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논어 - 1 - 학이 - 4 - 오일삼성오신

2024. 3. 31. 10:28논어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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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논어》 번역에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정태현(鄭泰鉉)의 2013년 번역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皇侃의 《論語集解義疏》, 陸德明의 《經典釋文》, 韓愈의 《論語筆解》, 邢昺의 《論語註疏》, 朱熹의 《論語集註》,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劉寶楠의 《論語正義》,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주석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何晏의 《論語集解》를 참고하였습니다. 본래 《논어》의 주석으로는 朱熹의 《集註》가 유명하지만, 皇侃의 《義疏》에는 南北朝 시대 학자들의 견해가 수록되어 있고, 邢昺의 《註疏》에는 唐代까지의 정통 官學적 관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經典釋文》과 《校勘記》에는 판본에 따라 글자가 어떻게 다른 사례들이 있는지가 소개되어 있고, 劉寶楠의 《正義》에는 이전까지의 연구 성과들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고, 또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俞樾의 《群經平議》에는 여러 가지 이설들이 논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모두 참고하여, 이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설을 택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劉寶楠의 설을 소개하고, 또 俞樾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논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 박정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4년 3월 31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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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1 - 학이 - 4 - 오일삼성오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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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為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했다.[각주:1]

 

“나는 매일 나 자신을 세 번 되돌아 본다.”[각주:2]

 

<증자의 말 이어짐>

 

“남을 위해 논의하면서 충실하지 않았는가.”[각주:3]

 

<증자의 말 이어짐>

 

친구와 함께 이야기하며 신실하지 않았는가.”[각주:4]

 

<증자의 말 이어짐>

 

“[아는 것을] 전수해 주면서 [혹시 충분하게] 숙달되지 않았는가.”[각주:5]

 

 

 

