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순자 - 1 - 권학 - 6 - 공부는 무엇으로 시작하고 어떻게 끝내야 할까

2021. 9. 24. 10:10순자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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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보기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원래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숫자로 바꾸고 하단으로 내려 두었습니다. 원래 글은 물론 원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주석을 하단으로 내리니까 정작 중요한 주석과 중요하지 않은 주석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어 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에다가 '*' 같은 것으로 표시해 둘까, 혹은 다르게 어떻게든 표시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느니 원안을 보존하고 새로 글을 파 두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기가 편한 것이 우선이냐, 주석이 우선이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 편한 방식에 맞게 글을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주석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습니다.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李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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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0년 5월 1일 16시 46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6

 

순자 - 1 - 권학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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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본문과 함께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1

 

순자 - 1 - 권학 - 6 - 공부는 무엇으로 시작하고 어떻게 끝내야 할까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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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惡乎始?惡乎終?曰:其數則始乎誦經,終乎讀禮;其義則始乎爲士,終乎爲聖人。眞積力久則入,學至乎沒而後止也。故學數有終,若其義則不可須臾舍也。爲之,人也;舍之,禽獸也。

故書者,政事之紀也;詩者,中聲之所止也;禮者,法之大分,類之綱紀也。故學至乎禮而止矣。夫是之謂道德之極。禮之敬文也,樂之中和也,詩、書之博也,春秋之微也,在天地之間者畢矣。

 

 

공부는 무엇으로 시작하고, 어떻게 끝내야 할까.[각주:1] [그 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공부 방법을 생각하자면 《경》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예》를 읽는 것으로 마쳐야 하고[각주:2], 공부의 목적을 생각하자면 선비가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성인이 되는 것으로 마쳐야 한다.[각주:3] [그러면 얼마나 공부해야 성인이 될 수 있을까.] 진정 오랫동안 [공부에] 매진해야만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공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공부라는 것은 죽은 뒤에야 끝나는 법이다.[각주:4] 따라서, 공부의 방법에는 끝이 있지만, 앞의 말과 같이 공부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잠시라도 [공부를 멈추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공부하면 인간이 되고, 공부하지 않으면 금수가 된다.[각주:5]

 

[이번에는 공부의 방법, 즉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무릇 《서》는 정사의 요점[을 적어 둔 글]이요, 《시》는 올바른 가락을 기록해 둔 글이요, 《예》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법도의 대체적인 요점과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관행의 요체[에 대해 적어 둔 글]이다.[각주:6] 그래서 [내가] 공부는 [《시》와 《서》를 암송하면서 시작하되,] 《예》[를 배우기]에 이르면 끝난다고 했던 것이다.[각주:7] 이 글들은 [세상을] 교화하는 [도리의] 근본이다.[각주:8] 《예》에 담긴 예법과 제도, 《악》에 담긴 조화, 《시》와 《서》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 [그리고] 《춘추》의 미묘한 취지에는 온세상 만물과 만사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각주:9]

 

 

  1. 學惡乎始/惡乎終, ◈ 學은 체언으로, ‘학문’, ‘공부’다. ◈ 惡는 의문사다. ‘오’라고 읽는다. ‘어디’, ‘무엇’, ‘어떻게’처럼 해석할 수 있겠다. 何, 奚 등과 같다. ◈ 乎는 ‘~에서’다. 惡乎는 본래 乎惡가 되어야 하겠으나, 惡가 의문사이기 때문에 어순이 도치되었다. 惡乎는 ‘어디에서’라는 말이다. ◈ 始는 용언으로, ‘시작하다’는 말이다. ◈ 終은 용언으로, ‘끝내다’, ‘마치다’는 말이다. ◈◈ 楊倞은 假設問也, ‘질문을 가정하였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荀子는 이 부분에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음으로써 공부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운동을 한답시고 잘못된 자세로 몸을 굴리다가는 오히려 몸이 망가진다. 이처럼, 공부에도 적절한 방법이 있다. [본문으로]
