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논어 - 1 - 학이 - 3 - 교언영색

2024. 3. 29. 20:55논어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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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논어》 번역에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정태현(鄭泰鉉)의 2013년 번역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皇侃의 《論語集解義疏》, 陸德明의 《經典釋文》, 韓愈의 《論語筆解》, 邢昺의 《論語註疏》, 朱熹의 《論語集註》,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劉寶楠의 《論語正義》,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주석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何晏의 《論語集解》를 참고하였습니다. 본래 《논어》의 주석으로는 朱熹의 《集註》가 유명하지만, 皇侃의 《義疏》에는 南北朝 시대 학자들의 견해가 수록되어 있고, 邢昺의 《註疏》에는 唐代까지의 정통 官學적 관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經典釋文》과 《校勘記》에는 판본에 따라 글자가 어떻게 다른 사례들이 있는지가 소개되어 있고, 劉寶楠의 《正義》에는 이전까지의 연구 성과들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고, 또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俞樾의 《群經平議》에는 여러 가지 이설들이 논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모두 참고하여, 이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설을 택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劉寶楠의 설을 소개하고, 또 俞樾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논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4년 3월 29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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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巧言令色,鮮矣仁!」

 

 

공자가 말했다.[각주:1]

 

“교묘하게 말하고, 낯빛을 좋게 꾸며 대는 자들은 어진 경우가 적다.”[각주:2]

 

 

 

