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순자 - 1 - 권학 - 3 -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

2021. 9. 24. 10:00순자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반응형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보기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원래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숫자로 바꾸고 하단으로 내려 두었습니다. 원래 글은 물론 원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주석을 하단으로 내리니까 정작 중요한 주석과 중요하지 않은 주석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어 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에다가 '*' 같은 것으로 표시해 둘까, 혹은 다르게 어떻게든 표시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느니 원안을 보존하고 새로 글을 파 두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기가 편한 것이 우선이냐, 주석이 우선이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 편한 방식에 맞게 글을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주석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습니다.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李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0년 5월 1일 16시 46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6

 

순자 - 1 - 권학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philosophistory.tistory.com

 

 

주석을 본문과 함께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68

 

순자 - 1 - 권학 - 3 -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philosophistory.tistory.com

 

 


 

 

南方有鳥焉,名曰蒙鳩,以羽爲巢,而編之以髮,繫之葦苕,風至苕折,卵破子死。巢非不完也,所繫者然也。

西方有木焉,名曰射干,莖長四寸,生於高山之上,而臨百仞之淵,木莖非能長也,所立者然也。

蓬生麻中,不扶而直。白沙在涅,與之俱黑。

蘭槐之根是爲芷。其漸之滫,君子不近,庶人不服,其質非不美也,所漸者然也。

故君子居必擇鄉,遊必就士 ,所以防邪僻而近中正也。

 

 

남쪽 지방에는 몽구라는 새가 있다. [몽구는 자기] 깃을 가지고 집을 만든다.[각주:1] 그런데 [몽구는 집을 지을 때,] 머리깃을 얽어서 갈대 줄기에다가 매달아 두기에, 바람이 불면 [갈대] 줄기가 구부러지면서 [집이 뒤집어져 버린다. 그래서] 알은 깨지고 새끼들은 죽어 버린다.[각주:2] [몽구가 이렇듯 변을 당하는 까닭은, 몽구의] 둥지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둥지가] 매여 있는 줄기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각주:3]

 

[한편] 서쪽 지방에는 야간이라는 풀이 있다.[각주:4] [야간의] 줄기 길이는 네 마디밖에 안 되지만, 높은 산 위에 서식하면서, 백 길이나 아래에 있는 연못을 내려다 보고 있다.[각주:5] [그런데 야간이 연못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은, 야간 같은] 풀 줄기가 [백 길 만큼이나 길게] 자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야간이] 살고 있는 곳이 [그 만큼] 높기 때문이다.[각주:6]

 

쑥이 삼들 사이에서 자라면, 받쳐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고, 하얀 모래가 뻘에 있으면, 뻘과 함께 모두 새까매지고 만다.[각주:7]

 

난괴의 뿌리는 [백]지라고 한다. [그런데 백지가 향초이기는 하지만,] 만약 [백지를] 쉰 뜨물에 적셔 둔다면, 군자는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요, 서인도 패용하지 않을 것이다.[각주:8] [군자와 서인이 모두 백지를 피하게 된 것은, 백]지의 본바탕이 훌륭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백지를] 적신 것이 지저분하기 때문이다.[각주:9]

 

이러한 까닭으로, 군자는 머무를 때에도 반드시 [올바른] 지역을 택하고, [다른 선비와] 어울려 놀 때도 반드시 [올바른] 선비를 좇는다. [군자는] 그릇된 도리를 멀리하고, 올바른 도리를 가까이 하기 때문이다.[각주:10]

 

 

 