  2. 曰//其數則始乎誦經/終乎讀禮, ◈ 曰은 용언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뜻이다’처럼 해석된다. ◈ 其數의 其는 學, 즉 ‘공부’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다. ‘공부의’처럼 해석된다. ◈ 數는 체언으로, ‘방법’이다. 楊倞은 數/術也, ‘數는 방법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則은 아마 ‘~는’처럼, 주격 조사로 보아야 할 듯하다. 之와 같다. 즉, 其數則은 ‘공부의 방법은’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공부 방법을 생각하자면’이라고 의역하였다. 則은 之와 통용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東略之不知/西則否矣, ‘동쪽을 정벌하는 일은 모르겠으나, 서쪽은 정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고, 《國語》 「晉語」에 華則榮矣/實之不知, ‘겉은 화려하였지만, 실체는 모르겠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之과 則은 모두 ‘~는’과 같이 사용되었으며, 같은 형식의 句에서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則과 之가 옛날에 서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之」에 수록되어 있다. ◈ 始는 용언으로, ‘시작하다’는 말이다. ◈ 始乎誦經의 乎는 於와 같다. ‘~에서’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誦經을 받는다. 終乎讀禮의 乎도 그렇다. 명사구인 讀禮를 받는다. ◈ 誦은 용언으로, 아마 ‘외우다’, ‘암송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經을 받는다. ◈ 經은 체언으로, ‘《경》’이다. 아마 《詩》와 《書》를 이르는 듯하다. 楊倞은 經/謂詩書, ‘經은 《詩》와 《書》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終은 용언으로, ‘마치다’, ‘끝내다’라는 말이다. ◈ 讀은 용언으로, ‘읽다’는 말이다. ◈ 禮는 체언으로, ‘《예》’다. 아마 《儀禮》를 뜻하거나, 《禮記》, 《大戴禮記》의 편을 이르는 말 같다. 楊倞은 禮/謂典禮之屬也, ‘禮는 「典禮」 같은 부류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典禮/疑當是曲禮之誤, ‘「典禮」는 「曲禮」가 잘못된 말이 아닐까 의뭉스럽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經은 본래 천을 짤 때 사용하는 ‘날실’을 뜻한다. 천을 짤 때는 가로, 세로로 실을 배치하고 얽는데, 가로줄을 ‘씨실’, 세로줄을 ‘날실’이라고 한다. 직조 과정에서, 씨실은 움직이지만, 날실은 움직이지 않는다. 즉, 불변적이다. 불변적이니, 곧 ‘진리’를 뜻한다. 아마 이런 취지에서 ‘날실’을 뜻하는 經을 ‘經文’이라고 한 듯하다. 일반적으로 經文, 즉 經이란, ‘聖人의 글’을 이른다. 그래서 聖經賢傳, ‘聖人이 經을 쓰면, 賢人이 傳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관념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일찍 보면 戰國時代나 漢代, 아무리 늦어도 南朝 시기에는 정착된 듯하다. 《論衡》 「書解」에는 聖人作其經/賢者造其傳/述作者之意/採聖人之志/故經須傳也, ‘聖人은 經을 만들고, 賢者는 傳을 짓는다. 述作하는 사람의 意는 聖人의 志를 채록한 것이니, 그래서 經은 傳을 須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論衡》은 後漢의 王充이 지은 책이다. 뒷내용을 읽어 보면, 속칭 ‘經’이라는 것이 절대불변한 글이라는 점에 대해 王充이 비판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당대 사람들에게 이런 관념이 퍼져 있었다는 점은 알 수 있겠다. 한편, 西晉의 張華가 지은 《博物志》에는 文籍//考/聖人制作曰經/賢者著述曰傳, ‘文籍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생각해 보면, 聖人이 制作한 것을 經이라고 하고, 賢者가 著述한 것을 傳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또, 이 보다 시간이 조금 지나, 蕭梁 시대의 劉勰이 지은 《文心雕龍》에도 經에 대한 말이 나온다. 「論說」에는 聖哲彝訓曰經/述經敘理曰論, ‘聖哲이 교훈을 내린 글을 經이라고 하고, 經을 풀이하여 이치에 대해 진술한 글을 論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總術」에는 予以爲/發口爲言/屬翰曰筆/常道曰經/述經曰傳, ‘나는 입에서 나오는 것을 言, 서간 같은 부류를 筆, 불변적인 도리를 經, 經을 기술한 글을 傳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이 있다. 상기하였고, 또 王充, 張華, 劉勰이 기술한 것처럼, 經은 ‘聖人의 글’을 이른다. 漢나라의 경우, 秦나라의 焚書坑儒 같은 정책으로 단절되었던 儒家의 맥을 이어, 西漢 초에 ‘經’과 ‘傳’들을 정리하고, 분석하며, 또 연구하고, 민간에 보급하였었다. 이 과정에서 經의 범주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漢書》 「武帝紀」에 置五經博士, ‘五經博士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고, 또 《漢書》 「百官公卿表 上」에 武帝建元五年初置五經博士, ‘武帝 建元 5년 초에 五經博士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五經이란, 《詩》, 《書》, 《易》, 《禮》, 《春秋》를 이른다. 여기서 《禮》는 아마 《儀禮》를 이르는 말 같다. 이 글들은 모두 ‘聖人’인 孔子 혹은 孔子의 직속 제자들의 손을 거쳐 정리되거나 찬술되었다. 그래서 ‘經’인 것이다. 이 외에도 《樂》이 있었으나, 《樂》은 秦代를 거치며 소실되었다. 다만, 經의 범주는 점차 넓어져, 趙宋 시대에는 《春秋》에 대한 주석인 《春秋左氏傳》, 《春秋公羊傳》, 《春秋穀梁傳》을 각각 經으로 보고, 《禮》를 다시 《禮記》, 《周禮》, 《儀禮》로, 그리고 여기에다 《孝經》, 《論語》, 《爾雅》, 《孟子》를 합해, 총 13개의 책들을 經으로 보았다. 이것이 十三經이다. 그러면 荀子가 《經》이라고 부른 책은 무엇이었을까. 荀子는 戰國時代의 가장 마지막 시기를 살았다. 荀子 역시 孔子를 聖人이라고 생각하였겠으나, 戰國時代에 孔子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직 ‘실재하는 사람’으로 존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저 13경 중, 荀子가 《經》으로 생각했을 만한 책은, 아마 孔子의 이전 시대부터 전해 오던 글들이라고 생각해야 할 듯하다. 그러면 《詩》, 《書》, 《易》이 남는다. 그런데 이 중 《易》은 점술서이므로, 《詩》와 《書》만 남는다. 또, 사실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 荀子가 《詩》와 《書》를 언급하고 있는 점을 보면, 본문의 《經》이 《詩》와 《書》임이 또한 분명하다. ◈◈ 蜀虎又案 : 荀子가 읽는다고 한 《禮》는 《禮記》가 아니다. 《禮記》의 어떤 편일 수는 있어도, 《禮記》 그 자체는 아니다. 漢나라 때 만들었다는 五經博士는 《詩》, 《書》, 《易》, 《禮》, 《春秋》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관직이었다. 그런데 이 중 《禮》도 우리가 아는 《禮記》가 아니다. 《漢書》 「百官公卿表 上」에 武帝建元五年初置五經博士, ‘武帝 建元 5년 초에 五經博士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建元 5년은 기원전 137년, 136년을 이른다. 