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과 가야금, 그리고 대가야(삼국사기 악지 중)

2020. 6. 8. 22:47삼국사기 이야기/잡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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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역사의 영역에서 음악, 복식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비주류적인 영역입니다. 보통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정치사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고구려의 태조대왕을 생각한다고 해 봅시다. 보통 우리는 태조대왕을 한나라와 적극적으로 전쟁을 벌인 왕으로 이해합니다. 태조대왕대에 있었던 사건이 무엇 있었냐고 한다면 아마 요서 지역에 축성했다는 기사를 드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태조대왕은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것을 먹었으며, 어떤 음악을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생각나는 바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기록이 남아 있지도 않고요. 이런 '문화적인 역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제가 알기로는 상대적으로 아주 최근부터입니다. 따라서 태조대왕이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았길래 119살까지나 정정하게 살 수 있었는지는 결국 미스테리로 남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역사에도 음악가로써 이름을 남긴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우륵입니다. 지금 애들은 다들 잘 모르겠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우륵'이라고 하면 '가야금'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옛날 이야기로 유명하게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도 우륵을 그런 식으로 막연하게 알고 있다가 최근에야 삼국사기에 우륵이 적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부분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지금 아님 언제 이런 글을 한 번 써 보겠어요.

 

 

 

삼국사기에는 우륵에 관한 기록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나옵니다. 하나는 신라본기의 진흥왕본기입니다. 보통 본기에는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들이 쓰이기 마련인데, 우륵의 이야기도 짧게나마 등장합니다. 우륵은 정치와는 상관이 없는 악공인데 어떻게 본기에 실렸을까요? 아마 진흥왕의 행적이 우륵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 기록은 진흥왕 12, 13년, 즉 551년과 552년입니다. 이 때 당시 백제에는 성왕이 재위 중이었습니다.

 

550년 전후는 신라와 백제, 특히 백제에게 아주 중요했습니다. 바로 성왕이 절치부심하고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경기 북부나 황해도로 축출하려고 노력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왜놈서기 흠명천황본기를 보면, 성왕이 섬진강 이서 지역의 대가야 영토를 완전히 삼켜 버리고, 신라와 가야의 군대를 통솔해 북진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경기 일대를 모두 평정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흠명천황 12년, 550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551년에는 백제가 경기 일대를 포기해서 신라가 이리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 모두 553년이라 하여 시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라와 백제 사이에 전쟁이 터져 성왕은 신라군에게 잡혀 죽고 말았고, 이후부터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되고 맙니다. 다만 왜놈서기와 삼국사기 모두에서는 왜 백제가 그 경기 일대를 포기했는지, 혹은 신라가 어떻게 경기 지역을 점유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왕이 비명에 죽은 뒤로부터 백제는 다시 한동안 쭈구리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따로 써 보겠습니다.

 

 

적색은 성왕 시기 백제의 진출 방향 / 황색은 진흥왕 시기 신라의 진출 방향 / 청색은 위덕왕 시기 금강 돌파 시도

 

 

백제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옛 수도를 탈환했으나, 곧 기세를 잃고 만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의 신라는 폭주기관차와 같았습니다. 553년에 백제에게서 경기 일대를 탈취하고는 성왕의 딸을 후처(小妃)로 삼았습니다. 이듬해에는 백제 왕을 잡아 죽이고, 백제에게서 한 때 지금의 전주까지 탈취했습니다. 성왕을 이은 위덕왕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결국 재위 내내 신라의 방어선을 돌파하지는 못했습니다. 562년에는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아예 합병해 버렸습니다. 566년에는 황룡사가 완공되었습니다. 황룡사는 절로써는 신라에서 가장 거대했다고 합니다. 진흥왕대에 신라의 북쪽 영토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초령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진흥왕대의 신라는 올라갈 줄만 알았지, 내려갈 줄은 몰랐습니다. 우륵이 살았던 시대가 바로 이 때였습니다. 통일 전,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을 거치고 있는 황금기의 신라에 살았던 것입니다. 우륵을 '음악가'로서만 이해하기 보다는, 이렇게 이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과 연결지어 보는 것이 좀 더 명확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흥왕본기에서 우륵에 관한 기사는 551년과 552년에 두 번 나옵니다.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千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진흥왕, 551)

