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삼품과와 유학생(삼국사기 원성왕본기 중)

2020. 4. 28. 11:19삼국사기 이야기/신라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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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원성왕본기에 있는 독서삼품과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四年, ,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愽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前祇以弓箭選人, 至是攺之.

 

 

4(788) 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讀書三品)을 정하여 출사(出仕)케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나 혹은 예기(禮記), 문선(文選)을 읽고 그 뜻에 능통하며 논어(論語)효경(孝經)에 모두 밝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곡례(曲禮)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으로, 곡례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삼았다. 혹 오경(五經), 삼사(三史),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을 널리 통달한 자는 등급을 뛰어넘어 발탁 등용하였다. 예전에는 오직 궁술(弓術)로써만 사람을 선발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 이를 개정하였다.

 

 

원문에는 사실 독서삼품과라는 말은 없고, '독서삼품이출신'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게 답니다. 다른 말은 없습니다. 독서는 책을 읽는다는 거고, 삼품은 상품, 중품, 하품으로 사람의 등급을 나눴다는 겁니다. 좀 무식해 보이지만, 수능등급제하고 별반 다르지도 않습니다.

 

언뜻 보기엔 과거 제도 같기도 한데, 우리나라 최초의 과거를 고려 초로 보통 보니까 아마 지엄하신 역사학자들이 독서삼품과를 최초의 과거로 보지 않는 이유가 있겠죠. 아마 기록이 부족해서이지 싶습니다.

 

 

 

춘추좌씨전은 춘추에 대한 좌구명의 주석입니다. 예기, 논어, 효경, 곡례는 모두 유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글들이고요. 문선은 선진 시대가 아니라 나중에 누가 시를 모아 놓은 거라는데 전 이과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이 외에도 오경, 삼사(사기, 한서, 후한서?), 제자백가의 글이 포함된 것을 볼 때, 기본 틀은 유학으로 잡고 기타 정치철학들을 열심히 배워라는 취지에서 만든 것 같습니다. 과목? 자체는 관료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잘 잡아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의뭉스러운 점이 두 개가 있습니다.

 

1. 독서삼품과가 생기기 전에는 궁술로 사람을 뽑았다고 했는데, 이 궁술이 정말 활 쏘는 걸 의미하는 걸까요? 다른 기록도 없고, 김부식이와 친구들이 주석을 달아 놓은 것도 없어서 정말 어땠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사람을 뽑았다는 표현도 이상합니다. 독서삼품과가 과거 같은 거라서 일반적인 백성들에게 개방된 것이었는지, 국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거였는지, 아니면 내시로 만들려고 거세하기 전에 내시 말고 다른 데 쓸모가 있는 놈이지 확인해 보려고 시행한 것인지를 우리가 도무지 알 수가 없거든요.

 

2. 그런 맥락에서 어떤 사람들은 독서삼품과가 국학에 대한 시험이라고 봅니다. 좀 비약하는 놈들은 국학 졸업시험이 바로 독서삼품과라고 주장하기도 하죠. 아마도 당시에 골품으로만 등용하다 보니 폐단이 생기고, 이 때문에 국학의 힘을 키워 주려고 저런 시험을 만들었다고요.

 

하지만 삼국사기의 위 기록에는 국학에 관한 어떤 연관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물론 신라인들이 근친상간만 일삼던 야만좇들이라서, 나라에 있는 교육 기관이 국학밖에 없으니 독서삼품과도 국학에 연관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냐고 주장할 수야 있겠지만, 그럴 거면 대륙백제설이나 은하삼국설도 타당하게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찾아 보니 삼국사기 직관 상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教授之法, 以周易·尚書·毛詩·禮記·春秋左氏傳·文選, 分而爲之業. 愽士若助教一人, 或以禮記·周易·論語·孝經, 或以春秋左傳·毛詩·論語·孝經, 或以尚書·論語·孝經·文選, 教授之. 諸生, 讀書以三品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基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能兼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或差筭學愽士若助教一人, 以綴經·三開·九章·六章, 教授之.

 

 

국학 운영에 관한 기록입니다.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 곡례, 효경, 철경, 삼개, 구장, 육장 같은 책들을 가르쳤다는 말이 있네요. 본기의 독서삼품과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대체로 일치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본문 중에 독서이삼품출신讀書以三品出身이라는 말이 있다는 거겠네요. 이게 원성왕본기에 나오는 표현과 완전히 같기 때문에 원성왕본기의 독서이삼품출신에 관한 기록이 결국 국학에 관한 부연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타칭 '독서삼품과'과는 국학에서 학생을 뽑는 절차라고 볼 수 있겠네요.

 

물론 골품제 때문에 국학에 힘을 싣느니 하는 말은 저는 못 믿겠습니다.

 

 

 

이번 글의 교훈도 본기 하나만 읽지 말고 기록을 복합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거겠네요.ㅡㅡㅡ

 

 

 

 

그런데 이로부터 조금 뒤인 7899월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九月, 以子玉爲楊根縣小守. 執事史毛肖駮言,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 侍中議云, “雖不以文籍出身, 曽入大唐爲學生, 不亦可用耶.” 王從之.

 

 

자옥이라는 놈을 양근현 구청장으로 삼으려 했는데, 집사는 문적 출신이 아니라서 반대했고, 시중은 탁발부에서 유학한 놈이니 괜찮지 않겠냐고 해서 구청장으로 삼았다는 말이죠.

 

여기서 문적 출신이라는 말도 사실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국학 학생이라고 볼 때, 이 논쟁은 국학 출신인 놈들만 뽑아야 하느냐, 다른 놈도 뽑아도 되느냐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자옥이가 구청장이 됐다고 하니, 이미 원성왕대에 이르면 국학 출신이 아닌, 검은머리 탁발야만좇들이 벼슬아치로 임용되는 사례가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다만 원성왕본기의 자옥에 대한 논쟁이 마치 처음 이런 일이 있었다는 듯 진행되는 걸 볼 때, 자옥이 당시에는 특이 사례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자옥 이후 소성왕 때인 800년에는 양열이라는 놈이 탁발부에서 우찬선대부로 제수돼 왔기 때문에 두힐현의 구청장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八月, 授前入唐宿衛學生梁恱豆肹小守. 初德宗幸奉天, 恱從難有功, 帝授右賛善大夫, 還之. 故王擢用之.

 

 

흥덕왕 때 장보고 역시 서주중군소장의 벼슬을 달고 와서 신라에서 임용된다는 점을 볼 때, 이 이후로 이런 사례는 점점 많아지겠죠. 이런 놈들이 결국 의료보험비를 떼 먹어서 신라가 망하고 만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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