《禮記》는 《小戴禮記》를 이르는데, 이 책은 小戴, 즉 戴聖이 그 때까지 남아 있던 《禮》에 대한 「記」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이 외에 戴聖의 삼촌인 戴徳이 만든 《大戴禮記》도 존재한다. 그런대 戴德과 戴聖은 모두 西漢 宣帝 때 사람이다. 宣帝는 武帝의 증손자다. 따라서 武帝 때 만든 五經博士가 미래에 만들어진 《禮記》를 관장할 수는 없으니, 五經博士의 《禮》는 《禮記》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荀子가 《禮》라고 한 글도 《禮記》일 수 없다. 물론, 《禮記》를 구성하는 편들은 武帝 때도 존재하였을 것이고, 또 戰國時代에도 존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荀子가 《禮》라고 한 글은 《禮記》의 편들일 수는 있다. 또, 이와 별개로, 《禮記》, 《周禮》, 《儀禮》를 三禮라고 한다. 상기하였듯 《禮記》와 《大戴禮記》는 西漢 宣帝 때야 성립되었다. 《周禮》는 戰國時代 말기 즈음에 성립되었다고 생각한다. 《儀禮》는 天子와 諸侯, 卿, 大夫, 士들이 지켜야 할 禮法에 대해 기술한 책이었다.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孔子의 제자였던 子夏가 남긴 傳, 즉 주석이 남아 있어, 아무리 늦어도 子夏 생전에는 책으로 존재하였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이 점을 가지고 미루어 볼 때, 五經博士가 주관하였다는 《禮》도 아마 《儀禮》일 가능성이 크고, 또 荀子가 《禮》라고 한 글도 바로 《儀禮》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荀子는 禮, 즉 禮法의 형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점도 《儀禮》의 내용과 통하는 면이 있다. [본문으로]
  3. 其義則始乎爲士/終乎爲聖人, ◈ 其義의 其는 學, 즉 ‘공부’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공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공부’라고 해석하였다. ◈ 義는 체언으로, ‘의의’, ‘명분’, ‘목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儀의 가차자로 보고,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목적’이라고 번역하였다. 楊倞은 義/謂學之意, ‘義는 공부의 의미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則은 아마 ‘~는’처럼, 주격 조사로 보아야 할 듯하다. 之와 같다. 즉, 其義則은 ‘공부의 목적은’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공부의 목적을 생각하자면’이라고 의역하였다. 則이 之와 통용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其數則始乎誦經의 則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始는 용언으로, ‘시작하다’는 말이다. ◈ 始乎爲士의 乎는 於와 같다. ‘~에서’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爲士를 받는다. 終乎爲聖人의 乎도 그렇다. 명사구인 爲聖人을 받는다. ◈ 爲士의 爲는 용언으로, ‘~가 되다’는 말이다. 爲聖人의 爲도 그렇다. 각각 士와 聖人을 받는다. ◈ 士는 체언으로, 학문을 닦는 ‘선비’를 이른다. ◈ 終은 용언으로, ‘마치다’, ‘끝내다’라는 말이다. ◈ 聖人은 체언으로, ‘성인’이다. ◈◈ 楊倞은 言在乎修身也, ‘자신을 수양하는 데 달려 있다는 점을 설명하였다’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荀書以士君子聖人爲三等/修身非相儒效哀公篇可證/故云始士終聖人, ‘荀子의 글에서는 사람을 士, 君子, 聖人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이 점은 「修身」, 「非相」, 「儒效」, 「哀公」을 가지고 증명할 수 있다. 그래서 士에서 시작해서 聖人이 되고 끝난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修身」, 「非相」, 「儒效」, 「哀公」은 모두 《荀子》의 편들이다. 「修身」에는 好法而行/士也//篤志而體/君子也//齊明而不竭/聖人也, ‘法을 好하고 行하면 士다. 志를 篤하고 體하면 君子다. 齊明하고 竭하지 않으면 聖人이다’라는 말이 있다. 「非相」에는 小辯而察/見端而明/本分而理//聖人士君子之分具矣, ‘小辯함으로써 察하고, 見端함으로써 明하며, 本分함으로써 理한다. 이로써 聖人과 士君子가 구분된다’라는 말이 있다. 「儒效」에는 彼學者/行之/曰士也//敦慕焉/君子也//知之/聖人也,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렇다. 行하면 士라고 할 수 있다. 敦하고 慕하면 君子다. 知하면 聖人이다’라는 말이 있다. 「哀公」에는 人有五儀//有庸人/有士/有君子/有賢人/有大聖,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모습이 있다. 庸人이 있고, 士가 있으며, 君子가 있고, 賢人이 있으며, 大聖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王先謙이 든 문장들은 바로 이 것들일 것이다. ◈◈ 蜀虎案 : 본래 士는 春秋戰國時代의 봉건적 신분 중 하나였다. 가장 위에 天子가 있고, 그 아래에 諸侯가 있으며, 諸侯 아래에 卿과 大夫들이 있고, 大夫 아래에 士가 있다. 즉, 士는 본래 大夫 아래에서 일하던 하급 관리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儒學의 영향으로, 점차 학문과 수양에 매진하는 ‘선비’로 의미가 바뀌었다. 이 글에 나온 士는 ‘선비’를 이른다. 또, 이 글에서 荀子는 공부의 목적이 聖人이 되는 데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 점 역시 살펴 볼 만하다. [본문으로]
  4. 眞積力久則入/學至乎沒而後止也, ◈ 眞은 부사어로, ‘진정’, ‘정말’, ‘참으로’라는 말이다. 楊倞은 眞/誠也, ‘眞은 진정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積은 용언으로, ‘쌓다’, ‘모으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힘을 ‘지속적으로 투입하다’, ‘매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力을 받는다. ◈ 力은 체언으로, ‘힘’이다. 즉, 積力은 ‘힘을 지속적으로 투입하다’는 말이니, 곧 ‘매진하다’는 말이 된다. 積力은 명사구로, 용언 久의 주어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積力久은 ‘매진하기를 오래 하다’는 말이 되지만, 여기서는 ‘오랫동안 매진하다’처럼 의역하였다. 楊倞은 力/力行也, ‘力은 힘껏 실천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久는 용언으로, ‘오래 하다’는 말이다. ◈ 則은 ‘그러면’이다. ◈ 入은 용언으로, 어떤 경지나 수준에 ‘들다’, ‘오르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聖人의 경지에 ‘오르다’는 말일 것이다. ◈ 學은 체언으로, ‘공부’, ‘학문’이다. ◈ 至는 용언으로, 어떤 상황에 ‘이르다’, 어떤 상황이 ‘되다’는 말이다. ◈ 至乎沒而後의 乎는 ‘~에’다. 於와 같다. 