  1. 曾子曰, ◈ 曾子는 孔子의 제자인 曾參이다. 孝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孔子가 죽은 뒤, 학파의 주도권이 有若을 거쳐 曾參에게 돌아간 것으로 추측된다. 宋儒들은 道의 적통이 孔子, 曾子, 子思, 孟子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曾子의 행적은 《論語》, 《禮記》, 《大戴禮記》, 《孝經》, 《荀子》, 《孟子》, 《孔子家語》 등에 기재되어 있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서는 曾參/南武城人/字子輿//少孔子四十六歲//孔子以爲能通孝道/故授之業//作孝經//死於魯, ‘曾參은 南武城 사람이다. 字는 子輿다. 孔子 보다 46살 어렸다. 孔子는 曾參이 孝의 도리에 통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학업을 전수했다. 《孝經》을 지었다. 魯나라에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는 曾參/南武城人/字子與//少孔子四十六歲//志存孝道/故孔子因之以作孝經, ‘曾參은 南武城 사람으로, 字는 子與다. 孔子 보다 46살 어렸다. 曾參의 관심사는 孝道에 있었다. 그래서 孔子가 《孝經》을 짓게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史記》의 南武城에 대해 司馬貞은 按/武城屬魯//當時魯更有北武城/故言南也, ‘찾아 보니, 武城은 魯나라에 속해 있다. 당시 魯나라에는 北武城이 또 있었기 때문에, 南이라는 말을 붙여서 南武城이라고 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張守節은 括地志云/南武城在兗州/子游爲宰者//地理志云/定襄有武城/淸河有武城//故此云南武城也, ‘《括地志》에는 이런 말이 있다. “南武城은 兗州에 있다. 子游가 宰를 지냈다. 「地理志」에 定襄에 武城이 있고, 淸河에 武城이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南武城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括地志》는 唐初에 濮王泰 등이 편찬한 지리서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인용되어 있는 「地理志」는 어떤 글인지 분명하지 않다. 또, 《史記》의 孔子以爲能通孝道에 대해 張守節은 韓詩外傳云/曾子曰/吾嘗仕爲吏/祿不過鍾釜/尙猶欣欣而喜者/非以爲多也/樂道養親也//親沒之後/吾嘗南游於越/得尊官/堂高九仞/榱提三尺/黛卑儷耍然猶北向而泣者/非爲賤也/悲不見吾親也, ‘《韓詩外傳》에 이런 말이 있다. “曾子가 말했다, ‘나는 출사해서 吏가 된 적이 있었는데, 녹봉은 鍾釜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기뻤다. 그 까닭은 녹봉이 많아서가 아니라, 부모를 모실 수 있다는 점이 즐거워서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나는 남쪽의 越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높은 관직을 얻었었다. 堂은 높이가 아홉 길이나 되었고, 榱提는 세 자나 되었었지만, 눈썹을 낮추고 꼴사납게 북쪽을 보며 눈물을 흘렸으니, 이는 내 자리가 비천해서가 아니라, 나의 부모를 뵙지 못하는 점을 슬퍼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馬融은 弟子曾參, ‘弟子인 曾參이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馬融의 주석에 있는 參에 대해, 陸德明은 參/所金反/又七南反, ‘參은 所와 金의 반절로 읽는다. 七과 南의 반절로 읽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曾參은 ‘증삼’이라고 읽지만, ‘증참’이라고 읽기도 하는 모양이다. ▼ 皇侃은 姓曾/名參/字子輿, ‘姓은 曾이고, 이름은 參이며, 字는 子輿다’라고 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邢昺은 曾子를 弟子曾參, ‘弟子인 曾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또, 邢昺은 史記/弟子傳云/曾參/南武城人/字子輿//少孔子四十六歲//孔子以爲能通孝道/故授之業/作孝經//死於魯, ‘주석의 馬曰/弟子曾參에 대한 해설이다. 《史記》 「弟子傳」에 “曾參은 南武城 사람이다. 字는 子輿다. 孔子 보다 46살 어리다. 孔子는 曾參이 孝道에 능통하다고 생각했기에, 曾參에게 학업을 전수하였다. 《孝經》을 지었고, 魯나라에서 죽었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弟子傳」은 「仲尼弟子列傳」이다. ▼ 朱熹는 曾子/孔子弟子/名參/字子輿, ‘曾子는 孔子의 弟子다. 이름은 參이고, 字는 子輿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元和姓纂/夏少康封少子曲烈于鄫/春秋時/爲莒所滅//鄫太子巫仕魯/去邑爲曾氏//見世本/巫生阜/阜生晳///晳即曾點/曾子父也//史記/弟子傳/曾子名參/字子與/南武城人//少孔子四十六歲, ‘《元和姓纂》에 “夏나라의 少康은 어린 아들인 曲烈을 鄫에 봉했다. 춘추시대 때 莒나라에게 망했다. 鄫나라의 太子 巫는 魯나라에 출사했는데, 옛날의 고향을 가지고 氏를 曾氏로 했다. 《世本》을 보면, 巫는 阜를 낳았고, 阜는 晳을 낳았다”라는 말이 있다. 晳은 곧 曾點으로, 曾子의 부친이다. 《史記》 「弟子傳」에는 “曾子의 이름은 參이고, 字는 子與다. 南武城 사람이다. 孔子 보다 46살 어렸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元和姓纂》은 唐나라 元和 연간에 林甫가 성씨에 대해 지은 책이다. 《元和姓纂》에는 夏少康封少子曲烈于鄫//春秋時/爲莒所滅//鄫太子巫仕魯/去邑爲曽氏//見世本/巫生阜/阜生參/字子輿/父子幷爲仲尼弟子, ‘夏나라의 少康은 어린 아들인 曲烈을 鄫에 봉했다. 춘추시대 때 莒나라에게 망했다. 鄫나라의 太子 巫는 魯나라에 출사했는데, 옛날의 고향을 가지고 氏를 曾氏로 했다. 《世本》을 보면, 巫는 阜를 낳았고, 阜는 參을 낳았다. 參은 字가 子輿다. 父子가 모두 仲尼의 제자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史記》 「弟子傳」은 《史記》 「仲尼弟子列傳」을 이른다. 「仲尼弟子列傳」에는 曾參/南武城人/字子輿//少孔子四十六歲, ‘曾參은 南武城 사람이다. 字는 子輿다. 孔子 보다 46살 어리다’라고 되어 있다. ◈ 曰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말을 인용할 때 사용한다. 따옴표처럼 사용된다. ◈◈ 邢昺은 此章論曾子省身愼行之事, ‘이 장에서는 曾子가 자신을 반성하고, 행동거지를 삼갔던 일에 대해 논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馬融의 弟子曾參에 대해, 皇本/參下有也字, ‘《皇侃本》에는 參 다음에 也가 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弟子曾參에 대해, 閩本北監本毛本/弟子作曾子//案/以前其爲人也章䟽文例之/當作弟子//馬季長注亦作/弟子曾參, ‘弟子가 《閩本》, 《北監本》, 《毛本》에는 曾子로 되어 있다. 살펴 보면, 앞에 나왔던 其爲人也 부분의 章과 䟽를 가지고 생각해 볼 때, 마땅히 弟子가 되어야 한다. 馬季長의 주석에도 역시 弟子曾參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馬季長은 馬融을 이른다.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도, ‘孔子의 弟子인 曾參이다’가 되어야지, ‘曾子인 曾參이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蜀虎案 : 《論語》 「學而」의 첫 장은 공부에 대한 孔子의 말이고, 두 번째 장은 孝弟에 대한 有子의 말이며, 세 번째 장은 다시 巧言令色에 대한 孔子의 말이고, 네 번째 장은 曾子가 자신을 반성한 일에 대한 말이다. 뒤의 두 장은 다시 孔子의 말이고, 그 다음 장은 子夏의 말이며, 다음은 孔子, 다음은 曾子, 다음은 子禽과 子貢, 다음은 孔子, 다음은 有子, 또 有子, 다음은 孔子, 다음은 子貢, 그리고 마지막 장은 孔子의 말이다. 참고차 기재해 둔다. [본문으로]