  1. 南方有鳥焉/名曰蒙鳩/以羽爲巢, ◈ 南方은 체언으로, ‘남쪽 지방’, ‘남방’이라는 뜻이다. 南은 관형어로, ‘남쪽의’라는 말이다. 方을 한정한다. 方은 체언으로, ‘지방’을 이른다. 荀子는 趙나라 사람이므로, 여기서 南方이라는 말은 아마 중원 및 그 이남 지방 어딘가를 이를 것이다. ◈ 有는 용언으로, ‘있다’, ‘존재하다’라는 말이다. 鳥를 받는다. ◈ 鳥는 체언으로, ‘새’다. 뒤에 나오는 蒙鳩를 이른다. ◈ 焉은 也처럼, 아마 말을 끝내는 조사일 것이다. 아마 有가 용언으로, ‘존재하다’, ‘있다’라는 식으로 사용될 때, 이에 대한 조사로 사용되는 듯하다. 이 句와 대구를 이루고 있는 西方有木焉에도 有 뒤에 焉이 붙어 있고, 《莊子》 「逍遙遊」의 有鳥焉/其名爲鵬, 《莊子》 「山木」의 東海有鳥焉/其名曰意怠, 《論語》 「先進」의 有民人焉/有社稷焉 등에서도 모두 그렇다. 고대 사람들은 이렇게 썼나 보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焉이 없이, 南方有鳥라고만 되어 있다. ◈ 名은 체언으로, ‘이름’이다. 鳥의 ‘이름’을 이른다. ◈ 曰은 용언으로, ‘~라고 한다’라는 표현이다. 蒙鳩를 받는다. ◈ 蒙鳩는 체언으로, 새의 이름이다. 나는 ‘몽구’라고 음역하였다. 주석을 참고하면, 아마 ‘뱁새’를 이르는 듯하다. 宋基采는 ‘굴뚝새’라고 하였다. 南方有鳥焉/名曰蒙鳩는, 직역하면 ‘남쪽 지방에는 새가 있는데, 이름은 몽구라고 한다’가 되지만, 나는 ‘남쪽 지방에는 몽구라는 새가 있다’처럼 의역하였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蒙鳩가 𧊷鳩라고 되어 있다. 아마 蒙이나 𧊷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발음을 빌려서 사용된 글자일 것이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蒙鳩/鷦鷯也, ‘蒙鳩는 鷦鷯다’라고 하였다. 鷦鷯는 ‘뱁새’를 이른다. 楊倞은 또, 蒙/當爲蔑//方言云/鷦鷯/自關而西謂之桑飛/或謂之蔑雀///或曰/一名蒙鳩/亦以其愚也, ‘蒙은 마땅히 蔑이 되어야 한다. 《方言》에서는 “鷦鷯에 대해, 函谷關 서쪽에서는 桑飛라고 하한다. 蔑雀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蒙鳩라고 하는 까닭은, 그 새가 역시 멍청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方言》에는 桑飛/自關而東謂之工爵/或謂之過鸁/或謂之女𪀘//自關而東謂之鸋鴂//自關而西謂之桑飛/或謂之懱爵, ‘桑飛는, 函谷關 동쪽에서는 工爵이라고 하고, 過鸁라고 하기도 하며, 女𪀘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函谷關 동쪽에서는 鸋鴂이라고 하며, 函谷關 서쪽에서는 桑飛라고 하고, 懱爵이라고 하기도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楊倞은 아마 이 말을 인용한 듯하다. 한편, 盧文弨는 蒙鳩/大戴禮作虫鳩///方言作蔑雀///虫/讀如芒//蒙虫蔑一聲之轉/皆謂細也//蒙與蠛/蠓音義近//楊云當爲蔑/似非, ‘蒙鳩는 《大戴禮》에는 虫鳩라고 되어 있고, 《方言》에는 蔑雀이라고 되어 있다. 虫은 芒이라고 읽는다. 蒙과 虫, 蔑은 어떤 발음이 와전된 말일 것이다. 모두 세밀하다는 뜻이다. 蒙과 蠛은 蠓과 발음과 의미가 비슷하다. 楊倞은 蔑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이 설은 아마 틀렸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戴禮》는 《大戴禮記》다. 앞에서, 《大戴禮記》에는 𧊷鳩라고 되어 있다고 했는데, 아마 이 경우 역시 발음이 와전되어서 판본에 따라 글자가 바뀐 사례일 것이다. ◈ 以羽爲巢의 以는 ‘~를 가지고’, ‘~로써’라는 말이다. 羽을 받는다. ◈ 羽은 체언으로, ‘깃’이다. 蒙鳩의 ‘깃’을 이른다. ◈ 爲는 용언으로, ‘만들다’, ‘제작하다’라는 말이다. 巢를 받는다. 《周禮》 「春官宗伯」에 典同/掌六律六同之和/以辨天地四方陰陽之聲/以爲樂器, ‘典同은 六律과 六同의 조화를 관장하여, 天地와 四方, 陰陽의 소리를 변별하고, 이를 가지고 악기를 爲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爲/作也, ‘爲는 만들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言」에는 作/造/爲也, ‘만들거나 짓는 것을 爲라고 한다’라는 말도 있다. ◈ 巢는 체언으로, ‘새집’, ‘둥지’를 이른다. 《說文解字》 「巢部」에서는 巢/鳥在木上曰巢/在穴曰窠//从木/象形//凡巢之屬皆从巢, ‘巢는 이렇다. 새가 나무 위에 머물면, 巢라고 하고, 구멍에 머물면 窠라고 한다. 木이 들어 있다. 象形한 글자다. 巢의 부류에 들어가는 글자들에는 모두 巢가 들어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즉, ‘새가 나무 위에 짓는 집’을 巢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의미에서 파생하여서, 꼭 새가 살지 않아도, 나무 위에 만든 거처이기만 하면, 대체로 다 巢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孟子》 「滕文公 下」에 下者爲巢/上者爲營窟, ‘저지대 사람들은 巢를 만들고, 고지대 사람들은 營窟을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趙技는 埤下者於樹上爲巢/猶鳥之巢也, ‘저지대 사람들은 나무 위에다가 巢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는 새가 만든 巢와 같다’라고 하였다. 홍수가 터지자, 저지대 사람들이 나무 위에 집을 만들고 살았는데, 이를 巢라고 하였던 모양이다. 또, 《漢書》 「五行志 中之上」에 成帝建始四年九月/長安城南有鼠銜黃蒿柏葉/上民冢柏及榆樹上爲巢/桐柏尤多, ‘成帝 建始 4년 9월에, 長安城 남쪽에서, 쥐들이 黃蒿와 柏葉을 물고는, 백성들의 무덤가에 있는 측백나무나 느릅나무 위에다가 巢를 만들었다. 桐柏에는 더욱 많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도 나무 위에 올라가서 집을 만들었기에 巢라고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2. 而編之以髮/繫之葦苕/風至苕折/卵破子死, ◈ 而編之以髮의 而는 아마 역접인 듯하다. ‘그런데’처럼 해석된다. 다만 이 경우, 앞뒤의 내용이 아주 상반된다기 보다는, 어감을 환기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而編之以髮의 而가 없다. ◈ 編은 용언으로, ‘엮다’ 혹은 ‘얽다’라는 말이다. 蒙鳩가 자기 깃털을 이리저리 ‘얽어’서 집을 만든다는 뜻이다. ◈ 編之以髮의 之는 도치를 표현하는 말 같다. 본래는 以髮編이라고 해야 한다. ◈ 編之以髮의 以는 ‘~로써’, ‘~를 가지고’라는 말이다. 髮을 받는다. ◈ 髮은 체언으로, 본래 ‘머리카락’을 뜻한다. 이 말은 蒙鳩에 대한 표현이므로, ‘머리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編之以髮은 ‘머리깃을 가지고 얽는다’라는 뜻이다. ◈ 繫는 용언으로, ‘매다’라는 말이다. 葦苕에 ‘매달아 놓는다’는 뜻이다. ◈ 繫之葦苕의 之는 ‘~에’라는 말이다. 於, 乎, 之於, 之乎와 같다. 즉, 繫之葦苕는 ‘葦苕에 繫한다’라는 뜻이다. 《禮記》 「少儀」에 仆者右帶劍/負良綏/申之面/拖諸幦, ‘仆者는 오른쪽으로 검을 차고, 良綏를 지며, 얼굴 之 申하고, 幦으로 拖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申之面/拖諸幦는 의미상 대구를 이루고 있다. 즉, 申之面의 之는 拖諸幦의 諸와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 《孟子》 「滕文公 上」에는 禹疏九河/瀹濟漯/而注諸海//決汝漢/排淮泗/而注之江, ‘禹는 九河를 틔었으니, 濟와 漯을 터서 바다로 흘러가게 했고, 汝와 漢을 터서 淮와 泗를 통해 江 之 흘러가게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서 역시 而注諸海와 而注之江은 의미상 대구를 이루고 있으므로, 諸와 之의 역할은 동일해야 한다. 이 사례들이 之가 諸의 의미로 사용된 사례들이다. 王引之는 之/猶諸也//諸之/一聲之轉, ‘之는 諸와 같게 사용된다. 諸와 之는 소리가 동일해서 전용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之가 於를 대신하여 사용된 경우도 있다. 《大戴禮記》 「曾子事父母」에 養之內/不養於外/則是越之也//養之外/不養於內/則是疏之也, ‘안으로만 養하고 밖으로 養하지 않으면, 이는 越하는 것이다. 밖으로만 養하고 안으로 養하지 않으면, 이는 疏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養之內와 不養於外, 그리고 養之外와 不養於內는 모두 의미상 대구를 이루고 있고, 之가 於의 의미라고 해석되고 있다. 《荀子》 「勸學」에 目好之五色/耳好之五聲/口好之五味, ‘눈으로는 五色 보다 더 좋아하고, 귀로는 五聲 보다 더 좋아하고, 입으로는 五味 보다 더 좋아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도 之는 於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보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王引之는 之/猶於也//諸之/一聲之轉//諸訓爲於/故之亦訓爲於, ‘之는 於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諸와 之는 소리가 동일하여 전용되었다. 諸가 於의 뜻으로 사용되므로, 之 또한 於의 의미로 사용된다’라고 하였다. 이 예시와 설명들은 《荀子》의 예를 제외하면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之」에 기술되어 있다. ◈ 葦苕는 체언으로, 아마 ‘갈대 줄기’를 이르는 듯하다. 葦는 ‘갈대’인데, 여기서는 관형어로, ‘갈대의’처럼 해석된다. 苕는 체언으로, 아마 ‘줄기’를 이르는 듯하다. 楊倞은 苕/葦之秀也, ‘苕는 갈대의 秀다’라고 하였다. 秀는 본래 ‘꽃’을 의미하지만, ‘꽃에 매달아 둔다’라고 하면 이상하므로, 달리 해석해야겠다. 秀는 秀出이라는 말처럼, ‘솟아 있는 것’을 이른다. 갈대에서 솟아 있는 부분은 ‘줄기’이므로, 아마 葦苕는 ‘갈대 줄기’를 이를 것이다. 楊倞은 今巧婦鳥之巢至精密/多繫於葦竹之上/是也, ‘巧婦鳥가 짓는 새집이 아주 정밀한 데다, 葦竹 위에 매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巧婦鳥 역시 ‘뱁새’를 이르는 듯하다. ◈ 風은 체언으로, ‘바람’이다. ◈ 至는 용언으로, 아마 ‘이르다’는 말일 것이다. 바람이 ‘이르’므로, 곧 바람이 ‘불다’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 折은 용언으로, 본래 ‘꺾이다’, ‘부러지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휘어지다’, ‘구부러지다’라고 해석해야 타당하겠다. 바람이 불면 갈대가 휘어지면 휘어지지, 꺾여서 부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曲折이라는 말처럼, 折은 曲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듯하다. 