沒而後를 받는다. ◈ 沒은 관형어로, ‘죽은’이다. 而後를 한정한다. 生年, 沒年이라고 할 때의 沒과 같다. ◈ 而後는 어떤 사건 ‘이후’, ‘뒤’다. 즉, 沒而後는 ‘죽은 뒤’가 된다. ◈ 止는 용언으로, ‘멈추다’, ‘그치다’, ‘끝나다’는 말이다. ◈◈ 楊倞은 誠積力久/則能入於學也//生則不可怠惰, ‘진정 오랫동안 매진한다면, 학문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공부에 대해, 살아 있는 동안 나태하게 굴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句는 학문에 입문하는 일이라고 보면 말이 안 되고, 聖人의 경지에 오르는 일에 대해 설명하는 말이라고 이해해야 말이 된다. 겨우 학문에 ‘입문’하는데,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蜀虎案 :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전에 우리 나라에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 《20대, 공부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따위의 책들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들에서 말하는 ‘공부’는 荀子의 공부와 의미가 아마 달랐을 것이다. ‘공부’는 정작 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해라’라는 책만 ‘공부’한다고, 聖人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오르지 못할 것이다. [본문으로]
  5. 故學數有終/若其義則不可須臾舍也//爲之/人也/舍之/禽獸也, ◈ 故는 ‘따라서’다. ◈ 學數는 ‘공부의 방법’, ‘공부 방법’이다. 學은 관형어로, ‘공부의’, ‘학문의’다. 數를 한정한다. 數는 체언으로, ‘방법’이다. ◈ 有는 용언으로, ‘있다’, ‘존재하다’라는 말이다. ◈ 終은 체언으로, ‘끝’이다. ◈ 若은 아마 若此로 보고, ‘이와 같이’, ‘이처럼’이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眞積力久則入/學至乎沒而後止也의 내용을 이어 받는 말이기 때문이다. ◈ 其義의 其는 學, ‘학문’, ‘공부’를 가리킨다. ◈ 義는 체언으로, ‘의의’, ‘목적’이다. ◈ 不可는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不은 부정어다. 可는 ‘괜찮다’는 말이다. ◈ 須臾는 ‘잠시’처럼,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른다. ◈ 舍는 용언으로, ‘버리다’, ‘내팽개쳐 두다’, ‘소홀히 하다’, ‘그만두다’, ‘포기하다’는 말이다. 捨와 같은 글자다. ◈ 爲之의 爲는 용언으로, ‘하다’, ‘실천하다’는 말이다. ◈ 爲之의 之는 學, 즉 ‘공부’를 가리킨다. 舍之의 之도 그렇다. ◈ 人은 아마 용언으로, ‘사람이 되다’, ‘인간이 되다’라는 말일 것이다. ◈ 禽獸 또한 아마 용언으로, ‘짐승이 되다’라는 말일 것이다. 禽은 ‘날짐승’, 獸는 ‘들짐승’을 이른다. ◈◈ 蜀虎案 : 공부를 안 하면 인간 구실도 못한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6. 故書者/政事之紀也//詩者/中聲之所止也//禮者/法之大分/類之綱紀也, ◈ 故는 夫와 같이 발어사일 것이다. ‘대저’, ‘무릇’이라고 해석된다. ◈ 書는 체언으로, ‘《서》’를 이른다. 속칭 《書經》이다. ◈ 書者의 者는 ‘~라는 것’이다. 詩者, 禮者의 者도 모두 그렇다. ◈ 政事는 체언으로, ‘정사’, ‘정무’, ‘정치’를 이른다. ◈ 政事之紀의 之는 관형격 조사로, ‘~의’처럼 해석된다. 法之大分, 類之綱紀의 之도 모두 그렇다. ◈ 紀는 체언으로, ‘요점’, ‘요체’다. 紀는 본래 그물의 ‘벼리’를 뜻한다. 그물에는 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얽혀 있다. 그런데 작은 줄들은 큰 줄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물을 들려면 작은 줄을 일일이 잡을 필요 없이, 작은 줄이 매여 있는 큰 줄만 들면 된다. 이 큰 줄을 ‘벼리’라고 한다. 그래서 紀를 ‘핵심’, ‘요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書》는 堯와 舜을 시작으로, 周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書》에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 위주로 기술되어 있으므로 荀子가 政事之紀, ‘정사의 요점’이라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楊倞은 書/所以紀政事, ‘《書》는 政事를 기록한 글이다’라고 하였다. ◈ 詩는 체언으로, ‘《시》’를 이른다. 속칭 《詩經》이다. ◈ 中聲은 아마 ‘올바른 소리들’, ‘올바른 가락들’이라는 말 같다. 中은 관형어로, ‘올바른’이라는 말일 것이다. 正와 같다. 聲은 체언으로, ‘소리’, ‘가락’이다. 中은 ‘가운데’이고, 곧 ‘치우치지 않은 상태’이므로, ‘올바르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고대의 詩는 본래 노래였는데, 孔子가 이를 정리하면서, 儒家적 원칙에 맞게 시를 ‘해석’하고, ‘바로잡’아, 지금의 《詩》가 되었다. 즉, 지금의 《詩》는, 본래 존재하던 詩가 儒家적인 원칙에 따라 윤색된 결과물인 것이다. 그래서 儒學者인 荀子는 中聲, ‘올바른 소리들’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中을 어떻게 ‘올바르다’라고 풀이할 수 있을까. 《禮記》 「儒行」에 儒有衣冠中, ‘儒에게는 衣冠을 입는 방법의 中이 有하다’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中/中間/謂不嚴厲也, ‘中은 중간이라는 말로, 빡빡하지 않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中/間/言儒者所服衣冠/在尋常人之中間/不嚴勵自異也, ‘中은 사이라는 말이다. 儒者가 옷을 입고, 관을 쓸 때는 보통 사람들의 中間 만큼 하니, 빡빡하게 따지면서 이상하게 굴지 않는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즉, 이 말은 옷을 입을 때 너무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빡빡하지도 않게 한다는 말로, 곧 ‘中正’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詩》가 본래 노래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中을 和처럼 ‘조화를 이루다’라고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詩/謂樂章/所以節聲音/至乎中而止/不使流淫也//春秋傳曰/中聲以降/五降之後/不容彈矣, ‘詩는 樂章을 이른다. 소리를 분절하여서, 올바른 경지에 이르면 멈추니, 음탕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春秋傳》에 “中聲으로써 降하는데, 다섯 번 降한 뒤에는 연주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春秋傳》은 《春秋左氏傳》이다. 인용된 기사는 「昭公」 원년에 나온다. 이 말에 대해 杜預는 此謂先王之樂得中聲/聲成五降而息也//降/罷退, ‘이 말은 先王의 음악은 中聲에 得하는데, 소리가 다섯 번 降한 뒤에는 멈춘다는 뜻이다. 