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성한왕(삼국사기 제사지 중)

2020. 6. 1. 11:26삼국사기 이야기/잡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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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제사지 처음 부분에는 왕실의 오묘에 대한 말들이 있습니다. 이 중 혜공왕 시기에 대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至第三十六代惠恭王, 始定五廟. 以味鄒王爲金姓始祖, 以太宗大王·文武大王, 平百濟·髙句麗有大功德, 並爲世世不毀之宗, 兼親廟二爲五廟.(제사지)

 

 

혜공왕 시기에 처음으로 오묘를 두었는데, 미추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셋을 먼저 두고, 친묘(親廟) 둘을 더 두어 오묘로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친묘는 아마 아빠와 할아버지를 의미할 것입니다. 정작 혜공왕본기에는 오묘 관련 기록이 없지만, 다른 왕들의 기록에서 아빠와 할아버지를 그렇게 둔다는 말이 있거든요.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은 말할 것 없이 무열왕과 문무왕입니다. 두 사람은 통일을 완수한 왕들이었기 때문에 중대 이후 신라에서는 각별했을 것입니다. 중대의 왕들은 무열왕의 직계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미추왕입니다. 미추왕을 '김성'의 시조로 두었다고 했거든요. 미추왕은 신라의 13번째 왕이자, 김씨 중에서는 최초로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신라 초기에는 박씨와 석씨가 왕위를 차지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보통 배우는 대로 박씨와 석씨가 사이 좋게 왕위를 갈라 먹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미추왕이 즉위했을 때는 석씨가 박씨를 밀어내는 형국이었습니다. '박박박 석 박박박박 석석석석 김 석석석석 김...'이었으니까요. 미추왕이 즉위하기 전 네 왕이 석씨였고, 미추왕이 죽은 뒤의 네 왕이 다시 석씨였습니다. 박씨는 8대의 아달라왕이 죽은 뒤, 하대에 신덕왕이 즉위할 때까지 한 번도 왕이 된 적이 없었고, 석씨는 16대의 흘해왕이 죽은 뒤에는 아예 신라본기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내물왕 이후로는 김씨가 거의 왕위를 독점했습니다. 내물왕은 17번째 왕입니다. 그래서 신라본기만 갖고 생각하기로는, 미추왕이 어떤 이유로 석씨에게서 왕위를 찬탈했다가 사후 다시 석씨에게 빼앗겼고, 그 이후 내물왕 때 석씨를 완전히 숙청하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김씨 '왕조'를 연 사람은 내물왕이지만, 내물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미추왕이 어떤 이유에서든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래서 혜공왕 때도 미추왕을 '시조'로서 존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 당대의 금석문들에는 좀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星漢'이라는 사람이 있어, 이 사람을 태조라고 부르고 있거든요. 비문 한 개에만 그렇게 적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비문에 등장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것저것 찾아 보며, 그 안에 '성한'이나 '태조'가 등장하는 비만 해도 여섯 가지나 됩니다. 문무왕릉비, 흥덕왕릉비, 김인문묘비, 광조사진철대사비,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 황초령비가 그렇습니다.

 

 

紹太祖之基纂承王位兢身自愼恐違(황초령비, 568)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문무왕릉비, 681~682?)

 

太祖漢王啓千齡之(김인문묘비, 695 이후)

 

太祖星漢...卄四代孫(흥덕왕릉비, 836 이후)

 

大師法諱利俗姓金氏其先林人也考其國史實星漢之苗遠祖世道凌夷(광조사진철대사비, 937)

 

俗姓金氏雞林人也其先䧏自聖韓興於𨚗勿本枝百世貽(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 939)

 

 

황초령비는 황초령에 진흥왕이 세운 비입니다. 성한이라는 말은 없으나, '태조'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문무왕릉비는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세웠습니다. '15대조 성한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마 문무왕의 15대조가 성한왕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김인문묘비에는 '태조 한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흥덕왕릉비에는 '태조 한왕'과 '24대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비문이 아주 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라서 다른 것에 비해서는 불확실하지만, 아마도 흥덕왕이 태조 한왕의 24대손이라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광조사진철대사비와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는 사실 신라 당대의 것은 아니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세워진 비들입니다. 하지만 진철대사와 진공대사는 모두 김씨이고, 그 선조를 계림 사람이며 '성한'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진철대사비에는 '星漢'이라고 되어 있는데, 진공대사비에는 '聖韓'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발음은 같으니, 동일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흥덕왕릉비와 김인문묘비에 나오는 태조 한왕도, 태조라고 칭한 점에서 황초령비의 태조와 같다고 볼 수 있겠고, 이것이 문무왕릉비에 나오는 성한왕과 같은 사람일 것 같습니다. 좀 의뭉스러운 점은, 진철대사비와 진공대사비 모두 그 비문은 최언위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왜 '성한'의 글자를 다르게 적었는지입니다. 음차였더라도 굳이 다른 글자를 쓸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정리하면, 태조, '星漢', '聖韓'은 모두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앞의 제사지에 관한 기록, 그리고 '태조'라는 명칭에 대해 생각해 볼 점이 생깁니다. 왜냐면 신라 왕들 중에 '태조'는 없었거든요. 태조, 태종 같이 '조'나 '종'을 붙인 명칭을 우리는 묘호라고 합니다. 종묘에다 이렇게 바쳤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저는 자세한 이야기는 모릅니다. 다만 이 묘호라는 것이 원래는 천자에게만 붙이는 것이라서, '제후국'이 묘호를 붙였을 때는 외교적으로 마찰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0

 

