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 2 - 제물론 - 해설

2021. 7. 19. 11:14장자 내편 이야기 - 완결/원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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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편》 번역에는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이민수(李民樹)의 2007년 번역, 현암사에서 나온 안동림(安東林)의 2019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내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0년 5월 9일 12시 46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원문과 번역문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2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1 - 자기와 자유가 인뢰, 지뢰, 천뢰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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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68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2 - 장자의 도론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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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69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3 - 장자의 도론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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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70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4 - 왕예가 만물이 하나라는 점으로 설결을 깨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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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71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5 - 장오자가 구작자에게 성인의 경지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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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72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6 - 망량이 그림자를 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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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73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7 - 호접몽(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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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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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주석>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6 - 망량이 그림자를 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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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28

 

<하단 주석>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7 - 호접몽(끝)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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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책으로 출판되어 교보문고를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전문을 다 읽으시려면 책을 구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莊子內篇孃注》, 李相珉, 책과세계)

 

**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내용은, 번역문 전체 및 주석 일부입니다. 그러나 번역문과 주석 모두 중간 부분을 {...}라는 표시로 비워 뒀습니다. 책을 구입하기 전 열람할 수 있는 견본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교보문고와 리디북스 두 개 서점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 가능한 링크는 아래에 기재해 두었습니다.

 

1.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3332426(양장본, 품절)

 

2.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9069155(문고판, 상권 및 하권으로 분절, 세트로 판매, 재고 있음)

 

 

3. 전자책

 

3-1. 교보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405

(전자책, 교보문고, 합본)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1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6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3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63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2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7

(전자책, 교보문고, 편별로 분권)

 

 

3-2. 리디북스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8?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1

(전자책, 리디북스, 합본)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1?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4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2?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5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3?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6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4?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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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6?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8

https://ridibooks.com/books/5392000007?_s=search&_q=%EC%9E%A5%EC%9E%90%EB%82%B4%ED%8E%B8&_rdt_sid=search&_rdt_idx=2

(전자책, 리디북스, 편별로 분리)

 

 

 

 

 

장자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은 '道'입니다. 장자는 「齊物論」에서 처음으로 {...} 각론에 들어가기 전에 《內篇》의 전체적인 주제를 설명하는 총론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자가 「齊物論」에서 도가 무엇인지에 {...}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內篇》 중 딱 한 편만 읽을 여유가 {...}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는 것 이전에 {...} 경향이 있지만, 그 점을 감안하고도 그렇습니다.

 

「齊物論」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장자가 「齊物論」에서 {...} 곧장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역사가 대체로 수천 년 정도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표현하려는 주제에 대해 예전에 {...} 번뜩이면서 떠올렸다고 해 봅시다. 하지만 하늘이 돌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체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지금부터 1900여 년 전에 이미 정립한 학설입니다.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는 주전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천체의 운동을 {...} 케플러로부터 다시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뉴턴이 중력 이론을 통해 '물리학적'으로 반박하며 완전히 사장되었습니다. 만약 옆집 철수가 요즘 시기에 자기 '발상'을 {...} 선수들은 펠프스의 기록을 자기 목표이자 출발점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 무엇 보다도 후학들이 {...} '돈가스가 라면 보다 맛있다'라고 하면 돈가스가 맛있다는 핵심 주제가 보다 돋보이게 된다는 점과 같습니다.

 

장자가 「齊物論」에서 자신의 도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주요한 논증 모형이 {...} 것처럼, 수많은 사상가들이 자기 목소리를 냈던 시대였습니다. '百家'의 학문적 주류는 단언 유가와 묵가, 그리고 도가였습니다. 주류와 비주류의 중간 정도엔 명가가 있었죠. 학문적인 면을 제외한다면 종횡가도 한 시대를 {...} 하지만, 당대의 사서에 유가와 묵가가 항상 싸우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심지어는 《莊子》에도 그렇게 등장합니다. 당장 「齊物論」에도 둘이 항상 싸움을 벌인다고 {...} 하는데, 구성원 각자가 설명한다는 도의 의미라는 것이 달랐으니까요. 우리가 유가의 계통을 공자, 증자, 자사, 맹자로 {...} 하지만, 윤희가 실재한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가 없는데다, 장자는 열자가 바람을 타고 다녔다고 할 지경이니까요. 열자는 장자 보다 한 세대 정도 전 사람인데, 그 정도로 가까운 사람임에도 행적이 불분명한 {...} 몇 차례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고, 그 견해는 아주 분명합니다. 장자는 유가와 묵가, 특히 유가적 정치에 대해서 선명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반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판하기 {...} 중심 입장을 비판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道'를 분명하게 드러냈거든요.