 

十三年, 王命階古·法知·萬德三人, 學樂於于勒. 于勒量其人之所能, 敎階古以琴, 敎法知以歌, 敎萬德以舞. 業成, 王命奏之, 曰, “與前娘城之音無異.” 厚賞焉.(진흥왕, 552)

 

 

 

 

낭성

 

 

551년 기록에서는 진흥왕이 순행하다가 낭성에서 우륵과 그 제자인 니문을 불러 음악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낭성은 지금의 청원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륵은 본래 가야 사람일 텐데, 어떻게 신라에서 부를 수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왜 하필 청원에서 불렀을까요? 앞의 질문의 대답은 바로 그 기사에 있습니다. 본래 가야의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어 우륵에게 곡을 만들도록 했는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이 가야금을 들고 신라에 귀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야의 가실왕은 사실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금관가야의 왕이었을 수도 있고, 대가야의 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예 제 3국이었을 수도 있죠. 일단 여기에서는 가야의 왕이라고 그냥 두고 지나가겠습니다. 552년의 기사는 진흥왕이 계고, 법지, 만덕이라는 사람들에게 우륵에게 배우도록 했다는 내용입니다. 우륵은 계고에게는 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기에는 이 기록으로 우륵이 더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륵에 대한 직접적 기록을 더 찾으려면 악지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김부식이와 친구들은 악지에서 신라를 중심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 그리고 그에 얽혀 내려오는 악공들의 전승을 소개합니다. 말을 볼 때, 백제와 고구려의 음악은 신라가 이어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통일 직후 유민들과 신라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좋아 보였더라도 순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니까요. 게다가 음악을 비롯한 '문화'는 귀족들의 것이지 평민들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34년 동안 노숙했던 사람이 갑자기 피아노를 칠 줄 안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죠? 예나 지금이나 본질은 같습니다. 어쨌건 문화도 배워야 누릴 수 있고, 창조해낼 수 있으니까요. 반대로 신라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상세하게 전해 옵니다. 다행입니다.

 

악지 본문에서는 신라의 음악을 삼죽, 삼현, 박판, 대고, 가무로 이뤄진다고 보았습니다. 죽(竹)은 피리, 현(絃)은 현악기입니다. 다만 현악기라 해도 바이올린 같은 것이 아니라 가야금 같이 '뜯는' 악기입니다. 박판은 드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고는 북일 것이고, 가무는 노래와 춤일 것입니다. 삼현은 바로 현금, 가야금, 비파를 이르는데, 현금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거문고를 의미합니다. 현금은 중국에서 넘어왔다고 합니다. 현금은 옥보고, 속명득, 귀금선생을 통해서 지리산에서 맥이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현금 이야기는 우륵과는 무관하고, 그 시기도 불분명합니다. 볼 만한 이야기이기는 하니 글 말미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주로 이야기할 악기는 가야금입니다. 가야금은 쟁(箏)을 본떴다고 했습니다. 쟁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쟁이라고 부르는 그 악기일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국악 하는 분들한테 물어 보시면 잘 알려 주실 겁니다.

 

 

加耶琴, 亦法中國樂部箏而為之. 風俗通曰, “箏秦聲也.” 釋名曰, “箏施絃髙, 箏箏然, ·二州箏, 形如瑟.” 傅玄曰, “上圎象天, 下平象地, 中空准六合, 絃柱擬十二月, 斯乃仁智之器.” 阮瑀曰, “箏長六尺, 以應律數, 絃有十二, 象四時, 𥘭髙三寸, 象三才.”(삼국사기 잡지, 악지)

 

 

쟁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가야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김부식이 여러 책들을 인용하여 적어 두긴 했지만, 우리가 그 말들을 꼭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쟁의 위가 둥근 것을 하늘을 본뜬 것이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본떴다고 했지만, 그랬는지 아니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유래, 고사에 대해서는 중국인들이 좋은 말을 붙여서 미화하는 바가 많습니다. 믿을 걸 믿어야 합니다.