'태종'을 둘러싼 신라와 당의 갈등(삼국사기 신문왕본기 중)

보통 왕을 부를 때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호고, 하나는 묘호입니다. 근데 저는 둘 다 잘 모릅니다. 대충 태조, 태종, 정종, 철종 이런 게 묘호고, 명제, 양제, 영락제 같이 묘호와

philosophistory.tistory.com

 

 

신라에서는 무열왕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리고 고구려를 멸망시킬 기틀을 닦았기 때문에 무열왕을 특히 존숭했습니다. 그래서 '태종'이라는 묘호까지 올렸는데, 이에 대해서 탁발부가 문제를 삼았었습니다. 전쟁 같은 다른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으나, 이후에 신라에서는 공개적으로 묘호를 올린 적이 없고, 그 이전에도 없었습니다. 금석문 등을 통해 원성왕을 열조(烈祖)라고 불렀던 정황이 보이기는 하나, 삼국사기에는 나와 있지 않죠. 우리나라에서 묘호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고려는 원 간섭기의 충렬왕 이후 왕들을 제외하면, 모두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같은 묘호를 사용합니다. 조선에서는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하면 모든 왕들에게 묘호를 올렸습니다.

 

그럼 신라 외에는 어땠을까요? 백제에서는 묘호를 쓴 예가 없었고, 고구려에서 '태조대왕'이라고 해서 '태조'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이것을 묘호라 보아야 할지, 시호라 보아야 할지는 좀 애매합니다. 고구려인들의 자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 확실하게 추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태조대왕 당시 고구려는 한나라 동북 국경을 공격, 약탈하고 다녔기 때문에 묘호를 쓰지 말라는 '온건한 간섭' 같은 건 없었습니다. 사실 중국인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태조라고 불렀는지도 몰랐을 수 있겠습니다. 서로서로 어느 정도 알아야 간섭이든 뭐든 하는 거니까요. 아마 잘 몰랐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태조'라는 묘호는 왕조를 새로 연 사람에게 붙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왕건과 이성계는 태조가 되었고, 조광윤이와 주원장이도 태조가 되었습니다. 유방이는 보통 사람들이 '고조'로 알고 있지만, 사실 묘호는 태조이고 시호가 고황제입니다. 고구려의 태조대왕의 경우, 태조대왕 때 고구려의 왕실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태조라고 한다고 보통 봅니다. 나라를 세웠는데도 묘호로 태조를 받지 않은 예도 있습니다. 탁발부의 이연이 그렇습니다. 이연의 묘호는 고조인데, 그 아빠는 세조, 그 할아버지가 태조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성계의 경우, 그 아빠부터 고조할아버지까지를 각가 환조, 도조, 익조, 목조로 추존했는데, 태조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라에 태조가 있다면, '신라를 연'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상 신라를 연 사람은 바로 박혁거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제가 인용한 금석문 여섯 개를 볼 때, 성한왕 또는 태조는 김씨여야 합니다. 김씨들이 자신을 태조의 후손이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혁거세는 박씨라고 합니다. 김씨가 아닙니다. 따라서 나라를 열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태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역으로, 김씨의 계보를 거슬러 가다 보면, 가장 처음에 있는 것이 바로 태조가 아닐까요? 삼국사기에서 김씨의 가장 시조로 나오는 사람은 바로 김알지입니다. 삼국사기에서 김알지가 처음 등장했던 때는 65년으로, 탈해왕 9년입니다.

 

 

九年, 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 枝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竒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 聦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雞林, 因以爲國號.(탈해이사금, 65)

 

 

시림

 

 

당시 재상이었던 호공이 '始林'에서 금궤짝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 남자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길러 이름을 알지라고 했는데, 금궤짝이서 나와서 성을 '金'으로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김씨의 시작입니다. 이론적으로, 모든 김씨는 김알지의 후손이고, 김알지는 모든 김씨의 시조이므로, 알지를 '태조 성한왕'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김알지는 왕이 된 적이 없습니다. 김씨들의 시조이기는 하나, '김씨 왕조'의 시조는 아닌 셈입니다. 왕이 아니더라도, 그 후손들이 왕으로 추존하는 경우는 있지만, 김알지에 대해서는 그런 말도 없거니와, 추존하는 대상도 보통 아빠나 할아버지, 혹은 그 주변까지이지, 저 멀리 1대의 시조 어른까지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김씨 중 최초로 왕이 된 미추왕과 김알지 사이에는 5명이나 있습니다. '알지 -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왕'이거든요. 따라서 미추왕이 추존하기에는 너무 멉니다. 사실 미추왕 이후로는 다시 석씨 네 명이 즉위하기 때문에, 미추왕이 추존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이 태조 성한왕에 대한 첫 번째 설입니다.

 

 

알지의 아들인 세한을 태조 성한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김알지의 아들은 '勢漢'으로, 삼국유사에는 ''으로 나와 있습니다. 세한과 열한은 아마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경주 김씨 족보에는 '勢漢'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세한을 태조 성한왕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한과 세한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알지 보다는 훨씬 가깝네요. 근데 그것밖에 없습니다. 족보를 보면 세한이 이찬까지 지냈다고 하니 고위직까지 가긴 했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행적이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삼국의 초기 행적이 불분명하다고 해도, 당대 사람들이 '태조'로 칭할 정도였다면 송곳이 튀어나오듯, 눈에 띠는 치적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특히 삼국 중 신라의 자료가 비교적 가장 많이 남아 있었을 것인데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문제가 좀 있습니다. 따라서 아마 세한은 태조 성한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한과 세한의 음이 비슷하다는 것은 아주 아쉽고 아까운 점입니다. 그래서 이런 설도 있습니다. 사실은 세한이 김씨의 시조인데, 자기 행적을 신격화하기는 곤란하니, 자기 선대에 다른 사람을 하나 만들어서 그 사람을 시조로 삼았다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김알지는 가공의 인물이고, 세한이 바로 김씨의 시조가 됩니다. 하지만 이 경우도, 여전히 세한이 왕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김씨 첫째 왕인 미추왕으로부터 너무 멀다는 점이 여전히 문제로 남습니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문제는 남습니다.

