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순자 - 1 - 권학 - 5 - 한 길만 꾸준히 걸으면 명망이 천하에 드러난다

2021. 9. 24. 10:08순자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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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보기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원래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숫자로 바꾸고 하단으로 내려 두었습니다. 원래 글은 물론 원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주석을 하단으로 내리니까 정작 중요한 주석과 중요하지 않은 주석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어 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에다가 '*' 같은 것으로 표시해 둘까, 혹은 다르게 어떻게든 표시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느니 원안을 보존하고 새로 글을 파 두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기가 편한 것이 우선이냐, 주석이 우선이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 편한 방식에 맞게 글을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주석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습니다.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李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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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0년 5월 1일 16시 46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6

 

순자 - 1 - 권학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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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본문과 함께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0

 

순자 - 1 - 권학 - 5 - 한 길만 꾸준히 걸으면 명망이 천하에 드러난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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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土成山,風雨興焉;積水成淵,蛟龍生焉;積善成德,而神明自得,聖心備焉。故不積蹞步,無以致千里;不積小流,無以成江海。騏驥一躍,不能十步;駑馬十駕,則亦及之。

功在不舍。鍥而舍之,朽木不折;鍥而不舍,金石可鏤。螾無爪牙之利,筋骨之强,上食埃土,下飲黃泉,用心一也。蟹六跪而二螯,非虵蟺之穴無可寄託者,用心躁也。

是故,無冥冥之志者無昭昭之明,無惛惛之事者無赫赫之功。行衢道者不至,事兩君者不容。目不能兩視而明,耳不能兩聽而聰。螣蛇無足而飛,梧鼠五技而窮。

詩曰:尸鳩在桑,其子七兮。淑人君子,其儀一兮。其儀一兮,心如結兮。故君子結於一也。

昔者瓠巴鼓瑟而流魚出聽,伯牙鼓琴而六馬仰秣。故聲無小而不聞,行無隱而不形。玉在山而草木潤,淵生珠而崖不枯。爲善不積邪,安有不聞者乎?

 

 

흙을 쌓아서 산을 만들면, [대기가 산에 부딪혀서] 비바람이 일어나고[각주:1], 물을 모아서 연못을 만들면, [물고기가 많아져서] 교룡이 생겨난다.[각주:2] [마찬가지로, 사람이] 선을 쌓아서 덕을 이루면, 신묘한 통찰력이 저절로 체득되고, 성인과 같은 마음도 갖춰지게 된다. [신묘한 통찰력을 체득하고 성인의 마음을 갖추기 위한 관건은 바로 선을 조금씩이라도 쌓아 나가는 데 있는 것이다.][각주:3] 이처럼, 반걸음이라도 나아가지 않으면 천릿길을 갈 수가 없고[각주:4], 실개천들을 합치지 않고서는 강이나 바다를 만들 수가 없다.[각주:5] 기기라고 한 번 뛰어서 천 리를 갈 수는 없지만, 둔한 말이 열흘을 가면 [천 리를 움직이므로, 둔한 말] 역시 기기와 견줄 만하다.[각주:6]

 

공을 세우[느냐, 세우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일을 중도에] 그만두지 않는 데 달려 있다.[각주:7] 새기다가 [중도에] 포기해 버리면, 썩은 나무에조차도 새기지 못할 것이요, 새겨 나가면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면, 금속이나 돌에도 새길 수 있게 될 것이다.[각주:8] 지렁이는 발톱이나 어금니처럼 예리한 것도, 근육이나 뼈처럼 강건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위로는 흙을 먹고, 아래로는 흙탕물을 마신다. [지렁이의] 마음가짐이 전일하기 때문이다.[각주:9] 게는 다리를 여덟 개, 집게발을 두 개나 가지고 있지만, 드렁허리가 파 놓은 굴이 아니면 거처로 삼으려 들지 않는데, [이는 게의] 마음가짐이 성급하기 때문이다.[각주:10]

 

이런 까닭으로, 심원한 뜻을 [일관되게] 품지 않으면 명철한 통찰력을 지닐 수 없고, [일관된 자세로] 직무를 그윽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혁혁한 공적을 세울 수 없다.[각주:11] 갈림길을 [모두] 가려는 놈은 [양쪽 모두에] 이를 수가 없고, 두 군주를 [동시에] 모시려는 놈은 [양측 모두에게서] 용납되지 못한다.[각주:12] 눈으로 두 곳을 [동시에] 보면서 뚜렷하게 볼 수는 없고, 귀로 두 가지 소리를 [한꺼번에] 들으면서 또렷하게 들을 수는 없다.[각주:13] 등사는 발이 없었는데도 [전일하게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날아 다녔고, 날다람쥐는 재주가 다섯 가지나 있었는데도 [한 가지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지에 몰렸다.[각주:14]

 

[이에 대해] 《시》에 이런 말이 있다.[각주:15]

 

“뻐꾸기가 뽕나무에 [앉아] 있는데, 새끼들이 일곱이구나. [하지만] 훌륭한 군자는 몸가짐이 한 결 같도다. 군자의 몸가짐은 한 결 같으니, [군자의] 마음도 굳건하구다.”[각주:16]

 

따라서 군자는 [심지를] 한 결 같이 다잡는 것이다.[각주:17]

 

[한 가지를 한결같이 이루어 나가면 탁월해지고, 마침내 천하에 명성이 퍼져 나간다.] 옛날 호파가 슬을 타면 물 속에 있던 고기도 나와서 [연주를] 들었고, 백아가 금을 타면 육마도 [연주를 듣느라] 고개를 쳐들고 꼴을 먹었다.[각주:18] [호파와 백아의 예에서 알 수 있듯, 탁월한] 연주는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그 경지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이처럼, 행위도 은미하다 한들 [그 인과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없다.[각주:19] [예를 들면 이러하다.] 산에 옥이 [매장되어] 있으면 [그 산에 있는] 나무는 생생해지고, 연못이 진주를 만들면 [연못] 기슭이 마르지 않게 된다.[각주:20] [연주가 탁월하다면, 연주 소리를 아무리 미미하게 낸들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이처럼, 선행을 이어 나갔다면 옥과 진주의 경우처럼 아무리 선행을 숨기려 해도 세상 사람들에게 명망이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선을 행하고, 이어 나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또, 선행을 이어 나가다 보면,] 어찌 명망이 [천하에] 퍼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각주:21]

 

 

 