 

다만 「齊物論」에서 유가, 묵가, 명가를 {...} 점은 분명합니다. 《荀子》에는 「非十二子」라는 편이 있습니다. 이 편에서 순자는 유학자의 입장에서 타효(它嚻)와 위모(魏牟), 진중(陳仲)과 사추(史鰌), 묵적(墨翟)과 송견(宋銒), 신도(慎到)와 전병(田駢), 혜시(惠施)와 등석(鄧析), 자사(子思)와 맹가(孟軻)의 열 두 학자들을 비판합니다. 다른 학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齊物論」과 「非十二子」가 {...} 것처럼 비판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齊物論」과 「非十二子」는 다릅니다. 오히려 《雜篇》의 「天下」야말로 비판이나 평론 그 자체가 목적인 편이었습니다. 혼동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齊物論」에 가장 처음 나오는 이야기는 '籟', 즉 소리에 관한 자기와 자유의 대화이지만, 장자 본인의 논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 들어가 보겠습니다.

 

 

 

장자는 「逍遙遊」에서 '大'와 '小'를 {...} 대지와 대언은 장자의 주장, 즉 '道'를 의미하고, '小知'와 '小言'은 '道를 따를 준비가 안 된 좀생이'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道'가 바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요, '좀생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바로 {...}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 없이 싸움을 일삼습니다. 잠이 들면 넋에 시달리고, 잠에서 깨면 외물과 엮입니다. 게다가 주변을 살피는 {...} 것처럼 굴기도 합니다. 이렇게 추태를 부리니, 나중에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업이 쌓이기도 하죠. {...} 아는 것은 뭣도 없는데 말도 비루하게 하고 다닌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小'에 대해 설명했으면 '大'에 대해서도 {...} 수 있겠죠. 바로 이 부분에서 장자는 '眞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宰'는 재상이라는 말인데, 재상은 왕이나 제후 아래에서 국정을 총괄하는 만백관의 우두머리입니다. '주재자'라고 하기도 하죠. 그래서 '眞宰'를 {...} 대해 설명하기 위해 우리의 감정과 행동 상태를 예로 들었습니다. 예컨대 기쁘다는 감정이 있다면, 기쁘다는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것이 장자의 착안점이었죠. 술을 마시면 토하기 마련인데, 반대로 토사물이라는 {...}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술과 토사물처럼 인과 관계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원인이 {...} 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 아닙니다. 장자는 그래서 진재를 보고 실체는(情) 있지만 형체는(形) 없다고 했습니다.

 

'眞宰'라는 것은 상정된 표현입니다. 감정과 {...} 행동이라는 소재 자체나, 진재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무언가를 일으키는, 혹은 현상의 원인이 되는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장자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의 몸을 다시 예로 {...} 결과로 구분하고, 그 원인을 상정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표현을 달리 해서 '眞君'이라고 했습니다. 진군은 우리 {...} 때문에 실제로 무엇을 통솔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장자는 진재와 진군을 설명함으로써, {...} 의심할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고자 했습니다.

 