  1. 子曰, ◈ 子는 ‘孔子’를 이른다. ◈ 曰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말을 인용할 때 사용한다. 지금의 따옴표처럼 사용된다. [본문으로]
  2. 巧言令色/鮮矣仁, ◈ 巧言과 令色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풀이할 수 있다. 먼저 ‘巧하게 言하다’, ‘令하게 色하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巧와 令은 부사어고, 言과 色은 용언이다. 두 번째로, ‘巧한 言’, ‘令한 色’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巧와 令은 관형어고, 言과 色은 체언이다. 세 번째로, ‘言을 巧하다’, ‘色을 令하다’ 혹은 ‘言을 巧하게 하다’, ‘色을 令하게 하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巧와 令은 용언이고, 言과 色은 체언이자 巧와 令의 목적어다. 나는 첫 번째 방식으로 해설하고, 번역하였다. ◈ 또, 巧言令色은 문장의 의미를 고려할 때, 巧言令色者처럼, ‘巧言令色한 사람’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와 같이 번역하였다. ◈ 巧는 부사어로, ‘교묘하게’, ‘약삭빠르게’라는 말이다. 巧言의 言을 한정한다. 巧는 본래 ‘솜씨가 좋다’, ‘재치있다’, ‘잘하다’라는 뜻이다. 재주나 기술이 좋은 모습을 뜻한다. 《說文解字》 「工部」에 巧/技也, ‘巧는 技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手部」에는 技/巧也, ‘技는 巧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巧와 技가 모두 ‘솜씨가 좋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巧는 ‘거짓으로 화려하게 꾸미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禮記》 「月令」에 毋或作為淫巧以蕩上心, ‘간혹 淫巧하여서 上의 心을 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淫巧/謂偽飾不如法也, ‘淫巧는 거짓으로 꾸며서 법도와 같지 않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荀子》 「非十二子」에는 爲詐而巧, ‘거짓말을 하되 巧하다’라는 말이 있으니, 여기서도 巧는 솜씨가 좋되, 부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문의 巧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예가 더 있다. 《詩》 「小雅 小旻之什」의 「巧言」에 巧言如簧/顏之厚矣, ‘簧처럼 巧한 말, 낯짝은 두껍도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顏之厚者/出言虛偽而不知慚於人, ‘顏之厚는 거짓말을 해 대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簧은 아마 일종의 ‘피리’를 이를 것이다. 즉, 巧言如簧은 ‘피리 소리처럼 巧한 말’이 된다. 말이 악기 소리처럼 듣기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鄭玄이 풀이한 것처럼 거짓말이다. 이 巧言 역시 본문의 巧言과 의미가 같다. 皇侃은 공정하지 못하고, 치우치게 말하는 모습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타당하다. ▼ 包咸은 巧言/好其言語, ‘巧言이란, 표현을 좋게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이 주석에 대해, 巧好/音義相近//詩/雨無正箋/巧/猶善也///禮/表記注/巧/謂順而說也///皆謂好其言語/即詩云/好言自口也, ‘巧와 好는 발음도 비슷하고, 의미도 비슷하다. 《詩》 「雨無正」에 대한 箋에는 “巧는 善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禮》 「表記」에 대한 주석에는 “巧는 順하게 이야기한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두 사례에서 巧는 모두 말을 잘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곧 《詩》에서 “좋은 말은 입에서 나온다”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雨無正」은 「小雅 祈父之什」에 속해 있다. 箋은 鄭玄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巧言如流, ‘巧한 말은 흐르는 물 같다’에 붙어 있다. 《禮》 「表記」는 《禮記》 「表記」다.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情欲信/辭欲巧, ‘정신은 信하도록 해야 하고, 말은 巧하도록 해야 한다’에 붙어 있다. 好言自口는 《詩》 「小雅 祈父之什」의 「正月」에 나오는 말이다. ▼ 皇侃은 巧言者/便辟其言語也, ‘巧言은 표현을 편벽되게 하는 짓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공정하지 않고 치우친 표현이라는 뜻이다. ▼ 朱熹는 巧/好, ‘巧는 좋게 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言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 令도 巧와 같다. ‘잘하다’, ‘훌륭하다’, ‘착하다’, ‘좋다’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부사어로 기능한다. 令色은 아마 ‘착해 보이게 낯빛을 꾸미다’, ‘좋게 낯빛을 꾸미다’라는 따위의 말일 것이다. 앞의 巧言이 ‘말을 꾸며 댄다’라는 표현이었듯, 이 부분의 令色은 ‘낯빛을 꾸며 댄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爾雅》 「釋詁」에 儀/若/祥/淑/鮮/省/臧/嘉/令/類/綝/彀/攻/穀/介/徽/善也, ‘儀, 若, 祥, 淑, 鮮, 省, 臧, 嘉, 令, 類, 綝, 彀, 攻, 穀, 介, 徽는 善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곧, 令도 善이라는 말이 된다. 