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주와 도사(삼국사기 옥사지 중)

2020. 6. 22. 15:50삼국사기 이야기/잡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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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역사 기록은 대체로 '중앙'을 향합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기록이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기나 삼국사기 같은 관찬사 사서는 대체로 어떤 책이든 이런 문제를 수반합니다. 예를 들어 사마천은 본기 이외에 세가를 두어 각 지역 제후국의 역사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 각지에 '정권'이 난립해 있었기 때문이지, 그 지역 자체가 그 지역으로서 존중받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따라서 제남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싶으면 사기 같은 사서를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그 지역에 남은 사료를 뒤져야 합니다. '1차 사료' 너머, '원사료'에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남긴 것이라면 뭐든 다 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성곽, 식기, 의복, 갑돌이와 갑순이가 정분이 났다는 전설, 민요가 모두 사료인 셈이죠. 글로 남았다면 더 좋습니다. 우리가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할 공극이 줄어들 테니까요. 가끔 무덤에서 죽간이나 종이가 대거 발굴되기도 하고, 금석문이 새로 발견되거나 판독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발견될 때마다 학자들이 들썩이는 것은 '상상'으로 채워 넣었던 부분이 뒤엎어지기도 하고, 검증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라에 대해 우리에게 남은 1차 사료래봤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제일 가깝고, 그 외에는 고려사 같은 후대의 사서들이나, 중국 계통 사서들밖에 없습니다. 중국 계열 사서들은 중국이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거리도 멀 뿐만 아니라, 엿 같은 선민의식으로 점철돼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 아주 전적으로 믿을 만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찬자나 저자가 직접 가서 경험한 것이 아니라 대개 그 지역에 다녀 온 사람들을 통해 주워 들은 것을 개략적으로 쓰거나, 옛날부터 이어지는 자기네 사서의 기록을 베끼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지역의 기록이랄 것도 많지 않습니다.

 

삼국지는 예외입니다. 위지 오환선비동이전의 한(韓) 기록을 보면, 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원양국,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 백제국, 속로불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람국, 월지국, 자리모로국,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점리비국, 신흔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포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내비리국, 감해국, 만로국, 벽비리국, 구사오단국, 일리국, 불미국, 지반국, 구소국, 첩로국, 모로비리국, 신소도국, 막로국, 고랍국, 임소반국, 신운신국, 여래비리국, 초산도비리국, 일난국, 구해국, 불운국, 불사분사국, 원지구그 건마국, 초리국이 바로 그렇습니다. 변진 기록에도 나라 이름이 전합니다. 이저국, 불사국, 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근기국, 난미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염해국, 변진반로국, 변진락노국, 군미국, 변진밍사마국, 여담국, 변진감로국, 호로국, 주선국, 변진구야국, 변진주조마국, 변진안야국, 변진독로국, 사로국, 우유국이 그렇습니다. 진수는 누구한테 들었는지 한, 예 등의 풍속도 자세히 기술해 두었습니다. 아주 전적으로 믿을 수 있겠냐마는, 삼국사기 등에는 이런 나라들의 이름이 안 나와 있기 때문에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중 사로국은 아마 신라를 의미할 것입니다. 변진 제국들은 아마 가야 제국을 의미할 것입니다. 백제국, 구야국, 안야국처럼 익숙한 이름도 보이는군요. 변진 제국의 이름에는 '彌'가 특히 많이 들어갑니다. 일본서기에도 '彌'가 여기저기 많이 쓰이는데,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삼국지에서도 나라 이름만 열거되어 있지, 그 나라들의 역사나 위치가 똑바로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낙랑태수 등을 통해 이런 정세를 전해 받았되, 아주 자세히 알 형편은 못 되었던 모양입니다.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를 편찬했기 때문에 삼국지에 이름이 나온 저 나라들의 역사는 전혀 기술해 두지 않았습니다. 사실 말이 삼국이지, 고구려, 백제에 관한 기록은 신라에 비해서는 아주 부족하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도 챙기지 못하는 마당에 신분고국의 역사를 기술해 두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소국들은 차치하더라도, 상대적으로 큰 '덩어리'였던 부여나 옥저, 예, 가야의 역사도 기술해 두지 않은 점은 아쉽습니다. 그 때는 적어도 지금 보다 남은 기록들이 많았을 텐데 말입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김부식이와 친구들은 신라의 각 행정 구역의 변천을 개략적으로 기술해 두기는 했으나, 그 지역 자체의 역사에 접근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방의 사건들은 김헌창의 난이나 청해진과 관련된 것처럼 아주 굵직굴직한 것들 이에는 적혀 있지 않죠. 진성왕본기를 보면,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리는 듯 하다가 갑자기 889년부터 지방에서 사람들이 일제히 반란을 터트린 것처럼 기술되어 있습니다. 경주는 평화로웠을지도 모르나, 지방에는 꾸준히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4

