉는 감탄사이자, 반문하는 의문사다. ◈◈ 蜀虎案 : 공부할 때 귀로 듣고 바로 말로 내뱉어선 안 되고, 충분히 되새겨서 배운 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君子와 小人을 대조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5. 古之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 ◈ 古는 체언으로, ‘옛날’이다. ◈ 古之學者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된다. 今之學者의 之도 그렇다. ◈ 古之學者의 學은 관형어로, ‘배우는’, ‘공부하는’이다. 學者의 者를 한정한다. 今之學者의 學도 그렇다. ◈ 古之學者의 者는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學者는 ‘공부하는 사람’, ‘배우는 사람’이 된다. 今之學者의 者도 그렇다. ◈ 爲己의 爲는 용언으로, ‘위하다’는 말이다. 己를 받는다.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공부한다는 뜻이다. 뒤에 나오는 句인 以美其身에 풀이되어 있다. ◈ 己는 체언으로, ‘자신’, ‘자기’다. ◈ 今은 체언으로, ‘지금’, ‘현재’다. ◈ 爲人의 爲도 용언으로, ‘위하다’는 말이다. 人을 받는다. 이 爲는 남에게 잘 보이거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뜻이다. 뒤에 나오는 句인 以爲禽犢에 풀이되어 있다. 이 말의 의미를 고려하면, 爲人의 爲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 人은 체언으로, ‘남’, ‘타인’을 이른다. ◈◈ 蜀虎案 : 자신을 위해, 즉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君子를, 남을 위해, 즉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小人을 이른다. 이 말은 바로 뒤의 句서 다시 풀이된다. ◈◈ 蜀虎又案 : 이 말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 《論語》 「憲問」에도 나온다. 《論語》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설도 참고차 소개해 둔다. 孔安國은 爲己/履而行之//爲人/徒能言之, ‘爲己라는 말은 실천하고 실행한다는 뜻이고, 爲人이라는 말은 다만 말로만 할 줄 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孔穎達은 此章言古今學者不同也//古人之學/則履而行之/是爲己也//今人之學/空能爲人言說之/己不能行/是爲人也//范曄云/爲人者馮譽以顯物/爲己者因心以會道也, ‘이 章에서는 옛날과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이 같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옛 사람은 배우면 실천하고, 실행하니, 이것이 자신을 위한다는 말이다. 지금 사람들은 배우면 공연하게 남을 위해 말이나 할 줄 알지, 자신이 실행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남을 위한다는 말이다. 范曄은 “남을 위하는 자는 칭찬에 의지해서 物을 밝히지만, 자신을 위하는 자는 내면에 근거해서 道를 깨우친다”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또, 程顥는 爲己/欲得之於己也//爲人/欲見知於人也, ‘爲己라는 말은 스스로 만족하고자 한다는 말이고, 爲人이라는 말은 남들에게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또 程頤는 古之學者/爲己/其終至於成物//今之學者/爲人/其終至於喪己, ‘옛날 공부하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다가 마침내 남을 깨우쳐 주었고,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을 위하다가 마침내 자신을 잃는 데에 이르고 만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愚按/聖賢論學者用心得失之際/其說多矣/然未有如此言之切而要者//於此明辨而日省之/則庶乎其不昧於所從矣, ‘내 생각에는, 聖賢이 학문에 대해 따지면서 마음가짐이나 깨달음을 가지고 설명한 말이 많다. 그러나, 이 말 만큼 절도 있고 핵심적인 말은 없었다. 이 말을 보고, 잘 따지고, 날마다 반성한다면, 아마도 앞길이 어둡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孔安國, 孔穎達, 程顥의 설명이 타당하다. 程頤와 朱熹의 설명은 너무 나간 듯하다. [본문으로]