《孟子》 「告子 上」에 令聞廣譽施於身, ‘令한 聞과 廣한 譽가 자신에게 施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朱熹는 令/善也, ‘令은 善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呂氏春秋》 「孟冬紀 安死」에 君之不令民, ‘君의 令하지 않는 백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令/善, ‘令은 善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戰國策》 「秦策」에 是以弊邑之王不得事令, ‘이 때문에 弊邑의 王이 令하게 섬길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令/善也//不得善事於楚王也, ‘令은 善이라는 뜻이다. 楚王을 잘 섬길 수가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包咸은 令色/善其顏色, ‘令色이란, 그 안색을 좋게 만든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이 주석에 대해, 爾雅/釋詁/令/善也///書/皋陶謨/令色///史記/夏本紀作/善色///是令有善義//說文/色/顔气也///齊語/韋昭解/顔/眉目之閒///引申之/凡氣之達於面者/皆謂之顔//故注以顔色連文, ‘《爾雅》 「釋詁」에 “令은 善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書》 「皋陶謨」의 令色은 《史記》 「夏本紀」에는 善色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令에는 善이라는 의미가 있다. 《說文》에는 “色은 얼굴의 기색이다”라고 되어 있다. 「齊語」에 대해 韋昭는 “顔은 눈썹과 눈 사이의 간격이다”라고 하였는데, 본래 의미를 확장하여서, 얼굴에 드러나는 모든 기색을 전부 顔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석의 顔色은 같은 의미의 글자로 구성된 단어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詁」에는 儀/若/祥/淑/鮮/省/臧/嘉/令/類/綝/彀/攻/穀/介/徽/善也, ‘儀, 若, 祥, 淑, 鮮, 省, 臧, 嘉, 令, 類, 綝, 彀, 攻, 穀, 介, 徽는 善이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皋陶謨」는 「虞書」에 속해 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色은 「色部」에 기재되어 있다. 「齊語」는 《國語》의 편이다. 이 주석은 天威不違顏咫尺, ‘天子의 위엄이 顏에서 咫尺도 떨어져 있지 않다’에 붙어 있다. ▼ 皇侃은 令色者/柔善其顏色也, ‘令色은 안색을 부드럽게 맞추는 짓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令/力呈反, ‘令은 力과 呈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令/善也, ‘令은 좋게 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色은 본래 ‘낯빛’, ‘안색’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용언으로, ‘낯빛을 꾸미다’는 말로 사용되었다. ◈ 鮮矣仁은 ‘仁한 경우가 鮮하다’라는 말로, 仁鮮矣가 도치된 표현이다. 따라서, 글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鮮하다, 仁한 경우가.’처럼 번역해야 한다. 나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수사적 기법이라고만 간주하고, 원래 어순인 仁鮮矣, ‘仁한 경우가 鮮하다’와 같이 번역하였다. 이런 도치 기법은 당시에 가끔 사용되었던 것 같다. 《論語》 「述而」에 甚矣/吾衰也//久矣/吾不復夢見周公, ‘내 衰가 심하도다. 내가 다시 꿈에서 周公을 뵙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도다’라는 말이 있고, 《孟子》 「盡心 下」에는 死矣/盆成括, ‘盆成括은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며, 《史記》 「魯仲連鄒陽列傳」과 《戰國策》 「趙策」에 亦太甚矣/先生之言也, ‘선생의 말이 또 아주 심하도다’라는 말이 있다. ◈ 鮮은 용언으로, ‘드물다’, ‘적다’는 말이다. 고대에는 이런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爾雅》 「釋詁」에 希/寡/鮮/罕也, ‘希, 寡, 鮮은 드물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禮記》 「大學」에 好而知其惡/惡而知其美者/天下鮮矣, ‘좋아하면서도 결점을 알고, 싫어하면서도 장점을 아는 경우는 세상에 鮮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鮮/罕也, ‘鮮은 드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鮮/少也, ‘鮮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禮記》 「中庸」에는 民鮮能/久矣, ‘사람들이 鮮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래 되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과 孔穎達은 모두 鮮/罕也, ‘鮮은 드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예시가 또 있다. 《詩》 「國風 鄭風」의 「揚之水」에 終鮮兄弟, ‘끝내 형제가 鮮하게 되어’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鮮/寡也, ‘鮮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朱熹와 劉寶楠은 鮮, 즉 ‘적다’는 말이 단지 우회적인 표현일 뿐이며, 실제로는 ‘없다’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巧와 令은, 劉寶楠이 주석에서 예를 들었듯, 긍정적인 의미로도 자주 사용되었다. 