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북방 국경(삼국사기 근초고왕본기 중)

2020. 7. 20. 15:50삼국사기 이야기/백제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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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삼국'을 칭할 때는 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즉 '고, 백, 신'의 순서로 말을 합니다. 왜 하필 순서가 그런지는 잘 모릅니다. 첫 글자의 가나다 순서를 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실질적으로 추정되는 건국 연대 순서라서 그런지, 왜놈들에게서 먼 순서인지, 여러 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세 나라의 전성기를 기술할 때는 순서가 좀 다릅니다. 가장 첫 머리가 백제입니다. 바로 근초고왕 때입니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여서 고구려가 평양 이남으로 남진하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게 해 버렸습니다. 다음은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을 시작으로 장수왕, 문자왕에 이르기까지 백제를 강하게 압박하고, 신라를 속국처럼 부렸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위상은 중국 왕조들에 대해서 대등한 위치에까지 올랐습니다. 중국 왕조를 넘지는 못했습니다. 중국놈들이 워낙 숫자가 많아야 말이죠. 그 다음이 바로 신라입니다. 건국 이래 한참을 쭈구리로 지냈던 신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 고구려를 북쪽으로 축출하고, 백제의 성왕을 잡아 죽였습니다. 이 시기에 가야 역시 실질적으로 멸망하고 말죠.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각각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가 각각 4세기, 5세기, 6세기였습니다. 기억하기도 쉽죠.

 

 

 

이번 글에서는 이 중 근초고왕에 대해 말을 좀 해 볼까 합니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13대 왕으로, 비류왕, 계왕을 이어 즉위했습니다. 비류왕에서 조금 더 거슬러 가면 분서왕, 책계왕, 고이왕이죠.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은 문맥 그대로만을 본다면 믿기 힘든 것이 많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인 삼국의 '초기 역사' 역시 믿기 힘든 점들이 많죠. 그래서 다른 중국계 기록들을 끌어 와서 검증하거나 추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못하지만, 고이왕은 백제를 실질적으로 건국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 사람입니다. 온조 외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백제의 시조로 나오는 문헌이 있거든요. 그런데 '구태'를 '구이'라고 읽고, 다시 '구이'가 '고이'와 비슷하므로, 아마 '백제 시조 구태'가 고이왕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백제 왕조가 온조 이후로 계승되다가 고이왕 때 한 번 바뀌었다고 볼 수도 있고, 고이왕 이전에는 아예 백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자가 타당할 것 같은데, 자세한 건 전공자들에게 물어 봐야 할 것 같네요.

 

'왕조 교체'이든, '왕조 신설'이든, 고이왕을 고이왕 이후 백제의 '시조'라고 어떻게든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근초고왕은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계왕, 근초고왕으로 이어지는 왕통에서 처음으로 중흥기를 연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이왕과 근초고왕 사이의 백제에는 대외적으로 큰 일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기록을 최대한 끌어 모아 볼 수는 있습니다.

 

 

秋八月, 幽州刺史毋丘儉樂浪劉茂·朔方大守王遵, 伐髙句麗, 王乗虛, 遣左將真忠, 襲取樂浪邊民. 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고이왕, 246)

 

二十二年, 秋九月, 出師侵新羅. 與羅兵戰於槐谷西, 敗之. 殺其將翊宗. 冬十月, 遣兵攻新羅烽山城, 不克.(고이왕, 255)

 

十三年, 秋八月, 遣兵攻新羅烽山城. 城主直宣率壯士二百人, 出擊敗之.(고이왕, 266)

 

三十九年, 冬十一月, 遣兵侵新羅.(고이왕, 272)

 

四十五年, 冬十月, 出兵攻新羅, 圍槐谷城.(고이왕, 278)

 

五十年, 秋九月, 遣兵侵新羅邊境.(고이왕, 283)

 

髙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寳菓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髙句麗怨. 王慮其侵冦, 修阿旦城·虵城備之.(책계왕, 286)

 

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분서왕, 304)

 

 

모두 백제본기 기록입니다. 그런데 255, 266, 272, 278, 283년의 사건들은 모두 고이왕 재위 중에 일어났고, 모두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입니다. 이 때 백제가 공격했다는 신라의 괴곡, 봉산은 지금의 괴산, 영주 방면입니다.