  2. 吾日三省吾身, ◈ 吾는 1인칭 대명사로, ‘나’라는 말이다. 曾子 자신을 가리킨다. ▼ 劉寶楠은 爾雅/釋詁/吾/我也///說文/吾/我自稱也, ‘《爾雅》 「釋詁」에는 “吾는 나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說文》에서는 “吾는 자신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詁」에는 卬/吾/台/予/朕/身/甫/余/言/我也, ‘卬, 吾, 台, 予, 朕, 身, 甫, 余, 言은 나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吾는 「口部」에 기재되어 있다. ◈ 日은 부사어로, ‘날마다’ 혹은 ‘하루에’, ‘매일’이라는 뜻이다. ▼ 劉寶楠은 日行一周天爲一晝夜/故一晝夜即名日//周髀算經注/從旦至旦/爲一日也///是也, ‘태양이 하늘을 한 번 돌면 낮과 밤이 한 번 지나간다. 그러므로 밤낮 한 번을 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周髀算經》에 대한 주석에 “아침에서 시작해서 다시 아침에 이르는 기간을 1日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런 뜻이다’라고 하였다. 《周髀算經》은 東漢 말 즈음에 편찬된 수학, 천문학에 관한 책이다. 曹魏의 劉徽, 南北朝 때 范陽 사람인 祖𣈶, 唐代의 李淳風, 趙宋 및 元代의 楊輝 등이 주석을 달았는데, 劉寶楠이 가리키는 주석이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 三은 부사어로, ‘세 번’이다. ‘세 가지’로 볼 수도 있다. 曾子는 이 장에서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의 세 가지 사항을 통해서 자신을 반성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도 되고, ‘세 가지’도 된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본다면 ‘세 번’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세 가지’라면, ‘세 가지를 가지고’처럼 번역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三이 아니라 以三 혹은 三以가 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나는 ‘세 번’이라고 번역하였다. ▼ 陸德明은 三/息暫反/又如字, ‘三은 息과 暫의 반절로 읽는다. 글자 그대로 읽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說文/三/數名///阮氏元/數說/古人簡策繁重/以口耳相傳者多/以目相傳者少//且以數記言//使百官萬民易誦易記//洪範/周官/尤其最著者也//論語以數記文者/如一言/三省/三友/三樂/三戒/三畏/三愆/三疾/三變/四敎/絕四/四惡/五美/六言/六蔽/九思之類//則亦皆口授耳/受心記之古法也, ‘《說文》에서는 “三은 수의 명칭이다”라고 하였다. 阮元은 《數說》에서 “옛날에는 죽간을 번거롭게 엮었기 때문에, 입이나 귀를 통해 서로 전수해 준 경우가 많았고, 시각적인 경로로 서로 전수해 준 경우는 적었다. 또, 숫자를 가지고 말을 기록했는데, 百官, 萬民 《易》이 암송되고, 기록되었다. 「洪範」, 《周官》의 경우에는 그런 면이 한 층 더 드러나 있다. 《論語》에서도 숫자를 가지고 글을 기록하였는데, 一言, 三省, 三友, 三樂, 三戒, 三畏, 三愆, 三疾, 三變, 四敎, 絕四, 四惡, 五美, 六言, 六蔽, 九思 같은 부류의 말들이 그렇다. 그러한 즉,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입에서 귀로 전달하였을 것이니, 마음으로 받아서 기억하는 옛 방식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三은 《說文解字》 「三部」에 기재되어 있는데, 《說文解字》 본문에는 三/天地人之道也//从三/數, ‘三은 天地人의 道다. 三이 들어 있다. 數다’라고 되어 있다. 「洪範」은 《書》 「周書」에 속해 있다. 《周官》은 《周禮》다. ◈ 省은 용언으로, ‘살피다’, ‘반성하다’, ‘헤아리다’, ‘되돌아 보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吾身을 받는다. ▼ 皇侃은 省/視也, ‘省은 살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省/悉井反/視也//鄭云/思察己之所行也, ‘省은 悉과 井의 반절로 읽는다. 살피다는 뜻이다. 鄭玄은 “자신의 행위를 생각해 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省/悉井反, ‘省은 悉과 井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鄭注云/思察己之所行也///此以省訓察/本爾雅/釋詁//說文/省/視也///義亦近, ‘鄭玄은 주석에서 “자신의 행위를 생각해 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에서는 省을 察이라고 풀이하였는데, 《爾雅》 「釋詁」에 근거한 바이다. 《說文》에서는 “省은 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의미가 역시 가깝다’라고 하였다. 省에 대해 《爾雅》 「釋詁」에는 在/存/省/士/察也, ‘在, 存, 省, 士는 察이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省은 《說文解字》 「眉部」에 기재되어 있다. ◈ 吾身은 ‘나 자신’이다. 吾는 관형어로, ‘나의’, ‘나’다. 身을 한정한다. 身은 체언으로, ‘자신’이다. 曾子 자신을 이른다. ▼ 劉寶楠은 爾雅/釋詁/身/我也///說文/身/躳也/象人之身///釋名/釋身體云/身/伸也/可屈伸也, ‘《爾雅》 「釋詁」에 “身은 나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說文》에서는 “身은 몸이다. 사람의 몸을 본뜬 글자다”라고 하였다. 《釋名》 「釋身體」에서는 “身은 펴다는 뜻이다. 굽히고 펼 수 있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身에 대해 《爾雅》 「釋詁」에는 卬/吾/台/予/朕/身/甫/余/言/我也, ‘卬, 吾, 台, 予, 朕, 身, 甫, 余, 言은 나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身은 《說文解字》 「身部」에 기재되어 있다. ◈◈ 皇侃은 曾子言/我生平戒愼每一日之中三過/自視察我身有過失否也, ‘曾子는 자신이 살면서 평소에 하루마다 항상 세 가지 잘못을 조심하는데, 스스로 그 자신이 그 잘못을 저질렀는지의 여부를 살핀다고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또, 曾子言/我一日之中每三過自視/況復凡人可不爲此三事乎//言不可也//又一通云/曾子言/我一日之中三過內視我身有此三行否也, ‘曾子는 자신도 매일 세 가지 잘못에 대해 자신을 살피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 이 세 가지 일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고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또 이 말을 풀이하면서, “曾子는 자신이 하루에 세 가지 잘못을 가지고, 내적으로 자신이 이 세 가지를 저질렀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핀다고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邢昺은 曾子의 말을 吾每日三自省察己身, ‘나는 매일 세 번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라고 풀이하였다. ◈◈ 蜀虎案 : 이 장에는 曾子가 매일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되돌아 보았는지가 제시되어 있다. 왜 되돌아 볼까.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그대로 정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을 고치니 나아지고, 또 방법이 옳다면 그대로 정진하니 또 나아진다. 《荀子》 「勸學」에 故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智明而行無過矣, ‘나무는 먹줄을 대면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데, 君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자신을 헤아리니, 이에 나무가 곧아지고, 쇠가 날카로워지듯, 식견은 명쾌해지고, 행동에는 잘못이 없어지게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가 이 말과 같다. [본문으로]