  1. 積土成山/風雨興焉, ◈ 이 句는 積土而成山/則風雨興焉, ‘積土하여 成山하면 風雨가 興한다’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 積은 용언으로, ‘쌓다’, ‘모으다’는 말이다. 土를 받는다. ◈ 土는 체언으로, ‘흙’이다. ◈ 成은 용언으로, ‘이루다’, ‘만들다’는 말이다. 山을 받는다. ◈ 山은 체언으로, ‘산’이다. ◈ 風雨는 체언으로, ‘바람과 비’, 아마 ‘비바람’을 뜻할 것이다. 風은 ‘바람’이고, 雨는 ‘비’다. ◈ 興은 용언으로, ‘일어나다’는 말이다. ◈◈ 蜀虎案 : 積土는 成山의 원인이고, 成山은 風雨興의 원인이다. 즉, 風雨興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積土, ‘흙이 쌓이는 일’이다. 이하 句들의 구조도 같다. [본문으로]
  2. 積水成淵/蛟龍生焉, ◈ 이 句는 積水而成淵/則蛟龍生焉, ‘積水하여 成淵하면, 蛟龍이 生한다’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 積은 용언으로, ‘쌓다’, ‘모으다’는 말이다. 水를 받는다. ◈ 水는 체언으로, ‘물’이다. ◈ 成은 용언으로, ‘이루다’, ‘만들다’는 말이다. 淵을 받는다. ◈ 淵은 체언으로, ‘못’, ‘연못’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淵이 川, ‘내’라고 되어 있다. 淵도 물이고, 川도 물이다. 그러나 아래의 蛟龍 부분에서 인용하였듯, 《說文解字》의 내용을 참고하면 川 보다는 淵이 더 타당할 듯하다. ◈ 蛟龍은 체언으로, ‘교룡’이다. 蛟龍은 물 속에 사는 용의 일종이다. 《說文解字》 「虫部」에 蛟/龍之屬也//池魚滿三千六百/蛟來爲之長/能率魚飛//置笱水中/卽蛟去//从虫交聲, ‘蛟는 龍의 일종이다. 연못의 물고기가 3600마리에 이르면, 蛟가 나와 우두머리가 되는데, 물고기를 데리고 날아 갈 수 있다. 수중에 통발을 설치하면, 蛟는 떠나 버린다. 虫이 들어 있고, 交라고 발음한다’라고 되어 있다. ◈ 生은 용언으로, ‘생겨나다’는 말일 듯하다. ◈◈ 蜀虎案 : 積水는 成淵의 원인이고, 成淵은 蛟龍生의 원인이다. 즉, 蛟龍生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積水, ‘물이 모이는 일’이다. [본문으로]
  3. 積善成德/而神明自得/聖心備焉, ◈ 이 句는 積善而成德/則神明自得/而聖心備焉, ‘積善하여 成德하면, 神明이 自得해져서 聖心을 備한다’처럼 해석해야 하겠다. ◈ 積은 용언으로, ‘쌓다’, ‘모으다’는 말이다. 善을 받는다. ◈ 善은 체언으로, ‘선’, ‘선행’이다. ◈ 成은 용언으로, ‘이루다’는 말이다. 德을 받는다. ◈ 德은 체언으로, ‘덕’, ‘덕성’이다. ◈ 而神明自得의 而는 ‘그러면’이라고 해석된다. 則과 같다. 《禮記》 「喪服小記」에 士妾有子而爲之緦/無子則已, ‘士妾에게 자식이 있으면 삼베로 만들고, 자식이 없으면 그만 둔다’라는 말이 있고, 《墨子》 「明鬼 下」에 則先死者/非父則母/非兄而姒也, ‘그러면, 먼저 죽는 사람은, 아비가 아니면 어미이고, 형이 아니면 姒다’라는 말이 있으며, 《史記》 「季布欒布列傳」에 與楚則漢破/與漢而楚破, ‘楚나라와 함께하면 漢나라를 깨뜨리고, 漢나라와 함께하면 楚나라를 깨뜨린다’라는 말이 있다. 예문들에서 而는 모두 ‘그러면’으로, 則과 의미가 같다. 而가 則과 서로 교차되어 쓰인 사례도 있다. 《禮記》 「樂記」에 喜則天下和之/怒則暴亂者畏之, ‘즐거우면 天下가 어우러지고, 빡치면 暴亂한 자들이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荀子》 「樂論」에는 喜而天下和之/怒而曓亂畏之라고 되어 있다. 《孟子》 「公孫丑 上」에 可以仕則仕/可以止則止/可以久則久/可以速則速, ‘출사할 만하면 출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며, 久할 만하면 久하고, 速할 만하면 速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孟子》 「萬章 下」에는 이 말이 可以速而速/可以久而久/可以處而處/可以仕而仕라고 되어 있다. 而와 則이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소개되어 있다. ◈ 神明은 아마 ‘신묘한 통찰력’이라는 말 같다. 神은 관형어로, ‘신묘한’, ‘신비로운’, ‘영험한’이라는 말이다. 明을 한정한다. 明은 체언으로, ‘통찰력’, ‘명료성’이다. ◈ 自는 부사어로, ‘저절로’라는 말이다. ◈ 得은 용언으로, ‘체득되다’, ‘깨닫게 되다’, ‘얻어지다’는 말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得이 傳으로 되어 있다. 傳은 아마 ‘전수받다’는 말일 듯하다. ◈ 그래서 神明自得은 ‘신묘한 통찰력이 저절로 체득된다’라는 말이 된다. 어순을 바꾸어서 自得神明으로 보고, ‘神明을 스스로 터득한다’라고 보아도 좋겠다. 楊倞은 神明自得/謂自通於神明, ‘神明自得이라는 말은 神明과 저절로 통하게 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聖心은 아마 ‘聖人의 마음’, ‘聖人과 같은 마음’이라는 말 같다. 心聖은 관형어로, ‘聖人의’, ‘聖人과 같은’이라는 말이다. 心을 한정한다. 心은 체언으로, ‘마음’이다. ◈ 備는 용언으로, ‘갖춰지다’, ‘구비되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備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備는 판본에 따라 循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循은 ‘좇다’, ‘따르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備로 보고 풀이하였다. 盧文弨는 循을 따랐고, 劉台拱, 王念孫, 王先謙은 모두 備가 타당하다고 보았다.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盧文弨는 宋本循作備/與大戴同, ‘《宋本》에는 循이 備로 되어 있다. 《大戴》와 같다’라고 하였다. 《大戴》는 《大戴禮記》다. 劉台拱은 當作備//古音與德得爲韻, ‘마땅히 備라고 해야 한다. 옛날 발음으로 따져 보면, 備는 德, 得과 韻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王念孫은 呂錢本作備//此言積善成德/而通於神明/則聖心於是乎備也//成德與聖心備/上下正相應//元刻備作循/則與上文不相應矣//儒效篇云/積善而全盡/謂之聖人///彼言全盡/猶此言聖心備也/一也//備字/古音鼻墨反[見吳棫韻補正]/正與德得爲韻/二也//大戴記及群書治要竝作備/文選謝瞻從宋公戲馬臺集送孔令詩注/張子房詩注/引此亦作備[張華勵志詩注/引作循/與二注不合/乃後人以誤本荀子改之]/三也//備字/俗書作俻/循字/隷書或作𠌪/二形相似而誤, ‘《呂本》과 《錢本》에는 備로 되어 있다. 이 말은 善을 쌓아서 德을 이루고, 神明에 통하면, 聖心이 이에 갖추어진다는 뜻이다. 德을 이룬다는 말과 聖心을 갖춘다는 말은, 바로 앞뒤에서 상응하고 있다. 《元刻》에는 備가 循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러면 앞의 글과 상응하지 못하게 된다. 「儒效」에는 “善을 쌓아서 온전하게 다하면 聖人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 중 “온전하게 다한다”는 것이 이 句에서 “聖心이 갖춰진다”라는 말과 의미가 같다. 이 점이 첫 번째 증거다. 備의 옛날 발음은 鼻와 墨의 반절이다.[王先謙의 부연 : 吳棫의 《韻補正》에 나온다.] 그러므로 備는 바로 德, 得과 韻을 이룬다. 이 점이 두 번째 증거다. 《大戴記》와 《群書治要》에는 모두 備로 되어 있다. 《文選》에 있는 謝瞻의 「宋公戲馬臺集送孔令詩」에 대한 주석, 「張子房詩」에 대한 주석에서는 이 글을 인용해 놓았는데, 인용문에는 역시 備라고 되어 있다.[王先謙의 부연 : 張華의 「勵志詩」에 대한 주석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면서 循이라고 했는데, 두 가지 주석이 정합되지 않는다. 아마도 나중 사람이 잘못된 판본의 《荀子》를 가지고 고쳤을 것이다.] 이 점이 세 번째 증거다. 備는 俗書에는 俻이라 되어 있고, 循은 隷書로 𠌪이라고 쓰기도 하니,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해서 잘못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儒效」는 《荀子》의 편 이름이다. 吳棫은 趙宋 사람이다. 吳棫은 《韻補》를 지었다. 《韻補正》은 淸代 顧炎武의 저작이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다. 《文選》의 주석은 李善의 주석을 이른다. 「宋公戲馬臺集送孔令詩」는 「九日從宋公戲馬臺集送孔令詩」를 이르는 듯하다. 「九日從宋公戲馬臺集送孔令詩」라는 제목의 詩는 두 개가 있는데, 여기서 이르는 시는 첫 번째 것이다. 「九日從宋公戲馬臺集送孔令詩」에는 聖心眷嘉節/揚鑾戾行宮, ‘聖心이 嘉節을 眷하여, 鑾을 揚하고 行宮에 戾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李善은 孫卿子曰/積善德而聖心備焉, ‘《孫卿子》에 “좋은 德을 쌓으면 聖心이 備해진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孫卿子》는 《荀子》다. 「張子房詩」에는 聖心豈徒甄/惟德在無忘, ‘聖心이 어찌 甄에 徒하겠느냐. 德을 생각하며 잊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李善은 大戴禮曰/神明自得/聖心備矣, ‘《大戴禮》에는 “神明이 저절로 체득되고, 聖心이 備해진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大戴禮》는 《大戴禮記》다. 「勵志詩」는 《文選》에 「勵志」라고만 되어 있다. 「勵志」에는 土積成山/歊蒸鬱冥, ‘흙을 쌓아서 산을 만들면, 올라간 안개가 울창하게 冥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李善은 荀卿子曰/土積成山/風雨興焉//水積成川/蛟龍生焉//種善德而神明自得/聖心循焉, ‘《荀卿子》에 “흙이 쌓여서 산이 되면 비바람이 일어나고, 물이 쌓여서 내를 이루면, 蛟龍이 생겨난다. 善德을 種하면 神明이 저절로 체득되고, 聖心이 循해진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설들에 대해 王先謙은 謝本/從盧校作聖心循焉, ‘《謝本》에서는 盧文弨의 교정을 따라 聖心循焉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고, 또 榮辱篇云/堯禹者/非生而具者也//起於變故/成乎修爲/待盡而後備者也///與此言積善成德聖心乃備義合//劉王說是/今改從宋本, ‘「榮辱」에는 “堯와 禹는 태어나면서부터 갖춘 사람이 아니다. 故를 변화시키는 데에서 시작하여, 修爲를 이루고, 수양이 극진해지기를 待한 이후에야 備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본문에서 善을 쌓아서 德을 갖추면, 聖心이 이에 備한다고 한 말과 의미가 정합된다. 劉台拱과 王念孫의 설이 타당하다. 그래서 《宋本》을 따라 循을 備로 고쳤다’라고 하였다. 「榮辱」은 《荀子》의 편이다. 「榮辱」에는 堯禹者/非生而具者也//夫起於變故/成乎修修之爲/待盡而後備者也로 되어 있어, 몇 글자가 다르다. ◈ 焉은 말을 끝내는 조사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焉이 矣로 되어 있다. 矣 역시 말을 끝내는 조사다. ◈◈ 王先謙은 言學必積小高大/一志者成也, ‘이 글은, 배우는 자는 반드시 작은 것을 쌓아 나가야 크고 높게 된다는 뜻이니, 뜻을 한결 같이 품어야 학업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또, 孔廣森大戴記補注/以積土成山至末爲一段/今從之, ‘孔廣森의 《大戴記補注》에서는, 積土成山에서 끝까지를 한 문단으로 보았다. 나는 이를 따랐다’라고 하였다. 《大戴記補注》는 《大戴禮記補注》를 이른다. 末이란, 아마 저 뒤에 나오는 故君子結於一也를 이르는 듯하다. 《大戴禮記補注》 원문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荀子集解》에는 故君子結於一也까지가 한 문단으로 간주되어 있다. 나는 그 뒷부분인 爲善不積邪/安有不聞者乎까지를 한 문단으로 간주하였다. 마음을 한 결 같이 먹고 꾸준히 쌓아 나가야 한다는 주제가 그 부분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 蜀虎案 : 이 부분의 초점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본문으로]
  4. 故不積蹞步/無以致千里, ◈ 故는 是故로 보고, ‘이와 같이’, ‘이처럼’이라고 해석하면 좋겠다. 그냥 故로 보고, ‘따라서’라고 해도 합치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故가 是故라고 되어 있다. ◈ 不은 부정어다. 積을 한정한다. ◈ 積은 용언으로, ‘쌓다’, ‘모으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蹞步를 받는다. 여기서 積은 ‘걸음’에 대해 사용되었으므로, 나는 ‘나아가다’라고 의역하였다. ◈ 蹞步는 아마 ‘반걸음’이라는 말 같다. 楊倞은 半步曰蹞//蹞與跬同, ‘반걸음을 蹞라고 한다. 蹞와 跬는 같다’라고 하였다. 步는 ‘한 걸음’이다. 그러면 蹞步는 ‘반걸음과 한 걸음’이 되는데, 그래서는 말이 어색하다. 아마 蹞가 관형어일 것이고, 步는 체언일 것이다. 그러면 蹞步가 한 단어로, ‘반걸음’이 된다. 《方言》에 半步爲跬, ‘반걸음을 跬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蹞가 跬로 되어 있다. ◈ 無以는 ‘~할 수가 없다’는 말일 것이다. 以는 아마 能, ‘~할 수 있다’ 또는 爲, ‘~하다’라는 말인 것 같다. 致를 받는다. 《論語》 「季氏」에 不學詩/無以言, ‘詩를 배우지 않으면 言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고, 또 不學禮/無以立, ‘禮를 배우지 않으면 立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또, 《論語》 「子張」에 無以爲也, ‘爲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또, 《論語》 「堯曰」에는 不知命/無以爲君子也//不知禮/無以立也//不知言/無以知人也, ‘命을 모르면 君子라고 爲할 수가 없고, 禮를 모르면 立할 수가 없으며, 言을 모르면 사람을 知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莊子》 「逍遙遊」에는 瞽者無以與乎文章之觀/聾者無以與乎鍾鼓之聲, ‘瞽者는 文章의 경관에 기뻐할 수가 없고, 聾者는 鍾鼓의 소리에 기뻐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 致는 용언으로, ‘이르다’, ‘도달하다’라는 말이다. 千里를 받는다. ◈ 千里는 아마 ‘천 리 떨어진 곳’을 이르는 듯하다. 나는 ‘천릿길’이라고 의역하였다. ◈◈ 蜀虎案 :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면, 언젠가는 천릿길도 갈 수가 있지만, 가만히 있기만 하면, 영겁의 세월이 지나도 절대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5. 不積小流/無以成江海, ◈ 不은 부정어다. 積을 한정한다. ◈ 積은 용언으로, ‘쌓다’, ‘모으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小流를 받는다. 물에 대한 말이므로, ‘합치다’라고 의역하였다. ◈ 小流는 ‘작은 개울’, ‘작은 개천’을 뜻한다. 나는 ‘실개천’이라고 번역하였다. 小는 관형어로, ‘작은’이다. 流를 한정한다. 流는 본래 ‘흐르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체언으로, ‘물이 흐르는 것’, 즉 ‘강’이나 ‘내’ 같은 ‘물줄기’를 뜻한다. 支流, 激流라고 할 때의 流와 같다. ◈ 無以는 ‘~할 수가 없다’는 말일 것이다. 以는 아마 能, ‘~할 수 있다’ 또는 爲, ‘~하다’라는 말인 것 같다. 成을 받는다. 無以에 대해서는 無以致千里의 無以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成은 용언으로, ‘이루다’, ‘만들다’는 말이다. 江海를 받는다. ◈ 江海는 체언으로, ‘강과 바다’를 이른다. 江은 ‘강’이고, 海는 ‘바다’다. 그런데 이 江海는 판본에 따라 江河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盧文弨는 江海/宋本與大戴同/元刻作江河, ‘江海는 《宋本》과 《大戴》에도 江海라고 되어 있다. 《元刻》에는 江河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群書治要作河海, ‘《群書治要》에는 河海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앞에 나온 글 중에 假舟檝者/非能水也/而絕江河, ‘나룻배를 사용하는 사람은 나룻배를 탄다고 수영을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江河를 건넌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王念孫은 江河가 아니라 江海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따라 江河라고 보지 않고, 江海 그대로 번역하였다. ◈◈ 蜀虎案 : 커다란 강이나 바다도, 실개천에서 시작된다. 산에 오르다 보면, 정상 부근에서 바위 틈으로 졸졸졸 흐르는 물이, 중턱 아래로 내려 가면 돌다리로 건너야 할 만한 개울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이와 같다. [본문으로]
  6. 騏驥一躍/不能十步//駑馬十駕/則亦及之, ◈ 이 節에는 문제가 있다. 앞뒤의 구조가 대칭을 이루지 못하고, 또 앞뒤의 내용도 대칭을 이루지 못한다. 따라서 이 節을 풀이하기 전에, 이 점에 대해 먼저 따져 보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먼저, 구조의 대칭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節은 본래 騏驥一躍/不能十步//駑馬十駕라고만 되어 있을 뿐, 마지막에 則亦及之라는 句가 없다. 이 句는 楊倞의 설에 근거해서 내가 임의로 추가한 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의 주석에 설명해 두었다. 두 번째로, 내용의 대칭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騏驥一躍/不能十步//駑馬十駕/則亦及之는 ‘騏驥가 一 躍하더라도 十步를 갈 수는 없고, 駑馬가 十駕를 가면 역시 騏驥와 及할 만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글자는 十步다. 騏驥는 천리마다. 천리마란, 하루에 천 리를 간다는 말이다. 十步는 대략 15m 정도다. 즉, 騏驥一躍/不能十步는 ‘천리마인 騏驥라도, 한 번 도약해서 15m를 갈 수는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뒤의 駑馬十駕/則亦及之를 생각해 보자. 十駕는 ‘열흘 동안 간다’는 말이고, 之는 騏驥를 지시하는 대명사다. 及은 ‘견주다’, ‘비슷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駑馬十駕/則亦及之는 ‘둔한 말이 열흘 동안 움직이면 둔한 말 역시 騏驥에 견줄 만하다’라는 말이 된다. 그럼 어떤 점을 견줄 만하다는 뜻일까. 앞에서 騏驥에 대해 十步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駑馬에 대해서도 十步라고 생각해야 할까. 그러면 이 말은 ‘駑馬가 열흘 동안 움직여서 駑馬를 간다’는 의미가 되어야 하는데, 이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十步는 아무리 잘 쳐 줘야 15m나 20m밖에 안 될 텐데, 아무리 말이 둔하더라도, 어떻게 열흘 동안 15m를 못 가겠는가. 신생아가 굴러서 가도 열흘이면 1km를 넘게 갈 수 있겠다. 따라서 十步는 말이 안 된다. 盧文弨는 《大戴禮記》 「勸學」을 근거로, 十步가 아니라 千里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이 타당하다. 그러면 騏驥가 천리마라는 점으로써 자연스럽게 의미가 풀린다. 그러면, 駑馬가 騏驥와 견줄 만해진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王念孫은 《呂氏春秋》 「開春論 貴卒」과 《淮南子》 「齊俗訓」을 근거로, 옛 사람들이 駑馬라도, 열흘 동안 천리를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증명했다. 駑馬十駕, 즉 ‘둔한 말이 열흘 동안 가면’, 곧 천 리를 가니, 그래서 천리마인 騏驥와 견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十步는 千里로 해석해야 하고, 駑馬十駕 역시 ‘천 리’를 함의한다고 간주하고 해석해야 하겠다. 王念孫의 논증은 十駕에 대한 주석에 인용되어 있다. ◈ 騏驥는 체언으로, ‘기기’다. 고대에 유명하였던 천리마의 이름이다. 《莊子》 「秋水」에 騏驥驊騮/一日而馳千里/捕鼠不如狸狌, ‘騏驥와 驊騮는 하루에 천 리를 가지만, 쥐를 잡는 데에는 狸狌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成玄英은 騏驥驊騮/並古之良馬也, ‘騏驥와 驊騮는 모두 옛날에 있던 좋은 말이다’라고 하였고, 李頤는 騏驥驊騮/皆駿馬也, ‘騏驥와 驊騮는 모두 준마다’라고 하였다. 《淮南子》 「主術訓」에는 騏驥騄駬/天下之疾馬也, ‘騏驥와 騄駬는 天下의 疾馬다’라는 말이 있다. 疾은 ‘빠르다’는 뜻이다. 또, 《淮南子》 「齊俗訓」에는 夫騏驥千里/一日而通//駑馬十舍/旬亦至之, ‘저 騏驥는 천 리를 하루에 가지만, 駑馬도 열흘이면 十舍를 역시 갈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史記》 「外戚世家」에는 馬不必騏驥/要之善走, ‘말이 꼭 騏驥일 필요는 없지만, 잘 달리는 점은 중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戰國策》 「燕策」에는 騏驥盛壯之時/一日而馳千里/至其衰也/駑馬先之, ‘騏驥는 한창일 때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만, 노쇠해지면 駑馬가 騏驥를 앞지른다’라는 말이 있다. 