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순자 - 1 - 권학 - 9 - 예법은 대화의 기본이다

2021. 9. 24. 10:15순자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반응형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보기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원래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숫자로 바꾸고 하단으로 내려 두었습니다. 원래 글은 물론 원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주석을 하단으로 내리니까 정작 중요한 주석과 중요하지 않은 주석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어 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에다가 '*' 같은 것으로 표시해 둘까, 혹은 다르게 어떻게든 표시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느니 원안을 보존하고 새로 글을 파 두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기가 편한 것이 우선이냐, 주석이 우선이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 편한 방식에 맞게 글을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주석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습니다.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李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0년 5월 1일 16시 46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6

 

순자 - 1 - 권학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philosophistory.tistory.com

 

 

주석을 본문과 함께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4

 

순자 - 1 - 권학 - 9 - 《예》는 인간 관계의 기본이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philosophistory.tistory.com

 

 


 

 

問楛者勿告也,告楛者勿問也,說楛者勿聽也,有争氣者勿與辯也。故必由其道至,然後接之,非其道則避之。故禮恭而後可與言道之方,辭順而後可與言道之理,色從而後可與言道之致。

故未可與言而言謂之傲,可與言而不言謂之隱,不觀氣色而言謂之瞽。故君子不傲,不隱,不瞽,謹順其身。

詩曰:匪交匪舒,天子所予。

此之謂也。

 

 

예의 없이 묻는 놈에게는 대답해 주지 말 것이요, 예의 없이 대답하는 놈에게는 묻지 말 것이요, 예의 없이 주장하는 놈은 [그 주장을] 들어 주지 말 것이요, 싸울 기색을 비치는 놈과는 논쟁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각주:1] 이처럼, 반드시 [상대가] 묻고, 대답하고, 주장하고, 논쟁할 때 지켜야 할 도리를 극진하게 이행한 뒤에야 상대방을 상대해야 하고, [상대가 말을 하는 태도가] 말을 할 때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라면 상대방을 상대하지 않아야 한다.[각주:2] 따라서 [상대의] 예의범절이 공손해진 뒤에야 도를 이룰 방법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고, [상대의] 말이 화순해진 뒤에야 도의 대체적인 모습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며, [상대의] 안색이 부드러워진 뒤에야 도의 이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3]

 

[그러나 세상에는 예법을 따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놈들이 있다. 예법은 무시하고,] 도리어 함께 말을 나눌 만하지 않은데도 말을 하기도 하니, 이런 짓을 조급하다고 하고, 함께 말을 나눌 만한데도 말을 하지 않기도 하니, 이런 짓을 [속내를] 숨긴다고 하며, [상대의] 기색을 살피지 않고 말을 하기도 하니, 이런 짓을 눈이 삐었다고 한다.[각주:4] [그러나 군자는 언제나 예법을 따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급하게 굴지도 않고, [속내를] 숨기지도 않으며, 눈이 삔 것처럼 행동하지도 않으니, [예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삼갈 뿐이다.[각주:5]

 

[이에 대해] 《시》에 이런 말이 있다.[각주:6]

 

“[저 물품들은] 저 자들의 교제가 소홀하지 않았기에, 천자가 내려 준 것이다.”[각주:7]

 

[이 시가 바로] 이런 뜻이다.[각주:8]

 

 

 