 

가야금은 쟁을 본뜬 것이라고 합니다. 다만 신라인들이 만든 것은 아니고, 가야인들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而造之.(삼국사기 잡지, 악지)

 

 

악지에도 가실왕, 진흥왕본기에도 가실왕이지만, 진흥왕본기에서는 '嘉悉'이라고 하고, 악지에서는 '嘉實王'이라고 했습니다. 글자만 다를 뿐 음이 같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상기한 것처럼 가실왕은 누구인지 아주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그냥 가야의 왕이었구나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아래에서 누구인지 생각해 보죠. 가야금 이야기는 그 뒤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王以謂‘諸國方言各異, 聲音豈可一哉.’乃命樂師省熱縣于勒, 造十二曲. 于勒以其國將亂, 㩗樂器投新羅眞興王. 王受之, 安置國原. 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舎萬徳, 傳其業. 三人旣傳十一曲, 相謂曰, ‘此繁且淫, 不可以為雅正.’遂約為五曲. 于勒始聞焉而怒, 及聽其五種之音, 流淚歎曰, ‘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爾其奏之王前.’王聞之大恱. 諌臣獻議, ‘加耶亡國之音, 不足取也.’王曰, ‘加耶王淫亂自滅, 樂何罪乎. 盖聖人制樂, 緣人情以為撙蓈, 國之理亂, 不由音調.’遂行之, 以為大樂.”(삼국사기 잡지, 악지)

 

 

가실왕은 우륵에게 열 두 곡을 만들게 했습니다. 우륵은 성열현 사람이라고 했는데, 성열현은 지금의 의령 부림면으로 봅니다. 경남입니다. 그 뒤에 나라, 즉 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망명했습니다. 진흥왕은 망명을 받고, 우륵을 국원에 있게 했습니다. 국원은 지금의 충주를 이릅니다. 진흥왕본기에서 진흥왕이 낭성에서 우륵의 음악을 들은 것이 551년이므로, 이 때는 적어도 551년 이전일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국원, 낭성, 성열현

 

 

또한 진흥왕은 주지, 계고, 만덕을 보내 우륵에게 배우게 하였고, 이 음악을 대악(大樂)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다만 눈여겨 볼 만한 점도 있습니다. 간관들은 주지 등이 배워 온 우륵의 음악을, 나라 망친 음악이니 신라에서 취하면 안 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음악 때문에 나라가 망했겠냐마는, 우륵이 망명한 것도 그렇고, 간관들이 이렇게 말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가야가 아주 어지러웠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신라가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 562년이라는 점을 참고합시다.

 

 

 

사실 우륵 자체에 대한 '생애'의 기록은 이것이 다입니다. 다만 이 뒤에, 우륵과 그 제자인 니문이 지었다는 곡 이름들이 남아 있습니다.

 

 

干勒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寳伎, 四曰逹已,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下竒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上竒物. 泥文所製三曲, 一曰烏, 二曰䑕, 三曰鶉.(삼국사기 잡지, 악지)

 

 

곡 이름이 무슨 대수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중요합니다. 왜냐면 곡 이름이 대부분 지명이거든요. 우륵이 지은 곡은 열 두 개가 있습니다.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寳伎), 달이(逹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竒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竒物)입니다. 니문이 지은 세 곡은 오(), 서(), 순()으로, 모두 동물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그 진의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륵의 곡 이름을 봅시다. 하가라도는 금관가야로 지금의 김해를, 상가라도는 대가야로 지금의 고령을 의미합니다. 보기는 어디인지 모릅니다. 달이는 여수의 돌산으로, 사물은 사천의 사천읍으로 봅니다 물혜는 광양의 광양읍으로, 하기물은 장수의 번암면과 임실 등지로 봅니다. 사자기는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거열은 거창이고, 사팔혜는 합천의 초계로 봅니다. 이사는 의령의 부림으로, 상기물은 남원으로 봅니다. 김해, 고령, 여수, 사천, 광양, 장수, 임실, 거창, 합천, 의령, 남원은 모두 가야의 영역입니다.