 

 

괴곡과 봉산

 

 

하지만 이 시기 신라의 왕들은 조분왕, 첨해왕, 미추왕, 유례왕인데, 이 때 신라는 경상북도 중북부로 치고 올라갔다고 했을 뿐, 경상도 북부이자 충청도 방면인 영주, 괴산 방면을 영유할 형편이 된다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사실 경상북도 중북부로 갔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는 사람이 많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 기사는 지금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점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사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246년의 낙랑 공격, 286년의 대방 구원, 304년의 낙랑 공격이 남습니다. 246년 사건은 관구검과 동천왕 사이의 전쟁에 낙랑, 대방이 관구검에 호응해 고구려를 공격한 틈을 타 백제가 낙랑을 습격했다는 말입니다. 언뜻 보면 백제가 고구려 편을 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는 증거도 없거니와, 이 기록이 실제로 백제의 행동이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마한 소속의 다른 나라의 행위가 백제의 행위인 것처럼 기술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이 군사 행동의 주체를 백제가 아니라 마한의 신분고국(臣濆沽國)으로 보는 사람들이 요즘은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86년에는 고구려가 대방을 쳤는데, 마침 책계왕이 대방의 사위였기 때문에 대방을 도왔다는 말입니다. 304년에는 다른 인과가 없이 백제가 낙랑의 서현(西縣)을 습격해 취했다는 말만 있습니다. 313년, 314년에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각각 합병하기 때문에, 286, 304년에 백제, 고구려, 대방, 낙랑 사이에 저런 행위가 있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지는 않아도 납득할 만한 정도는 된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백제가 그 지역에서 독보적인 국가로 성장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즉, 백제의 '전성기'라고 부르기는 힘들다는 말입니다. 괴산, 상주, 영주 등지에서의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쟁 기록은 고이왕 이전에도 많이 나오지만, 그 기록을 상기한 이유로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백제는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또는 광주, 하남 일대에서 시작했습니다. 온조왕 때 마한을 깨고 이미 아산 일대로 남하했다는 말이 있으나, 이 점을 믿는다 하더라도, 이 기록은 아산 일대의 마한 세력을 제압했다는 말일 뿐입니다. 멀리 보면 황해도 동부에서 전라도 남부까지 뻗어 있다는 '마한'이 모두 백제의 휘하에 들어갔다고 볼 수 없습니다. 즉, 우리가 백제가 '전성기'를 맞았다고 하려면, 그 시점은 백제가 마한 일대를 제압하였던 때, 적어도 군사적으로 마한을 복속시킨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가 근초고왕입니다. 그래서 백제의 전성기를 근초고왕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초고왕에 대한 기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좀 엉뚱할 수도 있겠으나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입니다. 이 두 기록은 아주 이질적입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중기에 기술되었고, 그 때까지 전해지는 기록을 김부식이와 친구들이 필사적으로 모아 편찬되었습니다. 일본서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통일 직후인 7세기 말, 8세기 초에 쿠데타로 집권한 천무천황과 친구들이 자기들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위해 저술한 책입니다. 삼국사기가 국내 신라계 기록 및 중국계 기록을 많이 참고했다면, 일본서기는 백강 전투 후 왜로 망명한 백제인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물론 일본서기 중 백제 관련 기록들 말입니다. 왜놈들 스스로의 기록은 참고할 만한 자기네들의 기록이 있었겠죠. 그래서 그 시대에 가깝기는 일본서기가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당대 국제 및 정치 관계가 왜놈들 기준으로 심하게 윤색되어 있고, 삼국사기는 부족한 사료 때문에 기록들의 진위 및 인과가 불분명하다는 단점이 각각 있습니다. 특히 초기로 갈수록 그렇습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일본서기에는 백제와 가야 관련하여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기록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런 기록들은 일본서기가 아니면 또 나오지 않는지라 한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앞의 내용은 일반적인 논지에서 비교한 것이고, 논점을 근초고왕에 한정해서 비교하면 차이점이 또한 명확합니다. 삼국사기 근초고왕본기의 대외 전쟁 기록들은 주로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전쟁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상기한 것처럼 고이왕 때까지만 해도 신라와의 전쟁이 백제본기의 주요 내용이었으나, 근초고왕 시기에는 신라와의 전쟁 기사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근초고왕 즉위년이 346년인데, 상기한 것처럼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에 합병된 것이 313, 314년입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대방 이북 지역, 지금으로 치면 황해도 이북 지역을 모두 점유한 시점에서, 그 이남 지역에서 가장 컸을 백제에게, 국방에 관한 주요 관심사가 고구려가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신라 또는 신라에 속하지 않은 경상도 중북부의 진한계, 변한계 세력들이 백제와 어떤 관계였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겠지만, 적어도 근초고왕 때는 이들이 백제의 1차적인 관심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의 근초고왕은 삼국사기 근초고왕본기와는 아주 색다릅니다. 일본서기에는 주로 충청도 남부 및 전라도 일대의 마한 세력을 공격해 군사적으로 복속시키는 왕으로 나오기 때문이죠. 사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아는 근초고왕의 상에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근초고왕을 학교에서 주로 마한 남부를 정복한 왕으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마한 지역을 정복했다는 말이 일언반구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마한 정복이 나와 있기는 하지만, 백제가 주체가 아니라 왜놈들의 주체가 된 것처럼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왜놈들의 역량, 가야의 역량, 백제의 역량, 그리고 일본서기 외의 기록들을 생각해 볼 때, 남부 마한 일대에 원정이 있었다면, 그 원정의 주체가 왜가 아니라 백제라는 점은 명확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취신'해 근초고왕이 남부 마한을 정복했다고 배우고, 또 그렇게 아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근초고왕 시기의 백제의 북쪽 국경을 고찰해 보려 합니다. 사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둘 다 글 하나에 넣어 보려 했는데,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분리했습니다. 남쪽 국경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54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남방 국경(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중)