  1. 問楛者勿告也/告楛者勿問也/說楛者勿聽也/有争氣者勿與辯也, ◈ 問楛者는 ‘問이 楛한 놈’, 즉 ‘예의 없이 질문하는 놈’, ‘싸가지 없이 질문하는 놈’을 이른다. 問은 체언으로, ‘질문’이다. 楛는 용언으로, ‘예의 없다’, ‘질이 나쁘다’는 말이다. 問楛는 관형어절로, 者를 한정한다. 者는 ‘~한 사람’, ‘~한 놈’이다. 뒤에 인용해 둔 주석을 보면, 楊倞은 楛를 苦와 같다고 하고, ‘나쁘다’라고 풀이했다. 荀子는 이 문단에서 問楛者, 告楛者, 說楛者, 有争氣者를 모두 태도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이런 부류에 반대되는 사람은 바로 君子다. 君子는 자신을 삼가고, 조심하며, 禮法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楛는 ‘예법을 지키다’는 말에 상반되도록 풀이되어야 한다. 즉, 楛는 ‘예의 없다’, ‘싸가지 없다’처럼 번역할 수 있겠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楛/與苦同/惡也//問楛/謂所問非禮義也//凡器物堅好者謂之功/濫惡者謂之楛//國語曰/辨其功苦///韋昭曰/堅曰功/脆曰苦//故西京賦曰/鬻良雜苦///史記曰/器不苦窳///或曰/楛/讀爲沽//儀禮/有沽功///鄭玄曰/沽/麤也, ‘楛는 苦와 같다. 조악하다는 뜻이다. 問楛라는 말은, 묻는 말이 禮義에 맞지 않다는 뜻이다. 대저, 사물이 질적으로 튼튼하고 좋을 때 功이라고 하고, 지나치거나 조악할 때 楛라고 한다. 《國語》에 “其가 功한지 苦한지 가린다”라는 말이 있는데, 韋昭는 “튼실하면 功, 흐물흐물하면 苦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西京賦」에 “좋은 것을 판다고 하며 苦를 섞는다”라는 말이 있고, 《史記》에는 “器가 苦窳하지 않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楛를 沽라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儀禮》에 沽功이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沽는 조잡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國語》 인용문은 「齊語」에 나온다. 그 句에 대해 韋昭는 辨/別也//功/牢也//苦/脆也, ‘辨은 변별하다는 뜻이다. 功은 단단하다는 뜻이다. 苦는 흐물흐물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西京賦」는 東漢의 張衡이 지은 賦다. 《文選》에 실려 있다. 鬻良雜苦에 대해 李善은 周禮曰/辨其苦良而買之///鄭玄曰/苦讀爲盬, ‘《周禮》에 “苦하고 良한 것을 가려서 판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苦는 盬라고 읽는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盬는 ‘거칠다’, 즉 ‘조악하다’는 말이다. 《周禮》 인용문은 「天官冢宰」에 있다. 「天官冢宰」에는 辨其苦良比其小大而賈之, ‘苦한 것과 良한 것을 가리고, 작고 큰 것을 比하여서 판다’라고 되어 있다. 《史記》 인용문은 「五帝本紀」다. 「五帝本紀」에는 河濱器皆不苦窳, ‘河濱한 그릇들이 모두 苦窳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張守節은 苦/讀如盬/音古//盬/粗也, ‘苦는 盬라고 읽는다. 발음은 古다. 盬는 조악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周禮》에 대한 鄭玄의 풀이와 같다. 沽功은 《儀禮》 「既夕禮」에 나온다. ◈ 勿은 부정어로, ‘~하지 마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勿告, 勿問, 勿聽, 勿與辯의 勿들이 모두 그렇다. ◈ 勿告의 告는 용언으로, ‘알려 주다’, ‘대답하다’는 말이다. ◈ 告楛者는 ‘告가 楛한 놈’, 즉 ‘예의 없이 대답하는 놈’이라는 말이다. 告는 체언으로, ‘알려 주는 것’, 즉 ‘대답’이다. 者는 ‘~하는 놈’이다. 告楛가 관형어절로, 者를 한정하고 있다. ◈ 勿問의 問은 용언으로, ‘질문하다’, ‘묻다’는 말이다. ◈ 說楛者는 ‘說이 楛한 놈’, 즉 ‘예의 없이 주장하는 놈’이다. 說은 체언으로, 아마 ‘주장’일 것이다. 者는 ‘~하는 놈’이다. 說楛가 관형어절로, 者를 한정하고 있다. ◈ 勿聽의 聽은 용언으로, 주장을 ‘들어 주다’는 말이다. ◈ 有争氣者는 ‘争할 氣를 有한 者’, 즉 ‘싸울 기색을 가지고 있는 놈’, ‘싸울 기색을 내비치는 놈’이다. 有는 용언으로,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는 말이다. 争은 관형어로, ‘싸울’, ‘싸움을 벌이려는’이다. 氣를 한정한다. 氣는 체언으로, ‘기색’이다. 有争氣는 관형어구로, 者를 한정하고 있다. ◈ 勿與辯의 與는 부사어로, ‘함께’, ‘더불어’, ‘같이’다. ◈ 勿與辯의 辯은 용언으로, 아마 ‘논쟁을 벌이다’, ‘토론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29년에 辯而不德/必加於戮, ‘辯하면서 不德하게 굴면, 반드시 형벌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杜預는 辯/猶爭也, ‘辯은 싸움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예의 없는 놈들과는 말을 섞지도 말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2. 故必由其道至/然後接之/非其道則避之, ◈ 故는 ‘이처럼’, ‘이와 같이’라고 해석된다. 是故와 같다. ◈ 必은 부사어로, ‘반드시’다. ◈ 由는 용언으로, 아마 ‘따르다’, ‘행하다’, ‘실천하다’는 말일 것이다. 