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논어 - 1 - 학이 - 14 - 군자식무구포

2024. 4. 18. 11:18논어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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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논어》 번역에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정태현(鄭泰鉉)의 2013년 번역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皇侃의 《論語集解義疏》, 陸德明의 《經典釋文》, 韓愈의 《論語筆解》, 邢昺의 《論語註疏》, 朱熹의 《論語集註》,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劉寶楠의 《論語正義》,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주석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何晏의 《論語集解》를 참고하였습니다. 본래 《논어》의 주석으로는 朱熹의 《集註》가 유명하지만, 皇侃의 《義疏》에는 南北朝 시대 학자들의 견해가 수록되어 있고, 邢昺의 《註疏》에는 唐代까지의 정통 官學적 관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經典釋文》과 《校勘記》에는 판본에 따라 글자가 어떻게 다른 사례들이 있는지가 소개되어 있고, 劉寶楠의 《正義》에는 이전까지의 연구 성과들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고, 또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俞樾의 《群經平議》에는 여러 가지 이설들이 논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모두 참고하여, 이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설을 택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劉寶楠의 설을 소개하고, 또 俞樾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논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 박정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4년 4월 18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주석을 같이 보고 싶은 분들은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28

 

논어 - 1 - 학이 - 14 - 군자식무구포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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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君子食無求飽,居無求安,

敏於事而慎於言,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공자가 말했다.[각주:1]

 

“군자는 [공부에 열중하느라 먹는 일도, 거처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먹을 때는 배부르기를 바라지 않고, 거처할 때는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각주:2]

 

<공자의 말 이어짐>

 

“[또,] 매사에 노력하고, 언사에 조심하며, 덕행을 갖춘 자를 좇아서 [자신을] 바로잡는다.”[각주:3]

 

<공자의 말 이어짐>

 

“[이처럼 군자는]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만하다.”[각주:4]

 

 

 

 