 

 

좌측 위에서부터 한 줄씩 하기물, 거열, 상가라도, 상기물, 사팔혜, 이사, 물혜, 사물, 하가라도, 달이

 

 

그런데 이 '十二曲'이 가실왕이 지시해 만든 곡이라고 한다면 생각할 거리가 많아집니다. 가실왕은 우륵에게 여러 나라의 말과 이름이 다른데 음악도 어찌 하나겠느냐(諸國方言各異, 聲音豈可一哉)고 하며 곡을 만들게 했습니다. 이 말은 가실왕이 다스리는 가야의 방방곡곡을 돌며 그 음악을 모으라는 말일 수도 있고, '가야' 제국들의 음악을 모으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이 기원전 5세기도 아니고, 기원후 5~6세기인 만큼, 후자 보다는 전자를 취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저런 영역을 지배할 만한 가야는 대가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륵과 가실왕이 본래 대가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대가야가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어떤 나라들이 가야를 이루고 있었는지, 그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죠. 삼국사기에도 가야에 대한 내용은 아주 단편적으로만 있으니까요. 가야가 언제 몰락했는지, 즉 망한 것이 아니라 언제 국세가 기울기 시작했는지도 사실 잘 모릅니다. 엉뚱하게도 일본서기에 이런 정황들이 그럭저럭 나와 있습니다. 다만 이 글은 일본서기를 파고 들어 분석하기 위한 글은 아니기 때문에 사건들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정황을 알려 드리기만 하겠습니다. 현종천황 시기에 기생반숙녜(紀生磐宿禰)라는 사람이 한국 남부에서 스스로를 '神聖'이라고 자칭하고 삼한의 왕이 되고자 하여 백제와 전쟁을 벌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생반숙녜의 난이라고 합니다.

 

 

是歲, 紀生磐宿禰, 跨據任那, 交通高麗. 將西王三韓, 整脩官府, 自稱神聖. 用任那左魯那奇他甲背等計, 殺百濟適莫爾解爾林[爾林高麗地也.]. 築帶山城, 距守東道. 斷運粮津, 令軍飢困. 百濟王大怒, 遣領軍古爾解內頭莫古解等, 率衆趣于帶山攻. 於是, 生磐宿禰, 進軍逆擊. 膽氣益壯, 所向皆破. 以一當百. 俄而兵盡力竭. 知事不濟, 自任那歸. 由是, 百濟國殺佐魯那奇他甲背等三百餘人.(일본서기 현종천황, 487)

 

 

이 사건은 현종천황 3년, 즉 487년에 터졌습니다. 이 때의 백제에는 동성왕이 재위 중이었습니다. 기생반숙녜는 고구려와도 통교했다고 합니다. 기생반숙녜는 이림성(爾林城)을 공격하고, 대산성(帶山城)을 쌓는 등 기세를 올리다가, 결국 백제군에 토벌당하고 임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백제 내부의 반란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제 생각엔 이 정도 군대를 일으킬 세력은 신라를 제외하면 당시엔 대가야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림성은 보통 예산의 대흥면으로 보아 임존성(任存城)과 같다고 생각하지만, 이설이 많습니다. 대산성은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맥상 기생반숙녜가 대가야와 관련이 있다면, 이림성은 충청북도 지역 어딘가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인 접경지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림성, 황색은 예산 대흥면 / 적색은 충청북도 어딘가로 추정할 때

 

 

어쨌거나 기생반숙녜가 대가야의 왕인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서기에서 임나로 돌아갔다(自任那歸)고 한 점을 보아 '반란군'이 대가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동성왕은 대가야까지 깨지는 못했고, 마찬가지로 대가야도 백제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湌比助夫之妹送之.(법흥왕, 522)

 