其道를 받는다. 由其道至는 ‘由其道가 至하다’는 말로, 由其道가 명사절로, 주어 역할을 하고 있다. 《禮記》 「經解」에 是故/隆禮由禮/謂之有方之士//不隆禮不由禮/謂之無方之民, ‘이러한 까닭으로, 禮를 隆하고, 由한다면, 이를 有方한 선비라고 하고, 禮를 隆하지 않고, 由하지 않는다면, 이를 無方한 백성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孔穎達은 由/行也, ‘由는 이행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또, 《書》 「周書 微子之命」에 率由典常/以蕃王室, ‘典常을 率由함으로써 王室을 蕃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率由는 ‘따르다’, ‘행하다’라고 해석된다. ◈ 由其道의 其는 禮法을 이른다. 問, 告, 說, 辯, 즉 묻고, 대답하고, 주장하고, 논쟁할 때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 由其道의 道는 체언으로, ‘도리’다. 올바른 ‘도리’, 禮法에 맞는 ‘도리’를 이른다. 즉, 其道는 ‘묻고, 대답하고, 주장하고, 논쟁할 때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 至는 용언으로, ‘지극하다’, ‘극진하다’는 말이다. 至의 주어는 由其道다. ◈ 然後는 ‘그러한 뒤에’다. 然은 由其道至를 가리킨다. ◈ 由其道至는 직역하면 ‘其道를 由한 것이 至하다’이지만, 여기서는 ‘상대가 其道를 극진하게 이행하다’처럼 의역하였다. ◈ 接之의 接은 용언으로, ‘만나다’, ‘사귀다’, ‘교제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대화에 상대해 준다’라고 해석된다. ◈ 接之의 之는 대화 상대방을 가리킨다. 避之의 之도 그렇다. ◈ 非는 용언으로, ‘아니다’라는 말이다. 其道를 받는다. 상대가 말을 하는 태도가, 말을 할 때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 則은 ‘그러면’이라고 해석된다. ◈ 避之의 避는 용언으로, ‘피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상대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 楊倞은 道不至則不接, ‘말하는 도리가 지극하지 않으면,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무슨 말을 하든, 말할 때의 도리, 즉 禮法을 지키지 않는다면, 상대할 생각도 말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3. 故禮恭而後可與言道之方/辭順而後可與言道之理/色從而後可與言道之致, ◈ 이 節에 나오는 禮恭, 辭順, 色從은 각각 상대방의 ‘禮가 恭해지다’, 상대방의 ‘辭가 順해지다’, 상대방의 ‘色이 從해지다’라는 말이다. 荀子는 바로 앞의 節에서, 상대방이 대화에 대한 禮法을 극진하게 지킨 뒤에야 상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부분의 禮恭, 辭順, 色從이 바로 앞 節의 ‘禮法을 극진하게 지킨 상태’에 해당할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해서 번역해야 하겠다. ◈ 故는 ‘따라서’처럼 해석된다. ◈ 禮는 체언으로, ‘예의’, ‘예법’, ‘예절’, ‘범절’이다. 대화 상대방의 ‘예절’을 이른다. ◈ 恭은 용언으로, ‘공손해지다’, ‘공경스러워지다’는 말이다. 주어는 禮다. ◈ 而後는 ‘~이후’다. ◈ 可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言을 받는다. ◈ 與는 부사어로, ‘함께’, ‘더불어’다. ◈ 言은 용언으로, ‘말하다’, ‘이야기를 나누다’는 말이다. 각각 道之方, 道之理, 道之致를 받는다. ◈ 道는 체언으로, ‘道’다. 儒家적인 ‘道’를 이른다. 앞의 내용 중에서 찾는다면, 原先王이나 本仁義가 이 ‘道’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겠다. ◈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된다. 道之方, 道之理, 道之致의 之가 모두 그렇다. 여기서는 方, 理, 致의 의미에 맞게 해석하였다. ◈ 方, 理, 致의 경우, 方에서 致로 갈수록 더욱 심오한 경지를 이른다. 이에 맞추어 번역해야 하겠다. ◈ 方은 체언으로, 아마 ‘방법’일 것이다. 道之方은 ‘道를 이룰 방법’을 이를 것이다. ◈ 辭는 체언으로, ‘말’이다. 대화 상대방의 ‘말’을 이른다. ◈ 順은 용언으로, 아마 ‘화순해지다’라는 말일 것이다. 앞에 有争氣者勿與辯也, ‘싸울 기색을 비치는 놈과는 논쟁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아마 이 句에 대응되는 말로 보인다. ◈ 理는 체언으로, 아마 ‘모습’, ‘형체’를 이를 것이다. 理는 본래 ‘무늬’, ‘손금’, ‘결’을 이른다. 文과 같다. ‘결’이니까 ‘대체적인 형체’를 뜻할 것이다. 理를 만약 ‘이치’라고 해석한다면, 方, 理, 致 중 致와 의미가 겹친다. 따라서 理를 ‘이치’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荀子》 「正名」에 形體色理/以目異, ‘形體와 色, 理는 눈 때문에 구별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楊倞은 理/文理也, ‘理는 무늬다’라고 하였고, 王引之는 色理/膚理也//榮辱性惡二篇竝云/骨體膚理, ‘色理는 피부의 결이다. 「榮辱」과 「性惡」 두 편에 骨體膚理라는 말이 모두 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荀子는 理를 ‘결’, ‘무늬’라고 사용하였다. 