 

진성왕대 민란의 뿌리는 언제일까(삼국사기 진성왕본기 중)

신라는 통일한 이후, 외부로는 큰 전쟁 없이 무난하게 멸망까지 이어졌습니다. 적어도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대로면 그렇습니다. 통일 이후에도 간혹 전쟁 기록이 확인되긴 합니다. 성덕왕 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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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역사는 어떤 나라의 '중심'을 '중심'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기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왔습니다. 반대로 그 외의 지역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록도 잘 남아 있지 않고, 사실 중앙의 정치사에 비해서는 관심에서 많이 멀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기록이 대체로 '중앙'을 향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단서는 남아 있습니다. '촌주'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옥사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外眞村主, 與五品同. 次村主, 與四品同.(삼국사기 잡지, 옥사지)

 

 

 

 

진촌주와 차촌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품은 골품 중 오두품을 의미할 것이고, 사품은 사두품을 의미할 것입니다. 옥사지는 '屋舍', 즉 집에 관한 규정입니다. 진촌주와 차촌주에 대한 규정은 오품과 사품을 따르라고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그 앞에는 진골에서 사두품에 이르기까지 각 신분이 지켜야 할 집의 규정이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방의 길이, 넓이, 기와는 어떤 것을 쓰거나 쓰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장식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담장의 높이는 얼마여야 하는지 등입니다. 사실 옥사지는 잡지 2에 들어있는데, 잡지 2에는 옥사지 외에 색복지, 거기지, 기용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색복은 옷, 의복을 의미합니다. 거기는 차량입니다. 당시에는 말이 끄는 수레를 의미했을 것입니다. 기용은 생활에서 쓰는 집기입니다. 그릇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각각에 모두 진골에서 사두품에 이르기까지 규정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색복지와 거기지에서는 골품에 따른 기준뿐만 아니라, 성별에 따른 규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남자옷과 여자옷이 다른 것이야 그렇지만, 마구에도 남녀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라본기에서는 신분이 어떠니 하는 말이 거의 나와 있지 않고, 다만 관직을 통해서 이런 사람이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고 볼 단서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잡지 2가 신라의 실정과 맞다고 간주한다면, 신라의 신분제는 생각 보다 훨씬 빡빡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촌주에서 '村'은 보통 '시골 마을'을 지칭합니다. 그냥 우리가 그렇게 씁니다. 아마 '시골'은 아니었겠지만, 예전에는 마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촌을 지방 행정 단위로 간주한다면, 촌주라는 것은 신라의 지방관 또는 지방관을 돕는 향리 같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옥사지에서 진촌주는 오두품, 차촌주는 사두품 대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진촌주와 차촌주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진골은 왕족인 귀족입니다. 육두품은 우리가 신분제를 넘어설 수 없었던 비운의 인재들이라고 알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아래 계급의 고혈을 빨아 먹던 쁘띠 브루주아에 불과하죠. 요즘 세상의 주류가 브루주아다 보니 육두품을 이 따위로 미화했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두품 이하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四頭品至百姓 ... 四頭品女至百姓女(삼국사기 잡지, 거기지)