장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존재, 세상의 {...} 우리 존재, 세상의 존재, 현상에 대해서도 원인을 상정한다면, 이 '원인'에 대해 장자는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 「養生主」에서 주장하는 '養生' 개념의 근간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신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 공을 세우겠다고 선봉에 나서는 것은 자신을 해치는 행위입니다. 정치를 바로잡는답시고 자기 목숨을 거는 일도 자기를 망치는 행위이죠. 장자는 이런 공로나 명망이 우리가 받은 우리의 존재성을 지키는 것에 비해서는 {...} 같이 산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재나 진군이 실재한다는 {...} 수도 있고, 알고도 외면할 수도 있으며, 혹은 아주 잘못 알고는 자기 생각이 맞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견해가 {...} 모범으로 삼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아집'이나 '고집'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자기 성심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게 되면, 결국 우리 존재의 '원인'을 제대로 보지는 못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제대로 {...} 이지러졌다, 혹은 무너졌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존재의 '원인'이 이지러지면 어떻게 될까요? 장자는 {...} '소리'일 뿐, '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미가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이런 '말'을 새 새끼가(鷇) 내는 소리에 {...} 비유를 왜곡해서 이해하게 될 테니까요. 다시 돌아가 봅시다. '말'에서 의미가 훼손돼 버린다면 '말'은 말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 것을 알 수가 있으며, 확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누가 '말'의 원래 의미를 잘 구현해 냈느냐, 반영해 냈느냐, 이해했느냐, 표현하고 있느냐를 {...} 맞니, 니가 맞니 하고 싸우기 시작하면 바로 그것이 옳고 그름의 논쟁, 즉 시비의 {...} 아님 맹목적으로 따르느냐는 것 역시 장자의 사상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이론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수양론 입장에서 특히 {...} 성견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한 바로 이 부분은 《內篇》 중에서 '道'라는 말이 가장 처음 {...} 것입니다. 말의 의미가 가려져 있기에 사람들이 말의 의미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게 된 것처럼, 장자는 도가 가려져 있기에 {...} 구분할 필요는 없겠죠. 그런데 이런 식의 논증, 즉 도가 {...} 나오고, 「竹簡本」에에는 같은 구절이 '故大道廢安有仁義'라는 말이 나오죠. '安'은 '어찌'라는 말이므로, 「通行本」은 '대도가 무너지니 인과 의가 나왔다'는 말이고, 「竹簡本」은 '대도가 무너지면 어떻게 인과 의가 남아 있을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보시다시피 「竹簡本」과 「通行本」의 어조와 내용은 정반대이기는 하지만, 장자 계열이 아니라 노자 계열에서도 {...} 문제 의식이 같았던 것 같습니다. 즉, 도가의 집단성이 느슨하기 {...} 공유한 것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齊物論」으로 돌아가 봅시다. 도가 {...} 위에서 '養生'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공명을 세우기 위해 자신을 함부로 쓴다고 했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소성과 영화입니다. 도가 {...} 한다는 것도 모르며, 죽고 난 뒤 도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도 {...}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소성이 오히려 '大成'으로 보이고, 그 공적과 명망을 얻으면 천하를 모두 얻을 것처럼 들떠 합니다. 바로 이 와중에 {...} 도라고 주장할 테니까요.

 

장자는 '시비의 다툼'을 벌이는 사람들을 '儒墨'이라고 아주 분명히 {...} 달리고 있던 학파였습니다. 장자가 노자 계열의 '도가적 정치 이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가와 묵가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신랄하게 세웠던 것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특히 유가와 묵가는 사상적으로도 {...} 기존 전통을 무너뜨려야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했으니까요. 반면, 「大宗師」의 좌망(坐忘) 이야기를 보면, 장자는 인(仁)과 의(義), 예(禮)와 악(樂)을 잊는 데에서 {...}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장자에게는 세상의 정치나 질서를 세우겠답시고 나서는 행위를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명성을 얻기 위해 {...} 유가든, 묵가든, 도는 뒷전인 채 정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니 장자의 입장에서는 비판하지 않으려 해도 비판하지 않을 수가 {...} 유가와 묵가가 정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또한 다른 어떤 학파 보다도 '잘'했으며, 게다가 경쟁하는 관계였기에 서로서로 헐뜯는 것도 누구 {...} 비판했던 것입니다.

 

장자는 유묵에 대한 비판을 '莫若以明'이라는 말로 {...} 없더라도 '도를 밝힌다', 혹은 {...} 하는 것은 모두 도를 밝힌다는 장자 자신의 사상을 따르는 것 보다 {...}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면 시비로 생기는 다툼 보다는 나은 길도 있을까요? 있습니다. 장자는 {...} 않습니다. 「天下」에는 혜자가 주장했다는 대표적인 명제가 10개 남아 있는데, 이것을 역물십사(歷物十事) 또는 역물지의(歷物之意)라고 합니다. 역물십사에 대해서는 《荀子》 「非十二子」의 해설에 정리해 두었으니 참고하시면 {...} 동등하다, 나란하다는 말이고, '生'은 생긴다, 생겨나다는 말이죠. 따라서 방생지설은 {...} 함께 생겨난다는 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天下」에 나오는 '物方生方死'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삶이라는 {...} 적어도 하나 반드시 생겨납니다. '日方中方睨'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가 중천에 뜬 것과 해가 기운 것 역시 삶과 죽음처럼 대척점에 있으니까요. 이 {...} 살펴 보면 혜자가 요즘 말로 상대주의적 진리론을 {...} 북쪽에 있는 나라요, 월나라는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본다면 연나라 북쪽은 중국의 극북이고, 월나라 남쪽은 중국의 극남이니 모두 중앙과는 거리가 있죠. 하지만 지구본을 {...} '相對主義'나 '相對性理論' 같은 표현이 없었기 때문에 혜자는 '方生之說'이라는 말을 썼던 것이죠. 장자는 {...} 방생지설을 표현하기 위해 '彼是'라는 말을 썼습니다. '彼是'는 모두 지시대명사로, '彼'는 저것, '是'는 이것을 {...} '이런 입장'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니까요.

