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성 전투에서 고창 병산 전투까지(삼국사기 경명왕본기 중)

2020. 5. 23. 19:33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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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889년에 있었던 원종과 애노의 난 이후, 신라 각지에는 반란군을 비롯해 각종 군벌들이 난립하게 됩니다. 삼국사기에 성주나 장군으로 표현된 군벌들이 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기술한 바 있습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5

 

후삼국 시기의 군벌들(삼국사기 경애왕본기 중)

전에 다른 글에서 진성왕 시기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반란의 뿌리는 어디일까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4 이 글에서 저는 그 뿌리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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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짝눈미륵과 견훤은 그 세력이 아주 독보적이었습니다. 다소 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들이 본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진성왕 때입니다.

 

 

五年, 冬十月, 北原賊帥梁吉, 遣其佐弓裔領百餘騎, 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内酒泉等十餘郡縣.(진성왕, 891)

 

六年, 完山甄萱, 㩀州自稱後百濟, 武州東南郡縣降屬.(진성왕, 892)

 

 

이 이후 이들은 신라의 북방과 서부를 잠식하며 양대 세력으로써 부상합니다. 견훤은 전라도 일대를 석권하고 후백제를 칭했으며, 짝눈미륵은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일대를 석권하고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다만 짝눈미륵은 자기 나라의 이름을 태봉, 마진처럼 몇 차례 바꾸었는데, 아마 처음엔 견훤을 따라했다가 나중에는 롤모델을 무하마드로 바꾼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나라 이름을 이렇게 많이 바꾸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근본이 없다고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그러던 짝눈미륵이는 결국 왕위에서 축출당하고, 그 자리에는 왕건이가 올라갔습니다.

 

 

夏六月, 弓裔麾下人心忽變, 推戴太祖. 弓裔出奔, 爲下所殺. 太祖即位, 稱元.(경명왕, 918)

 

 

짝눈미륵이는 신라를 시종일관 적대했습니다. 하지만 왕건이는 이 기조를 바꾸어 신라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사실 이 시점이면 왕건의 세력은 금강 일대, 경상북도 중북부 일대에까지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왕건이의 입장에서는 신라를 더 이상 적대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견훤도 그 동안 놀고 있지 않았습니다. 견훤은 전라도 일대를 석권한 뒤, 신라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동쪽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위에 인용한 기사를 보면 892년에 견훤이 이미 후백제를 칭했다고 하지만, 사실 왕이라고 자칭한 것은 900년으로 보입니다.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光化三秊, 新羅孝恭王四秊也.(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00)

 

 

아마 892년부터 900년까지는 전라도 일대를 평정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을 것이니 후백제로만 세력을 칭했고, 이 때 이르러 마침내 왕으로 자칭한 게 아닌가 합니다.

 

견훤은 후백제왕을 칭하고부터 본격적으로 경상도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秋八月, 後百濟甄萱攻大耶城, 不下, 移軍錦城之南, 奪椋㳂邉部落而歸.(효공왕, 901)

 

一善郡以南十餘城, 盡爲甄萱所取.(효공왕, 907)

 

 

노랑은 우측부터 대야성, 금성 / 빨강은 견훤의 901년 공격 방향

 

 

 

901년에 견훤은 첫 번째로 대야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금성(지금의 나주) 남부 지역을 약탈했습니다. 대야성은 지금의 합천입니다. 그런데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다름아닌 642년에 있습니다.

 

 

是月, 百濟將軍允忠領兵攻拔大耶城, 都督伊湌品釋·舍知竹竹·龍石等死之.(선덕왕, 642)

 

 

선덕왕 때, 백제의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품석과 죽죽, 용석 등을 잡아 죽였다는 말입니다. 이 때 김품석의 부인인 고타소낭도 잡혀 죽었는데, 이 사람은 다름아닌 김춘추, 즉 나중의 무열왕의 딸이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백제와 신라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은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250여 년 뒤의 공격을 운운하기 위해 642년의 기사를 갖고 온 것은 왜일까요? 바로 대야성이 경상도 남부를 통과해 경주로 직행하는 전략적 요지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각지에 자잘한 성은 많았지만, 맥락상 대야성은 그 지역의 성들 중에서도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642년에 대야성이 떨어진 후, 바로 그 해에 김춘추가 고구려로 가 백제를 협공해 줄 것을 요청하고, 김유신은 압량주(경산과 그 주변 지역)의 군주가 됩니다. 김춘추 개인의 원한도 있었겠으나, 대야성이 뚫리면 정말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김유신은 그 당시 신라가 망하지 않은 '유이'한 근거였는데, 바로 그 김유신이 경산에 군주로 부임했다는 것은, 대야성이 함락되었기 때문에 경주가 백제에게 바로 공격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좌측부터 대야성, 압량주, 경주

 

 

 

 

907년 기록은 대야성이 함락되지 않았는데도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이 견훤에게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일선군은 지금의 구미, 선산인데, 이것은 견훤이 무리한다면 경북 중남부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겠죠. 하지만 대야성을 넘지 못한 견훤은 그 이상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습니다.

