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을 둘러싼 신라와 당의 갈등(삼국사기 신문왕본기 중)

2020. 4. 28. 10:15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반응형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보통 왕을 부를 때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호고, 하나는 묘호입니다.

 

근데 저는 둘 다 잘 모릅니다. 대충 태조, 태종, 정종, 철종 이런 게 묘호고, 명제, 양제, 영락제 같이 묘호와 다른 게 시호라고 대충 보면 되겠습니다.

 

 

 

근데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에는 묘호를 일반적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고구려의 태조대왕이나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그렇습니다.

 

특히 신라에서는 공식적으로 말고, 내부 기록에서 태조대왕(김알지? 미추이사금? 나물이사금?)이니 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특히 무열왕처럼 대내외적으로 모두 태종이라고 사용한 것은 전무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걸 두고 볼 탁발부 오랑캐들이 아닙니다. 짝눈이 묘호가 태종인데, 이 오랑개새끼들이 짝눈이하고 무열왕이 똑같이 '태종'을 쓰는 게 꼴같잖았던지, 신문왕 재위 기간인 692년에 사신을 보내 와서 무열왕에게 올린 태종을 고치라고 협박해 왔습니다.

 

당시는 나당전쟁이 끝나고 탁발부와 신라 사이가 아직 좋아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신문왕은 이에 대해 좇까라고 했고, 내부 사정이 시끄러웠던 탁발부에서는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재밌는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김부식이는 신라본기 이 부분에서 '당중종'이 사신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692년이면 중종이 폐위되고 무측천 아줌마가 제위에 올라 있을 때였습니다.

 

'사대노' 김부식이가 이 점을 몰랐을 리 없었을 텐데 이렇게 적어 놓은 걸 보면 아마 자기도 쪽팔려서 중종이라고 적어 놓은 게 아닌가 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