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법흥왕, 524)

 

十九年, 金官國金仇亥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법흥왕, 532)

 

 

30여 년 뒤인 법흥왕본기에는 522년에 가야와 신라가 국혼을 맺었다는 말이 있고, 524년에는 법흥왕이 남쪽을 돌아 보다가 가야의 왕이 와서 만났다는 말도 있습니다. 532년에는 금관국이 신라에 항복해 왔습니다. 앞의 두 가야가 대가야라면, 호전적이전 대가야가 갑자기 신라의 부용이 된 것마냥 쭈구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용과 맥락상으로는 금관국으로 볼 만한데, 금관국은 금관국이라고 따로 지칭되고 있으므로 금관가야로 보기에는 의뭉스럽습니다. 대가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사실 기생반숙녜의 난에 대해서도 신라가 개입했다거나, 신라가 어쨌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이 때 신라에는 소지왕이, 고구려에는 장수왕이 재위 중이었습니다.

 

이 '정황'은 일본서기의 계체천황본기와 흠명천황본기로 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계체천황 6년에 바로 섬진강 하류의 여수, 순천, 광양 등지를 백제가 '임나'에서 탈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상다리(上哆唎), 하다리(下哆唎), 사타(裟陀), 모루(牟婁)라고 했는데, 차례대로 여수, 돌산, 순천, 광양으로 봅니다. 이 때는 512년으로 무령왕 재위 중이었습니다. 임나를 대가야로 본다면, 대가야가 백제에게 호락호락하게 줬을 리는 없고, 아마 백제와 대가야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계체천황 23년인 529년에는 백제가 다사진(多沙津), 즉 하동 부근을 또 탈취해 갔다고 합니다. 이 때는 성왕 재위 중이었습니다.

 

 

노랑은 위에서부터 사타, 모루, 상다리, 하다리 / 빨강은 다사진

 

 

冬十二月, 百濟遣使貢調. 別表請任那國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 四縣. ... 依表賜任那四縣.(일본서기 계체천황, 512)

 

廿三年 春三月, 百濟王謂下哆唎國守穗積押山臣曰, 夫朝貢使者, 恆避嶋曲[謂海中嶋曲崎岸也. 俗云美佐祁.], 每苦風波. 因茲, 濕所齎, 全壞无色. 請, 以加羅多沙津, 爲臣朝貢津路. 是以, 押山臣爲請聞奏. 是月, 遣物部伊勢連父根吉士老等, 以津賜百濟王.(일본서기 계체천황, 529)

 

 

한편 흠명천황본기는 '성왕본기'라고 할 만큼, 흠명천황 본인 보다 백제 성왕에 대한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성왕 기록의 6~7할 정도는 '임나', 즉 가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따르면' 이렇습니다. 이 시기 임나는 예전과 같은 '위세'를 완전히 잃어, 백제와 왜놈 조정에 빌붙어 겨우겨우 명맥을 잇고 있었습니다. 왜놈 조정에서는 성왕이 임나를 주도하여 임나 '官家'를 다시 회복시키를 바랐지만, 성왕은 그러는 척하며 임나를 부용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정황들은 다음 영상으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반대로 보면, 성왕 이전까지 섬진강 서부 일대도 임나령이었다고 할 수 있죠. 즉, 광양, 여수, 하동 일대도 대가야령이라는 것입니다. 장수, 임실 일대도 그럼 대가야령이었나, 아마 한 때 그랬을 것입니다. 정확히 언제 빼앗고, 빼앗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때 대가야가 한반도 남부에서 위세를 크게 떨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임나가 대가야냐 물을 수 있습니다.