《淮南子》 「覽冥訓」에 河九折注於海, ‘강은 아홉 번 折하고서 바다로 흘러 들어 간다’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折/曲, ‘折은 구부러지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禮記》 「玉藻」에 折還中矩, ‘折還하니 矩에 맞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曲行也, ‘曲行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曲行/謂屈曲而行/假令從北向南行/曲折而東向西向也, ‘曲行이라는 말은, 구불구불 간다는 말이다. 가령, 북쪽을 좇다가 남쪽으로 가거나, 방향을 바꿔서 동쪽이나 서쪽으로 향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역시 折은 曲과 의미가 같다. 《禮記》 「曲禮 下」에는 立則磬折垂佩, ‘서 있을 때는 磬折하고 佩를 드리운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磬折은, 직각으로 몸을 굽혀서 인사를 한다는 말로, 악기인 磬의 모습처럼 구부린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즉, 折은 여기서도 曲처럼 ‘구부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卵은 체언으로, ‘알’이다. 蒙鳩의 ‘알’을 이른다. ◈ 破는 용언으로, ‘깨지다’, ‘박살나다’, ‘파괴되다’, ‘부서지다’라는 뜻이다. 蒙鳩의 알이 ‘부서지다’라는 말이다. ◈ 子는 체언으로, ‘자식’, ‘새끼’를 이른다. 둥지 속에 있던 蒙鳩의 ‘새끼’를 이른다. ◈ 死는 용언으로, ‘죽다’는 말이다. 蒙鳩의 새끼들이 떨어져서 ‘죽는다’는 뜻이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卵破子死가 子死卵破로 되어 있다. 말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 의미는 동일하다. ◈◈ 蜀虎案 : 갈대는 단단하지 않으므로,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갈대에 매달린 蒙鳩의 집도 무사할 수가 없다. [본문으로]
  3. 巢非不完也/所繫者然也, ◈ 巢는 체언으로, ‘새집’, ‘둥지’다. 蒙鳩의 ‘둥지’를 이른다. ◈ 非는 용언으로, ‘~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不完을 받는다. 사실 非不은 ‘~하지 않음이 아니다’와 같이 사용된다. 즉, 非不完은 ‘完하지 않음이 아니다’, ‘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처럼 해석된다. ◈ 不은 부정어로, 完을 한정한다. ◈ 完은 용언으로, ‘완전하다’라는 말인데, 여기서는 ‘견고하다’처럼 해석하면 좋겠다. ◈ 所繫者는 ‘매인 것’, ‘매여 있는 것’을 이른다. 所는 피동을 뜻한다. 爲, 見, 被 등과 같다. 繫는 용언으로, ‘매다’, ‘매어 놓다’라는 말이다. 즉, 所繫는 ‘매여 있는’, ‘매인’이라는 말이다. 者는 ‘~한 것’이다. 所繫를 받는다. 所繫者는 ‘매인 것’, 즉 둥지가 ‘매달려 있는 것’이 되니, 곧 ‘갈대의 줄기’를 이른다. 나는 者를 ‘줄기’라고 의역하였다. 그러면 所가 피동으로 사용된 사례에는 무엇이 있을까. 《史記》 「高祖本紀」에 由所殺蛇白帝子/殺者赤帝子/故上赤, ‘타살당한 뱀은 白帝의 자식이고, 죽인 뱀은 赤帝의 자식이었기에, 그래서 적색을 숭상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所殺의 所가 바로 피동을 표현하는 말이다. ◈ 然은 용언으로, ‘그러하다’, ‘그렇다’는 말이다. 不完, 즉 ‘견고하지 않다’는 뜻이다. ◈◈ 楊倞은 言人不知學問/其所置身/亦猶繫葦之危也//說苑客謂孟嘗君曰/鷦鷯巢於葦苕/箸之以髮/可謂完堅矣//大風至/則苕折卵破者/何也//所託者然也, ‘사람이 학문을 깨우치지 못하면, 그 사람이 처신하는 꼴 역시 갈대에 매달아 둔 것과 같이 위태롭다는 뜻이다. 《說苑》에, “客이 孟嘗君에게 ‘鷦鷯는 갈대 줄기에다 둥지를 짓고, 머리깃으로 箸해 두는데, 이를 완벽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바람이 크게 일면, 줄기가 구부러져서 알이 깨져 버린다. 이 까닭은 무엇인가. 매어 둔 곳이 그렇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했다. 箸는 아마 ‘붙이다’, ‘매 두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 인용문은 《說苑》 「善說」에 있다. 「善說」에는 臣見鷦鷯巢於葦苕/著之髮毛/建之/女工不能爲也/可謂完堅矣//大風至/則苕折卵破子死者/何也//其所託者使然也, ‘臣은 鷦鷯가 갈대 줄기에다 둥지를 트는 것을 보았다. 머리깃으로 붙여 두는데, 女工도 할 수 없을 만큼 둥지를 지으니, 완벽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바람이 크게 불면, 줄기가 구부러져서, 알은 깨지고, 새끼는 죽어 버린다. 이 까닭이 무엇일까. 매어 둔 것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盧文弨는 楊倞의 주석 중 箸에 대해, 箸/張略切/俗間本多作著//今從宋本/與說文合, ‘箸는 張과 略의 반절로 읽는다. 세상에 떠도는 판본에는 箸가 著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宋本》을 따른다. 이는 《說文》과 합치된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아마 《宋本》에는 箸라고 되어 있는데, 《說文解字》에는 箸만 있고, 著에 대한 해설은 없으니, 그래서 합치된다고 한 듯하다. 盧文弨는 또, 說文有箸無著/箸但訓飯欹/無形著及繫著義//或本有著字而誤脫/亦未可知//然古書如周語大夫士日恪位箸///即位著也//列子仲尼篇形物其箸///以箸爲著明也//趙策智伯曰/兵箸晉陽三年矣///以箸爲傅著也//世說新語一書/皆以箸爲著//以故六書正譌謂/箸字/多有假借用者///別作著/非//今校此書/凡宋本作箸者仍之/其他卷作著字者即不改//非必古之盡是/而今之皆非//以待夫通人自擇焉耳, ‘《說文》에는 箸만 있고, 著에 대한 말은 없다. 箸에 대해서는 다만 밥 먹을 때 쓰는 것이라고만 되어 있다. 著의 모습이나, 매어 둔다는 의미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본래 著가 《說文》에 있었는데, 잘못되거나, 빠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또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周語」에 “大夫와 士는 날마다 공경스럽게 位箸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位箸는 곧 位著라는 말이요, 《列子》 「仲尼」에는 “形과 物이 其 箸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箸는 著明하다는 의미다. 「趙策」에는 “智伯이 ‘군대가 晉陽에 3년 동안 箸한다’라고 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箸는 傅著하다는 의미요, 《世說新語》에는 모든 글에 箸가 著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옛 글들이 이러하니, 이 때문에 《六書正譌》에서는 “箸는 다른 글자의 가차자로 사용된 경우가 많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특별히 著라고만 바꿔 써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교정하고 있는데, 《宋本》에 箸라고 되어 있으면, 이를 따르고, 그 외의 내용에 著라고 되어 있어도 고치지 않았다. 옛 것이 꼭 옳다고 할 수도 없고, 지금 것이 모두 틀렸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고, 잘 아는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선택하기를 기다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周語」는 《國語》의 「周語」를 이른다. 「趙策」은 《戰國策》의 「趙策」을 이른다. 《世說新語》에 대한 이야기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國語》, 《戰國策》 등의 인용문들이 《世說新語》에 인용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世說新語》 원문에 箸가 없고 著만 있는 것도 아니다. 一書는 《世說新語》의 편 이름도 아니다. 《六書正譌》는 元代의 周伯琦가 지은 책이다. 盧文弨는 楊倞이 인용한 말 중, 箸가 실제로는 著의 의미이며, 찾아 보면 箸가 著처럼 사용되거나, 글자가 바뀌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또 어느 글자가 꼭 맞거나 틀리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荀子》를 교정함에, 箸를 따라야 할지, 著를 따라야 할지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하고 있다. 또, 盧文弨는 所引說苑/見善說篇//作著之髮毛/建之/女工不能爲也///末句作其所託者使然也///餘與此同, ‘楊倞이 인용한 《說苑》 내용은 「善說」에 있다. 「善說」에는 著之髮毛/建之/女工不能爲也라고 되어 있고, 마지막 句는 其所託者使然也라고 되어 있다. 이 외에는 인용된 글과 같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蒙鳩는 집을 아주 정교하게 만든다. 그러나 집을 잘 지어 놓고는, 정작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줄기에 매달아 놓기 때문에, 바람이 한 번 불면 변을 당하고 만다. 건물이 아무리 튼튼해도, 그 건물을 짓는 장소가 모래사장이라면,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말 것이다. 荀子는 蒙鳩의 사례를 통해, 사람의 자질이나 재능, 재주, 그리고 기울이는 노력과 무관하게, 주변 환경이 좋지 못하다면, 그 결과 역시 잘 되기 어렵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4. 西方有木焉/名曰射干, ◈ 西方는 체언으로, ‘서쪽 지방’이다. 西는 관형어로, ‘서쪽의’다. 方은 체언으로, ‘지방’이다. ◈ 有는 용언으로, ‘있다’, ‘존재하다’라는 말이다. ◈ 木은 체언으로, 정황상 ‘풀’을 이를 것이다. 射干을 이른다. 그런데 木은 본래 ‘나무’를 이르지, ‘풀’을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木이 射干을 가리킨다는 점은 분명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볼 때, 射干이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우리가 草木이라고 하듯이, ‘풀과 나무’를 아울러 사용하다가 草 대신 木이라고 썼을런지도 모르겠다. 뒤의 木莖非能長也라는 句에서 木이 ‘풀’이라는 의미로 또 사용되었다는 점을 보면, 단순하게 木을 오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듯하다. 《康熙字典》에도 木이 ‘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예는 없다. 楊倞은 木, 즉 ‘나무’라고 되어 있는 말이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이 주석은 射干 부분을 풀이할 때 인용해 두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 宋基采가 여러 설들을 소개해 두었는데, 참고할 만하다. 