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 - 1 - 입교 4장

2022. 3. 26. 17:51개인 공부(추후 재배치 예정)/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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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교 4장>

 

學記曰 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

 

「학기」(學記, 《예기》의 편 이름이다.)에 이런 말이 있다.

 

"고대의 교육 방식은 이러했다.(古之敎者, 孔穎達은 古之敎를 謂上代, '고대를 이르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敎는 校, '학교', '교육 기관' 혹은 '교육 방식'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뒤의 塾, 庠, 序, 學이 모두 '교육 기관'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가에는 숙이 있고, 당에는 상이 있으며, 술에는 서가 있고, 국에는 학이 있었다.(家有塾/黨有庠/術有序/國有學, 家는 아마 '한 집'을 뜻할 것이다. 塾은 '글방'이다. 《설문해자》에서는 塾을 門側堂, '문 옆에 있는 방'이라고 하였다. 고대에는 대문 옆의 방을 공부하는 방으로 썼을까. 아무리 그래도 한 집마다 塾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吳訥은 陳氏가 二十五家爲閭/同在一巷//巷首有門/門側有塾, '25家를 閭로 하고, 하나의 巷으로 두었는데, 首에는 門이 있어서, 그 門 곁에 塾이 있었다'라고 했다고 했다. 이를 따른다면, 塾은 25家를 기준으로 둔 일종의 '서당'이었을 것이다. 黨과 은 '마을'을 이른다. 구체적으로는 500호를 黨이라고 하고, 12500호를 術이라고 하였다. 鄭玄은 周禮//五百家爲黨/萬二千五百家爲遂, '周禮》에서 500 黨이라고 하고, 12500家를 遂라고 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周禮》에서는 저런 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周禮地官司徒」에 五家爲鄰/五鄰里/四里酂/五酂鄙/五鄙縣/五縣遂, '5家를 鄰이라 하고, 5鄰을 里라 하며, 4里를 酇이라 하고, 5酇을 鄙라 하며, 5鄙를 縣이라 하고, 5縣을 遂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따라 보면 遂는 12500家가 된다. 周禮》는 아니지만, 《釋名》 釋州國」에는 五百家爲黨, '500家를 黨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萬二千五百家爲鄉, '12500家를 鄉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다. 이로써 보면 術, 遂, 鄉은 모두 12500호를 가리키는 듯하다. 術 또는 遂가 쓰이다가, 漢代를 거치면서 鄉으로 정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吳訥이 陳氏를 인용한 말에 術當爲州/二千五百家爲州, '術은 마땅히 州라고 해야 한다. 2500家를 州라고 한다'라고 한 것을 보면, 州라는 표현도 혼용되었던 모양이다. 庠과 序는 모두 '학교'의 이름이다. 《설문해자》에 禮官養老//夏曰校/殷曰庠/周曰序, '를 관장하고 노인들을 먹이던 곳이다. 夏나라 때는 校라고 하였고, 殷나라 때는 庠이라고 했으며, 周나라 때는 序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왜 교육 기관이 아니라 禮官養老라고 했을까. 본문처럼 「학기」에서 古之敎者를 언급하며 庠과 序를 언급한 점을 볼 때, 분명 교육기관이 아니지는 않다. 禮官養老 중 禮官이 아마 '禮를 가르쳤다'는 말이 아닐까 하다. 그러면 養老 업무도 보았을까. 《예기》의 「王制」에 有虞氏養國老於上庠/養庶老於下庠//夏后氏養國老於東序/養庶老於西序//殷人養國老於右學/養庶老於左學//周人養國老於東膠/養庶老於虞庠, '有虞氏는 上庠에서 國老를 봉양하였고, 下庠에서 庶老를 봉양하였다. 夏后氏 東序에서 國老를 봉양하였고, 西序에서 庶老를 봉양하였다. 殷나라 사람들은 右學에서 國老를 봉양하였고, 左學에서 庶老를 봉양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東膠에서 國老를 봉양하였고, 虞庠에서 庶老를 봉양하였다'는 말이 있다. 이를 보면, 교육 기관이기도 하고, 동시에 노인들을 먹이는 기관이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國은 아마 수도를 뜻하는 듯하다. 學은 大學과 小學을 이를 것이다.)"