降은 연주를 파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郝懿行은 按下文方云/樂之中和/詩書之博///詩樂分言/則此中聲疑非即謂樂章//且詩三百/未必皆合中聲//夫子但謂關雎不淫不傷/可知它詩未必盡然, ‘생각해 보건대, 荀子는 아랫쪽 글에서 “《樂》의 中和, 《詩》와 《書》의 博”이라고 하며 詩와 樂을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즉, 본문의 中聲이라는 말은 樂章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 詩 300편이 꼭 모두 올바른 가락인 것도 아니다. 夫子는 다만, 「關雎」가 음탕하지 않고, 마음을 다치게 하지도 않는다고 하였으니, 「關雎」 외의 다른 詩들이 꼭 극진하지는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夫子는 孔子를 이른다. 「關雎」는 《詩》 「國風 周南」에 속해 있다. 孔子가 「關雎」에 대해 했다는 이야기는 《論語》 「八佾」에 나온다. 「八佾」에서 孔子는 關雎/樂而不淫/哀而不傷, ‘「關雎」는 樂하지만 淫하지 않고, 哀하지만 傷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이른다. 郝懿行은 아랫쪽 글에서 《詩》와 《樂》을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부분의 《詩》와 中聲을, 음악이나 곡조를 뜻하는 표현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 하고 있다. 한편, 王先謙은 下文詩樂分言/此不言樂/以詩樂相兼也//樂論篇云/樂則不能無形/形而不爲道/則不能無亂//先王惡其亂/故制雅頌之聲以道之/使其聲足以樂而不流///與此言詩爲中聲所止/可互證//郝說非也, ‘아랫쪽 글에서 《詩》와 《樂》을 구분해서 기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樂》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으므로, 《詩》와 《樂》을 겸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樂論」에는 “樂하면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드러난 것이 올바르게 이끌어지지 않는다면,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先王은 그 혼란을 싫어하였기에, 「雅」와 「頌」 같은 가락을 지어서 인도하고, 그 가락이 만족스럽고, 또 방탕한 방향으로 빠지지 않을 만하게 하였던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본문에서 《詩》를 “中聲이 止한 바”라고 설명한 점과 교차해서 검증할 수 있다. 郝懿行의 설은 틀렸다’라고 하였다. 「樂論」은 《荀子》의 편 이름이다. 「樂論」 본문에는 先王惡其亂 다음에 也 한 글자가 더 있다. 「雅」와 「頌」은 「大雅」, 「小雅」, 「頌」을 뜻한다. 《詩》의 편들이다. ◈ 中聲之所止의 之는 주격 조사다. ◈ 所는 ‘~한 바’, ‘~한 것’이다. 止를 받는다. ◈ 止는 용언으로, 아마 ‘머무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기록하다’라고 의역할 수도 있을 것 같다. 止는 본래 ‘멈추다’는 말이므로, ‘멈춰 있다’, 즉 ‘머무르다’는 뜻과 통한다. 고대에도 노래가 있어 사람들이 불렀을 것인데, 그 노래의 가사가 바로 詩다. 노래에서 선율과 박자는 빠지고, 선율만 남았지만, 노래를 기록함으로써 글로 ‘머무르게’ 한 것이다. 그러면 中聲之所止는 ‘中聲이 止하는 것’, 곧 ‘올바른 소리들이 머물러 있는 것’, ‘올바른 소리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된다. ◈ 禮는 체언으로, ‘《예》’를 이른다. 終乎讀禮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아마 《儀禮》를 이르는 듯하다. 아니면 지금의 《禮記》나 《大戴禮記》의 편들을 이를 것이다. 楊倞은 禮/所以爲典法之大分/統類之綱紀, ‘《禮》는 典法의 大分과 統類의 綱紀을 爲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마 ‘법도의 요점과 관행의 요체가 담겨 있는 글이다’라는 말 같다. ◈ 法은 체언으로, ‘법도’, ‘법제’를 이른다. ◈ 大는 관형어로, 아마 ‘대체적인’ 같은 말일 것이다. ◈ 分은 체언으로, ‘요점’, ‘요체’다. 分은 본래 ‘나뉘다’는 말로, 곧 ‘갈림길’을 뜻한다. 《禮》를 근거로 法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法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고, 禮 또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다. 다만 禮는 보다 폭넓고, 또 강제성이 덜한 반면, 法은 보다 좁고, 강제성도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어겨서는 안 될 法’을 만들려면, 먼저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禮》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이 大分이라는 표현은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고대에는 자주 쓰였던 것 같다. 이 표현은 《荀子》에 특히 자주 등장하지만, 그 외의 문헌에도 나온다. 「榮辱」에 榮辱之大分/安危利害之常體, ‘영예와 치욕의 大分, 安危와 利害의 보편적인 대체에 대해 말해 보겠다’라는 말이 있고, 또, 是榮辱之大分也, ‘이 것이 영예와 치욕의 大分이다’라는 말도 있다. 「非十二子」에는 不足以合大衆/明大分, ‘사람들에게 合하거나, 大分을 밝히기에는 모자라다’라는 말이 있다. 이 大分에 대해 楊倞은 大分/謂忠孝之大義也, ‘大分은 忠孝의 大義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王制」에는 聽政之大分, ‘정치의 大分에 대해 말해 보겠다’라는 말이 있고, 또 「王霸」에는 是百王之所同也/而禮法之大分也, ‘이 점이 百王이 똑같이 이행했던 바이고, 禮法의 大分이로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漢書》 「百官公卿表 上」에 故略表舉大分/以通古今/備溫故知新之義云, ‘그래서 表를 요약해서 大分을 보이고, 이로써 古今의 이치를 밝히며, 溫故知新한 의의를 갖추려 하였다’라는 말이 있고, 또 《漢書》 「五行志 中之下」에 五色物之大分也, ‘五色과 物의 大分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글들에서 大分은 ‘대체적인 요점’, ‘대체적인 갈림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요점’과 ‘갈림길’의 의미가 통한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 類는 체언으로, 본래 ‘대체적인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지키는 ‘관행’을 이르는 말이다. 荀子는 法과 類를 대칭적으로 사용하였다. 法은 좀 더 좁은 의미로, 類는 좀 더 넓은 의미로 간주한 듯하다. 이 점은 王念孫이 더 자세하게 설명해 두었다. 《方言》에 肖/類/法也//齊曰類, ‘肖와 類는 法이라는 뜻이다. 齊나라에서는 類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荀子는 稷下에 오랫동안 체류하였으므로, 이 점을 눈 여겨 볼 만하다. 