  3. 爲人謀而不忠乎, ◈ 爲人의 爲는 부사어로, ‘~를 위하여’라는 말이다. 爲人의 人을 받는다. 즉, 爲人은 ‘人을 爲하여’라는 말이다. ▼ 陸德明은 爲/于僞反/又如字, ‘爲는 于와 僞의 반절로 읽는다. 글자 그대로 읽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爲/去聲, ‘爲는 去聲으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國策/魏策注/爲/助也, ‘《國策》 「魏策」에 대한 주석에 “爲는 돕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國策》은 《戰國策》을 이른다. 이 주석은 高誘의 주석이며, 臣請問文之爲魏, ‘臣이 묻건대, 文이 魏나라를 爲하는 일이’라는 말에 붙어 있다. ◈ 人은 체언으로, ‘남’, ‘다른 사람’이다. ◈ 謀는 용언이다. 본래 ‘모의하다’, ‘일을 꾸미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아마 남을 돕기 위해 ‘논의하다’는 의미일 것 같다. 《說文解字》 「言部」에 謀/慮難曰謀, ‘謀는 이렇다. 어려운 일을 고찰하는 행위를 謀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또 같은 곳에 謨/議謀也, ‘謨는 議謀하다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謀가 議, 즉 ‘논의하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國語》 「魯語」에 咨事爲謀, ‘일에 대해서 묻는 행위를 謀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韋昭는 咨難爲謀, ‘어려운 일을 묻는 행위를 謀라고 한다’라고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대체적인 의미는 같다. 또, 《詩》 「小雅 鹿鳴之什」의 「皇皇者華」에 周爰咨謀, ‘두루두루 咨謀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咨事之難易爲謀, ‘일이 어려운지, 쉬운지를 묻는 행위를 謀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朱熹는 謀/猶諏也, ‘謀는 諏와 같다’라고 하였는데, 諏 역시 ‘묻다’는 말이다. 周爰咨謀의 謀는 ‘묻다’는 말이지만, 단순히 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일에 대해 세세하게 묻는다는 말이므로, 곧 ‘논의하다’는 말과 같다. 劉寶楠은 爲人謀의 爲를 ‘돕다’라고 풀이하였다. 참고할 만하다. ▼ 주석을 참고하면, 邢昺은 謀를 謀事, ‘일을 꾸민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 劉寶楠은 左/襄四年/傳/咨難爲謀///魯語/咨事爲謀///毛詩/皇皇者華傳/諮事之難易爲謀///用內外傳義也, ‘《左》 「襄」 4년에 대한 傳에 “어려움을 묻는 행위를 謀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魯語」에는 “事를 묻는 행위를 謀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毛詩》의 「皇皇者華」에 대한 傳에서는 “일의 어렵거나 쉬운 정도를 묻는 일을 謀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內外傳의 풀이를 차용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左》 「襄」은 《春秋左氏傳》 「襄公」이다. 「魯語」는 《國語》의 편이다. 「魯語 下」를 이른다. 이에 대해 韋昭는 事/當爲難//傳曰/咨難爲謀, ‘事는 마땅히 難이 되어야 한다. 《傳》에는 咨難爲謀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傳》은 《春秋左氏傳》을 이른다. 즉, 《國語》의 咨事爲謀와 《春秋左氏傳》의 咨難爲謀는 동일한 사건을 표현하는 말이므로, 韋昭는 《春秋左氏傳》에 근거하여서 《國語》를 고쳤다. 「皇皇者華」는 《詩》 「小雅 鹿鳴之什」에 속해 있다. 傳은 毛亨의 주석이다. 內外傳이란, 아마 《春秋左氏傳》과 《國語》를 이를 것이다. 《國語》를 《春秋外傳》이라고 하기도 한다. ◈ 爲人謀而不忠乎의 而는 순접으로, ‘~하면서’처럼 해석된다. ◈ 不忠의 不은 부정어다. 忠을 한정한다. ◈ 忠은 용언으로, ‘충실하다’, ‘신실하다’, ‘정성스럽다’, ‘공경스럽다’는 말이다. 지금은 忠이 국가나 군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고대에는 꼭 그렇지 않았다. 忠은 中과 心이 합쳐져 있는데, ‘마음의 중간’이니, 가장 ‘진심어린 부분’을 이른다. 《說文解字》 「心部」에 忠/敬也, ‘忠은 공경스럽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荀子》 「禮論」에 其忠至矣, ‘그 忠은 지극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楊倞은 忠/誠也, ‘忠은 정성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皇侃은 忠/中心也, ‘忠은 진심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盡己之謂忠, ‘자신을 다하는 태도를 忠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周語/忠者/文之實也///楊倞/荀子/禮論注/忠/誠也///誠實義同//誠心以爲人謀謂之忠//故臣之於君/有誠心事之/亦謂之忠, ‘「周語」에 “忠은 文의 신실함이다”라는 말이 있다. 楊倞은 《荀子》 「禮論」에 대한 주석에서 “忠은 신실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誠과 實은 의미가 같다. 신실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謀하는 일, 이를 忠이라고 한다. 신하는 군주에 대해, 신실한 마음을 품고 섬기니, 따라서 이 역시 忠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周語」는 「周語 下」를 이른다. 《國語》의 편이다. 《國語》 본문에는 忠者의 者가 없다. 楊倞의 저 주석은 其忠至矣, ‘그 忠은 지극하다’라는 말에 달려 있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 皇侃은 言爲他人圖謀事/當盡我中心也//豈可心而不盡忠乎//所以三省視察/恐失也,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도모할 때, 마땅히 자기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찌 마음을 쓰면서 진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 가지를 살피는 까닭은 실수할까 걱정해서이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曾子의 말을 爲人謀事而得無不盡忠心乎, ‘남을 위해 일을 꾸밀 때, 진심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도록 할 수 있었는지’라고 풀이하였다. 