騏驥는 이 외에도 수많은 문헌들에 등장한다. ◈ 一은 부사어로, ‘한 번’이다. ◈ 躍은 용언으로, ‘뛰다’, ‘도약하다’는 말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躍이 躒으로 되어 있다. 躒은 ‘움직이다’는 말이다. ◈ 不은 부정어다. 能을 한정한다. ◈ 能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十步를 받는다. ◈ 十步는 아마 千里가 잘못된 말일 것이다. 千里는 ‘천 리를 가다’라는 말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十步가 千里라고 되어 있고, 盧文弨 또한 千里가 맞다고 간주하고 있다. 왜 千里가 더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가장 앞의 주석에서 이미 설명하였었다. 그러나 十步가 어쨌건 원문이므로, 十步라고 해석한다면 어떻게 풀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따져 보고 지나가겠다. 十步는 ‘열 보를 가다’, ‘10보를 가다’는 말일 듯하다. 步는 길이의 단위로, 1步가 이 당시에는 6尺 4寸 정도였을 것이다. 1寸을 2.25cm, 1尺을 22.5cm라고 하면, 1步는 144cm가 된다. 그러면 10步는 1440cm로, 약 14m 정도가 된다. 《三國志》 「吳志 吳主傳」에 統等以死扞權/權乘駿馬越津橋得去, ‘淩統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孫權을 지켰다. 孫權은 준마를 타고, 津橋를 넘어 떠날 수 있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裴松之가 《江表傳》을 인용한 말 중에 權乘駿馬上津橋/橋南已見徹/丈餘無版, ‘孫權이 준마를 타고 津橋에 올랐는데, 다리 남쪽은 이미 부서져서, 丈 정도 판자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다. 丈은 2m에서 3m 정도다. 이 정도 거리를 뛰어 넘는 일도 어려워서 史書에 기재될 정도인데, 14m면 말할 것도 없겠다. 이번에는 十步와 千里에 대해 학자들이 낸 의견을 살펴 보겠다. 盧文弨만 千里에 동의하고 있고, 劉台拱, 王念孫, 王引之 등은 모두 반대하고 있다. 盧文弨는 不能十步/十/當作千//玉篇引大戴禮騏驥一躒/不能千步///今大戴禮/步作里/此千作十///皆是譌字//里海爲韻/步舍爲韻/古音如是//晉書虞溥傳云㓶而舍之/朽木不知/㓶而不舍/金石可虧///亦是韻語, ‘不能十步에서 十은 마땅히 千이 되어야 한다. 《玉篇》에서는 《大戴禮》를 인용하여 騏驥一躒/不能千步라고 했다. 지금 《戴禮》에는 步가 里로 되어 있고, 千은 十으로 되어 있다. 모두 잘못된 글자들이다. 里와 海는 韻을 이루고, 步와 舍는 韻을 이루니, 옛 발음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晉書》 「虞溥傳」에 “㓶하다 舍하면 썩은 나무라도 知할 수 없고, 㓶하기를 舍하지 않으면, 金石이라도 虧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韻을 맞춘 말이다’라고 하였다. 《玉篇》은 梁나라의 顧野王이 만든 자전이다. 《大戴禮》와 《戴禮》는 《大戴禮記》다. 《晉書》 「虞溥傳」은 「列傳第五十二」를 이른다. 劉台拱은 案不能十步義最長/大戴禮作千里/於義疏矣//若玉篇作千步/直是譌字/盧反引以爲據/非也, ‘생각해 볼 때, 不能十步라고 해야 의미상 가장 낫다. 《大戴禮》에는 千里라고 되어 있는데, 의를 생각해 보면 별로다. 만약 《玉篇》에 千步라고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千은 단지 잘못된 글자일 뿐일 것이다. 그런데 盧文弨는 도리어 이를 가지고 근거로 삼았으니, 틀렸다’라고 하였다. 王念孫은 大戴記騏驥一躒/不能千里///里與舍不合韻/乃涉上文無以致千里而誤[玉篇引作千步/千字雖譌/而步字不譌]//辯見大戴記述聞, ‘《大戴記》에는 騏驥一躒/不能千里라고 되어 있는데, 里와 舍는 韻이 맞지 않다. 아마도 위의 無以致千里와 혼동되어서 잘못되었을 것이다.[王先謙의 부연 : 《玉篇》에는 千步라고 인용되어 있다. 千이 비록 잘못된 글자일지라도, 步가 잘못된 글자는 아니다.] 이에 대한 논의는 「大戴記述聞」에 나와 있다’라고 하였다. 「大戴記述聞」은 아마 王引之의 「大戴禮記述聞」을 이르는 듯하다. 「大戴禮記述聞」은 《經義述聞》에 포함되어 있다. 王引之는 王念孫의 아들이다. 「大戴禮記述聞」에서 王引之는 千里//騏驥一躒/不能千里/駑馬無極/功在不舍//家大人曰/千里/本作十步//舍/止也/息也//言若使騏驥一躒而止/則尙不能及十步/而駑馬之所至反無窮極者/其功在常駕而不息也//今本/十步作千里者/十千字相似/又涉上文千里而誤耳//玉篇/躒/動也/引大戴禮/騏驥一躒/不能千步//雖十誤作千/而步字尙未誤//荀子作/騏驥一躍/不能十步///謝校荀子據玉篇所引/謂十步當作千步/非也//騏驥一躒/實不能十步/非但不能千步而巳也//若云/不能千里/則失之/愈遠矣//且步與舍爲韻[舍古讀若庶//說見唐韻正]//若作千里/則失其韻矣, ‘千里에 대한 논의다. “騏驥가 한 번 뛰어도, 千里를 갈 수는 없지만, 駑馬는 끝 없이 갈 수 있으니, 공을 세우는 것은 멈추지 않는 데에 달려 있다”는 말에 대해, 家大人은 “千里는 판본에 따라 十步라고 되어 있다. 舍는 멈추다, 쉬다는 뜻이다. 이 말은 만약 騏驥에게 한 번 도약하고 멈추게 한다면, 오히려 열 步도 갈 수가 없지만, 駑馬은 끝 없이 나아갈 수 있으니, 공적을 세우는 일이 항상 진행하고, 멈추지 않는 데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지금 판본에는 十步가 千里로 되어 있는데, 十과 千은 모양이 서로 비슷하고, 또 앞에 있는 千里 때문에 헷갈려서 잘못되었을 따름이다. 《玉篇》에서는 躒을 움직이다는 뜻으로 풀이하였고, 《大戴禮》의 騏驥一躒/不能千步를 인용해 놓았다. 그런데 十이 千으로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步는 잘못되지 않았을 것이다. 《荀子》에는 騏驥一躍/不能十步라고 되어 있다. 謝墉이 교정한 《荀子》에서는 《玉篇》에 인용된 글에 근거하여서 十步가 마땅히 千步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틀렸다. 騏驥가 한 번 뛴다고, 진정 十步를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다만 千步를 가지 못한다는 말이야 어떻겠는가. 그러니 만약 不能千里라고 한다면, 말이 되지 않고, 의미도 더 이상해진다. 또, 步와 舍는 韻을 이룬다.[王引之의 부연 : 舍는 고대에 庶처럼 발음했다. 이에 대한 논의는 《唐韻正》에 나온다.] 만약 千里라고 한다면, 韻도 맞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家大人은 王念孫을 이른다. 《唐韻正》은 淸代 顧炎武가 저술한 책이다. ◈ 駑馬는 ‘둔한 말’이다. 駑는 관형어로, ‘둔하다’는 말이다. 馬를 한정한다. 馬는 체언으로, ‘말’이다. 《史記》 「廉頗藺相如列傳」에 相如雖駑/獨畏廉將軍哉, ‘相如가 비록 駑하긴 하지만, 어찌 廉 將軍을 두려워하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楚辭》 「七諫 謬諫」에 駑駿雜而不分兮, ‘駑와 駿이 뒤섞여서 구분이 안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王逸은 駑/鈍馬也, ‘駑는 둔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顧野王이 만든 《玉篇》에는 駑에 대해 乃乎切/最下馬也/駘也, ‘乃와 乎의 반절로 읽는다. 가장 낮은 등급의 말, 둔한 말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十駕는 아마 ‘열 번 멍에를 쓰다’, ‘열흘을 가다’라는 말일 것이다. 十은 부사어로, ‘열 번’이다. 一躍의 一이 ‘한 번’이었던 점과 같다. 駕는 본래 말에 씌우는 ‘멍에’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용언으로 사용되었다. 이 駕는 아마 ‘멍에를 씌우다’라는 말일 듯하다. 멍에를 씌운다는 것은 곧 말을 수레 같은 것에 연결한다는 뜻이므로, 곧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다’는 말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十駕는 ‘열 번 멍에를 씌우다’는 말이 된다. 하루 동안 이동한다면, 출발할 때 멍에를 씌우고, 도착할 때 멍에를 벗길 것이다. 그러면 열흘 동안 갈 때는, 열 번 멍에를 씌우고, 또 벗길 것이다. 그래서 十駕, 즉 ‘열 번 멍에를 씌우다’라는 말이, ‘열흘 동안 가다’, ‘열흘 동안 이동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禮記》 「曲禮 上」에 君車將駕, ‘군주의 수레가 駕할 것이라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孔穎達은 將駕에 대해 謂始欲駕行時也, ‘비로소 駕行하려 할 때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駕行은 아마 ‘멍에를 씌우고 가다’, 즉 군주가 ‘수레를 타고 가다’는 말일 것이다. 《孟子》 「公孫丑 下」에는 君命召/不俟駕, ‘군주가 명을 내려 부르면, 駕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論語》 「鄉黨」에는 君命召/不俟駕行矣, ‘군주가 명을 내려 부르면, 駕行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의 駕 역시 ‘멍에를 씌우다’, 즉 ‘수레를 타다’는 말일 것이다. 《荀子》 「大略」에 諸侯召其臣/臣不俟駕/顛倒衣裳而走/禮也, ‘諸侯가 자기 신하를 부르면, 신하가 駕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衣와 裳을 뒤집어 입은 체 달려 가는 것이 禮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駕 역시 ‘멍에를 씌우다’, ‘수레를 타다’는 말일 것이다. 한편 본문에 대해, 楊倞은 十駕를 十度引車, ‘열 번 수레를 끌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는 楊倞의 주석 중에 나온다. 또, 劉台拱은 十駕/十日之程也//旦而受駕/至暮脫之/故以一日所行爲一駕//若十度引車/則非駕義也, ‘十駕는 열흘 동안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아침에 멍에를 씌우고, 저녁이 되면 멍에를 벗긴다. 그래서 하루 동안 간 것을 一駕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楊倞처럼 열 번 수레를 끌었다고 해석한다면, 駕의 뜻이 아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차피 멍에를 씌우는 까닭도 수레를 끌기 위해서이므로, 楊倞의 풀이가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아예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楊倞의 말이나, 劉台拱의 말이 근원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駑馬가 열흘 동안 움직이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바로 천 리를 간다. 王念孫은 呂氏春秋貴卒篇曰/所爲貴驥者/爲其一日千里也/旬日取之/則與駑駘同///淮南齊俗篇曰/夫騏驥千里/一日而通/駑馬十舍/旬亦至之///此皆駑馬十日行千里之證, ‘《呂氏春秋》 「貴卒」에 “驥를 귀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아마 하루에 천 리를 가기 때문일 것이다. 열흘 동안 천 리를 간다면, 둔한 말과 다를 것이 없다”라는 말이 있고, 《淮南》 「齊俗」에는 “저 騏驥는 천 리를 하루에 가지만, 駑馬도 열흘이면 十舍를 역시 갈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들은 노둔한 말도 열흘이면 천 리를 갈 수 있다는 증거다’라고 하였다. 「貴卒」은 「開春論」에 속한다. 《淮南》 「齊俗」은 《淮南子》 「齊俗訓」이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十駕가 無極이라고 되어 있다. 無極은 ‘끝이 없다’는 말이므로, 駑馬無極은 아마도 ‘둔한 말이 끝 없이 간다’라는 의미일 듯하다. 이렇게 보아도 의미는 통하지만, 十駕 보다 분명하지는 않다. 그런데, 바로 아래의 주석에서 楊倞이 인용하였듯, 《荀子》 「修身」에 騏驥와 駑馬 이야기가 한 번 더 나온다. 「修身」의 그 부분에서 荀子는, 君子가 名家의 명제들처럼 답이 없는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 과정에서 無極이라는 말이 나온다. 예를 들어, 將以窮無窮/逐無極與, ‘앞으로 無窮을 궁리하고, 無極을 쫓는다면 어떨까’라는 말이 있다. 내 생각에는, 《大戴禮記》 「勸學」을 찬술하면서, 《荀子》의 「勸學」과 「修身」의 내용이 섞여 버렸기 때문에 十駕가 無極으로 바뀌어 버린 것 같다. 十駕를 따라 번역해야 하겠다. ◈ 이 글의 본문은 본래 騏驥一躍/不能十步//駑馬十駕/則亦及之라고 되어 있지 않다. 則亦及之 없이 騏驥一躍/不能十步//駑馬十駕라고만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뒤로 곧장 功在不舍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래서는 문장이 제대로 마무리되지도 않고, 말도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楊倞은 據下云/駑馬十駕/則亦及之///此亦當同/疑脫一句, ‘아랫쪽 글에 駑馬十駕/則亦及之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글에 근거해 보면, 본문 역시 마땅히 같아야 할 것이니, 본문에 則亦及之라는 한 句가 빠지지 않았나 의뭉스럽다’라고 하였다. 이 다음 편인 「修身」에 夫驥一日而千里/駑馬十駕/則亦及之矣, ‘대저 驥는 하루에 천 리를 가지만, 駑馬라도 열흘을 가면, 역시 천 리에 이를 수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글과 내용이 일치하므로, 이 글처럼 본문에도 則亦及之가 붙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楊倞의 설이 타당하므로, 나는 則亦及之를 본문에 넣어 번역하였다. 다만, 《大戴禮記》 「勸學」에도 則亦及之라는 말은 없다. ◈ 則은 ‘그러면’이라고 해석된다. ◈ 亦은 부사어로, ‘또한’, ‘역시’라는 말이다. 둔한 말 ‘역시’, 둔한 말 ‘또한’, 둔한 말‘도’라는 뜻이다. ◈ 及은 용언으로, ‘미치다’는 말이다. 及之의 之를 받는다. 騏驥에 ‘미치다’는 말이므로, 이는 곧 騏驥에 ‘견줄 만하다’, ‘비할 만하다’라는 말이 된다. ◈ 及之의 之는 지시대명사로, 아마 ‘騏驥’를 가리키는 듯하다. ◈◈ 楊倞은 言駑馬十度引車/則亦及騏驥之一躍, ‘둔한 말이 수레를 열 번 끌면, 둔한 말도 騏驥가 한 번 도약한 거리에 이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가 없고, 능력이 아무리 일천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노력하다 보면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王念孫이 인용하였듯, 《淮南子》 「齊俗訓」에 夫騏驥千里/一日而通/駑馬十舍/旬亦至之, ‘저 騏驥는 천 리를 하루에 가지만, 駑馬도 열흘이면 十舍를 역시 갈 수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이 부분의 주제와 꼭 맞다. [본문으로]
  7. 功在不舍, ◈ 功은 체언으로, ‘공을 세우는 것’, ‘공적을 세우는 것’이라는 말이다. ◈ 在는 용언으로, ‘있다’, ‘~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不舍를 받는다. ◈ 不은 부정어다. 舍를 한정한다. ◈ 舍는 용언으로, ‘버리다’, ‘내팽개쳐 두다’, ‘소홀히 하다’, ‘그만두다’, ‘포기하다’는 말이다. 捨와 같은 글자다. 즉, 不舍는 명사구로, ‘그만두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 盧文弨는 此句當連上文, ‘이 句는 마땅히 위의 글과 이어서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이 말은 앞의 글과도 이어지지만, 뒤의 글과도 이어진다.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주제는 爲善不積邪/安有不聞者乎까지 계속 유지된다. [본문으로]
  8. 鍥而舍之/朽木不折//鍥而不舍/金石可鏤, ◈ 鍥는 용언으로, ‘새기다’, ‘조각하다’는 말이다. 나는 ‘새기다’라고 번역했다. 楊倞은 鍥/刻也/苦結反//春秋傳曰/陽虎借邑人之車/鍥其軸也, ‘鍥은 새기다는 뜻이다. 苦와 結의 반절로 읽는다. 《春秋傳》에 “陽虎가 마을 사람의 수레를 빌려서, 그 굴대를 鍥했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春秋傳》은 《春秋左氏傳》이다. 이 기사는 「定公」 9년에 있다. 원문에는 陽虎願東/乃囚諸西鄙/盡借邑人之車/鍥其軸/麻約而歸之, ‘陽虎가 동쪽으로 가기를 원하였기에, 西鄙에 가두었는데, 결국 邑 사람들의 수레를 빌려서, 그 굴대를 鍥하고, 삼이 約해지자 돌려 주었다’라는 말이 있다. 杜預는 鍥/刻也, ‘鍥은 깎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陸德明은 鍥/舌結反, ‘鍥은 舌과 結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했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鍥이 楔이라고 되어 있다. 鍥而不舍의 鍥도 그렇다. 楔은 ‘설’이라고 읽는데, 이는 陸德明이 舌結反, ‘舌과 結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한 점과 비슷하다. 아마 鍥과 楔은 발음이 같아서 고대에 통용되었거나, 아니면 楔이 鍥의 가차자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 鍥而舍之의 而는 ‘~하고서’라는 말이다. 鍥而不舍의 而도 그렇다. ◈ 舍는 용언으로, ‘버리다’, ‘내팽개쳐 두다’, ‘소홀히 하다’, ‘그만두다’, ‘포기하다’는 말이다. 楊倞은 舍與捨同, ‘舍는 捨와 같다’라고 하였다. 捨 역시 ‘버리다’는 말이다. ◈ 舍之의 之는 지시대명사로, 鍥, 즉 조각하던 ‘나무’를 이른다. ◈ 朽木은 ‘썩은 나무’다. 朽는 관형어로, ‘썩은’이라는 말이다. 木을 한정한다. 木은 체언으로, ‘나무’다. ◈ 不折의 不은 부정어다. 折을 한정한다. ◈ 折은 용언으로, 아마 斲처럼 ‘깎다’, ‘새기다’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는 朽木이 주어이므로, 아마 ‘깎이다’, ‘새겨지다’처럼 번역해야 할 듯하다. 나는 한국어로써 자연스럽도록, 朽木不折을 不折朽木, 혹은 不折於朽木, ‘朽木에 折하지 못한다’처럼 번역하였다. ◈ 不舍의 不는 부정어다. 舍를 한정한다. ◈ 金石은 ‘금속과 돌’을 이른다. 金은 체언으로, ‘쇠’, ‘금속’, 石은 체언으로, ‘돌’이다. ◈ 可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鏤를 받는다. ◈ 鏤는 용언으로, ‘새기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金石이 주어이므로, ‘새겨지다’처럼 번역해야 하겠다. 나는 한국어로써 자연스럽도록, 金石可鏤를 可鏤金石 혹은 可鏤於金石, ‘金石에 鏤할 수 있다’처럼 번역하였다. ◈◈ 楊倞은 言立功在於不舍, ‘공적을 세우는 일이 그만두지 않는 데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나무에는 새기기 쉽고, 금속이나 돌에는 새기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용하여 노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비유하고 있다. [본문으로]