久保愛와 楊柳橋는 草의 옛 글자인 屮가 옮겨 쓰이는 과정에서 잘못되었다고 했다고 하였고, 駱瑞鶴과 王天海는 이미 草木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이를 가지고 木도 ‘풀’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 焉은 也처럼, 아마 말을 끝내는 조사일 것이다. 아마 有가 용언으로, ‘존재하다’, ‘있다’라는 식으로 사용될 때, 이에 대한 조사로 사용되는 듯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오는 有鳥焉의 焉 부분에서 언급하였었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焉이 없다. ◈ 名은 체언으로, ‘이름’이다. 鳥의 ‘이름’을 이른다. ◈ 曰은 용언으로, ‘~라고 한다’라는 표현이다. 蒙鳩를 받는다. ◈ 射干은 체언으로, 풀의 이름이다. 射는 ‘야’라고 읽는다. 이 점은 楊倞의 주석에 나와 있다. 나는 ‘야간’이라고 음역하였다. 西方有木焉/名曰射干은, 직역하면 ‘서쪽 지방에는 풀이 있는데, 이름은 야간이라고 한다’가 되지만, 나는 ‘서쪽 지방에는 야간이라는 풀이 있다’처럼 의역하였다. 射干에 대한 정보는 곳곳에 흩어져 있다. 司馬相如의 「子虛賦」에 其上則有鵷鶵孔鸞騰遠射干, ‘그 위에는 鵷鶵, 孔鸞, 騰遠, 射干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郭璞은 射干/似狐/能緣木, ‘射干은 似狐다. 나무에 기생할 수 있다’라고 하였고, 李善은 射/弋舍切, ‘射는 弋과 舍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또, 司馬相如의 「上林賦」에는 槀本射干, ‘槀本과 射干’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司馬彪는 射干/香草也, ‘射干은 香草다’라고 하였고, 李善은 또 射/弋舍切, ‘射는 弋과 舍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들은 모두 《文選》에 실려 있다. 《史記》 「司馬相如列傳」과 《漢書》 「司馬相如傳」에도 「子虛賦」와 「上林賦」가 인용되어 있다. 「子虛賦」에 대해, 裴駰은 《漢書音義》에 射干/似狐/能緣木이라고 되어 있다는 말을 인용해 두었으며, 司馬貞과 顏師古는 長揖이 射干/似狐/能緣木이라고 되어 있다는 말을 인용해 두었다. 이 말은 《文選》에 인용되어 있는 郭璞의 주석과 동일하다. 「上林賦」에 대해서, 裴駰은 郭璞이 揭車/一名乞輿//稿本/稿茇//射干/十月生//皆香草, ‘揭車는 乞輿라고도 한다. 稿本은 稿茇이다. 射干은 10월에 난다. 모두 香草다’라고 한 말을 인용해 두었고, 顏師古는 射干/即烏扇耳//射音弋舍反, ‘射干은 곧 烏扇이다. 射는 弋과 舍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또, 《文選》에 수록되어 있는 宋玉의 「高唐賦」에 青荃射干, ‘青荃과 射干’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李善은 見本草//夜干/一名烏扇/今江東爲烏蓮/史記爲射干, ‘《本草》에 나온다. 夜干은 烏扇이라고 하기도 한다. 지금 江東 지방에서는 烏蓮이라고 한다. 《史記》에는 射干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했다. 《本草》는 《神農本草經》을 이른다. 이 책은 東漢이나 三國 시대에 성립되었고, 蕭梁의 陶弘景이 교정했다고 한다. 《本草經》, 《本經》이라고도 한다. 《史記》는 앞에서 내가 인용한 「司馬相如列傳」을 이른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本草藥名有射干/一名烏扇//陶弘景云/花白莖長/如射人之執竿///又引阮公詩云/射干臨層城///是生於高處也//據本草/在草部中/又生南陽川谷/此云西方有木/未詳//或曰/長四寸/即是草//云木/誤也//蓋生南陽/亦生西方也//射音夜, ‘《本草》에 있는 약 이름 중에 射干이 있다. 烏扇이라고 하기도 한다. 陶弘景은 “꽃은 희고, 줄기는 길다. 射人이 장대를 쥐고 있는 듯하다”라고 하였고, 또 阮公의 詩를 인용해서, “射干이 層城을 내려다 본다”라고 했으니, 이 말은 射干이 높은 곳에 산다는 뜻이다. 《本草》에서 射干은 《本草》 중 「草部」에 있고, 또 南陽의 냇가나 계곡에 산다고 하는데, 《荀子》에는 “서쪽 지방에 나무가 있다”라고 하니 이상하다. 어떤 사람은 射干의 길이가 네 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射干은 풀일 것이다. 나무라고 한 것은 잘못된 말이다. 아마도 南陽에도 살고, 또 서쪽 지방에도 살 것이다. 射의 音은 夜다’라고 하였다. 《本草》는 《神農本草經》을 이른다. 인용된 내용은 「草部 下品」에 있다. 《神農本草經》에는 射干/味苦平//主治咳逆上氣/喉痺咽痛不得消息/散結氣/腹中邪逆/食飲大熱//一名烏扇/一名烏蒲//生川谷, ‘射干은 맛이 쓰고 평이하다. 주로 咳逆, 上氣를 치료한다. 喉痺, 咽痛은 가라앉히지 못한다. 뭉친 氣를 흐트리고, 뱃속의 邪氣를 역행시키니, 먹거나 마시면 열이 심하게 난다. 烏扇이라고도 하고, 烏蒲라고도 한다. 냇가나 계곡에 산다’라고 되어 있다. 陶弘景은 蕭梁 시대의 도사다. 《神農本草經》을 교정한 陶弘景이 바로 이 사람이다. 射人은 단순히 ‘활 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인지, 《周禮》 「夏官司馬」에 나와 있는 관직 이름을 이르는 말인지 모르겠다. 阮公은 아마 西晉의 阮籍을 이르는 듯하다. 層城은 西王母가 산다는 곳으로, 崑崙山 중 가장 높은 데라고 한다. 즉, 射干이 層城을 내려다 본다는 말은, 射干이 崑崙山 보다 더 높은 데에 산다는 뜻이다. 宋基采는 인용된 阮籍의 詩가 「詠懐詩」라고 하였다. 楊倞의 주석에 대해 盧文弨는, 注烏扇/宋本與本草同//元刻作烏翣/廣雅/烏萐/射干也///萐翣同所夾反/是二字皆可通, ‘楊倞의 주석에 있는 烏扇이는 말은, 《宋本》 및 《本草》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元刻》에는 烏翣이라고 되어 있고, 《廣雅》에는 “烏萐은 射干이다”라는 말이 있다. 萐와 翣은 모두 所와 夾의 반절로 읽는다. 즉, 이 두 글자는 모두 통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廣雅》는 曹魏의 長揖이 편찬한 책이다. 《廣雅》 「釋草」에 鳥蓮/射干也, ‘鳥蓮은 射干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盧文弨가 인용한 글은 아마 이 말을 이르는 듯하다. 鳥蓮은 아마 烏蓮의 오기일 것이다. ◈◈ 蜀虎案 : 앞에서는 蒙鳩를 가지고 비유하였었고, 이번에는 射干을 가지고 비유하고 있다. [본문으로]
  5. 莖長四寸/生於高山之上/而臨百仞之淵, ◈ 莖長은 체언으로, 射干 ‘줄기의 길이’를 이른다. 莖은 관형어로, ‘줄기의’라는 말이다. 長은 체언으로, ‘길이’다. ◈ 四寸은 체언으로, ‘네 촌’, ‘네 마디’다. 대략 9cm를 이른다. 寸은 길이의 단위다. ‘촌’이라고도 하고, ‘마디’라고도 한다. 10寸이 1尺인데, 1尺을 22.5cm라고 하면, 1寸은 2.25cm가 되고, 4寸은 9cm가 된다. ◈ 莖長四寸은 ‘줄기 길이는 네 마디다’라고 해석될 것이지만, 여기서는 앞뒤의 대조 관계를 밝혀서 ‘네 마디밖에 안 되지만’이라고 의역하였다. ◈ 生은 용언으로, ‘살다’, ‘서식하다’라는 말이다. ◈ 於는 ‘~에’, ‘~에서’다. 명사구인 高山之上을 받는다. ◈ 高山은 체언으로, ‘높은 산’이다. 高는 관형어로, ‘높은’이라는 말이다. 山은 체언으로, ‘산’이다. ◈ 高山之上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처럼 해석된다. ◈ 上은 체언으로, ‘위’다. ‘정상’이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 而臨百仞之淵의 而는 순접으로, ‘~하면서’처럼 해석된다. ◈ 臨은 용언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百仞之淵을 받는다. 《說文解字》 「臥部」에는 監에 대해 監/臨下也, '내려다 보다'라고 하였는데, 臨을 다시 臨/監臨, ' 臨은 監臨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으니, 臨 역시 監처럼 '내려다 보다'라고 할 수 있겠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大明」에 上帝臨女, '上帝가 너를 臨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臨/視也, '臨은 보다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孔穎達 역시 臨視, '보다'라고 풀이하였다. 《詩》 「頌 魯頌」의 「閟宮」에도 같은 말이 있다. 《詩》 「國風 邶風」의 「日月」에는 日居月諸/照臨下土, '해와 달이 下土를 照臨한다'라는 말이 있고, 《詩》 「小雅 北山之什」의 「小明」에는 明明上天/照臨下土, '밝은 上天이 下土를 照臨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照臨은 '굽어 살피다', '굽어 비추다'라는 말이다. 臨이 '보다'가 아니라 '살피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아래를' 살핀다는 의미로는 같다. 《莊子》 「人間世」에도 其高臨山/十仞而後有枝, ‘그 높이는 산을 臨할 정도였으니, 밑둥에서 열 길이나 올라간 뒤에야 가지가 나 있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臨 역시 ‘내려다 보다’라는 뜻이다. ◈ 百仞은 체언으로, ‘백 인’, ‘백 길’이다. 대략 170m를 이른다. 仞은 길이의 단위로, ‘인’이라고도 하고, ‘길’이라고도 한다. 1仞이 7~8尺이다. 1尺을 22.5cm라고 하면, 1仞은 7.5尺 정도이고, 이는 곧 168.75cm다. 즉, 100仞은 약 16875cm, 즉 170m 정도가 된다. ◈ 百仞之淵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한’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 淵은 체언으로, ‘못’, ‘연못’이다. 臨百仞之淵이라는 말은, 아마 연못의 깊이가 백 길이라는 말이 아니라, 射干이 있는 곳에 비해, 연못이 백 길 낮다는 의미 같다. 이에 따라, 여기서는 百仞之淵을 ‘백 길 아래에 있는 연못’과 같이 의역하였다. ◈◈ 蜀虎案 : 射干은 10cm도 되지 않는 작은 풀이다. 그러나 높은 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연못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射干이 낮은 데에 살았다면, 연못을 내려다 보기는커녕,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뜯어 먹히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집 앞에 화담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의 높이는 200m 정도이다. 그러나 화담산 위에 올라서, 자리를 잘 잡고 보면, 이 동네 일대가 조그맣게 내려다 보인다. 산 밑에서 보는 경치와, 산 위에서 보는 경치가 같을 수는 없다. 이처럼 荀子는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 安危나 위치, 경험이 달라질 수 있기에, 주변 환경에 대해 고찰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6. 木莖非能長也/所立者然也, ◈ 木莖은 체언으로, ‘풀 줄기’다. 木은 관형어로, ‘풀의’라는 말이다. 