 

사실 성한왕 할 때 '星漢'은 사람 이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星漢'은 은하수라는 말이니까요. 별 보면 누구나 동경하잖아요? 옛날 사람들은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을 별에 빗대기도 하는 거죠. 그래서 아마 '태조'의 업적을 상징하는 말로써 은하수, '성한'이라는 말을 사용해 성한왕이라고 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연식은 아예 '味鄒'와 '星漢'이 같다는 것을 언어학적으로 논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성한은 사람 이름이 아니니, 세한과의 음운적 유사성에서 성한을 찾을 필요는 없는 것이죠.

 

이것이 태조 성한왕에 대한 두 번째 설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사지에 나온 것처럼 '시조'인 미추왕을 태조 성한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미추왕은 성한과 발음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왕이라는 행적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태조' 같은 묘호가 있었다고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추왕은 김씨 중 가장 먼저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미추왕에서 내물왕까지의 상황을 보면, 미추왕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내물왕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미추왕은 김씨 왕조의 형식적 시조이기도 하고, 실질적 시조이기도 합니다. 미추왕이 즉위했다가 죽은 뒤에 왕위가 왜 석씨에게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씨 왕조는 미추왕 덕분에 확실히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지에서 혜공왕 때 미추왕을 시조로 두었다는 말은 전후 상황상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미추왕은 최초의 왕이고, 김씨 왕조를 연 실질적 창건자이자 그 존재 근거입니다. 따라서 발음상 성한과 유사하지는 않지만, 김씨 왕조의 '태조'로서의 자격은 알지, 세한 등 누구 보다도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제사지의 시조 기록이 시사하는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미추왕이 바로 '실존'했다는 강력한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학자에 따라 편한 대로 취사선택하기도 하고, 왜놈들은 대체로 부정하고, 저도 사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다, 저렇다 할 정황들만 있고, 교차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요. 고고학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신라가 고대 국가로서 성장했다고 보이는 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좀 차이가 나거든요. 사실 일본서기를 보면 왜놈들이 삼국사기를 부정한다는 건 좀 꼴값이 아닌가 하지만, 일단 설은 설이니까 소개해 두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삼국사기의 기록을 모두 믿지 않지만 그 대체적인 사건의 흐름은 아주 대체적으로 맞다고 전제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알지와 세한 등, 미추왕의 먼 선조들은 실존하지 않거나, 실존했다 하더라도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아주 달랐다고 합시다. 하지만 미추왕은 실재해야 합니다. 이로써, 미추왕이 혹시 외부 세력이 아니었나 하는 설도 있습니다. 미추왕 즉위 전후로 '김씨'가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종의 이유와 사건들로 미추왕이 석씨에게서 왕위를 찬탈했는데, 이걸 사후에도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석씨에게 찬탈당했다가 내물왕 때 다시 찬탈한 게 아닌가 합니다. 어쨌거나 미추왕은 실재해야 하니까요. 이 설이 타당하려면, 외부에서 김씨가 들어왔다는 타당한 정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태조 성한왕에 대한 세 번째 설입니다.

 

 

 

알지, 세한, 미추왕을 각각 태조 성한왕으로 보는 세 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위에 기술한 것은 그 정황 뿐이고, 실제로 증명이라고 하기엔 부족합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실제로 태조 성한왕이냐고 하려면, 금석문에 나온 것처럼 문무왕의 15대조인지, 흥덕왕이 24대손인지 등을 따져 봐야 합니다. 사실 '대손', '대조' 같은 말들이 고대에도 요즘처럼 아주 엄격하게 맞아 들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일본서기를 읽을 때, 천황의 즉위기에 누가 누구의 후손이고, 누가 누구의 부모라는 말은 안 믿었거든요. 후세 상황에 맞게 윤색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그랬다 하더라도 책을 쓴 당대에는 기록이 잘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요. 하지만 따져 봐야 합니다. 이것이 태조 성한왕에 대해 남아 있는 유일한 '증거'니까요. 물론 학자들은 이런 작업도 모두 해 두었습니다.

 

알지에서 문무왕까지의 세계는 이렇습니다. 전부 아빠에서 아들로 이어집니다.

 

 

알지 -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말구와 미추왕 - 내물왕(말구의 자식) - 복호 - 습보 - 지증왕 - 입종 - 진흥왕 - 진지왕 - 용춘 - 무열왕 - 문무왕

 

 

무열왕을 문무왕의 1대조, 용춘을 2대조로 세면, 알지가 바로 문무왕의 16대조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럼 15대조 할아버지는 세한이 되죠.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면 문무왕릉비에 나온 대로, 세한이 15대조이고, 따라서 세한이 태조 성한왕입니다.