 

그러나, 장자는 혜자의 입장이 본질적으로는 {...} 들어 옳은 건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인데, 방생지설을 따르면 옳은 것은 그른 것에 기인해서 나오고(因是因非), 그른 것은 옳은 것에 기인해서 나온다고(因非因是) 해야 할 테니까요. 저는 어릴 때 유묵의 시비를 {...} 옳거나, 그르거나, 이런 입장이나, 저런 입장 모두 한 가지 개념 또는 입장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로 특별하고 {...} 것이 사실은 시비처럼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시각적으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2차원 직교좌표평면을 생각해 {...} 극단적 대립 상태를 넘어 서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道'를 원에 비유하죠. '道樞', 도는 지도리 같다는 말이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樞'는 지도리로, 문과 기둥을 이어 주는 부품이었습니다. 경첩의 일부죠. 각지지 {...} 표현할 수 있습니다. '是非'나 '彼是'의 축에서는 중심을 {...} 맡겨 버리자는 말도 아닙니다. 장자의 '道' 사상은 이렇듯 모든 것을 {...} 지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道樞'입니다.

 

 

 

장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장자는 {...} 마지막으로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을 비판했습니다. 백마비마론은 본래 아열(兒說)이 주장한 학설인데, 지금은 《公孫龍子》의 「白馬論」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 백마비마론을 아열과 공손룡 중 누가 먼저 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의 주석에 의견을 남겼으니, 여기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고, {...} 명제를 설명합니다. 그 중 하나만 {...} 1이 자연수 집합의 원소라는 말이지, 1이 자연수라는 집합 그 자체와 동등하게 비교할 {...} 구별해 배우게 됩니다. 저도 배운 적이 있고요. 아열이나 공손룡이 당시에 집합론을 배우지는 않았을 것이니, 스스로 {...} 똑똑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白馬非馬'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명가에서 '白馬非馬'를 {...} 입장이 그 정도까지 상세하게 남아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백마비마론을 가지고, '말을 가지고 말을 말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을 말이 {...} 나쁘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그 보다 더 나은 방식이라고 비교한 방법일 것입니다. 이왕 말을 두고 말이 아니라고 설명하려 한다면, 말을 {...} 논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장자의 입장에서 이런 논증은 괜스레 류 개념과 원소 개념을 나눠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만 한다는 것이죠.

 

장자의 이런 의중은 {...} 점입니다. 상기한 것처럼 장자는 도가 우리의 존재, 만물의 존재, 세상의 존재, 현상의 존재를 낳은 '원인'이자, 이 모든 것을 {...} 각자 성견을 갖고 있고, 자기 성견을 따르기 때문에 자기 편한 대로, 혹은 자기 필요한 대로 만물을 인식합니다. 예를 들어 '길'은 {...} 받았기 때문에, 자신을 훼손하지 않고 죽을 때 도에게 돌려 주어야 하는 것도 모두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물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장자는 본문에서 아주 못생긴 문둥이와 아주 {...}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필요, 편의, 인식, 성견에 따라 {...} 내세우지 않고, 만물을 타고난 그대로에 맡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不用而寓諸庸'이라고 합니다. '用'은 사람들이 {...} 의미입니다. 평상시라는 것은 성견 때문에 인식 상태가 왜곡되지 않고, 도에게서 받은 타고난 본성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不用而寓諸庸'은 도를 따르는 사람이 마땅히 이르러야 할 {...} 이론적으로는 '실천하지만 실천하는 줄도 모르는 상태'여야 합니다. 장자는 바로 이런 것을 '道'라고 했습니다.

 

장자가 이런 지침을 {...} 수고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 원숭이들은 도토리를 하루에 7개 받게 되고, 무엇 보다도 도토리, 즉 밥을 받는다는 점도 모두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 감정과 기력을 소모하게 되죠.