邢昺은 또 以謀貴盡忠, ‘일을 꾸밀 때에는 진심을 다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邢昺의 주석 중 以謀貴盡忠에 대해, 十行本謀誤講, ‘《十行本》에는 謀가 講으로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이 句에서는 동료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논의할 때는 대충대충 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句의 초점은 忠에 있다. 忠은 ‘진심을 다하다’, ‘충실하다’는 뜻이니, 곧 ‘최선을 다하다’는 말과 같다. 최선을 다하다는 말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의미하는 표현 같지만, 무리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할 수 있을 만큼 다 해 주었다는 뜻이다. 사실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도 대충 이행하였다는 점을 뜻하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4. 與朋友交而不信乎, ◈ 與朋友의 與는 ‘~와’라는 말이다. 朋友를 받는다. 즉, 與朋友는 ‘朋友와’가 된다. ▼ 劉寶楠은 禮檀弓注/與/及也///此常訓, ‘《禮》 「檀弓」에 대한 주석에 “與는 及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인 뜻이다’라고 하였다. 《禮》 「檀弓」은 《禮記》 「檀弓 上」을 이른다.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聖人之葬人/與人之葬聖人也/子何觀焉, ‘聖人이 보통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 與 보통 사람이 聖人을 장사지내는 일 중, 子는 무엇을 觀하려 하는가’에 붙어 있다. 與, 及은 여기서 ‘그리고’, ‘~와’라는 말이다. 그런데 及은 ‘A와 B’이라는 의미이고, 이 부분의 與는 ‘~와 함께’, ‘~와 같이’라는 의미이므로, 같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 朋友는 체언으로, ‘친구’다. 《周禮》 「地官司徒」에는 五曰聯朋友, ‘다섯 번째는 朋友를 聯하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同師曰朋/同志曰友, ‘스승이 같으면 朋이라고 하고,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但朋疏而多/友親而少/故云同師曰朋/同志曰友, ‘다만 朋은 멀지만 많고, 友는 가깝지만 적으니, 그래서 스승이 같으면 朋이라고 하고,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고 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朋은 같은 문하에서 배운 사람을, 友는 뜻하는 바가 같은 사람을 이른다. 朋友에 대해서는 「學而」 첫 장의 有朋自遠方來 부분에 아주 상세하게 풀이해 두었다. ▼ 劉寶楠은 鄭注云/同門曰朋/同志曰友///同門義見前疏//同志者/謂兩人不同學而所志同也//鄭箋詩關雎/注禮坊記/並有此訓//說文/友/同志爲友/從二又//相交友也///義與鄭同, ‘본문에 대해 鄭玄은 “같은 문하에서 배운 사람을 朋이라 하고, 뜻이 같은 사람을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同門이 무슨 뜻인지는 앞의 疏에서 풀이하였었다. 同志는 두 사람이 함께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뜻한 바는 같다는 뜻이다. 《詩》 「關雎」에 대한 鄭玄의 箋이나, 《禮》 「坊記」에 대한 주석에도 모두 이런 풀이가 기재되어 있다. 《說文》에서는 “友는 이렇다.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 又가 두 개 들어 있다. 서로 사귀는 友다”라고 하였다. 뜻이 鄭玄과 같다’라고 하였다. 同門을 이미 풀이했다는 말은, 「學而」 첫 장의 주석 중, 包含이 同門曰朋이라고 한 말이 있는데, 劉寶楠이 이 주석에 대해 同門의 의미를 이미 풀이했다고 하는 뜻일 것이다. 「關雎」는 《詩》 「國風 周南」에 속해 있다. 《禮》 「坊記」는 《禮記》 「坊記」를 이른다. 「關雎」의 窈窕淑女/琴瑟友之, ‘요조하고 정숙한 여자와 琴瑟처럼 벗하였다’에 대해 鄭玄은 同志爲友//言賢女之助後妃共荇菜/其情意乃與琴瑟之志同/共荇菜之時/樂必作,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 현명한 여자가 후비를 도와서 함께 荇菜를 캤으니, 그 情意가 琴瑟이 뜻과 같았다는 뜻이다. 함께 荇菜를 캘 때, 분명 노래를 만들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坊記」에 寡婦之子/不有見焉/則弗友也, ‘과부의 자식은 見하지 않는다면 友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同志爲友,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友는 《說文解字》 「又部」에 기재되어 있다. 는 아마 交言으로, ‘함께 이야기하다’, ‘함께 대화를 나누다라는 말일 것이다. 論語註疏를 비롯한 소위 正本들에는 라고 되어 있으나, 皇侃論語集解義疏, 高麗本에는 交言으로 되어 있다. 만약 라고만 본다면, ‘교분을 나누다’, ‘사귀다는 말이 된다. 邢昺, 劉寶楠은 모두 로만 해설하였지, 交言이라고 보지 않았다. 交言이라고 본다면, 다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교류하며 이야기를 나누다처럼 해석할 수 있다. 이 경우 은 모두 용언으로 풀이된다. , 交言서로 이야기를 나누다혹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때, 는 부사어로, ‘함께’, ‘서로라고 해석되고, 은 용언으로, ‘이야기를 나누다라고 해석된다. 그러면 세 설 중 어느 것이 타당할까. 내 생각에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라고 보는 편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 두 가지 정황적 증거가 존재한다. 첫 번째로. 學而7, 賢賢易色 장에는 與朋友交言而有信이라는 말이 있다. 본문의 與朋友交而不信乎와 비교해 보자. 본문은 반어형으로 기술되었고, 7장의 는 평서문으로 작성되었다. 이 차이만 있을 뿐, 둘의 내용은 같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7장의 交言에 따라 交言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 두 번째 증거는, 바로 끝에 나오는 이 말에 대한 표현, 말이 신실하다는 의미로 學而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6장에는 謹而信이라는 말이 오는데, 朱熹劉寶楠은 모두 을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표현으로, 을 말을 신실하게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해석하였다. 물론 7장에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이를 가지고 추측해 보면, 본문의 不信乎 역시 말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마침 交言으로 되어 있는 판본이 존재하므로, 정황적으로 합치된다. 나는 이에 근거하여, 交言으로 바꾸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처럼 번역하였다. 그러면 를 어떻게 서로’, ‘함께같은 부사어로 해석할 수 있을까. 春秋左氏傳》 「隱公3년에 故周鄭交質, ‘이에 나라와 나라가 인질을 잡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서로라고 해석된다. , 春秋左氏傳》 「襄公11년에 武濟自輔氏/與鮑交伐晉師, ‘輔氏에서 강을 건너서 交 晉나라 군대를 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함께라고 해석된다. 