 

 

廿三年 春正月. 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 廿一年, 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合十國.].(일본서기 흠명천황, 562)

 

 

 

 

흠명천황 23년 1월에 신라가 임나 '관가'를 공격해 멸망시켰다(新羅打滅任那官家)고 했는데, 이 때가 바로 562년으로, 상기한 것처럼 진흥왕이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멸망시킨 때와 같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는 통틀어 하는 말이고, 개별적으로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의 열 나라라고 했습니다. 신라가 대가야령 일대를 모두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이 말들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가실왕과 우륵은 모두 대가야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가실왕도 그런 맥락에서 대가야의 왕이겠죠.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에게 곡을 만들라고 했을 때는 아직 대가야의 국세가 기울었을 때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풍류나 읊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악지에서 우륵이 만들었다는 열 두 곡은 모두 지명으로, 가야의 각 지역을 가리키는데, 이를 볼 때 우륵이 명령을 받들고 음악을 모두 만든 뒤의 어느 시점에 신라로 망명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륵은 551년에 낭성에서 진흥왕을 위해 연주했습니다. 따라서 우륵이 망명한 시점은 적어도 551년 이전일 것입니다. 우륵이 곡을 만든 시점이 연고지들이 아직 대가야령일 때라고 가정하면 그 시간을 보다 특칭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성왕이 섬진강 유역의 임나령을 탈취했다고 했죠? 이 때가 바로 계체천황 6년, 즉 512년입니다. 제 가정이 맞다면 우륵은 512년 전에는 곡을 모두 완성했을 것입니다. 법흥왕본기의 기록에 나오는 가야를 대가야라고 본다면, 520년 전후로 대가야는 신라의 부용 비슷하게 몰락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악지와 진흥왕본기에서 대가야가 어지러워졌다고 한 시기는 좁게 보면 512년에서 520년 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한 끗발 날리던 대가야가 이 때 몰락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안 나와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후 대가야의 행적을 조금 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성왕과 진흥왕이 함께 경기 지역을 탈취한 시점은 550년입니다. 이후 1~3년 사이에 백제가 이 땅을 포기하게 되죠.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이 이 지역을 공격할 때 신라군은 물론, 임나군도 동원했다고 합니다. 대가야는 550년 전후로는 백제나 신라의 부용 상태로 떨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성왕 말년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백제도 신라의 부용처럼 저자세를 취했습니다. 경기 지역을 신라가 백제에게서 가져간 것도 그 증거이고, 진흥왕본기에서 553년에 성왕의 딸을 후처(小妃)로 삼았다는 말이 그 증거입니다. 관산성 전투는 정황상 성왕이 신라에 참다참다 선빵을 날렸다가 불의에 당한 것입니다. 진흥왕본기에서는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을 공격했다고 했는데, 여기 나온 가량이 바로 가라, 즉 대가야입니다.

 

 

百濟王明襛加良來攻管山城.(진흥왕, 554)

 

 

즉, 대가야는 백제에 협력해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듯이 성왕은 죽고, 백제는 한동안 쭈구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에 신라가 562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대가야를 합병해 버린 것도 설명이 잘 됩니다. '부용' 대가야가 '상국'을 배신하고 '백잔'에 붙었으니, 구실을 붙여 잡아 버린 것일 것입니다. 우륵이 대가야를 떠나 신라로 망명한 것에는 이런 국제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만약 우륵이 한 세기 전 사람이었다면, 망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는 대가야가 끗발 날리던 때니까요. 이 시대는 정말인지 신라가 모든 나라를 재치고 독주하던 때였습니다. 우륵이 망명한 것은 우륵이 기회주의자였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국제적으로 신라가 가장 융성했기 때문에, 음악과 생존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아마도요.

 

 

 

이제 이야기할 만한 점이 세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는 진흥왕본기와 악지에 나오는 가실왕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야는 삼국사기 같은 역사책이 바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그 왕계도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상기한 것처럼, 가실왕 시기 대가야는 아직 몰락하기 전일 가능성이 큽니다. 남제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加羅國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量廣始登 遠夷洽化. 加羅王荷知款關海外 奉贄東遐. 可授輔國將軍本國王.(남제서 열전 39 만동남이, 가라국)

 

 