  6. 君子之學也以/美其身//小人之學也以/爲禽犢, ◈ 君子之學의 之는 아마 주격 조사인 듯하다. ‘~는’처럼 해석된다. 小人之學의 之도 그렇다. ◈ 君子之學의 學은 체언으로, ‘배움’, ‘공부’, ‘학문’이다. 小人之學의 學도 그렇다. ◈ 君子之學也의 也는 아마 잘못 끼어 든 글자인 것 같다. 小人之學也의 也도 그럴 것이다. 이 문단 첫 節에 君子之學也라는 말이 있었고, 또 그 뒷부분에 小人之學也라는 말이 있었다. 아마 君子之學이라는 글자가 같아서, 원래 이 句에는 也가 없었는데, 앞의 句와 혼동해서 也를 집어 넣었거나, 也를 멋대로 보충해 넣은 것 같다. 만약 也가 없다면, 이 句는 君子之學/以美其身가 되는데, 이 말은 ‘君子는 學함으로써 其身을 美한다’가 되고, 뒤의 句도 小人之學/以爲禽犢, ‘小人은 學함으로써 禽犢을 爲한다’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也가 있다면, 也는 者처럼 ‘~라는 것’이라고 해석될 것이므로, 君子之學也/以美其身, ‘君子의 學이라는 것으로써 其身을 美한다’가 되고, 뒤의 句도 이런 식으로 해석될 것이다. 보다시피, 也가 없어야 之와 以가 자연스럽게 풀이된다. 나는 也를 빼고 번역하였다. 대조해 볼 문헌이 있으면 좋겠는데, 《群書治要》나 《韓詩外傳》 모두에 이 부분이 인용되어 있지 않다. ◈ 學也以美其身의 以는 ‘~함으로써’, ‘~로써’, ‘~하여서’라는 말이다. 學을 받는다. 學也以, 즉 學以는 ‘배움으로써’, ‘공부함으로써’, ‘학문으로써’, ‘공부하여서’라고 해석된다. 學也以爲禽犢의 以도 그렇다. ◈ 美는 용언으로, ‘개선하다’, ‘바로잡다’는 말이다. 其身을 받는다. ◈ 其身의 其는 君子를 가리킨다. ‘君子의’처럼 해석된다. ◈ 身은 체언으로, ‘자기’, ‘자신’이다. 君子 ‘자신’을 이른다. ◈ 爲禽犢의 爲는 용언으로, 아마 ‘보답을 바라다’는 말 같다. 즉, 爲禽犢은 ‘禽犢을 보답으로 바라다’는 뜻이 된다. 《禮記》 「祭統」에 不求其爲, ‘그 爲를 바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爲/謂福祐爲己之報, ‘爲는 자신을 위해 도와 줄 것이라는 보답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言/孝子但內盡孝敬/以奉祭祀/不求其鬼神福祥爲己之報, ‘효자는 다만 내면으로 효도와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 뿐, 자신을 위해 귀신의 복록을 보답으로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爲가 본문의 爲와 같다. 아마 爲의 이 의미는, ‘~를 위하다’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듯 보인다. ◈ 禽犢은 체언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날짐승과 송아지’를 이른다. 날짐승이란, 오리나 닭 같은 것을 이르는 말 같다. 禽犢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먼저 楊倞은 ‘선물’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爲禽犢은 공부를 ‘선물로 여긴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아마, 공부를 남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 사용한다는 말 같다. 郝懿行은 ‘애완 동물’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爲禽犢은 공부를 ‘유희 거리로 생각하다’라는 말이 된다. 王先謙은 禽獸와 같은 말로 보았다. 그러면 爲禽犢은 공부해도 ‘짐승과 똑같다’라는 말이 된다. 세 의견 다 나름의 타당성을 갖추고 있다. 宋基采는 陶鴻慶과 劉師培의 설을 소개하고, 《禮記》 「曲禮 下」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공부를 ‘남의 신임을 얻는 도구’로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楊倞의 설과 같은 듯 보인다. 宋基采가 언급한 「曲禮 下」는 무슨 내용일까. 「曲禮 下」 끝부분에는 폐백, 즉 남에게 보내는 예물이 나열되어 있다. 「曲禮 下」에서는 凡摯/天子鬯/諸侯圭/卿羔/大夫雁/士雉/庶人之摯匹, ‘폐백은 이렇다. 天子는 鬯, 諸侯는 圭, 卿은 羔, 大夫는 雁, 士는 雉, 庶人은 匹을 올린다’라고 하였다. 摯는 ‘폐백’으로, 남에게 바치는 예물을 이른다. 羔는 ‘어린 양’을, 雁은 ‘기러기’를, 雉는 ‘꿩’을, 匹은 鶩으로, ‘집오리’를 이른다. 예물 각각에는 또 이를 바치는 까닭이 있는데, 이 의미까지 인용하지는 않겠다. 그러면 본문의 禽犢과 이 예물들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雁, 雉, 匹은 모두 조류로, ‘날짐승’인 禽에 해당한다. 羔는 ‘어린 양’이므로, ‘송아지’인 犢에 해당한다. 