  1. 子曰, ◈ 子는 孔子를 이른다. ◈ 曰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말을 인용할 때 사용한다. 지금의 따옴표처럼 사용된다. ◈◈ 邢昺은 此章述好學之事, ‘이 장에서는 학문을 좋아하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此章言君子當安貧力學也, ‘이 장에서는 君子가 마땅히 가난을 편안하게 받아 들이고, 공부에 힘써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君子食無求飽/居無求安을 보고 가난이라고 해석한 듯한데, 내 생각에 이 장 내용은 가난과 상관이 없다. ◈◈ 蜀虎案 : 이 장에서는 공부할 때 취해야 할 자세를 君子의 모습과 태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2. 君子食無求飽/居無求安, ◈ 君子는 체언으로, ‘君子’다. ◈ 食은 부사어로, ‘먹을 때’처럼 해석된다. ‘먹음에’처럼 번역하기도 한다. ▼ 劉寶楠은 禮記/曲禮注/食/飯屬也, ‘《禮記》 「曲禮」에 대한 주석에서는 “食는 밥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曲禮」는 「曲禮 上」을 이른다. 「曲禮」에 대한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食居人之左, ‘居人의 左에서 食한다’라는 부분에 달려 있다. 그런데, 본문의 食無求飽에서 食은 ‘먹을 때’, ‘먹는 것’이라는 말이고, 「曲禮 上」의 食는 ‘밥’이라는 말이므로, 둘은 다르다. 앞의 食은 ‘식’이라고 읽고, 뒤의 食는 ‘사’라고 읽는다. 劉寶楠은 「曲禮 上」의 食를 가지고 본문의 食을 풀이하고 있으나, 내 생각에는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 無는 부정어로, 不과 같다. ‘~하지 않다’는 말이다. 모두 求를 한정한다. ◈ 求는 용언으로, ‘원하다’, ‘바라다’, ‘구하다’는 말이다. 求飽와 求安의 求는 각각 飽와 安을 받는다. ◈ 飽는 체언으로, ‘배부른 상태’, ‘배부르기’다. 즉, 無求飽는 ‘飽하기를 求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 劉寶楠은 說文/飽/猒也///猒者/足也//禮記/禮器云/有以少爲貴者/天子一食/諸侯再/大夫士三/庶人食力無數///注/一食/再食/三食/謂告飽也//食力/謂工商農也///又/公食大夫禮/賓三飯以湆醬///注/三飯而止/君子食不求飽///彼言禮食之事/君子不當求飽//故此言家貧者/食無求飽爲君子也, ‘《說文》에서는 “飽는 猒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만족하다는 뜻이다. 《禮記》 「禮器」에는 “적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天子는 한 번 먹고, 제후는 두 번 먹고, 大夫와 士는 세 번 먹고, 庶人이나 食力의 경우, 무수히 먹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주석에서는 “한 번 먹고, 두 번 먹고, 세 번 먹고 배가 부르다고 한다는 뜻이다. 食力은 기술자, 상인, 농민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또, 「公食大夫禮」에 “손님은 세 번 밥을 먹고, 湆醬을 먹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주석에서는 “세 번 밥을 먹고 멈춘다는 뜻이다. 君子는 먹을 때 배불리 먹으려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말들은 예법에 맞게 식사할 때는, 君子가 마땅히 배불리 먹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은 집이 가난하다면, 먹을 때 배불리 먹으려 하지 않아야 君子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飽에 대한 풀이는 「食部」에 있다. 「禮器」 인용문의 경우, 庶人食力無數가 「禮器」 본문에는 食力無數라고 되어 있다. 「禮器」에 대한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公食大夫禮」는 《儀禮》의 편이다. 「公食大夫禮」에 대한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劉寶楠은 이 句를 계속 가난과 연관해서 설명하려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 句 말미에 내 의견을 달아 두었다. ◈ 居는 부사어로, ‘거처할 때’처럼 해석된다. ‘거처함에’처럼 번역하기도 한다. ▼ 劉寶楠은 說文/凥/處也//從尸几//尸得几而安也///居/蹲也///二字義別//今經傳皆叚居爲凥, ‘《說文》에는 “凥는 處라는 뜻이다. 尸와 几가 들어 있다. 시체가 几하게 되어 편안해졌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고, “居는 쭈그려 앉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 두 글자의 의미는 다르다. 