莖은 체언으로, ‘줄기’다. ◈ 非는 용언으로, ‘~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能長을 받는다. 不처럼 부정어로 보고, 能長을 한정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 能長을 명사구가 아니라 용언으로 해석해야 한다. ◈ 能長의 能은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長을 받는다. ◈ 能長의 長은 용언으로, ‘자라다’ 혹은 ‘길어지다’라는 말이다. 生長 혹은 延長의 長과 같다. 나는 ‘자라다’라고 번역하였다. 能長은 명사구로, ‘자랄 수 있는 것’처럼 해석된다. 여기서는 문맥을 고려하여, ‘자랄 수 있기 때문’처럼 의역하였다. 그러면 非能長은 ‘자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처럼 번역될 것이다. ◈ 所立者는 ‘서 있는 곳’이다. 여기서는 ‘살고 있는 곳’이라고 의역하였다. 所는 피동을 뜻한다. 爲, 見, 被 등과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所繫者의 所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立은 용언으로, ‘서다’ 혹은 ‘세우다’라는 말이다. 즉, 所立은 ‘세워져 있는’, ‘서게 되어 있는’이라는 말이고, 이는 곧 ‘서 있는’이라는 뜻이 된다. 者는 ‘~한 것’인데, 여기서는 장소를 이르므로, ‘~한 곳’이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所立을 받는다. 그러면 所立者는 ‘서 있는 곳’, 즉 射干이 ‘서 있는 곳’, 곧 ‘살고 있는 곳’이 된다. 射干은 풀이기에, 땅에 뿌리를 박고, ‘서서’ 사니, 立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고, 射干이 높은 데에 사는 것은 射干이 원한 바가 아니라, 그렇게 된 바이므로, 所立이라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立을 ‘살다’처럼 의역하였다. ◈ 然은 용언으로, ‘그러하다’, ‘그렇다’는 말이다. 生於高山之上, 즉 射干이 높은 데에서 산다는 점을 이른다. ◈◈ 蜀虎案 : 射干이 연못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까닭은, 射干이 그 만큼 길게 자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射干이 자라 나는 환경이 그러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본문으로]
  7. 蓬生麻中/不扶而直//白沙在涅/與之俱黑, ◈ 蓬은 체언으로, ‘쑥’이다. ◈ 生은 용언으로, ‘살다’, ‘자라다’라는 말이다. 生長의 生과 같다. 명사구인 麻中을 받는다. ◈ 麻中은 체언으로, ‘삼 가운데’, ‘삼들 사이’라는 말이다. 麻는 ‘삼’이다. 여기서는 관형어로, ‘삼의’‘ 삼들의’라는 말이다. 中은 체언으로, ‘사이’, ‘중’, ‘가운데’다. 즉, 麻中은 ‘삼들 사이’, ‘삼들 가운데’가 된다. ◈ 蓬生麻中은 蓬生於麻中, ‘蓬이 麻中에서 生한다’처럼 해석해야 한다. ◈ 不은 부정어로, 扶를 한정한다. ◈ 扶는 용언으로, ‘돕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꼿꼿하게 자라도록 ‘받쳐 주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而는 역접으로, ‘그래도’, ‘그럼에도’, ‘도리어’처럼 해석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而가 自로 되어 있다. 즉, 不扶而直이 아니라 不扶自直이 된다. 이 때 自는 ‘스스로’라는 부사어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自로 보아도 말은 되지만, 의미가 있어서 自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글자 모양이 비슷해서 옮겨 쓰다가 而를 自로 잘못 옮긴 듯하다. ◈ 直은 용언으로, ‘곧아지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곧게 자라다’라고 해석하였다. ◈ 白沙는 ‘흰 모래’다. 白은 관형어로, ‘하얀’, ‘흰’이다. 沙는 체언으로, ‘모래’다. ◈ 在는 용언으로, ‘있다’, ‘위치하다’라는 말이다. ◈ 涅은 체언으로, ‘개흙’이다. 뻘에 있는 ‘새까만 흙’이다. 나는 ‘뻘’이라고 번역하였다. 《說文解字》 「水部」에는 涅/黑土在水中也//从水从土/日聲, ‘涅은 물 속에 있는 까만 흙이다. 水와 土가 들어 있다. 日이라고 읽는다’라고 되어 있다. ◈ 與는 ‘~와’다. 之를 받는다. ◈ 與之의 之는 지시대명사로, 아마 涅을 가리키는 듯하다. ◈ 俱는 부사어로, ‘함께’, ‘같이’다. ◈ 黑은 용언으로, ‘검어지다’, ‘까매지다’라는 말이다. ◈ 白沙在涅/與之俱黑이라는 말은 지금 《荀子》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말은 《大戴禮記》 「勸學」에도 없다. 그러나 이 句가 본문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정황적 증거를 王念孫이 들어 놓았다. 나는 王念孫의 설에 근거하여, 이 두 句를 본문에 넣고 풀이하였다. 王念孫은 此下有白沙在涅與之俱黑二句/而今本脫之/大戴記亦脫此二句//今本荀子無此二句/疑後人依大戴删之也//楊不釋此二句/則所見本已同今本//此言善惡無常/唯人所習//故白沙在涅與蓬生麻中/義正相反/且黑與直爲韻//若無此二句/則旣失其義而又失其韻矣//洪範正義云/荀卿書云/蓬生麻中/不扶自直/白沙在涅/與之俱黑///褚少孫續三王世家云/傳曰/蓬生麻中/不扶自直/白沙在泥[今本泥下有中字/涉上文而衍]/與之皆黑者/土地敎化/使之然也///索隱曰/蓬生麻中以下/竝見荀卿子///案上文引傳曰靑采出於藍云云/下文引傳曰蘭根與白芷云云/皆見荀子/則此所引傳/亦荀子也//然則漢唐人所見荀子皆有此二句/不得以大戴無此二句而刪之也, ‘이 蓬生麻中/不扶而直 다음에는 白沙在涅과 與之俱黑이라는 두 句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 판본에는 빠져 있고, 《大戴記》에도 역시 두 句가 빠져 있다. 《荀子》 지금 판본에는 이 두 句가 없는데, 나중 사람이 《大戴》에 근거해서 빼 버리지 않았나 의심된다. 楊倞은 이 두 句를 풀이하고 있지 않으니, 楊倞이 보았던 판본에는 이미 지금 판본과 같이 두 句가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은 善이나 惡은 일정하지 않고, 오직 사람이 겪은 바에 달려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白沙在涅과 蓬生麻中은 의미가 정반대이고, 또한, 黑과 直은 韻이 맞으니, 이에 이 두 句가 없다면, 이 글은 진정 의미를 잃게 될 것이요, 韻도 맞지 않게 될 것이다. 《洪範正義》에는 “荀卿의 글에, ‘쑥이 삼들 사이에서 자라면, 받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곧아지고, 하얀 모래가 뻘에 있으면, 뻘과 함께 모두 새까매지고 만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되어 있고, 褚少孫이 보충한 「三王世家」에는, “《傳》에, ‘쑥이 삼들 사이에서 자라면, 받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곧아지고, 하얀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王先謙의 부연 : 지금 판본에는 泥 다음에 中이 더 있다. 앞의 글 때문에 잘못 들어온 글자일 것이다.] 진흙과 함께 모두 새까매지고 만다’라고 하였으니, 이 사건은 그 토지의 수준과 교화된 수준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索隱》에서는 “蓬生麻中부터의 글은 모두 《荀卿子》에 나온다”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자. 「三王世家」에서, 앞의 글에서는 “《傳》에, ‘靑采는 쪽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고, 아래의 글에서는 “《傳》에, ‘蘭根과 白芷는’이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들은 모두 《荀子》에 나온다. 즉, 이 부분에서 인용한 《傳》이라는 것 역시 《荀子》일 것이다. 그러한 즉, 漢代와 唐代 사람들이 읽었던 《荀子》에는 白沙在涅과 與之俱黑이라는 두 句가 모두 있었을 것이니, 《大戴》에 이 두 句가 없다고 해서 이 두 句를 날려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大戴記》와 《大戴》는 《大戴禮記》다. 白沙在涅과 蓬生麻中의 의미가 반대된다고 한 까닭은, 白沙在涅은 좋은 것이 나빠지는 상황을, 蓬生麻中은 나쁜 것이 좋아지는 상황을 상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洪範正義》란, 唐代에 편찬된 《尙書正義》의 「周書 洪範」을 이른다. 孔安國의 주석을 기초로 해서, 孔穎達이 疏를 달았다. 인용된 내용은 孔穎達의 疏 중에 있는데, 荀卿書曰/蓬生麻中/不扶自直//白沙在涅/與之俱黑이라고 되어 있다. 云이 曰로 되어 있을 뿐, 내용은 같다. 荀卿書는 곧 ‘荀卿의 글’로, 《荀子》를 이른다. 「三王世家」는 《史記》 「三王世家」를 이른다. 《傳》이란, 옛 글을 뜻하는 말이다. 《索隱》은 司馬貞의 《史記索隱》이다. 《史記索隱》에는 已下並見荀卿子라고만 되어 있다. 《荀卿子》는 곧 《荀子》다. 靑采出於藍과 蘭根與白芷는 모두 「三王世家」 본문에 인용되어 있는 말들로, 그 원전은 모두 《荀子》 「勸學」이다. 靑采出於藍은 가장 첫 부분에 나왔었고, 蘭根與白芷는 바로 이 뒷부분에 나온다. 王念孫은 또, 又案群書治要曾子制言篇云/故蓬生麻中/不扶乃直[燕禮注/乃猶而也]//白沙在泥/與之皆黑[大戴同]///考荀子書/多與曾子同者/此四句亦本於曾子/斷無截去二句之理, ‘또 살펴 보면, 《群書治要》 「曾子 制言」에는 “그래서, 쑥이 삼들 사이에서 자라면, 받쳐 주지 않아도 도리어 곧아지고[王先謙의 부연 : 「燕禮」에 대한 주석에서 乃는 而와 같다고 했다.], 하얀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진흙과 함께 모두 새까매진다[王先謙의 부연 : 《大戴》와 같다.]”라고 되어 있다. 《荀子》의 글을 살펴 보면, 「曾子」와 같은 경우가 많고, 이 네 句 역시 근본적으로는 「曾子」에서 나온 것이니, 단연코, 이 두 句들을 본문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하겠다’라고 하였다. 「曾子」는 《群書治要》의 「曾子」를 이른다. 「曾子」는 다시 「修身」, 「立孝」, 「制言」, 「疾病」으로 나뉘어 있다. 「燕禮」는 《儀禮》의 「燕禮」를 이른다. 「燕禮」의 주석이란, 아마 鄭玄의 주석일 것이다. 王先謙이 인용한 주석은, 士升/大夫不拜/乃飲/實爵, ‘士는 升하고, 大夫는 절하지 않으며, 乃 마시고, 잔을 채운다’라는 말에 달려 있다. 또, 王先謙이 《大戴》와 같다고 부연한 말은, 王念孫이 《群書治要》 「曾子 制言」에서 인용한 蓬生麻中/不扶乃直//白沙在泥/與之皆黑이 《大戴禮記》 「曾子制言」에 나와 있는 문구와 동일하다는 뜻이다. 저 말은 「曾子制言 上」에 나온다. 王念孫이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한 것처럼, 白沙在涅/與之俱黑은 본문의 蓬生麻中/不扶而直 다음에 오도록 이어 읽는 편이 타당하다. 王先謙은 《荀子集解》에 白沙在涅/與之俱黑을 본문에 편입시키지 않았고, 王念孫의 설을 인용만 해 두었다. 