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논어 - 1 - 학이 - 16 - 불환인지불기지(끝)

2024. 4. 23. 11:02논어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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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논어》 번역에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정태현(鄭泰鉉)의 2013년 번역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皇侃의 《論語集解義疏》, 陸德明의 《經典釋文》, 韓愈의 《論語筆解》, 邢昺의 《論語註疏》, 朱熹의 《論語集註》,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劉寶楠의 《論語正義》,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주석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何晏의 《論語集解》를 참고하였습니다. 본래 《논어》의 주석으로는 朱熹의 《集註》가 유명하지만, 皇侃의 《義疏》에는 南北朝 시대 학자들의 견해가 수록되어 있고, 邢昺의 《註疏》에는 唐代까지의 정통 官學적 관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經典釋文》과 《校勘記》에는 판본에 따라 글자가 어떻게 다른 사례들이 있는지가 소개되어 있고, 劉寶楠의 《正義》에는 이전까지의 연구 성과들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고, 또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俞樾의 《群經平議》에는 여러 가지 이설들이 논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모두 참고하여, 이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설을 택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劉寶楠의 설을 소개하고, 또 俞樾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논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 박정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4년 4월 23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주석을 같이 보고 싶은 분들은 다음 글을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32

 

논어 - 1 - 학이 - 16 - 불환인지불기지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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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

 

 

 

공자가 말했다.[각주:1]

 

“남이 자신을 대우해 주지 않을 일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남에게] 대우 받지 못할 사람일지를 걱정해야 한다.”[각주:2]

 

 

 