지금 經傳들에는 모두 居가 凥의 의미로 가차되어 사용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凥와 居는 각각 「几部」와 「尸部」에 기재되어 있다. 凥에 대해서는 凥/處也//从尸//得几而止//孝經曰/仲尼凥///凥/謂閒居如此, ‘凥는 處라는 뜻이다. 尸가 들어 있다. 几하게 되어 止하였다는 말이다. 《孝經》에는 “仲尼가 凥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凥는 이와 같이 한가롭게 있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孝經》 인용문은 「開宗明義」에 나온다. 지금 판본에는 仲尼居, ‘仲尼가 居했다’라고 되어 있다. 劉寶楠은 《說文解字》를 근거로 하여 凥와 居를 구분하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고대에는 이 두 글자가 구분되었다가, 차츰 居처럼 바뀌면서 혼용되었을 듯하다. ◈ 安은 체언으로, ‘편안한 상태’, ‘편안하기’다. 즉, 無求安은 ‘安하기를 求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 劉寶楠은 爾雅/釋詁/安/定/止也, ‘《爾雅》 「釋詁」에는 “安, 定은 止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詁」에는 訖/徽/妥/懷/安/按/替/戾/底/廢/尼/定/曷/遏/止也, ‘訖, 徽, 妥, 懷, 安, 按, 替, 戾, 底, 廢, 尼, 定, 曷, 遏은 止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 鄭玄은 學者之志/有所不暇, ‘배우는 자의 뜻에는 한가할 틈이 없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아마 君子가 배우기를 좋아해서, 먹는 일이나 거처하는 일에서 맛있고 편안한 쾌락을 찾을 틈이 없다는 말 같다. ◈◈ 皇侃은 此勸人學也//既所慕在形骸之內/故無暇復在形骸之外/所以不求安飽也//一簞一瓢/是無求飽也//曲肱陋巷/是無求安也, ‘이 글에서는 사람들에게 배울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미 육신 속에 그리워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기에, 육신 밖으로 그 마음이 다시 외재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편안하거나 배부르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대나무 밥그릇과 표주박으로도 만족하니, 이것이 배부르기를 바라지 않는 모습이요, 팔을 펼 수도 없는 陋巷에 사니, 이것이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는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에 賢哉回也//一簞食/一瓢飲/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 ‘현명하구나, 回야. 대나무 밥그릇으로 밥을 먹고, 표주박으로 물을 마시며, 누추한 곳에 산다. 다른 사람들은 괴로움을 견딜 수 없을 것이나, 回는 그런 생활이 즐겁다는 생각을 고치지 않는구나. 현명하도다, 回야’라는 말이 있다. ◈◈ 邢昺은 言學者之志/樂道忘飢/故不暇求其安飽也, ‘배우는 자의 뜻이 道에 즐거워하기가 배가 고프다는 점도 잊을 정도이니, 이에 편안하게 있거나 배가 부르기를 바랄 틈이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不求安飽者/志有在而不暇及也, ‘편안하기나 배 부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뜻이 在한 데 있어서, 미칠 겨를이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無求飽/無求安/若顔子一簞食/一飄飲/在陋巷/不改其樂者也, ‘배부르기를 바라지 않고,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顏子가 대나무 밥그릇을 밥을 먹고, 표주박에 물을 마시며, 비루한 곳에서 살면서도 즐겁다는 마음가짐을 바꾸지 않는 모습과 같다’라고 하였다. 顏子는 顏回를 이른다. 一簞食/一飄飲/在陋巷/不改其樂者는 《論語》 「雍也」에서 따 온 말이다. 「雍也」에는 賢哉回也//一簞食/一瓢飲/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 ‘현명하구나, 回야. 대나무 밥그릇으로 밥을 먹고, 표주박으로 물을 마시며, 누추한 곳에 산다. 다른 사람들은 괴로움을 견딜 수 없을 것이나, 回는 그런 생활이 즐겁다는 생각을 고치지 않는구나. 현명하도다, 回야’라는 말이 있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鄭玄의 주석 중 有所不暇에 대해, 皇本/暇下有也字, ‘《皇侃本》에는 暇 다음에 也가 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주석 중 樂道忘飢에 대해, 閩本北監本/飢作饑//案/說文/穀不孰爲饑///飢/餓也//則字當作飢, ‘《閩本》과 《北監本》에는 飢가 饑로 되어 있다. 