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순자 - 3 - 불구 - 10 - 통사, 공사, 직사, 각사가 되기를 지향해야 한다(재번역 예정)

2021. 12. 3. 14:04순자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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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보기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원래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숫자로 바꾸고 하단으로 내려 두었습니다. 원래 글은 물론 원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주석을 하단으로 내리니까 정작 중요한 주석과 중요하지 않은 주석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어 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에다가 '*' 같은 것으로 표시해 둘까, 혹은 다르게 어떻게든 표시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느니 원안을 보존하고 새로 글을 파 두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기가 편한 것이 우선이냐, 주석이 우선이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 편한 방식에 맞게 글을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주석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습니다.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李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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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1년 10월 5일 10시 32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240

 

순자 - 3 - 불구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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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본문과 함께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236

 

순자 - 3 - 불구 - 10 - 통사, 공사, 직사, 각사가 되기를 지향해야 한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philosophistory.tistory.com

 

 


 

 

有通士者,有公士者,有直士者,有慤士者,有小人者。上則能尊君,下則能愛民,物至而應,事起而辨,若是則可謂通士矣。不下比以闇上,不上同以疾下,分爭於中,不以私害之,若是,則可謂公士矣。身之所長,上雖不知,不以悖君,身之所短,上雖不知,不以取賞,長短不飾,以情自竭,若是,則可謂直士矣。庸言必信之,庸行必之,畏法流俗而不敢以其所獨甚,若是,則可謂慤士矣。言無常信,行無常貞,唯利所在,無所不傾,若是,則可謂小人矣。

 

[선비의 종류에는] 통사[각주:1]도 있고[각주:2], 공사[각주:3]도 있으며, 직사[각주:4]도 있고, 각사[각주:5]도 있고, 소인[각주:6]도 있다.

[어떤 선비가] 위로는 군주를 공경할 줄 알고[각주:7], 아래로는 백성을 아낄 줄 알며[각주:8], 어떤 사람과 마주하더라도 [잘] 대응하고[각주:9],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잘] 바로잡는다고[각주:10] 하자. [선비의 모습이] 이러하다면[각주:11] [그 선비를] 통사[각주:12]라고 부를 수 있겠다.

[어떤 선비가] 신하들끼리 결탁해서 군왕[의 판단력]을 가리지 않고[각주:13], 군주의 비위를 맞춰서는 [다른] 신하들을 비방하지 않으며[각주:14], [조정 안의] 정쟁에 대해서도 중립을 견지하면서[각주:15] 사사로운 마음으로 다른 신하들을 해치지 않는다고[각주:16] 하자. [선비의 모습이] 이러하다면[각주:17] [그 선비를] 공사[각주:18]라고 부를 수 있겠다.

[어떤 선비가] 비록 군주가 자기 장점을 알아 주지 않더라도[각주:19] 군주를 원망하지 않고[각주:20], 설사 군주가 자기 단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각주:21] [부당하게] 상을 받으려 하지 않으며[각주:22], [자신이] 잘하거나 못하는 것들을 꾸미지 않고 [잘하고 못하는] 실제를 스스로 이야기한다고[각주:23] 하자. [선비의 모습이] 이러하다면[각주:24] [그 선비를] 직사[각주:25]라고 부를 수 있겠다.