 

 

노랑은 위에서부터 일선군, 대야성 / 빨강은 907년에 견훤에게 넘아간 10여 성 추정

 

 

이 상황은 250여 년 뒤에도 변하지 않아, 나중에 대야성이 함락된 뒤 견훤은 경주를 직접 습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야성의 전략적 가치는 그 정도로 컸습니다. 이 점을 알아 두시면 됩니다. 하지만 신라에서도 그 중요성을 알았던 것인지, 대야성의 방비는 훌륭해 견훤의 공격을 그 뒤 한 차례나 더 막아냈습니다.

 

 

五年, 秋八月, 甄萱攻大耶城, 不克.(신덕왕, 916)

 

冬十月, 後百濟甄萱率歩騎一萬, 攻䧟大耶城, 進軍於進禮, 王遣阿湌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命將出師救之, 聞乃去.(경명왕, 920)

 

 

신덕왕 때인 916년에는 대야성이 한 번 더 견훤을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920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920년 당시, 견훤은 대야성을 드디어 뚫고 진례로 진격했다가 왕건이가 태조를 구원했기 때문에 더 진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진례는 김해의 진례면이라고 보기도 하고, 청도읍의 부산성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지리적으로는 부산성이 대야성에서 더 가깝기 때문데, 둘 다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청도나 김해나, 모두 경주에서 지척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야성이 뚫린 이후, 신라와 견훤의 전쟁이 경주 권역을 직접 두고 벌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진례를 청도의 부산성이라고 간주하겠습니다.

 

 

좌측 위로부터 대야성, 청도 부산성, 김해 진례면

 

 

 

 

정리해 보면, 920년까지 신라와 견훤, 즉 후백제의 전쟁은 대야성을 중심으로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920년에 대야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경주 권역이 직접 후백제에게 공격받을 수 있게 되었죠.

 

 

 

그럼 그 때까지의 전쟁이 대야성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짝눈미륵이는 생전에 지금의 나주를 중심으로 견훤과 대치했던 적이 있습니다.

 

 

 

 

開平四秊, 錦城投于弓裔, 以歩騎三千圍攻之, 経旬不解.(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10)

 

十四年, 甄萱躬率歩騎三千, 圍羅州城, 經旬不解. 弓裔發水軍, 襲撃之, 引軍而退.(효공왕, 910)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910년이나 그 직전에 금성(나주)이 짝눈미륵이에게 투항했던 모양입니다. 견훤은 금성을 탈환하려 했으나 짝눈미륵이가 원군을 보내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乹化二秊, 弓裔戰于徳津浦.(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12)

 

 

912년에는 덕진포에서 견훤과 짝눈미륵이 싸웠는데, 덕진포는 영암 어딘가로 봅니다. 영암도 매나 나주 부근입니다. 그러면 왜 전라도 서남부 끝지역이 전장이 되었을까요? 그 단초는 대야성을 처음 공격하기 직전인 909년에 보입니다.

 

 

十三年, 夏六月, 弓裔命將領兵舡, 降珍㠀郡, 又破臯夷㠀城.(효공왕, 909)

 

 

짝눈미륵이가 장군을 보내 진도군과 고이도성을 함락시켰다는 내용입니다. 진도는 지금의 진도이고, 고이도성은 지금의 신안에 있는 고이도입니다. 이 기사와 견훤 열전의 910년 기사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여기 드러나지 않지만, 금성이 어떤 이유로 짝눈미륵이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짝눈미륵이가 장군을 보내 서남부를 공격해서 구원하도록 한 모양입니다. 이 때 보낸 장군은 고려사 태조세가를 참고할 때 왕건으로 봅니다. 910년 기사의 원군이라는 것이 왕건이의 이 군대 아니었을까요?

 

 

위에서부터 고이도성, 금성, 덕진포, 진도

 

 

나주 일대는 후삼국 시대가 끝날 때까지 끝끝내 고려령으로 남습니다. 견훤은 이 지역을 탈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후백제의 전략적 약점으로 남고 말죠. 하지만 고려가 나주를 거점으로 전라도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극적인 상황도 나주에서 터지진 않았습니다.

 

 

 

따라서 대야성 함락 이후, 전장은 자연스레 경상도로 옮겨 갔습니다. 신라는 노골적으로 왕건이의 편을 들었고, 왕건이도 노골적으로 신라의 편을 들었습니다. 견훤은 그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신라는 그 때로써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대립 양상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단일 전선으로 굳어갔습니다.

 

대야성이 함락되기 직전부터, 정확히는 경명왕 즉위 이후부터, 경상도의 군벌들, 특히 경상북도 중북부의 군벌들이 고려에 투항하기 시작합니다.

 

 

秋七月, 尚州賊帥阿兹盖, 遣使降於太祖.(경명왕, 918)

 

二月, 康州將軍閠雄, 降於太祖.(경명왕, 920)

 

六年, 春正月, 下枝城將軍元逢·溟州將軍順式, 降於太祖. 太祖念其歸順, 以元逢夲城爲順州, 賜順式姓曰王.(경명왕, 922)

 

是月, 眞寳城將軍洪述, 降於太祖.(경명왕, 922)

 

七年, 秋七月, 命旨城將軍城逹·京山府將軍良文等, 降於太祖.(경명왕, 923)

 

二年, 冬十月, 髙欝府將軍能文, 投於太祖, 勞諭還之, 以其城迫近新羅王都故也.(경애왕, 925)

 

太祖親破近巖城.(경애왕, 927)

 

康州所管突山等四郷, 歸於太祖.(경애왕, 927)

 

 

918년엔 상주(경상북도 중북부)의 도적 아자개, 920년에는 강주(경상남도 서부)의 군벌 윤웅, 922년에는 하지성(안동)의 군벌 원봉과 명주(영동 지방)의 군벌 순식이, 진보성(의성읍) 군벌 홍술이 고려에 투항합니다. 이 중 순식이는 원래 짝눈미륵이의 수하였으므로, 다른 군벌들과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923년에는 명지성(경기도 포천) 군벌 성달과 경산부(성주읍) 군벌 양문이 투항합니다. 925년에는 고울부(영천 임고면)의 군벌 능문이 태조에게 투항했다가 반려되었는데, 경주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였습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죠?