즉, 이 禽犢 역시 ‘폐백’, 즉 ‘선물’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왜 양 새끼가 아니라 하필 송아지일까. 송아지 역시 고대 중국에서 중요한 예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禮記》 「禮器」에 天子適諸侯/諸侯膳以犢, ‘天子가 諸侯에게 가면, 諸侯는 송아지를 선물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郊特牲」에는 天子適諸侯/諸侯膳用犢이라고 되어 있는데, 같은 말이다. 以가 곧 用과 같기 때문이다. 「郊特牲」에 대해 鄭玄은 犢者誠愨/未有牝牡之情/是以小爲貴也, ‘송아지는 성실해서 牝牡 같은 情을 품고 있지 않다. 그래서 어릴수록 귀하게 생각한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謂天子巡守至諸侯之國/諸侯致膳於天子/則用犢也, ‘天子가 巡守하면서 諸侯國에 오면, 諸侯는 天子에게 지극하게 선물을 보내야 하니, 그래서 송아지를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周禮》 「秋官司寇」에도 王巡守/殷國/則國君膳以牲犢, ‘王이 巡守하면, 殷나라에서는 國君이 牲犢을 선물로 올렸다’라는 말이 있다. 牲犢은 ‘제물로 사용하는 송아지’다. 이처럼 송아지는 上古 시대 때부터 제후가 天子에게 올리는 선물이었다. 荀子는 戰國時代 가장 말기 사람이므로, 周나라의 天子는 이미 유명무실해졌고, 이 예법 또한 명문은 남아 있었을지언정, 꼭 제후와 천자 사이가 아니라, 예물을 주고 받는 사이에 적용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荀子는 ‘선물’을 禽犢이라고 표현하였던 것 같다. 禽犢이라는 표현은 《荀子》 「勸學」의 이 부분과, 「致士」 외의 다른 문헌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致士」에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致士」에는 貨財禽犢之請/君子不許, ‘재물이나 禽犢을 가지고 청탁하더라도, 君子는 받아 들이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으니, 「致士」에서도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명백하다. 이처럼, 禽犢이 ‘선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楊倞 등과 같이, ‘선물’이라고 보았다. 다만 나는 爲를 ‘여기다’, ‘생각하다’가 아니라, 상기하였듯 ‘보상을 바라다’라고 해석하고, 이 句를, 공부해서 ‘보상을 바란다’라고 번역하였다. 각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禽犢/餽獻之物也, ‘禽犢은 남에게 주는 물건이다’라고 하였다. 郝懿行은 小曰禽/大曰獸/禽犢/謂犢之小//小者/人喜撫弄而愛玩之/非必己有/非可獻人/直以爲玩弄之物耳//小人之學/入乎耳/出乎口/無裨於身心/但爲玩好而已//故以禽犢譬況之//注據致士篇貨財禽犢之請君子不許/故云/禽犢饋獻之物///不知貨財謂賄賂/禽犢謂玩好耳, ‘작은 것을 禽, 큰 것을 獸라고 한다. 禽犢이란, 작은 송아지를 이른다. 작은 송아지는 사람들이 즐겁게 쓰다듬으며 데리고 노는 것이니, 꼭 자기가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줄 만한 것도 아니다. 단지 가지고 노는 物일 뿐이다. 小人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니, 신체나 정신에 도움되는 바가 없고, 다만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荀子는 禽犢을 가지고 그 점을 비유하였다. 楊倞은 「致士」의 “금품이나 禽犢을 가지고 해 오는 청탁은 君子가 받지 않는 것들이다”라는 말에 근거하였기에, “禽犢은 주는 물건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楊倞은 貨財가 뇌물을 뜻하고, 禽犢이 애완 동물을 이른다는 점을 몰랐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致士」는 《荀子》의 편이다. 王先謙은 楊注固非/郝說尤誤//上言君子之學/入耳箸心而布於身/故曰/學所以美其身也//小人入耳出口/心無所得/故不足美其身/亦終於爲禽犢而已/文義甚明//荀子言學/以禮爲先/人無禮則禽犢矣//上文云/學至乎禮而止矣///是其言學之宗旨//又云/爲之人也/舍之禽獸也///正與此文相應//禽獸禽犢/特小變其文耳//小人學與不學無異/不得因此文言小人之學/而疑其有異解也, ‘楊倞의 주석이 참으로 잘못되었지만, 郝懿行의 설은 더 잘못되었다. 앞에서 君子의 학문은 귀에 들어가서 내면에 각인되고, 전산에 퍼진다고 했었다. 