[어떤 선비가] 예사롭게 하는 말이라도 반드시 신실하게 하고[각주:26], 평범하게 하는 행위라도 반드시 정성을 기울이며[각주:27], 유속을 본받으려 하지도 않고[각주:28], 결코 [자기] 혼자만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각주:29] 하자. [선비의 모습이] 이러하다면[각주:30] [그 선비를] 각사[각주:31]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번에는 어떤 놈이 있는데, 이 놈은] 무슨 말을 해도 신실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고[각주:32], 무슨 짓을 해도 정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데[각주:33], 다만[각주:34] 이익이 있는 일에는[각주:35] 매달리지 않는 경우가 없다.[각주:36] [그 놈의 행태가] 이러하다면[각주:37] [이런 놈을] 소인[각주:38]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1. 通士 [본문으로]
  2. [본문으로]
  3. 公士 [본문으로]
  4. 直士 [본문으로]
  5. 慤士 [본문으로]
  6. 小人 [본문으로]
  7. 上則能尊君, 尊은 敬 [본문으로]
  8. 下則能愛民 [본문으로]
  9. 物至而應, 至는 '이르다', '닥쳐 오다'는 말이다. 物至而應은 事起而辨과 대구를 이룬다. 따라서 物 역시 事와 대응된다고 보아야 한다. 事는 '사건'을 뜻한다. 따라서 物을 '물체', '물건', '사물'이라고 하면 '사건'과 대구를 이룬다고 할 수도 없고, 의미도 어색하다. '어떤 물체가 닥쳐 오든 잘 대응한다'고 하면 이상하기 때문이다. 나는 物을 '환경',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이라고 보았다. [본문으로]
  10. 事起而辨, 事는 '사건'이다. 王念孫은 辨을 治, '바로잡다', '다스리다'는 뜻이라고 했다. 辨은 원래 '분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辨은 辯과 통하고, 辯에는 治의 뜻이 있다. 따라서 辨도 治로 볼 수 있다. 治로 보면 事起而辨도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러면 순자는 辨과 辯을 治의 의미로 사용했을까. 「유효」에 分不亂於上/能不窮於下/治辯之極也라고 하여 治辯이라는 말이 사용되었고, 「영욕」에 脩正治辨矣, 「왕패」에 加有治辨彊固之道焉, 莫不治辨/是百王之所同也, 「의병」에 禮者/治辨之極也, 「정론」에 故上者/下之本也/上宣明/則下治辨矣, 治辨則易一/愿愨則易使/易直則易知, 「예론」에 君者/治辨之主也라고 하여 治辨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으며, 「성상」에 辨治上下/貴賤有等明君臣이라고 하여 辨治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순자가 辨, 辯, 治를 묶어 두 글자로 단어를 만든 것은 이 글자들을 같은 의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王念孫을 따른다. [본문으로]
  11. 若是, 是는 上則能尊君/下則能愛民//物至而應/事起而辨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12. 通士, 순자는 通을 주로 窮의 반의어로 사용했다. 窮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모습'을 뜻하지만, '꽉 막혀 있는 모습', '일을 못하는 모습'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通士는 上則能尊君 등이 뜻하는 바처럼, '선비로서의 본분을 막힘 없이 해내는 선비', '탁월한 선비'라고 보면 타당하겠다. [본문으로]
  13. 不下比以闇上, 下는 上의 반의어다. 下는 '아랫사람', '신하'를 가리키고, 上은 '윗사람', '군주', '왕'을 가리킨다. 比는 '친하게 지내다', '결탁하다', '파당을 이루다'는 뜻이다. 《논어》 「위정」에서 君子周而不比, '군자는 두루 친하게 지내지만 파당을 이루지는 않는다'라고 한 뜻과 같다. 그러므로 下比는 '신하들끼리 결탁하는 짓'을 뜻한다. 闇은 '어둡게 하다', '막다', '가리다'는 말이다. 따라서 闇上은 '군주의 판단력을 흐리는 짓'이다. 楊倞은 闇上을 掩上之明, '군주의 통찰력을 가리는 짓'이라고 풀이했다. [본문으로]
  14. 不上同以疾下, 同은 '뜻을 같게 맞추다', '어울리다', '영합하다', '결탁하다'는 말이다. 王先謙은 上同을 苟合於上, '군주와 구차하게 영합하는 짓'이라고 보았다. 楊倞은 疾을 嫉, '미워하다'로 보았는데, '비방하다'라고 해석하면 더 타당하겠다. [본문으로]
  15. 分爭於中, 中은 '가운데', '편파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分爭은 '싸움'인데, 이 부분에서는 군주와 신하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으므로 '정쟁'이라고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16. 不以私害之, 之는 '分爭의 상대방', '다른 신하'를 뜻한다. 본문에는 지칭 대상이 드러나 있지 않다. [본문으로]
  17. 若是, 是는 不下比以闇上/不上同以疾下//分爭於中/不以私害之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18. 公士, '공정한 선비' [본문으로]
  19. 身之所長/上雖不知, 身은 '자기 자신'이다.長은 '잘하다', '능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所長은 '장점'이다. [본문으로]
  20. 不以悖君, 悖에 대해 이견이 있다. 郝懿行은 倍, '배신하다'로 보았고, 王引之는 怨懟, '원망하다'라고 했다. 王引之는 《廣雅》, 《方言》을 인용해서 侼, 怨, 懟이 모두 '원망하다'는 의미로 悖와 통한다고 보았다. 또한 王引之는 「중니」에서 君雖不知/無怨疾之心, '비록 군주가 알아 주지 않더라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라고 한 점을 들어, 이 부분의 悖와 같다고 보았다. 한편 내가 찾아 보니, 《廣韻》에서는 悖를 逆이라고 하였고, 《方言》에서는 悖를 愮, '두려워하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集韻》에서는 悖를 𢟥로도 쓴다고 하였는데, '거스르다', '껄끄럽다'는 말이다. 즉, 悖는 郝懿行처럼 '배신하다', '반역하다'는 의미로 볼 것까지는 없으나, '마음이 불편한 상태', '거역하는 마음이 생긴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넓게 보면 '원망하다', '미워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그러면 王引之가 예로 들었던 「중니」의 君雖不知/無怨疾之心에도 잘 들어 맞고, 본문의 뜻에도 합치된다. [본문으로]