 

 

노랑은 좌측 상단부터 명지성, 명주, 하지성, 상주, 진보성, 경산부, 강주 / 파랑은 고울부 / 빨강은 근암성

 

 

사실 이렇게 군벌들이 고려에 투항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맥락을 볼 때 투항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가 이 지역을 착실히 포섭해 나갔다고 볼 수는 있겠습니다. 실제로 927년에 왕건이가 근암성(문경 산양면)을 직접 공격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고려는 경상북도로 남하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이에 대해 군벌들이 호응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고려에 투항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견훤도 이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同光二秊秋七月, 遣子湏彌強,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曺物城. 城人爲太祖, 固守且戰, 湏彌強失利而歸.(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4)

 

三秊冬十月, 率三千騎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兵銳甚, 未决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亦以外甥真虎交質.(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5)

 

十二月, 攻取居昌䓁二十餘城.(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5)

 

 

노랑은 위에서부터 조물성, 문소성, 거창, 진례, 대야성 / 빨강은 920년 견훤의 공격 방향 / 파랑은 924년 견훤의 공격 방향

 

 

견훤은 920년에 대야성을 함락시킨 뒤, 진례를 공격했다가 퇴각했다고 했었습니다. 그 이후, 924년에는 대야성과 문소성의 군대를 보내 조물성을 치게 했는데, 함락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문소성은 의성의 금성면으로 봅니다. 924년에도 대야성을 계속 점령하고 있었군요. 조물성은 죽령 부근 어디인가로 보는데, 죽령은 영주와 단양 사이의 고개니까, 견훤의 전략적 안목이 이미 경북 북부에도 미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견훤은 925년 10월에 다시 조물성을 공격했고, 이번에는 왕건이가 이에 직접 맞섰으나, 결국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서로 왕신과 진호를 인질로 보내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925년에 견훤은 경상도 남북부를 동시에 공격했던 것 같습니다. 925년 12월에는 거창 등 20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거창은 경상남도의 북부 지역입니다. 조물성에서의 전투 이후, 왕건이와 견훤은 일시적으로 휴전 상태였고, 고려는 경상북도로, 후백제는 경상남도 일대와 경상북도 남부지역으로 각자 동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라만 잠식되고 있었겠죠.

 

 

 

그런데 926년에 변수가 생깁니다.

 

 

四秊, 真虎暴卒. 聞之, 疑故殺, 即囚王信獄中.(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6)

 

 

견훤이 고려에 보냈던 진호가 갑작이 죽었거든요. 이로써 휴전은 깨지고, 양측은 다시 군사 행동에 돌입합니다. 

 

 

十年 春正月 乙卯 親伐百濟龍州降之.(고려사 태조세가, 927)

 

三月 甲寅 渤海工部卿吳興等五十人, 僧載雄等六十人來投. 辛酉 王入運州, 敗其城主兢俊於城下. 甲子 攻下近品城.(고려사 태조세가, 927)

 

夏四月 壬戌 遣海軍將軍英昌·能式等, 率舟師往擊康州, 下轉伊山·老浦·平西山·突山等四鄕, 虜人物而還. 乙丑 王攻熊州, 不克.(고려사 태조세가, 927)

 

秋七月 戊午 遣元甫在忠·金樂等, 攻破大良城, 虜將軍鄒許祖等三十餘人.(고려사 태조세가, 927)

 

 

좌측 둘은 좌측에서부터 운주, 웅주, 우측 둘은 위에서부터 용주, 근품성, 아래 셋은 위에서부터 대량성, 강주, 여수 및 남해 일대

 

 

이번엔 왕건이가 먼저 행동에 나섰습니다. 왕건이는 927년 정월에는 용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았고, 3월에는 운주와 근품성을, 4월에는 여수와 남해 일대를 약탈했습니다. 마찬가지로 4월에는 웅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습니다. 7월에는 대량성을 함락시켰는데, 대량성은 대야성, 즉 합천입니다. 용주는 예천의 용궁면, 운주는 충청도의 홍성, 근품성은 앞에 나온 근암성, 즉 문경 산양면입니다. 웅주는 아마 공주겠죠? 왕건이의 공격은 충청도, 경상북도 북부, 경상남도 서부, 동북부 등에 아주 넓게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왕건이가 친정한 것은 예천, 홍성, 웅주이므로, 경상북도 중부 이남 지역은 확실히 고려령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를 굳히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남 지역은 대야성 같은 주요 거점들을 중심으로 간접적으로 군벌들을 통치하고 있던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위의 기록에 이어, 8월에는 왕건이 직접 강주(경상남도 서부)를 순시해서 후백제 성들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대야성도 먹었겠다, 경상도 일대의 군벌들도 항복해 오겠다 하니 그 일대의 세력을 추스려 신라를 확실히 부용으로 삼고, 견훤이 더 이상 동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왕건이의 전략적 목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견훤은 바로 반격했습니다.