 

 

알지(16) - 세한(15) - 아도(14) - 수류(13) - 욱보(12) - 구도(11) - 말구와 미추왕(10) - 내물왕(말구의 자식)(9) - 복호(8) - 습보(7) - 지증왕(6) - 입종(5) - 진흥왕(4) - 진지왕(3) - 용춘(2) - 무열왕(1) - 문무왕(0)

 

 

하지만 대수, 세수를 세는 법이 지금과 달랐다면 어땠을까요? 저는 무식해서 잘 모르지만, 정연식은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1대로 세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알지(17) - 세한(16) - 아도(15) - 수류(14) - 욱보(13) - 구도(12) - 말구와 미추왕(11) - 내물왕(말구의 자식)(10) - 복호(9) - 습보(8) - 지증왕(7) - 입종(6) - 진흥왕(5) - 진지왕(4) - 용춘(3) - 무열왕(2) - 문무왕(1)

 

 

이러면 사실 세한과 알지는 모두 문무왕의 15대조는 아니게 됩니다. 미추왕은 두 경우 모두 10대조와 11대조이므로, 15대조로 대충 '보정'하기에는 좀 멀죠. 그런데 이렇게 봐서 아도를 태조 성한왕이라고 보기도 좀 그렇습니다. 아도는 세한 보다도 더 기록이 없습니다. 왕도 아니죠.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끼워 맞춰 보려던 놈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전간공작(前間恭作), 금서룡(今西龍)이 그랬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알지를 태조 성한왕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금서룡은, 문무왕릉비의 '十五代祖 星漢王'을 '十五代 祖 星漢王'으로, 즉 '15대의 할아버지 성한왕'으로 끼워 맞춰서 알지를 어떻게든 태조 성한왕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동서고금, 심지어는 근본 없는 왜놈들조차도 한문을 그런 식으로 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금서룡은 곧 '알지' 대신 '세한'으로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전간공작의 경우는 제가 위에서 소개한 대로, 알지와 세한이 동일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이 주장은 세한이 태조 성한왕이라는 입장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세한을 태조 성한왕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기한 전간공작, 말송보화(末松保和), 장전하수(長田夏樹), 목불례인(木下禮仁), 그리고 문경현이 그랬습니다. 이 주장들은 근본적으로 세한과 성한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아 보이긴 하지만, 이런 단서를 추적할 때 아주 중요합니다. 당장 지금도 발음의 유사성으로 삼국사기에 나온 고지명들을 비정하거나 추정하기도 하니까요. 때문에 'ㅅ한'과 'ㅅ한'이 같다는 것은 아주 강력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상기한 것처럼, 다른 문제들도 합치되어야 이 증거가 진실이 됩니다. 먼저 세한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아닌 시조에게 '태조'를 붙인다고 하더라도, '성한왕'이라고 '왕'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환조, 목조 등은 왕이 아니었지만 묘호는 받았고, 다만 무슨 왕이라는 말까지 받진 않았죠. 음운상의 유사성 만큼이나 강력한 반증인 셈입니다. 고대의 관습 대로 새면 세한이 문무왕의 15대조가 아니라는 점도 문제였습니다. 문무왕부터 1대조로 세면 세한은 16대조가 되니까요. 물론 무열왕부터 1대조로 세면, 세한은 15대조가 됩니다. 만약 이렇다면, 왜 이 경우만 고대의 관습과는 달리 세어야 하는지를 해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알지와 미추왕의 입장이 남습니다. 알지는 일단 김씨의 시조입니다. 알지와 세한, 둘 다 왕이 아닌데, 기왕에 태조에다가 '왕'으로까지 추봉한다면, 세한이 아주 큰 공적을 세웠다면 모를까, 저 같으면 시조인 알지에게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세한을 태조로 둔다는 것은 많이 부자연스럽죠. 또한 이 경우, 왕조의 실질적 시조인 미추왕은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결국 세한과 성한이 같다는 설을 미는 사람들은 15대조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그리고 왜 하필 세한이 태조가 되어야 하는지를 해결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세한을 알지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거나, 세한을 어떻게든 문무왕의 15대조로 끼워 맞췄습니다. 또한, 왕조의 실질적 시조인 미추왕의 경우, 허구적 인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대체로 믿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전간공작, 말송보화가 그랬습니다. 전간공작은 소지왕 이전 기록은 믿을 수 없으며, 내물왕 이전에는 신라가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이 경우, 미추왕은 실재한 시조왕이 아니라, 왕조의 관념적인 시조로 남게 됩니다.  말송보화는 '星漢'이 '熱漢'과 뜻으로 통하고, 이것이 '혁거세'의 이칭인 '불구내'와 소리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성한왕이 실존한 것이 아니라 관념적인 시조로 남게 됩니다. 목불례인은 중고기와 중대기의 역사 인식이 달라지면서, 중고기에는 내물왕을 시조로 모셨으나, 중대 이후로는 시조 미추왕을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목불례인의 관점은 결국, 미추왕, 성한왕 등이 모두 실존하지 않는다는 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문경현은 박씨의 시조는 남해왕이고, 김씨의 시조는 성한왕인데, 김씨와 박씨가 태양신을 시조로 만들면서 김씨는 알지, 박씨는 혁거세로 시조를 만들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문경현은 알지와 혁거세를 관념적 시조로 보았습니다. 성한왕은 세한이지만, 이 경우 세한이 왜 기록에 왕으로 등장하지 않는지는 깔끔하게 해명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세한을 태조 성한왕으로 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미추왕을 설명할 수 없기에, 미추왕을 아예 실제 왕이 아니라고 못박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미추왕은 기록상 엄연히 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고, 따라서 15대조라는 것에 맞추기 위해, 기록상 실존하는 미추왕을 없애 버리고, 기록상 왕이 아닌 세한을 왕으로 올리는 것은 손톱을 깎기 위해 손을 자르는 것 만큼 앞뒤가 바뀐 설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음운상의 유사성이 크긴 하지만, 이렇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오히려 늘어나기 때문에 설명으로서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 두 가지 설들은 대체로 2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나왔던 설들입니다. 이 때까지 학자들은 15대조라는 표현 때문에, 미추왕을 아예 태조 성한왕의 후보에서 배제해 두었습니다. 다만 80년대부터는 미추왕이 태조 성한왕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의의 양상은 새롭게 변했습니다.