*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일본 고대 지도 링크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영토를 분석하려면 크게 삼국사기와 �

philosophistory.tistory.com

 

 

 

근초고왕본기 중 대외 전쟁들에 대한 기록을 모두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二十四年, 秋九月, 髙句麗王斯由帥歩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戸.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근초고왕, 369)

 

二十六年, 髙句麗舉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急擊之. 髙句麗兵敗北. ,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髙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근초고왕, 371)

 

秋七月, 築城於青木嶺.(근초고왕, 373)

 

三十年, 秋七月, 髙句麗來攻北鄙水谷城䧟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舉兵報之, 以年荒不果.(근초고왕, 375)

 

 

생각 보다 되게 적죠? 기록이 상세했음 좋겠지만, 상세하지도 않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늘 이런 점이 아쉽습니다. 369년 기사는 치양에서 고구려왕과 싸워서 백제가 크게 이겼다는 말입니다. 고구려왕으로 사유(斯由)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고국원왕입니다. 기록에서는 고국원왕이 보병, 기병 2만 명을 데리고 치양에 주둔해 민가를 약탈했다고 했습니다.

 

 

 

 

그대로 믿는다면, 치양은 이미 백제령이었는데, 고구려가 치양을 공격해 온 셈이 됩니다. 치양은 지금의 배천으로 봅니다. 배천은 황해도 중남부로, 예성강 서쪽 건너편입니다. 치양이 이미 백제령이었다면, 314년에 고구려가 대방을 합병한 이후, 백제도 예성강 이서로 넘어와 대방을 분할했거나, 314년에서 369년 사이에 이 지역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분쟁이 있어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고구려군을 기습하여 5천여 명을 잡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5천 명이 죽었다면, 치양의 전투 규모는 아주 컸을 것입니다. 태자는 아마 근초고왕의 뒤를 이은 근구수왕일 것 같습니다.

 

 

치양

 

 

그런데 고국원왕과 근초고왕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근초고왕 26년인 371년에 다시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해 온 것입니다. 근초고왕은 패하(浿河)에 복병을 두어 고구려군을 크게 이겼다고 합니다. '浿'가 어느 강을 의미하는지는 이설이 많습니다. 멀리 보면 압록강,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을 가리키는 정황이 다른 기록에 모두 있거든요. '浿'라는 말이 국경 근처의 하천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는 정황이 있거든요. 아마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국경에 있는 하천을 가리키는 말일 텐데, 이 기록에서는 아마 예성강 또는 대동강, 혹은 그 사이의 하천이 아닐까 합니다. 369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치양에서 싸워 백제가 이겼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예성강이 실질 국경이었다 하더라도 369년 이후 국경은 북상했을 것이고, 그 상한선이 대동강일 것이기 때문이죠. 왜 대동강이냐면, 바로 이어지는 기록 때문에 그렇습니다.