 

누가 잘못했을까요? 요즘은 원숭이들이 속았다는 점에 착안해서 저공을 못된 놈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아이들한테 가르치기도 쉽고요. 하지만 장자의 입장에서는 {...} 도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길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성견만 고집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朝三'을 지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원숭이가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모습은 {...} 처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길이라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天鈞'의 '鈞'은 '均'으로 봅니다. 균형, 고른 상태를 의미하죠. '天'은 대개 '道'와 같습니다. 즉, 성견에 치우치지 않고 도를 따라 균형 잡힌 입장을 {...} 고수해야 합니다. 이것을 '兩行'이라 합니다. 하지만 양행이든, 천균이든, 본질적으로는 '不用而寓諸庸'과 같습니다. 결국 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장자의 '道說'은 조금 더 이어집니다. 이제 도를 정의하고, 도에 대해 대체적으로 핵심적인 언술도 마쳤으니, 이번엔 도를 이루는 {...} 단계 '구분'의 핵심적인 기준은 바로 만물의 '구별'입니다. 도 앞에 만물이 하나로 통한다는 점이 장자의 대전제입니다. 따라서 만물이 {...} 실존하기 이전 상태, 예를 들면 45억 년 전의 지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하나의 '物'인 {...} 구별하긴 하지만 옳거나 그르다, 즉 사물의 '是非' 같은 기준은 없다고 여기는 경지입니다. 아마 혜자의 방생지설과 같은 상대주의에 해당하는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당연히 이 경지에서 더 내려간다면, {...} 구분짓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묵과 혜자가 {...}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도가 이지러지는 원인은(道之所以虧也) 시비가 뚜렷해지는 {...} 이 부분에서 처음 나오는 말이죠. 뒤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愛'는 앞에서 진재, 진군을 설명할 때 나왔던 '私'와 같은 말입니다. 편향된 {...} 따져 보죠. 장자는 그 점을 따지기 {...} 자기 분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 분야만 '愛'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도에 대한 장자의 원칙들 중에는 도 앞에 만물이 모두 평등하고, 공평하며, 분별 없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세 사람들은 자기가 {...} 이루지는 못했고, 결과적으로는 자기 재주에 대한 '보잘 것 없는 업적'만 남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듯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만물을 말 그대로 '公平無私'하게 대하고, 받아 {...} 이를 골의지요(滑疑之耀)라고 표현했습니다. 골의지요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저는 문맥상 부정적인 {...} 것입니다. 결국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愛'가 끼어들게 하지 못하게 하고, 상기한 것처럼 '不用而寓諸庸', 즉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만물을 타고난 그대로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不用而寓諸庸'은 처음 나왔을 때부터 {...} 있는 말입니다.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道'라고 쓰여 있어야만 도인 것은 아니니까요.

 

 

 

마지막으로 장자는 도를 따르는 것이 왜 가장 나은지, 즉 왜 '莫若以明'인지에 대해 논증하려 했습니다. 장자는 「齊物論」에서 지금까지 여러 학파들을 {...} 학파들처럼 '說'을 세워서 도가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런데 설을 세워서 논증하는 방식은 장자 본인이 {...} 스스로가 노출된다는 것을 시인한 다음, 그래도 한 번 그렇게 해 보겠다고 합니다. 왜 굳이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요? 뒷내용으로써 미루어 {...} 없기 때문에 그 점을 {...} 비판하려 합니다.

 

장자의 논증법은 아킬레우스의 거북이와 유사합니다.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 완전히 금을 그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장자의 논증을 살펴 봅시다. 일단 장자는 '始', 즉 '태초의 상태'를 가정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상태를 상정하면, 처음 상태가 있기 전도 가정할 수 있게 {...} 존재할 것입니다. 이렇듯 따져 보면, 끝 없이 소급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갑자기 백가(百家)의 설이 {...} 무한히 소급되고, 그 시원을 찾을 수 없게 되며, 따라서 이 과정이 의미가 없다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를 따라야 한다는 장자의 {...} 「大宗師」에 '도는 태극 보다 위에 있었지만 높은 척 하지 않았고, 육극 보다 아래에 있었지만 깊은 척하지 않았으며, 천지 보다 앞서 있었지만 오래된 척 하지 않았고, 상고 보다도 오래 되었지만 나이 든 체 하지 않았다'(在太極之先而不爲高/在六極之下而不爲深/先天地生而不爲久/長於上古而不爲老)라는 말이 나오고, {...} 전에 만물이 모두 한 데 뭉쳐 있던 상태를 생각하면 잘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장자가 쳐 둔 '함정'에, 장자 본인의 도론(道論)은 걸려 들지 않습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아킬레우스의 거북이, 그리고 금 긋는 {...} 금을 쉽게 그을 수 있습니다. 백가(百家)가 상정하고 있는 설(說)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가든 묵가든, 명가든, 모두 설을 '전제'하고, 그 설에 적합한 결론을 찾을 뿐이지, 전제한 설에 대한 전제를 다시 무한정 {...} 점에는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장자의 논증도 틀렸을까요. 저는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자는 도를 시원으로 전제하고, 이를 통해 세상의 변천을 모두 설명하며, 또 사람이 살아갈 {...} 점을 설명하는 데 대해서는 적합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도를 따라 만물을 {...} 진전되지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다시 장자를 따라 잡아 봅시다. 백가의 설들을 {...} 죽은 아이를 장수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풀줄기와 기둥, 그리고 문둥이와 서시(西施)를, 좀 이상하긴 하지만, 같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상식'에는 위배되더라도, 천하의 천변만화를 모두 설명해 낼 수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說' 외의 다른 '說'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설이야말로, 사람들이 따라야 {...} 소급해 나가면, 결론도 날 수가 없을 뿐더러, '유일한 진리'를 해치게 되겠죠.