그러나 나는 상기한 것처럼, 王念孫의 설에 따라, 이 句를 본문에 들여 놓았다. ◈◈ 蜀虎案 : 쑥은 본래 구불구불하게 자라지만, 삼들 사이에서 자라면 저절로 곧게 자라는데, 삼들이 곧게 자라기 때문에, 그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모래가 새하얗다 하더라도, 뻘에 던져 두면, 결국 뻘의 흙처럼 새까맣게 물들고 말 것이니, 이 경우 역시 그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쑥의 사례는, 사람의 자질이 좋지 않더라도,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겠고, 흰 모래의 사례는, 사람의 자질이 좋더라도, 나쁜 환경에서 자라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이겠다. 王念孫의 말처럼, 두 句의 의미는 상반되지만, 함의하고 있는 뜻은 환경이 중요하다는 점으로 동일하다. 近墨者黑이나, 近朱者赤 역시 이 句들과 의미가 같다. ◈◈ 蜀虎又案 : 그런데, 白沙在涅/與之俱黑이 본문에 포함되어 있었건, 없었건 간에, 蓬生麻中/不扶而直 부분은 다른 句節들과 다소 이질적이다. 앞에 나왔던 蒙鳩, 射干에 대한 글, 그리고 이 뒤에 나올 芷에 대한 글은 모두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蓬生麻中/不扶而直은 이 句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白沙在涅/與之俱黑을 포함시킨다 하더라도, 蒙鳩, 射干, 芷에 대한 글과는 형식적으로 전혀 같지 않고, 오히려 불쑥 끼어 들었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楊倞이 이 부분에 주석을 달지 않았다는 점도 의심스럽다. 그러면 이 句들은 본래 《荀子》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나중에 잘못 들어 온 글들일까. 그러나 王念孫이 밝혔듯, 唐代에 편찬된 《尙書正義》나 《史記索隱》에는 이 句들이 《荀子》에서 나왔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으니, 이 또한 이상하다. 王念孫은 《群書治要》를 들어서, 《荀子》의 글들 중, 「曾子」를 원전으로 하는 듯한 글이 다소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이 맞다면, 「三王世家」 등에서 인용한 글은 《荀子》가 아니라 「曾子」였고, 「曾子」에 비해 《荀子》가 유명해지면서, 唐代 학자들이 《荀子》를 원전으로 지목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본문으로]
  8. 蘭槐之根是爲芷//其漸之滫/君子不近/庶人不服, ◈ 蘭槐는 체언으로, 풀의 이름인 것 같다. 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香草 또는 약재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우리말로는 ‘구릿대’라고 부르는 듯하다. 나는 ‘난괴’라고 음역하였다. 《神農本草經》에는 蘭槐라는 말이 없고, 또 明代 李時珍이 지은 《本草綱目》에도 蘭槐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蘭槐/香草/其根是爲芷也, ‘蘭槐는 香草다. 그 뿌리를 芷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아래에 기재하였듯, 《大戴禮記》 「勸學」에는 蘭槐之根是爲芷가 蘭氏之根/懷氏之苞라고 되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蘭槐는 ‘蘭과 槐’ 두 가지 풀을 지칭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 蘭槐之根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처럼 해석된다. ◈ 根은 체언으로, ‘뿌리’다. ◈ 蘭槐之根是爲芷의 是는 아마 주격 조사인 듯하다. 之와 같다. 즉, 蘭槐之根是爲芷는 ‘蘭槐之根는 芷라고 爲한다’라는 말이 된다. 是는 之와 같이 사용되었다. 《詩》 「國風 衛風」의 「氓」에 ‘배신한 것 是 생각지 못한 까닭이니, 역시 끝나 버리고 말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배신한 것 之 생각지 못한 까닭이다’라는 뜻이다. 즉, 이 是는 之와 같이 주격 조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大戴禮記》 「文王官人」에 ‘평소에 어질고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기르는 일을 使是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중 使是는 使之와 같은 뜻이다. 여기서 是는 之와 같이 의미 없는 조사로 사용되었다. 「文王官人」에는 平人이 아니라 平仁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 王引之가 잘못 인용한 모양이다. 나는 仁에 맞추어 번역하였다. 또, 《春秋左氏傳》 「襄公」 40년에는 ‘晉나라의 命은 未是有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未之有라는 뜻이다. 未之有는 ‘있던 적이 없었다’는 말로, 여기서 之는 의미 없는 조사다. 未是有의 是 역시 之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王引之는 是訓爲之/故之亦訓爲是/互見之字下, ‘是를 之라고 풀이할 수 있으니, 之 역시 是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 점은 之에 대한 내용에 수록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是氏」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 爲는 용언으로, ‘~라고 하다’라는 말이다. 芷를 받는다. ◈ 芷는 체언으로, 본문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蘭槐의 뿌리를 이른다. 지금은 ‘白芷’라고 부르는 것 같다. 《神農本草經》 「草部 中品」에는 白芷/味辛溫//主治女人漏下赤白/血閉/陰腫/寒熱/風頭/侵目淚出/長肌膚/潤澤顏色/可作面脂//一名芳香//生川谷, ‘白芷의 맛은 맵고 따뜻하다. 주로, 여자의 漏下赤白, 血閉, 陰腫, 寒熱, 風頭, 侵目淚出 증상을 치료하는 데 쓴다. 피푸를 자라게 하고, 낯빛을 윤택하게 만들기에, 얼굴에 화장품으로 사용할 수 있다. 芳香이라고도 한다. 냇가나 계곡에 서식한다’라고 되어 있다. 《神農本草經》은 東漢 말기에서 三國 시대에 성립되었다고 보므로, 白芷라는 표현은 이미 東漢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神農本草經》에 근거해 보면, 白芷는 아마 약재로도 쓰고, 일종의 화장품으로도 사용된 것 같다. 또, 이런 말도 있다. 《楚辭》 「離騷經」에 扈江離與闢芷兮, ‘江離와 闢芷를 扈하고’라는 말이 있는데, 王逸은 江離/闢芷皆香草名也//闢/幽也/芷幽而香芳也, ‘江離와 闢芷는 모두 香草의 이름이다. 闢은 그윽하다는 말이니, 芷가 그윽하게 향기를 낸다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朱熹는 芷/亦香草/生於幽僻之處, ‘芷 역시 香草다. 幽僻한 곳에 서식한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王逸과 朱熹는 모두 芷를 香草의 일종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한편, 《史記》 「三王世家」에는 이 句가 蘭根與白芷라고 인용되어 있다. 《史記》를 따른다면, 蘭根과 白芷는 서로 별개의 사물이 되어야 한다. 《史記》에 대해 司馬貞은 白芷/香草也/音止/又音昌改反, ‘白芷는 香草다. 芷는 止로 읽는데, 昌과 改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張守節 역시 香草라고 풀이하고 있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本草/白芷/一名白茝///陶弘景云/即離騷所謂蘭茝也///蓋苗名蘭茝/根名芷也//蘭槐當是蘭茝別名/故云蘭槐之根是爲芷也, ‘《本草》에는 “白芷는 白茝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陶弘景은 “곧, 「離騷」에 나오는 蘭茝다”라고 했다. 아마도 그 싹의 이름이 蘭茝고, 뿌리의 이름이 芷일 것이다. 蘭槐는 분명 蘭茝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蘭槐의 뿌리는 芷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本草》는 아마 《神農本草經》을 이를 것이다. 陶弘景은 蕭梁의 도사다. 한편, 郝懿行은 芷/即茝也//茝/芷古字同聲通用, ‘芷는 곧 茝와 같다. 茝는 芷의 옛 글자다. 발음이 같아 통용되었다’라고 하였다. 앞에서 《史記》 「三王世家」의 芷에 대해 張守節은 昌과 改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발음이 ‘채’가 된다. 그런데 茝도 ‘채’라고 읽는다. 郝懿行의 설처럼, 고대에는 두 글자가 서로 발음이 같아 통용되었을 것이다. ◈ 蘭槐之根是爲芷는 《大戴禮記》 「勸學」에 蘭氏之根/懷氏之苞, ‘蘭氏의 뿌리와 懷氏의 뿌리’라고 되어 있다. 즉, 《大戴禮記》의 글은 蘭氏之根/懷氏之苞/漸之滫中처럼 이어진다. 蘭이 풀 이름인 것처럼, 懷도 아마 풀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荀子》 본문의 蘭槐에서, 槐는 懷와 발음이 비슷하므로, 서로 가차자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蘭氏之根/懷氏之苞라는 말은 蘭槐之根과 같은 말일 것이고, 그러면 蘭槐는 사실 ‘蘭과 槐’처럼 두 가지 풀을 지칭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宋基采는 懷를 ‘홰나무 꽃’이라고 번역해 두었는데, 참고할 수 있겠다. 盧文弨는 蘭槐之根/大戴禮作蘭氏之根/懷氏之苞///晏子作/今夫蘭本/三年而成///說苑雜言篇同, ‘본문의 蘭槐之根은 《大戴禮》에는 蘭氏之根/懷氏之苞라고 되어 있다. 《晏子》에는 “대저, 蘭의 뿌리는 3년이 지나야 다 자란다”라고 되어 있는데, 《說苑》 「雜言」에도 똑같은 글이 있다’라고 하였다. 《大戴禮》는 《大戴禮記》다. 《晏子》는 《晏子春秋》다. 인용문은 《晏子春秋》 「內篇 雜上」에 나온다. 《說苑》에는 今夫蘭本三年이라고만 되어 있고, 而成이 빠져 있다. 이 이야기는 《孔子家語》 「六本」에도 나오는데, 《說苑》처럼 今夫蘭本三年이라고만 되어 있고, 而成이 빠져 있다. ◈ 其漸之滫의 其는 부사어로, 아마 ‘만약’이라는 말 같다. 若과 같다. 《詩》 「小雅 小旻之什」의 「小旻」에 謀之其臧/則具是違//謀之不臧/則具是依, ‘謀가 其 臧하다면 모두 어기고, 謀가 臧하지 않다면 모두 의지한다’라는 말이 있다. 《禮記》 「文王世子」에 公族其有死罪/則磬于甸人, ‘公族이 其 죽을 죄를 졌다면, 甸人에게 磬한다’라는 말이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其濟/君之靈也//不濟/則以死繼之, ‘其 濟한다면 君의 靈이다. 濟하지 못한다면 죽음으로 따르겠다’라는 말이 있다. 또, 《春秋左氏傳》 「襄公」 23년에 其然/將具敝車而行, ‘其 그렇게 한다면, 이제 敝車를 具해서 行하겠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其는 모두 ‘만약’이라는 말이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其가 없고, 漸之滫中으로 되어 있다. ◈ 漸은 용언으로, ‘담그다’, ‘적시다’, ‘물들이다’라는 따위의 말이다. 