 

백제는 같은 해인 371년 겨울에 다시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이번에는 야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초고왕이 평양을 공격해 버렸거든요. 근초고왕과 태자는 3만 명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입했고(侵髙句麗), 평양성을 쳤습니다. 이 전투는 맹렬했던 것 같습니다. 고국원왕이 직접 평양에서 농성하다가 눈 먼 화살(流矢)에 맞아 죽기까지 했습니다. 근초고왕은 결국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철군했지만, 만약 성공했다면 고구려는 대방은 커녕 낙랑 일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평양성과 황해도 일대

 

 

 

사실 고국원왕에게 백제는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위협이었습니다. 평양은 옛날부터 사람이 아주 많이 사는 곳이고, 낙랑군이 400여 년 동안이나 자기 자리를 지킬 정도로 큰 곳이었으나, 그 당시 고구려의 실질적인 위협은 모용선비의 전연이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고국원왕본기의 기록 대부분은 모용씨와의 전쟁 또는 갈등에 대한 것입니다. 고국원왕은 331년에 즉위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꾸준히 모용선비와 주먹질을 하다가 342년에는 전략적 오판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고국원왕의 아빠인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겼으며, 왕의 엄마인 주씨를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그 여파인지 이듬해인 343년에 고국원왕은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해 버렸습니다. 고국원왕 치세에 모용선비와 갈등이 그나마 마무리된 것은 355년으로, 이 때 연왕 모용준이 포로로 잡았던 왕모 주씨를 송환하였습니다.

 

 

十一月, 自將勁兵四萬, 出南道, 以慕容翰·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㝢等, 將兵萬五千, 出北道以來侵. 王遣弟, 帥精兵五萬, 拒北道, 自帥羸兵, 以偹南道. 慕容翰等先至戰, 以大衆繼之, 我兵大敗. 左長史韓壽斬我將阿佛和度加, 諸軍乗勝, 遂入丸都. 王單騎走入斷熊谷. 將軍慕輿埿, 追獲王母周氏及王妃而歸. 㑹王寓等, 戰於北道, 皆敗沒. 由是, 不復窮追, 遣使招王, 王不出. 將還, 韓壽曰, “髙句麗之地, 不可戍守. 今其主亡, 民散潛伏山谷. 大軍旣去, 必復鳩聚, 收其餘燼, 猶足爲患.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䇿之上也.” 從之, 發羙川王, 載其尸, 収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宫室, 毀丸都城而還.(고국원왕, 342)

 

秋七月, 移居平壤東黄城. 城在今西京木覔山中.(고국원왕, 343)

 

冬十二月, 王遣使詣, 納質修貢, 以請其母. 許之, 遣殿中將軍刀龕, 送王母周氏歸國, 以王爲征東大將軍·營州刺史, 封樂浪公, 王如故.(고국원왕, 355)

 

 

여기서 평양의 동황성이 어디인지는 사실 이견이 좀 있습니다. 동황성으로 천도한 것 자체는 아마 모용선비에 진절머리가 나서인 것이 정황상 분명한데, 이 동황성이 지금의 평양이냐, 다른 곳이냐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김부식이와 친구들은 동황성이 서경 동쪽 목멱산에 있다고 했기 때문에, 이를 따르면 동황성도 지금의 평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양은 집안, 강계 등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명확하지는 않죠. 낙랑 합병 이전인 동천왕 때도 말년에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평양'이라는 말이 고유 명사가 아니라 신채호의 주장처럼 평야, 햇볓이 잘 드는 곳처럼 일반 명사로 당시에는 쓰였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동천왕, 247)

 

 

만약 고국원왕 때의 평양 동황성이 지금의 평양이라면, 고구려가 모용선비에게 시달리다 일시적으로 남천했고, 뒤이어 백제를 공격했는데, 마침 백제도 북진하던 중이라 치양에서 크게 깨졌고, 뒤이어 '수도'였던 평양성까지 공격 받는 와중에 고국원왕이 전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수가 없기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습니다.

 

 

三十九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續.(고국원왕, 369)

 

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고국원왕, 371)

 

 

보시는 것처럼 고국원왕본기에도 치양 전투와 평양성 전투의 전황이 나와 있으나, 고구려본기에는 고국원왕의 전사 날짜가 371년 10월 23일이라고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이상의 차이는 없습니다.

 

 

 

평양성 전투에서 2년 뒤인 373년에는 근초고왕이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았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375년에는 고구려가 수곡성을 공격했는데, 백제가 결국 패했습니다. 청목령은 지금의 개성이나 금천 방면으로 봅니다. 수곡성은 신계입니다. 특히 수곡성 공격 기사에서는 수곡성을 백제의 '北鄙'라고 했는데, 이것은 북쪽 변경이라는 말입니다. 즉, 375년 당시 백제의 북쪽 국경은 수곡성으로, 그 이북 지역은 고구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목령(청목산)과 수곡성

 

 

청목령에 축성했다는 것은, 백제의 황해도 일대 거점들이 예성강 하류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 몰려 있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북쪽 국경이 수곡성, 즉 신계라는 것은 근초고왕이 371년에 평양을 공겨갈 정도는 되었으나, 대동강 이남 지역을 전부 영역으로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 '수도 있다'고 하냐면, 이 외엔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백제가 대동강까지 고구려를 밀어 붙이지는 못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위기를 크게 맞았으나, 소수림왕 때는 수곡성을 탈환하는 등, 국세를 점차 회복하는 듯 보입니다. 예성강을 중심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주먹질과 발길질을 주고 받는 구도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세력의 균형을 깨 버릴 때까지 대체로 이어집니다.