  9. 螾無爪牙之利/筋骨之強/上食埃土/下飲黃泉/用心一也, ◈ 이 지렁이 이야기는 다양한 문헌에 등장한다. 《孟子》 「滕文公 下」에는 夫蚓/上食槁壤/下飲黃泉, ‘저 蚓은, 위로는 槁壤을 먹고, 아래로는 黃泉을 마신다’라고 되어 있고, 《淮南子》 「說山訓」에는 螾無筋骨之強/爪牙之利/上食晞堁/下飲黃泉/用心一也, ‘螾은 힘줄이나 뼈의 강건함도 없고, 발톱이나 어금니의 예리함도 없는데, 위로는 晞堁를 먹고, 아래로는 黃泉을 마신다. 用心이 일관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說苑》 「雜言」에는 夫蚯蚓內無筋骨之強/外無爪牙之利//然下飲黃泉/上墾晞土//所以然者/何也//用心一也, ‘저 蚯蚓는 안으로는 힘줄이나 뼈의 강건함이 없고, 밖으로는 발톱이나 어금니의 예리함도 없다. 그러나 아래로는 黃泉을 마시고, 위로는 晞土를 墾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用心이 일관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文子》 「上德」에는 蚯蚓無筋骨之強/爪牙之利/上食晞堁/下飲黃泉/用心一也, ‘蚯蚓은 힘줄이나 뼈의 강건함도 없고, 발톱이나 어금니의 예리함도 없지만, 위로는 晞堁를 먹고, 아래로는 黃泉을 마신다. 用心이 일관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아마 이 이야기가 고대에 널리 유명했던 모양이다. 이 節을 풀이할 때, 이 글들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螾 앞에 夫가 있다. 夫는 ‘저’처럼 지시하는 말이다. 즉, 夫螾은 ‘저 螾’이다. 《孟子》, 《說苑》에도 夫가 앞에 붙어 있다. ◈ 螾은 체언으로, ‘지렁이’다. 《孟子》에는 蚓이라고 되어 있는데, 蚓 역시 ‘지렁이’다. 《說苑》과 《文子》에는 蚯蚓이라고 되어 있는데, 蚯蚓 역시 ‘지렁이’다. 蚯도 ‘지렁이’를 이른다. 《孟子》에 대해 趙技는 蚓/蚯蚓之蟲也, ‘蚓은 蚯蚓과 같은 벌레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螾與蚓同/蚯蚓也, ‘螾은 蚓과 같다. 지렁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正文螾字上/宋本有蚯字/無注末蚯蚓也三字//今從元刻, ‘《宋本》에는 본문의 螾 위에 蚯가 있고, 楊倞의 주 마지막에 蚯蚓也라는 세 글자가 없다. 나는 《元刻》을 따른다’라고 하였다. 《宋本》에는 본문이 螾이 아니라 蚯螾이라고 되어 있었고, 楊倞의 주석도 螾與蚓同이라고만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 無은 용언으로, ‘없다’,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爪牙之利와 筋骨之強을 받는다. ◈ 爪는 체언으로, 아마 ‘발톱’이나 ‘갈퀴’를 이르는 말 같다. 爪는 본래 ‘손톱’인데, 대상이 지렁이이므로, ‘발톱’이나 ‘갈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낫겠다. 나는 ‘발톱’이라고 번역하였다. ◈ 牙는 체언으로, ‘어금니’다. ◈ 爪牙之利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처럼 해석된다. 筋骨之強의 之도 그렇다. ◈ 利는 체언인데, ‘이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예리함’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예리함’이라고 번역하였다. 爪牙之利와 筋骨之強은 대구를 이루고 있는데, 利는 強에 대응된다. 強이 ‘강건함’이므로, 利 역시 이에 따라 ‘예리함’으로 번역해야 하겠다. ◈ 筋은 체언으로, ‘힘줄’이다. ◈ 骨은 체언으로, ‘뼈’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骨이 脈으로 되어 있다. 脈은 ‘줄기’이므로, 아마 筋, 즉 ‘힘줄’과 같은 말일 것이다. ◈ 強은 체언으로, ‘강함’, ‘강건함’이라는 말이다. ◈ 爪牙之利와 筋骨之強은 직역하면 ‘발톱과 어금니의 예리함’과 ‘힘줄과 뼈의 강건함’이 되어야 하지만, 그러면 말이 어색하다. 나는 한국어로써 자연스럽도록, ‘발톱이나 어금니처럼 예리한 것’, ‘힘줄이나 뼈처럼 강건한 것’과 같이 번역하였다. ◈ 上은 부사어로, ‘위로’, ‘위로는’이라는 말이다. ◈ 食은 용언으로, ‘먹다’는 말이다. 埃土를 받는다. 《說苑》에는 食이 墾으로 되어 있다. 墾은 ‘개간하다’는 말인데, 지렁이가 흙을 먹고 배설하면서 땅이 비옥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듯하다. ◈ 埃土는 한 단어로, ‘흙’을 이를 것이다. 埃는 체언으로, ‘티끌’, ‘먼지’, ‘흙먼지’다. 《莊子》 「逍遙遊」에 野馬也/塵埃也/生物之以息相吹也, ‘野馬나 塵埃라는 것들은 生物들이 숨을 쉬면서 서로 내쉬는 것일 뿐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成玄英은 揚土曰塵/塵之細者曰埃, '흙이 흩날리는 것을 塵이라 하고, 塵이 미세하면 埃라고 한다'라고 했다. 土는 체언으로, ‘흙’이다. 즉, 埃와 土는 모두 ‘흙’을 뜻한다. 한편, 《孟子》에는 槁壤이라고 되어 있다. 槁壤은 ‘마른 흙’이다. 朱熹는 槁壤/乾土也, ‘槁壤은 마른 흙이다’라고 하였다. 《淮南子》와 《文子》에는 晞堁, 《說苑》에는 晞土라고 되어 있다. 晞는 ‘마르다’는 말이고, 堁는 ‘흙먼지’이므로, 晞堁, 晞土 역시 埃土와 의미가 같다. 《淮南子》에 대해 高誘는 晞/乾也//堁/土塵也//楚人謂之堁也, ‘晞는 마르다는 말이다. 堁는 흙먼지라는 말인데, 楚나라 사람들이 堁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도 《說苑》처럼 晞土라고 되어 있다. ‘마른 흙’이다. ◈ 下는 부사어로, ‘아래로’라는 말이다. ◈ 飲은 용언으로, ‘마시다’는 말이다. 黃泉을 받는다. ◈ 黃泉은 아마 ‘흙탕물’을 이르는 말 같다. 黃은 관형어로, ‘누런’, ‘노란’이고, 泉은 체언으로, ‘샘’, 즉 ‘물’을 이른다. 즉, 黃泉은 ‘누런 샘’, ‘누런 물’이므로, 아마 ‘흙탕물’을 이를 것이다. 다른 문헌들에도 모두 黃泉이라고 되어 있는데, 《孟子》에 대해 朱熹는 黃泉/濁水也, ‘黃泉은 탁한 물이다’라고 하였다. 아마 ‘흙탕물’을 이르는 듯하다. 한편, 宋基采는 ‘지하의 샘물’이라고 번역하였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下飲黃泉 다음에 者가 붙어 있다. 者는 上食晞土/下飲黃泉을 모두 받는다.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내 생각에는, 者 때문에 다섯 글자가 되므로, 글자 수는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지만, 문장의 흐름은 더 분명해지는 듯하다. ◈ 用心은 명사구로, ‘마음을 쓰는 자세’, ‘마음을 쓰는 방식’, 즉 ‘마음가짐’이다. ◈ 一은 용언으로, ‘일정하다’, ‘일관되다’, ‘전일하다’는 말이다. ◈◈ 蜀虎案 : 지렁이는 孃破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蜀虎처럼 충성스럽지도 않다. 흙을 먹고, 흙탕물을 마시는 일은 고되다. 그러나 지렁이는 일관되게 마음을 먹고 있기 때문에 궂은 일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살아 갈 수 있다. [본문으로]
  10. 蟹六跪而二螯/非虵蟺之穴無可寄託者/用心躁也, ◈ 이 句에는 용언이 빠져 있는 것 같다. 蟹六跪而二螯에서, 주어는 蟹인데, 六跪而二螯 중에는 용언 역할을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문맥상 蟹가 六跪와 二螯를 ‘가지고 있다’라는 말이 되어야 하므로, 나는 有를 사용하여, 蟹六跪而二螯를 蟹有六跪而二螯라고 간주하고 번역하였다. 《說文解字》 「虫部」에 蠏/有二敖八足/㫄行/非蛇鮮之穴無所庇//从虫解聲, ‘蠏는 敖를 두 개, 足을 여덟 개 가지고 있고, 옆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蛇鮮의 굴이 아니면 의지하지 않으려 한다. 虫이 들어가 있고, 解라고 발음한다’라는 말이 있다. 蠏는 蟹와 같은 글자다. 이 말은 본문의 蟹六跪而二螯/非虵蟺之穴無可寄託과 같은 내용인데, 《說文解字》에는 有가 있어서 말이 되고, 《荀子》에는 有가 없어서 말이 되지 않으니, 당연히 有를 넣어서 풀이해야 할 것이다. ◈ 蟹는 체언으로, 옆으로 걷는 ‘게’다. ◈ 상기하였듯, 蟹 다음에는 有가 있어야 한다. 有는 용언으로,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는 말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도 有가 없다. ◈ 六은 아마 八의 오기인 듯하다. 八은 관형어로, ‘여덟 개의’다. 跪를 한정한다. 위에 인용하였듯, 《說文解字》 「虫部」에는 蠏/有二敖八足이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의 六跪而二螯와 비교해 보면, 敖가 螯와 같고, 足이 跪와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說文解字》에는 足이 八이라고 되어 있고, 본문에는 六이라고 되어 있다. 게의 모습을 보면, 가장 위에 집게발이 두 개 달려 있고, 그 아래에 집게가 없는 발이 양옆으로 두 개씩 총 네 쌍 붙어 있다. 아마 집게가 없는 발을 足 혹은 跪라고 하고, 집게발을 敖 혹은 螯라고 하였을 것이다. 즉, 六이 아니라 八이어야 한다. 楊倞과 盧文弨 역시 《說文解字》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楊倞은 許叔重說文云/蟹六足二螯也, ‘許叔重의 《說文》에는 “게는 여섯 개의 足, 두 개의 螯를 가지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했다. 許叔重은 《說文解字》를 지은 許愼을 이른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앞에서 인용하였듯이, 《說文解字》에는 蠏有二敖八足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 六과 八의 모양이 비슷해서 혼동한 듯하다. 盧文弨는 案說文蟹有二敖八足/大戴禮亦同此/正文及注六字/疑皆八字之訛, ‘살펴 보면, 《說文》에는 蟹有二敖八足이라고 되어 있고, 《大戴禮》 또한 이와 동일하다. 본문과 楊倞의 주석에 있는 六은 모두 八이 잘못된 글자가 아닌지 의심된다’라고 하였다. 《大戴禮》는 《大戴禮記》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蟹二螯八足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도 용언 有가 없고, 중간의 而도 없으며, 螯와 足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다. ◈ 跪는 체언으로, 아마 게의 ‘다리’를 뜻하는 말 같다. 집게발이 없는 그냥 다리를 이른다. 이 점은 六에 대한 주석에서 《說文解字》와 글자를 대조하여 이미 유추하였었다. 그러면 왜 게의 다리를 跪라고 했을까. 跪는 ‘무릎을 꿇다’는 말이다. 게 다리는 중간에 관절이 여러 개 있어서 접히기 때문에, 무릎을 꿇는 것과 비슷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趙宋의 羅願이 지은 《爾雅翼》에는 蟹/八跪而二敖//八足折而容俯/故謂之跪//兩敖倨而容仰/故謂之敖, ‘蟹는 跪가 여덟 개, 敖가 두 개이다. 여덟 개의 다리는 접어서 굽힐 수 있다. 이에 跪라고 한다. 두 敖는 굽혀서 쳐들 수 있다. 그래서 敖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즉, 跪는 게의 그냥 ‘다리’를, 螯 혹은 敖는 게의 ‘집게발’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敖는 螯의 가차자일 것이다. ◈ 六跪而二螯의 而는 ‘~와’라는 말이다. 與, 及와 같다. 《論語》 「雍也」에 不有祝鮀之佞/而有宋朝之美/難乎免於今之世矣, ‘祝鮀의 佞과 宋朝의 美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지금 세상에서 화를 면하기가 어렵다’라는 말이 있고, 《墨子》 「尙賢 上」에 聞善而不善/皆以告其上, ‘善과 不善을 들으면, 모두 上에게 알린다’라는 말이 있으며, 《韓非子》 「說林 上」에는 以管仲之聖/而隰朋之智, ‘管仲의 聖과 隰朋의 智를 가지고도’라는 말이 있는데, 모두 而는 ‘~와’라고 해석된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而가 없다. ◈ 二는 관형어로, ‘두 개의’다. 螯를 한정한다. ◈ 螯는 체언으로, 게의 ‘집게발’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說文解字》 및 《爾雅翼》을 인용하여 설명하였었다. 《說文解字》와 《爾雅翼》에는 敖라고 되어 있고, 본문에는 螯라고 되어 있는데, 두 글자는 모두 ‘오’라고 읽는다. 敖는 螯의 가차자일 것이다. 《晉書》 「列傳第十九」 중 畢卓에 대한 列傳에 右手持酒杯/左手持蟹螯, ‘오른 손에는 술잔을 들고, 왼손에는 蟹螯를 든다’라는 말이 있다. 畢卓이 게를 아주 좋아했던 모양이다. ◈ 非는 용언으로, ‘~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虵蟺之穴을 받는다. ◈ 虵蟺은 체언으로, 아마 ‘뱀장어’나 ‘물뱀’을 이를 것이다. 虵는 ‘뱀’이라는 뜻이고, 蟺은 ‘뱀장어’를 이른다. 《淮南子》 「覽冥訓」에 而蛇鱔輕之, ‘그래서 蛇鱔도 之를 하찮게 생각한다’라는 말이 있고, 또 蛇鱔著泥百仞之中, ‘蛇鱔은 백 길이나 되는 진흙에 著한다’라는 말이 있으며, 又況直蛇鱔之類乎, ‘또 하물며 고작 蛇鱔 같은 놈들이야 어떻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이 蛇鱔이 본문의 虵蟺과 같은 동물인 듯하다. 蛇鱔은 판본에 따라 蛇鱓이라고 되어 있기도 한 것 같다. 王先謙은 蟺同鱓, ‘蟺은 鱓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蛇鱔은 곧 蛇鱓이고, 蛇鱓은 다시 虵蟺과 같게 된다. 高誘는 蛇鱔 혹은 蛇鱓에 대해 따로 풀이해 두지 않았다. 아마 당시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鱓은 ‘드렁허리’를 이른다. 드렁허리 역시 뱀장어의 일종이다. 논 같은 곳에 살고, 땅에 굴을 파고 다닌다. 나는 ‘드렁허리’로 번역하였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蛇夔라고 되어 있다. 夔 역시 아마 뱀장어의 일종을 이르는 말이거나, 다른 글자의 가차자 같은데, 그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山海經》 「大荒東經」에 東海中有流波山/入海七千里//其上有獸/狀如牛/蒼身而無角/一足/出入水則必風雨/其光如日月/其聲如雷/其名曰夔//黃帝得之/以其皮爲鼓/橛以雷獸之骨/聲聞五百里/以威天下, ‘동쪽 바다에 流波山이 있다. 바다에 들어 가고 7천 리 거리에 있다. 그 위에는 짐승이 있는데, 모습은 소 같고, 몸은 푸른데, 뿔은 없다. 발은 하나다.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데, 그러면 꼭 비바람이 내린다. 빛나기는 해, 달과 같고, 소리는 우레와 같다. 그 짐승의 이름은 夔다. 黃帝가 夔를 잡고, 가죽으로 북을 만들었으며, 雷獸의 뼈에 말뚝을 박았는데, 소리가 500리에까지 들려, 천하를 놀라게 했다’라는 말이 있다. 발이 하나고, 물에 들어 갔다 나왔다 했다는 걸 보면 뱀장어 같기도 한데, 모습이 소 같다고 했으니, 이 夔는 아니겠다. ◈ 虵蟺之穴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된다. ◈ 穴은 체언으로, ‘굴’이다. 드렁허리는 논에 굴을 파고 다니는데, 이 ‘굴’을 이른다. 虵蟺之穴을 나는 ‘드렁허리가 파 놓은 굴’이라고 번역하였다. ◈ 非虵蟺之穴과 無可寄託은 ‘그러면’으로 이어진다. 즉, 非虵蟺之穴則無可寄託처럼 보고 해석해야 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非虵蟺之穴과 無可寄託 사이에 而가 있다. 이 而 역시 ‘그러면’이라는 뜻이다. 而는 則과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積善成德/而神明自得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無는 부정어로, ‘~하지 않다’는 말이다. 不과 같다. 可를 한정한다. ◈ 可는 용언으로, ‘괜찮아 하다’, ‘납득하다’는 말이다. 寄託을 받는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可가 所로 되어 있다. 즉, 無所寄託이 된다. ‘寄託할 곳이 없다고 여긴다’는 말일 것이다. ◈ 寄託은 체언으로, ‘의지할 곳’, ‘의탁할 곳’이라는 말이다. 寄와 託은 모두 ‘의지하다’, ‘의탁하다’는 말이다. 寄託은 아마 ‘거소’, ‘거처’, ‘보금자리’를 뜻할 것이다. 드렁허리가 굴을 파 놓으면, 게가 그 굴에 들어가서 자기 보금자리처럼 사용한다는 뜻이다. 즉, 無可寄託은 ‘거처로 괜찮아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거처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라고 의역하였다. ◈ 非虵蟺之穴無可寄託者의 者는 ‘~하는 것’이다. 非虵蟺之穴無可寄託 전체를 받는다. 즉, 非虵蟺之穴無可寄託者는 ‘드렁허리의 굴이 아니면 거처로 괜찮아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 用心은 명사구로, ‘마음을 쓰는 자세’, ‘마음을 쓰는 방식’, 즉 ‘마음가짐’이다. ◈ 躁는 용언으로, ‘성급하다’, ‘조급하다’는 말이다. 이 躁는 앞 節의 一과 대구를 이루고, 또 의미도 대조되고 있다. ◈◈ 蜀虎案 : 爪牙之利와 筋骨之強이 없다는 점은 지렁이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六跪而二螯, 즉 다리가 여덟게, 집게발이 두 개 있다는 점은 게의 장점이다. 그러나, 지렁이는 저런 약점을 가지고도, 흙을 먹고, 흙탕물을 마시면서, 꿋꿋하게 살아 간다. 그러나, 게는, 다리가 모두 열 개나 있으면서도, 스스로 거처를 꾸밀 생각은 않고, 드렁허리가 만들어 놓은 굴에 들어가서 살려고 한다. 荀子는 이 둘의 차이를 마음가짐이라고 보았다. 지렁이는 마음가짐이 일관되기에, 악조건에서도 살아 가는 것이고, 게는 마음가짐이 성급하고, 또 산만하기 때문에, 이점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남에게 기대서 산다. 지렁이의 약점과 게의 이점은 또한, 사람의 품성과 능력이 모두 다르다는 점을 뜻한다. 품성이 어떻든, 마음을 일관되게 먹고 살아 가야, 성과도 내고, 공적도 낼 수 있다는 것이 荀子의 요지라 하겠다. [본문으로]
  11. 是故/無冥冥之志者無昭昭之明/無惛惛之事者無赫赫之功, ◈ 이 節은 ‘따라서, 冥冥한 志가 없는 자는 昭昭한 明도 없고, 惛惛한 事가 없는 자는 赫赫한 공적도 없다’처럼 해석된다. 지금까지, 그리고 이 뒤로도, 荀子는 산만하게 굴지 말고, 마음가짐을 일관되게 먹어야 무엇이든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冥冥, 惛惛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겠다. ◈ 是故는 ‘이러한 까닭으로’, ‘이처럼’, ‘이와 같이’라고 해석된다. ◈ 無冥冥之志者의 無는 용언으로, ‘없다’,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품고 있지 않다’라고 번역하였다. 冥冥之志를 받는다. ◈ 冥冥은 아마 ‘그윽한 모양’, ‘깊은 모양’, ‘심원한 모양’을 이를 것이다. 冥은 본래 ‘어둡다’는 말이지만, ‘그윽하다’, ‘깊다’, ‘심원하다’처럼 풀이되기도 한다. 어슴푸레하게 어두우면, 모습이 명백히 보이지 않으므로, ‘그윽하다’는 말이 되고, 곧 ‘깊다’, ‘심원하다’는 말이 된다. 상기하였듯, 冥은 본래 ‘어둡다’는 말이고, 이와 대구를 이루고 있는 昭는 ‘밝다’는 말이다. 이 둘은 의미상 대조되지만, 역설적으로 본문 안에서는 대구를 이루며 상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陰이 있어야 陽이 있을 수 있고, 陽이 있어야 陰이 있을 수 있듯이, 冥이 있어야 昭도 있고, 昭도 있어야 冥도 있다. 옛 글들에는 이 점을 내포하고 있는 문장들이 많다. 《莊子》 「知北遊」에는 夫昭昭生於冥冥, ‘대저, 昭昭는 冥冥에서 생겨난다’라는 말이 있고, 《韓非子》 「解老」에는 以爲暗乎/其光昭昭//以爲明乎/其物冥冥, ‘어둡다고 생각하면 그 빛은 昭昭해지고, 밝다고 생각하면 그 物은 冥冥해진다’라는 말이 있다. 또, 《呂氏春秋》 「審應覽 離謂」에는 冥冥之中有昭焉, ‘冥冥한 가운데 昭가 있다’라는 말이 있고, 《鄧析子》 「轉辭」에는 視昭昭/知冥冥, ‘昭昭를 보고, 冥冥을 깨닫는다’라는 말이 있다. 《淮南子》 「俶眞訓」에는 能遊冥冥者與日月同光, ‘冥冥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해나 달과 같이 밝다’라는 말이 있고, 《淮南子》 「繆稱訓」에는 人能貫冥冥入於昭昭, ‘冥冥에 통달할 수 있는 사람이 昭昭한 경지에 든다’라는 말이 있으며, 《淮南子》 「人間訓」에는 人能由昭昭於冥冥/則幾於道矣, ‘昭昭에 근거하여 冥冥에 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道의 경지에 가깝겠다’라는 말이 있다. 《淮南子》 「泰族訓」에는 由冥冥至炤炤, ‘冥冥에 근거하여 炤炤에 이른다’라는 말이 있고, 《淮南子》 「要略」 昭昭之通冥冥也, ‘昭昭는 冥冥에 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炤는 ‘밝다’는 말로, 昭와 같다. 역설적으로, 이 말들은 출전이 모두 道家 문헌이거나, 道家가 아니더라도 문장의 내용이 道家에 가깝다. 荀子도 道家에 영향을 받았을까. 또 생각해 볼 만한 점이 있다. 첫 주석에서 언급하였듯, 荀子는 일관되게 마음을 먹어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점을 계속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이 冥冥 또한 ‘일관된 모습’처럼 풀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冥冥之志는 ‘일관된 의지’가 되어서, 문맥과도, 주제와도 잘 어울리게 된다. 실제로, 본문에 대해, 楊倞은 冥冥惛惛/皆專默精誠之謂也, ‘冥冥과 惛惛은 모두 묵묵하게 집중하면서 정성을 들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李止漢은 冥冥을 ‘조용하고 정성스러운 것’이라고 하였고, 金學主는 ‘뜻이 한결 같은 모양’이라고 하였다. 宋基采는 ‘마음을 가라 앉혀 깊이 연구한다’라고 풀이했다. 楊倞을 위시해, 李止漢, 金學主, 宋基采가 모두 이렇게 풀이한 까닭은, 荀子가 언술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마음을 일관되게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을 끼워 넣지 않고, 온전히 본문만 가지고 글의 ‘내용’에 맞추려 한다면, 이 해석이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冥冥을 그렇게 볼 근거를 찾지 못했다. 고대 문헌에서, 冥冥은 크게 두 가지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冥은 본래 ‘어둡다’는 말이다. 따라서 冥冥은 ‘어두운 모습’이 된다. 이 것이 첫 번째이다. 상기하였듯, 冥은 ‘그윽하다’, ‘심원하다’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러면 冥冥은 ‘그윽한 모습’, ‘심원한 모습’이 된다. 실체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작용은 존재하고, 또 그 작용은 신비로운 데다 만물을 주재하는 듯 보인다. 이런 까닭에, 道家 사람들이 道의 모습을 형용할 때 冥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 것이 두 번째다. 내가 찾아 보기로, 冥은 어떤 곳에서도 一이나 專처럼 ‘일관되다’는 의미로 풀이되지 않았다. 《說文解字》 등에서도 상기한 두 가지 풀이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冥冥을 ‘정성을 들이다’나, ‘한결 같다’라고 풀이해야 할까. 