《方言》은 楊倞 역시 인용해 두었다. 또, 《楚辭》 「九章 懷沙」에 明告君子/吾將以爲類兮, ‘君子들에게 분명히 알리니, 나는 앞으로 이를 類로 여길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王逸과 朱熹는 모두 類/法也, ‘類는 法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은 《史記》 「屈原賈生列傳」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裴駰 또한 상기한 王逸의 주석을 인용해 두었다. 이 말은, 詩의 내용을 자신이 지키겠다고 君子들에게 공언한다는 뜻이다. 지켜야 할 것이니 곧 法이 된다. 즉, 類는 곧 法이다. 이런 말도 있다. 《漢書》 「趙尹韓張兩王傳」에 類常如翁歸言, ‘類 언제나 翁歸의 말과 같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類/猶率也, ‘類는 率과 같다’라고 하였다. 率은 ‘대체적으로’라는 말이다. 즉, 類 역시 ‘대체적으로’가 되고, 이를 체언으로 보면 ‘대체적인 것’, ‘대강의 것’이 된다. 이 역시 본문의 의미와 통한다. 이처럼 類는, 당시 사람들이 쓰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類는 앞에 나왔던 物類之起의 類와는 다르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類/謂禮法所無/觸類而長者/猶律條之比附//方言云/齊謂法爲類也, ‘類는 禮法에는 없지만, 유사한 범주의 것들을 확장시킨 것으로, 조항에 대한 比附와 같다. 《方言》에는 “齊나라에서는 法을 類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比附란,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는 규칙 조항이 없을 때, 유사한 조문과 비교해서, 죄를 정하는 일을 뜻한다. 宋基采는 類와 比附를 ‘세칙’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類와 比附는 모두 명문화된 조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므로, 엄밀하게 ‘세칙’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편, 이 類는 본래 群類라고 되어 있었다. 王先謙은 謝本從盧校類上有群字, ‘《謝本》에서는 盧文弨가 교정한 것을 따라, 類 위에 群 한 글자가 더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王先謙이 底本으로 삼았던 《謝本》에는, 본문의 類가 群類로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王念孫은 元刻無群字[宋龔本同]/元刻是也//宋本作群類者/蓋不曉類字之義而以意加群字也/不知類者謂與法相類者也//此文云/法之大分/類之綱紀///非十二子及大略篇竝云/多言而類/聖人也//少言而法/君子也///王制大略二篇又云/有法者以法行/無法者以類舉///皆以類與法對文//據楊注云/類/謂禮法所無/觸類而長者/猶律條之比附///則本無群字明矣, ‘《元刻》에는 群이 없다.[王先謙의 부연 : 《宋龔本》도 그렇다.] 《元刻》이 맞다. 《宋本》에는 群類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類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類의 일반적인 뜻을 가지고 群을 추가하였을 것이다. 본문에는 “法의 大分이요, 類의 綱紀이다”라는 말이 있고, 「非十二子」와 「大略」에는 모두 “말이 많아도 말이 類에 맞으면 聖人이고, 말이 적어도 말이 法에 맞으면 君子다”라는 말이 있다. 「王制」와 「大略」 두 편에는 또 “法이 있으면 法을 시행하고, 法이 없으면 類 대로 처리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글들에서는 類와 法이 모두 대구를 이루고 있다. 楊倞은 주석에서 “類는 禮法에는 없지만, 유사한 범주의 것들을 확장시킨 것으로, 조항에 대한 比附와 같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근거해 보면, 본래 群이 없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하겠다’라고 하였다. 宋基采는 《宋龔本》을 宋나라 《龔士卨本》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王先謙은 王說是//今改從元刻, ‘王念孫의 설이 옳다. 이제 《元刻》에 따라 고쳤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荀子集解》에는 群類가 아니라 類로 되어 있다. 類는 본래 ‘무리’를 뜻하는데, 이 의미가 群과 같다. 아마 글을 옮기던 사람이 類가 여기서 法처럼 해석된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類의 본래 의미를 따서 群을 추가하였을 것이다. ◈ 綱紀는 체언으로, ‘요점’, ‘요체’, ‘핵심’이다. 綱과 紀는 모두 그물의 ‘벼리’를 이른다. 벼리에 대해서는 政事之紀의 紀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楊倞은 此說六經之意, ‘이 글에서는 六經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六經이란, 《詩》, 《書》, 《易》, 《禮》, 《樂》, 《春秋》를 이른다. 그런데 뒤의 글까지 읽어 보면, 荀子는 《易》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 왜 楊倞이 六經이라고 지칭했는지 모르겠다. ◈◈ 蜀虎案 : 《詩》, 《書》, 《禮》가 어떤 글인지, 왜 이 글들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7. 故學至乎禮而止矣, ◈ 故는 ‘그래서’, ‘따라서’다. ◈ 學은 체언으로, ‘공부’다. ◈ 至는 용언으로, 어떤 상황에 ‘이르다’, 어떤 상황이 ‘되다’는 말이다. ◈ 乎는 ‘~에’다. 於와 같다. 禮를 받는다. ◈ 禮는 체언으로, ‘《禮》’다. ◈ 而는 ‘그러면’이라고 해석된다. 則과 같다. 《禮記》 「喪服小記」에 士妾有子而爲之緦/無子則已, ‘士妾에게 자식이 있으면 삼베로 만들고, 자식이 없으면 그만 둔다’라는 말이 있고, 《墨子》 「明鬼 下」에 則先死者/非父則母/非兄而姒也, ‘그러면, 먼저 죽는 사람은, 아비가 아니면 어미이고, 형이 아니면 姒다’라는 말이 있으며, 《史記》 「季布欒布列傳」에 與楚則漢破/與漢而楚破, ‘楚나라와 함께하면 漢나라를 깨뜨리고, 漢나라와 함께하면 楚나라를 깨뜨린다’라는 말이 있다. 예문들에서 而는 모두 ‘그러면’으로, 則과 의미가 같다. 而가 則과 서로 교차되어 쓰인 사례도 있다. 《禮記》 「樂記」에 喜則天下和之/怒則暴亂者畏之, ‘즐거우면 天下가 어우러지고, 빡치면 暴亂한 자들이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荀子》 「樂論」에는 喜而天下和之/怒而曓亂畏之라고 되어 있다. 《孟子》 「公孫丑 上」에 可以仕則仕/可以止則止/可以久則久/可以速則速, ‘출사할 만하면 출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며, 久할 만하면 久하고, 速할 만하면 速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孟子》 「萬章 下」에는 이 말이 可以速而速/可以久而久/可以處而處/可以仕而仕라고 되어 있다. 