 

四頭品至百姓(삼국사기 잡지, 기용지)

 

四頭品至百姓(삼국사기 잡지, 옥사지)

 

 

거기지, 기용지, 옥사지에서는 사두품을 그 이하 백성들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색복지에서는 따로 구분합니다. 사두품의 남녀, 그리고 평민 남녀의 의복 규정은 달랐습니다. 하지만 거기지, 기용지, 옥사지에서 함께 취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두품과 평민들이 구별되긴 하되, 그 차이는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로써 보면 오두품까지가 실질적으로 귀족 대접을 받은 마지막 집단이고, 사두품부터는 귀족이긴 하되 여러 면에서 평민들과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옥사지에서 진촌주는 오두품, 차촌주는 사두품 대우를 받았다는 것은 촌주들이 수도에서 귀족과 평민 사이의 대우를 중앙에서 받았다는 말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중앙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보다 높았을 것입니다. 촌주가 지방관은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 향촌을 주도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아마 왕이나 제후처럼 군림했을 테니까요. 요즘도 '토착 세력' 중에 스스로 법 위에 있는 것처럼 구는 놈들 있죠?

 

일단 색복지, 거기지, 기용지에는 촌주가 나와 있지 않은데, 이것을 다시 두 경우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촌주, 차촌주가 오두품, 사두품과 같다는 것은 옥사지 마지막에 나오는 말인데, 이것이 잡지 2의 마지막 말이므로, 잡지 2 전체 규정에 다 적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 규정이 옥사에만 적용되고, 색복, 거기, 기용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사실 어느 쪽이든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집은 규제하여 본보기로 삼기 좋지만, 옷이나 그릇 같은 것을 누가 다 신경 썼겠어요. 처음엔 규정이 있었겠지만 중대 말, 하대로 이어질수록 유명무실화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글에서 이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옷을 어떻게 입었던 간에 역사의 큰 흐름에 영향을 주진 않았으니까요.

 

 

 

그럼 촌주라는 말은 옥사지에만 나올까요? 혹시 말 한 마디 나왔다고 아주 확대해석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촌주'는 신라본기에 딱 두 번 나옵니다.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冬十月二日, 英公平壤城北二百里. 差遣尒同兮村主大奈麻江深, 率契丹騎兵八十餘人, 歷阿珍含城漢城, 移書以督兵期, 大王從之.(문무왕, 667)

 

三年國内諸州郡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所在盗賊蜂起. 於是, 元宗·哀奴等, 㩀沙伐州叛. 王命奈麻令竒捕捉, 令竒望賊壘, 畏不能進. 村主祐連力戰死之. 王下勑, 斬令竒, 祐連子年十餘歳, 嗣爲村主.(진성왕, 889)

 

 

문무왕본기의 기록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 짝눈이 부하 이세적이 문무왕에게 군대를 보내라고 독촉하는 내용입니다. 진성왕본기의 기록은 그 유명한 원종과 애노의 난 기사입니다. 전자에서는 이동혜(尒同兮) 촌주 대나마 강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동혜는 이동혜현으로, 구미의 해평면 해평리 일대로 봅니다.