孟子》 「梁惠王 上에는 上下交征利而國危矣,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잇속을 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함께라고 해석된다. 이 사례들은 모두 金元中한문 해석 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주석을 참고하면, 邢昺結交, ‘교분을 맺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阮元皇本高麗本/交下有言字, ‘皇侃本高麗本에는 다음에 이 있다라고 하였다. 劉寶楠說文//交脛也//從大/象交形///朋友與己兩人想會合/亦得稱交/引申之義也, ‘說文에는 는 정강이가 교차되었다는 뜻이다. 가 들어 있다. 교차된 모습을 본딴 글자다라고 되어 있다. 과 자신 또는 와 자신, 두 사람은 뜻으로 회합하니, 마찬가지로 그 모습을 라고 할 수 있겠다. 본래 의 의미를 확장해 사용한 글자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說文解字》 「交部에 기재되어 있다. 劉寶楠皇本/交下有言字, ‘皇侃本에는 다음에 이 있다라고 하였다. ◈ 與朋友交而不信乎의 而는 순접으로, ‘~하면서’라고 해석된다. ◈ 不信의 不은 부정어다. 信을 한정한다. ◈ 信은 용언으로, ‘미쁘다’, ‘믿음직하다’, ‘신실하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邢昺은 信을 誠信, ‘신실하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 朱熹는 以實之謂信, ‘진정으로 이행하는 태도를 信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說文/信/誠也//從人從言//會意///釋名/釋言語/信/申也//言以相申束/使不相違也, ‘《說文》에는 “信은 신실하다는 뜻이다. 人과 言이 들어 있다. 會意字다”라고 되어 있다. 《釋名》 「釋言語」에는 “信은 묶다는 뜻이다. 말을 가지고 서로 묶고, 서로 어기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信은 《說文解字》 「言部」에 기재되어 있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 皇侃은 朋友交會/本主在於信/豈可與人交而不爲信乎, ‘朋友와 사귈 때에는 본래 信을 전제해야 한다. 어찌 사람과 사귀는데 미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였다. ◈◈ 邢昺은 曾子의 말을 與朋友結交而得無不誠信乎, ‘朋友와 교분을 맺을 때 신실한 태도로 임하지 않은 경우가 없도록 할 수 있었는지’라고 풀이하였다. 邢昺은 또, 朋友主信, ‘朋友에 대해서는 신실함에 초점을 맞춘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五倫之義/朋友主信/故曾子以不信自省也, ‘五倫에서, 朋友는 信에 주안점이 있으니, 그래서 曾子가 信하지 않았는가로 자신을 돌아 보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五倫은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다. 《孟子》 「滕文公 上」에 나온다. ◈◈ 蜀虎案 : 이 句에서는 친구의 입장에서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친구와 교분을 나눌 때에는, 언제나 믿음직하고 신실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친구는 서로 믿고 의지할 만해야 하는데, 신실하지 않으면 어떻게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이 句의 초점은 信에 있다. 그러나, 신실하다는 말은 곧 ‘최선을 다하다’는 뜻이니, 이 信 역시 앞의 忠과 뜻하는 바는 같다. [본문으로]
  5. 傳不習乎, ◈ 傳은 용언으로, ‘傳授해 주다’는 말일 것이다. 아마 학문적인 지식을 ‘전수해 주다’는 의미 같다. 傳은 본래 ‘전해 주다’, ‘전하다’는 말이다. 陸德明은 鄭玄이 《魯論》에 傳이 専으로 되어 있지만, 결국엔 《古論》을 따라 傳이 타당하다고 보았다고 한 설을 소개해 두었다. 傳과 專에 대해서는 劉寶楠이 상세히 설명해 두었다. ▼ 주석을 참고하면, 皇侃은 傳을 傳述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傳述은 ‘기술해서 전수하다’는 말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邢昺은 傳을 傳授, ‘전수해 주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 陸德明은 傳/直専反/注同//鄭注云/魯讀傳爲専//今從古///案/鄭校周之本以齊古讀正凡五十事//鄭本或無此注者/然皇覽引魯讀六事/則無者非也//後皆放此, ‘傳은 直과 専의 반절로 읽는다. 주석에서도 그렇게 읽는다. 鄭玄은 주석에서 “《魯》에서는 傳을 専이라고 보았다. 여기서는 《古》를 따랐다”라고 하였다. 살펴 보면, 鄭玄은 周氏의 판본을 校注하면서, 《齊》와 《古》가 모두 50개의 사항들에 대해 올바르게 읽었다고 보았다. 鄭玄의 판본에는 이 주석이 없는 경우도 있는데, 《皇覽》에는 《魯》에 따라 읽은 경우가 여섯 번 있다고 인용되어 있으니, 주석이 없는 경우가 틀렸을 것이다. 이후로도 모두 그렇다’라고 하였다. 《魯》는 《魯論》이다. 《古》는 《古論》이다. 《齊》는 《齊論》이다. 《皇覽》은 曹魏의 文帝가 정리한 책을 이르는 듯한데, 분명하지 않다. 사실 陸德明의 이 주석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劉寶楠은 陸德明이 인용한 鄭玄의 주석에 대해, 鄭注云/魯讀傳爲專//今從古///臧氏庸/輯鄭注釋云/此傳字/從專得聲//魯論故省用作專//鄭以古論作傳/於義益明/故從之///如臧此言/是傳與專同謂師之所傳//而字作專者/是謂叚借爲之也//宋氏翔鳳/論語發微/孔子爲曾子傳孝道而有孝經//孝經說曰/春秋屬商/孝經屬參//則曾子以孝經專門名其家//故魯論讀傳爲專//所業既專/而習之又久/師資之法無絕/先王之道不湮//曾氏之言/即孔子傳習之旨也///包氏愼言/論語溫故錄/專爲所專之業也//呂氏春秋曰/古之學者/說義必稱師//說義不稱師/命之曰叛//所專之業不習/則墮棄師說/與叛同科//故曾子以此自省//後漢書/儒林傳/其耆名高義開門受徒者/編牒不下萬人//皆專相傳祖/莫或訛雜//楊雄所謂/譊譊之學/各習其師//此即魯論義也///案/宋包二君義同//廣雅/釋詁/專/業也///亦謂所專之業//此魯論文既不著/義亦難曉//故既取臧說/兼資宋包//非敢定於一是也, ‘鄭玄은 주석에서 “《魯》에서는 傳을 專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古》를 따른다”라고 하였다. 臧庸은 《輯鄭注釋》에서 “이 傳에는 專이 들어 있고, 得이라고 발음한다. 《魯論》에서는 글자를 생략했기 때문에 專이라고 쓴 것이다. 鄭玄은 《古論》의 傳이 의미상 더 분명하기 때문에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臧庸의 말이 맞다면, 이 傳은 專과 같고, 이 글자들의 의미는 스승이 전수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魯論》에 專이라고 되어 있는 까닭은, 가차하여 그렇게 사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宋翔鳳은 《論語發微》에서 “孔子는 曾子가 孝道를 傳하였다고 爲하였으니, 《孝經》이 있다. 《孝經》에 대해 ‘《孝經》는 商에게 전담하게 하고, 《孝經》은 參에게 전담하게 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曾子가 《孝經》을 전문적으로 다루어서, 그 家를 유명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魯論》에서 傳을 專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룬 학업을 이미 專하였으니, 익힌 지도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師資한 방법도 끊이지 않았고, 先王의 道도 매몰되지 않았던 것이다. 曾氏의 말은 곧 孔子가 傳習하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包愼言은 《論語溫故錄》에서 “專은 학업을 專했다는 뜻이다. 《呂氏春秋》에 ‘옛날의 학자들은 논의할 때 반드시 스승을 稱했다. 