  1. 子曰, ◈ 子는 孔子를 이른다. ◈ 曰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말을 인용할 때 사용한다. 지금의 따옴표처럼 사용된다. ◈◈ 邢昺은 此章言人當責己而不責人, ‘이 장에서는 사람이 마땅히 자신을 책려해야지, 남의 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學而」 첫 장에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남들이 내 기량을 몰라 주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君子답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이 장 내용과 통한다. [본문으로]
  2. 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 ◈ 이 글은 판본에 따라 글자가 조금 다르다. 《皇侃本》에는 不患人之不己知也/患己不知人也로 되어 있다. 앞구인 不患人之不己知 다음에 也가 더 있고, 또 뒷구인 患不知人也가 患己不知人也로, 즉 己가 추가되어 있다. 《高麗本》과 《足利本》은 뒷구만 患己不知人也로 되어 있다. 이 점은 阮元과 劉寶楠이 모두 언급해 두었다. 앞의 句는 문제가 없다. 也가 더 있든 말든,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뒤의 句에는 문제가 있다. 나는 이 부분에 인용해 둔 陸德明의 설과 陸德明의 설에 대한 阮元의 설, 그리고 이 句 자체에 대한 阮元과 劉寶楠의 설을 고려해 볼 때, 뒤의 句를 患不知人也 그대로 보지 말고, 患不知也라고 하든, 아니면 患己不知也처럼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患不知也와 患己不知也의 知는 피동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러면 患不知也는 ‘알려지지 못할 것을 걱정하라’는 말이 되고, 患己不知也는 ‘자신이 알려지지 못할 것을 걱정하라’라는 말이 된다. 患不知人也라고 하면 자신이 남을 알아 줄 식견을 갖추지 못할 일을 걱정하라는 말이지만, 患不知也, 患己不知也라고 하면 자신이 남이 알아 줄 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할까 걱정하라는 말이 된다. 이처럼 의미가 다르다. 皇侃의 시대에 이미 患不知也에 己와 人이 추가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句에 대한 판본 문제는 아주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아마 隋唐 시기에도 이러한 판본들이 뒤섞여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陸德明은 患不知也를 正本으로 하고, 患不知人也처럼 人이 더 들어가 있는 판본을 아예 잘못되었다고 규정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면 陸德明의 말만 보고 患不知也가 맞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증거도 있다. 臧琳은 「里仁」에, 阮元은 「里仁」과 「先進」에 患不知也로 해석하였을 때와 의미가 동일한 句가 존재한다는 점을 들었다. 「里仁」에 不患莫己知/求爲可知也, ‘자신을 알아 주는 이가 없을 일을 걱정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알아 줄 만하게 되기를 바래라’라는 말이 있고, 「先進」에는 居則曰不吾知也/如或知爾則何以哉, ‘居하면서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만약 누가 너희를 알아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이 두 구절은 모두 ‘남이 알아 줄 만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뜻이니, 患不知也, 患己不知也와 같다. 이처럼, 患不知也로 해석해야, 《論語》의 다른 글들과 정합된다. 따라서 나는 患不知也, 患己不知也를 따르고, 본문 역시 그에 맞추어 해설하고 번역하였다. ▼ 陸德明은 患不知也/本或作患己不知人也/俗本妄加字/今本患不知人也, ‘患不知也는 판본에 따라 患己不知人也로 되어 있기도 하다. 속본에서 함부로 글자를 더 집어 넣은 것이다. 지금 판본에는 患不知人也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人이 함부로 추가된 글자라고 하였는데, ‘원문’인 患不知也의 知를 ‘알려지다’, ‘대우 받다’처럼 피동이 아니라, ‘대우하다’, ‘알아 주다’처럼 능동으로 해석할 경우, ‘다른 사람을’이라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처럼 오해하게 되기 때문에, 이 ‘생략된’ 목적어를 추가한답시고 人을 함부로 더 넣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阮元은 陸德明의 말 중 今本患不知人也에 대해, 段玉裁云/七字恐非元郞語/乃後人所增耳, ‘段玉裁는 “이 일곱 글자는 元郞의 말이 아마 아닐 것이다. 나중 사람들이 덧붙인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元郞은 陸德明이다. 元郞이 이름이고, 德明이 字다. 또, 阮元은 이 설에 대해 阮元은 釋文出患不知也云/本或作患己不知人也/俗本妄加字///案/經義雜記云/據釋文/知古本作患不知也//蓋與里仁不患莫己知求爲可知也//先進居則曰不吾知也如或知爾則何以哉//語意同//今邢䟽及集註本皆作患不知人也/人字亦淺人所加, ‘《釋文》에는 患不知也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이에 대해 “患不知也는 판본에 따라 患己不知人也로 되어 있기도 하다. 