 

 

이동혜현

 

 

기사 내용상 강심은 이미 탁발군에 종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신라측에서 전쟁을 위해 탁발군에 소규모 군대나 사절들을 먼저 파견해 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나마는 신라의 17관등 중 열 번째입니다. 오두품까지 대나마에 오를 수 있었고, 사두품은 오를 수 없었습니다. 위의 분석을 토대로 하면, 촌주 강심은 아마 진촌주 이상의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진성왕본기에서는 중앙군의 나마 영기라는 지휘관이 원종과 애노의 난을 진압하지 못하자 우련이라는 촌주가 분투했다는 내용입니다. 우련은 죽고, 왕명으로 우련의 아들이 촌주 자리를 이었습니다. 진성왕본기의 기록에서는 촌주 우련이 관직이 무엇이니 하는 말이 없는데, 문무왕 때는 내내 전쟁 중이었으니 오히려 강심이 대나마에 올라 있는 것이 예외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기록 모두 지방 통치가 어땠는지, 촌주가 평시에 지방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 단서를 주지 않습니다. 전자는 전쟁 중이라는 특수 상황이었고, 후자는 반란을 진압 중이었으니까요. 유사시에는 촌주가 관군을 도와 군사 행동을 보조해야 한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 역시 일반적인 상황이라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면 다른 사료를 찾아야 합니다. 다행히 금석문 중에는 '村主'라는 말이 나와 있는 것이 몇 개 있습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고선사 서당화상비, 규흥사 종명, 숭산촌대사 종명, 청주 쌍청리 출토 명문와, 청주 연지사 종명, 사천 선전리 신라비, 경주 남산신성비 제 1비가 그렇습니다. 다만 촌주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사실상 촌주를 의미하는 말이 나오는 금석문도 있습니다. 사실 촌주라는 말이 나오더라도 분석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금석문도 있습니다. 일단 단서가 있어야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村主臾支干支, 須支壹今智, 此二人, 世中了事, 故記.(포항 냉수리 신라비, 503)

 

 

냉수리 신라비 발견 위치

 

 

냉수리 신라비에는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이 나옵니다. 아마 실성왕과 눌지왕이 아닐까 합니다.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사람도 나오는데, 나중의 지증왕으로 추정됩니다. 맞다면 지증왕은 즉위하기 전에 갈문왕 자리에 있었겠죠. 냉수리 신라비는 지역 사람들의 왕에게 재산의 분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는 내용입니다. 분쟁 대상자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입니다. 절거리는 진이마촌(珍而麻村) 사람이라는데, 진이마촌은 여기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발견자의 할아버지가 돌을 옮겨 왔기 때문에, 그 원래 위치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죠. 하지만 정황상 비석 발견지인 포항의 옛 신광면 주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냉수리 신라비는 그 내용이 재산을 두고 생긴 분쟁이기 때문에 재밌습니다. '재산권'이 곧 문명 발달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눈을 뒤집고 달려들 만하죠.

 

절거리의 분쟁은 신라 조정에까지 올라가 지증왕에게 직접 판결을 받을 정도로 나름 큰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비문의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촌주 유지 간지, 그리고 수지 일금지가 왕명을 받아 판결문을 돌에다가 새겨 둔 것입니다. 아마 유지와 수지가 인명일 것입니다. 간지, 일금지는 신라의 외위 11관등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외위의 상위 관등에는 대체로 '干'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고, 일벌, 일척처럼 '一'이 들어간 관등도 있으므로, 간지, 일금지도 외위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아마 유지가 수지 보다 신분이 높았겠죠? 만약 절거리가 이 분쟁을 들고 직접 경주로 갔다면 촌주가 중간에서 그 업무를 중개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송사'는 촌주를 거쳐서 신라 조정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올 때도 촌주를 거쳤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촌주에게는 지방민의 분쟁이 커졌을 경우, 이것을 신라 조정에 올리고, 그 판결을 받아 이행할 의무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503년 비문에 촌주가 등장하므로, 반대로 촌주는 적어도 503년부터 신라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촌주는 지방민의 우두머리에게 주는 '직'이고, 따라서 신라가 외부를 정복하고 다닌 이후 어느 시점에 정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주변을 정복하고 다녔다는 신라본기 초기 기록을 취신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석우로가 활약했던 석씨 왕조 중기나, 아니면 내물왕 전후로는 신라가 어느 정도 영토를 구축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250년이나 350년 사이 기간에는 신라가 지방 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마 그 때부터 503년 사이의 어느 기간에 '최초의 촌주'가 생기지 않았겠나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송사를 조정과 중개하는 일이라면 사실 촌주 같은 토호 보다는 지방관이 해야 할 일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냉수리 신라비에서는 지방관이 등장하지 않고 촌주만 나와 있을까요? 