하지라는 가야의 왕이 건원 원년에 남제에 조공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왕을 하지왕이라고 합니다. 남제에서는 하지왕을 보국장군, 본국왕으로 봉했는데, 아마 '本國王'이라는 것은 가야의 종주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가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공 시기를 보면 대가야 이외엔 중국에 조공할 만한 가야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건원 원년은 479년인데, 기생반숙녜의 난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입니다. 금관국이 살아 있었다고 하나 금관국은 이미 포상팔국의 난 이후로 신라의 속국이었고, 다른 가야들은 본기에 언급조차 안 됩니다. 이 시기라면 대가야가 한창 끗발 날릴 때니, 앞에 기술했던 것처럼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이 각 지역의 곡을 만들거나 모은다는 정황에도 잘 맞습니다. 가실왕, 하지왕은 음이 아주 비슷하진 않지만, '문어'와 '대가리'처럼 아예 다르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한 번 연구해 보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왜 하필 국원이었냐 하는 것입니다. 우륵이 망명한 뒤, 진흥왕은 우륵을 경주가 아니라 국원에 안치했습니다. 왜였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정황이 좀 있습니다.

 

 

十八年, 以國原爲小京.(진흥왕, 557)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 以實國原.(진흥왕, 558)

 

 

국원은 본래 고구려령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신라가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문자왕 시기인 494년에 보은, 속리산 부근에서 신라와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적어도 494년까지는 고구려가 여전히 점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494년에서 550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신라가 탈취한 것 같으나, 정확한 시점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국원은 신라에게 최전선이었습니다.

 

 

위에서부터 국원, 보은

 

 

하지만 진흥왕대에 신라가 북진하는 데 성공하면서 국원은 '나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충주의 위치가 적절하거든요. 진흥왕은 557년에는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고, 558년에는 귀족 자제들과 경주의 백성들을 국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소경은 신라에서 갓 점령한 지역을 위무하거나, 그 주변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구역입니다. 사람들까지 이주시킨 것을 보면 진흥왕은 국원을 정말 '國原'인 것처럼 작정하고 계획 도시로 키울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음악인 우륵도 경주로 부르지 않고 국원에 머물도록 한 것이 아닐까요?

 

'國原'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미추왕의 출신을 국원으로 보는 설도 있습니다. 저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런 설도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41

 

태조 성한왕(삼국사기 제사지 중)

제사지 처음 부분에는 왕실의 오묘에 대한 말들이 있습니다. 이 중 혜공왕 시기에 대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至第三十六代惠恭王, 始定五廟. 以味鄒王爲金姓始祖, 以太宗大王·文武大王, 平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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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의 '혁신 도시'는 그 이후에도 잘 유지된 것 같습니다. 

 

 

二十五日, 王還國, 次褥突驛, 國原仕臣龍長大阿湌, 私設筵, 饗王及諸侍從. 及樂作, 奈麻緊周能晏, 年十五歳, 呈加耶之舞. 王見容儀端麗, 召前撫背, 以金盞勸酒, 賜幣帛頗厚.(문무왕, 668)

 

 

문무왕이 국원을 지날 때, 국원에서 가야의 춤을 보았다(加耶之舞)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륵 사후에도 여전히 가야 음악은 국원에서 전수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국원은 이후 쭉 소경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경덕왕 때 중원경(中原京)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아마 이 때는 KTX가 없던 시절이니, '혁신 도시'로서의 국원경은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은 현금(玄琴), 즉 거문고 이야기입니다. 우륵 만큼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거문고 이야기도 악지에 전하기에 간략하게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玄琴之作也, 新羅古記云, “初𣈆人以七絃琴, 送髙句麗, 麗人雖知其爲樂噐, 而不知其聲音及鼔之之法, 購國人能識其音而鼔之者, 厚賞. 時第二相王山岳, 存其本樣, 頗攺易其法制而造之, 兼製一百餘曲, 以奏之. 於時玄鶴来舞, 遂名玄䳽琴, 後但云玄琴.(삼국사기 잡지, 악지)

 

 

일단 거문고 자체는 진나라(晉)에서 고구려로 처음 넘어왔다고 합니다. 아마 서진이나 동진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따로 신라로는 어떻게 들어왔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 백제 및 신라, 가야로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거문고를 어떻게 타는지 몰랐는데, 왕산악이라는 재상이 거문고를 다듬어 우리에 맞게 개량했다고 합니다.