《詩》 「國風 衛風」 「氓」에 淇水湯湯/漸車帷裳, ‘淇水가 넘쳐서 車, 帷, 裳을 漸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陸德明은 漸/子廉反/注同/漬也/濕也, ‘漸은 子와 廉의 반절로 읽는다. 毛亨의 주석에서도 그렇게 읽는다. 담그다, 젖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朱熹는 漸/漬也, ‘漸은 담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氓」에서는 물에 ‘담기다’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 《漢書》 「董仲舒傳」에 漸民以仁, ‘仁을 가지고 백성들을 漸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漸謂浸潤之, ‘漸은 점차 물들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어진 습관에 ‘점차 익숙해지게 만든다’는 뜻이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漸/漬也/染也, ‘漸은 담그다, 물들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또 子廉反, ‘子와 廉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한편, 《史記》 「三王世家」에는 본문의 이 句가 漸之滫中이라고 인용되어 있는데, 司馬貞은 漸音子潛反//漸/漬也, ‘漸은 子와 潛의 반절로 읽는다. 漸은 담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張守節 역시 漸을 漸漬, ‘담그다’라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 其漸之滫의 之는 ‘~에’라는 말이다. 之於, 之乎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繫之葦苕의 之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滫는 체언으로, ‘오래된 뜨물’, ‘쉰 뜨물’을 뜻한다. 여기서 ‘뜨물’은, 쌀뜨물처럼, 곡식을 씻은 뒤 생긴 뿌연 물을 이른다. 맥락을 볼 때, 滫는 본문에서 ‘더러운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이야 쌀뜨물을 가지고 설거지도 하고, 세수도 한다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說文解字》 「水部」에는 滫/久泔也//从水脩聲, ‘滫는 오래된 뜨물이다. 水가 들어 있고, 脩라고 읽는다’라고 되어 있다. 《史記》 「三王世家」에는 본문의 이 句가 漸之滫中이라고 인용되어 있는데, 裴駰은 徐廣曰/滫者/淅米汁也//音先糾反, ‘徐廣은 “滫라는 것은 쌀을 씻어서 나온 액체다. 先과 糾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했다’라고 하였고, 司馬貞은 滫/讀如禮滫溲之滫/謂洗也//音思酒反, ‘滫는 《禮》에 나오는 滫溲의 滫처럼 읽는다. 씻은 것이라는 뜻이다. 思와 酒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禮》는 《禮記》, 《周禮》, 《儀禮》 중 하나일 텐데, 어디에도 滫溲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張守節은 滫를 米汁, ‘쌀에서 나온 액체’라고 풀이하였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도 「三王世家」처럼 滫가 滫中으로, 즉 漸之滫中으로 되어 있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滫/溺也, ‘滫는 오줌이다’라고 하였고, 또 思酒反, ‘思와 酒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盧文弨는 又案/滫/久泔也/說文廣韻訓皆同//又晏子雜上篇作湛之苦酒///苦/讀如良苦之苦/義皆相近//楊氏乃訓滫爲溺/未見所出, ‘또 생각해 보면, 滫는 오래된 뜨물이다. 《說文》, 《廣韻》의 풀이가 모두 그렇다. 또, 《晏子》 「雜上」에는 “苦酒에 湛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苦는 良苦의 苦처럼 읽으니, 의미가 서로 비슷하다. 그런데 楊倞은 滫를 오줌이라고 풀이했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또 ‘《淮南》 「人間訓」에 대한 高誘의 주석에서는 “滫는 냄새나는 액체다”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楊倞의 주석과 서로 비슷하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良苦는 아마 ‘아주 쓰다’라는 말 같다. 《淮南》은 《淮南子》를 이른다. 《淮南子》 「人間訓」에는 及漸之於滫, ‘滫에 漸하기에 이르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인용된 高誘의 주석은 이 부분에 달려 있다. 한편 郝懿行은 滫/久泔也, ‘滫는 오래된 뜨물이다’라고 하였다. 楊倞은 滫를 ‘오줌’이라고 풀이했는데, 盧文弨, 郝懿行은 滫를 모두 ‘오래된 뜨물’, ‘쉰 뜨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특히 盧文弨는 楊倞이 滫를 왜 ‘오줌’이라고 풀이했는지에 대해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찾아 보니, 楊倞은 아마 《禮記》에 근거하여 풀이한 것 같다. 《禮記》 「內則」에 堇荁枌榆免槁薧滫以滑之, ‘堇, 荁, 枌, 榆, 免, 槁, 薧, 滫을 가지고 之를 滑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秦人溲曰滫, ‘秦나라 사람들은 溲를 滫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陸德明은 滫/思酒反/溲也, ‘滫는 思와 酒의 반절로 읽는다. 溲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思와 酒의 반절로 읽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楊倞의 주석과 같다. 문제는 溲다. 溲는 문맥상 ‘빚은 술’ 혹은 ‘반죽한 음식’을 이르는 듯한데, 공교롭게도 溲에는 ‘오줌’이라는 의미가 있다. 楊倞이 《禮記》에서 溲가 ‘오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몰랐을 리는 없다. 아마도 《荀子》에서 滫가 맥락상 ‘더러운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점을 보고,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찾아 내기 위해 고민하다가, 《禮記》에서 滫를 溲라고 풀이한 말을 보고는, 溲를 ‘오줌’이라고 풀이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宋基采 역시 이렇게 추측하고 있다. 《荀子》에서는 滫를 ‘오줌’이라고 풀이해도 전체적인 내용은 이어진다. 그러나 나는 ‘오줌’을 따르지 않고, ‘쉰 뜨물’이라고 번역하였다. ◈ 不近의 不은 부정어다. 近을 한정한다. 不服의 不도 그렇다. 服을 한정한다. ◈ 近은 용언으로, ‘가까이 하다’, ‘친근하게 하다’라는 말이다. ◈ 庶人은 체언으로,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을 이른다. 庶는 衆과 같은 말로, ‘뭇’이라고 해석된다. 즉, 庶人은 ‘뭇 사람’, 즉 ‘보통 사람’이 된다. 나는 ‘서인’이라고 음역하였다. 이 글에서는 君子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服은 용언이다. 몸에 ‘지니다’, 몸에 ‘차다’라고 볼 수도 있고, 약재를 ‘복용하다’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나는 ‘차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두 설 모두 근거가 있다. 먼저, 앞에서 살펴 보았듯, 芷, 즉 白芷는 원래 약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庶人, 즉 사람들이 白芷를 약재로써 ‘복용’한다고 생각하면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그러면, 몸에 ‘차다’라고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晏子春秋》 「雜上」에도 이 이야기가 대체적으로 인용되어 있는데, 「雜上」에는 今夫蘭本/三年而成/湛之苦酒/則君子不近/庶人不佩//湛之縻醢/而賈匹馬矣//非蘭本美也/所湛然也, ‘대저, 蘭의 뿌리는 3년이 지나야 다 자라는데, 苦酒에 담가 두면 君子도 가까이 하지 않고, 庶人도 차지 않는다. 그러나 縻醢에 적혀 두면, 말 한 필의 값어치가 된다. 蘭의 뿌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담가 둔 것이 그러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즉, 같은 이야기인데, 「雜上」에는 服이 佩, 즉 몸에 ‘차다’라는 말로 바뀌어 있다. 이로써 생각해 보면, 白芷를 몸에 차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었던 모양이므로, 본문의 服 역시 ‘차다’라고 해석하는 편이 좋겠다. 또, 《荀子》 「大略」에 蘭茝稾本/漸於蜜醴/一佩易之, ‘蘭茝나 稾本를 蜜醴에 적셔 두면, 한 번 차고 바꾼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글의 맥락도 본문과 같으므로, 역시 근거로 삼을 수 있겠다. 宋基采는 王天海의 설을 소개해 두었다. 王天海는 服을 약으로 ‘복용하다’라고 해석하였는데, 白芷가 본래 약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宋基采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大略」의 위 句를 들어서, ‘차다’라고 풀이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9. 其質非不美也/所漸者然也, ◈ 其는 지시대명사로, ‘芷’, ‘白芷’를 가리킨다. ‘白芷의’처럼 해석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其가 없다. 즉, 質非不美也/所漸者然也라고만 되어 있다. ◈ 質은 체언으로, ‘본바탕’, ‘바탕’, ‘본래의 성질’을 이른다. ◈ 非는 용언으로, ‘~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不美를 받는다. ◈ 不美는 ‘훌륭하지 않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이므로, ‘훌륭하지 않기’처럼 해석된다. 不은 부정어로, 美를 한정한다. 美는 용언으로, ‘훌륭하다’라는 말이다. ◈ 所漸者는 ‘적셔진 것’이다. 여기서는 ‘적신 것’이라고 의역하였다. 所는 피동을 뜻한다. 爲, 見, 被 등과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所繫者의 所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漸은 용언으로, ‘적시다’, ‘담그다’라는 말이다. 즉, 所漸은 ‘적셔진’이라는 말이고, 이는 곧 ‘적신’이라는 뜻이 된다. 者는 ‘~한 것’이다. 所漸을 받는다. 그러면 所漸者는 ‘적셔진 것’, 즉 芷가 ‘적셔진 것’, 곧 芷를 ‘적신 것’이 된다. ‘쉰 뜨물’을 이른다. ◈ 然은 용언으로, ‘그러하다’, ‘그렇다’는 말이다. 