속본에 함부로 글자를 더 집어 넣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살펴 보면, 《經義雜記》에는 이 점을 “《釋文》에 근거해 보면, 옛 판본에는 이 句가 患不知也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마도 「里仁」의 ‘자신을 알아 주는 이가 없을 일을 걱정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알아 줄 만하게 되기를 바래라’라는 말이나, 「先進」의 ‘居하면서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만약 누가 너희를 알아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말이 있으니, 말의 의미가 동일하다. 지금 邢昺의 주석과, 《集註本》에 모두 患不知人也라고 되어 있는데, 이 중 人 역시 멍청한 놈이 집어 넣은 글자일 것이다”라고 설명해 놓았다’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經義雜記》는 臧琳이 저술한 책이다. 《經義雜記》에는 今邢䟽及集註의 註가 注로 되어 있다. 나머지 말은 같다. 「里仁」과 「先進」은 모두 《論語》의 편이다. 《集註本》은 아마 朱熹의 《論語集註》를 의미할 것이다. ▼ 阮元은 皇本作/不患人之不己知也/患己不知人也, ‘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는 《皇侃本》에 不患人之不己知也/患己不知人也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皇本作/不患人之不己知也/患己不知人也///高麗/足利本亦作/患己不知人也///釋文云/患不知也/本或作患己不知人也//俗本妄加字/今本/患不知人也///臧氏琳/經義雜記/古本作/患不知也/與里仁/不患莫己知/求爲可知也///語意同//人字/淺人所加///案/皇本有王注云/但患己之無能知也///己無能知/即未有知之義/則皇本人字爲俗妄加無疑, ‘본문은 《皇侃本》에 不患人之不己知也/患己不知人也라고 되어 있다. 《高麗本》, 《足利本》에도 患己不知人也라고 되어 있다. 《釋文》에서는 “患不知也는 판본에 따라 患己不知人也로 되어 있기도 하다. 속본에서 함부로 글자를 더 집어 넣은 것이다. 지금 판본에는 患不知人也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臧琳의 《經義雜記》에는 “옛 판본에는 患不知也라고 되어 있었다. 이 말은 「里仁」의 ‘자신을 알아 주는 이가 없을 일을 걱정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알아 줄 만하게 되기를 바래라’라는 말과 의미가 같다. 人은 잘 모르는 놈이 더 집어 넣은 말이다”라고 되어 있다. 내 생각은 이렇다. 《皇侃本》에는 王肅이 “但患己之無能知也”라고 한 주석이 기재되어 있는데, 여기서 “己無能知”라는 말은 곧 未有知라는 뜻이니, 《皇侃本》의 人이, 속인이 멋대로 집어 넣은 글자라는 점에 의심할 바가 없겠다’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臧琳은 淸나라 江蘇 사람이다. 《經義雜記》를 저술했다. 「里仁」은 《論語》의 편이다. ◈ 不患의 不은 부정어다. 不患의 患을 한정한다. ◈ 不患人之不己知의 患은 용언으로, ‘걱정하다’, ‘근심하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人之不己知를 받는다. ▼ 劉寶楠은 說文/患/憂也, ‘《說文》에는 “患은 걱정하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인용문은 「心部」에 나온다. ◈ 人은 체언으로, ‘다른 사람’, ‘남’을 이른다. 여기서는 ‘상대’라고 의역하였다. ◈ 人之不己知의 之는 주격 조사로 볼 수도 있고, 관형격 조사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 주격 조사로 보았다. 주어는 人이다. ◈ 不己知의 不은 부정어다. 不己知의 知를 한정한다. ◈ 不己知의 己는 체언으로, ‘자기’, ‘자신’이다. 知의 목적어다. 본래 어순 대로라면 不知己가 되어야 하겠으나, 己가 1인칭 대명사이기 때문에 도치된 듯 보인다. ◈ 不己知의 知는 용언으로, ‘알아 주다’, ‘대우하다’는 말이다. 상기하였듯, 「學而」 첫 장에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남들이 내 기량을 知해 주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君子답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이 知와 같다. ◈ 患不知人의 患은 용언으로, ‘걱정하다’, ‘근심하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不知, 혹은 不知人을 받는다. 이 患의 주어는 아마 ‘자기 자신’일 것이다. ◈ 상기하였듯, 판본에 따라 患不知가 患己不知로 되어 있기는 경우도 있다. 己는 체언으로, ‘자신’을 이른다. ◈ 不知人의 不은 부정어다. 不知人의 知를 한정한다. ◈ 不知人의 知는 용언으로, ‘알려지다’, ‘알아지다’, ‘대우를 받다’는 말이다. 따라서 不知는 용언으로, ‘대우 받지 못할 사람’이 된다. 患不知人也 그대로 해석하려면 ‘알아 주다’, ‘대우하다’라고 보아야 한다. 이 경우엔 不知人의 人을 받는다. 주석을 보면, 皇侃, 邢昺, 尹焞, 劉寶楠 모두 知 다음에 목적어인 人을 밝혀서, 知를 ‘알아 주다’, ‘대우하다’로, 즉 본문의 患不知人也 그대로 해석하였다. 다만 王肅의 경우, 知를 능동으로 해석할지, 피동으로 해석할지에 따라 설의 방향이 바뀌어 버린다. ◈ 不知人의 人은 상기하였듯, 잘못 들어간 글자다. 《皇侃本》 등에는 모두 들어 있지만, 陸德明의 《經典釋文》에는 빠져 있고, 阮元 역시 이 점을 지적해 두었다. 나는 이를 빼고 번역하였다. 이 人에 대해서는 이 句 첫 부분에 자세히 설명해 두었다. 陸德明과 阮元의 설 역시 句 첫 부분에 함께 인용해 두었다. 