논의하면서 스승을 稱하지 않는 짓을 叛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專한 학업을 익히지 않으면, 스승의 설을 내팽개치는 꼴이 되므로, 叛과 같은 짓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曾子는 이 점을 가지고 자신을 반성하였던 것이다. 《後漢書》 「儒林傳」에 ‘명성과 德이 높은 자들이 문을 열고 제자를 받아 들였으니, 문하에 들어간 사람들이 만 명 보다도 더 많았다. 모두 오로지 서로 祖를 傳하였는데, 간혹이라도 잘못된 경우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楊倞은 ‘떠들썩한 학문이여, 각자 스승의 말을 익히고 있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魯論》에 담겨 있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은 이렇다. 宋翔鳳과 包愼言의 의견은 같다. 《廣雅》 「釋詁」에 “專은 業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역시 학업을 專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魯論》은 이미 사라졌기에, 의미를 분명히 알기 어렵다. 따라서, 臧庸의 설을 취하고, 宋翔鳳과 包愼言의 설을 보존하되, 어느 하나가 옳다고 감히 확정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魯》는 《魯論》을 이른다. 《古》은 《古論》을 이른다. 臧庸은 江蘇 사람으로, 淸나라 때의 학자다. 盧文弨에게 배웠다. 宋翔鳳은 江蘇의 長州 사람으로, 淸나라 嘉慶帝 때의 학자다. 孝經說曰이라고 인용되어 있는 말은 《孝經注疏》에 나온다. 商은 子夏를, 參은 曾子를 이른다. 《呂氏春秋》 인용문은 「孟夏紀 尊師」에 나온다. 《後漢書》 「儒林傳」은 《後漢書》 「儒林列傳 下」를 이른다. 인용된 揚雄의 말은 《揚子法言》 「寡見」에 나온다. ▼ 朱熹는 傳/平聲, ‘傳은 平聲으로 읽는다’라고 하였고, 또 傳/謂受之於師, ‘傳은 스승에게서 전수받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釋文出傳不云/鄭註云/魯讀傳爲専//今從古, ‘《釋文》에는 傳不에 대해, “鄭玄은 주석에서 ‘《魯》에서는 傳을 専으로 보았다. 나는 《古》를 따른다’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앞에 인용하였으나, 그래도 阮元 역시 명기해 두었으므로, 다시 한 번 기재해 둔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魯》와 《古》는 각각 《魯論》과 《古論》을 이른다. ▼ 劉寶楠은 傳謂師有所傳於己也, ‘傳은 스승이 자신에게 전수해 줄 것이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傳不習乎는 傳而不習乎가 되어야 하지 않나 의뭉스럽다. 앞에서는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라고 하여, 爲人謀와 不忠乎, 與朋友交와 不信乎 사이에 而가 들어 있다. 그런데 왜 이 句에만 而가 없을까. 판본의 문제는 아니다. 陸德明과 阮元을 비롯해, 누구도 傳而不習乎라고 되어 있는 판본이 있다고 하지는 않았다. 다른 句는 그렇지 않지만, 傳不習乎는 네 글자로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而를 넣지 않았을까. ◈ 不習의 不은 부정어다. 習을 한정한다. ◈ 習은 용언으로, 아마 ‘숙달하다’, ‘충분히 익숙해지다’, ‘숙련되다’는 말인 것 같다. 즉, 傳不習乎는 남에게 지식을 傳授해 주는데, 傳授해 주는 曾子 자신이 남을 가르칠 만큼 그 분야에 ‘숙달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는 말일 것이다. 《戰國策》 「秦策」에 嘗無師傅所敎學/不習於誦,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운 적이 없어서, 誦하는 데 習하지 않다’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習/曉, ‘習은 曉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曉는 ‘밝다’는 말로, 여기서는 ‘밝게 알다’, 즉 ‘잘하다’, ‘숙달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주석을 참고하면, 邢昺은 習을 穿鑿, ‘파고 들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충분히 ‘숙달되다’는 뜻이다. ▼ 朱熹는 習/謂熟之於己, ‘習은 자신에게 익숙하게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숙달되다’는 말이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 何晏은 言凡所傳之事/得無素不講習而傳之, ‘전수해 준 모든 일들에 대해, 평소에 제대로 익히지 않고서 전수해 준 경우가 없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이 주석에 대해, 得無/猶無得也//素/猶本也//言所傳之事/無得本不經講習而傳之也, ‘得無는 無得과 같다. 素는 本과 같다. 전수해 주는 일은 본래 그 내용에 통달하거나, 그 일을 연습하지 않고 전수해 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이 주석에 대해, 得無者/疑辭//郭氏翼雪/履齋筆記/曾子三省/皆指施於人者言//傳亦我傳乎人//傳而不習/則是以未嘗躬試之事而誤後學/其害尤甚於不忠不信也///焦氏循/論語補疏/己所素習/用以傳人/方不妄傳/致誤學者//所謂溫故知新可以爲師也///二說皆從集解/亦通, ‘得無는 의심하는 말이다. 郭翼雪은 《履齋筆記》에서 “曾子는 세 번 반성하였는데, 모두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일에 대한 사안들이었다. 傳 역시 자신이 남에게 傳하는 일이었다. 傳하고 習하지 않으면, 직접 검증한 적이 없게 되고, 따라서 후학들을 그르치게 되니, 그 폐단이 忠信하지 않은 경우 보다 더욱 심하다”라고 하였다. 焦循은 《論語補疏》에서 “평소에 자신이 익힌 바를 가지고 남에게 傳하는데, 다만 겨우 망령되게 傳하지 않을 정도로만 한다면, 학문을 그르치기에 이를 것이다. 소위 ‘옛 것을 溫하고, 새 것을 知하면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두 설은 모두 《集解》를 따르고 있고, 의미 역시 통한다’라고 하였다. 焦循은 淸나라 嘉慶帝 때의 학자다. 阮元에게서 배웠다. 溫故知新 인용문은 《論語》 「爲政」에 나온다. 「爲政」에는 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라고 되어 있다. 《集解》은 何晏의 《論語集解》를 이른다. ◈◈ 皇侃은 凡有所傳述/皆必先習後乃可傳//豈可不經先習而妄傳之乎, ‘대저, 어떤 분야를 전수하든, 반드시 먼저 그 내용에 대해 제대로 익힌 뒤에 전수할 수 있는 법이다. 어찌 내용에 통달하지도 못하였고, 앞서 익히지도 않았으면서 망령되게도 남에게 전수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故袁氏云/常恐傳先師之言/不能習也//以古人言/必稱師也, ‘이에 대해 袁氏는 “스승의 말을 남에게 전할 때에는 제대로 알지 못할 수도 있으니 언제나 걱정해야 한다. 옛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반드시 스승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曾子의 말을 凡所傳授之事/得無素不講習而妄傳乎, ‘남을 가르쳐 주는 일들에 대해, 평소에 익히지 않고서 망령되게 가르치지는 경우가 없도록 할 수 있었는지’라고 풀이하였다. 여기서 素는 ‘평소’라는 말이다. 邢昺은 또, 傳惡穿鑿/故曾子省愼之, ‘가르쳐 줄 때는 제대로 천착하였었는지를 살핀다. 이렇듯 曾子는 자신을 삼갔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 尹焞은 曾子守約/故動必求諸身, ‘曾子는 간략한 바를 지켰다. 