살펴 보건대, 《說文》에는 “곡식이 익지 않은 모습을 饑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飢는 굶주리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즉, 이 글자는 마땅히 飢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說文解字》 「食部」에 饑/穀不孰爲饑, ‘饑는 이렇다. 곡식이 익지 않은 모습을 饑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또, 《爾雅》 「釋天」에는 穀不熟爲饑/蔬不熟爲饉/果不熟爲荒, ‘곡식이 익지 않은 모습을 饑라고 하고, 채소가 익지 않은 모습을 饉이라고 하며, 과일이 익지 않은 모습을 荒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다. ◈◈ 蜀虎案 : 鄭玄, 邢昺, 朱熹가 옳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시간을 들이고, 편안하게 있으려고 또 노력을 들인다. 그러나 君子는 맛과 편안함 보다도 공부를 더욱 좋아하니, 먹어도 단지 먹는 데에 그치고, 있어도 단지 있는 데에 그친다. 《荀子》 「勸學」에 使目非是無欲見也/使口非是無欲言也/使心非是無欲慮也//及至其致好之也/目好之五色/耳好之五聲/口好之五味/心利之有天下//是故權利不能傾也/群衆不能移也/天下不能蕩也, ‘君子는 이처럼 학문에 관한 것이 아니면 눈으로 보려 하지조차 않았고, 학문에 관한 것이 아니면 입으로 말하려 하지조차 않았으며, 학문에 관한 것이 아니면 마음 속으로 생각하려 하지조차 않았다. 그러다가 君子가 학문을 극진하게 좋아하기에 이르면, 눈은 오색 보다 학문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요, 귀는 오성 보다 학문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요, 입은 오미 보다 학문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요, 마음은 학문을 천하를 다 가지는 일 보다 더 이롭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배우고자 하는 君子의 뜻은 권세와 이익을 가지고도 무너뜨릴 수는 없고, 뭇사람들이 함께 입을 모아도 변질시킬 수는 없으며, 천하가 모두 달려 든다고 해도 흔들어 놓을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으니, 본문과 합치된다. ◈◈ 蜀虎又案 : 皇侃과 劉寶楠은 顏回의 일화를 근거로 해서 이 장의 주요 소재가 가난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래에서 《荀子》 「勸學」을 인용하며 설명하였듯, 無求飽와 無求安은 학문에 열중해서 먹는 일과 거처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지, 가난해서 그럴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본문으로]
  3. 敏於事而愼於言/就有道而正焉, ◈ 敏은 용언으로, 아마 ‘노력하다’, ‘힘쓰다’는 말일 것이다. 敏은 ‘명민하다’, ‘똑똑하다’는 말이므로, 이 글에서는 ‘명민하도록 하다’처럼 해석할 수 있겠지만, 孔子가 經文에서 好學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력하다’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禮記》 「中庸」에 人道敏政/地道敏樹, ‘사람의 도리는 정치를 敏하는 일이고, 땅의 도리는 나무를 심는 일을 敏하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敏/猶勉也, ‘敏은 힘쓰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敏/勉也//言爲人君當勉力行政, ‘敏은 힘쓰다는 말이다. 군주를 위해서 마땅히 정사를 행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孔安國, 皇侃, 邢昺, 劉寶楠은 모두 敏을 ‘빠르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주석을 보면 모두 ‘노력해야 한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아마 겉으로는 ‘명민하다’처럼 해석하고, 속으로는 ‘명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본 듯하다. ▼ 孔安國은 敏/疾也, ‘敏은 빠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皇侃은 敏/疾也, ‘敏은 빠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敏/疾也, ‘敏은 빠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說文/敏/疾也, ‘《說文》에 “敏은 疾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敏은 「攴部」에 있다. ◈ 敏於事의 於는 ‘~에’, ‘~에 대해’다. 