이는 巧와 令이 기만적이라는 의미 이전에, 본래 ‘솜씨가 좋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표현하고, 낯빛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뿐이다. 소박하게 표현해야 할 때도 있고, 교묘하게 표현해야 할 때도 있다. 나는 朱熹와 劉寶楠이 왜 굳이 鮮을 ‘없다’라고 풀이하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皇侃은 鮮/少也, ‘鮮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聖人辭不迫切/專言鮮/則絕無可知/學者所當深戒也, ‘聖人은 말을 할 때 딱 끊듯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드물다고만 말하였을 뿐이다. 그러한 즉, 실제로는 仁한 경우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이 점을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문장 전체에 대한 주석을 참고하면, 劉寶楠은 孔子가 여러 차례 비난하기 싫어서 없다고 하지 않고 적다고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 矣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다. 여기서는 ‘~하도다’, ‘~도다’, ‘~로다’와 같이 번역할 수 있겠다. ◈ 仁은 체언이다. 그러나 내용을 고려할 때, 이 仁은 仁者, 즉 ‘어진 경우’, ‘어진 사람’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판본에 따라 仁이 有仁으로, 즉 鮮矣仁이 鮮矣有仁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 有仁은 ‘仁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해석될 것이다. 包咸은 주석에서 少能有仁也라고 풀이했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包咸이 보았던 판본에도 有仁이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 劉寶楠은 皇本/仁上有有字, ‘《皇侃本》에는 仁 앞에 有가 있다’라고 하였다. 《皇侃本》, 즉 《論語集解義疏》에는 본문의 鮮矣仁이 鮮矣有仁으로 되어 있다. ▼ 阮元은 皇本作/鮮矣有仁//案包注及䟽文/當作有仁, ‘鮮矣仁이 《皇侃本》에는 鮮矣有仁이라고 되어 있다. 包咸의 주석이나 䟽의 글을 참고할 때, 마땅히 鮮矣有仁이라고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 包咸은 皆欲令人說之/少能有仁也, ‘巧言과 令色은 모두 다른 사람을 기쁘게 만들고자 하는 행위로, 이런 놈들 중엔 적은 수만이 仁을 품고 있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주석 중 說에 대해, 說音悅, ‘說은 悅이라고 읽는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이 주석에 대해, 云少能有仁/似注所見本亦作有仁, ‘주석에서는 少能有仁이라고 하였는데, 아마 包咸이 참고했던 판본에도 鮮矣仁이 鮮矣有仁으로 되어 있었던 듯하다’라고 하였다. ◈◈ 皇侃은 此人本無善言美色/而虛假為之則少有仁者也//然都應無仁/而云少者/舊云人自有非假而自然者/此則不妨有仁/但時多巧令/故云少也//又一通云/巧言令色之人/非都無仁政/是性不能全/故云少也//故張憑云/仁者/人之性也//性有厚薄/故體足者難耳//巧言令色之人於仁性為少/非為都無/其分也//故曰/鮮矣有仁///王肅曰/巧言無實/令色無質, ‘이 말은 사람이 본래 말을 좋게 하거나, 낯빛을 예쁘게 드러내지 않는데, 공허하게 그러한 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 중 어진 경우는 적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 중에는 아마 어진 경우가 없을 텐데, “적다”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옛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원래부터 거짓이 아닌 자연스러운 모습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아예 어진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때에 따라 말을 교묘하게 하고, 낯빛을 좋게 꾸미는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이에 “적다”라고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 이 말을 풀이하면서, “말을 교묘하게 하고 낯빛을 좋게 꾸미는 사람이 모두 어진 마음 없이 정치를 펴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性을 보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적다’라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張憑은 “仁은 사람의 性이다. 性이 여유로우면, 足을 體하기가 어렵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낯빛을 좋게 꾸미는 사람은, 仁의 性이 작을 뿐,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이 그 차이다. 