 

 

十一年, 春正月, 以朴氏貴戚, 分理國内州郡, 號爲州主郡主.(탈해왕, 67)

 

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始於此.(지증왕, 505)

 

 

67년에 주주(州主)와 군주(軍主)라는 말이 이미 나옵니다. 하지만 신라는 505년에 이사부를 실직의 군주로 임명하면서 지방의 사령관이자 통치자인 '군주'를 임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67년 기록은 구라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505년이면 이미 정복하고 다닌 영토도 많았을 것입니다. 실직만 해도 저 북쪽의 삼척이니까요.

 

 

실직

 

 

505년에 군주가 최초로 시작된 것이지, 그 이전에도 정복한 지역이 있으니 통치할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주, 군주라고 칭하진 않았더라도요. 그런데 지방 통치라는 것이, 지금에는 동장을 중앙에서 파견하고, 동 아래의 통과 반까지 나눠서 통장, 반장을 통해 사람들을 '통치'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거든요. 중앙에서 통치자를 파견한 '군주'가 505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는 어쩌면 중앙에서 파견 없이 정복지의 지배자들을 회유해서 간접 통치하는 데 신라의 지방 통치가 그쳤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503년까지만 하더라도 지방의 크고 작은 일들은 촌주들이 모두 맡아 처리했을 것입니다. 촌주들은 촌주라는 직함뿐만 아니라, 유지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간지(干支)라는 관등도 받아 '관리처럼' 대우 받았을 것입니다. 문무왕본기에서 이동혜현의 촌주 강심이 '대나마'였던 것을 볼 때, 촌주가 항상 외위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문무왕 시기에는 내위와 외위, 즉 경주 사람과 지방 사람의 관등 '차별'이 점차 사라지던 때였기 때문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어디나 다 '신라'인데, 관위가 달라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 신라의 통치가 지방에도 정착하면서 촌주의 어께에 걸린 '무게'는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신라가 경주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방관'이라 합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 관리가 파견된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민선 시장들이 뽑히기 전에는 중앙에서 시장, 군수들을 파견했었습니다. 대구도 시장을 선출하지 않고 '임명'했었죠. 물론 동, 면 단위에서 일을 하는 공무원들도 국가가 모두 '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너머의 통장과 반장, 이장까지 '위촉'해서 지방 구석구석을 '통치'하기까지 합니다. 통장, 반장, 리장에까지 국가의 영향이 구석구석 미치는 것은 현대 한국의 행정 통치력이 거기까지 미쳤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과거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과거로 올라갈수록 통치의 최하 범위는 넓어집니다. 최대한 직접 통치하려 하기야 하겠으나, 국가의 수입, 기간 시설 때문에 한계가 생기는 겁니다.

 

삼국사기에는 군주, 도독 같은 사람들을 임명했다는 말은 자주 나오지만, 그 아래 관직은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리지를 보면 가장 위에 주(州)가 있고, 그 아래 군(郡)과 현(縣)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던 김헌창이가 바로 웅주의 도독이었습니다. 원성왕본기에서는 자옥이라는 사람을 양근현의 소수(小守)로 삼았다는 말이 나오고, 애장왕본기에서는 양열이라는 사람을 두힐현의 소수로 삼았다는 말이 나오죠. 소수는 지방의 장관입니다. 이로써 볼 때 주 단위는 물론 현 단위에도 지방관들이 임명되어 파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옥, 양열에 대해선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

 

독서삼품과와 유학생(삼국사기 원성왕본기 중)

원성왕본기에 있는 독서삼품과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四年, 春,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

philosophistory.tistory.com

 