 

 

天成二秊秋九月, 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髙欝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扵太祖.(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7)

 

秋九月, 甄萱侵我軍於髙欝府. 王請救於太祖, 命將出勁兵一萬徃救.(경애왕, 927)

 

 

노랑은 좌측부터 근품성, 공산 동수, 고울부 / 청색은 고려령 대야성 / 빨강은 927년 공산 동수 전투 이전 견훤의 공격 방향 / 자색은 927년 왕건의 신라 구원군

 

 

견훤은 927년 9월에 근품성을 탈환하고, 7월에 대야성을 빼앗겼음에도 고울부를 습격했습니다. 고울부는 영천의 임고면입니다. 합천, 즉 경상남도 북부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경상북도 중부를 통해 빙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일반적으로 경주로 들어가는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대야성쪽 길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견훤이 수 차례 대야성을 공격해 결국 함락시키지도 않았겠죠. 따라서 고려의 전략에 대해 견훤은 허를 찔러 바로 경주를 공격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경주를 깨서 경상도 남북 지역으로 형성되고 있던 고려의 방어선과 영향력을 일거에 깨 부수도록 말입니다. 임고에서는 고개만 하나 넘으면 바로 포항, 경주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신라 조정에서는 위기를 알고 있었고, 왕건이에게 원병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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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 박씨 3왕이 재위한 이유(삼국사기 신덕왕본기 중)

신라의 초기 계보를 문자 그대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와는 별개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들은 어쨌거나 건국 이후 신라의 지배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여 주는 단서가 됩니다.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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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원군을 청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비록 당시 신라가 고려의 부용처럼 전락하긴 했어도, 세태는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이니까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죽었다는 말이 삼국사기에도 나와 있고,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데, 이미 영천에 견훤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도 포석정에서, 그것도 한겨울에 논다는 것은 말이 안 되거든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망국의 책임을 경애왕이 전부 덮어쓴 게 아닌가 싶습니다.

 

 

 

 

甄萱以救兵未至, 以冬十一月, 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飽石亭宴娱, 不覺賊兵至. 倉猝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宫,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 奔走逃竄. 其爲賊所虜者, 無貴賤皆駭汗匍匐, 乞爲奴僕而不免. 又縱其兵, 剽掠公私財物略盡, 入處宫闕,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在後宫,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強滛王妃, 縱其下亂其妃. 妾. 乃立王之族弟權知囯事, 是爲敬順王.(경애왕, 927)

 

 

결국 견훤은 경애왕을 잡아 죽입니다. 고려의 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경주가 함락될 줄은 아무도 몰랐겠죠. 그래서 제가 전에 혹시 김씨들이 견훤에게 내통한 게 아닐지 의심했던 것입니다. 견훤은 김부를 권지국사로 세웠는데, 권지국사라는 것은 임시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김부는 경순왕이 되지만, 이후 견훤의 행보를 볼 때, 왕건이를 죽령 이북으로 내쫓고, 신라를 아예 합병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왕건의 구원군은 경주를 제 때 구원하지 못했지만, 경주를 함락시킨 견훤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왕건이와 견훤은 지금의 대구에서 격돌했습니다.

 

 

王聞之大怒, 遣使弔祭, 親帥精騎五千, 邀萱於公山桐藪, 大戰不利.萱兵圍王甚急, 大將申崇謙·金樂力戰死之, 諸軍破北, 王僅以身免. 萱乘勝, 取大木郡, 燒盡田野積聚.(고려사 태조세가, 927)

 

太祖以精騎五千, 要公山下, 大戦. 太祖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僅以身免. 乗勝取大木郡.(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7)

 

冬十月 甄萱遣將, 侵碧珍郡, 芟大·小木二郡禾稼.(고려사 태조세가, 927)

 

十一月 燒碧珍郡稻穀, 正朝索湘戰死之.(고려사 태조세가, 927)

 

十二月, 甄萱大木郡, 燒盡田野積聚.(경순왕, 927)

 

 

양군은 공산의 동수에서 싸웠습니다. 공산은 지금의 팔공산, 동수는 지금의 지묘동 일대입니다. 경주가 함락된 것도 9월, 공산에서 싸움을 벌인 것도 9월이니, 당시 상황이 아주 급박하게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견훤은 이 전투에서 왕건이를 아주 크게 이깁니다. 신숭겸과 김락이 죽었고, 왕건이도 죽을 뻔했다가 겨우 탈출했습니다. 지금 팔공산 인근에 붙어 있는 대구의 지명은 이 때 왕건이가 깝놀하거나 안심한 것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노랑은 위에서부터 대목군, 소목군 및 벽진군 / 빨강은 927년 공산 동수 전투 이후 견훤의 공격 방향

 