 

 

 

미추왕을 태조 성한왕으로 주장한 최초의 학자는 이종욱이었습니다. 다만 이종욱은 문무왕의 15대조라는 기술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종욱은 왕의 정통성 때문에 미추왕과 내물왕 사이 4명을 없애 버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다른 모든 정황이 미추왕이 태조 성한왕이라는 것을 가리키지만, 15대조가 유일한 걸림돌이라면, 15대조라는 표현이 정확한지 의심해 보는 것도 타당합니다. 이종태가 바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15대조만 문제가 아니라, 흥덕왕릉비의 24대손이라는 표현도 아주 문제가 있었습니다. 선덕왕은 문무왕과 네 세대 만큼 차이가 나고, 원성왕은 선덕왕과 두 세대 차이가 나며, 흥덕왕은 원성왕의 손자이므로 다시 두 세대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흥덕왕은 태조 성한왕의 23(15+4+2+2)대손이 되니까요. 이 난점들은 대수를 세는 기준을 아예 바꾸면 대개 해결됩니다.

 

여기에 맞는 예가 있습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경우,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대왕이 대주류왕의 17세손으로 적혀 있습니다.

 

 

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至十七世孫國𦊆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광개토대왕비, 414)

 

 

그런데 광개토왕은 대주류왕, 즉 대무신왕의 17세손이 아닙니다.

 

 

추모왕 - 유리왕 - 대무신왕, 민중왕, 재사 - 모본왕(대무신왕 아들),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모두 재사의 아들) - 고국천왕, 산상왕(신대왕 아들) - 동천왕(산상왕 아들) - 중천왕 - 서천왕 - 봉상왕, 돌고 - 미천왕(돌고의 아들) - 고국원왕 - 소수림왕, 고국양왕 - 광개토왕(고국양왕 아들)

 

 

여기서 광개토왕의 직계만 보면 이렇습니다. 대무신왕은 넣습니다.

 

 

추모왕 - 유리왕 - 대무신왕, 재사(0) - 신대왕(1) - 산상왕(2) - 동천왕(3) - 중천왕(4) - 서천왕(5) - 돌고(6) - 미천왕(7) - 고국원왕(8) - 고국양왕(9) - 광개토왕(10)

 

 

따라서 광개토왕은 대무신왕의 10세손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대무신왕의 직계도 아니죠. 추모왕에서 세어도 12세손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한두 세도 아니고, 일곱 세나 차이가 나는 셈인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가장 쉽게 생각하면 중간에 계보가 누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채희국이 그랬습니다. 손영종은 고구려 건국 연대가 삼국사기 기록 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시형은 대주류왕을 추모왕의 1세손으로 치고, 이후 왕들을 차례로 계산하면 광개토왕이 17세손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들 외부적인 상황을 끌어 들여야 하죠? 아예 다르게 생각해 봅시다. '세'나 '대'를 세는 기준을 조, 부, 자, 손으로 보지 않고, 왕위 계승 순서 대로 세어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습니다.

 

 

대무신왕(1) - 민중왕(2) - 모본왕(3) - 태조대왕(4) - 차대왕(5) - 신대왕(6) - 고국천왕(7) - 산상왕(8) - 동천왕(9) - 중천왕(10) - 서천왕(11) - 봉상왕(12) - 미천왕(13) - 고국원왕(14) - 소수림왕(15) - 고국양왕(16) - 광개토왕(17)

 

 

대무신왕을 1세의 기준으로 삼으면, 광개토왕은 대무신왕의 17세손이 됩니다.

 

이제 이 방법을 태조 성한왕에 적용해 봅시다. 문무왕은 30대 왕이고, 미추왕은 13대 왕입니다. 따라서 왕위 계승 순서로 보자면, 사실 미추왕은 문무왕의 18대조가 되어야 합니다.(30-13+1-3) 그런데 이 사이의 유례왕, 기림왕, 흘해왕은 석씨인데, 성한왕은 김씨 내부의 이야기이므로 이 세 왕을 빼 버립시다. 그러면 문무왕의 15대조가 바로 미추왕이 됩니다. 그런데 정작 흥덕왕릉비에서 흥덕왕이 태조 성한왕의 24대손이라고 한 것은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흥덕왕이 42대니까, 석씨 3왕을 제외하더라도 흥덕왕은 미추왕의 27대손이 되거든요.(42-13+1-3)

 

그래서 김창호는 24대손을 일원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김창호는 미추왕부터 흥덕왕까지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미추왕은 13대, 성덕왕은 33대입니다. 왕위 계승 순서로 따질 때, 성덕왕은 미추왕의 18대손입니다.(33-13+1-3) 그런데 성덕왕 다음인 효성왕부터 김창호는 다른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선덕왕 때 오묘에는 성덕왕과 개성왕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로써 단순히 왕위 계승을 순서로 하는 게 아니라 오묘를 누구로 두느냐에 따라 직계를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본 것이죠. 이로써 효성왕, 경덕왕, 사소부인을 19대손, 사소부인의 아들인 선덕왕을 20대손으로 봅니다. 그런데 선덕왕은 내물왕의 10세손, 원성왕은 12세손이라고 했으므로, 원성왕은 22대손으로 보았습니다. 흥덕왕은 원성왕의 손자이므로 바로 24대손이 되는 것이죠.