 

다행히도 삼국사기에는 경주 밖 관직, 즉 '지방 공무원'에 대해 기술해 둔 외관지가 있습니다. 외관지 내용이 많기 때문에 이 글에 필요한 관직 이름과 그 수만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都督九人 ... 仕臣五人 ... 郡大守百十五人 ... 外司正百三十三人 ... 少守八十五人 ... 縣令二百一人(삼국사기 잡지, 외관지)

 

 

도독(都督)은 주의 장관입니다. 주가 9개니까 도독도 아홉 명이겠죠. 사신(仕臣)은 소경의 장관입니다. 김해소경, 남원경 같은 소경들에는 따로 사신을 파견해 통치했던 것 같습니다. 군태수(郡大守)는 군의 통치자일 것입니다. 지증왕본기에서 지증왕 6년에 처음 주, 군, 현을 정했다고 했기 때문에, 그 때부터 태수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증왕 이전부터도 군은 아니더라도 군 단위의 정복지 또는 행정 체계는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외사정(外司正)은 지방관을 감찰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외사정 본인들은 누가 감찰했을까요? 소수(少守)와 현령(縣令)은 모두 현의 장관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뭐가 다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소수는 당(幢)에서 대나마까지를 임명한다고 했고, 현령은 선저지에서 사찬까지를 임명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당은 다시 조위에서 대사 이하인 사람이 임명되는 자리였습니다. 조위는 선저지와 같으며 17번째 관등이고, 대나마는 10번째, 사찬은 8번째 관등이기 때문에, 정확한 차이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소수가 현령 보다 조금 더 높게 취급되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현들 사이에도 어떤 기준에 따라 위계 질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지방관들입니다. 금석문에는 이 외에 도사(道使)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典事人, 沙喙壹夫智奈麻, 到盧弗須仇休, 喙眈須道使心訾公, 喙沙夫那·斯利, 沙喙蘇那支, 此七人, 張踪所白了事, 煞牛拔誥故記.(포항 냉수리 신라비, 503)

 

 

앞서 나왔던 냉수리 신라비입니다. 사훼의 나마인 일부지, 사훼의 도로불, 수구휴, 그리고 훼의 탐수 도사 심자공(喙眈須道使心訾公), 훼의 사부나와 사리, 사훼의 소나지가 모여 일을 어찌어찌 처리하기로 하여 소를 잡아 사람들에게 알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훼(喙)는 훼부이고, 아마 신라의 부, 즉 지역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신라 6부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훼 탐수 도사 심자공'에 주목해야 합니다. 탐수(眈須)는 아마 지명일 것입니다. 현이나 촌 단위일 가능성이 큽니다. 탐수현 또는 탐수촌이겠죠. 따라서 탐수촌 도사가 심자공인데, 이 사람이 바로 훼부 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대충, 현에 도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일을 하는 것 같더라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이 사람이 고대의 소수나 현령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辛亥年二月卄六日, 南山新城作節, 如法以作, 後三年崩破者, 罪敎事爲, 聞敎令誓事之. 阿良邏頭沙喙音乃古大舍, 奴含道使沙喙合親大舍, 營沽道使沙喙▨▨▨知大舍(경주 남산신성비 제 1비, 591)

 

 

경주 남산신성비에도 도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奴含道使沙喙合親大舍, 營沽道使沙喙▨▨▨知大舍'라고 했죠. 이 비는 경주 남산에 성을 새로 쌓았으니, 3년 동안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공표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그 담당 '관리'로써 노함 도사(奴含道使)와 영고 도사(營沽道使) 등등이 비에 나와 있습니다. 경주 남산은 경주 권역 안인데도 도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냉수리 신라비에서도 그렇듯이, 남산신성비에서도 도사에는 항상 이 도사가 속해 있는 부가 따라옵니다. 노함 도사와 영고 도사 뒤에 모두 사훼(沙喙)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노함과 영고는 새로 쌓은 성 주변의 '현'이나 '촌'들이 아닐까 합니다. 아마 이 도사들은 노함과 영고 출신이 아닐 것입니다. 사훼부 출신이겠죠. 이곳은 경주의 지척이지만, 그래도 신라의 중심인 6부와는 구분되어 '지방'으로써 통치를 받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그럼 도사는 앞에 나왔던 소수, 현령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비슷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외관지에 소수, 현령만 나오고, 도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도사는 제도를 개편할 때 소수나 현령으로 대체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즉, 도사는 '고대' 신라의 관직이었던 것이죠.