따라서 나는 冥冥을 ‘깊다’, ‘심원하다’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면 冥冥之志는 ‘깊은 뜻’이 된다. 나는 ‘일관되게’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번역하였다. 그러면 冥冥도 일반적인 용례에 정합되게 풀이할 수 있고, 또 《荀子》 본문의 주제에도 정합되도록 맞출 수 있다. 또, 뒤에 나오는 惛惛 역시 마찬가지다. 惛은 아마 昏과 같은 글자일 것이다. 惛은 ‘흐릿하다’, ‘어둡다’는 말이고, 昏 역시 ‘어둡다’는 말이다. 冥도 그렇다. 어두우면 흐릿하게 보일 것이므로, 두 의미는 사실 같다. 즉, 惛惛은 昏昏, 冥冥처럼 풀이해야 한다. 참고로, 李止漢은 惛惛을 ‘온갖 정성을 드리다’라고 하였고, 金學主는 ‘묵묵히 정성을 다하는 모양’이라고 하였다. 宋基采는 ‘남이 모르는 가운데 행한다’라고 풀이하였다. 한편, 王先謙은 大戴記冥冥作憤憤/惛惛作緜緜, ‘《大戴記》에는 冥冥이 憤憤으로 되어 있고, 惛惛은 緜緜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다. 憤은 ‘분발하다’, ‘힘쓰다’는 말이므로, 憤憤은 ‘분발하는 모양’, ‘노력하는 모양’이 된다. 즉, 憤憤之志는 ‘노력하는 마음’이다. 緜은 綿과 같은 글자인데, 綿 역시 ‘아득하다’, ‘요원하다’는 말이다. 陸機의 「飲馬長城窟行」에 去家邈以綿, ‘집을 떠나 멀어지고, 요원해졌다’는 말이 있다. 즉, 《大戴禮記》에서는, 앞의 冥冥은 글의 문맥에 맞추어서 憤憤이라고 글자를 바꾸었고, 뒤의 惛惛은 惛惛의 의미 그대로 緜緜이라고 글자를 바꾸었다 할 수 있겠다. ◈ 冥冥之志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한’처럼 해석된다. ◈ 志는 체언으로, ‘뜻’, ‘심지’, ‘의지’라는 말이다. ◈ 無冥冥之志者의 者는 ‘~한 사람’이다. 관형어구인 無冥冥之志가 者를 한정한다. 無冥冥之志者는 ‘冥冥한 志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 無昭昭之明의 無 역시 용언이다. ‘가질 수 없다’, ‘지닐 수 없다’는 말이다. 昭昭之明을 받는다. ◈ 昭昭는 ‘밝은 모양’, ‘명철한 모양’을 이른다. 昭는 ‘밝다’는 말로, 明과 같다. 즉, 昭昭는 明明, ‘명철한 모양’이 된다. ◈ 昭昭之明의 之는 관형격 조사로, ‘~한’처럼 해석된다. ◈ 明은 체언으로, ‘명철함’, ‘총명함’, ‘통찰력’이다. 宋基采는 物雙松이 明을 名이 잘못된 글자로 보았다고 한 설을 소개해 두었다. 名이라고 본다면, ‘명성’, ‘명예’, ‘명망’이 된다. ◈ 無惛惛之事者의 無는 용언으로, ‘하지 않다’는 말이다. 惛惛之事를 받는다. ◈ 惛惛은 ‘그윽한 모습’, ‘심원한 모습’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의 冥冥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또한 상기하였듯, 《大戴禮記》 「勸學」에는 惛惛이 緜緜으로 되어 있다. ◈ 惛惛之事의 之는 관형격 조사로, ‘~한’처럼 해석된다. ◈ 事는 체언으로, 아마 ‘일’, ‘직무’를 이를 것이다. 즉, 惛惛之事는 ‘惛惛한 事’, ‘그윽한 일’이 되고, 無惛惛之事는 ‘그윽한 일을 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나는 ‘일을 그윽하게 처리하지 않는다’와 같이 의역하였다. ◈ 無惛惛之事者의 者는 ‘~한 사람’이다. 관형어구인 無惛惛之事가 者를 한정한다. ◈ 無赫赫之功의 無 역시 용언으로, ‘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赫赫之功을 받는다. ◈ 赫赫은 ‘혁혁한 모습’, ‘빛나는 모습’이다. 赫은 ‘빛나다’는 말이다. 공적이 ‘혁혁하다’라고 할 때의 ‘혁’이 바로 赫이다. ◈ 赫赫之功의 之는 관형격 조사로, ‘~한’처럼 해석된다. ◈ 功은 체언으로, ‘공’, ‘공적’이다. ◈◈ 蜀虎案 : 일관되게 심지를 다잡고, 일관되게 직무를 잘 처리하면, 통찰력도 얻고, 공적도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12. 行衢道者不至/事兩君者不容, ◈ 行은 용언으로, ‘가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衢道를 받는다. ◈ 衢道는 아마 ‘두 갈랫길’, ‘양갈랫길’일 것이다. 衢는 관형어로, 道를 한정하고 있다. 道는 체언으로, ‘길’이다. 衢는 본래 ‘네 갈랫길’을 뜻한다. 그런데 郝懿行과 王念孫, 王先謙은 모두 衢를 ‘두 갈랫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衢가 본래 ‘네 갈랫길’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說文解字》 「行部」에는 衢에 대해 四達謂之衢//从行瞿聲, ‘네 방향으로 통하는 것을 衢라고 한다. 行이 들어 있고, 瞿라고 발음한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達은 通과 같은 말로, ‘통하다’는 말이다. 또, 《爾雅》 「釋宮」에는 一達/謂之道路//二達/謂之歧旁//三達/謂之劇旁//四達/謂之衢//五達/謂之康//六達/謂之莊//七達/謂之劇驂//八達/謂之崇期//九達/謂之逵, ‘한 방향으로 통하면 道路라고 하고, 두 방향으로 통하면 歧旁이라고 하며, 세 방향으로 통하면 劇旁이라고 하고, 네 방향으로 통하면 衢라고 하며, 다섯 방향으로 통하면 康이라고 하고, 여섯 방향으로 통하면 莊이라고 하며, 일곱 방향으로 통하면 劇驂이라고 하고, 여덟 방향으로 통하면 崇期라고 하며, 아홉 방향으로 통하면 逵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釋名》 「釋道」에는 또, 四達曰衢, ‘네 방향으로 통하는 것을 衢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즉, 고대 사람들이 衢를 ‘네 갈랫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음은 분명하다. 한편, 《春秋左氏傳》 「昭公」 원년에 及衝/擊之以戈, ‘衝에 가서 창으로 쳤다’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衝/交道, ‘衝는 길들이 만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네 갈랫길’이 아니더라도, ‘갈림길’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나 보다. 이제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 보자. 楊倞은 爾雅云/四達謂之衢///孫炎云/衢/交道四出也///或曰/衢道/兩道也, ‘《爾雅》에 “네 방향으로 통하는 것을 衢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孫炎은 “衢는 길이 얽혀서 네 가지 방향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衢道란, 양갈랫길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그리고 楊倞은 또, 下篇有楊朱哭衢塗//今秦俗猶以兩爲衢/古之遺言歟, ‘아랫쪽 편에 “楊朱가 衢塗에서 통곡했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秦나라 사람들은 속된 말로 두 갈랫길을 오히려 衢라고 하니, 옛 말의 남은 흔적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孫炎은 曹魏 사람으로, 反切로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방법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孫炎의 이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楊朱哭衢塗라는 말은 「王霸」에 나온다. 다만 塗가 涂로 되어 있다. 郝懿行은 案楊朱哭衢塗/見王霸篇//注云/衢塗/歧路也//秦俗以兩爲衢/或曰/四達謂之衢///大意與此注同/俱兼二義訓釋//實則楊朱見歧路而悲/即莊子云大道以多歧亡羊之意/不必泥爾雅四達謂之衢也, ‘살펴 보면, “楊朱가 衢塗에서 통곡했다”는 말은 「王霸」에 나온다. 그에 대한 楊倞의 주석에는 “衢塗는 갈림길이다. 秦나라 사람들은 양갈랫길을 衢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네 방향으로 통한 길을 衢라고 했다”라고 되어 있으니, 대체적인 의미가 이 부분 주석과 같아, 두 주석 모두 두 갈랫길, 네 갈랫길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함께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실제로는, 楊朱가 갈림길을 보고 슬퍼했다는 뜻으로, 곧 莊子에 “큰 길에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었다”라고 나오는 말의 의미와 같다. 그러니 《爾雅》의 “네 방향으로 통한 길을 衢라고 한다”라는 말에 꼭 연연할 필요는 없겠다’라고 했다. 양 이야기는 《莊子》에 나오지 않고, 《列子》 「說符」에 나온다. 이 점은 宋基采도 지적하고 있다. 王念孫은 爾雅四達謂之衢///又云/二達謂之歧旁///歧衢一聲之轉/則二達亦可謂之衢//故大戴記作行歧塗者不至//勸學篇下文/言兩君兩視兩聽/王霸篇下文/言榮辱安危存亡之衢/皆謂兩爲衢也//大略篇又云/二者治亂之衢也[今本脫治字/辯見大略]///則荀子書皆謂兩爲衢, ‘《爾雅》에는 “네 방향으로 통하는 것을 衢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고, 또 “두 방향으로 통하는 것을 歧旁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歧와 衢는 본래 발음이 같았으나, 나중에 바뀌었으니, 두 방향으로 통하는 길 역시 衢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大戴記》에 行歧塗者不至라고 되어 있다 하겠다. 「勸學」 아랫쪽 글 중 兩君, 兩視, 兩聽이라는 문구, 그리고 「王霸」의 글 중 “榮辱과 安危, 存亡의 衢”라는 문구에서 모두 두 갈래를 衢라고 하고 있다. 「大略」에는 “두 가지는 治亂의 衢다”라는 말이 있으니[王先謙의 부연 : 지금 판본에는 治가 빠져 있다. 이에 대한 논증은 「大略」에 기재되어 있다.], 荀子의 글에서는 항상 두 갈래를 衢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兩君, 兩視, 兩聽은, 이 글 뒤로 이어지는 行衢道者不至/事兩君者不容/目不能兩視而明/耳不能兩聽而聰의 兩君, 兩視, 兩聽을 뜻한다. 王先謙은 王說是, ‘王念孫의 설이 옳다’라고 하였다. 王念孫의 논증에서 알 수 있듯, 荀子가 글에서 衢를 ‘두 갈랫길’의 의미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본래 衢는 ‘네 갈랫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네 방향’이라는 뜻은 뭉개지고, ‘갈림길’이라는 의미만 남았을 것이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衢道가 跂塗로 되어 있다. 跂는 아마 支의 가차자일 것이다. 支는 ‘갈리다’, ‘갈라지다’는 말이다. 塗는 ‘길’이다. 즉, 跂塗는 ‘갈림길’이다. 王念孫은 《大戴禮記》에 歧塗라고 되어 있다고 인용하였었는데, 歧 역시 跂와 같은 글자다. ◈ 行衢道者의 者는 ‘~하는 사람’이다. 관형어구인 行衢道가 者를 한정한다. ◈ 不至의 不는 부정어다. 至를 한정한다. ◈ 至는 용언으로, ‘이르다’, ‘도달하다’는 말이다. 목표하는 바에 ‘이르다’는 뜻이다. 楊倞은 不至/不能有所至, ‘不至는 이르는 일이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곧, ‘이를 수가 없다’는 말이다. ◈ 事는 용언으로, ‘섬기다’, ‘모시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兩君을 받는다. ◈ 兩君은 ‘두 군주’다. 兩은 관형어로, ‘두’, ‘둘의’다. 君을 한정한다. 君은 체언으로, ‘군주’다. ◈ 事兩君者의 者는 ‘~하는 사람’이다. 관형어구인 事兩君이 者를 한정한다. ◈ 不容의 不은 부정어다. 容을 한정한다. ◈ 容은 용언으로, ‘용납되다’, ‘용인되다’, ‘수용되다’는 말이다. ◈◈ 蜀虎案 : 하나에 전념하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다 보면 이도 저도 안 된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13. 目不能兩視而明/耳不能兩聽而聰, ◈ 目은 체언으로, ‘눈’이다. 目은 주어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나는 ‘눈으로’처럼 의역하였다. ◈ 不能의 不은 부정어다. 能을 한정한다. ◈ 能은 ‘~를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目不能兩視而明의 能은 兩視而明을, 耳不能兩聽而聰의 能은 兩聽而聰을, 정확히는 明과 聰을 각각 받는다. 그런데 이 能은 판본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러나 있는 편이 내용에 더 정합된다. 학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盧文弨는 兩不字下/宋本俱有能字/與大戴同/元刻無, ‘目不과 耳不 다음에, 《宋本》에는 모두 能이 있다. 《大戴》도 그렇다. 《元刻》에는 없다’라고 하였다. 《大戴》는 《大戴禮記》다. 王念孫은 呂錢本俱有能字//元刻無兩能字者/以上下句皆六字/此二句獨七字/故刪兩能字/以歸畫一//不知古人之文不若是之拘也//若無兩能字/則文不足意矣, ‘《呂本》과 《錢本》엔 모두 能이 있다. 《元刻》에는 두 곳에 다 能이 없다. 이는 위와 아래의 句가 모두 여섯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句만 일곱 글자로 구성돼 있으므로, 能 두 글자를 없애서 통일시켰기 때문이다. 고친 사람은 옛 사람들의 글이 이런 문제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점을 몰랐을 것이다. 能이 없으면, 글의 의미가 불분명해진다’라고 하였다. 目不能兩視而明과 耳不能兩聽而聰은 모두 일곱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앞에 있는 行衢道者不至, 事兩君者不容, 그리고 이 뒤에 있는 螣蛇無足而飛, 梧鼠五技而窮은 모두 여섯 글자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王念孫은 후세의 누군가가 이 句의 能들을 없애서 글자 수를 맞췄다고 생각한 것이다. 王先謙은 謝本從盧校/無兩能字//今依王說/改從宋本, ‘《謝本》에서는 盧文弨의 교정을 좇았기 때문에 能들이 없다. 나는 王念孫의 설에 근거하여, 《宋本》을 따라 能을 넣어서 고쳤다’라고 하였다. ◈ 兩은 부사어로, ‘양쪽으로’, ‘두 방향으로’다. 兩視와 兩聽의 兩은 각각 視와 聽을 한정한다. ◈ 視는 용언으로, ‘보다’는 말이다. 즉 兩視는 ‘양쪽으로 보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두 곳을 보다’라고 의역하였다. ◈ 兩視而明의 而는 ‘~하면서’라고 해석된다. 兩聽而聰의 而도 그렇다. ◈ 明은 용언으로, ‘눈이 밝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분명히 보다’라고 번역하였다. 《孟子》 「離婁 上」에 離婁之明, '離婁는 明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朱熹는 離婁/古之明目者, '離婁는 옛날 눈이 밝았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즉, 「離婁 上」 본문에서 明은 '눈이 밝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莊子》 「大宗師」에 黜聰明, ‘聰과 明을 黜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明 역시 눈의 감각 작용을 이른다. 또, 《莊子》 「外物」에 目徹爲明, ‘눈이 밝은 것을 明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 耳는 체언으로, ‘귀’다. 耳는 주어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나는 ‘귀로’처럼 의역하였다. ◈ 聽은 용언으로, ‘듣다’는 말이다. 즉 兩聽은 ‘양쪽으로 듣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소리를 듣다’라고 의역하였다. ◈ 聰은 용언으로, ‘귀가 밝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또렷하게 듣다’라고 번역하였다. 《莊子》 「外物」에 耳徹爲聰, ‘귀가 밝은 것을 聰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또, 위에도 인용하였듯, 《莊子》 「大宗師」에 黜聰明, ‘聰과 明을 黜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聰은 귀의 감각 작용을 이른다. ◈◈ 蜀虎案 : 하다못해 감각 작용을 가지고 생각해 보아도, 하나에 집중해야 똑바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같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14. 螣蛇無足而飛/梧鼠五技而窮, ◈ 螣蛇는 체언으로, 뱀의 이름이다. 나는 ‘등사’라고 음역하였다. 螣이 이 뱀의 이름이고, 蛇는 ‘뱀’을 뜻한다. 《說文解字》 「虫部」에 螣/神蛇也//从虫朕聲, ‘螣은 신비로운 뱀이다. 虫이 들어 있고, 朕이라고 발음한다’라는 말이 있다. 《爾雅》 「釋魚」에는 螣/螣蛇, ‘螣은 螣蛇다’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대해 郭璞은 龍類也/能興雲霧而遊其中//淮南云蟒蛇, ‘龍의 일종이다. 구름과 안개를 일으켜서, 그 속에서 돌아 다닐 수 있다. 《淮南》에는 蟒蛇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螣/直錦反/字又作{朕虫}/又作騰/並同/徒登反//字林云/神蛇也///愼子云/螣蛇遊, ‘螣은 直과 錦의 반절로 읽는다. 이 글자는 {朕虫}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騰이라고 되어 있기도 한데, 모두 徒와 登의 반절로 읽는다. 《字林》에는 “신비로운 뱀이다”라고 되어 있다. 《愼子》에는 “螣蛇가 遊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邢昺은 蛇似龍者也//名螣/一名螣蛇//能興雲霧而遊其中也//蟒當爲奔//淮南子覽冥篇說女媧云/功烈/上際九天/下契黃壚//名聲被後世/光輝熏萬物//乘雷車/服應龍/驂青虯/援絕瑞/席蘿圖/黃雲絡/前白螭/後奔蛇///許愼云/奔蛇/蛇馳///是也//或曰淮南人呼此螣爲蟒蛇/螣義亦通, ‘뱀인데 용과 비슷하다. 이름은 螣인데, 螣蛇라고 하기도 한다. 구름과 안개를 일으켜서, 그 속을 다닐 수 있다. 郭璞의 주석 중 蟒은 마땅히 奔이 되어야 한다. 《淮南子》 「覽冥」에서 女媧에 대해, “공적은, 위로는 九天에 際하고, 아래로는 黃壚에 契한다. 명망은 후세에 被하고, 광휘는 萬物에 熏한다. 雷車를 타고, 應龍을 服했으며, 青虯를 驂하고, 絕瑞를 援하였다. 蘿圖에 앉아 있으니, 黃雲이 絡하였다. 白螭를 앞세우고, 奔蛇를 뒤에 세웠다”라고 한 말이 있다. 許愼이 “奔蛇는 蛇馳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를 뜻한다. 어떤 사람은 淮南 사람들이 이 螣을 蟒蛇라고 부른다고 하기도 했다. 螣의 뜻 역시 통용된다’라고 하였다. 《淮南》은 《淮南子》 「覽冥訓」을 이른다. 이 내용은 邢昺이 인용해 놓았다. 《愼子》 「威德」에 騰蛇遊霧, ‘騰蛇가 안갯속을 遊한다’라는 말이 있다. 邢昺이 인용한 許愼의 말은 아마 《淮南子》에 대한 許愼의 주석을 이르는 듯하다. 지금은 許愼의 주석이 실전되고, 高誘의 주석만 남아 있다. 高誘는 이 글의 奔蛇에 대해, 奔蛇/騰蛇也, ‘奔蛇는 騰蛇다’라고 하였다. 郭璞, 陸德明, 邢昺의 주석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인들에게 螣蛇는 옛날부터 용과 같은 뱀으로 유명한 동물이었다.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고서 그 안에서 돌아 다녔다고 하니, 이 말이 바로 날아 다녔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螣蛇無足而飛, ‘螣蛇는 발이 없지만 날아 다녔다’라고 한 것이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螣蛇가 騰蛇로 되어 있는데, 陸德明이 설명하였듯, 옛 사람들은 螣과 騰은 서로 바꾸어 쓰기도 하였었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爾雅云/螣/螣蛇//郭璞云/龍類/能興雲霧而遊其中也, ‘《爾雅》에 “螣은 螣蛇다”라고 되어 있다. 郭璞은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고, 그 속을 돌아 다녔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앞서 인용한 바와 같다. 한편, 宋基采는 螣蛇를 𧑞蛇, 虺螣이라고 하기도 했다고 했다. 𧑞은 螣과 같은 글자다. 虺螣의 경우, 《淮南子》 「本經訓」에 虺蛇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 이를 이르는 듯하다. ◈ 無는 용언으로, ‘없다’,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足을 받는다. ◈ 足은 체언으로, ‘발’이다. ◈ 無足而飛의 而는 역접으로, ‘그러나’, ‘하지만’처럼 해석된다. 五技而窮의 而도 그렇다. ◈ 飛는 용언으로, ‘날아 다니다’는 말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飛가 騰으로 되어 있다. 騰은 ‘오르다’는 말로, 아마 飛처럼 ‘날다’는 뜻이거나, 하늘로 ‘오르다’는 말일 것이다. ◈ 梧鼠는 체언으로, 쥐의 일종이다. 아마 鼫鼠, ‘날다람쥐’를 이르는 듯하다. 나는 楊倞의 설을 따랐다. 楊倞은 梧鼠/當爲鼫鼠//蓋本誤爲鼯字/傳寫又誤爲梧耳, ‘梧鼠는 마땅히 鼫鼠가 되어야 한다. 아마도, 鼫이 원래 鼯로 잘못되어 있었을 것이고, 베껴 적다가 다시 梧로 잘못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本草云/螻蛄一名鼫鼠///易釋文及正義皆引之/崔豹古今注亦同//蛄與梧音近/楊說似未參此, ‘《本草》에 “螻蛄는 鼫鼠라고 하기도 한다”라는 말이 있다. 