견훤은 동수에서 이긴 뒤, 대목군으로 가 곡식을 태워 버립니다. 대목군은 칠곡의 약목면입니다. 정황상 대목군은 당시 고려의 세력권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향후에 고려군의 식량으로 쓰일 곡식을 견훤이 태운 것 같습니다. 태조세가에서는 10월에 견훤이 벽진군을 공격하고, 대목군과 소목군의 곡식을 베어 갔다고 했습니다. 11월에는 벽진군의 곡식을 불태웠다고 했습니다. 다만 대목군의 곡식을 불태운 사건을 신라본기에서는 12월이라 하고, 고려사에서는 9월이라 하니, 시간적 차이가 조금 있습니다. 여기서 벽진군, 소목군은 모두 지금의 성주, 고령 일대입니다. 정황상 고려사의 기록을 좀 더 믿을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견훤이 칠곡, 성주 일대를 공격한 이후, 이를 탈환하려던 고려군과 충돌이 있었지만, 견훤이 이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만 공산 전투는 신라본기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견훤의 열전에만 짧게 나오죠. 공산 전투가 이후의 전략적 향방을 결정할 만큼 아주 큰 전투였음에도 본기에 기술해 두지 않았다는 점이 좀 미심쩍습니다... 아마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신라는 경애왕이 죽고 그 사후 처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공산 전투에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본기에 쓰지 않고 열전에만 쓴 것이 아닌가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공산 전투는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전투니까요.

 

 

 

견훤이 왕건이를 크게 이겼다는 효과는 이듬해부터 바로 드러났습니다.

 

 

二年, 春正月, 髙麗金相與草八城賊興宗戰, 不克死之.(경순왕, 928)

 

乙亥 元尹金相, 正朝直良等, 將往救康州, 經草八城, 爲城主興宗所敗, 金相死之.(고려사 태조세가, 928)

 

夏五月, 康州將軍有文, 降於甄萱.(경순왕, 928)

 

夏五月, 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8)

 

五月 庚申 康州元甫珍景等運粮于古子郡, 甄萱潛師, 襲康州. 珍景等還戰敗, 死者三百餘人, 將軍有文降于萱.(고려사 태조세가, 928)

 

 

일단 강주(경상남도 서부)가 견훤에게 떨어졌습니다. 경주, 영천, 대구, 칠곡, 성주 일대가 견훤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그 이남의 경상남도 일대는 왕건이의 입장에서는 허리가 잘린 형국이 되었습니다. 경순왕본기에는 928년 1월에 고려의 김상이 초팔성의 도적 흥종에게 죽었다고 했지만, 태조세가를 보면 김상의 군대는 강주를 구원하기 위한 지원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팔성은 합천의 초계면, 즉 대야성 근처입니다. 이미 이 지역도 견훤에게 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종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견훤에게 붙은 군벌이었겠죠. 지원을 받지 못한 강주는 결국 5월에 견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유문이라는 군벌이 견훤에게 항복했는데, 아마 당시 강주를 통치하고 있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위로부터 초팔성, 강주

 

 

사실 이 사이에 견훤과 왕건 사이에 서신이 오간 적이 있습니다. 길기 때문에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내용은 이렇습니다. 견훤은 지금 기세를 타고 평양까지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왕건은 공격하지 말라고 부탁하죠. 공산 전투로 균형이 무너진 형국이 이와 같았습니다. 사실 공산 전투 이전까지는 경상도 일대로 고려가 남하하며 전략적으로는 우위에 있었는데, 한 순간에 뒤바뀌어 버린 거죠. 이 편지는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도 있고, 고려사 태조세가에도 있습니다. 다만 태조세가에는 왕건이가 견훤에게 보낸 답서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5월에 강주가 떨어진 이후에도 견훤은 계속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秋七月 辛亥 渤海人大儒範率民來附. 丙辰 自將擊三年山城不克, 遂幸靑州.(고려사 태조세가, 928)

 

秋八月, 甄萱命將軍官昕, 築城於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率兵擊走之. 甄萱進屯於大耶城下, 分遣軍士, 芟取大木郡禾稼.(경순왕, 928)

 

秋八月, 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8)

 

甄萱使將軍官昕城陽山, 王遣命旨城元甫王忠, 率兵擊走之. 官昕退保大良城, 縱軍芟取大木郡禾稼. 遂分屯烏於谷, 竹嶺路塞. 命王忠等, 往諜于曹物城.(고려사 태조세가, 928)

 

冬十月, 甄萱攻䧟武谷城.(경순왕, 928)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柭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8)

 

冬十一月 甄萱選勁卒, 攻拔烏於谷城, 殺戍卒一千, 將軍楊志·明式等六人出降. 王命集諸軍于毬庭, 以六人妻子, 徇諸軍棄市.(고려사 태조세가, 928)

 

 

좌측 위로부터 삼년산성, 양산, 추풍령

 

 

7월에는 왕건이가 삼년산성을 친정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삼년산성은 충청도의 보은에 있습니다. 8월에는 견훤이 관흔이란 장군에게 양산에 성을 쌓게 했습니다. 양산은 충청도의 영동입니다. 김천과 영동 사이에 있는 것이 추풍령이니, 추풍령 너머로 넘어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도는 고려측의 명지성 군벌 왕충에게 막혀, 후백제군은 대야성으로 물러났습니다. 삼년산성은 후백제령이지만, 왕건이가 영동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이 시기의 충청도, 경상북도 북부의 후백제, 고려 사이의 국경은 깔끔하지 않고 이리저리 꼬여 있었을 것입니다.