그래서 학문을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小人의 경우,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니, 내면에 도움이 되는 바가 없기에, 자신을 바로잡을 만하지 않고, 마침내는 禽犢 같은 짐승이 될 뿐이라고 한 것이다. 글이 이러한 말이라는 점이 아주 명백하다. 荀子가 학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禮를 앞세우니, 사람이 禮를 모른다면, 곧 禽犢이라는 뜻이다. 앞의 글에서 “공부는 《禮》에 이르면 끝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글이야말로 학문에 대한 핵심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荀子는 또, “공부하면 사람이 되고, 안 하면 금수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 글과 서로 맞아 들어간다. 禽獸에서 禽犢으로 글자를 조금 바꾸었을 뿐이다. 小人은 공부를 하나, 공부를 하지 않으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小人之學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다른 해석을 생각해 볼 수는 없겠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君子는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바로잡는 데 공부를 사용하지만, 小人은 이익을 취하려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禽犢 부분에서 인용하였던 「致士」의 내용을 고려할 때, 아마도 출세한 뒤, 뇌물을 받아 챙길 목적으로 공부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본문으로]
  7. 故不問而告謂之傲/問一而告二謂之囋, ◈ 故는 ‘그래서’다. 小人이 爲禽犢하기 때문에, 不問而告하거나 問一而告二한다는 점을 표현하는 말이다. ◈ 不問의 不은 부정어다. 問을 한정한다. ◈ 問은 용언으로, ‘묻다’, ‘질문하다’는 말이다. ◈ 不問而告의 而는 역접으로, ‘그런데’, ‘그런데도’처럼 해석된다. ◈ 告는 용언으로, ‘알려 주다’, ‘대답하다’는 말이다. ◈ 謂는 용언으로, ‘이르다’, ‘표현하다’라는 말이다. ◈ 謂之傲의 之는 명사구인 不問而告를 가리킨다. ◈ 傲는 아마 ‘성급하다’, ‘조급하다’는 말 같다. 小人은 이익을 원하므로, 먼저 남에게 잘 보이려고 들기 때문에 묻지 않았는데도 알려 주면서 꼴값을 떤다는 말이다. 傲에 대해서는 이견이 나뉜다. 楊倞은 ‘시끄럽게 떠든다’라고 보았고, 郝懿行은 ‘거만하다’, 그리고 俞樾과 王先謙은 모두 ‘성급하다’, ‘조급하다’라고 해석하였다. 각각의 설은 다음과 같다. 楊倞은 傲/喧噪也/言與戲傲無異//或曰/讀爲嗷/口嗷嗷然也//嗷與敖通, ‘傲는 시끄럽게 떠든다는 뜻이다. 희롱하면서 떠들어 대는 짓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傲는 嗷라고 읽어야 하니, 입을 모아 떠들어 대는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嗷와 敖는 통용된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楊倞의 주석에 대해, 口嗷嗷/舊本作聲曰嗷嗷/今改正, ‘楊倞의 주석 중 口嗷嗷는 옛 판본에는 聲曰嗷嗷라고 되어 있었다. 이제 개정하였다’라고 하였다. 郝懿行은 傲與謷同//說文云/謷/不省人言也///與此義合, ‘傲와 謷는 같다. 《說文》에 “謷는 다른 사람의 말을 돌아 보지 않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과 의미가 정합된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說文解字》 「言部」에는 謷/不肖人也//从言敖聲//一曰哭不止/悲聲謷謷, ‘謷는 다른 사람을 肖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言이 들어가 있고, 敖라고 발음한다. 어떤 사람은 곡이 멈추지 않는 모습이라고 했다. 슬퍼서 내는 소리가 謷謷다’라고 되어 있다. 肖는 아마 省의 오기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郝懿行이 인용한 말과 비슷해진다. 俞樾은 論語季氏篇/言未及之而言謂之躁///釋文曰/魯讀躁爲傲///荀子此文/蓋本魯論//下文曰/故未可與言而言謂之傲/可與言而不言謂之隱/不觀氣色而言謂之瞽///皆與論語同/惟變躁爲傲/可證也//傲/即躁之假字//不問而告/未可與言而言/皆失之躁/非失之傲也//魯論之說/今不可得而詳/以意度之/殆亦假傲爲躁//自古文論語出/得其本字/遂謂魯論讀躁爲傲/實不然也//躁字義長/傲字義短/魯之經師/豈不知此而改躁爲傲乎, ‘《論語》 「季氏」에 “말이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도 말을 하는 것을 躁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釋文》에는 “《魯論》에서는 躁를 傲라고 읽었다”라고 되어 있다. 