事를 받는다. 愼於言의 於도 그렇다. 言을 받는다. ◈ 事는 체언으로, ‘일’, ‘직무’, ‘사안’을 이를 것이다. 나는 ‘매사’라고 의역하였다. 皇侃은 이 事와 뒤의 言을 모두 ‘배운 바’로 해석하였는데, 이 역시 좋다고 생각한다. ▼ 皇侃은 事/所學之行也, ‘事는 배워서 행하는 바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李翶는 凡人事政事皆謂之事, ‘사람에 대한 모든 일, 정치에 관한 모든 일을 전부 事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敏於事而愼於言의 而는 순접으로, ‘그리고’처럼 해석된다. 敏於事와 愼於言은 대등하게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愼은 용언으로, ‘삼가다’, ‘조심하다’는 말이다. ◈ 言은 체언으로, ‘말’, ‘표현’, ‘언사’다. ▼ 皇侃은 言/所學之言也, ‘言은 배운 바를 말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就는 용언으로, ‘나아가다’, ‘좇다’, ‘따르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有道를 받는다. 劉寶楠은 《禮記》 「學記」를 근거로, 就가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就는 스승을 ‘모시다’처럼 번역할 수도 있겠다. ▼ 劉寶楠은 就와 就有道에 대해, 學記/就賢體遠///注/就/謂躬下之///荀子/性惡篇/夫人雖有性質美而心辯知/必將求賢師而事之/擇良友而友之//得賢師而事之/則所聞者/堯舜禹湯之道也//得良友而友之/則所見者/忠信敬讓之行也//身日進於仁義/而不自知也者/靡使然也, ‘「學記」에 “賢을 就하고, 遠을 體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주석에서는 “就는 자신을 낮추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荀子》 「性惡」에는 “대저, 비록 사람들의 性質이 훌륭하고, 식견이 총명하더라도, 반드시 현명한 스승을 찾아 모셔야 하고, 좋은 친구를 골라 사귀어야 한다. 현명한 스승을 만나 섬긴다면, 堯, 舜, 禹, 湯의 道에 대해 듣게 될 것이요, 좋은 친구를 만나 사귄다면, 忠信하고 敬讓한 몸가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날마다 仁義의 경지로 진보하면서도, 그러한 줄도 모르게 될 것이니, 靡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學記」는 《禮記》의 편이다. 「學記」의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 有道는 명사구로, ‘道를 품은 사람’, ‘德行을 갖춘 사람’을 이른다. 아마 모범으로 삼을 만한 스승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禮記》 「禮器」에 尊有道/任有能, ‘有道를 尊하고, 有能에 任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穎達은 有道를 有道之士, ‘道를 품은 선비’라고 설명하였다. 아마 이런 부류의 말일 것이다. 有는 용언으로,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는 말이다. 道를 받는다. 道는 체언으로, ‘道’, ‘德行’이다. ▼ 孔安國은 有道/有道德者, ‘有道는 道德을 품고 있는 사람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皇侃은 有道/有道德者也, ‘有道는 道德을 품고 있는 사람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李翶는 迹若道則聖賢德行非記誦文辭之學而已, ‘살펴 보건대, 道는 聖賢의 德行으로써, 기록되지 않은 文辭에 대한 학문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有道/謂有道德者, ‘有道는 道德을 품은 사람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凡言道者/皆謂事物當然之理/人之所共由者也, ‘대체로, 道라는 표현은 모두 만사의 당연한 이치요, 사람들이 함께 따르는 바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就有道而正焉의 而는 아마 ‘~함으로써’라는 말일 것이다. 以와 같다. 就有道而正焉은 ‘就有道함으로써 正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墨子》 「尙賢 下」에 使天下之爲善者可而勸也/爲暴者可而沮也, ‘온세상의 善한 사람들을 더욱 권면할 수 있고, 暴한 사람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같은 편에 上可而利天/中可而利鬼/下可而利人, ‘위로는 하늘을 이롭게 할 수 있고, 중간으로는 鬼를 이롭게 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呂氏春秋》 「孟春紀 去私」에는 南陽無令/其誰可而爲之, ‘南陽에 令이 없는데, 누가 맡을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可而는 모두 可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而가 以와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용된 것이다. 