또, 《史記》 「扁鵲倉公列傳」에 君有疾在腠理/不治將深, ‘君은 腠理에 병이 있다. 치료하지 않으면 앞으로 심해질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곧 ‘피부에 병이 있다’는 뜻이다. 즉, 腠理는 ‘피부’, ‘겉’을 이른다. 張守節은 上音湊/謂皮膚, ‘腠는 湊라고 발음한다. 腠理는 皮膚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色은 체언으로, ‘안색’, ‘낯빛’이다. 대화 상대방의 ‘안색’을 이른다. ◈ 從은 용언이다. 從 역시 順처럼 ‘화순해지다’, ‘부드러워지다’라는 말일 것이다. 《禮記》 「孔子閒居」에 氣志既從, ‘氣와 志가 既 從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從/順也, ‘從은 順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從, 順 등이 같은 부류임을 알 수 있다. ◈ 致는 체언으로, ‘지극한 경지’, 즉 ‘이치’를 이른다. 楊倞은 致/極也, , ‘致는 지극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楊倞은 此謂道至而後接之也, ‘이 글에서는 道가 지극해진 뒤에 상대방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학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더라도 禮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기본적인 수준이더라도 禮法에 따라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 하고, 아주 심오한 경지에 대해서도 禮法을 따라야 한다.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상대의 태도가 禮法에 맞지 않다면, 상대해 주지도 말아야 한다. 禮라는 것은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인데, 그 禮 하나 지키지 못하는 놈과 이야기를 나눈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말일 것이다. 禮恭, 辭順, 色從은 모두 禮法을 지켜서 몸가짐이 바로잡힌 모습을 형용하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4. 故未可與言而言謂之傲/可與言而不言謂之隱/不觀氣色而言謂之瞽, ◈ 이 節은 《論語》 「季氏」에 나온다. 「季氏」에는 孔子曰/侍於君子有三愆//言未及之而言謂之躁/言及之而不言謂之隱/未見顏色而言謂之瞽, ‘孔子가 말했다. “君子를 모실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세 가지 있다. 君子의 말이 이르지 않았는데 말을 하기도 하니, 이런 짓을 躁라고 하고, 君子의 말이 이르렀는데도 말을 하지 않기도 하니, 이런 짓을 隱이라고 하며, 君子의 顏色을 살피지 않고 말을 하기도 하니, 이런 짓을 瞽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보다시피 글자가 조금씩 다르며, 주제도 다르다. 《論語》의 주제는 ‘君子를 모실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이다. 《荀子》의 주제는 ‘대화를 나눌 때 취하지 말아야 할 태도’다. 그러나 禮에 맞지 않는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論語》와 《荀子》 모두 같다. 본문을 풀이할 때, 《論語》의 내용을 참고차 기술해 두겠다. ◈ 故는 아마 ‘도리어’라는 말 같다. 禮法에 따라 대화해야 하는데, ‘도리어’ 禮法을 지키지 않는 놈들이 있다는 말이다. 故는 乃와 같다. 《戰國策》 「齊策」에 單何以得罪於先生/故常見惡於朝, ‘單이 선생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故 언제나 조정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냐’라는 말이 있고, 《呂氏春秋》 「季夏紀 制樂」에 我必有罪/故天以此罰我也, ‘내게는 분명 죄가 있으니, 故 하늘이 이 때문에 나를 벌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故는 乃처럼 ‘이에’라고 해석된다. 또, 《莊子》 「徐無鬼」에 先生苦於山林之勞/故乃肯見於寡人, ‘선생은 산림에 산다고 고생하고 있구나. 故乃 과인을 만나려 하였던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故乃는 곧 乃로, ‘이에’다. 故와 乃가 같기 때문에 故乃로 붙여 쓴 것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固故顧」에 수록되어 있다. 이 사례들에서는 故가 乃로 풀이되되, 언제나 ‘이에’라고 번역되지만, 본문에서는 상기한 것처럼 ‘도리어’라고 번역된다. ◈ 未可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未는 부정어다. 可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未可與言의 言을 받는다. ◈ 與는 부사어로, ‘함께’, ‘더불어’다. ◈ 言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未可與言而言, 可與言而不言, 不觀氣色而言의 言들이 모두 그렇다. ◈ 未可與言而言의 而는 역접으로, ‘~한데도’, ‘그런데도’처럼 해석된다. ◈ 謂는 용언으로, ‘표현하다’, ‘말하다’, ‘이르다’는 말이다. ◈ 謂之傲의 之는 未可與言而言을 가리킨다. ◈ 傲는 ‘조급하다’라는 말이다. 