 

 

노랑은 좌상단부터 가은현, 순주, 병산, 의성부, 오어곡 / 빨강은 929년에서 고창 병산 전투까지 견훤의 공격 방향 / 파랑은 고창 병산 전투 당시 왕건의 반격 방향

 

 

그런데 삼국사기의 견훤 열전에는 후백제군이 대야성으로 물러났다고만 되어 있고, 경순왕본기에는 거기다가 대목군을 약탈했다고 했는데, 고려사 태조세가에는 여기에다가 후백제가 오어곡에 주둔해 죽령을 틀어 막았다고 했습니다. 오어곡은 바로 뒤에 나오는 무곡성과 같은 곳으로 봅니다. 군위의 의흥면이라고 보죠. 오어곡, 무곡, 부곡 모두 같은 곳으로 봅니다. 경순왕본기에는 10월에, 견훤 열전, 태조세가에는 11월에 무곡성, 부곡성, 오어곡성을 깼다고 했습니다. 군위가 뚫렸다는 것은 경상북도 중부에서 북부로 북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왕건이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군위가 떨어지며 후백제에 항복한 양지, 명식 등 6명의 처자를 모아 공개적으로 죽였다고 합니다. 고려사, 삼국사기에서 왕건이는 견훤의 '악독한 짓'에 대해 항상 허허 웃으며 상대하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이 시기에는 확실히 구석에 몰렸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사태는 더 악화됩니다.

 

 

秋七月, 甄萱義成府城, 髙麗洪述出戰, 不克死之. 順州將軍元逢, 降於甄萱. 太祖聞之怒, 然以元逢前㓛宥之, 伹攺順州爲縣.(경순왕, 929)

 

四年秋七月, 以甲兵五千人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29)

 

辛巳 甄萱以甲卒五千, 侵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王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又侵順州, 將軍元奉遁.(고려사 태조세가, 929)

 

 

의성이 뚫린 것이죠. 의성이 함락되면서 그 지역의 군벌인 홍술이 죽었는데, 왕건이는 이를 듣고 꺼이꺼이 울기까지 합니다. 또한, 의성이 붕괴되며 후백제군은 바로 안동까지 북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주(안동 풍산읍)를 지키던 원봉은 견훤에게 항복했습니다. 다만 경순왕본기에는 항복했다고 했고, 태조세가에는 도망쳤다고 했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안동까지 북진한 견훤은 사실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한 번만 더 이기면 죽령 이남은 물론, 죽령 이북의 군벌들도 왕건에서 이반할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이에 견훤은 가은현(문경 가은읍)을 공격합니다.

 

 

冬十月, 甄萱加恩縣, 不克而歸.(경순왕, 929)

 

冬十月 丙申 百濟一吉干廉昕來投. 甄萱圍加恩縣, 不克.(고려사 태조세가, 929)

 

 

그런데 못 이겼습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후백제의 일길찬인 염흔이란 사람이 고려에 투항을 했네요. 견훤은 이번에는 고창군(안동)을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왕건이 또한 친정하여 고창에서 견훤과 맞서죠.

 

 

十二月 甄萱圍古昌郡, 王自將救之.(고려사 태조세가, 929)

 

太祖甄萱古昌郡甁山之下, 大捷, 殺虜甚衆.(경순왕, 930)

 

大舉兵次古昌郡瓶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虜百姓, 移入全州. 太祖元逢前有功, 宥之, 攺順州下枝縣.(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丙戌 王自將, 軍古昌郡甁山, 甄萱軍石山, 相去五百步許. 遂與戰, 至暮萱敗走, 獲侍郞金渥, 死者八千餘人. 是日, 古昌郡奏, “萱遣將, 攻陷順州, 掠人戶而去.” 王卽幸順州, 修其城, 罪將軍元奉. 庚寅 以古昌郡城主金宣平爲大匡, 權行·張吉爲大相.(고려사 태조세가, 930)

 

 

그런데 졌습니다. 견훤은 후삼국 통일까지 적게 보면 단 한 번의 전투만 남겨 두고 있었는데, 이걸 이기지 못했습니다. 8천 명이 죽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패배였습니다. 고려사에서는 공산에서 왕건이가 이끌고 간 병력이 기병 5천 명이랬는데, 공산에서 이 병력이 몰살했으니, 공산 전투와 비등비등할 정도로 패하고 만 것입니다. 태조세가가 가장 상세한데, 왕건이는 병산, 견훤은 석산에 진을 치고 하루종일 싸웠는데, 결국 견훤이 지고 8천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견훤은 패배 이후 순주를 습격해 떨어뜨렸으나,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습니다. 병산은 지금의 안동의 와룡면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전투를 고창 전투, 혹은 병산 전투, 혹은 고창 병산 전투라고 합니다.

 

저는 무능력한 사람이라 이 전투의 내막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태조세가에 전투 이후에 고창의 성주인 김선평, 권행, 장길을 봉작한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의 역할이 컸던 모양입니다. 사실 태조세가에는 김선평 등의 전공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은데, 엉뚱하게도 고려사 지리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太祖十三年, 與後百濟王甄萱, 戰於郡地, 敗之. 郡人金宣平·權幸·張吉, 佐太祖有功, 拜宣平, 爲大匡, ·, 各爲大相, 陞郡, 爲安東府.(고려사 지리지 안동부)

 

 

김선평, 권행, 장길이 고창 전투에서 공을 세웠기에 봉작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선가 보기로는 경애왕이 잡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고창의 호족들이 견훤을 배신한 것이라 하는데, 저는 그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성주라 했으니 군벌, 혹은 호족일 것인데, 어떤 내막으로 공을 세웠기에 이름이 남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똑똑한 전공자에게 물어 보세요.