滫의 특성, 즉 ‘지저분하다’는 말을 이른다. ◈◈ 楊倞은 言雖香草/浸漬於溺中/則可惡也, ‘香草라고 하더라도, 오줌에 적셔 두면, 싫어할 만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郝懿行은 大略篇云/蘭茝稾本/漸於蜜醴/一佩易之///與此義近//晏子春秋雜上篇云/蘭本三年而成/湛之苦酒/則君子不近/庶人不佩//湛之縻醢/而賈匹馬矣///縻/說苑雜言篇作鹿//此言香草之根爲芷/漸以滫及酒皆不美/惟漸之鹿醢/乃能益其香而賈易匹馬//故曰/其質非不美/所漸者然也, ‘「大略」에 “蘭茝나 稾本를 蜜醴에 적셔 두면, 한 번 차고 바꾼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부분과 의미가 비슷하다. 《晏子春秋》 「雜上」에는 “蘭의 뿌리는 3년이 지나야 다 자라는데, 苦酒에 담가 두면 君子도 가까이 하지 않고, 庶人도 차지 않는다. 그러나 縻醢에 적혀 두면, 말 한 필의 값어치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縻는 《說苑》 「雜言」에는 鹿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글은, 香草의 뿌리를 芷라고 하는데, 이를 滫에 적혀 두나, 酒에 적셔 두나, 다 좋다고 생각되지 않고, 다만 鹿醢에 담가 놓아야 향이 깊어지고, 값어치도 말 한 필을 바꿀 만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본질이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적셔 둔 것이 그러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略」은 《荀子》의 「大略」을 이른다. 服 부분에 인용하였듯, 《晏子春秋》에는 저 말 뒤에 非蘭本美也/所湛然也, ‘蘭의 뿌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담가 둔 것이 그러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더 붙어 있다. 《說苑》 「雜言」에는 今夫蘭本三年/湛之以鹿醢/既成則易以匹馬/非蘭本美也, ‘대저, 蘭의 뿌리는 3년 동안 鹿醢에 담가 두는데, 다 완성되면 말 한 필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蘭의 뿌리가 훌륭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주제는 같지만 글자와 내용이 조금 다르다. 郝懿行은 《晏子春秋》과 《說苑》에 근거하여, 본래의 가치가 어떻든 간에, 어떤 환경에 있느냐에 따라 가치는 변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 蜀虎案 : 芷는 香草였다. 향이 나기 때문에, 몸에 패용하기도 하고, 방향제처럼 사용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芷를 쉰 뜨물에 담가 버리면, 향도 날아갈 것이거니와, 지저분한 게 묻었다고 해서 패용하기는커녕, 만지거나 향을 맡으려 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이는, 芷가 본래 더러워서가 아니라, 芷를 적신 뜨물이 더럽기 때문이다. 사람의 품성이나 자질이 어떻든, 주변 환경이 지저분하다면, 사람 또한 그 환경에 물들게 되는 법이다. [본문으로]
  10. 故君子居必擇鄉/遊必就士/所以防邪僻而近中正也, ◈ 故는 ‘이러한 까닭으로’, ‘그러므로’, ‘이처럼’이라고 해석된다. 是故와 같다. 《荀子》에는 故가 是故와 같이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故가 是故로 되어 있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君子와 居必擇鄉 사이에 靖居恭學/脩身致志, ‘조심스럽게 居하고, 삼가 배우면서, 자신을 수양하고, 심지를 닦는다’라는 말이 더 있다. 즉, 《大戴禮記》에는 故君子居必擇鄉이 是故君子靖居恭學/脩身致志/處必擇鄉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없는 편이 좋겠다. 앞의 이야기와 이 節의 인과 관계가, 靖居恭學/脩身致志가 없어야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 居는 부사어로, 어디에 ‘머무를 때’, ‘살 때’처럼 해석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居가 處로 되어 있다. 의미는 동일하다. ◈ 必은 부사어로, ‘반드시’다. ◈ 擇은 용언으로, ‘가리다’, ‘선택하다’, ‘고르다’라는 말이다. 鄉을 받는다. 여기서는 여러 지역 중 적당한 곳을 ‘가린다’, ‘선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鄉은 체언으로, ‘지역’, ‘마을’을 이른다. 君子가 居할 ‘지역’, 즉 君子가 살 ‘지역’을 뜻한다. ◈ 遊는 부사어로, ‘놀 때’, 친구와 ‘어울릴 때’, ‘어울려 놀 때’라는 말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遊가 游로 되어 있다. 游 역시 ‘놀다’는 말이다. ◈ 就는 용언으로, ‘좇다’, ‘따르다’는 말이다. 士를 받는다. ◈ 士는 체언으로, ‘선비’를 이른다. ◈ 所以는 ‘~하기 때문이다’, ‘~하기 위해서다’라는 말이다. 防邪僻而近中正, 즉 防邪僻과 近中正을 받는다. 즉, 所以防邪僻而近中正은 ‘防邪僻하고, 近中正하기 때문이다’ 혹은 ‘防邪僻하고, 近中正하기 위해서다’라는 말이 된다. ◈ 防은 용언으로, ‘막다’, ‘방어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近과 대구를 이루고 있으므로, ‘멀리하다’ 혹은 ‘피하다’처럼 번역해야 하겠다. 邪僻을 받는다. ◈ 邪僻은 체언으로, ‘삿된 것’, ‘그릇된 것’,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릇된 도리’라고 번역하였다. 대구를 이루고 있는 中正에 반대되는 말이다. 邪는 ‘사악하다’, ‘간사하다’, ‘올바르지 않다’, ‘삿되다’라는 말이다. 僻은 본래 ‘궁벽하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邪와 같이 ‘올바르지 않다’, ‘그릇되다’, ‘간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邪僻은, 같은 의미의 두 글자가 모여서 이루어진 단어다. 그러면 僻이 邪와 같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墨子》 「辭過」에 是以其民淫僻而難治/其君奢侈而難諫也, ‘이런 까닭으로, 백성이 淫僻하면 다스리기 어렵고, 군주가 사치스러우면 간언하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고, 《大戴禮記》 「盛德」에는 風俗淫僻, ‘風俗이 淫僻하다’라는 말이 있으며, 賈誼의 《新書》 「輔佐」에는 或有淫僻犯禁而不知, ‘혹 淫僻하여서 금기를 어기면서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淫僻은 모두 한 단어로 사용되었으니, 淫과 僻의 의미가 또한 같다는 점을 알 수 있다. 淫은 ‘올바르지 않다’, ‘삿되다’는 말이므로, 僻 또한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僻이 곧장 邪로 풀이된 예도 있다. 《淮南子》 「精神訓」에 㪍志勝而行不僻矣, ‘왕성한 뜻이 일어나더라도, 행실은 僻하지 않게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僻/邪也, ‘僻은 그릇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僻見의 僻처럼, 僻에는 ‘편중되다’, ‘치우치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 역시 ‘올바르지 않다’는 의미와 통한다. 한편, 《禮記》 「樂記」에 中正無邪/禮之質也, ‘中正하고 邪하지 않다는 점이야말로 禮의 근본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穎達은 內心中正/無有邪僻, ‘마음 속으로는 中正하고, 邪僻함이 있지 않다’라고 이를 풀이하였으니, 邪가 곧 邪僻, 즉 邪와 僻의 의미가 동일함을 또 확인할 수 있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邪僻이 僻邪라고 되어 있다. 의미는 동일하다. ◈ 防邪僻而近中正의 而는 순접으로, ‘~하고’, ‘그리고’처럼 해석된다. ◈ 近은 용언으로, ‘가까이 하다’라는 말이다. 中正을 받는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近이 道로 되어 있다. 여기서 道는 ‘좇다’, ‘따르다’는 뜻일 것이다. 즉, 道中正은 ‘中正을 따르다’는 말이 된다. ◈ 中正은 체언으로, ‘올바른 것’, ‘올바름’이다. 나는 ‘올바른 도리’라고 번역하였다. 대구를 이루고 있는 邪僻에 반대되는 말이다. 邪僻에 대해, 한 단어이기에, 邪와 僻의 의미가 동일하다고 간주하였던 것처럼, 中正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正은 ‘올바르다’는 말이다. 中은 ‘정 가운데’라는 말이니, 곧 ‘치우치지 않다’라는 뜻이 되고, 이는 곧 ‘올바르다’는 뜻과 통한다. 邪僻의 僻이 ‘치우치다’, ‘편중되다’라는 의미였다는 점과 반대된다. 邪僻 부분에서 인용하였듯, 《禮記》 「樂記」에 中正無邪/禮之質也, ‘中正하고 그릇되지 않다는 점이야말로 禮의 근본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中正이 邪와 반대되는 뜻으로 고대에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禮記》 「中庸」에는 齊莊中正/足以有敬也, ‘가지런하고 中正하니, 공경 받을 만하다’라는 말이 있고, 《禮記》 「儒行」에는 言必先信/行必中正, ‘말은 반드시 믿을 만해야 하고, 행동은 반드시 中正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 中正들이 모두 ‘올바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또한 분명하겠다. ◈◈ 蜀虎案 : 荀子는 蒙鳩, 射干, 쑥, 흰 모래, 芷의 사례를 들면서, 환경이 사람에게 영향을 크게 끼치기 때문에, 살 곳과 만날 사람을 택할 때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주변 환경이 그릇되었다면, 그 사람도 그릇될 수밖에 없고, 주변 환경이 올바르다면, 그 사람도 올바르게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환경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 蜀虎又案 : 莊子가 비유로 논지를 전개한 것처럼, 荀子 또한 비유를 통해 논지를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莊子가 들었던 비유가 다소 난해하였고, 또 莊子 본인이 스스로 자기 주장을 직설적으로 잘 표현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荀子는 직설적으로 비유하고, 자신의 논지 또한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荀子》는 《莊子》 보다 쉽게 읽힌다. 荀子는 이 節에서처럼, 자신의 논지를 ‘故’라는 표현을 이용해서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이 節은, 蒙鳩 이야기 등을 저술한 요지와 까닭을, 저자인 荀子 본인이 정리한 문장이다. [본문으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