傲는 躁의 가차자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不問而告謂之傲의 傲 부분에서, 俞樾이 《論語》 「季氏」를 예로 들면서 이미 설명하였었다. 《論語》 「季氏」에는 傲가 아니라 躁로 되어 있는데, 鄭玄은 躁/不安靜, ‘躁는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邢昺은 謂君子言事/未及於己而輒先言/是謂躁動不安靜也, ‘君子의 言事가 자신에게 이르지 않았는데에도 먼저 말을 하는 짓을 행동이 조급하여 안정되지 않았다고 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傲亦戲傲也//論語曰/言未及而言謂之躁, ‘傲도 마찬가지로 희롱하다는 뜻이다. 《論語》에 “君子의 말이 이르지 않았는데 말을 하기도 하니, 이런 짓을 躁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論語》는 물론 「季氏」를 이른다. 郝懿行은 傲與敖同//敖者/謂放散也, ‘傲는 敖와 같다. 敖는 산만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不言의 不은 부정어다. 言을 한정한다. ◈ 謂之隱의 之는 可與言而不言을 가리킨다. ◈ 隱은 ‘숨기다’라는 뜻이다. 자기 뜻을 ‘숨기다’는 말일 것이다. 《論語》 「季氏」에 대해, 孔安國은 隱匿不盡情實, ‘숨겨 두고 진정을 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邢昺은 謂君子言論及己/己應言而不言/是謂隱匿不盡情實也, ‘君子의 言論이 자신에게 이르렀는데, 자신은 대답만 하고 더 말하지 않는 행위를, 자기 뜻을 숨겨 두고 진정을 다하지 않는다고 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不觀의 不은 부정어다, 觀을 한정한다. ◈ 觀은 용언으로, ‘보다’, ‘살피다’는 말이다. 氣色을 받는다. ◈ 氣色은 체언으로, ‘기색’, ‘낌새’, ‘사정’이다. ◈ 謂之瞽의 之는 不觀氣色而言을 가리킨다. ◈ 瞽는 ‘눈이 보이지 않다’, ‘눈이 삐었다’, ‘눈동자가 막히다’라는 말이다. 瞽는 본래 ‘소경’으로, 곧 ‘장님’을 뜻한다. 분위기상 말을 해야 할 때와,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데, 이런 정황을 살피지 않고 멋대로 말을 해 대니, ‘소경과 같다’라고 한 것이다. 《莊子》 「逍遙遊」에 瞽者無以與乎文章之觀, ‘瞽者는 아름다운 무늬의 모습을 즐길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成玄英은 瞽者/謂眼無眹縫/冥冥如鼓皮也, ‘瞽는 눈이 없어서, 눈동자가 꿰메여 있어서, 막혀 있기가 북의 가죽과 같이 되어 있는 것을 이른다’라고 하였고, 또 盲者/眼根敗也, ‘盲은 시신경이 기능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音古//盲者無目/如鼓皮也, ‘瞽의 音은 古다. 소경 중에 눈이 없어서, 눈이 북의 가죽처럼 되어 있는 경우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論語》 「季氏」에 대해, 周氏는 未見君子顏色所趣嚮/而便逆先意語者/猶瞽也, ‘君子의 안색이나 뜻을 살피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거스르고는 먼저 자기 뜻 대로 말하는 자는 소경과 같다’라고 하였다. 周氏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또, 邢昺은 瞽/謂無目之人也//言未見君子顏色所趣嚮/而便逆先意語者/猶若無目人也, ‘瞽는 눈동자가 없는 사람을 이른다. 이 말은 君子의 안색이나 뜻을 살피지 않고, 편한 대로 거스르고는 먼저 자기 뜻 대로 말하는 자가 눈동자가 없는 사람과 같다고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瞽/無目/不能察言觀色, ‘瞽는 눈동자가 없는 사람이니, 말에 대해 생각하고, 안색을 살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瞽者/不識人之顔色, ‘瞽者는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 《論語》 「季氏」에 대해 邢昺은 此章戒卑侍於尊/審愼言語之法也, ‘이 章에서는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모실 때, 말을 조심하는 방법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라고 하였고, 尹焞은 時然後言/則無三者之過矣, ‘때를 살피고, 그런 뒤에 말을 한다면,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尹焞은 趙宋 사람이다. ◈◈ 蜀虎案 : 傲, 隱, 瞽는 모두 대화할 때 저지르지 말아야 할 예의 없는 행동이자 태도다. 자기가 말할 차례가 아닌데 조급하게 끼어 들어서도 안 되고, 남의 말만 듣고 자기 마음은 숨겨서도 안 되며, 남의 기색을 살피지 않고 멋대로 이야기를 해서도 안 된다. [본문으로]