《荀子》의 이 글은 아마도 본래 《魯論》에 있던 말일 것이다. 「勸學」 아랫쪽 부분에 “그래서 말을 나눌 만하지 않은데 말을 하는 것을 傲라고 하고, 말을 할 만한데 말을 하지 않는 것을 隱이라고 하며, 이색을 사리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을 瞽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모두 《論語》와 동일하고, 다만 躁가 傲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이 점을 가지고 증명할 수 있겠다. 傲는 躁의 가차자다. “묻지 않았는데 알려 준다”는 말과, “말을 나눌 만하지 않은데 말을 한다”는 짓은 성급해서 생기는 문제이지, 거만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魯論》에 대해서 지금은 상세히 알 수 없지만, 의미를 가지고 판단하건대, 아마 마찬가지로 傲를 가차해서 躁라고 사용하였을 것이다. 古文 《論語》가 나오고서 본래 글자를 알게 되었으니, 결국 “《魯論》에서는 躁를 傲라고 읽었다”라고 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설명하였듯,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躁의 뜻은 깊고, 傲의 뜻은 얕은데, 魯나라의 經師가 어찌 이 점을 몰라서 躁를 傲라고 고쳤겠느냐’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經典釋文》에는 躁에 대해 早報反//魯讀躁爲傲//今從古, ‘早와 報의 반절로 읽는다. 《魯論》에서는 躁을 傲라고 읽었다. 여기서는 《古論》을 따른다’라고 되어 있다. 말이 조금 꼬여 있는데, 俞樾은 傲를 ‘성급하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俞樾은 《論語》 「季氏」를 이용하여 傲와 躁가 서로 가차자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서, 본문의 傲가 사실은 躁, ‘성급하다’라는 의미임을 설명한 것이다. 王先謙은 俞說是, ‘俞樾의 설이 타당하다’라고 하였다. ◈ 一은 체언으로, ‘한 가지’다. ◈ 二는 체언으로, ‘두 가지’다. ◈ 謂之囋의 之는 명사구인 問一而告二를 가리킨다. ◈ 囋은 ‘말이 많다’, ‘시끄럽다’, ‘수다스럽다’는 뜻이다. 이 때는 ‘찰’이라고 읽는다. 小人은 이익을 원하므로, 먼저 남에게 잘 보이려고 들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알려 주면서 꼴값을 떤다는 말이다. 盧文弨와 郝懿行은 모두 陸機의 「文賦」를 인용해서 囋을 ‘떠들썩하다’처럼 풀이하고 있는데, 이 설이 타당하다. 楊倞은 囋을 讚과 같다고 보고, ‘억지로 도와 준다’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보면 말은 되지만 ‘말이 많다’는 설 보다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楊倞은 囋/卽讚字也/謂以言強讚助之//今贊禮謂之讚/囋古字/口與言多通, ‘囋은 곧 讚과 같다. 말을 가지고 억지로 도와 준다는 뜻이다. 요즘은 贊禮를 讚이라고 한다. 囋은 옛 글자다. 口와 言은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하였다. 讚은 ‘돕다’는 말이다. 贊禮는 제사 같은 의식을 지낼 때, 절차를 읽고 진행하는 사람을 이른다. 囋과 讚의 부수가 각각 口와 言인데, 楊倞이 囋을 讚으로 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口와 言이 부수로써 통용된다고 한 것이다. 盧文弨는 李善注文賦/引埤蒼云/嘈㖕/聲皃//㖕與囋及囐同/才曷反///荀子/上句謂其躁/此句謂其多言/下文云如嚮/則不問不告/問一不告二//楊注非也//啈/今文選注誤爲㖕, ‘「文賦」에 대해 李善은 《埤蒼》에서 “嘈와 㖕는 소리를 표현한 말이다. 㖕, 囋, 囐도 그렇다. 才와 曷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한 말을 인용해 놓았다. 荀子는 위의 句에서는 성급한 짓을, 이 句에서는 말이 많다는 점을, 아래의 글에서는 메아리 같은 태도를 들면서,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를 묻는다고 두 가지를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楊倞의 의견은 틀렸다. 啈의 경우, 지금 《文選》에는 㖕으로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文賦」는 西晉의 陸機가 지은 글로, 《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주석은 務嘈囋而妖冶, ‘힘껏 嘈囋하고, 妖冶한다’라는 말에 붙어 있다. 