그래서 행동할 때 원칙을 꼭 그 자신에게서 취하였다’라고 하였다. ◈◈ 謝良佐는 諸子之學/皆出於聖人/其後愈遠而愈失其眞//獨曾子之學/專用心於內/故傳之無弊/觀於子思孟子可見矣//惜乎/其嘉言善行/不盡傳於世也//其幸存而未泯者/學者其可不盡心乎, ‘諸子들의 학문은 모두 聖人에게서 나왔지만, 나중에 본의에서 더 멀어지고, 진의를 더욱 잃고 말았다. 다만 曾子의 학문의 경우, 오로지 내면에서 마음을 用하였을 뿐이었기에, 이에 그러한 폐단을 전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子思와 孟子를 살펴 보면 알 수 있다. 애석하도다. 그 아름다운 말들과 훌륭한 행위들이 세상에 모두 전해지지는 못했도다. 그러나 曾子의 학문이 다행스럽게도 보존되고, 산일되지 않았으니, 공부하는 자들이 曾子의 학문을 배우는 데에 어찌 성의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宋儒들이 曾子, 子思, 孟子를 존숭한 모습이 이러하였다. ◈◈ 朱熹는 曾子以此三者日省其身/有則改之/無則加勉/其自治誠切如此/可謂得爲學之本矣//而三者之序/則又以忠信爲傳習之本也, ‘曾子는 이 세 가지 방식으로 그 자신을 반성하였다. 이런 점이 있으면 고쳤고, 없으면 더욱 노력하였다. 曾子가 자신을 열심히 다스린 태도가 이와 같았으니, 공부에 대한 근본적인 이치를 깨달았다 할 만하다. 그리고 또, 세 가지의 순서는 忠信을 가지고 전습하는 일의 근본이로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夫子言/十室之邑/必有忠信/而不如丘之好學也///可見好學最難//其於及門中/唯稱顔子好學/今曾子三省/既以忠信自勗/又以師之所傳/恐有不習/則其好學可知//曾子立事篇/日旦就業/夕而自省思/以沒其身/亦可謂守業矣///又云/君子既學之/患其不博也/既博之/患其不習也/既習之/患其不知也/既知之/患其不行也///此正曾子以傳不習自省之證//習兼知行/故論語只言習也, ‘夫子는 “열 室의 邑에는 분명 忠信한 사람이 있겠으나, 丘가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통해 배우기를 좋아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겠다. 제자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오직 顏子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글에서 曾子는 세 번 반성하고 있는데, 앞에서는 忠信하기로 스스로 노력하였는지를 반성하였었고, 이 번에는 스승이 전수해 준 바를 혹시나 익히지 않았는지를 반성하고 있으니, 曾子도 배우기를 좋아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겠다. 「曾子立事」에 “날마다 아침에는 학업을 닦고, 저녁이 되면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자신을 마치면, 역시 학업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라는 말이 있고, 또 “君子는 이미 배웠다면, 배운 바를 폭넓게 깨우치지 못했을까 걱정하고, 이미 폭넓게 깨우쳤다면, 익히지 못했을까 걱정한다. 이미 익혔다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을까 걱정하고, 이미 제대로 알고 있다면, 이를 실천하지 못할까 걱정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들이 바로 曾子가 傳不習이라는 부문에 대해 자신을 반성하였다는 증거다. 익히면, 또 제대로 알고, 이행해야 하겠지만, 《論語》 본문에서는 단지 익히는 일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라고 하였다. 十室之邑 인용문은 《論語》 「公冶長」에 나온다. 「公冶長」에는 十室之邑/必有忠信如丘者焉/不如丘之好學也라고 되어 있다. 「曾子立事」는 《大戴禮記》의 편이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何晏의 주석 중 得無素不講習而傳之에 대해, 皇本/之下有乎字, ‘《皇侃本》에는 之 다음에 乎가 있다’라고 하였다. 乎가 없어도 말이 되므로, 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아마 본문의 네 句 중 세 句에 모두 乎가 붙어 있어서 혼동된 모양이다. ▼ 傳에 대한 陸德明의 주석 중, 鄭本或無此注者에 대해, 段玉裁校或下增有字, ‘段玉裁는 “有가 더 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蜀虎案 : 이 句에서는 스승의 입장에서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남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 주려면, 먼저 자신이 그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수리물리학을 가르치는데, 판서는커녕, 책만 줄줄 읽으면서 강의한다면, 누가 수리물리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숙달하지 못하였다면 스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荀子》 「勸學」에 學莫便乎近其人, ‘공부에는 학문에 탁월한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 만큼 편한 방법이 없다’라는 말이 있고, 또 學之經莫速乎好其人/隆禮次之, ‘공부를 빠르게 성취하는 방법으로는, 학문에 탁월한 사람을 따르는 것 보다 신속한 방식이 없다. 예법을 갈고 닦는 일은 그 다음이다’라는 말이 있다. 왜 荀子는 其人, 즉 ‘탁월한 사람’을 따르라고 하는가. 其人이 학문에 숙달하였기 때문이다. 숙달하였기 때문에 큰 얼개에서부터, 세세하고 정밀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빠뜨리지 않고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스승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일 것이다. ◈◈ 蜀虎又案 : 아마 이 장에 나오는 말들은 曾子가 孔子 생전에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曾子가 제자들을 받을 정도의 위치에 올랐을 때,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한 말일 것이다. 그러면서, 스승인 자신도 이 사항들을 잘 지키는지 언제나 반성하므로, 제자들인 너희들도 이 사항들을 점검하면서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傳不習乎를 보면 曾子가 스승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앞서 劉寶楠이 인용하였듯, 《大戴禮記》 「曾子立事」에 日旦就業/夕而自省思/以沒其身/亦可謂守業矣, ‘날마다 아침에는 학업을 닦고, 저녁이 되면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자신을 마치면, 역시 학업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라는 말이 있고, 또 君子既學之/患其不博也/既博之/患其不習也/既習之/患其不知也/既知之/患其不行也, ‘君子는 이미 배웠다면, 배운 바를 폭넓게 깨우치지 못했을까 걱정하고, 이미 폭넓게 깨우쳤다면, 익히지 못했을까 걱정한다. 이미 익혔다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을까 걱정하고, 이미 제대로 알고 있다면, 이를 실천하지 못할까 걱정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曾子는 노둔하였을지언정, 매일 자신을 반성하고, 또 정진하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大戴禮記》의 이 말들이 어쩌면, 《論語》 본문 보다도 이 장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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