  5. 故君子不傲/不隱/不瞽/謹順其身, ◈ 故는 ‘따라서’, ‘그러므로’다. ◈ 不은 부정어다. 각각 傲, 隱, 瞽를 한정한다. ◈ 傲는 용언으로, ‘조급하게 굴다’는 말이다. 躁와 같다. ◈ 隱은 용언으로, 속내를 ‘숨기다’는 말이다. ◈ 瞽는 용언으로, ‘눈이 삔 듯 행동하다’는 말이다. ◈ 謹順은 용언으로, 아마 ‘삼가다’, ‘조심하다’는 말일 것이다. 其身을 받는다. 예법을 거스르지 않도록 자신을 ‘삼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謹은 ‘조심하다’, ‘삼가다’는 말이다. 《說文解字》 「言部」에 謹/愼也//从言堇聲, ‘謹은 삼가다는 뜻이다. 言이 들어 있고, 堇이라고 발음한다’라고 되어 있다. 順 역시 ‘삼가다’는 말일 것이다. 《前漢紀》 「孝平皇帝紀」에 爾謹順事之, ‘너는 謹順하면서 之를 섬겨라’라는 말이 있는데, 이 謹順 역시 ‘삼가다’는 말이다. 謹順을 붙여 쓴 까닭은, 謹과 順의 의미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에 대해, 盧文弨는 順/宋本作愼//今從元刻/與呂東萊讀詩記所引同, ‘順은 《宋本》엔 愼이라고 되어 있다. 나는 《元刻》을 따랐다. 《元刻》은 呂東萊의 《讀詩記》에 인용된 말과 똑같이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謹과 愼은 같다. 《說文解字》에 기재되어 있다. 呂東萊는 趙宋의 呂祖謙을 이른다. 《讀詩記》는 《呂氏家塾讀詩記》다. 인용문은 「小雅 白華之什」의 「蓼蕭」를 해설하는 말 중에 기재되어 있다. ◈ 其身은 君子 ‘자기 자신’을 이른다. 其는 君子를 가리킨다. ‘君子의’처럼 해석된다. 身은 체언으로, ‘자신’이다. 郝懿行은 謹順其身/身/猶人也, ‘謹順其身의 身은 다른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郝懿行은 其身을 대화 상대방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하였는데, 身이 일반적으로 ‘자신’을 의미하는데다, 身을 ‘상대방’이라고 해석하면 謹順其身은 ‘상대방을 삼간다’는 말이 되므로,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 郝懿行은 此謂君子言與不言/皆順其人之可與不可/所謂時然後言/人不厭其言也, ‘이 말은 君子가 이야기를 나눌지, 나누지 않을지를, 모두 상대방이 될지, 되지 않을지에 따라 결정한다는 말이다. 소위 “때가 맞은 뒤에 말을 해야, 다른 사람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郝懿行이 인용한 時然後言/人不厭其言은 宋基采가 지적하였듯 《論語》 「憲問」에 나온다. ◈◈ 蜀虎案 : 君子는 언제나 禮法을 지키기 때문에, 傲, 隱, 瞽처럼 예의 없이 행동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삼간다는 말이다. 郝懿行은 君子가 남의 태도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지, 그렇지 않을지를 결정한다고 하였는데, 身에 대한 해석은 다를지라도, 글의 의미는 잘 이해한 듯하다. [본문으로]
  6. 詩曰, ◈ 詩는 체언으로, 《詩》, 즉 《詩經》을 이른다. 인용된 詩는 「小雅 桑扈之什」의 「采菽」이다. 楊倞은 詩/小雅采菽之篇, ‘이 詩는 「小雅」의 「采菽」이다’라고 하였다. ◈ 曰은 말을 표현하거나, 다른 곳의 글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7. 匪交匪舒/天子所予, ◈ 匪交의 匪는 彼의 가차자로, ‘저’라는 말이다. 즉, 匪交는 ‘저 交’, ‘저 사람들의 交’라는 뜻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盧文弨가 잘 설명해 두었다. 《詩》에는 匪가 彼로 되어 있다. 이 彼는 ‘天子를 朝見하러 온 제후들’을 가리킨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匪交/當爲彼交, ‘匪交는 마땅히 彼交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匪/亦有彼義//左傳襄二十七年/引詩桑扈匪交匪敖/成十四年/引仍作彼交匪敖//襄八年/引小旻如匪行邁謀/杜注/匪/彼也, ‘匪에도 마찬가지로 彼라는 뜻이 있다. 《左傳》 「襄」 27년에 《詩》 「桑扈」를 匪交匪敖라고 인용해 두었는데, 「成」 14년에는 같은 글을 인용하면서 彼交匪敖라고 해 두었다. 「襄」 8년에는 「小旻」를 인용하며 如匪行邁謀라고 해 놓았는데, 杜預는 “匪는 彼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左傳》 「襄」은 《春秋左氏傳》 「襄公」이다. 「桑扈」는 「小雅 桑扈之什」에 속해 있다. 「成」은 「成公」이다. 「小旻」는 「小雅 小旻之什」에 속해 있다. 한편 王引之는 此引詩匪交匪舒/正申明上文之不傲不隱不瞽/則作匪者正字/作彼者借字也, ‘여기서 인용한 《詩》의 匪交匪舒는 앞의 글에서 不傲, 不隱, 不瞽라고 한 말을 다시 밝히는 말이니, 匪가 正字이고, 彼가 가차자다’라고 하였다. 王引之는 匪舒의 匪처럼, 匪交의 匪도 부정어라고 해석했다. 王引之가 이렇게 본 까닭은 交에 대한 王引之의 주석에 설명해 놓았다. ◈ 交는 체언으로, ‘교분’, ‘교제’를 이른다. 「采菽」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 보면, 제후들이 天子를 조회하러 오는데, 제후들이 交를 舒, 즉 소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天子가 상으로 물건들을 하사해 준다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交는 제후와 제후 사이의 ‘교제’를 이를 수도 있고, 天子와 제후 사이의 ‘교제’를 이를 수도 있겠다. 내 생각에는 제후들이 天子를 조회하러 오는 禮를 交라고 표현한 듯하다. 즉, 「采菽」 원전에서의 의미는 ‘朝見’에 가까울 것이다. 朱熹는 交/交際也, ‘交는 교제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荀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에 이 詩를 적용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즉,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禮法을 소홀히 않는 일’이 바로 이 글에서 交의 의미다. 