 

 

 

고창 전투의 여파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왕건은 공산에서 지고 강주와 대야성을 잃었으며, 경상북도 중북부까지 위협받았었습니다. 고창에서 이기고 얻은 것은 어쩌면 그 이상이었습니다.

 

 

永安·河曲·直明·松生等三十餘郡縣, 相次降於太祖. 二月, 太祖遣使告捷, 王報聘兼請相㑹. 秋九月, 國東㳂海州郡部落, 盡降於太祖.(경순왕, 930)

 

於是, 永安·河曲·直明·松生等三十餘郡縣, 相次來降. 二月 乙未 遣使新羅, 告古昌之捷, 羅王遣使報聘, 致書請相見. 是時, 新羅以東, 沿海州郡部落, 皆來降, 自溟州至興禮府, 㹅百十餘城. 庚子 幸昵於鎭. 北彌秩夫城主萱達, 與南彌秩夫城主, 來降. (고려사 태조세가, 930)

 

己亥 幸大木郡, 以大丞弟弓爲天安都督府使, 元甫嚴式爲副使.(고려사 태조세가, 930)

 

五年, 春二月, 太祖率五十餘騎, 至京畿逋謁. 王與百官郊迎, 入宫相對, 曲盡情禮. 置宴於臨海殿, 酒酣, 王言曰, “吾以不天, 寖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痛如之.” 因泫然涕泣. 左右無不嗚咽, 太祖亦流涕慰藉. 因留數旬迴駕, 王送至穴城, 以堂弟裕廉爲質隨駕焉. 太祖麾下軍士肅正,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 秋八月, 太祖遣使, 遺王以錦彩·鞍馬, 并賜羣僚·將士布·帛有差.(경순왕, 931)

 

十四年 春二月 丁酉 新羅王遣大守謙用, 復請相見. 辛亥, 王如新羅, 以五十餘騎, 至畿內, 先遣將軍善弼, 問起居. 羅王命百官迎于郊, 堂弟相國金裕廉等, 迎于城門外, 羅王出應門外迎拜. 王答拜, 羅王由左, 王由右, 揖讓升殿. 命扈從諸臣, 拜羅王, 情禮備至. 宴臨海殿, 酒酣, 羅王曰 “小國不天, 爲甄萱椓喪, 何痛如之” 泫然泣下. 左右莫不鳴咽, 王亦流涕, 慰藉之. 夏五月 丁丑 王遺羅王, 太后竹房夫人, 與相國裕廉, 匝干禮文, 波珍粲策宮·尹儒, 韓粲策直·昕直·義卿·讓餘·寬封·含宜·熙吉等, 物有差. 癸未, 王還, 羅王送至穴城, 以裕廉爲質而從. 都人士女, 感泣相慶曰, “昔甄氏之來, 如逢豺虎, 今王公之來, 如見父母.” 秋八月 癸丑 遣甫尹善規等, 遺羅王鞍馬·綾羅·綵錦, 幷賜百官綵帛, 軍民茶·幞頭, 僧尼茶·香, 有差.(고려사 태조세가, 931)

 

 

일단 왕건과 태조 사이에서 간을 보던 여러 군들이 항복해 왔습니다. 경순왕본기에서는 전투 직후 영안, 하곡, 송생, 직명 등 30여 군현, 그리고 9월에 나라 동쪽 바닷가의 주와 군들이 모두 왕건이에게 항복했다고 했습니다. 후자는 아마 영동 지역일 것 같습니다. 고려사 태조세가에도 마찬가지로 전투 직후 영안, 하곡, 송생 등 30여 군현이 투항해 왔다고 합니다. 2월에는 명주부터 흥례부까지 110여 성이 투항했으며, 같은 달에 북미질부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 성주와 함께 투항했습니다. 영안, 하곡, 송생, 직명 등은 모두 경상북도 중북부로 보입니다. 북미질부와 남미질부는 모두 포항 흥해의 곡강천 주변을 이르는 말 같습니다. 게다가 930년 8월에는 왕건이가 대목군(칠곡)까지 가서 관리를 임명했다고 하니, 이 일대에서 견훤의 세력은 완전히 빠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창 병산 전투 이후 왕건에게 투항한 지역 추정

 

 

왕건은 이 승리를 빌미로 931년엔 경순왕과 만나기까지 합니다. 경순왕과 만나고, 견훤을 이긴 것을 '함께' 축하하며, 신라왕도 아니면서 신라의 왕과 관료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백성들에게는 부모 같다는 말까지 듣습니다. 백성들은 견훤을 이리나 승냥이 같은데 왕건이는 부모 같다고 하여 아양을 떨었는데, 견훤이 이겼으면 아마 견훤을 보고 부모 같다고 했겠죠?