  21. 身之所短/上雖不知, 短은 '못하다' [본문으로]
  22. 不以取賞 [본문으로]
  23. 長短不飾/以情自竭, 飾은 '꾸미다'는 말이다. 郝懿行과 王念孫은 情을 實, '실제'라고 보았고, 竭은 舉, '들다', '거론하다'로 해석했다. 《설문해자》에서는竭을 負舉也, '등에 지고 들어 올리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아》의 「석고」에서는 歇과 竭이 같다고 했으며, 다시 《설문해자》에서는 歇을 高舉也,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 고대에는 歇과 竭이 舉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情自竭은 '실제를 스스로 거론한다', '실제를 스스로 밝힌다'는 뜻이 된다. [본문으로]
  24. 若是, 是는 身之所長부터 以情自竭까지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25. 直士, '올곧은 선비', '강직한 선비' [본문으로]
  26. 庸言必信之, 信은 '성실하다', '신실하다' 庸은 '평범하다', '범상하다', '일상적이다', '예사롭다'는 뜻이다. 楊倞은 庸을 常이라고 했다. 따라서 庸言은 '평범하게 하는 말', '일상적으로 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之는 庸言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7. 庸行必愼之, 之는 庸行을 가리킨다. 愼은 앞의 以愼其獨者也에서처럼 誠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愼은 信과 대구를 이루는데, 信이 '성실하다'였으므로, 愼이 '삼가다'는 뜻이면 어색하다. 誠으로 보고 '정성을 기울인다'라고 해석하면 타당하다. [본문으로]
  28. 畏法流俗, 流俗은 '세속적인 풍속', 法은 效, '본받다', 畏는 '두려워하다', '꺼리다', 즉 畏法流俗은 '流俗을 본받기를 꺼린다', '流俗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29. 不敢以其所獨甚, 不敢은 '감히 ~하려 하지 않는다', '결코 ~하려 하지 않는다', 獨은 '혼자', '자기 혼자', 所는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其는 所獨甚을 지칭하는 듯 보인다. 甚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王念孫은 甚을 是, '옳다'라고 하였다. 甚과 是는 隸書로 쓸 때 글자 모양이 아주 비슷하다. 甚은 𤯅으로 쓰고, 是는 昰로 쓰기 때문이다. 오기라는 정황도 있다. 「부」에는 嫫母力父/是之喜라는 말이 있는데, 《전국책》 「초책」에는 이 글이 嫫母求之/又甚喜之라고 되어 있다. 즉, 是之喜가 甚喜之로, 즉 是가 甚으로 잘못 적혀 있다. 이 문구는 서로 같은 글 같지 않은데 어떻게 등치해서 비교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초나라의 춘신군이 순자를 한 번 거절했다가, 마음이 바뀌어 다시 초청했을 때, 순자가 춘신군의 초청을 거절하며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 말이다. 「부」에도 있고, 《전국책》 「초책」에도 인용되어 있다. 같은 글이므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王念孫의 의견 대로 甚을 是로 보면 의미가 잘 통하므로, 나도 王念孫을 따른다. 이를 따라 직역하면 不敢以其所獨甚은 '자기 혼자 맞다는 짓을 감히 저지르지 않는다'이고, 다듬으면 '결코 자기 혼자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본문으로]
  30. 若是, 是는 庸言必信之부터 不敢以其所獨甚까지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31. 慤士, 慤은 '정성스럽다', '성실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慤士는 '정성을 기울이는 선비', '성실한 선비', '신실한 선비'라는 말이다. [본문으로]
  32. 言無常信, 信은 '신실하다', '성실하다', 常은 恒, '언제나' [본문으로]
  33. 行無常貞, 貞은 '일관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庸行必愼之와 대조되는 뜻으로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하겠다. 즉, 貞은 愼, 誠, '성실하다'는 말이다. 貞이 誠으로 사용된 예가 있을까. 《역》의 「乾」을 보면, 貞固足以幹事, '진실한 마음이야말로 만사를 이루는 근간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貞이 誠, '정성스러운 마음', '진실한 마음'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34. [본문으로]
  35. 利所在 [본문으로]
  36. 無所不傾, 傾에 대해 이견이 있다. 楊倞은 傾意, '마음을 기울인다'라고 보았다. 俞樾은 盡으로 보았다. 《문선》에 실려 있는 孫楚의 「征西官屬送于陟陽候作」에 傾城遠追送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李善이 傾을 盡으로 설명한 데에 근거한 주장이다. 《후한서》 「종실사왕삼후열전」에 傾身破産, '자신을 傾하고,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라는 말이 있는데, 이 때 傾은 '온 힘을 다해 성의를 기울이다', '성의를 다하다'는 뜻이다. 이 경우도 傾은 盡과 같다. 그러나 盡으로 보나, 傾을 따르나, '재물에 눈이 돌아 간다'는 의미는 모두 같다. 단순히 '마음을 기울인다', '신경 쓴다'로 본다면 楊倞처럼 보면 되고, '진력한다', '전력한다'로 보려면 俞樾처럼 보면 된다. 나는 俞樾을 따른다. [본문으로]
  37. 若是, 是는 言無常信부터 無所不傾까지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38. 小人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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