 

사실 이런 방식은 고대부터 중국에서 학문적으로 유행한 방법입니다. 원전이 있다면, 그 원전에 주석을 답니다. 그런데 나중이 되면 다시 그 주석에 주석을 달고, {...} 원효(元曉)가 지은 《大乘起信論疏》를 생각해 봅시다. 원래는 《大乘起信論》이 있었는데, 거기다가 원효가 '疏', 즉 설명을 붙이기 위해 《大乘起信論疏》를 지은 것이죠. 이런 주석을 지칭하는 말도 많은데, 기본적으로 '注'가 있고, '疏'도 있으며, '義疏'도 있고, '翼'이라는 말도 씁니다. 제가 모르는 말도 많을 겁니다.

 

여하간 장자는 이런 방식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장자 본인이 글이 난해해서, 혹은 비유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주석서나 {...} 들어야 도를 따르든, 배격하든 할 것 아닙니까. 당장 제가 이 책을 기술하면서 참고한 곽상(郭象)의 《莊子注》, 성현영(成玄英)의 《南華眞經註疏》, 왕선겸(王先謙)의 《莊子集解》, 곽경번(郭慶藩)의 《莊子集釋》 같은 주석서도 그렇고, 혹은 {...} 장자는 이런 식으로 '說'을 세워서 설명하는 백가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천하를 설명하는 데 전혀 도움이 {...} 뿐이어야(因是已) 한다고 했습니다. 결론은 간단하죠?

 

 

 

여기까지가 「齊物論」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 글은 장자가 직접 기술한 것으로 {...} 도의 형체는 볼 수 없더라도, 도의 실체성을 의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죠. 또한 우리 모두는 도에게서 나온 것이고, 죽으면 다시 도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같잖은 공적이나 명망을 {...} 포용합니다. 그래서 「齊物論」이 '齊物論'인 것입니다. 도는 만물을 공평하게 보고, 우리도 도를 따른다면 {...}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道'가 공평하다 한들, 사람들은 성견이나 성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도를 {...} 뛰어난 사람들도 편애 때문에 도에 이르지 못하기도 하고, 그 보다 못한 사람들은 니가 옳니, 내가 옳니 하며 {...} 따르지 않더라도 여전히 만물을 구별지어 본다면 혜자처럼 방생지설(方生之說)을 따르거나, 아열처럼 백마비마(白馬非馬)나 운운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를 따르는 성인들은 이런 것들에 현혹되지 {...} 도에게서 받은 그대로의 타고난 본성을 따르도록 내버려 두죠.(不用而寓諸庸) '說'을 따로 세우지도 않습니다. 도를 유일한 {...} 무를 좇고(無適焉), 그저 도를 따를 뿐인(因是已) 상태가 장자가 꼽을 수 있는 최고의 수도법일(修道法) 것입니다. 「齊物論」의 핵심을 요약한다면, 제 생각에는 딱 {...}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핵심을 설명했으니 이번에는 나머지 {...} 비판하고 나면 도에 대한 논설은 대체로 끝납니다. 그 뒷부분에도 도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더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은 앞의 본론과는 좀 이질적이고 동떨어진 느낌을 줍니다. 저는 그래서 분리했습니다. 그 뒤에는 설결(齧缺)과 왕예(王倪)의 대화가, 그리고 {...} 대화, 마지막으로 《莊子》 보다도 더 유명한 호접몽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 생각에 「齊物論」의 핵심만 따진다면 초입 부분의 논설만 들어도 충분하지만, 제가 설명하는 데 글을 {...}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序'에 가깝습니다. 각론 부분을 볼 때는, 그 주제가 「齊物論」의 전체적인 주제, 즉 총론의 주제와 {...}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자유와 자기는 '籟', 즉 소리에 대해 대화를 나눕니다. '籟'는 원래 퉁소 소리를 {...} 소리에 '人籟', '地籟', '天籟'라는 세 종류가 있다고 {...} 때문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기도 하고, 바람이 {...} 구멍 자체로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텅 비어 있는데, 구멍에 바람이 들어오면 비로소 소리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道'라는 말이 일체 {...} 설명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자기는 '地籟'를 이렇듯 도가 만물을 이루어 만물이 내는 소리라고 하였지만, '天籟'가 무엇인지는 그저 반문할 뿐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天'이라는 것은 대개 '道'를 의미하고, 바로 만물이 {...} '道'에 대한 총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입맛을 돋우는 식전 음료이자, 그 자체로도 도와 만물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식사의 일부라고 할 수 {...} 만드는 수문장 역할도 하고 있죠.