 

 

 

삼국사기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313년과 314년에 낙랑과 대방이 연이어 고구려에 합병되면서 백제 혹은 북부 마한의 소국들과 고구려는 직접 접경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는 백제 비류왕 때이지만, 비류왕 때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벌였다거나, 대방과 낙랑에 개입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책계왕과 분서왕 때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후 369년의 치양 전투에 이르기까지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충돌은 일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50여 년 동안 낙랑, 대방을 통치할 동안, 백제가 이 지역을 도외시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369년에 고구려와 백제는 지금의 배천인 치양에서 맞붙었습니다. 하지만 고국원왕본기, 근초고왕본기 모두에서 고구려가 백제의 영토인 치양을 친 것으로 기술되어 있어, 369년에는 이미 배천을 비롯해 예성강 이서 지역으로 백제가 넘어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혹은 그 때 막 예성강 이서로 백제가 진격해 들어간 것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치양 전투에서 백제가 크게 이겼기 때문에 고구려는 북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371년에는 고구려가 다시 백제를 공격하려 했으나, '패하'에서 백제가 고구려를 크게 이겼으며, 뒤이어 그 해 겨울에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공격했습니다. 함락시키지는 못했으나, 고국원왕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근초고왕은 373년에 청목령에 축성해 고구려를 방어하려 했습니다. 375년에는 예성강 중상류에 있는 수곡성을 고구려가 백제에게 탈환함으로써, 양측의 국경은 예성강을 끼고 대체로 형성되었습니다.

 

즉, 백제는 일시적으로 대동강으로 진격해 고국원왕을 죽이고 평양을 위협했으나, 373년과 375년의 정세를 볼 때 대동강 이남 지역의 옛 낙랑, 대방 지역을 영역화하는 데는 실패했고, 예성강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대방 중남부 지역의 통치권을 두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근초고왕 때의 북방 국경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근초고왕 시대의 백제의 북방 국경을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다름 아닌 칠지도입니다.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왜에게 '하사'한 칼로 유명합니다. 사실 왜놈들은 우리가 왜놈에게 '상납'한 것인지, '하사'한 것인지가 불명확하거나, 혹은 우리가 상납한 것이라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려 하지만, 칠지도의 명문이나 당시의 정황을 볼 때 백제가 하사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명문 자체는 이 글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52년에 보면, 백제가 칠지도를 '상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그 배경이 재밌습니다.

 

 

五十二年 秋九月丁卯朔丙子, 久氐等從千熊長彥詣之. 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 及種種重寶. 仍啓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飮是水, 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 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雖死何恨. 自是後, 每年相續朝貢焉.(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 372)

 

 

원래 신공황후 52년은 252년이지만, 120년을 더해 생각하면 372년으로 근초고왕의 시대와 맞습니다. 이 기사는 백제가 구저 등을 보내 칠지도와 칠자경 등 보물을 바쳤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곡나철산(谷那鐵山)이라는 곳에서 철을 얻어 왜에 '바치려고' 칼과 거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뒤의 말은 볼 필요가 없고, 다만 곡나철산이 어디인지가 중요합니다. 곡나는 황해도의 곡산으로 보기도 하고, 전라도의 곡성으로 보기도 합니다. 충청도 어디로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372년은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했던 371년의 바로 다음 해입니다. 고대 사료이니, 시간상의 차이가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이 시기는 백제가 대동강까지는 알 수 없지만 대방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시점이었습니다. 따라서 곡나철산을 황해도의 곡산으로 보는 것도 아주 무리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곡나철산

 

 

수곡성을 고구려에 빼앗긴 것이 375년이었는데, 평양 전투에서 375년 이전까지는 대방 상당 부분을 백제가 점유하고 있지 않았느냐 추론할 수 있는 정황 증거로써 신공황후본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곡산은 신계, 즉 수곡성 보다 더 북동쪽이에요. 그런데 곡나철산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372년에 백제가 어느 지방을 확보하고 있었는지의 주장이 달라지므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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