또, 《荀子》 「成相」에는 進諫不聽/剄而獨鹿/棄之江, ‘간언을 올려도 듣지 않으니, 獨鹿을 가지고 목을 베어 강에 버렸다’라는 말이 있는데, 剄而獨鹿의 而는 以, 즉 ‘獨鹿을 가지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수록되어 있고, 또 《荀子》 「成相」의 剄而獨鹿에 대한 王念孫의 주석에도 들어 있다. ◈ 正은 용언으로, ‘바로잡다’, ‘다스리다’는 말이다. 아마 자신을 ‘바로잡다’는 말일 것이다. 孔安國은 사안의 是非를 따진다고 풀이했고, 韓愈, 李翶는 正이 사안 보다 포괄적인 관념에 대한 표현이라고 하였다. 邢昺과 朱熹는 아마 자신을 바로잡는다고 한 듯하다. 劉寶楠도 邢昺, 朱熹와 같은 듯하다. 好學의 의미를 고려할 때, 자신을 ‘바로잡는다’라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 孔安國은 正/謂問事是非, ‘正은 사안에 대한 是非를 묻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韓愈는 正謂問道/非問事也//上句言事/下句言道//孔不分釋之/則事與道混而無別矣, ‘正은 道에 대해 묻는다는 말이지, 세상일에 대해 묻는 말은 아니다. 孔子는 앞의 句에서 세상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뒤의 句에서는 道에 대해 말하고 있다. 孔安國은 이를 나누지 않고 풀이하고 있으니, 그래서 세상일과 道에 대한 이야기가 섞여서 그 풀이 속에서 구분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李翶는 孔子曰/有顏囘者//好學/不遷怒/不貳過///此稱爲好學//孔云/問事是非///蓋得其近者小者/失其大端, ‘孔子는 “顏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고, 자기 화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렇듯 학문을 좋아하는 일을 칭찬하였던 것이다. 孔安國은 “사안에 대한 是非를 묻는다”라고 하였는데, 대체로 작은 부분은 본의에 가까우나, 중요한 부분은 놓쳤다 하겠다’라고 하였다. 有顏囘者//好學/不遷怒/不貳過는 《論語》 「雍也」에 나오는 말이다. 囘는 回의 옛 글자다. ▼ 邢昺은 正/謂問其是非, ‘正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묻는 일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朱熹는 正을 正其是非, ‘자신의 是非를 바로잡는다’라고 풀이하였다. ▼ 劉寶楠은 說文/正/是也///周官/家司馬/各使其臣以正於公司馬///注/正/猶聽也///邢疏/言學業有所未覺/當就有道德之人/正定其是之與非//易/文言曰/問以辨之也, ‘《說文》에 “正은 옳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周官》에는 “家司馬는 卿과 大夫들이 각자 자기 가신을 보내고, 이로써 公司馬에게 正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주석에서는 “正은 聽과 같다”라고 하였다. 邢昺은 주석에서 “공부에 진전이 없다면, 마땅히 道德을 품은 사람에게 나아가, 자신에게서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괜찮지 않은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易》 「文言」에 ‘물어서 가려 낸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周官》은 《周禮》다. 인용문은 「夏官司馬」에 나온다. 《周官》에 대한 주석은 鄭玄의 주석을 이른다. ◈ 焉은 句를 나누는 조사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없다. 나는 焉을 則처럼 ‘~한다면’, ‘그렇다면’이라고 해석하고, 뒤의 可謂好學也已에 붙여 읽으려고 해 보았으나,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어려울 것 같다. 正에 붙여 읽는 편이 낫다. ▼ 劉寶楠은 焉/也已/助語之辭, ‘就有道而正焉의 焉과 可謂好學也已의 也已는 어조사다’라고 하였다. ◈◈ 皇侃은 此以下三句是不飽不安所爲之事也, ‘이 글에서부터 아래의 세 句는 배부르지 않고, 편안하지 않으면서 행해야 할 일들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此以下三句란, 敏於事, 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을 이를 것이다. 