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초성전투와 기벌포전투(삼국사기 문무왕본기 중)

2020. 4. 28. 10:08삼국사기 이야기(잡설)/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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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석문전투 이후 신라는 대방 전역을 포기하고 전국에 크고 작은 성들을 짓습니다. 아마 위기감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문무왕의 외삼촌이자 선덕왕 이후 신라군의 중추였던 김유신도 죽고, 탁발부에 붙으려는 반역자를 발각해 잡아 죽이기도 합니다.

 

 

 

석문전투부터 1여 년 뒤인 6739월부터 탁발부는 다시 남진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1여 년 동안 신라와 탁발부 사이에 교섭이 있었든지, 아님 탁발부가 대방 지역의 잔류 괴뢰 고구려군을 평정하고 있었든지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전투들은 주로 임진강, 한강 하류 등 경기도 북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신라군은 붕괴하지 않고 잘 막습니다.

 

이 와중에 짝눈이 새끼는 김인문이를 신라왕을 봉해서 신라가 내부에서 분열하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유인궤와 이근행, 이필을 원정군 장군으로 보냅니다.

 

6752월에 탁발부는 칠중성(파주 적성)에서 신라군에게 이깁니다. 이후 무슨 교섭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김인문과 유인궤는 돌아가고, 문무왕의 형식적 관작이 복구됩니다.

 

 

 

하지만 신라가 정복지를 행정적으로 통치하려 하자 전쟁이 재개됩니다. 유인궤가 돌아간 이후 탁발부의 사령관은 설인귀, 이근행이었습니다.

 

6759월 말에 이근행은 매초성(연천 청산?)20만 명을 이끌고 주둔했는데 신라가 이를 공격해 크게 이기고 전리품을 많이 얻습니다. 전마 3만 필이라고 하니까 보통 규모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매초성전투 이후 신라군이 안북하(예성강?)를 따라 성을 쌓은 것을 볼 때, 석문에서 패한 이후 대방 전역을 신라가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매초성전투 이후 탁발부도 경기 북부 전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능력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매초성전투와 같은 달에 신라는 아달성(강원도 이천?), 칠중성(파주 적성), 적목성(강원도 회양 난곡 현리?), 석현성(양주 장흥?)을 공격받습니다. 전부 강원도, 경기도 북부 지역입니다. 또한 위치가 안 나와 있지만, 십팔 번 싸워서 십팔 번 모두 이기고 탁발선비 6740명을 잡아 죽였다는 기록이 마찬가지로 같은 달에 있습니다.

 

매초성전투가 929일로 날짜가 남아 있고, 뒤의 전투들도 모두 9월 기록인 것을 감안할 때, 아달성, 칠중성, 적목성, 석현성의 전투는 일시가 꼬여 있거나, 아니면 매초성전투의 대단위 전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초성에 20만 명이 주둔했다고 보기 힘들다면, 임진강 이북 지역에 이근행이 20만 명을 분산시켜 주둔시켰고, 신라가 이것을 공격해 탁발부와 전투를 벌였고, 결과적으로 크게 이겼다고 할 수 있겠죠.

 

 

 

이후 67611월에 야만족 설인귀가 웅진도독부를 깔짝거리려고 기벌포로 왔다가 신라에게 크게 진 것을 끝으로 나당전쟁은 사실상 끝납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설인귀가 이겼다면 모를까, 실제로는 매초성전투의 전략적 가치가 기벌포전투에 비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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