그래서 ‘어진 마음을 품은 경우가 적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肅은 “말을 교묘하게 하는 짓은 실체가 없는 짓이요, 낯빛을 좋게 꾸미는 짓은 본바탕이 없는 짓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邢昺은 此章論仁者必直言正色//其若巧好其言語/令善其顏色/欲令人說愛之者/少能有仁也, ‘이 장에서는 어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말을 올곧게 하고, 안색을 바르게 한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만약 말을 巧好하게 하고, 안색을 令善하게 한다면, 이는 다른 사람이 기뻐하여서 자신을 좋아하게 하고자 하는 짓이니, 이런 자들이 어진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경우가 적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程氏는 知巧言令色之非仁/則知仁矣, ‘말재주가 좋고, 낯빛이 좋으면 仁하지 않다는 점을 안다면, 仁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은 朱熹의 《論語集註》에 程子의 말이라고 인용되어 있는데, 程顥인지 程頤인지 구분할 수 없으므로, 程氏라고만 기재해 두었다. ◈◈ 朱熹는 好其言/善其色/致飾於外/務以悅人/則人欲肆而本心之德亡矣, ‘말이 좋고, 낯빛이 좋으니, 밖으로 지극하게 꾸며 대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한 즉, 다른 사람은 방자하게 대하고자 할 것이요, 본심 속의 德은 어그러지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禮/表記/子曰/情欲信/辭欲巧///詩/雨無正/巧言如流/俾躬處休///左傳/載師曠善諫/叔向引巧言如流以美之//又烝民詩/令儀令色///彼文言巧令/皆是美辭//此云鮮矣仁者/以巧令多由僞作/故下篇言/巧言令色足恭/左丘明恥之/丘亦恥之///又書/皋陶謨云/何畏乎巧言令色孔壬///孔/甚也//壬/佞也//以巧言令色爲甚佞/則不仁可知//然夫子猶云鮮仁者/不忍重斥之/猶若未絕於仁也//曾子立事云/巧言令色/能小行而篤/難於仁矣///與此文義同, ‘《禮》 「表記」에 “孔子가 ‘정신은 信하도록 해야 하고, 말은 巧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詩》 「雨無正」에 “巧言이 물과 같으니, 그 자신이 편안해지는구나”라는 말이 있는데, 《左傳》에는 師曠이 간언을 잘 하였다고 하며 叔向이 “巧言이 물과 같다”를 인용하여서 칭찬한 일화가 기재되어 있다. 또, 「烝民」이라는 詩에는 “모습을 令하고, 안색을 令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글들에서 巧와 令은 모두 좋은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仁한 경우가 적다”라고 하였는데, 거짓된 동기에서 巧와 令한 경우가 많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뒷편에 “말을 巧하게 하고, 안색을 令하게 하며, 공손한 태도를 지나치게 하는 짓, 이는 左丘明이 부끄러워 하는 바이며, 丘 역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라는 말이 있다. 또, 《書》 「皋陶謨」에 “巧言하고 令色하며 孔하게 壬하는 자를 왜 두려워해야 하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孔은 심하게라는 뜻이고, 壬은 아부한다는 뜻이다. 巧言과 令色을 심히 아부한다고 하였으니, 巧言令色한 사람이 仁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겠다. 그런데 夫子는 다만 仁한 경우가 드물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거듭 비난하기 싫어서, 단지 완전히 仁한 경우가 없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曾子立事」에 “巧言하고 令色한 자는 작은 일은 성실하게 할 수 있겠지만, 仁하기는 어렵다”라는 말이 있는데, 본문과 의미가 같다‘라고 하였다. 《禮》 「表記」는 《禮記》 「表記」다. 「雨無正」은 「小雅 祈父之什」에 속해 있다. 인용된 《左傳》의 일화는 《春秋左氏傳》 「昭公」 8년에 기재되어 있다. 「烝民」은 《詩》 「大雅 蕩之什」에 속해 있다. 巧言/令色/足恭/左丘明恥之/丘亦恥之는 《論語》 「公冶長」에 나온다. 여기서 足는 ‘지나치다’라는 말로, ‘주’라고 읽는다. 「皋陶謨」는 「虞書」에 속해 있다. 「曾子立事」는 《大戴禮記》의 편이다. ◈◈ 蜀虎案 : 巧言과 令色은 여러 학자들이 설명하였듯,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할 수는 없다. 蜀虎는 배가 고플 때 사람에게 와서 입을 핥으면서 비굴하게 군다. 孃破는 밥통 위에서 화가 난듯 울며, 다른 고양이들은 주인과 밥통을 번갈아 보며 운다. 그러다가 밥을 주지 않으면, 눈치를 보면서 작게 울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한다. 그러나 밥을 줄 때까지 경계를 늦추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모두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왜 그렇게 행동할까. 얻어 내야 할 밥이 있기 때문이다.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에 蜀虎와 孃破, 그리고 기타 고양이들은 巧하게 言하고, 令하게 色하는 것이다. 즉, 巧言과 令色은, 남의 비위를 맞추는 행위이자, 남에게 바라는 바가 있는 행위이다. 일종의 기만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巧言하고 令色한다면, 그 동기가 순수하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어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鮮, 즉 ‘드물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분명 상황에 따라 소박하게 이야기해야 동기와 목적을 이룰 수 있을 때가 있고, 교묘하게 이야기해야 동기와 목적을 이룰 수 있을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어질지 않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史記》 「五宗世家」에 彭祖為人巧佞卑諂/足恭而心刻深, ‘彭祖는 巧하게 아부하고, 비열하게 아첨하였으니, 공손한 태도는 지나쳤고, 마음은 각박했다’라는 말이 있다. 본문과 맥락이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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