 

 

 

김창호의 설명 방식은, 보기에 따라 좀 비루해 보입니다. 흥덕왕이 24대손이라는 것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대수나 세수를 세는 기준을 이원화했기 때문이죠. 결과에 맞추기 위해 과정을 임의로 바꾼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상기한 것처럼, 우리는 알지, 세한, 미추왕 중, 태조 성한왕으로 누구를 추정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알지는 김씨의 시조로서, 세한은 발음의 유사성으로서 태조 성한왕이라는 점이 지지될 수 있지만, 모두 왕이 아니기 때문에 이 둘에 맞추려면 오히려 미추왕의 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알지나 세한 보다는 미추왕을 태조 성한왕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한 것입니다. 미추왕은 그 행적이 불분명한 선대와 달리, 분명히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미추왕은 김씨 중 최초로 신라 왕위에 오른 사람이고, 내물왕 이후 김씨의 세상이 열린 직접적인 계기이기도 합니다.

 

즉, 대수나 세수를 어떻게 세든 간에, 미추왕을 태조 성한왕으로 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가장 타당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설로 치부해 버려야 한다면, 보다 오래 되고, 보다 불분명한 것을 전설로 날려 버리는 게 낫겠죠. 70년대나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한을 태조 성한왕으로 맞추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지금은 미추왕으로 보는 의견들이 훨씬 더 많고, 정설로 굳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지루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의 집안 족보 따지는 게 뭐가 재밌겠어요. 마지막으로, 미추왕이 외부에서 신라에 들어와 석씨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다른 '정황'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그럼 미추왕은 일종의 정복 군주가 되니까, 우리가 느끼는 '태조'의 심상에 더 잘 맞기도 하겠네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건국이 대체로 비슷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고, 경주 사람들이 키웠습니다. 알을 따서 '朴'을 성으로 했죠. 석탈해, 김알지도 그렇습니다. 석탈해는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 삼국유사에는 용성국 출신이라고 하지만, 출신은 다르되 그 이후의 성장 과정은 거의 같기 때문에, 같은 전설이 와전되어서 모양만 다르게 분기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김알지 역시 모두 계림에서 호공이 발견하고, 금상자에서 튀어 나왔다는 것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고려인들이 쓴 책이고, 그리고 그 작성 시기도 1145년, 1281년으로 백 년'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삼국시대와 이 둘 사이의 간격을 생각하면, 김부식과 일연은 시간적으로 비슷한 위치에서 삼국시대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1200~1300년 내외의 시점에서 고려인들이 신라 초기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대체로 저 대로 굳어졌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삼국시대에 대해 기술된 한국산 1차 사료의 최고봉이자 최우선 사료입니다. 그런즉,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에 대해 이 외의 해석이 나오면, 두 책의 기록과 다르기 때문에 한 번쯤 의심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주류적 견해' 외에도, 신라의 건국에 대해 다른 견해들도 남아 있습니다. 멀리까지 갈 것 없이도, 당장 삼국사기 안에도 김부식이 송나라에 가서 들은 이야기를 소개해 뒀습니다.

 

 

論曰.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樻而降, 或云乗金車. 此尤詭怪, 不可信, 然丗俗相傳, 爲之實事. 政和中, 我朝遣尚書李資諒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 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 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경순왕, 가장 마지막의 사평)

 

 

신라본기의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박석김의 탄생 전설이라는 것이 괴이해서 믿기가 힘들지만, 민간에서는 그렇게 전해지는 말을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김부식이가 정화 연간(1110년 즈음)에 이자량을 보좌해 송나라에 갔을 때, 송나라의 우신관에서 왕보라는 사람에게 신라의 건국에 대해 들은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우신관에는 선녀상이 하나 있었는데, 왕보는 이 선녀가 옛날 황실의 딸이며, 남편 없이 애를 가졌기 때문에 집을 나와서 진한으로 건너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황실의 딸은 신선이 되어 선도산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선도산은 경주의 서형산을 이릅니다. 또 김부식은, 송나라의 왕양이 동신성모에게 제사니내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현인을 잉태해 처음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황상 이 둘은 같은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송나라에 전해지던 이 전설이 사실이라는 것이 아니라, 당대 고려에 내려오던 신라의 전설과, 송나라에 내려오던 신라의 전설이 아주 상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은 넓으니까 송나라에 전해 오는 전설도 하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주 색다르죠? 박석김의 시조는 모두 알이나 상자에서 나왔지만, 선녀가 낳아서 선도산에 머물렀다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요. 신라의 건국 연도는 이 때에 이미 1100년도 더 전의 일이 되었으니, 갖가지 상이한 전설들이 내려오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중국에서도 신라의 역사가 천 년이나 된다는 것을 경이롭게 여겼을 것입니다. 게다가 신라는 중국과도 친했으니까요.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讃屳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乃至雞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听現.(삼국유사 기이, 신라 시조 혁거세왕)

 

 