여기서는 ‘교분’이라고 번역하였다. 본문에 대해, 王引之는 匪交의 匪를 부정어로 보고, 交를 舒처럼 ‘태만하다’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면 匪交匪舒는 ‘태만하지 말 것이요, 소홀히하지 말 것이다’라는 말이 된다. 이 설 역시 타당하나, 본래 출전인 「采菽」 본문이 이렇게 해석될 수가 없고, 또 《荀子》 본문 또한 ‘교제’, ‘교분’이라는 의미가 들어가야 말이 더 분명해지므로, 나는 王引之의 설을 따르지 않았다. 그 설은 다음과 같다. 王引之는 交/讀爲姣//廣雅曰/姣[音絞]/侮也///言不侮慢/不怠緩也//說見經義述聞小雅桑扈篇, ‘交는 姣로 보아야 한다. 《廣雅》에 “姣는[王先謙의 부연 : 絞라고 읽는다.] 업신여기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본문의 인용구는 거만 떨지 않고, 나태하게 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설은 《經義述聞》의 「小雅」 「桑扈」 부분에 나와 있다’라고 하였다. 《經義述聞》은 王引之가 자신과 王念孫의 설을 묶어 기술한 책이다. 논의가 다소 길지만, 참고차 《經義述聞》의 해당 부분을 인용해 둔다. 《經義述聞》에서 王引之는 交之言姣也//廣雅曰/姣/侮也///字通作佼//淮南覽冥篇/鳳皇之翔至德也/雷霆不作/風雨不興/川谷不澹/草木不搖/而燕雀佼之/以爲不能與之爭於宇宙之閒[髙注訓爲佼健失/辯見讀書雜志]///言燕雀輕侮鳳皇也/然則彼交匪敖者/匪交匪敖也//匪交匪敖者/言樂胥之君子/不侮慢不驕傲也//彼交匪紓者/匪交匪紓也//匪交匪紓者/言來朝之君子/不侮慢不怠緩也//襄二十七年左傳/公孫段賦桑扈/趙孟曰/匪交匪敖/福將焉往[桑扈云/兕觥其觩/旨酒思柔/匪交匪敖/萬福來求///猶絲衣云/兕觥其觩/旨酒思柔/不吳不敖/胡考之休]///荀子勸學篇/君子不傲不隱不瞽/謹順其身///引詩曰/匪交匪紓/天子所予///是彼交作匪交之明證//交或作傲//成十四年傳引詩/彼交匪傲[彼/匪也/不也//交/姣也/侮也//杜注以爲彼之交於事/失之]///漢書五行志作/匪儌匪傲///又其一證矣//乃韓詩外傳引詩/彼交匪紓/而釋之曰/言必交吾志/然後予///則巳誤解爲交接之交//而應劭注漢書/匪儌匪傲/又以爲儌訐/顏師古又以爲傲倖/皆與匪敖之義不倫//旨酒思柔之時但慮其侮慢而巳/何儌訐傲倖之有乎, ‘交는 姣라는 뜻이다. 《廣雅》에는 “姣는 업신여기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글자는 佼와 통용해서 사용되었다. 《淮南》 「覽冥」에는 “鳳皇은 지극한 덕에 날아 드는데, 이 때는 천둥과 번개가 치지 않고, 비와 바람도 일어나지 않으며, 개천이나 계곡물도 넘치지 않고, 초목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제비와 참새는 鳳皇을 佼하면서, 온세상에 자신들과 겨룰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王引之의 부연 : 高誘는 佼를 健이라고 풀이했는데, 틀렸다. 이에 대한 논의는 《讀書雜志》에 나와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제비와 참새가 鳳皇을 업신여긴다는 뜻이다. 그러한 즉, 彼交匪敖라는 말은 匪交匪敖라는 말이요, 匪交匪敖라는 말은 즐거워하는 군자가 업신여기거나 교만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彼交匪紓라는 말은 匪交匪紓라는 뜻이요, 匪交匪紓라는 말은 朝見하러 온 君子가 업신여기거나 태만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襄」 27년에 대한 《左傳》에는 “公孫段이 「桑扈」를 읊자, 趙孟이 ‘匪交匪敖하니 福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하였다[王引之의 부연 : 「桑扈」에는 兕觥其觩/旨酒思柔/匪交匪敖/萬福來求라고 되어 있는데, 「絲衣」에 兕觥其觩/旨酒思柔/不吳不敖/胡考之休라고 되어 있는 말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荀子》 「勸學」에는 “君子는 조급하게 굴지도 않고, 속내를 숨기지도 않으며, 눈이 삔 것처럼 굴지도 않으니, 자신을 삼간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詩》를 인용하면서 匪交匪紓/天子所予라고 하였다. 이 글은 彼交가 匪交라고 되어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交가 傲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成」 14년의 《傳》에서 《詩》를 인용하면서 彼交匪傲라고 해 두었다.[王引之의 부연 : 彼는 匪라는 뜻이니, 不이라는 말이다. 交는 姣라는 뜻이니, 업신여긴다는 뜻이다. 杜預는 “일에 대한 저 사람의 交”라고 풀이하였는데, 틀렸다.] 《漢書》 「五行志」에는 匪儌匪傲라고 되어 있으니, 또 하나의 증거겠다. 그런데 《韓詩外傳》에는 《詩》를 인용하면서 彼交匪紓라고 하였고, 이를 “반드시 나의 뜻을 交한 뒤에 予한다는 말이다”라고 풀이하였으나, 交를 交接의 交로 오해하였을 뿐이다. 또, 《漢書》에 대해 應劭는 匪儌匪傲를 儌訐라고 풀이하였고, 顏師古는 또 傲倖라고 풀이했는데, 모두 匪敖를 잘못 풀이하였다. 좋은 술을 맛있게 마시고 있으니, 교만해질까 염려하였을 뿐이다. 어찌 儌訐하거나 傲倖할 것이라고 걱정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淮南》 「覽冥」은 《淮南子》 「覽冥訓」이다. 《讀書雜志》는 王念孫의 저작이다. 「襄」은 「襄公」이다. 《左傳》은 《春秋左氏傳》이다. 「絲衣」는 《詩》 「頌 周頌」에 속해 있다. 「成」은 「成公」이다. 《傳》은 《春秋左氏傳》이다. 한편, 宋基采는 俞樾이 交를 絞라고 보아야 한다고 한 설을 인용해 두었다. 絞는 ‘묶다’는 말이므로, 匪交는 ‘묶지 않다’는 말이 된다. 