《易》에 대한 《釋文》과 《正義》에도 이 말이 모두 인용되어 있고, 崔豹의 《古今注》에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 蛄와 梧는 音이 비슷하다. 楊倞은 이 글을 참고하지 않은 듯하다’라고 하였다. 《本草》는 《神農本草經》을 이르는 듯한데, 나는 저 말을 찾지 못했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을 이른다. 《正義》는 孔穎達의 《周易正義》를 이른다. 《易》 「䷢晉」에 대한 象傳에 碩鼠貞厲라는 말이 있는데, 碩鼠는 鼫鼠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陸德明은 音石//子夏傳作碩鼠/鼫鼠/五技鼠也//本草/螻蛄/一名鼫鼠, ‘鼫의 音은 石이다. 子夏의 傳에는 碩鼠라고 되어 있다. 鼫鼠는 재주를 다섯 가지 갖고 있는 쥐다. 《本草》에는 “螻蛄는 鼫鼠라고 하기도 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孔穎達은 鼫鼠有五能而不成伎之蟲也, ‘鼫鼠는 재주를 다섯 가지 가지고 있지만, 기예를 완성하지는 못하는 미물이다’라고 하였고, 또 蔡邕勸學篇云/鼫鼠五能不成一伎術///注曰/能飛不能過屋/能綠不能窮木/能游不能度穀/能穴不能掩身/能走不能先人///本草經云/螻蛄一名鼫鼠, ‘蔡邕의 「勸學篇」에는 “鼫鼠는 재주가 다섯 가지 있지만, 하나의 기예도 제대로 부리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고, 이에 대한 주석에는 “날 수 있지만 집을 가로지르진 못하고, 나무를 탈 수 있지만 전부 다 오르지는 못하며, 헤엄칠 수 있지만 穀을 지나지는 못하고, 구멍을 팔 수 있지만 자신을 숨기지는 못하며, 달릴 수 있지만 사람을 앞지르지는 못한다”라고 되어 있다. 《本草經》에는 “螻蛄는 鼫鼠라고 하기도 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勸學篇」은 後漢의 蔡邕이 지은 글이다. 주석은 누구의 주석인지 모르겠다. 《本草經》은 아마 《神農本草經》을 이르는 듯하다. 한편 王念孫은 本草言/螻蛄一名鼫鼠/不言一名梧鼠也//今以螻蛄之蛄/鼫鼠之鼠/合爲一名/而謂之蛄鼠/又以蛄梧音相近而謂之梧鼠/可乎//且大戴記正作鼫鼠五技而窮/鼫與梧音不相近/則梧爲誤字明矣//當以楊說爲是, ‘《本草》에서는 “螻蛄는 鼫鼠라고 하기도 한다”라고 하였지, “梧鼠라고 하기도 한다”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螻蛄의 蛄와, 鼫鼠의 鼠를 합쳐서 하나로 간주하고는, 蛄鼠라고 하고, 또 蛄와 梧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梧鼠라고 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또, 《大戴記》에는 바로 鼫鼠五技而窮이라고 되어 있는데, 鼫과 梧는 발음이 비슷하지도 않으니, 梧가 잘못된 글자임은 분명하다 하겠다. 당연히 楊倞의 설이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를 이른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王念孫이 언급하였듯, 鼫鼠라고 되어 있다. ◈ 梧鼠五技는 梧鼠有五技처럼, 용언 有를 넣어서 해석해야 한다. 아마 글자 수를 맞추려고 有를 생략했을 것이다. 앞의 蟹六跪而二螯 역시 蟹有六跪而二螯처럼 有를 넣어서 해석해야 했었다. 有는 ‘있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梧鼠五技, 즉 梧鼠有五技는 ‘梧鼠는 다섯 가지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해야 하지만, 나는 ‘梧鼠는 재주가 다섯 가지나 있었다’라고 의역하였다. ◈ 五技는 ‘다섯 가지 재주’다. 五는 관형어로, ‘다섯 가지의’, ‘다섯 개의’다. 技를 한정한다. 技는 체언으로, ‘재주’다. 그러면 ‘다섯 가지 재주’란 무엇일까. 이 재주에 대해서는, 梧鼠 부분에서 인용한 孔穎達의 주석에 설명되어 있다. 楊倞은 技/才能也, ‘技는 재능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또, 다섯 가지 재주에 대해 楊倞은 五技/謂能飛不能上屋/能緣不能窮木/能游不能渡谷/能穴不能掩身/能走不能先人, ‘다섯 가지 재주란, 날 수 있지만 지붕에 오르지는 못하고, 나무를 탈 수 있지만 전부 올라 가지는 못하며, 헤엄칠 수 있지만 계곡을 건너지는 못하고, 구멍을 팔 수 있지만 자신을 숨기지는 못하며, 달릴 수 있지만 사람을 앞지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蔡邕의 「勸學篇」에 대한 주석과, 楊倞의 주석은 글자가 조금 다를 뿐, 내용은 같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五技가 五伎라고 되어 있다. 伎 역시 ‘재주’, ‘기예’라는 말이다. ◈ 窮는 용언으로, ‘궁벽해지다’, ‘곤란해지다’, ‘곤경에 처하다’는 말이다. ◈◈ 楊倞은 言技能雖多/而不能如螣蛇專一/故窮, ‘梧鼠에게는 재주가 비록 많지만, 螣蛇처럼 전일할 수가 없으니, 궁지에 몰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螣蛇는 발이 없는데 날아 다닌다. 발은 장점이니, 발이 없다는 것은 단점이다. 하지만 荀子는 螣蛇가 마음을 전일하게 먹고 있기 때문에 단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아 다녔다고 한 것이다. 梧鼠는 정반대다. 재주가 다섯 가지나 있으니 이는 鼫鼠의 장점이다. 그런데도 鼫鼠는 자기 재주를 믿고 마음을 잡다하게 먹으니 궁지에 몰렸다. [본문으로]
  15. 詩曰, ◈ 詩는 체언으로, 《詩》, 즉 《詩經》을 이른다. 인용된 詩는 「國風 曹風」의 「鳲鳩」다. 楊倞은 詩/曹風尸鳩之篇, ‘詩는 「曹風」의 「尸鳩」다’라고 하였다. ◈ 曰은 말을 표현하거나, 다른 곳의 글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曰이 云으로 되어 있다. 云 역시 曰과 같다. [본문으로]
  16. 尸鳩在桑/其子七兮//淑人君子/其儀一兮//其儀一兮/心如結兮, ◈ 尸鳩는 체언으로, ‘뻐꾸기’다. 尸는 鳲의 가차자로, 본문처럼 尸鳩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鳲鳩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鳲鳩라고 되어 있다. 《爾雅》 「釋鳥」에 鳲鳩/鴶鵴, ‘鳲鳩는 鴶鵴이다’라고 하였다. 鴶鵴 역시 ‘뻐꾸기’다. 陸德明은 鳲音尸/本亦作尸, ‘鳲의 音은 尸다. 판본에 따라 尸로 되어 있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毛亨은 鳲鳩/秸鞠也, ‘鳲鳩는 秸鞠이다’라고 하였다. 秸鞠은 《爾雅》에 나온 鴶鵴과 같은 말일 것이다. 孔穎達은 釋鳥文, ‘「釋鳥」의 글이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秸/居八反/又音吉//鞠/居六反, ‘秸은 居와 八의 반절로 읽는다. 吉이라고 읽기도 한다. 鞠은 居와 六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鳲鳩/秸鞠也//亦名戴勝//今之布穀也, ‘鳲鳩는 秸鞠이다. 戴勝이라고 하기도 한다. 지금의 布穀이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뻐꾸기’일 것이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毛云/尸鳩/鴶鞠也, ‘毛亨은 “尸鳩는 鴶鞠이다”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注鴶鞠/元刻作秸鞫/毛傳作秸鞠, ‘楊倞의 주석에서 鴶鞠은 《元刻》에는 秸鞫이라고 되어 있고, 毛亨의 傳에는 秸鞠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在는 용언으로, ‘있다’는 말이다. 앉아 ‘있다’는 말일 것이다. ◈ 桑은 체언으로, ‘뽕나무’다. 在桑은 ‘뽕나무 가지에 앉아 있다’는 말일 것이다. ◈ 其子의 其는 尸鳩를 가리킨다. ‘尸鳩의’처럼 해석된다. ◈ 其子의 子는 체언으로, ‘자식’, ‘새끼’를 이른다. 뻐꾸기의 ‘새끼’를 이른다. ◈ 七은 용언으로, ‘일곱이다’, ‘일곱 마리다’라는 말이다. ◈ 兮는 말을 끝내는 조사로, 詩 같은 韻文에 사용된다. ◈ 淑은 관형어로, ‘착한’, ‘좋은’, ‘어진’, ‘훌륭한’이라는 말이다. 淑人의 人을 한정한다. 《說文解字》 「水部」에는 淑/清湛也//从水叔聲, ‘淑은 맑다는 뜻이다. 水가 들어 있고, 叔이라고 발음한다’라고 되어 있다. 사람이 맑으면, 곧 ‘선하다’는 뜻이다. 《爾雅》 「釋詁」에는 儀/若/祥/淑/鮮/省/臧/嘉/令/類/綝/彀/攻/穀/介/徽/善也, ‘儀, 若, 祥, 淑, 鮮, 省, 臧, 嘉, 令, 類, 綝, 彀, 攻, 穀, 介, 徽는 훌륭하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鄭玄은 淑/善, ‘淑은 훌륭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孔穎達은 釋詁文//此美其用心均壹, ‘「釋詁」의 글이다. 이 말은 君子의 마음가짐이 일관된다는 점을 찬미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朱熹 또한 詩人美君子之用心均平專一, ‘詩人은 君子의 마음가짐이 균평하고 전일하다는 점을 찬미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 人은 체언으로, ‘사람’이다. 淑人 역시 관형어로, 君子를 한정한다. 淑人君子는 ‘淑人인 君子’라는 말이다. ◈ 其儀의 其는 淑人君子의 君子를 가리키는 말이다. ‘君子의’처럼 해석된다. ◈ 儀는 체언으로, ‘거동’, ‘태도’, ‘모습’, ‘몸가짐’을 이른다. 鄭玄은 儀/義也, ‘儀는 의로움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주석을 보면, 毛亨 역시 義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儀 그대로 보고, ‘거동’처럼 해석해야 더 타당하겠다. ◈ 一은 용언으로, ‘일관되다’, ‘동일하다’, ‘전일하다’는 말이다. ◈ 心은 체언으로, ‘마음’이다. 君子의 ‘마음’을 이른다. ◈ 如는 용언으로, ‘~와 같다’는 말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如가 若으로 되어 있다. 若 역시 ‘~와 같다’는 말이다. ◈ 結은 체언으로, ‘맺어진 것’, ‘묶인 것’이다. 如結은 ‘묶인 것 같다’는 말로, 곧 ‘견고하다’, ‘단단하다’, ‘확고하다’, ‘굳건하다’는 뜻이다. 몸가짐을 한 결 같이 유지하는 모습이 확고하다는 뜻이다. 나는 如結을 용언처럼 ‘굳건하다’라고 번역하였다. 毛亨은 言執義一則用心固, ‘義를 고수하는 모습이 한결 같으니, 마음가짐이 단단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孔穎達은 如結者/謂如不以散/如物之裹結/故言執義壹則用心固也//素冠云/我心蘊結///又爲憂愁不散如裹結/與此同, ‘如結이라는 말은, 풀어지지 않는 듯하다는 뜻이니, 사물이 포장되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毛亨이 義를 고수하는 모습이 한결 같으니, 마음가짐이 단단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素冠」에 “내 마음은 蘊結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 또한 걱정이 풀리지 않아, 매여 있는 모습과 같다는 표현이다. 이 글과 같다’라고 하였다. 「素冠」는 《詩》 「國風 檜風」에 속한다. 朱熹는 如結/如物之固結而不散也, ‘如結은 사물이 단단하게 묶여 있는 것처럼 풀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楊倞은 尸鳩之養七子/旦從上而下/暮從下而上/平均如一//善人君子/其執義亦當如尸鳩之一/執義一則用心堅固//故曰/心如結也, ‘毛亨은 “尸鳩는 새끼 일곱을 기르는데, 아침에는 새끼들을 좇아 오르락내리락하고, 저녁에는 새끼들을 좇아 내리락오르락하니, 이를 한 결 같이 고르게 한다. 훌륭한 君子가 義를 고수하는 바 역시 尸鳩와 동일하다. 義를 한 결 같이 고수하니, 마음가짐도 확고하도다. 그래서 心如結也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이 말은 毛亨의 주석을 인용한 글로, 毛亨의 주석 원문과 글자가 조금 다를 뿐, 내용은 같다. ◈◈ 蜀虎案 : 상기하였듯, 출전은 《詩》 「國風 曹風」의 「鳲鳩」다. 「鳲鳩」는 뻐꾸기 가족들의 모습과 君子, 즉 卿이나 大夫의 모습을 병치하면서, 君子의 모습을 찬미한 시다. 楊倞은 毛亨의 주석을 인용해서, 뻐꾸기가 새끼를 기를 때 아침, 저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이를 변함 없이 계속 한다고 하여, 君子가 뜻을 일관되게 견지함을 뜻한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勸學」에 인용되지 않은 나머지 장을 보면, 뻐꾸기 가족들은 규칙성 없이 자연 배경을 묘사하는 소재로만 사용되고 있고, 인용된 부분으로 한정하더라도 뻐꾸기가 조석으로 오르내린다는 말은 없으므로, 楊倞처럼 해석해서는 안 될 듯하다. 차라리 인용된 부분만 고려할 때, 뻐꾸기는 새끼가 일곱이나 되지만, 君子는 몸가짐이 한결같으므로, 뻐꾸기와 君子가 앞에 나왔던 鼫鼠나 螣蛇처럼 대조를 이룬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뻐꾸기의 새끼가 일곱인 것이 '마음을 이리저리 잡다하게 먹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새끼가 일곱인 것은 그냥 자연 현상인데 말이다. 물론 그렇다.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는 荀子가 《荀子》 본문에다가 《詩》를 인용할 때, 《詩》 원전의 의미와 《荀子》 본문의 의미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맞추지 않고 인용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 뿐이다. 앞으로 이러한 경우를 여러 차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17. 故君子結於一也, ◈ 故는 ‘따라서’, ‘그래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故가 없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君子와 結 사이에 其가 들어가 있다. 즉, 君子其結於一也라고 되어 있다. 이 其는 아마 ‘이에’, ‘따라서’라는 말 같다. 乃와 같다. 상기하였듯, 《大戴禮記》에는 첫 부분의 故가 없는데, 其가 故가 뜻하는 인과 관계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禮記》 「月令」에 五者備當/上帝其饗, ‘다섯 가지를 갖추면, 其 上帝가 饗한다’라는 말이 있고, 《春秋左氏傳》 「僖公」 5년에 鶉之賁賁/天策焞焞/火中成軍/虢公其奔, ‘鶉이 賁賁하고, 天策이 焞焞하여, 火中에 軍을 成할 것이니, 其 虢公이 도망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며, 《春秋左氏傳》 「宣公」 2년에 非馬也/其人也, ‘말이 아니니, 其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고, 《國語》 「晉語」에 喪田不懲/禍亂其興, ‘田을 잃고도 懲하지 않으니, 其 禍亂이 일어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其는 모두 乃처럼 ‘이에’, ‘그래서’라고 해석된다. ◈ 結은 용언으로, 본래 ‘묶다’, ‘맺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마음을 ‘다잡다’라고 보아야 하겠다. 《文選》에 수록되어 있는 孫綽의 「遊天台山賦」에 結根彌於華岱, ‘結根은 華와 岱 보다 彌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李善은 結/猶固也, ‘結은 固와 같다’라고 하였다. 固는 곧 ‘단단하게 하다’, ‘다잡다’는 말이다. ◈ 於一의 於는 아마 ‘~와 같다’라는 말 같다. 如와 같다. 즉, 於一은 如一과 같다. 《戰國策》 「秦策」에 君危於累卵/而不壽於朝生, ‘君은 쌓여 있는 계란 於 위태로우니, 朝生 於 오래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고, 「燕策」에는 且非獨於此也, ‘또, 비단 이 於 뿐만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於는 모두 ‘~와 같다’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如와 의미가 같다. 한편, 《漢書》 「竇田灌韓傳」에 匈奴至者投鞍/高如城者數所, ‘도착한 匈奴들이 안장을 던졌는데, 높이가 성 만한 곳이 몇 곳이나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 일화는 劉向의 《新序》 「善謀 下」에는 匈奴至而投鞍/高於城者數所라고 되어 있다. 보다시피 如와 於만 다른데, 이는 두 글자가 의미가 같아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예시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於」에 수록되어 있다. ◈ 一은 체언으로, ‘하나’, ‘한 결’이다. ◈ 君子結於一也는 본래 ‘君子가 結하는 것이 一과 같다’라고 번역해야 하겠지만, 나는 ‘君子는 一과 같이 結한다’라고 어순을 바꾸어서 의역하였다. [본문으로]
  18. 昔者瓠巴鼓瑟而流魚出聽/伯牙鼓琴而六馬仰秣, ◈ 이 이야기는 여러 문헌에 인용되어 있고, 글자도 조금씩 다르다. 韓嬰의 《韓詩外傳》에는 淳于髡曰/夫子亦誠無善耳//昔者瓠巴鼓瑟/而潛魚出聽//伯牙鼓琴/而六馬仰秣//魚馬猶知善之爲善/而況君人者也, ‘淳于髡이 “선생도 진정 善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옛날 瓠巴가 瑟을 타면 潛魚가 나와서 들었고, 伯牙가 琴을 타면 六馬가 고개를 들고 秣했다. 물고기나 말들조차도 善을 알고, 善을 爲하는데, 하물며 君人은 어떻겠느냐”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淮南子》 「說山訓」에는 瓠巴鼓瑟/而淫魚出聽//伯牙鼓琴/駟馬仰秣, ‘瓠巴가 瑟을 타면 淫魚가 나와서 듣고, 伯牙가 琴을 타면, 駟馬가 고개를 들고 秣했다’라는 말이 있다. 《論衡》 「率性」에는 推此以論/百獸率舞/潭魚出聽/六馬仰秣/不復疑矣, ‘이렇게 따져 볼 때, 온갖 짐승들이 춤을 춘다는 말, 潭魚가 나와서 듣는다는 말, 六馬가 고개를 들고 秣한다는 말은 다시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중 百獸率舞은 《書》의 「虞書 舜典」과 「虞書 益稷」에 나오는 말이다. 또, 《論衡》 「感虛」에는 傳書言/瓠芭鼓瑟/淵魚出聽//師曠鼓琴/六馬仰秣, ‘전하는 글에서, “瓠芭가 瑟을 타면 淵魚가 나와서 듣고, 師曠이 琴을 타면 六馬가 고개를 들고 秣한다”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마지막으로, 《說文解字》 「魚部」에는 鱏/魚名//从魚覃聲//傳曰/伯牙鼓琴/鱏魚出聽, ‘鱏은 물고기의 이름이다. 魚가 들어 있고, 覃이라고 발음한다. 《傳》에 “伯牙가 琴을 타면 鱏魚가 나와서 듣는다”라는 말이 나온다’라고 되어 있다. ◈ 昔者는 ‘옛날’이다. 昔은 관형어로, ‘옛’, ‘옛날의’이다. 者는 ‘~한 것’, ‘~한 때’다. ◈ 瓠巴는 사람 이름이다. 아마 瑟, 즉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韓詩外傳》과 《淮南子》에는 똑같이 瓠巴라고 되어 있고, 《論衡》에만 瓠芭라고 되어 있다. 《淮南子》에 대해 高誘는 瓠巴/楚人也//善鼓瑟/淫魚喜音出頭於水而聽之, ‘瓠巴는 楚나라 사람이다. 瑟을 잘 탔는데, 그러면 淫魚가 음률에 즐거워하면서 물에서 머리를 내밀고 연주를 들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瓠巴라는 이름은 《荀子》, 《韓詩外傳》, 《淮南子》에만 나오지, 다른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瓠芭라는 이름도 《論衡》에만 나오지, 다른 문헌에 나오지 않는다. 《列子》 「湯問」에 匏巴鼓琴/而鳥舞魚躍/鄭師文聞之/棄家從師襄游, ‘匏巴가 琴을 타자, 새는 춤을 추고, 물고기는 뛰어 올랐다. 鄭나라의 師 文이 이 연주를 듣고는, 집을 버리고, 師 襄을 좇아 유람하였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匏巴 역시 瓠巴와 동일인인 것 같다. 楊倞 역시 《列子》를 인용해 두었지만, 楊倞의 주석에는 匏巴가 아니라 瓠巴라고 되어 있다. 《列子》에 대해 張湛은, 匏巴/古善鼓琴人也, ‘匏巴는 옛날 琴을 잘 타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殷敬順은 瓠音護, ‘瓠의 音은 護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판본에 따라 匏巴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楊倞이 인용하였듯 瓠巴라고 되어 있기도 했던 모양이다. 한편, 匏巴라는 이름은 《列子》 외엔 《焦氏易林》에 한 번 등장할 뿐,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다. 高誘의 주석이 맞다면, 瓠巴는 楚나라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瓠巴는 어느 시대 사람일까. 《列子》에서는 匏巴의 연주를 鄭나라의 師 文이 들었다고 했으니, 文과 瓠巴는 같은 시대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文은 언제 사람일까. 이 또한 알 수가 없다. 《呂氏春秋》 「審分覽 君守」에 鄭大師文終日鼓瑟而興, '鄭나라의 大師 文이 하루종일 瑟을 타고는 일어났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鄭大師文이 《列子》의 鄭師文일 것이다. 그러나 高誘는 鄭大師文이 누구인지에 대해 설명해 두지 않았고, 《春秋》 등에도 이 사람이 언급된 적이 없다. 