 

 

<소학집해>

 

學記 禮記篇名. 陳氏曰 "古者 二十五家爲閭 同在一巷, 巷首有門 門側有塾 民在家者 朝夕受敎於塾也. 五百家爲黨, 黨之學曰庠 敎閭塾所升之人也. 術當爲州 二千五百家爲州. 州之學曰序 敎黨學所升之人也. 天子所都及諸侯國中之學 謂之國學 以敎元子衆子及卿大夫士之子 與 所升俊選之士焉." 程子曰 "古者 家有塾 黨有庠 遂有序, 蓋 未嘗有不入. 學者八歲 入小學, 十五擇其俊秀者 入大學, 不可敎者 歸之于農 三老坐於里門, 出入 察 其長幼進退揖讓之序 觀其所習, 安得不厚也."

 

학기(學記) 《예기》(禮記)의 편 이름이다.

 

진씨(陳氏)가 말했다.

 

"옛날에는 25가(家)를 여(閭)라고 하고, 한 항(巷, 지금의 '길'처럼, '거리'라는 뜻으로 사용된 듯하다.)으로 두었다. 항수에는(巷首, '巷이 시작되는 지점'을 뜻하는 듯하다.) (門)이 있는데, 문 옆에 숙(塾)이 있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백성들은 숙(塾)에서 조석으로 공부하였다.(受敎, '가르침을 받았다') 500가(家)를 당(黨)이라고 한다. 당(黨)에 있는 학교(學)를 상(庠)이라고 하니, 여의 숙(閭塾)에서 올라 온 사람(所升之人, 升은 '오르다')을 가르쳤다. 술(術)은 마땅히 주(州)가 되어야 한다. 2500가(家)를 주(州)라고 한다. (州)에 있는 학교(學)를 서()라고 하니, 당의 학교(黨學)에서 올라 온 사람을 가르쳤다. 천자가 있는 수도(都)와 제후국에 있는(諸侯國中) 학교(學)를 국학(國學)이라고 한다. [국학에서는] 원자와 중자(元子衆子, 아마 天子와 諸侯의 장남과 기타 자제들을 뜻하는 듯하다.), 그리고 경, 대부, 사의 자식들(夫士之子), 또(與) 가려서 뽑은 사 중 준수한 자들을 올려 보내(所升俊選之士) 가르쳤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옛날에는 가에는 숙이 있었고(家有塾), 당에는 상이 있었으며(黨有庠), 수에는 서가 있었으니(遂有序), 대체로 [배우려고만 하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未嘗有不入) 학생(學者)이 8살이 되면, 소학(小學)에 들여 보내고, 15살이 되면 그 중 준수한 자들을 골라서(擇其俊秀者) 태학(大學)에 들여 보낸다. 가르칠 만하지 않은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러 돌려 보내니, 삼로(三老, 지역의 교화를 책임지던 직책이다. 아마 일종의 '이장'이나 '면장'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다. 《사기》 「고조본기」에 新城三老董公遮說漢王以義帝死故, '新城의 三老인 董公이 漢王을 막고 의제가 죽은 이유를 설명했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張守節은 百官表」를 인용하여, 十里一亭/亭有長//十亭一鄉/鄉有三老/三老掌教化, '10里를 1亭이라 하는데, 亭에는 長을 둔다. 10亭을 1鄉이라 하는데, 鄉에는 三老를 둔다. 三老는 백성들을 교화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또 皆秦制, '모두 秦나라의 제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三老가 처음 설치되었던 것은 周나라 때로, 《예기》의 「文王世子」에 遂設三老五更群老之席位焉, '드디어 三老와 五更, 群老의 직위를 만들었다'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고조본기」와 「文王世子」에서 三老의 역할이 같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시대에 따라 역할이 바뀌었던 듯하다.)가 마을 입구에 앉아서(坐於里門) [마을을] 출입하는 사람들에 대해(出入) 장유와 진퇴, 읍양의 질서(長幼進退揖讓之序, 揖讓은 '읍하면서 양보하는 것', 其는 出入)를 따지고(察, '따지다', 《한서》 「동방삭전」에 人至察則無徒, '사람이 너무 察하면 따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察은 '결백함을 따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어부사」에서 察察이 '깨끗한 모습'으로 사용된 것도 이런 의미에서가 아닐까 한다.), 사람들이 [예법을 제대로] 익혔는지를 살폈으니(觀其所習, 其는 出入), [사람들의 예법이] 어찌(安) 두텁지 않았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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