宋基采는 이를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다’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이 설은 俞樾의 《群經平議》나 《諸子平議》에 모두 기재되어 있지 않아, 宋基采가 다른 설과 착각한 것이 아닌가 의뭉스럽다. ◈ 匪舒의 匪는 부정어다. 不과 같다. 舒를 한정한다. ◈ 舒는 용언으로, ‘느슨하게 하다’, ‘느릿느릿 하다’, ‘대충대충 하다’는 말이다. 紓의 가차자다. 《詩》에는 舒가 紓로 되어 있다. 毛亨과 朱熹는 紓/緩也, ‘紓는 느슨하다는 뜻이다’이라고 하였고, 鄭玄도 紓緩, ‘느슨하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陸德明은 紓音舒, ‘紓는 舒라고 읽는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匪舒/宋本與詩考合/元刻及讀詩記所引皆作匪紓, ‘匪舒는 《宋本》과 《詩考》에는 그렇게 되어 있고, 《元刻》과 《讀詩記》에서 인용한 글에는 모두 匪紓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詩考》에 대해 宋基采는 王應麟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讀詩記》는 呂祖謙의 《呂氏家塾讀詩記》다. ◈ 天子는 체언으로, ‘天子’다. 중국의 ‘황제’를 이른다. ◈ 所予는 ‘준 것’이다. 所는 ‘~한 것’이다. 予는 ‘주다’는 말이다. 予는 與와 같다. 鄭玄은 賜予, ‘내리다’라고 풀이하였고, 陸德明과 朱熹는 모두 予音與, ‘予는 與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아마 발음이 비슷해서, 고대에는 이렇게 사용했던 모양이다. 주석을 참고하면, 楊倞 역시 賜予, ‘내리다’라고 풀이하였다. ◈◈ 楊倞은 言彼與人交接/不敢舒緩/故受天子之賜予也, ‘저들이 사람들과 교제할 때, 감히 소홀하게 하지 않았기에, 天子가 내리는 물품을 받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盧文弨는 此段自昔者瓠巴鼓瑟起至此/皆論爲學之效與爲學之要/末亦引詩以證之/應爲一節//宋本分段頗不明/今更正, ‘이 문단은 昔者瓠巴鼓瑟부터 여기까지로, 모두 공부의 효험과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끝부분에서는 또 《詩》를 인용해서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응당 하나의 節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宋本》에서는 문단을 나누어 놓았는데, 상당히 불분명하므로, 나는 다시 고쳤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앞에 나온 昔者瓠巴鼓瑟에서 이 부분까지의 내용이 동일하므로, 한 문단으로 묶어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의 경우, 積土成山에서 昔者瓠巴鼓瑟이 있는 節인 爲善不積邪/安有不聞者乎까지를 한 문단으로 보았고, 그 뒤로는 學惡乎始에서 在天地之間者畢矣까지를 한 문단, 그 뒤로 君子之學也/入乎耳에서 君子如嚮矣까지를 한 문단, 또 그 뒤로 學莫便乎近其人에서 雖察辯/散儒也까지를 한 문단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問楛者/勿告也에서 이 부분까지를 한 문단, 百發失一에서 끝까지를 한 문단으로 보았다. 「勸學」이 모두 공부에 대한 글이기는 하지만, 따져 보면 내용이 꽤 세세하게 나뉘어 있다. ◈◈ 《詩》에 대해 鄭玄은 彼與人交接/自逼束如此/則非有解怠紓緩之心/天子以是故賜予之, ‘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여, 저절로 이와 같은 복록이 약속되었으니, 태만하고 게으른 마음을 품지 않아서, 天子가 이런 까닭에 물품들을 내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朱熹는 言諸侯服此芾偪/見於天子/恭敬齊遬/不敢紓緩/則爲天子所與/而申之以福祿也, ‘제후가 이 芾과 偪을 입고, 天子를 알현하는데, 그 태도가 공경스럽고, 정돈되어 있어서, 감히 느슨해지지 않으니, 天子가 기뻐하게 되어, 福祿을 가지고 제후들을 申하였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楊倞이 설명하였듯, 이 詩는 《詩》 「小雅 桑扈之什」의 「采菽」이다. 원래 詩에서 君子는 天子를 朝見하려는 제후들을 가리킨다. 제후들이 天子를 朝見하면, 天子는 이에 대해 回謝를 내려야 한다. 이것이 관습이었다. 「采菽」은 바로 朝見과 回謝에 대한 詩이다. 인용된 匪交匪舒/天子所予 중 天子所予가 回謝를 뜻한다. 그러나 荀子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데에 예의범절을 갖추는 일을 빗대기 위해 이 詩를 인용했다. 「采菽」에서는 제후들이 禮法에 맞게 天子를 朝見하였기 때문에 天子가 상을 내렸다면, 荀子는 사람들이 禮法에 맞게 대화를 나눈다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취지로 이 詩를 차용한 것이다. 이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본문으로]
  8. 此之謂也, ◈ 此는 君子가 대화를 나눌 때 禮法을 따른다는 점을 가리킨다. 이 부분의 주제다. ◈ 之는 도치를 표현하는 말이다. 원래는 謂此也다. ◈ 謂는 용언으로, ‘이르다’, ‘뜻하다’, ‘표현하다’는 말이다. 謂의 주어는 생략되어 있는데, 바로 앞에서 인용한 「采菽」이다. [본문으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