《莊子》 「齊物論」에 有成與虧/故昭氏之鼓琴也//無成與虧/故昭氏之不鼓琴也, ‘만약 편애가 생겨났기 때문에 道가 이지러졌다고 본다면, 그 의견은 소씨가 거문고를 탄 일에 비길 수 있겠고, 반대로 편애가 생겨나지 않았는데도 道가 이지러졌다고 본다면 이 의견은 소씨가 거문고를 타지 않는 일에 비길 수 있겠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昭氏는 昭文으로, 이 사람이 바로 鄭大師文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莊子》에도 文이 언제 사람인지에 대한 단서는 나와 있지 않다. 文이 언제 사람인지 알 수 없으므로, 瓠巴 또한 언제 사람인지 추측할 수가 없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瓠巴/古之善鼓琴者/不知何代人//列子云/瓠巴鼓琴/鳥舞魚躍, ‘瓠巴는 옛날에 琴을 잘 타던 사람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列子》에 “瓠巴가 琴을 타자, 새들이 춤을 추고, 물고기가 뛰어 올랐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列子》는 《列子》 「湯問」을 이른다. 한편, 宋基采는 瓠巴를 춘추 시대 때 楚나라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춘추 시대는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으나, 楚나라 사람이라는 말은 아마 高誘의 주석에 근거한 의견일 것이다. ◈ 鼓瑟의 鼓는 용언으로, ‘연주하다’, 琴이나 瑟을 ‘타다’라는 말이다. 瑟을 받는다. 鼓琴의 鼓 또한 그렇다. 琴을 받는다. 《詩》 「小雅 鹿鳴之什」의 「鹿鳴」에 鼓瑟鼓琴, '瑟을 鼓하고, 琴을 鼓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鼓는 '연주하다'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 瑟은 체언으로, ‘거문고’, ‘슬’이다. 나는 ‘슬’이라고 음역하였다. ◈ 瓠巴鼓瑟而流魚出聽의 而는 ‘그러면’이라고 해석된다. 則과 같다. 伯牙鼓琴而六馬仰秣의 而도 그렇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而神明自得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流는 관형어다. 魚를 한정한다. 流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遊나 游의 가차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면 ‘헤엄치던’처럼 해석될 것이다. 아니면 글자 그대로 流로 보고, ‘흘러 가던’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또, 沈의 오기로 보고, ‘물 속에 있던’처럼 번역할 수 있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流가 沈이라고 되어 있다. 沈은 물에 ‘잠기다’는 말이다. 또, 이 글자는 《韓詩外傳》에는 潛이라고 되어 있고, 《淮南子》에는 淫이라고 되어 있으며, 《論衡》 「率性」에는 潭, 《說文解字》에는 鱏, 《論衡》 「感虛」에는 淵으로 되어 있다. 淵魚는 ‘연못에 있는 물고기’라는 말일 것이다. 鱏은 ‘철갑상어’를 이른다. 아마 潭을 잘못 인용한 듯하다. 潭은 沈처럼 물에 ‘잠기다’는 말 같다. 한편, 《文選》에 수록되어 있는 張協의 「七命 여덟 수」 중, 六馬噓天而仰秣, ‘六馬가 하늘을 보고 숨을 내 쉬고는 仰하고 秣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李善은 孫卿子曰/昔者瓠巴鼓瑟/而鱏魚出聽//伯牙鼓琴/而六馬仰秣, ‘《孫卿子》에 “옛날 瓠巴가 瑟을 타면 鱏魚가 나와서 듣고, 伯牙가 琴을 타면 六馬가 仰하고 秣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孫卿子》는 《荀子》다. 즉, 이 부분에도 鱏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淫에 대해, 王先謙은 ‘잠기다’는 말이라고 하였고, 高誘는 鱏처럼 물고기의 일종이라고 풀이했다. 高誘는 淫魚/長頭身/相半長丈餘/𤾁正白/身正黒/口在頷下/似鬲獄魚而魚无鱗//出江中也, ‘淫魚는 머리와 몸이 긴데, 서로 반반씩 한 丈 정도 된다. 코는 정백색이고, 몸은 정흑색이다. 주둥이는 턱 아래에 있다. 鬲獄魚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비늘이 없다. 江에 출몰한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잠기다’, ‘물 안에 있다’라고 풀이해야 가장 타당할 듯하다. 이에 따라, ‘물 속에 있던’이라고 번역하였다. 문헌들에 글자가 달리 쓰여 있는 점에 대해서는 王先謙이 잘 따져 두었으므로, 아래에 인용해 둔 주석을 참고할 만하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流魚/中流之魚也, ‘流魚는 물 속의 물고기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流魚/大戴禮作沈魚/論衡作鱏魚/亦與沈魚音近/恐流字誤//韓詩外傳作潛魚//或說流魚即游魚/古流游通用, ‘流魚는 《大戴禮》에 沈魚라고 되어 있다. 《論衡》에는 鱏魚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역시 沈魚와 발음이 비슷하다. 아마 流가 잘못된 듯 보인다. 《韓詩外傳》에는 潛魚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流魚는 游魚이며, 고대엔 流와 游가 통용되었다고 했다’라고 하였다. 《大戴禮》는 《大戴禮記》를 이른다. 王先謙은 流魚/大戴禮作沈魚/是也//魚沈伏/因鼓瑟而出/故云沈魚出聽//外傳作潛魚/潛亦沈也//作流者/借字耳//書沈湎/非十二子大略篇作流湎/君子篇士大夫無流淫之行/群書治要引作沈淫/此沈流通借之證//淮南子說山訓作淫魚/高注以爲長頭口在頷下之魚/與後漢馬融傳注鱏魚/口在頷下合//故論衡作鱏魚//此二書別爲一義//盧引或說流魚即游魚/旣是游魚/何云出聽//望文生義/斯爲謬矣, ‘流魚는 《大戴禮》에 沈魚로 되어 있다. 沈魚가 타당하다. 물고기가 물에 잠겨서 숨어 있다가, 瑟을 타니까 나온다. 그래서 沈魚出聽이라고 한 것이다. 《外傳》에는 潛魚라고 되어 있는데, 潛 또한 잠기다는 뜻이다. 流라고 되어 있는 것은 借字일 뿐이다. 《書》에 나오는 沈湎이라는 말이, 「非十二子」, 「大略」에는 流湎으로 되어 있고, 「君子」의 “士와 大夫가 流淫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을, 《群書治要》에는 沈淫이라고 인용해 두었다. 이 것이 沈과 流를 통용하여 쓰고, 가차하여 썼다는 증거다, 《淮南子》 「說山訓」에는 淫魚라고 되어 있는데, 高誘는 머리가 길고, 입은 턱 아래에 있는 물고기라고 설명하고 있고, 《後漢馬》 「馬融傳」에서도 “鱏魚는 주둥이가 턱 아래에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설명이 정합된다. 그래서 《論衡》에 鱏魚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글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다. 盧文弨는 어떤 사람이 流魚를 游魚라고 풀이했다는 설을 인용해 놓았는데, 물고기가 이미 헤엄지고 있다면, 어찌 나와서 들었다고 표현했는가. 글만 보고 뜻을 자아내니, 이렇게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다’라고 하였다. 《外傳》은 《韓詩外傳》이다. 《書》의 沈湎은 《書》 「周書 泰誓 上」의 沈湎冒色, ‘沈湎하고 冒色한다’의 沈湎을 이른다. 「非十二子」, 「大略」, 「君子」는 모두 《荀子》의 편들이다. 《後漢馬》 「馬融傳」은 「馬融列傳 上」을 이른다. 저 주석은 魴鱮鱏鯿, ‘魴, 鱮, 鱏, 鯿’에 붙어 있다. 주석은 李賢이 단 것이다. 李賢은 鱏音徐林反/口在頷下/大者長七八尺, ‘鱏은 徐와 林의 반절로 발음한다. 입이 턱 아래에 있다. 큰 것은 길이가 일곱에서 여덟 尺이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王先謙은 流, 沈, 淫이 모두 물에 ‘잠기다’, 물에 ‘빠지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또 가차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이 설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 魚는 체언으로, ‘물고기’다. ◈ 出은 용언으로, ‘나오다’는 말이다. 물 속에서 ‘나오다’는 뜻이다. ◈ 聽은 용언으로, ‘듣다’는 말이다. 瓠巴의 연주를 ‘듣다’는 뜻이다. ◈ 伯牙는 사람 이름이다. 거문고를 잘 탔다. 伯牙에게는 鍾子期라는 친구가 있어서, 伯牙가 거문고를 타면, 鍾子期가 항상 그 음률을 들어 주었는데, 鍾子期가 죽자 伯牙는 자기 연주를 알아 줄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거문고를 박살내고,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列子》 「湯問」, 《淮南子》 「脩務訓」, 《呂氏春秋》 「孝行覽 本味」, 《韓詩外傳》 등,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먼저 《列子》 「湯問」에는 伯牙善鼓琴/鍾子期善聽//伯牙鼓琴/志在登高山//鍾子期曰/善哉//峨峨兮若泰山///志在流水//鍾子期曰/善哉//洋洋兮若江河///伯牙所念/鍾子期必得之//伯牙游於泰山之陰/卒逢暴雨/止於巖下/心悲/乃援琴而鼓之//初爲霖雨之操/更造崩山之音/曲每奏/鍾子期輒窮其趣//伯牙乃舍琴而歎曰/善哉善哉/子之聽夫志//想象猶吾心也//吾於何逃聲哉, ‘伯牙는 琴을 잘 탔고, 鍾子期는 그 소리를 잘 들었다. 伯牙가 琴을 타는데, 그 마음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에 있었다. 그러자 鍾子期는 “훌륭하구나. 험준하도다. 泰山 같구나”라고 하였다.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鍾子期는 “훌륭하구나. 넓고 넓도다. 長江과 黃河 같도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伯牙가 생각을 하면, 鍾子期는 반드시 알아 차렸다. 伯牙가 泰山의 그늘에 놀러 갔는데, 갑작스레 폭우를 만나, 바위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그러다 마음이 슬퍼져서, 이에 琴을 끌어 당겨서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마의 곡조를 연주하다가, 다시 崩山의 음률을 자아냈다. 伯牙는 계속 곡을 연주했지만, 鍾子期는 언제나 伯牙의 뜻을 꿰뚫어 보았다. 伯牙는 이에 琴을 버리고, 탄식하며, “니가 의중을 듣는 모습이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과 같도다. 내가 어찌 소리를 逃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淮南子》 「脩務訓」에는 鍾子期死而伯牙絕弦破琴/知世莫賞也, ‘鍾子期가 죽자, 伯牙는 줄을 끊고, 琴을 박살냈으니, 세상에 賞해 줄 이가 없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伯牙/楚人//覩世/無有知音若子期者/故絶絃破其琴也, ‘伯牙는 楚나라 사람이다. 세상을 보니, 자기 음악을 鍾子期처럼 알아 주는 자가 없어서, 이에 줄을 끊고, 자기 琴을 박살내 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呂氏春秋》 「孝行覽 本味」에는 伯牙鼓琴/鍾子期聽之/方鼓琴而志在太山/鍾子期曰/善哉乎鼓琴/巍巍乎若太山///少選之間/而志在流水/鍾子期又曰/善哉乎鼓琴/湯湯乎若流水///鍾子期死/伯牙破琴絕弦/終身不復鼓琴/以爲世無足復爲鼓琴者, ‘伯牙는 琴을 타고, 鍾子期는 그 소리를 들었다. 琴을 타는데, 伯牙의 마음이 太山에 가 있으면, 鍾子期는 “연주가 훌륭하구나. 험준한 것이 太山 같다”라고 하였다. 伯牙의 마음이 잠시간 흐르는 물에 가 있으면, 鍾子期는 “연주가 훌륭하구나. 시원시원한 것이 흐르는 물 같도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鍾子期가 죽었다. 그러자 伯牙는 琴을 박살내고, 줄을 끊으며, 죽을 때까지 다시 琴을 연주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신이 琴을 다시 연주하게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대해 高誘는 伯/姓//牙/名//或作雅//鍾/氏//期/名//子/皆通稱//悉楚人也//少善聽音/故曰爲世無足爲鼓琴也, ‘伯은 姓이고, 牙는 이름이다. 牙는 雅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鍾은 氏고, 期는 이름이다. 子는 아마 通稱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楚나라 사람이다. 음악을 잘 듣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세상에 자신이 琴을 다시 연주하게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韓詩外傳》에는 伯牙鼓琴/鍾子期聽之//方鼓琴/志在山/鍾子期曰/善哉/鼓琴//巍巍乎如太山///志在流水/鍾子期曰/善哉/鼓琴//洋洋乎若江河///鍾子期死/伯牙僻琴絕絃/終身不復鼓琴/以爲世無足與鼓琴也, ‘伯牙가 琴을 타면, 鍾子期는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琴을 타다가, 마음이 산으로 가면, 鍾子期는 “연주가 훌륭하도다. 험준한 것이 太山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마음이 흐르는 물에 가면, 鍾子期는 “연주가 훌륭하도다. 드넓은 것이 長江이나 黃河와 같도다”라고 하였다. 鍾子期가 죽자, 伯牙는 琴을 멀리 하고, 줄을 끊고는, 죽을 때까지 다시 琴을 타지 않았다. 세상에 함께 琴을 탈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글자가 조금씩 다를 뿐, 내용은 대체적으로 동일하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伯牙/古之善鼓琴者/亦不知何代人, ‘伯牙는 옛날 琴을 잘 타던 사람인데, 마찬가지로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 琴은 체언으로, ‘거문고’, ‘금’이다. 나는 ‘금’이라고 음역하였다. ◈ 六馬는 글자 그대로 보면 ‘여섯 마리 말’ 혹은 ‘여섯 종류의 말’이 된다. 六은 관형어로, ‘여섯의’, ‘여섯 개의’, ‘여섯 마리의’다. 馬를 한정한다. 馬는 체언으로,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六馬는 아마 ‘왕실에서 사용하는 말’을 총칭하는 표현 같다. 나는 ‘육마’로 음역하였다. 《周禮》 「夏官司馬」에 校人/掌王馬之政//辨六馬之屬/種馬一物/戎馬一物/齊馬一物/道馬一物/田馬一物/駑馬一物, ‘校人은 王馬에 대한 政을 관장한다. 六馬들을 辨하는데, 種馬가 하나, 戎馬가 하나, 齊馬가 하나, 道馬가 하나, 田馬가 하나, 駑馬가 하나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鄭玄은 種謂上善似母者/以次差之//玉路駕種馬/戎路駕戎馬/金路駕齊馬/象路駕道馬/田路駕田馬/駑馬給宮中之役, ‘種은 가장 좋아서, 母와 같은 것을 이른다. 그 다음 것으로 등급을 나눈다. 玉路는 種馬가 끌고, 戎路는 戎馬가 끌고, 金路는 齊馬가 끌고, 象路는 道馬가 끌고, 田路는 田馬가 끈다. 駑馬는 宮中의 役에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路는 輅와 통용되는 글자로, ‘수레’를 뜻한다. 즉, 이 六馬, 즉 ‘여섯 종류의 말’들은 모두 왕실에서 사용하는 말들이다. 본문의 六馬가 이 六馬와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부류의 관용어라는 점은 분명하다. 《淮南子》 「說山訓」에는 駟馬라고 되어 있다. 駟는 아마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를 뜻할 것이니, 駟馬는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를 끄는 말들’이 된다. 《說文解字》 「馬部」에 駟/一乘也, '駟는 수레 한 대다'라는 말이 있다. 말 네 마리가 몰았으므로, 크고 화려했을 것이다. 《莊子》 「人間世」에 結駟千乘/隱將芘其所藾, ‘나무의 그림자에 결사가 장차 천 승이나 가려질 수 있을 정도였다’라는 말이 있다. 또, 《史記》 「仲尼弟子列傳」에 子貢相衛/而結駟連騎/排藜藿/入窮閻/過謝原憲, '子貢은 衛나라의 재상이 되고는, 結駟를 잇달아 몰고, 변변찮은 음식은 물리쳐 버리며, 마을로 들어가 原憲의 안부를 묻는답시고 방문하였다'라는 말이 있고, 《史記》 「貨殖列傳」에는 子貢/結駟連騎/束帛之幣以聘享諸侯, '子貢은 結駟를 잇달아 몰고, 비단 다발을 들고는, 이를 바치면서 제후를 만나고 다녔다'라는 말이 있다. 또 《戰國策》 「楚策」에는 楚王游於雲夢/結駟千乘/旌旗蔽日, '楚王이 雲夢에 놀러 갔는데, 結駟가 천 승이나 되었고, 깃발은 태양을 가릴 정도였다'라는 말이 있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六馬/天子路車之馬也//漢書曰/乾文車/坤六馬///白虎通曰/天子之馬六者/示有事於天地四方也///張衡西京賦曰/天子駕彫軫/六駿駮///又曰/六玄虯之奕奕/齊騰驤而沛艾, ‘六馬는 天子의 수레를 끄는 말이다. 《漢書》에 “乾文車와, 坤六馬”라는 말이 있고, 《白虎通》에 “天子의 말은 여섯이니, 하늘과 땅, 그리고 네 방위에서 사건이 생겼는지 살핀다”라는 말이 있다. 張衡의 「西京賦」에는 “天子가 彫軫과 六駿駮를 駕한다”라는 말이 있고, 또 “여섯 玄虯가 奕奕하니, 함께 騰驤하여 沛艾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漢書》는 《漢書》 「王莽傳 中」을 이른다. 원문에는 五威將乘乾文車/駕坤六馬, ‘五威將이 乾文車에 타고, 坤六馬를 몰며’라고 되어 있다. 顏師古는 鄭氏曰/畫天文象於車也///鄭氏曰/坤爲牝馬//六/地數, ‘乾文車에 대해 鄭氏는 “하늘의 모습을 수레에 그린 것이다”라고 하였고, 坤六馬에 대해 鄭氏는 “땅을 牝馬라고 한다. 六은 地數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鄭氏는 아마 鄭玄일 것이다. 《白虎通》은 《白虎通義》를 이른다. 그런데 나는 《白虎通義》에서 저런 말을 찾지 못했다. 「西京賦」는 《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원문은 天子乃駕彫軫/六駿駮로, 乃 한 글자가 더 있다. 薛綜은 彫/畫也//天子駕六馬//駮/白馬而黑畫爲文如虎者, ‘彫는 그리다는 말이다. 天子는 六馬를 駕한다. 駮은 백마에 검은 그림을 그려서, 호랑이처럼 무늬를 그린 것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六玄虯之奕奕/齊騰驤而沛艾는 「西京賦」가 아니라 「東京賦」에 나온다. 「東京賦」 역시 《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薛綜은 六/六馬也//玄/黑也//天子駕六馬, ‘六은 여섯 마리 말이다. 玄은 검다는 뜻이다. 天子는 六馬를 駕한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駕彫軫/元刻與今文選同/宋本駕作御//又案下所引二句出東京賦, ‘楊倞이 인용한 駕彫軫은 《元刻》과 지금 《文選》에는 말이 같다. 《宋本》에는 駕가 御로 되어 있다. 또 살펴 보면, 두 번째 인용한 두 句는 「東京賦」에 나온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인용한 두 句는 六玄虯之奕奕/齊騰驤而沛艾를 이른다. ◈ 仰은 용언으로, ‘우러르다’, ‘우러러 보다’, ‘고개를 들다’는 말이다. ◈ 秣은 용언으로, 아마 말이 ‘꼴을 먹다’는 말 같다. 《說文解字》 「食部」 䬴/食馬穀也//从食末聲, ‘䬴은 말을 먹이는 곡식이다. 食이 들어 있고, 末이라고 발음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康熙字典》에서는 本作䬴//今借作秣, ‘본래는 䬴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가차하여 秣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즉, 䬴은 곧 秣과 같다. 이처럼 秣은 ‘말을 먹이는 풀’, 곧 ‘꼴’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秣의 주어는 六馬이고, 또 秣은 仰과 함께 용언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꼴을 먹다’처럼 번역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仰秣는 ‘고개를 들고 꼴을 먹다’는 말이 된다. 말이 꼴을 먹을 때는 구유에 머리를 박고 먹는다. 머리를 들고 먹는다는 말은, 伯牙의 연주가 듣기 좋아서, 감상하면서 풀을 씹는 모습을 형용했다는 뜻일 것이다. 《淮南子》 「說山訓」의 駟馬仰秣에 대해 高誘는 仰秣/仰頭久吐/謂馬笑也, ‘仰秣은 머리를 들고 길게 숨을 내쉰다는 말이니, 말이 웃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즉, 高誘의 풀이도 내 의견과 같다. 한편, 流에 대한 주석에서 인용하였듯, 張協의 「七命 여덟 수」에는 六馬噓天而仰秣, ‘六馬가 하늘에 噓하고, 仰하고 秣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李善은 秣/或爲蹀也, ‘秣은 蹀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蹀은 ‘잔걸음하다’는 말로, 이리저리 자주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이른다. 이 역시 말이 즐거워서, 왔다갔다하며 자기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로 보인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仰首而秣/聽其聲也, ‘고개를 들고 꼴을 먹는다는 말은, 연주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瓠巴와 伯牙는 瑟과 琴을 탄다는 한 가지 일에 매진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물고기나 말도 감화시킬 수 있을 만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물고기나 말도 감동하는데, 세상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본문으로]