그런데 일연은 '서술성모'나 '선도성모'라는 이름으로 김부식이 소개한 전설을 주석으로 설명해 두었습니다. 김부식은 전설로 내려오는 말을 책에 싣기 싫어했고, 일연은 온갖 잡다한 것까지 모두 실으려 했으니, 아마 두 사람 사이의 견해 차이에서 벌어진 것 아닐가 생각이 듭니다. 경순왕본기 마지막의 논평에서 김부식이 적어 둔 걸 보면, 삼국사기를 기술할 때도 김부식은 선도산 전설에 대해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다만, 김부식이는 그 시조라는 것의 어느 왕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일연은 박혁거세를 설명하면서 주석을 단 것이니, 100여 년 사이에 선도산 전설에 박혁거세라는 옷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입힌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선도산 설화가 아닙니다. 수서에서 신라의 건국을 다룬 부분을 말 해 보고 싶거든요. 중국놈들은 자기네 역사를 쓰면서 주변 나라의 역사도 함께 써 두었습니다. 이걸 못된 버릇이라 해야 할지, 좋은 버릇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네요. 대개 발로 뛰어서 사실을 확인하고 쓴 게 아니라, 중국으로 흘러 들어오는 말들을 채록해 둔 것이라서 부정확하고 '신비'로운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에 당대의 역사서가 제대로 안 남아 있다면, 참고할 만한 아주 유력한 사료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에는 고구려, 부여, 옥저, 예, 삼한에 대한 기술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마한과 변한을 구성하고 있는 소국의 이름들이 있는데, 이 소국들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료로써 아주 중요하죠.

 

이처럼 수서에도 당시 주변 나라였던 고구려, 신라, 백제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수서에 남아 있는 신라의 건국 과정은 우리가 아는 것과 아주 상이합니다.

 

 

魏將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者遂爲新羅焉. 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傳祚至金眞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수서 열전 46, 동이)

 

 

수서에서는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를 신라의 건국 시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 고구려의 왕은 동천왕이었습니다. 동천왕과 관구검의 캐삭빵은 결과적으로 관구검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당시 관구검은 자기가 직할하던 유주의 병력뿐만 아니라, 낙랑의 병력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동천왕은 이후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가 겨우겨우 나라를 되찾는 데 성공했는데, 수서에서는 동천왕이 옥저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옥저는 보통 원산과 함흥 부근을 의미하죠. 그런데 이 때, 옥저로 쫓겨 갔던 사람들이 전부 고구려로 돌아간 것은 아니고, 일부는 남아 있다가 신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라에는 중국, 고구려, 백제 사람들이 섞여 있고,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을 겸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원래 신라의 왕은 백제 사람인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서는 신라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아주 다릅니다. 동천왕과 관구검의 캐삭빵은 244년에서 246년인데, 삼국사기상 이 시기 신라는 11대인 조분왕, 백제는 고이왕이 재위 중이었습니다.

 

 

 

 

아주 이상하죠? 옥저는 상기한 것처럼 함경도 남부나, 멀리 봐야 강원도 북부일 텐데, 왜 거기 있다가 신라가 되었다고 했을까요? 캐삭빵 이후 동천왕본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동천왕, 246)

 

 

캐삭빵에서 패한 뒤,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주해, 죽령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죽령은 일반적으로는 황초령으로 봅니다. 하지만 남옥저라고 했으니, 원산, 함흥 보다 훨씬 남쪽이라고 생각하면, 황초령은 너무 북쪽이고, 단양과 영주 사이의 죽령은 너무 남쪽이죠. 하지만 이왕 가 보는 거, 남쪽의 죽령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죽령 바로 서쪽은 충주입니다. 수서에서 언급한 옥저라는 것이, 삼국사기의 남옥저 혹은 죽령과 같은 곳이고, 이 죽령이 바로 단양, 충주 부근을 이른다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빨강은 동천왕의 도주로 / 노랑은 영주와 단양 사이의 죽령 / 보라는 황초령

 

 

이왕 막나가는 거, 여기서 좀 더 막나가 봅시다. 수나라는 581년에 개국했는데, 이 때 신라의 왕은 진평왕입니다. 사실 건국기 바로 뒤에는 진평왕이 조공했다는 기사가 바로 이어집니다. 수서 자체는 탁발부 초기에 만들어졌으나, 어차피 그 때도 왕은 김씨였습니다. 수나라와 탁발부에서의 신라를 박씨나 석씨의 나라가 아니라, 완전히 김씨만의 나라라고 인식했다면 어땠을까요?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기 시작한 내물왕은 356년에 즉위했습니다. 이 때는 내물왕이 즉위했을 때 보다 230여 년이나 지난 후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 신라는 처음에 박석김 세 성이 '사이 좋게' 돌아가면서 왕위를 이었다고 배우지만, 삼국사기를 볼 때 사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고, 석씨가 박씨를 밀어 내고, 다시 김씨가 석씨를 밀어내는 형국이었습니다. 진평왕 때는 이미 김씨가 나라를 독점해 '성골'이 씨가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나라나 탁발부에서도 신라를 김씨의 나라라고 인지했고, 따라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도 김씨가 어떻게 기존의 신라를 찬탈했는지를 기술해 둔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동천왕으로 돌아가 봅시다. 고구려는 대무신왕 때 '최씨 낙랑국'을 멸망시켰습니다. 원래 낙랑 지역인 평양에는 낙랑군이 살아 있었으므로, 최씨 낙랑국은 보통 평양 외부로 봅니다.

 

 

夏四月, 王子好童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問(대무신왕, 32)

 

 

왕자 호동은 옥저로 놀러갔다가 낙랑왕 최리를 만났습니다. 따라서 최씨 낙랑국의 위치는 옥저가 아니었을까요? 일단 그렇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대무신왕 때 이미 옥저를 합병했고, 태조대왕에서 신대왕에 이르기까지 한나라를 공격하거나, 한나라의 공격을 막아낼 정도로 성장합니다. 게다가 백제본기에는 고구려가 예를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다는 식의 기록들이 많은데, 그렇다면 고구려의 세력이 강원도 남부에 미쳤다고 보는 것도 아주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충주의 두정리 고분군을 갖고 이 정황을 더 끼워 맞출 수도 있겠지만, 이 고분군은 고구려 유적이기는 하나 4~500년대 초반의 것이기 때문에 이 예시와는 좀 멀어 보입니다... 광개토왕이나 장수왕 시기의 유적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죠.