而와 則이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소개되어 있다. ◈ 止는 용언으로, ‘끝나다’, ‘마치다’라는 말이다. 終과 같다. ◈◈ 蜀虎案 : 荀子가 스스로 기술하였듯, 《禮》에는 당대 세상 사람들이 지키고 실천하였던 법도와 관행, 그리고 이를 지켜야 하는 까닭이 기술되어 있었다. 즉, 《禮》를 배운다는 말은 세상에 적용되는 법도와 관행을 배우고, 익히며, 깨우친다는 뜻이다. 또, 《禮》를 배움으로써 공부를 끝낸다는 말은, 荀子의 목표가 세상에 출사해서, 정치에 참여하고, 정사를 바로잡는 데 있다는 점을 뜻한다. 《禮記》 「大學」에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바로잡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先秦 시대 儒學者들은 항상 정치에 참여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사람들이 보통 정치와 거리가 멀다고 오해하는 莊子조차도, 그 목표가 道를 가지고 세상의 본질을 보전하는 일, 즉 정치에 있었다는 점이 「人間世」, 「大宗師」 등 여러 편에 분명히 드러나 있는데, 荀子 같은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본문으로]
  8. 夫是之謂道德之極, ◈ 夫是는 아마 한 단어로, ‘이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是는 ‘이것’이다. 夫는 여기서 此와 같다. 따라서 夫 역시 ‘이것’이다. 夫를 발어사나, 아니면 ‘그런데’처럼 해석할 수는 없는데, 이는 이 문장에서 앞의 내용이 총괄되기 때문이다. 夫是는 《詩》, 《書》, 《禮》, 《樂》, 《春秋》를 가리킨다. 夫是라는 표현은 《荀子》 안에 96번 나오는데, 96번 모두 夫是之謂 A, 즉 ‘夫是를 A라고 한다’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不苟」에 夫是之謂至文, ‘夫是를 至文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고, 「榮辱」에 夫是之謂至平, ‘夫是를 至平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荀子가 夫是를 한 단어로 사용하였음은 분명하다. 《荀子》 외에도, 《禮記》 「三年問」에 夫是之謂至隆, ‘夫是를 至隆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는 점을 보면, 당시에 가끔 사용되었던 표현이었을 것이다. 다만 《荀子》 외의 글에서는 《荀子》에서 사용된 만큼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면 夫를 어떻게 此로 해석할 수 있을까. 《禮記》 「檀弓 上」에 夫夫也/爲習於禮者, ‘夫 夫는 禮를 習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이에 대해 夫夫/猶言此丈夫也, ‘夫夫라는 말은 이 장부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즉, 앞의 夫는 此와 같이 ‘이’라는 말이고, 뒤의 夫는 ‘장부’, ‘남자’라는 말이다. 또, 《禮記》 「檀弓 上」에 從母之夫/舅之妻/夫二人相爲服, ‘母의 夫, 舅의 妻를 從하여, 夫 두 사람이 모두 상복을 입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夫二人猶言此二人也, ‘夫二人이라는 말은 이 두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즉, 夫는 此와 같다. 이 글은 지금 판본에는 二夫人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보면 말이 안 되고, 夫二人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 《禮記》 「祭義」에 忌日不用/非不祥也//言夫日志有所至/而不敢盡其私也, ‘忌日에는 用하지 않으니, 상서로운 것이 아니면 하지 않아야 한다. 夫日에는 뜻을 극진하게 먹어야 하고, 감히 사사로운 마음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志有所至/至於親以此日亡/其哀心如喪時, ‘志有所至라는 말은 부모가 이 날에 돌아가셨으므로, 슬퍼하는 마음을 돌아가셨을 때처럼 먹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夫는 此와 같다. 《春秋左氏傳》 「昭公」 12년에, 且夫易/不可以占險/將何事也, ‘또 夫 《易》으로는 險을 점칠 수 없는데,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이려 하는 것이냐’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夫易/猶此易, ‘夫易은 이 《易》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夫는 此와 같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夫」에 수록되어 있다. ◈ 夫是之謂의 之는 글이 도치되었다는 점을 표시하는 말이다. 夫是之謂道德之極은 본래 謂夫是道德之極이다. ◈ 謂는 용언으로, ‘이르다’, ‘~라는 뜻이다’라는 말이다. ◈ 道德은 체언으로, ‘정치’ 혹은 ‘교화’를 뜻한다. 이 道德이라는 말은 荀子가 다섯 經文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그런데 앞에서 荀子는 《書》를 정사의 요점, 《詩》는 올바른 가락, 《禮》는 법도와 관행의 요체라고 설명하였다. 이 모두 정치와 교화를 함의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 句에서 荀子는 다섯 經文을 道德之極, 즉 ‘道德의 근본’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道德 역시 ‘정치’나 ‘교화’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나는 ‘교화’라고 번역하였다. 《荀子》 안에는 道德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 중 ‘정치’나 ‘교화’를 의미하고 있는 경우가 여럿 있다. 「儒效」에 言道德之求/不二後王, ‘道德을 求하는 말에 대해서는 後王과 다르게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楊倞은 道德/敎化也, ‘道德은 교화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또, 後王이 함의하고 있는 뜻이 올바른 정치이므로, 道德이 ‘정치’를 이른다고 할 수도 있겠다. 「王制」에는 全道德/致隆高/綦文理/一天下, ‘道德을 全하고, 隆高를 致하며, 文理를 綦하고, 天下를 합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道德 역시 ‘교화’, ‘정치’라고 보면 매끄럽게 해석된다. 「王霸」에는 道德誠明/利澤誠厚也, ‘道德은 진정 명쾌하고, 은택은 진정 두텁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道德 역시 爲政者의 ‘교화’, ‘정치’를 이른다. ◈ 道德之極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된다. ◈ 極은 체언으로, ‘근본’, ‘중심’, ‘요지’, ‘요점’이다. 「正名」에 故名足以指實/辭足以見極/則舍之矣, ‘그래서 명분이 실체을 가리킬 만하고, 말이 極을 보일 만하면, 그만 두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楊倞은 極/中也/本也, ‘極은 중심, 근본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본문의 極이 「正名」의 極과 같다. 