 

 

 

장자가 도에 대해 직접 기술한 총론 이후에 나오는 '夫道未始有封'부터 '而況德之進乎日者乎'까지는, 그 {...} 도 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齊物論」 안에서는 그렇죠. 또한 장자는 총론 부분에서 유가를 비판하면서도 '是非'를 가지고 싸움을 벌였다는 의미에서 비판했지, 유가의 핵심 개념인 '仁'이나 '義'를 언급하며 따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大道'라는 말도 {...} 자기 모순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左', '右' , '倫', '義', '分', '辯', '競', '爭' 같은 구별되고 대립되는 개념들을 갖고 와서 '八德'이라고 {...} 제외하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정적 표현은 주로 《道德經》에 등장합니다. '大道'니, {...} 않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그 방식이 《道德經》을 따라간다는 것은 다소 미심쩍죠? 이런 설도 있습니다. 동진(東晉) 시대의 최찬(崔贊)은 이 부분이 반고(班固)의 분류에서는 《外篇》에 속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莊子》는 본래 {...} 곽상(郭象)이 만든 것이고, 그 이전에는 52편으로 분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곽상이 52편을 재편집하면서 《外篇》에 {...} 장자 사후에 도가 계열 사람들이 현재의 《內篇》에 대한 주석을 달거나, 혹은 장자의 이름을 빌려서 저술했을 {...} 곽상 때문에 「齊物論」으로 흘러 들어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저는 고문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이런 '정황'을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설결(齧缺)과 왕예(王倪)는 도가 어지럽혀져 있어서 만물을 {...}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예가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왕예가 진정 도에 대해 모르기 때문은 아닙니다. 도가 어지럽혀져 있어서 자기가 알거나 모른다고 하는 진술들이 진정 원래 의미 그대로의 뜻을 지닌다고 할 수 {...} 잃어버렸다고 했던 말 기억하시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美',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고 해 봅시다. 우리는 아름답다, 예쁘다는 {...} 것이 원래는 이렇게 구분되지 않았고, 도에 {...} 해도 누구는 못생겼다고 하는 것처럼 '분열'되었던 것이죠.

 

그럼 도는 왜 어지럽혀졌을까요? 왕예는 인의지단(仁義之端)과 시비지도(是非之塗)가 난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총론에서는 장자가 {...} 도를 통해 구별과 분열 없이 만물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으니까요. 결론적으로 설결과 왕예의 대화는 「齊物論」의 주제와 {...} 하고요. 이 대화는 「應帝王」에서 설결과 포의자 사이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함께 읽어 볼 만합니다.

 

 

 

구작자(瞿鵲子)와 장오자(長梧子)의 대화는 설결과 왕예의 대화와 큰 맥락은 {...} 성인이 온세상 만물을 합쳐서는 섞어 두고, 만물의 바탕을 다시 존귀하게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만물을 합친다는 것은 {...} 본질, 본성을 다시 원래 대로 회복시켜 준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성인이야 도를 아니 도를 따른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도를 모르니 도를 따를 줄도 모르죠. 사람들은 만물을 {...} 넘을 수도 있습니다. '道'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인식 기재라고 한다면, 단순하게 자기 편의 대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것에 현혹되거나 미혹되어서 세상을 인식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죽기 싫고 {...} 뭔가에 현혹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원하거나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장오자는 이 점을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꿈'에 비유합니다. 꿈에서 {...} 있었다면 우리는 무언가에 현혹되었기 때문이 아닐지 의심할 뿐이죠. 장오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혹은 우리 자신의 바램, 기호, 세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인지하는 것들이 꿈처럼 우리가 무언가에 미혹된 결과물이 아닌가 물어 보는 {...}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가지고 {...} 주의해야겠습니다.