 

 

 

도사는 이 외의 금석문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道使喙部(경주 월지 출토 명활성비, 551)

 

居伐牟羅道使 本洗小舍帝智, 悉支道使烏婁次小舍帝智(울진 봉평리 신라비, 524)

 

大等与軍主幢主道使与外村主, 審照.(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561)

 

 

명활성비에는 '村'이라는 말이 직접 등장합니다. 이 도사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역시 훼부 출신이라는 것이 뒤에 붙어 있습니다. 비의 내용은 거의 알 수 없습니다.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소사이자 거벌모라 도사인 본세와, 마찬가지로 소사이자 실지 도사인 오루차가 등장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경우에는 어느 부 출신인지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거벌모라와 실지는 모두 현이나 촌의 지명일 텐데, 실지는 아마 실직, 즉 삼척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牟羅'는 ''을 훈독, 즉 뜻으로 읽은 말입니다.'帝智'는 관직 뒤에 붙는 말이라고 합니다. 봉평리 신라비는 거벌모라와 남미지 사람들의 처우에 관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도사는 남산신성비에서처럼, 어떠어떠한 일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중앙의 명을 받들어 공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는 특정 도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대등(大等), 군주(軍主), 당주(幢主), 도사(道使), 외촌주(外村主)라는 말이 연이어 나옵니다. 비의 내용은 신라가 원래 좁았는데 이제는 땅을 넓히고 잘 살게 도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진흥왕본기에는 진흥왕 16년인 555년에 비사벌에 주를 두었다고 했는데, 이 비는 561년의 것으로 추정되므로, 비사벌, 즉 창녕 부근을 돌아 보다가 진흥왕이 자기가 짱짱이라고 만들어 놓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등, 군주, 당주, 도사, 외촌주입니다. 대등은 6부의 귀족들, 즉 중앙의 귀족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른 금석문에서도 관례적으로 잘 나오는 말이라고 하는군요. 군주는 우리가 아는 군주일 것입니다. 훗날의 도독입니다. 당주에서 ''은 군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군 사령관이라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행정 관료들이 나오기 때문에 '郡'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대구시장, 수성구청장 나오다가 갑자기 2군사령부 사령관이 튀어 나오면 이상하잖아요? 당주라는 명칭은 통일 이후, 또는 김춘추가 중국식 제도를 들여 온 이후에 태수로 바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외촌주의 '外'는 아마 6부 밖의 지방을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외촌주는 앞에서 다루었던 촌주일 것입니다. 따라서 도사 역시, 군주, 당주, 외촌주와 함께 열거된 것으로 보아 지방 통치의 일익을 담당하는 지방관 또는 관료로써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앞에서 뒤로 갈수록 낮아지므로, 도사의 입지는 당주 아래, 촌주 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들 외에도 냉수리 신라비와 비슷한 비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포항 중성리 신라비입니다. 중성리 신라비에도 도사라는 관직이 나오고, 냉수리 신라비처럼 재산 때문에 생긴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로 도사가 등장합니다. 무엇 보다도 중성리 신라비가 냉수리 신라비 보다 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포항 중성리

 

 

奈蘇毒只道使喙念牟智, 沙喙鄒須智(포항 중성리 신라비, 441 또는 501?)