그리고, 敏於事에 대해 疾於所學之行也, ‘배워서 행하기를 빨리 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而愼於言에 대해, 所學之言/當愼傳說之也, ‘배운 바를 말할 때에는, 마땅히 삼가고 집중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就有道而正焉에 대해, 若前學之言行/心有疑昧/則往就有道德之人決正之也, ‘만약 앞서 배운 바를 말하고 실천하였는데, 분명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점이 있다면, 道德을 품은 사람에게 나아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敏於事而愼於言에 대해, 言當敏疾於所學事業/則有成功//說命曰/敬遜志務時敏/厥修乃來///是也//學有所得/又當愼言說之, ‘사람이 배우는 일에 재빠르다면, 마땅히 공적을 세울 것이라는 뜻이다. 「說命」에 “자세가 敬遜하고, 때를 맞추고, 敏하기로 노력한다면, 厥이 닦여서 자신에게 올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러한 뜻이다. 愼於言은 배우다가 깨닫는 바가 있어도, 또 말을 마땅히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說命」은 《書》 「商書 說命 下」를 이른다. 厥은 아마 德을 가리키는 말 같다. 또, 就有道而正焉에 대해, 言學業有所未曉/當就有道德之人/正定其是之與非//易/文言曰/問以辨之///是也, ‘공부에 진전이 없다면, 마땅히 道德을 품은 사람에게 나아가, 자신에게서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괜찮지 않은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易》 「文言」에 “물어서 가려 낸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뜻이다’라고 하였다. 《易》 「文言」은 「乾」에 대한 「文言」을 이른다. 지금은 問以辯之이라고 되어 있는데, 辯은 고대에 辨과 통용되었다. ◈◈ 尹焞은 君子之學/能是四者/可謂篤志力行者矣//然不取正於有道/未免有差/如楊墨學仁義而差者也/其流至於無父無君/謂之好學可乎, ‘君子의 공부는 이 네 가지를 할 수 있는 바이니, 의지를 돈독하게 먹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감히 道를 품은 자에 근거하여 바로잡지 않는다면, 올바른 길과는 이질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 이질감이란, 楊朱나 墨翟의 학문과, 仁義의 차이와 같다. 그리하여, 장차 방탕한 수준이 애비도 못 알아 보고, 군주도 모시지 않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이런 작태를 학문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朱熹는 敏於事者/勉其所不足//愼於言者/不敢盡其所有餘也//然猶不敢自是/而必就有道之人/以正其是非/則可謂好學矣, ‘敏於事라는 말은 모자란 부분에 대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愼於言이라는 말은, 여유가 있는 바에 대해 감히 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만, 감히 자신을 옳다고 하지 않고, 꼭 道를 품은 자에게 나아가서, 자신의 是非를 바로잡는다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敏於事에 대해 敏於事謂疾勤於事/不懈倦也//下篇/訥於言而敏於行///訓同//焦氏循/論語補疏/敏/審也//謂審當於事也//聖人敎人/固不專以疾速爲重///案/焦說與孔注義相輔//聞斯行之/夫子以敎冉有/是亦貴疾速可知//說文/正/是也///周官/家司馬各使其臣/以正於公司馬///注/正/猶聽也///邢疏/言學業有所未覺/當就有道德之人/正定其是之與非//易/文言曰/問以辨之也, ‘敏於事라는 말은 사안에 대해 疾勤하다는 뜻으로, 해이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뒷편에 “말에는 어눌하지만, 행동에는 敏하다”라는 말이 있으니, 의미가 같다. 焦循은 《論語補疏》에서 “敏은 審이라는 뜻이다. 일에 유의한다는 뜻이다. 聖人이 사람을 가르칠 때는, 원래 빠르게 하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焦循의 글과, 孔安國의 주석은 서로 보완적이다. “듣고 바로 실천해야 한다”라는 말로 夫子가 冉有를 가르쳤던 점을 생각하면, 이처럼 빠르게 이행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訥於言而敏於行은 《論語》 「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焦循은 淸나라 嘉慶帝 때의 학자다. 阮元에게서 배웠다. 聞斯行之는 《論語》 「先進」에 나오는 말이다. 孔子는, 子路와 冉有가 각각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하냐고 묻자, 子路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하고, 冉有에게는 그래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너무 급하면 늦춰 주고, 너무 느리면 다독여 주어서, 적당한 상태로 다잡아 주어야 한다.