 

 

옥저를 최씨 낙랑국으로 추정할 때

 

 

그래서 충주, 단양 지역까지 남하했던 고구려 유민들 중 일부가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고 충주, 단양에 남았고, 이 사람들이 그 지역의 '김씨'들과 '야합'한 다음 남진해서 왕위를 찬탈한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박경택 등의 설입니다. 박경택이 혼자 주장한 것은 아니고, 예전부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었습니다. 좀 막나가긴 하나, 김씨가 왜 갑자기 튀어 나왔는지를 아주 색다른 관점에서 봤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설명되지 않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왜 수서에서는 왕이 백제 사람이라고 했는지, 그리고 바다를 건너 왔다는데 충주에 바다가 어딨는지, 그리고 김씨가 충주, 단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증거가 어딨는지입니다... 하지만 이왕 끼워 맞춘 거, 아주 확실히 아전인수 해 봅시다.

 

중국 입장에서는 백제와 마한을 구별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먼 나라 이야기고, 자기들도 답사 하고 적은 게 아니라 듣거나 건너 들은 걸 적는데 뭐가 정확하겠습니까. 당시 충주, 단양 지역을 마한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지역의 '김씨'들은 마한 사람일 텐데, 이 사람들이 나중에 신라의 왕이 되니 백제 사람이 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충주와 단양에 바다가 어딨다고 수서에서는 바다를 건넜다고 했을까요? 충주호에서 적벽대전이 터졌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바다라고 한 것은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박경택은 '옥저'에서 동해를 통해 신라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주장합니다. 왜 지금까지는 충주라고 하다가 갑자기 옥저로 표현이 바뀐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정황도 있긴 합니다. 조분왕의 뒤를 이은 첨해왕 시기에는 '동쪽'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용이 나오거나, 혜성이 나타나거나, 물고기가 잡힙니다. 다른 본기에도 이런 기록은 많지 않느냐고 하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여튼, 이 주장대로 한다면, 고구려 유민들과 야합한 김씨들은 멀정한 육로를 두고, 갑자기 태백산맥을 넘어 바닷길로 신라까지 온 것이 됩니다. 첨해왕 다음 왕이 바로 김씨 왕의 시조인 미추왕이기 때문에, 시기상 아주 잘 맞아 떨어지기는 합니다.

 

마지막으로, 충주, 단양에서 김씨가 왔다면, 김씨들이 스스로 그렇게 여겼다는 증거가 남아 있을까요? 충주의 원래 이름은 '國原'입니다. 나라의 근원이라는 말인데, 그냥 이름만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진흥대왕 때인 557년엔 소경을 두었고, 558년에는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부자들을 국원으로 이주시켰다고 했습니다. 가야금의 명인인 우륵이 대가야에서 신라에 투항한 뒤 머물렀던 곳도 바로 국원입니다. 진흥왕이 아주 공을 들인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진흥왕 때 여기저기를 군사적으로 침략하면서 가장 지리적으로 각 지역을 통제하기 편한 곳에 소경을 둔 게 아니냐, 여기에 김씨들하고 관련됐다는 말이 한 마디라도 있냐고 하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충주의 지리적인 위치가 그러니까요. 사실 지리지에는 고구려령일 때도 본래 '國原'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다면 이 논증은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게 됩니다... 국원이라는 이름은 경덕왕 때 '中原'으로 바뀝니다. 정황은 아주 수두룩한데, 확실히 이렇다라고 할 만한 것은 제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김알지 이후 김씨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정황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남하해서 왕위를 찬탈했지만, 시조는 김알지로 설정해 두고 옛날부터 귀족으로 있었던 것처럼 말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러이러한 정황상, 미추왕을 비롯한 김씨들은 국원에서 남하해 신라의 왕위를 석씨에게서 찬탈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거듭 언급한 것처럼, 정황은 많은데 확실한 점은 사실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이 설은 수서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북사에도 있고, 통전에도 있습니다. 한원에도 아주 희미하게 나오긴 합니다. 남북조시대에서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런 인식이 중국에 퍼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 설이 확실해지려면,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적어도 김씨들이 진짜 충주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경주 김씨 족보에도 알지의 아들인 세한이 신라에서 이찬까지 지냈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주 김씨들은 자기들이 김알지의 시대부터, 즉 궤짝에서 나온 그 순간부터, 꾸준히 경주에 붙어 있었다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수서 등의 기록들이 어디서 흘러 들어온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존의 설을 뒤집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금석문에만 등장하는 신라의 태조 성한왕은 알지, 세한, 그리고 미추왕 세 명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기존에는 알지, 세한을 태조 성한왕으로 간주하는 연구가 많았으나, 80년대를 기점으로 미추왕으로 보는 시각이 많이 생겨, 지금은 미추왕이 태조일 것으로 보는 설이 주류적입니다. 미추왕은 김씨 중 최초의 왕이고, 미추왕이 없었다면 이후 내물왕부터 김씨가 왕위를 독점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실 정황상으로도 미추왕을 태조 성한왕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다만, 미추왕이 태조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김씨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수서, 북사의 기록을 통해, 충주에서 김씨들이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남하해 석씨의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설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의 설은 아주 새롭긴 하지만, 해명되지 않은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아직 취신하기에는 많이 모자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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