 

 

長興三年, 甄萱龔直勇而有智略, 來降. 太祖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32)

 

六月 丙寅 百濟將軍龔直來降.(고려사 태조세가, 932)

 

 

하나밖에 기록이 없기는 하지만, 후백제측의 투항자도 있었습니다. 공직은 충청도의 군벌인데, 이 사람이 투항한 것은 일모산성의 향방과 함께 향후 충청도가 후백제를 배신하느냐, 배신하지 않느냐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에 대해선 기회가 되면 따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고창 전투의 여파로 나라의 동쪽 절반 대부분이 왕건이에게 귀부해 버렸습니다. 반대로, 견훤에게서는 이탈한 것이죠. 왕건의 입장에서, 공산 전투 이후 경상북도 북부로 끝없이 밀리던 전세가 고창 전투 한 번으로 역전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간을 보고 있던 군벌들이 왕건에게 투항해 왔으며, 신라는 확실하게 왕건의 부용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경애왕 때까지만 해도, 좀 쩌리 같긴 해도 그래도 대등한 국가 대 국가로서 외교하던 신라는 사라졌습니다. 신라의 백성들은 왕건을 부모처럼 섬겼고, 왕과 신료들도 선물을 받고 왕건이를 부모처럼 따랐습니다.

 

견훤의 입장에서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에 더해 밥솥을 아예 엎어 버린 격이 되어 버렸습니다. 견훤은 고려와 가까이 지내던 경애왕을 잡아 죽였고, 공산에서 왕건이를 아주 크게 이겼으며, 이 기세를 타고 군위, 의성을 뚫으며 안동까지 북진했습니다. 한 번만 더 이기면 경상도의 민심을 확실히 후백제의 편으로 돌려 놓고, 죽령 이북 지역까지 왕건이에게서 이탈시킬 수 있었을 텐데, 이 단 한 번의 전투를 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견훤은 주력군을 잃고 경상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왕건이 약목군에 관리를 임명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만약 견훤이 고창에서 이겼다면 신라를 합병하고, 고려도 잡아 먹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그 한 번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견훤의 능력이 모자라서이거나, 견훤이 그 때 기력이 쇠해서 일을 그르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견훤은 그 뒤에도 왕건이의 허를 찌르거든요.

 

 

秋九月, 遣一吉湌相貴, 以舡兵入髙麗禮成江, 留三日, 取··三州舩一百艘焚之, 捉猪山㠀牧馬三百匹而歸.(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32)

 

九月 甄萱遣一吉粲相貴, 以舟師入侵禮成江, 焚塩·白·貞三州船一百艘, 取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冬十月 甄萱海軍將尙哀等攻掠大牛島, 命大匡萬歲等救之, 不利.(고려사 태조세가, 932)

 

 

932년에 견훤은 예성강 일대를 습격해서 고려에 타격을 크게 입힙니다. 그 때까지는 항상 후백제가 나주를 중심으로 공격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이 때 카운터를 날린 거죠. 고려는 이를 막지 못했지만, 해군 중심의 공격인 만큼 후백제도 이 지역을 점유하고 유지하지는 못했습니다. 피해는 주었지만, 점령하진 못한 것입니다. 만약 이 공격이 고창 전투 이전이나, 공산 전투 전후였다면 고려는 피해를 추스린다고 힘을 써야 했겠지만, 이 때는 고창 전투 이후였습니다. 기세를 뒤집지는 못했고, 따라서 전술적 승리였지만 전략적인 승리라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한강 및 예성강, 송악 일대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이 짙어졌습니다.

 

 

清泰元年春正月, 太祖渾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尚達·崔弼等降於太祖.(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934)

 

九月 丁巳 自將征運州, 與甄萱戰, 大敗之,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고려사 태조세가, 934)

 

 

견훤은 왕건이가 운주(홍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공격했지만, 유금필에게 크게 패하고 맙니다. 게다가 이 해에 웅진 이북의 30여 성과 여러 신료들이 왕건이에게 항복까지 하게 되죠. 다만 태조세가에서는 왕건이도 견훤과 싸우러 운주를 공격했다고 하니,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노랑은 좌측부터 운주, 웅주 / 파랑은 운주 전투 이후 왕건이에게 투항한 지역 추정

 

 

웅진 이북의 성들이 이탈한 이후, 견훤은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아들에게 배신당해 고려에 투항하고 맙니다. 결국 우리가 아는 대로 고려가 전국을 통일하고, 견훤은 고려에서 병으로 죽고 맙니다. 견훤은 새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니, 역사에 유일무이한 사람이자, 그 시대의 영웅이었을 겁니다.

 

 

 

정리하자면, 경명왕, 경애왕을 전후하여 왕건이는 경상도로 남하하면서 신라를 잠식해 들어갔고, 신라도 이를 거부하지 않아 신라와 고려의 후백제에 대한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견훤은 결국 대야성을 깨고, 북쪽 길을 통해 영천을 점령했으며, 이로써 경애왕을 잡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웁니다. 게다가 이를 구원하러 온 왕건이를 공산 동수에서 아주 크게 이겼습니다. 이 때부터 견훤은 경상도 중부, 남부 일대를 석권하고, 기세를 올리며 북부로 진격했으나, 고창 병산에서, 단 한 번의 승리를 거두지 못해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고창의 승리로 왕건이는 다 죽어 가던 명줄을 살렸고, 경상도를 견훤에서 다시 이탈시켜 자기 편으로 만들었으며, 신라를 확실히 부용으로 삼았습니다. 견훤은 결국 이 형세를 역전시키지 못했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드라마를 보면서 알았던 것들인데, 이렇게 사료를 뒤지며 글을 써 보니 또 재미가 있네요. 관심 있는 분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신덕왕본기에서 경순왕본기까지, 삼국사기 열전 10 궁예와 견훤, 그리고 고려사 태조세가를 중심으로 읽어 보시면 재구성하시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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