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敏을 孔安國은 ‘빠르다’는 의미로 풀이하였고, 焦循은 ‘유의하다’, 즉 ‘느리다’라고 풀이하였는데, 이 풀이는 상반되지만, 劉寶楠은 「先進」의 일화를 들면서 두 해석 모두에 일리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孔安國의 주석 중 有道/有道德者에 대해, 皇本作/有道者謂有道德者也//案/太平御覽四百三引亦有謂字, ‘有道/有道德者가 《皇侃本》에는 有道者/謂有道德者也라고 되어 있다. 살펴 보니, 《太平御覽》 403권에도 이 말이 인용되어 있는데, 謂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 孔安國의 주석 중 正/謂問事是非에 대해, 閩本北監本毛本/事作其//案/皇本筆解俱作事字/太平御覽四百三亦引作事/則作其者非, ‘《閩本》, 《北監本》, 《毛本》에는 事가 其로 되어 있다. 살펴 보면, 《皇侃本》과 《筆解》에는 모두 事라고 되어 있고, 《太平御覽》 403권에도 이 말을 인용해 두었는데, 事로 되어 있다. 그러한 즉, 其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틀렸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筆解》는 韓愈의 《論語筆解》다. ▼ 邢昺의 주석 중 遜志務時敏에 대해, 十行本閩本/遜志作敬遜//案/後述而篇志於道章䟽/十行本閩本北監本亦作敬遜/唯毛本作孫志, ‘《十行本》과 《閩本》에는 遜志가 敬遜이라고 되어 있다. 살펴 보건대, 뒷편인 「述而」의 志於道 章에 대한 䟽에서도, 《十行本》, 《閩本》, 《北監本》에는 敬遜으로 되어 있고, 《毛本》만 孫志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이 句에서는 처리해야 할 일, 자기 언사에 대해 君子가 취하는 태도를 설명하였고, 또 君子가 자신의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본받을 만한 사람에게 비추어 자신을 항상 바로잡는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본문으로]
  4. 可謂好學也已, ◈ 可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謂를 받는다. ◈ 謂는 용언으로, ‘~라고 하다’, ‘이르다’, ‘표현하다’는 말이다. 好學을 받는다. ◈ 好는 용언으로, ‘좋아하다’는 말이다. 學을 받는다. ▼ 朱熹는 好/去聲, ‘好는 去聲으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學은 체언으로, ‘학문’, ‘공부’, ‘배우기’다. ◈ 也已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다. 《論語》 안에 몇 차례 등장한다. 「爲政」에 攻乎異端/斯害也已, ‘異端을 攻하는 짓, 이는 해롭다’라는 말이 있고, 「雍也」에 可謂仁之方也已, ‘仁之方이라고 할 수 있겠다’라는 말이 있으며, 「子罕」에 雖欲從之/末由也已, ‘따르고자 하지만, 由하지 못하겠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 문장 말미를 강조하려고 사용한 표현 같다. ▼ 焉에 대한 주석을 참고하면, 劉寶楠은 也已를 어조사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또, 漢石經/也已作已矣//皇本作/也已矣, ‘《漢石經》에는 也已가 已矣로 되어 있고, 《皇侃本》에는 也已矣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也已에 대해, 漢石經作/可謂好學已矣//皇本作/可謂好學也矣已//筆解作/可謂好學也矣, ‘可謂好學也已가 《漢石經》에는 可謂好學已矣로, 《皇侃本》에는 可謂好學也矣已로, 《筆解》에는 可謂好學也矣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筆解》는 韓愈의 《論語筆解》다. ◈◈ 皇侃은 合結食無求飽以下之事/竝是可謂好學者也, ‘食無求飽 이하의 말들을 종합하고 있다. 이 모든 자세들에 대해 모두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만하다는 의미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揔結之也//言能行在上諸事/則可謂之爲好學也, ‘이 節 전체를 총괄하는 말이다. 앞에 기술된 일들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이 공부를 좋아한다고 할 만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이 장의 내용을 포괄하는 말이다. 君子의 모습과 태도를 살펴 볼 때, 君子가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만하겠다는 말이다. 곧, 공부할 때는 모름지기 君子와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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