嘈囋은 아마 떠들썩한 모습을 이를 것이다. 주석에는 㖕이 啈으로 되어 있고, 皃가 貌로 되어 있어, 글자가 조금 다르다. 《埤蒼》은 曹魏의 張揖이 지은 字典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趙宋 때 실전된 듯하다. 郝懿行은 囋者/嘈囋/謂語聲緐碎也//陸璣文賦/務嘈囋而妖冶///義與此近//楊注非, ‘囋이라는 것은 嘈囋하다는 말이니, 말소리가 번잡하게 뒤섞여 있다는 뜻이다. 陸機의 「文賦」에 “힘껏 嘈囋하고, 妖冶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그 뜻이 이 글과 비슷하다. 楊倞의 설은 틀렸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이 글은 독립적인 句文처럼 보이지만, 사실 앞의 글에서 이어진다. 小人은 공부를 통해 자신을 바로잡으려 들지는 않고, 이익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禮에 맞지 않게 행동한다. 傲와 囋은 그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겠다. ◈◈ 蜀虎又案 : 傲에 대한 俞樾의 설을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먼저 《論語》에 대해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 부연한다. 漢나라 때는 《論語》가 세 종류로 전해지고 있었다. 魯나라에서 전하던 《魯論》, 齊나라에서 전하던 《齊論》, 그리고 집 벽이 허물어지며 나온 《古論》이 그렇다. 이 중 《魯論》과 《齊論》은 사실 구전되던 것으로, 今文, 古文이라고 할 때의 今文에 해당한다. 《論語》 「季氏」에 있는 言未及之而言謂之躁에 대해 陸德明은 《魯論》에서는 躁가 傲라고 읽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바로 같은 문장임에도, 판본에 따라 躁와 傲가 서로 바뀌어서 사용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俞樾은 이 점을 이용해서 躁와 傲가 고대에 서로 가차자로 사용되었음을 보이고, 그래서 본문의 傲가 사실 躁라는 의미라고 설명한 것이다. 《論語》는 이후, 세 판본이 함께 전수되다가, 西漢 사람인 張禹가 《魯論》에다 《齊論》을 섞어서 《論語章句》를 만들었고, 다시 東漢의 鄭玄이 張禹의 《論語章句》와 《古論》을 섞었다. 지금 전수되고 있는 《論語》은 鄭玄이 편집한 판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傲/非也//囋/非也//君子如嚮矣, ◈ 傲는 체언으로, 小人의 ‘조급한 태도’, ‘성급한 태도’를 이른다. ◈ 非는 용언으로, ‘잘못되다’, ‘그릇되다’, ‘옳지 않다’는 말이다. ◈ 囋은 체언으로, 小人의 ‘수다스러운 태도’, ‘말이 많은 태도’를 이른다. ◈ 그래서 傲/非也//囋/非也는 ‘성급한 태도도 잘못되었고, 말이 많은 태도도 잘못되었다’라고 해석된다. 나는 ‘성급해서도 안 되고, 말이 많아도 안 된다’처럼 의역하였다. ◈ 如는 용언으로, ‘~와 같다’는 말이다. 嚮을 받는다. ◈ 嚮은 響과 통용되는 글자다. 체언으로, ‘메아리’다. 如嚮은 ‘메아리 같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메아리처럼 대답하다’라고 의역하였다. 楊倞은 嚮與響同, ‘嚮은 響과 같다’라고 하였다. ◈◈ 楊倞은 如響應聲, ‘君子는 메아리가 소리가 남에 따라 생겨나는 것처럼 대답해 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小人은 사람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에,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알려 주면서 친절을 과하게 베풀려 한다. 그러나 君子는 공부의 목표가 자신을 바로잡는 데에 있기 때문에, 묻지 않으면 알려 주지 않고, 물으면 묻는 말에만 대답해 준다. 그래서 이를 如嚮, ‘메아리 같다’라고 한 것이다. 《莊子》 「應帝王」에 不將不迎/應而不藏, ‘무엇이든 구태여 떠나 보내려 하지도 않고, 애써 맞아 들이려 하지도 않으니, 이처럼 만물을 비출 뿐,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莊子는 至人을 鏡, ‘거울’에 비유하면서, 萬物이 타고 난 그대로를 비추어 주는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일견 통하는 면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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