본문 그대로 번역할 경우, 人은 체언으로, ‘남’, ‘다른 사람’, ‘상대’를 이른다. ◈ 也는 말을 끝내는 조사다. ◈◈ 王肅은 但患己之無能知也, ‘다만, 자신이 대우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하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은 皇侃의 《論語集解義疏》에만 있고, 《論語註疏》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阮元은 此注唯皇本有之/各本竝脫, ‘이 주석은 《皇侃本》에만 있다. 각 판본들에 모두 빠져 있다’라고 하였다. 王肅의 주석 중 無能知의 知를, 상기하였듯 능동으로 해석할지, 피동으로 해석할지에 따라 주석의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 나는 患不知也를 정본으로 보았으므로, 이에 따라 知를 피동으로 번역하였다. ◈◈ 皇侃은 世人多言己有才而不爲人所知/故孔子解抑之也//言不患人不知己/但患己不知人耳//故李充云/凡人之情多輕易於知人/而怨人不知己/故抑引之敎興乎此矣,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이에 孔子가 이런 사람들을 깨우쳐 주고, 경계한 것이다. 남이 자신을 알아 주지 못할 일을 걱정하지 말고, 다만 자신이 다른 사람을 알아 주지 못할 일을 걱정하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李充은 “세상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가볍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알아 주지 못한다고 남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경계하고, 이 말을 가지고 깨우쳐 주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邢昺은 凡人之情/多輕易於知人/而患人不知己/故孔子抑之云/我則不耳//不患人之不己知/但患己不能知人也, ‘사람의 정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알아 주는 일은 가볍게 생각하고, 남이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근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孔子가 이런 정신머리를 바로잡기 위해, “나는 그렇지 않다. 남이 자신을 알아 주지 못한다고 걱정하지 말고, 다만 자신이 남을 알아 주지 못할까 걱정해라”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尹焞은 君子求在我者/故不患人之不己知//不知人/則是非邪正或不能辨/故以爲患也, ‘君子는 자신을 신경 쓰는 사람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 주지 않을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是非, 邪正을 변별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길 것이므로, 그래서 걱정거리로 생각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人不己知/己無所失/無可患也//己不知人/則於人之賢者不能親之用之/人之不賢者不能遠之退之/所失甚巨/故當患//呂氏春秋/論人篇/人同類而智殊/賢不肖異/皆巧言辯辭/以自防御/此不肖主之所以亂也///是言不知人之當患也,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 주지 않더라도, 자신이 잃는 바는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남을 알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현명한 식견을 가까이 할 수도 없고, 사용할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의 불초한 수준을 멀리 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 경우에는 잃는 바가 아주 크고, 이에 마땅히 걱정해야 한다. 《呂氏春秋》 「論人」에, “사람이 종족가 같더라도 식견은 다르고, 현명한지, 불초한지도 다르다. 그러나 모두 교묘하게 말하며, 자신을 방어하니, 이 점이 불초한 군주가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마땅히 걱정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呂氏春秋》 「論人」은 「季春紀」에 속해 있다. ◈◈ 蜀虎案 : 남이 대우해 주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고, 남에게 대우 받을 만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이다. 곧, 남에게 대우 받기 위해 공부하지 말고, 자신을 수양하고, 스스로 정진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論語》 「憲問」에 古之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 ‘옛날 공부하던 사람들은 자신을 위했고,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을 위한다’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위한다는 말은, 곧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뜻이다. 또, 《荀子》 「勸學」에 君子之學也以/美其身//小人之學也以/爲禽犢, ‘君子는 공부해서 자신을 바로잡지만, 小人은 공부함으로써 날짐승이나 송아지를 보답으로 바라기나 한다’라는 말이 있다. 모두 이 장의 내용과 정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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