 

'是非'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하기 위해 {...} 묻는 것입니다. 장오자는 내가 맞고 니가 틀린 경우, 니가 맞고 내가 틀린 경우, 둘 중 하나는 맞고 하나는 {...} 봅니다. 그리고 이로써 시비를 따지는 일은 본질적으로 {...} 아닌지 의심하기도 하죠.

 

만약 우리가 무언가에 의지하고 기대서 {...} 사람들의 편협한 인식 같은 것들이 모두 화성에 포함될 것입니다. 틈만 나면 바뀌는데 그런 것에 의지한다는 것은 {...} 장오자는 화성에 의지하는 것 보다 도에 의지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습니다. 장오자는 이것을 두고 천예(天倪)로써 조화를 이루고 만연(曼衍)에 근거하여 평생토록 실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예는 말할 것도 없이 도를 {...} 생각됩니다. 《雜篇》 「寓言」에는 '天均者天倪也'라고 하여, 총론에 나왔던 천균이 곧 천예와 같다는 말이 있기도 {...} 것이죠. '寓諸無竟'은 총론의 '不用而寓諸庸'과 같습니다.

 

구작자와 장오자의 대화는 현상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 것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총론에서는 소성이나 영예에 사람들이 눈이 돌아간다는 얘기는 나오지만, 그걸 꿈 {...} 소재로 쓰이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마지막의 호접몽도 중심 화제는 꿈이지만, {...} 전혀 관련이 없거든요.

 

 

 

망량(罔兩)과 영(景)의 대화에는 재밌는 구석이 있습니다. 망량은 {...} 퍼붓습니다. 이에 대해 영은 자신이 그렇게 구는 것이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하며 반문하죠. 사실 망량과 {...} 다소 난해합니다. 길이가 있으면 다른 정보가 있는 셈이니까, 일부가 난해해도 다른 곳에서 의미를 유추할 수 있거든요.

 

영은 분명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게 있어서 그렇게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이긴 한데,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당연히 '道'겠죠. 총론에서 {...}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그림자는 그림자 자신의 입장에서 그 점을 알 수 없는 법이니까요. 즉 영은, 자신이 {...}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망량입니다. 망량은 반그림자이기 때문에 {...} 있다면 영을 이렇게 힐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이 실체를 따라 움직이듯, 망량 자신도 영을 따라 움직이는 {...} 멀어서 도를 따를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망량은 자신의 처지나 입장을 제대로 {...} 빗대는 대상일 것입니다.

 

 

 

호접몽은 「齊物論」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우화입니다. 호접몽은 {...} 호접몽의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유명한 편에 비해서는 저는 의외라고 생각합니다. 호접몽에서는 장자가 자기 자신이 나비가 되어서 날아 다녔다는 꿈을 꾼 이야기를 합니다. 장자는 자기 자신을 {...} 이렇게 부르지 않으니까요. 장자 자신이 직접 썼다는 정황 증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장자가 자다가 자기가 나비가 되는 꿈을 꿨습니다. 중국인들은 나비를 '胡蝶'이라고 하니, 그래서 호접몽이라고 {...} 장자였다는 것을 몰랐고, 꿈에서 깨 보니 자기는 장자일 뿐, 나비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즉, 장자가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 이것을 '物化'라고 합니다.(周與胡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이것이 호접몽입니다.

 

호접몽을 볼 때는 '分'과 '物化'를 잘 봐야 합니다. 둘은 내용상 같은 {...} 의미로 쓰입니다. 이름부터가 '나눌 분'이니까요. 통상적인 해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分'을 이렇게 본다면, 장자와 나비 사이에 구별되는 점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장자는 「齊物論」에서 시종일관 {...} '分'이되, 장자와 나비의 외형이 다르다는 것 자체가 주제라고 보면 안 됩니다. 장자와 나비의 선후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오히려 나비가 변해서 장자가 되고, 장자가 변해서 {...} 나비 역시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에 따라 만물은 변천하지만, 즉 물화(物化)하지만,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형이 바뀐 {...} 문맥도 깔끔하고, 주제도 「齊物論」에 정합적입니다.

 

 

 

이상이 「齊物論」입니다. 처음에 설명했던 것처럼, 「齊物論」은 장자의 {...} 편이 바로 「齊物論」이니까요. 그리고 「齊物論」에서 밑작업을 끝냈기 때문에 장자는 「養生主」나 「人間世」에서 '각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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