  19. 故聲無小而不聞/行無隱而不形, ◈ 故는 聲無小而不聞에 함의되어 있는 뜻을 行無隱而不形에 연결시켜 주는 말이다. 즉, 故聲無小而不聞/行無隱而不形은 ‘聲無小而不聞하다. 이처럼 行無隱而不形하다’라는 말이 된다. 故는 일반적으로 A 故 B, ‘A다. 이에 B다’처럼 사용되는데, 《荀子》에는 故 A B, ‘A인 것과 같이 B다’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故가 夫로 되어 있다. 여기서 夫는 발어사로, ‘대저’, ‘무릇’과 같이 해석된다. 故 역시 발어사로 해석될 수 있기에, 발어사로 보고 夫로 글자를 바꾸었나 보다. 그런데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내 생각에는 故를 발어사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 聲은 체언으로, 원래 ‘소리’지만, 여기서는 ‘연주’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다. 앞에 나온 瓠巴와 伯牙의 연주를 이른다. ◈ 無小而不聞의 無는 용언으로, ‘~가 없다’, ‘~한 경우가 없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小而不聞을 받는다. ◈ 小은 용언으로, ‘작다’, ‘미미하다’, ‘미세하다’는 말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小가 細로 되어 있다. 細 역시 ‘미세하다’, ‘미미하다’는 말이다. ◈ 小而不聞의 而는 역접으로, ‘그러나’, ‘그래도’처럼 해석된다. ◈ 不聞의 不은 부정어다. 聞을 한정한다. ◈ 聞은 용언으로, 훌륭하다는 점이 ‘드러나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다’, 소문이 ‘퍼지다’는 말이다. 名과 같다. 《戰國策》 「燕策」에 謀未發而聞於外/則危, ‘모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밖에 聞하면 위태롭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聞은 ‘퍼져 나가다’라는 말이다. 또, 《書》 「周書 微子之命」에 爾惟踐修厥猷/舊有令聞, '니가 도리를 닦아, 예전부터 아름다운 聞이 있었다'라는 말이 있고, 《詩》 「大雅 生民之什」의 「卷阿」에 令聞令望, '아름다운 聞과 아름다운 望'이라는 말이 있는데, 聞은 모두 '명성', '평판'을 뜻한다. 《莊子》 「人間世」에도 名聞不爭/未達人心, ‘名聞를 두고 남들과 다투지는 않지만, 아직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지는 못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聞은 名과 같은 말로, 곧 ‘명예’, ‘명망’, ‘평판’을 이른다. ◈ 따라서 無小而不聞은 ‘小하더라도 聞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 된다. ◈ 行은 체언으로, ‘행위’, ‘행동’이다. 여기서는 ‘선행’과 ‘악행’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 無隱而不形의 無는 용언으로, ‘~가 없다’, ‘~한 경우가 없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隱而不形을 받는다. ◈ 隱은 용언으로, ‘은미하다’, ‘미미하다’는 말이다. 小而不聞의 小와 같다. ◈ 隱而不形의 而는 역접으로, ‘그러나’, ‘그래도’처럼 해석된다. ◈ 不形의 不은 부정어다. 形을 한정한다. ◈ 形은 용언으로, ‘드러나다’, ‘나타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구상화된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다. 행위가 선행이냐, 악행이냐에 따라 果報를 되돌려 받을 텐데, 이를 이른다. 즉, 행위가 果報로 ‘드러나다’는 뜻이다. 楊倞은 形/謂有形可見, ‘形은 형체가 생겨서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드러나다’는 뜻이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形이 行으로 되어 있는데, 이 行은 形의 오기일 듯하다.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서 잘못되었을 듯하다. ◈◈ 蜀虎案 : 현재 상황이 한미하고 미천하더라도, 마음을 일관되게 먹고 노력하면 결과적으로 명망을 천하에 떨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囊中之錐라는 말처럼, 재능이 있으면 세상이 알아 줄 날이 오니, 마음을 이리저리 흩트리지 말고, 한 결 같이 공부하고, 선행을 이어 나가라는 뜻이라 하겠다. [본문으로]
  20. 玉在山而草木潤/淵生珠而崖不枯, ◈ 玉은 체언으로, ‘옥’이다. ◈ 在는 용언으로, ‘있다’, ‘존재하다’라는 말이다. 山을 받는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在가 居로 되어 있다. 居 역시 ‘있다’는 말이다. ◈ 山을 체언으로, ‘산’이다. ◈ 玉在山而草木潤의 而는 ‘그러면’이라고 해석된다. 淵生珠而崖不枯의 而도 그렇다. 則과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積善成德/而神明自得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草木은 체언으로, ‘초목’, ‘풀과 나무’를 이른다. 王念孫은 草木은 본래 木이었을 것이라 했는데, 나는 이 설을 따라 木으로 보고, ‘나무’라고 번역하였다. 王念孫은 玉在山而草木潤/淵生珠而崖不枯/元刻無草字/案元刻是也//木與崖對文/故上句少一字//宋本木上有草字者/依淮南說山篇加之也//文選吳都賦林木爲之潤黷/李善注引此作玉在山而木潤[困學紀聞十引建本荀子同]//江賦文賦注竝同//藝文類聚木部/太平御覽木部一所引亦同//而草部不引/則本無草字明矣//大戴記作玉居山而木潤/續史記龜策傳作玉處於山而木潤//文雖小異/而亦無草字, ‘玉在山而草木潤/淵生珠而崖不枯 중, 《元刻》에는 草가 빠져 있다. 살펴 보면, 《元刻》이 옳다. 木과 崖는 대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草木이 다 있으면 앞 句의 글자가 한 글자 적게 된다. 《宋本》에는 木 위에 草가 있는데, 이는 《淮南》 「說山」에 근거해서 더 넣은 글자다. 《文選》에 있는 「吳都賦」에 “林木이 潤黷을 낸다”라는 말이 있는데, 李善의 주석에서는 이 글을 玉在山而木潤이라고 인용해 두었고[王先謙의 부연 : 《困學紀聞》 「十」에서는 《建本 荀子》를 인용했는데, 이와 동일하다.], 「江賦」와 「文賦」의 주석에서도 모두 그렇다. 《藝文類聚》 「木部」, 《太平御覽》 「木部 一」에서 인용한 글도 똑같다. 「草部」에는 이 글이 인용되어 있지 않으니, 원래 草가 없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大戴記》에는 玉居山而木潤이라고 되어 있고, 《續史記》 「龜策傳」에는 玉處於山而木潤이라고 되어 있다. 글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草가 없다’라고 하였다. 《淮南》 「說山」은 《淮南子》 「說山訓」이다. 「吳都賦」는 西晉 左思의 저작이다. 《困學紀聞》은 趙宋의 王應麟이 지은 책이다. 「江賦」와 「文賦」 역시 《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江賦」는 西晉의 郭璞, 「文賦」는 西晉의 陸機가 지었다. 「江賦」의 주석은 林無不溽/岸無不津, ‘수풀은 溽하지 않는 경우가 없고, 물가는 津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라는 말이 붙어 있고, 「文賦」의 주석은 石韞玉而山輝/水懷珠而川媚, ‘돌이 玉을 품으면 산이 빛나고, 물이 진주를 품으면 시내가 아름다워진다’라는 말에 붙어 있다. 李善은 두 경우 모두 《孫卿子》에서 인용하였다고 했는데, 《孫卿子》가 바로 《荀子》다. 《藝文類聚》는 「木部 上 木」을 이른다. 이 외에 「寶玉部 上 玉」에도 玉在山而木潤이 인용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인용문은 《大戴禮》, 즉 《大戴禮記》에서 인용한 글이다. 《太平御覽》은 「木部 一 木上」을 이른다. 이 외에 「珍寶部 三 玉上」에도 玉在山而木潤이 인용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인용문은 《大戴禮》, 즉 《大戴禮記》에서 인용한 글이다. 모두 草가 빠져 있다. 《續史記》 「龜策傳」은 《史記》 「龜策列傳」이다. 《史記》를 褚少孫이 보충했기 때문에 《續史記》라고 한 듯하다. 王念孫이 인용하였듯, 《淮南子》 「說山訓」에는 玉在山而草木潤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이 외에, 《文子》 「上德」에 玉在山而草木潤이라고 되어 있으니, 草가 있다. 《群書治要》에는 玉在山而木草潤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草가 있지만, 草木이 아니라 木草라고 되어 있다. ◈ 潤은 용언으로, ‘윤택해지다’라는 말이다. 상태가 좋아진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생생해진다’라고 번역하였다. ◈ 淵은 체언으로, ‘못’, ‘연못’이다. ◈ 生은 용언으로, 아마 ‘만들다’, ‘생성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 珠는 체언으로, ‘진주’다. ◈ 崖는 체언으로, ‘기슭’, ‘물가’를 이른다. 涯와 같다. 楊倞은 崖/岸, ‘崖는 물가의 언덕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崖가 岸으로 되어 있다. 楊倞의 주석과 같다. ◈ 不枯의 不은 부정어다. 枯를 한정한다. ◈ 枯는 용언으로, ‘마르다’는 말이다. 楊倞은 枯/燥, ‘枯는 마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玉이 산에 아무리 깊숙하게 숨겨져 있다 한들, 진주가 연못에 아무리 깊숙하게 숨겨져 있다 한들, 그 효험은 가시적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 蜀虎又案 : 玉과 나무가 무슨 상관이고, 진주와 물이 무슨 상관이길래, 玉이 있으면 나무가 생생해진다고 하고, 진주가 있으면 물가가 마르지 않는다고 했을까. 먼저, 《說文解字》 「玉部」에 玉/石之美//有五德/潤澤以溫/仁之方也//䚡理自外/可以知中/義之方也//其聲舒揚/尃以遠聞/智之方也//不橈而折/勇之方也//銳廉而不技/絜之方也//象三玉之連//丨/其貫也//凡玉之屬皆从玉, ‘玉은 아름다운 돌이다. 다섯 가지 德을 품고 있다. 潤澤하고 따뜻하니 仁한 측면이 있고, 무늬가 겉으로 드러나 속을 알 수 있으니 義한 측면이 있으며, 소리가 널리 퍼져서 멀리서도 들리니 智한 측면이 있겠고, 굽거나 부러지지 않으니 勇한 측면이 있으며, 대쪽 같고 청렴하여 나뉘지 않으니 絜한 측면이 있겠다. 이 글자는 옥 세 개를 이어서, 꿰뚫어 놓은 모습을 본뜬 것이다. 玉의 부류를 뜻하는 글자에는 모두 玉이 들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 玉은 습윤하고 따뜻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다. 즉, 玉이 산에 있으면, 산의 환경이 玉의 성질에 따라 습윤해지고, 따뜻해질 것이니, 바로 이 점이 荀子가 본문과 같이 표현한 까닭이다. 또, 《說文解字》 「玉部」에 珠/蚌之陰精//从玉朱聲//春秋國語曰/珠以禦火灾///是也, ‘珠는 대합의 陰精이다. 玉이 들어 있고, 朱라고 읽는다. 《春秋國語》에 “珠를 가지고 화재를 막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 珠다’라고 하였다. 《春秋國語》는 아마 《國語》를 이르는 말 같다. 《國語》 「楚語」에 珠足以禦火災/則寶之, ‘珠는 화재를 막을 만하니, 보물이라 여긴다’라는 말이 있는데, 韋昭는 珠/水精/故以禦火災, ‘珠는 물의 정기다. 따라서 화재를 막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즉, 고대 사람들은 진주를 水精, 즉 ‘물의 정기’가 모인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진주가 화재를 막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물의 정기이니, 곧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荀子도 진주가 있으면, 연못가가 마르지 않게 된다고 하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21. 爲善不積邪/安有不聞者乎, ◈ 爲는 용언으로, ‘하다’, ‘행하다’, ‘실천하다’는 말이다. 善을 받는다. ◈ 善은 체언으로, ‘선’, ‘선행’, ‘좋은 일’이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爲善과 不積 사이에 而가 있다. 즉, 爲善而不積이라고 되어 있다. 이 而는 순접으로, ‘그리고’처럼 해석된다. ◈ 不積의 不는 부정어다. 積을 한정한다. 그런데 王念孫은 이 不이 잘못 끼어든 글자라고 보았다. 王念孫은 不積之不/涉上下文而衍/當依群書治要刪//說見大戴記述聞勸學篇, ‘不積의 不은 앞뒤의 글과 혼동되면서 잘못 들어 간 글자다. 마땅히 《群書治要》에 근거해서 없애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大戴記述聞 勸學」에 나온다’라고 하였다. 「大戴記述聞」은 王引之의 「大戴禮記述聞」을 이른다. 《經義述聞》에 포함되어 있다. 「大戴禮記述聞」에서 王引之는 不積/不至//爲善而不積乎/豈有不至哉//盧曰/至/一作聞//家大人曰/爲善而不積乎/衍不字//豈有不至哉/一本作聞/是也//此承上聲無細而不聞四句而言/故言爲善而積/則未有不聞者//曾子制言篇曰/士執仁與義而不聞得之/未篤故也//胡爲其莫之聞也///意正與此同//若云/豈有不至哉/則與上文了不相涉矣//孔曲爲之說/非//荀子作/爲善不積邪/安有不聞者乎///積上亦衍不字//羣書治要引荀子作/爲善積也[與邪同]/安有不聞者乎, ‘不積과 不至에 대한 논의다. 爲善而不積乎/豈有不至哉에 대해, 盧辯은 “至는 聞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家大人은 “爲善而不積乎에서 不은 잘못 들어간 글자다. 豈有不至哉에서 어떤 판본에는 至가 聞으로 되어 있는데, 이 것이 옳다. 이 글은 앞의 聲無細而不聞부터 네 句에 이어서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善을 행하고, 積하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없다’라고 한 것이다. 「曾子制言」에 ‘선비가 仁과 義를 견지하는데도 명성을 얻지 못하는 것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장차 명성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글과 뜻이 꼭 맞다. 이 다음에 ‘어찌 지극해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위의 글과 涉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하다. 孔廣森은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하였으나, 틀렸다. 《荀子》에는 爲善不積邪/安有不聞者乎라고 되어 있는데, 積 위에 마찬가지로 不이 잘못 들어가 있다. 《羣書治要》에는 《荀子》를 인용해서 爲善積也[王引之의 부연 : 也는 邪와 같다.]/安有不聞者乎라고 해 놓았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盧辯은 北魏에서 北周까지의 세 나리를 섬긴 名臣이다. 字는 景宣이고, 范陽郡 涿縣 사람이다. 《大戴禮記》에 주석을 달았다. 「曾子制言」은 《大戴禮記》 「曾子制言 上」이다. 「曾子制言 上」에는 故士執仁與義而明行之/未篤故也//胡爲其莫之聞也, ‘따라서 선비가 仁과 義를 견지하고, 분명하게 실천하는 것은 견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명망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되어 있다. 내용이 조금 다르다. 즉, 王念孫은 爲善不積邪/安有不聞者乎를 爲善積則安有不聞者乎, ‘善을 爲하고 積하면, 어찌 聞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느냐’처럼 해석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말이야 맞지만, 이 경우에는 邪의 의미까지 則으로 바꿔서 해석해야 한다. 王先謙은 이런 해석에 반대하고 있다. 王先謙은 大戴記作/爲善而不積乎/豈有不至哉///盧辯注/至/一作聞///孔廣森注云/言爲善或不積耳//積則未有不至於成者///此文亦言/爲善或不積邪//積則安有不聞者乎//語意曲而有味//治要作/爲善積也///徑删不字/意味索然//王氏反從之/欲併删大戴記/何也, ‘《大戴記》에는 爲善而不積乎/豈有不至哉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盧辯은 “至는 聞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孔廣森은 “善을 행하면서도 지속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속한다면, 成하는 경지에 이르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 또한, 善을 행하되, 지속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어 간다면 어찌 명성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느냐는 뜻이다. 말의 뜻이 완곡해서 읽는 재미가 있다. 《治要》에는 爲善積也라고 되어 있는데, 옳지 않게 不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말의 뜻이 이상해져 버렸다. 그런데 王念孫은 도리어 이를 따르고, 《大戴記》의 不조차 같이 없애 버리려 하니, 왜일까’라고 하였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다. 《治要》는 《群書治要》다. 나는 王念孫을 따르지 않고, 不을 넣어서 번역하였다. ◈ 積은 용언으로, ‘쌓다’, ‘모으다’, ‘누적시키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선행을 ‘쌓아 가다’라는 말이므로, ‘계속해 나가다’, ‘이어 나가다’처럼 의역하였다. ◈ 邪는 아마 반문하는 의문사일 것이다. 이 때는 ‘야’라고 읽는다. 즉, 爲善不積邪는 ‘善을 爲하고 積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된다. 宋基采는 邪를 의문사로 해석하고 있다. 邪를 의문사가 아니라, ‘사악하다’라는 본래의 의미 그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李止漢과 金學主가 그렇게 번역하였다. 이 때 邪는 ‘사’라고 읽는다. 그러면 爲善不積邪는 ‘善을 爲하고, 邪를 積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群書治要》에는 이 말이 爲善積也라고 인용되어 있다. 不이 빠졌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邪를 也로 옮겼으니, 邪를 의문사로 해석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邪가 乎로 되어 있다. 乎 역시 반문하는 의문사다. ◈ 安은 의문사로, ‘어찌’, ‘어떻게’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安이 豈로 되어 있다. 豈 역시 의문사다. ◈ 有는 아마 용언으로, ‘있다’, ‘존재하다’라는 말인 것 같다. 명사구인 不聞者를 받는다. 有를 부사어로 보고, ‘또’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면 聞을 용언으로 해석해야 한다. ◈ 不聞의 不은 부정어다. 聞을 한정한다. ◈ 聞은 용언으로, 훌륭하다는 점이 ‘드러나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다’, 소문이 ‘퍼지다’는 말이다. 名과 같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聞이 至로 되어 있다. 至는 ‘지극해지다’는 말이다. ◈ 不聞者의 者는 ‘~한 경우’다. 관형어구인 不聞이 者를 한정한다. 不聞者는 명성이 ‘퍼지지지 않는 경우’가 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者가 없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즉, 有不聞者乎는 ‘명망이 세상에 퍼지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겠느냐’라는 말이 된다. 나는 ‘명망이 세상에 퍼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의역하였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乎가 哉로 되어 있다. 哉는 감탄사다. ◈◈ 蜀虎案 : 이 문단의 주제는 마음을 일관되게 먹고 선행을 이어 나가라는 것이다. 첫 부분에서도 선행을 조금씩이라도 쌓아 가라고 하였고, 이 마지막 문장에서도 선행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 신묘한 통찰력이 저절로 생기고, 성인과 같은 마음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명망이 천하에 널리 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善이란, 아마 학문과 수양을 포함하여, 儒學者가 갖추어 나가야 할 덕목들을 이를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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