 

 

중성리 신라비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이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들은 있습니다. 일단 도사가 나옵니다. 이 글에서는 이 점이 제일 중요하죠. 또한 중성리비에 나와 있는 송사는 재산 분쟁이기는 하되, 냉수리 신라비가 그 지방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었다면, 중성리 신라비는 6부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다른 비에서도 나왔듯이 훼부와 사훼부 소속입니다. 즉, 6부 사람들이 6부에 살면서도 지방에도 재산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니까요. 이 땅이 식읍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성리 신라비에 나온 도사는 훼부의 염모지, 그리고 사훼부의 추수지입니다. '나소독지도사'이므로 아마 나소의 도사, 독지의 도사로 따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각이 염모지와 추수지이겠죠. 여기서 '毒只'는 포항의 흥해나 장기로 본다고 하니, 아마 '奈蘇' 역시 해당 분쟁이 일어난 어딘가의 지명일 것입니다. 이미란은 나소를 영월로 보았습니다. 영월을 '奈城'이나 '奈生'으로 불렀는데, 비슷하잖아요? 하지만 영월의 위치와 포항의 위치를 생각할 때, 제 생각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위에서부터 영월, 포항 흥해, 포항 장기

 

 

따라서 중성리 신라비에서 역시 도사는 지방에서 벌어진 분쟁을 받아 중앙으로 보내고, 그 판결을 다시 받아 공표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냉수리 신라비에서와 같이, 이런 분쟁이 있을 시에는 도사들이 그 분쟁 내용을 금석에 새겨 남겼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 두 사건이 규모가 컸기 때문에 금석에 남은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건을 남겼을지, 혹은 이 두 사건에 특별한 어떤 점이 있어 남긴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지리지상으로, 신라는 행정 구역을 주, 군, 현의 형태로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통일 전후의 일이고, 그 이전 시기에는 명확히 드러나 있는 것이 많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라 하대인 진성왕본기에서 '촌주'라는 말이 등장하여 원종과 애노의 난을 관군과 함께 진압하는 것을 보아, 아마 현 단위에서는 촌주라는 사람이 있어, 지방의 행정을 도맡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촌주는 직관지에 나와 있는 관직이 아니고, 실제로도 중앙에서 파견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원성왕본기, 애장왕본기에는 소수라는 관직이 현을 통치하는 사람으로서 등장하고, 외관지에서 역시 소수와 현령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볼 때, 촌주는 '촌' 사람들의 실제적인 우두머리로서, 소수나 현령의 통치를 보조하거나 보좌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나중의 향리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주, 군, 현 체제로 정리되기 이전, 즉 정복지에 자연적인 촌락과 행정적인 촌락이 뒤섞여 있었을 시기에는 소수나 현령 대신 도사를 파견해 지역을 통치하도록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도사가 직접 지역을 통치했다는 말 그 자체로 등장하는 경우는 없으나, 창녕 척경비에서 군주, 당주, 도사, 외촌주가 병기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당주와 촌주 사이에 도사가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주는 나중의 태수입니다. 금석문에서는 주로 송사를 받아 중앙으로 보내고, 다시 판결을 받아 포고하는 역할로 주로 등장합니다. 도사가 처음 등장했으리라 추정되는 시기도 있습니다.

 

 

三月, 始置四方郵驛, 命所司修理官道.(소지왕, 487)

 

 

바로 소지왕 9년 기록입니다. 이 때 각 지역의 역참과 도로를 정비했다는 말이 있는데, 도사의 '道'가 길이므로, 어쩌면 487년에 도로 정비 사업을 위해 처음으로 도사를 두었던 게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로를 정비하기 위해 도사를 만들었으나, 그것이 점차 지방 통치를 위한 '대리자'로서 자리잡았을 수 있습니다. 다만, 중성리 신라비의 건립 연대가 441년과 501년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441년일 경우 소지왕 보다 이전이므로, 다시 이견의 여지가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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