 

 

羅人沙湌𦷧永子玉寳髙, 入地理山雲上院, 學琴五十年. 自製新調三十曲, 傳之續命得, 傳之貴金先生, 先生亦入地理山, 不出. 羅王恐琴道斷絶, 謂伊湌允興, 方便傳得其音, 遂委南原公事. 允興到官, 簡聦明少年二人, 曰安長·清長, 使詣山中傳學. 先生敎之, 而其隱微不以傳. 允興與婦偕進曰, ‘吾王遣我南原者, 無他欲, 傳先生之技, 于今三年矣, 先生有所柲而不傳, 吾無以復命.’允興捧酒, 其婦執盞, 膝行致禮盡誠, 然後傳其所柲飄風等三曲. 安長傳其子克相·克宗, 克宗制七曲, 克宗之後, 以琴自業者, 非一二.” 所製音曲有二調, 一平調, 二羽調, 共一百八十七曲. 其餘聲遺曲, 流傳可記者無幾, 餘悉散逸, 不得具載.(삼국사기 잡지, 악지)

 

 

 

 

신라에서는 사찬 공영의 아들인 옥보고(玉寶高)라는 사람이 지리산의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 동안이나 거문고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옥보고는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했고, 속명득은 귀금선생(貴金先生)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귀금선생은 지리산에 짱박혀 안 나왔고, 이에 신라의 왕이 이찬 윤흥(允興)을 보내 음률을 전수받도록 했다고 합니다. 윤흥은 남원경에 부임해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보내 귀금선생에게 기법을 배우게 했습니다. 귀금선생은 처음에는 정수까지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으나, 윤흥과 그 와이프가 극진히 귀금선생을 대하자, 어쩔 수 없이 표풍(飄風) 등 세 곡을 마저 알려 주었습니다.

 

 

남원, 지리산

 

 

이 기사만 보면 어느 시기의 일인지 불분명합니다. 다행히 단서가 있습니다. 윤흥이 본기에 딱 한 번 나오는 덕분입니다.

 

 

冬十月, 伊湌允興與弟叔興季興謀逆, 事發覺, 走岱山郡. 王命追捕斬之, 夷一族.(경문왕, 866)

 

 

이찬 윤흥과 그 동생들인 숙흥, 계흥이 반란을 꾀했다가 발각되어 결국 잡혀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경문왕본기의 윤흥과 악지의 윤흥이 같은 인물인지는 저는 확신할 수가 없겠습니다. 다만 악지에도 이찬 윤흥이고, 경문왕본기에도 이찬 윤흥이므로 우연 치고는 겹치는 게 많죠. 만약 동일한 사람이라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장기간 남원에 짱박아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경문왕대에도 귀족 반란들이 좀 있었는데, 동일인이라면 그 반란 분자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윤흥이 유일합니다. 그 당시 반란들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4

 

진성왕대 민란의 뿌리는 언제일까(삼국사기 진성왕본기 중)

신라는 통일한 이후, 외부로는 큰 전쟁 없이 무난하게 멸망까지 이어졌습니다. 적어도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대로면 그렇습니다. 통일 이후에도 간혹 전쟁 기록이 확인되긴 합니다. 성덕왕 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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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의뭉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가야금은 거문고를 개량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거문고가 퍼질 시기는 가야금 보다 앞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경문왕대가 아니라 진흥왕대일 것 같은데, 정작 경문왕대라는 정황이 있으니 특이합니다. 멀리 보면 진흥왕 이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남쪽에는 지리산 만한 산이 없으므로, 아마 국적에 관계 없이 '영산'인 지리산에 들어가 수행하고, 도를 주고 받았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어느 왕 때의 일인지 김부식이와 친구들이 기록을 좀 더 남겨 주었으면 좋았을 걸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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