道德之極은 본래 ‘道德의 極’, 즉 ‘교화의 근본’이라고 해석되지만, 나는 ‘세상을 교화하는 도리의 근본’이라고 의역하였다. ◈◈ 蜀虎案 : 혹시 본문에 본래 《樂》과 《春秋》에 대한 글도 있었는데, 실전되지 않았을까 의심된다. 앞의 글에는 《詩》와 《書》, 그리고 《禮》만 나오지, 《樂》과 《春秋》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뒤의 문장에서는 《樂》과 《春秋》도 포괄해서 다섯 가지 經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따라서 뒤의 문장과 글의 내용을 고려할 때, 본문의 夫是는 《樂》과 《春秋》까지 포함해 다섯 가지 經을 모두 포괄해서 지칭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타당하다. 그런데 夫是는 앞에 나왔던 개념들을 포괄해서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夫是가 《樂》과 《春秋》까지 포괄하려면, 앞의 글에 《樂》과 《春秋》에 대한 글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상기하였듯, 앞의 글에는 《樂》과 《春秋》에 대한 글이 나오지 않으므로, 아마 실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大戴禮記》 「勸學」에도 이 부분은 나오지 않고, 《群書治要》, 《韓詩外傳》에도 나오지 않아 대조해 볼 자료가 없다. [본문으로]
  9. 禮之敬文也/樂之中和也/詩書之博也/春秋之微也/在天地之間者畢矣, ◈ 禮는 체언으로, ‘《禮》’다. ◈ 禮之敬文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된다. 樂之中和, 詩書之博, 春秋之微, 天地之間의 之도 모두 그렇다. ◈ 敬文은 체언으로, 아마 ‘예법과 제도’를 이르는 말 같다. 敬은 본래 ‘공경하다’는 말로, 여기서는 ‘공경하는 일’, ‘공경스러운 일’, 곧 ‘예의’, ‘예법’을 뜻한다. 文은 ‘형식’이나 ‘제도’를 이른다. 《儀禮》, 혹은 《禮記》의 편들에는 天子, 諸侯, 卿, 大夫, 士가 지켜야 할 예법과 제도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이를 것이다. 楊倞은 禮有周旋揖讓之敬/車服等級之文也, ‘《禮》에는 몸을 움직이거나 揖讓하는 일에 대한 敬, 수레와 의복, 계급에 대한 文이 기록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禮之敬文也의 也는 아마 者와 같은 글자로, ‘~라는 것’이라는 말 같다. 樂之中和也, 詩書之博也, 春秋之微也의 也도 모두 그렇다. 따로 번역하지는 않았다. 《禮記》 「檀弓」에 古者冠縮縫/今也衡縫, ‘옛날에는 冠을 세로로 꿰맸는데, 요즘은 가로로 꿰맨다’라는 말이 있고, 《論語》 「陽貨」에는 古者民有三疾/今也或是之亡也, ‘옛날에는 백성들에게 문제가 세 가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듯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들에는 모두 古者와 今也가 대구를 이루고 있으니, 이로써 볼 때 今也는 앞의 句를 따라 今者가 되어야 함이 분명하고, 실제로 의미 자체도 그렇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예시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也」에 들어 있다. ◈ 樂은 체언으로, ‘《樂》’이다. ◈ 中和는 체언으로, 아마 ‘조화’를 이를 것이다. 中和는 한 단어인 것 같다. 中은 ‘알맞다’는 말이고, 和는 ‘어울리다’는 말이니, 中和는 ‘알맞고 어울리는 것’, 즉 ‘조화’를 이를 것이다. 楊倞은 中和/謂使人得中和悅也, ‘中和는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어 기쁘게 만들어 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詩는 체언으로, ‘《詩》’다. ◈ 書는 체언으로, ‘《書》’다. ◈ 博은 체언으로, ‘폭 넓은 것’, 즉 ‘다양한 이야기들’를 이른다. 《詩》에는 당시 사람들의 감정과 노래, 자연물들이 등장하고, 《書》에는 옛 聖王들의 정치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이른다. 楊倞은 博/謂廣記土風鳥獸草木及政事也, ‘博은 풍토, 짐승, 초목, 정사에 대해 폭넓게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春秋는 체언으로, ‘《春秋》’다. ◈ 微는 체언으로, ‘미묘한 취지’를 이른다. 孔子는 《春秋》를 기술할 때, 명분에 입각하여 사실을 엄격하게 평가하고, 또 필요 없는 말을 줄여 간이하게 표현했다. 따라서 문장은 간결하지만, 그 문장에 함의되어 있는 의미는 깊고 또 미묘하다. 이를 이른다. 楊倞은 微/謂襃貶沮勸/微而顯/志而晦之類也, ‘微라는 말은 《春秋》에서 사실을 포폄하거나 평가하는 말이 미묘하지만 드러나 있고, 뜻하는 바가 있는 것 같지만 가려져 있다는 등의 점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在는 용언으로, ‘있다’, 담겨 ‘있다’, ‘존재하다’라는 말이다. 天地之間者畢을 받는다. ◈ 天地는 체언으로, ‘천지’, ‘세상’을 이른다. ◈ 間은 체언으로, ‘사이’다. 天地之間은 ‘온세상’을 이른다. ◈ 天地之間者畢의 者는 아마도 之처럼 ‘~의’라는 말 같다. 관형격 조사처럼 해석된다. 즉, 天地之間者畢은 ‘天地之間의 畢’이 된다. 그런데 者가 之로 직접 풀이되는 사례를 본 적이 없다. 혹시, 者는 諸의 가차자일지도 모르겠다. 諸는 之 혹은 之於처럼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 畢은 체언으로, ‘모든 것’을 이른다. 즉, 天地之間者畢은 ‘세상 모든 것’이다. 나는 ‘萬物과 萬事’라고 번역하였다. 《詩》 「小雅 祈父之什」의 「無羊」에 麾之以肱/畢來既升, ‘팔을 麾하니 畢이 와서 오른다’는 말이 있는데, 畢은 ‘모두’, ‘전부’, ‘모든 사람’을 이른다. 또, 《禮記》 「月令」에 乃修闔扇/寢廟畢備, ‘闔扇을 정비하고, 寢廟도 畢 손본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畢/猶皆也, ‘畢은 모두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또, 王羲之의 「蘭亭記」에 群賢畢至, ‘賢들이 畢 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畢도 ‘모두’라는 뜻이다. ◈◈ 蜀虎案 : 《詩》, 《書》, 《禮》, 《樂》, 《春秋》에 온세상의 萬物과 萬事가 다 들어 있으므로,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려면 이 經文들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앞에서 道德之極, ‘세상을 교화하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修身」의 夫驥一日而千里 부분에서 荀子는 名家 같이 답이 없는 학문에 빠져서는 안 되고, 儒學처럼 명백하게 종착 지점이 있는 학문에 전념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본문과 결이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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